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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논개 이야기 ❷
이애미 붉은 꽃타래
박일만(시인)
의기사당 / 이지연
봄 산초 가을 계수나무는 강가에 허허롭고
한밤중 바람에 환패소리 쓸쓸하다
이후로 논개 영혼 의지할 곳 있도록
붉은 기둥 한 칸 집을 성 가운데 세웠네
義妓祠(의기사)
春椒秋桂野汀空(춘초추계야정공) 環佩凄然半夜風(환패처연반야풍)
從此精靈依有所(종차정령의유소) 一間朱棟起城中(일간주동기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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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연(李止淵 : 1777~1841), 본관은 전주(全州), 경상감사(慶尙監司),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 여(璵)의 후손, 저서 희곡집 등.
이 시는 이지연이 경상감사(慶尙監司)로 근무하던 시절 논개사당인 의기사(義妓祠)를 증축․보수하고, 이와 더불어 논개의 충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는 비교적 사회가 안정되었던 시절로서 일부 선비들은 충렬(忠烈)의 정신으로 순국한 조상들의 유적지를 보수하는 등 민족애를 발현시키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추세였다.
이 시는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는 남강가의 쓸쓸한 정경묘사를 통해 시대의 아픔을 극복하고자 지어졌다.
극복하는 방법으로, 비록 한 칸의 집에 불과하지만 논개의 사당을 증축하거나 보수하고, 자신이 아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논개의 영혼을 위로하려는 것이다.
봄 산초 가을 계수나무라는 자연 사물을 계절 감각을 담아 대비시켜서 계절의 빠른 흐름을 강조하였으며, 강가에서 한밤중까지 깊은 생각에 잠기는 작가의 심중을 나타내었다.
그러면서 전쟁이 남긴 상처를 생각하고 전투의 흔적을 바라보며 참혹했을 임진란 당시의 분위기를 떠올리며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하고 있다.
짧지만 매끄러운 문장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심상을 확장해 나갔으며,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이 작자에게 시적 창작능력이 충분히 있음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자연적 사물과 시간적 공간사이에서 떠오르는 작가의 시상(詩想)을 한 장의 그림으로 잘 형상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제2행의 환패는 조선 시대에 왕족의 법복이나 문무백관의 조복(朝服)과 제복의 좌우에 늘이어 차던 옥이다. 흰 옥을 이어서 무릎 밑까지 내려가도록 하였다. 이지연은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 여(璵)의 후손이다.
참고로, 조선후기 안정되었던 사회가 지나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일본제국으로 인해 국치를 겪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의식 있는 많은 인사들은 울분을 참지 못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조상들의 유적지를 찾아 시국의 한을 삭이기도 하였다. 그 유적지 중 하나가 진주 남강가에 위치한 촉석루와 논개 사당이다.
논개암(論介巖)에서 / 박치복
(서시)
남강 물은 만 길이나 깊고
강 바위는 천 길이나 높구나
그 위에 백 척의 높은 누각이 있어
장사들의 충혼이 머리카락 솟게 하네
江水萬仞深(강수만인심) 江巖千丈直(강암천장직)
上有百尺高樓(상유백척고루) 壯士忠魂髮衝冠(장사충혼발충관)
(둘째 시)
살아서 욕됨이 미치지 않고자 하더니
미천한 몸이 진실로 욕을 보게 되었네
왜장 하나 죽인 일들이라 말하지만
현인들은 오직 왜적 하나 만이라고 하지 않네
작은 여인이 왜장 하나 죽인 것이
왜적들의 자만스런 웃음 그치게 했네
生不欲被汚(생불욕피오) 鱗介誠爲辱(린개성위욕)
等是死殲一倭酋(등시사섬일왜추) 尙賢已莫道壹倭(상현이막도일왜)
小人殲壹倭(소인섬일왜) 倭且休堪笑(왜차휴감소)
(셋째 시)
제1부
여인들이 노래하며 걸어 다니니
오고가는 발길에 강둑 풀이 노랗구나
구름은 둥실 떠 오동나무 꽃을 어루고
요염한 여인이 창문으로 고개 내미네
집집마다 천자의 아들 돈 쓰듯
노래와 웃음, 다투어 봄을 간지럽히네
첩(논개)은 태어나서부터 어려움에 떨어져
몸은 창루 가에 맡겨졌네
꽃다운 나이 무리들과 같지 아니하고
다만 우뚝한 자태 가련하구나
천성은 본디 곧고 미뻐서
내치고 싶어도 결코 버릴 수 없다네
步出閨閤曲(보출규합곡) 井井黃蘖塢(정정황얼오)
英英剌桐花(영영랄동화) 冶豔當囱戶(야염당창호)
千家錢樹子(천가전수자) 歌笑爭春姸(가소쟁춘연)
妾生墮髬耏(첩생타비내) 寄身娼樓邊(기신창루변)
芳年屬破瓜(방년속파과) 多姿最可憐(다자최가련)
天性苦貞諒(천성고정량) 欲罷不能忘(욕파불능망)
제2부
나라의 운명이 임진․계사년의 간난 속에서
천한 오랑캐(왜구)에게 오래토록 짓밟혔네
관리들 사로잡혀 욕을 당하고
종묘와 도성도 송두리째 타버렸네
날 저물어 기둥에 의지하며 생각에 잠겼는데
긴 칼 끝에 초승달이 모여드네
고립된 성의 담장이 무너지니
견고한 진주성도 지킬 수가 없구나
슬프다! 육만의 성민들이여
관민이 한 날에 죽음을 맞았네
天步戹辰巳(천보액진사) 醜虜長蹂躪(추로장유린)
衣冠辱俘據(의관욕부거) 廟都隨灰燼(묘도수회신)
日夕倚柱念(일석의주념) 蛾眉攢脩劍(아미찬수검)
孤城乏儲胥(고성핍저서) 坐失金湯險(좌실금탕험)
哀哀六萬人(애애육만인) 同日爲猿鶴(동일위원학)
제3부
탐욕한 왜장은 걸상에 의탁한 채
술에 흠뻑 취해 방자히 지껄이며 희롱한다
미련스레 껄껄 웃으며 짐승처럼 나대더니
끌어내어 매질하며 제멋대로 음탕하다
단칼에 죽는 것이 어렵지는 않으나
욕되게 목숨을 마친다면 무슨 도움이 되리오
꾀를 내어 곧 일어나서
기쁘게 그를 따라 춤을 추네
높은 누각은 시 읊기에 좋지 못하나
강가의 바위는 크고 넓어 믿을 만 하단다
손을 끌고 가면서 원하여 말하기를
어두워질 때까지 노닐자 하더라
어리석은 왜놈은 이미 정신이 녹아서
그 말 따라 응낙을 하였네
위험한 바위는 절벽을 깎아 만들었나
위에는 겨우 소반 하나 놓을 만한데
아래로는 천 길 못이 있네
흐르는 물결 힐끗 보니 맑고 잔잔한데
섬뜩한 무서운 생각에 와락 끌어안긴다
몸을 가까이 점점 앞으로 나아가서는
그 허리를 얽어 끌어안는다
힘을 써 갑자기 발을 날리니
만 길 떨어져 풍덩 소리 났네
頑酋據胡牀(완추거호상) 縱酒恣讙謔(종주자환학)
騃渠牡牡性(애거모모성) 挑撻肆淫黷(도달사음독)
一劍諒非難(일검량비난) 經瀆竟何益(경독경하익)
作計乃爾立(작계내이립) 忻然隨俯仰(흔연수부앙)
高樓正不韻(고루정부운) 江石洵訏廣(강석순우광)
願言攜手去(원언휴수거) 徜徉窮曛旭(상양궁훈욱)
癡奴魂已銷(치노혼이소) 隨語聲應諾(수어성응낙)
危巖陡戌削(위암두술삭) 上可容盤礴(상가용반박)
下有千仞潭(하유천인담) 流睇澹淸漣(류제담청련)
强忍嚴閃意(강인엄섬의) 近身稍向前(근신초향전)
緊緊抱其腰(긴긴포기요) 用力儵擧趾(용력숙거지)
渢渢萬丈下(풍풍만장하) --------------------
제4부
나와 너 함께 죽었으니
추한 뼈는 상어와 악어의 먹이가 되고
아름다운 넋은 용궁으로 모셨네
용궁은 바다에 통한다 하니
멀리 대동강(패강)과도 통하겠네
대동강에도 의로운 기생이 있어
왜놈의 배를 칼로 찔렀다네
빛나는 강물 얕은 듯 깊은
대동강은 서북으로 흐르네
당대에 빼어난 아름다운 두 여인이 있어
어여쁜 절개! 그 이름 영원하리라
吾與爾共死(오여이공사) --------------------
醜骨餌鮫鰐(추골이교악) 香魂侍龍宮(향혼시용궁)
龍宮達于海(용궁달우해) 遙與浿江通(요여패강통)
浿上有義妓(패상유의기) 剚刃奴腹中(사인노복중)
菁江淺如泓(청강천여홍) 浿水西北流(패수서북류)
絶代兩佳人(절대양가인) 姱節名不休(과절명불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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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복(朴致馥 : 1824~1894), 경남 함안 生, 조선 후기 실용주의 학자, 저서 만성집 등.
이 시는 장시로서 서사적인 요소가 담긴 작품이다. 서시(序詩)를 비롯해서 둘째 시, 셋째 시로 나뉘는데, 셋째 시는 다시 제1부에서 제4부로 구성되어 있다.
촉석루에서 죽은 충렬들의 영혼을 위로함과 더불어 논개의 절의를 칭송하고, 논개의 살아온 내력, 그리고 그녀의 품성, 진주성 전투의 참혹함과 논개의 결행, 왜장의 죽음, 논개 정신의 무한함 등을 전반적으로 읊은 시로서 작자의 시적 창작능력이 대단했음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시인은 논개의 정신에 크게 감동하여 각 시 편의 행간(行間)마다에 눈앞에 펼쳐지는 역사처럼 논개의 실행과정을 그림 그리듯 채색해 놓았다.
그 첫 번째인 서시(序詩)는, 본 시의 전체적인 서경인 진주 남강과 그 위에서 우뚝 서있는 촉석루와 의연하게 돋아 있는 의암을 언급하고, 이를 통해 앞으로 전개 될 시의 배경을 설정했다. 그와 더불어 남강변에 서린 충성스런 영혼들을 함께 기리고 있다.
서시의 마지막 행에 나와 있는 발충관(髮衝冠) 은 머리카락이 치솟아 관(冠)을 밀어 올린다는 뜻으로서 몹시 성이 났음을 비유한다. 장사들의 기백을 의미 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시는, 비록 작은 여인의 몸으로 왜장 하나만을 죽였으나 그 절행(絶行) 이 낳은 결과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 나라를 지켜낸 큰 사건이었음을 강조 하고 있다.
셋째 시는, 이 시의 내용상 본문에 해당하는 긴 시이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어 작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심상을 세부적으로 읊고 있다. 논개의 성품, 임진왜란의 발발과 진주성의 슬픈 장면, 왜적들의 승전 잔치(勝戰宴)에서의 행태, 논개의 결행과 죽음의 의미 등을 읊고 있다.
제1부에서는, 꽃다운 나이에 기녀가 된 논개의 운명을 묘사하고 천성적으로 기품이 있고 자태 또한 우뚝하리 만치 미쁘다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제2부에서는,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온 나라가 왜군에게 짓밟히고 도성(都城)마저 침략을 당하여 민족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달렸음을 설파하고 있으며, 이즈음 이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밤늦도록 생각에 잠겨있다. 아울러 진주성에서의 많은 백성들이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사실을 더불어서 묘사하고 있다.
제3부에서는,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구들이 승전을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에서 벌인 잔치에 나아간 논개가 왜장을 서서히 의암으로 유인하여 함께 노니는 척 하다가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순국하는 장면을 묘사 하였다.
제4부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논개처럼 왜장을 죽인 평양 기생 계월향과 논개의 절의를 함께 칭송하고, 의연하게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있다.
계월향의 일화를 소개하자면, <계월향(桂月香)은 임진왜란 때 평양성 전투에서 김경서(본명 金景瑞, 아명 金應瑞)를 도와 왜장 소서비(小西飛)를 꾀어내 죽임으로서 공을 세운 대동강가의 의로운 기생을 말한다.
김경서(1564~1624)는 임진년 평양 방위전에서 수탄장(水灘將)으로 투입되었는데 대동강을 건너는 적병을 퇴치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임진란 발발 다음해인 계사년(癸巳年)에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왜군에게 빼앗겼던 평양성을 탈환하여 공을 세운 무장(武將)이다.(논개실기)
고시조古時調 / 안민영
촉석루矗石樓 난간欄干밖에 남강수벽南江水碧 백구비白鷗飛라
슬프다 일편석一片石은 정충고혼貞忠孤魂을 실었구나
서풍西風에 잔盞들어 위로할 때 눈물겨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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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영(安玟英 : 1816~1885?), 시조시인, 조선후기 스승 박효관과 함께 조선역대 시가집 가곡원류를 편찬한 가객, 저서 금옥총부·주옹만필) 등.
이 시의 작자 주옹(周翁) 안민영은 일반 서민(庶民) 출신이지만 고상한 면이 있어 산수(山水)를 좋아하고 풍류를 즐겼으며, 명예와 이익을 좇아 사는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반듯한 품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또한 한량처럼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하였고, 예능에도 밝아 시와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조선후기 가객이었으니, 이러한 그가 영남지방의 명승지인 촉석루인들 찾지 않았을 리 없었을 것이다.
이 시는 작자가 촉석루에 올라 남강의 푸른 물결과 흰 갈매기를 바라보다 어느덧 의암에 눈길을 멈추고 그곳을 향해 술잔을 건네는 장면을 연출했다.
이를 통해 작자는 정충고혼(貞忠孤魂), 곧고 충성스럽고 외로운 논개의 넋을 위로 하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남강수벽(南江水碧), 남강물은 여전히 푸르고, 일편석(一片石), 의암은 슬프게도 강물 위에 여전히 떠있어 시인으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제목을 특별히 붙이지는 않았지만 전형적인 시조의 형식을 갖추었으며, 역사적인 사실 앞에 경건해지는 시인의 마음을 잘 나타내었다.
안민영이 70세(1885년, 고종22년)되던 해에 편찬한 시조집(가집) 금옥총부(金玉叢部)에는 이 시조를 충분히 설명해 주는 사연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고 전한다.
<晋州矗石樓外 南江中 有一大巖 上可以坐百人 壬辰之倭亂 倭將與府妓論介登此巖 飮酒而樂 酒至半酣 請倭將對舞 倭將欣然而起舞 論介抱倭腰 投江而死以 此故 立廟以表忠烈
진주의 촉석루 밖 남강에는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위에는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있다. 임진년 왜란 때 왜장이 진주부 관기인 논개와 함께 이 바위 위에 올라 술을 마시고 즐기다가, 술이 반쯤 취하자 논개가 왜장에게 춤을 추자고 청하니 왜장은 기꺼이 일어나 함께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논개가 왜장의 허리를 끌어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으니, 이런 까닭으로 묘당(廟堂)을 세우고 그의 충렬(忠烈)을 표하였다.(논개실기)
고시조古時調 / 작자미상
(가)
촉석루矗石樓 밝은 달이 논낭자論娘子의 넋이로다
향국向國한 일편단심一片丹心 천만년千萬年에 비치오니
아마도 여중충의女中忠義는 이 뿐인가 하노라
(나)
맑고 맑은 남강수南江水야 임진壬辰일을 네 알리라
충신忠臣과 의사義士들이 몇몇이나 빠졌는고
아마도 여중장부女中丈夫는 논낭자論娘子인가 하노라
(다)
해동국海東國 삼천리三千里에 허다許多한 바위로다
풍마우세風磨雨洗하면 어느 돌이 안 변變하리
그 중中에 일편의암一片義巖은 만고불변萬古不變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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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미상.
이 시조들은 작자는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조선왕조 후기 고종(高宗) 대에 진주 목사를 지냈던 정현석(鄭顯奭)이 편찬한 시조집인 교방가요초(敎坊歌謠抄)(1872)와 박을수(朴乙洙)가 편찬한 한국시조대사전(韓國時調大事典)(1992) 등에 수록돼 있는 작품들이다.
(가), (나) 시조에서 시인은 논개를 가리켜 의기(義妓)라는 칭호 대신 ‘논낭자(論娘子)’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논개의 충성스러움과 의로운 정신을 함양하고 더불어서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이다.
또한 시인은 논개를 ‘여중충의(女中忠義)’ 또는 ‘여중장부(女中丈夫)’라 하고 있는데 이는 한갓 가녀린 여성으로서의 논개가 아닌 남성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그의 대담한 절행(節行)에 대한 최고의 칭찬이요 예우(禮遇)라 하겠다.
‘여중장부’에서 장부(丈夫)는 남자(男子) 즉, 사나이를 일컫는데, 논개의 순국정신이 여성스럽지 않고, 남자의 기상을 닮았다는 뜻으로서 이는 1651년(효종 2년) 오두인(吳斗寅, 1624~1689)이 지은 의암기(義巖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의암기 중간쯤에 “저(논개)는 남녘 고을의 한 창기로서 조용히 죽을 바를 가려 이렇게 열렬히 대장부의 일을 해내었으니”라는 기록이 보인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가)에서는 논개의 넋을 달에 비유하여 나라를 비춰주는 희망으로 승화시켰으며, 민족의 역사는 영원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적절한 비유와 은유를 통해 논개의 순국정신을 드높이고 있다.
또한 (나)에서는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겪으면서 셀 수 없이 많은 충신과 의사들이 나타난 사실을 반추하며 이들의 행적을 칭송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논개의 충의정신을 으뜸으로 꼽고 있다.
그리고 (다) 시조에서도 논개를 흔하지 않은 영혼으로 표현하고 세상은 변해도 논개의 충렬정신이 서린 돌(義巖)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에는 많은 돌(사람)이 있고 세월에 따라 모두 변하기 마련이지만 논개의 의로운 정신이 담긴 의암이야말로 천년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위의 시조에서는 특히, 논개의 신분을 천한 기생이 아닌 양반가의 규수로 격상시켜 논개의 사상인 구국정신을 품격 있게 하고자 했음을 아울러 엿볼 수 있겠다.
이 세 편의 시조는 ‘의암별제(義巖別祭)’를 지낼 때 각각 초헌악장, 아헌악장, 그리고 종헌악장으로 끌어다 불렀다.
‘의암별제’는 조선말 고종(高宗) 시절에 진주 목사 정현석이‘의기사’를 중건하고, 그동안 지내오던 논개의 제삿날 제사를 유교식으로 가다듬어, 풍악을 울리고 노래와 춤을 추게 했던 예술제이다. 이때에 연행되는 노래와 춤을 ‘의암별제가무(義巖別祭歌舞)’라고 부르고 있다.
화채비결花寨秘訣 / 작자미상
논개論介는 우리 조상祖上 계월향桂月香은 우리 선생先生
살신성인殺身成仁 그 충절忠節은 천만년千萬年에 빛나도다
우리도 저를 모범模範하여 시사여귀視死如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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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미상, 고시조(古時調).
이 시조는 1918년 12월 4일 자 <대한매일신보>의‘사조(詞藻)’란에 발표된 후 박을수(朴乙洙)가 편찬한 한국시조대사전(韓國時調大事典)(1992)에 수록된 작품이다.
시인은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논개와 계월향의 애국정신을 이 시에 함께 담아 읊고 있다. 논개와 계월향은 비록 기녀라고 하는 천민출신이지만 진주와 평양에서 각각 왜장을 죽이고, 나라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진 충절의 여인들이다. 이 사건은 남성으로 상징되는 사대부 정신을 능가하는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특히 <계월향은 임진왜란 당시 평양(平壤)의 기생인데 평안도 방어사(平安道防禦使) 김경서(金景瑞, 초명 金應瑞)를 오라비라고 속여 함께 평양성으로 들어가 왜장(倭將) 소서비(小西飛)를 죽이게 도와주고 왜군으로부터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하여 자신도 김경서로 하여금 죽이게 한 여인이다.(논개실기)
이 시는 논개와 계월향의 희생을 강조하였으며 이들의 순국사실은 우리민족의 역사 위에 영원히 빛날 것임을 강조한다.
시인이 논개와 계월향의 의연한 죽음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시에 담아 일컫는 목적은 현대를 살아가 후손들에게까지 시대를 초월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뜻이 담겨있다.
이는 곧 논개는 우리조상, 계월향은 우리선생이라고 칭하며 이들의 모범적인 삶을 강조하고 이 정신을 우리 민족정신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시대를 아우르는 설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의 제목인 화채비결(花寨秘訣)은 꽃처럼 아름답고 작은 성(城)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결행한 뜻이 참으로 심오하다는 의미로서 울타리(寨)에서 이별하다(訣), 헤어지다, 를 나타낸다.
또한, 시사여귀(視死如歸)는 죽는 것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여긴다, 라는 뜻으로서, 이는 곧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한다’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같은 정신은 유몽인이 남긴 어우야담(於于野談) 인륜편의 ‘효열’대목인 논개 이야기 말미에 “죽는 것을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겨 왜적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 했으니”라는 대목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다음호에 계속>
*이매미는 의암(의로운 바위)의 방언이며, 꽃타래는 논개를 노래한 시들의 묶음을 뜻한다.
박일만
전북 장수 육십령 출생, 2005년 《현대시》 로 등단
시집 사람의 무늬, 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 뼈의 속도, 살어리랏다, 사랑의 시차 등
송수권 시문학상, 나혜석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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