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황보명숙 작성일 2022.12.14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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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의 서러운 생애와 만나다]
오늘의 답사 테마는
백제시대 석탑의 발달과 특유의 우아한 미감을 살펴보고 통일신라 석조물과의 구분,
마치 극락에 머무는 듯 차안과 피안의 경계인듯 이상적인 사찰 무량사에서
천재시인, 김시습의 서러운 생애와의 만남
1. 날짜 : 2022년 12월 13일 화요일
2. 답사지
서천 성북리 오층석탑, 성주사지, 부여 무량사,
3. 주요 일정 (예정)
08:00 조계사 출발
08:15 양재역 출발
08:40 죽전정류장 출발
08:45 신갈정류장 출발
08:45-11:10 서천 비인 오층석탑
11:10-11:40 고려시대 백제계 석탑의 진수 답사
11:30-12:10 성주사지 입구로 이동
12:10-13:00 점심
13:00-14:10 성주사지 답사
14:10-14:30 무량사로 이동
14:30-16:30 무량사 답사
16:30~18:40 신갈/죽전정류장/양재역/강남역/논현역
19:40 조계사/경복궁역
4.참가자(25명 지인포함)
권화자,김노운,김병구,김정환,오관석,유정득,이영희,이혜숙,전미리,
정정옥,지종석,최용출, 최윤희,최현숙,황보,김동임,김여경,백낙순,
손영희,유동엽,이청미,이혜숙,장정숙,한정숙,황재성
5. 답사내용
5-1 서천 비인 성북리 오층석탑(백제계 고려시대 석탑) - 황보명숙
인도에서 시작된 부처님의 묘탑인 불탑이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오는 동안 각 지역 고유의 양식을 빌어 불탑이 건립되고 발전.
중국에서는 고층목조건축에 귀한 손님을 모시는 것에 착안하여 불사리를 모시는 목탑이 성행
(1) 한반도 석탑의 출현
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에 중국의 목탑이 불탑으로 전래되어 건립되었으나,
목탑이 화재와 지진 등에 취약한 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백제 시대 목재를 석재로 대체한 최초의 석탑이 익산 미륵사지 석탑 (639년)
*법주사 팔상전은 조선시대 건립된 것이기는 하나,
원래 있던 목탑의 양식을 재현해 놓았다고 볼 수 있으므로,
목탑에서 석탑으로의 변천 과정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많은 부재로 구성되어 있는 목탑을 충실히 모방.
(2) 백제시대 석탑
처음에는 목탑의 모방에 충실하다가
문화적 성숙기를 거치면서 간결해지고 세련되게 발전 미륵사지 석탑 -> 정림사지 석탑
한반도에 최초의 석탑(미륵사지 석탑)을 창안해내고
곧이어 완숙미(정림사지 석탑)까지 보여주었으나,
백제가 660년 멸망하는 바람에 백제의 석탑은 아름다운 꽃을 채 피우기도 전에
이 2기만 남기고 역사에서 사라짐.
(3) 통일신라 석탑
통일 이전 신라에서도 목탑을 건축하다가 통일 이후 백제에서 창안해낸 석탑을 도입해 와서
통일신라의 강성한 국격에 걸맞는 미감으로
기단부가 탄탄한 삼층석탑 창안 (감은사지 석탑) 한 이후 불국사 석탑에서 절정미
백제탑의 미감과는 또 다른 장중하면서도 정제미를 품어내고 있는 통일신라 석탑 특유의 아름다움을 창조.
이후 통일신라가 멸망하기 까지 변함없이 유지.
(4) 고려시대 백제계 석탑의 등장
백제가 멸망한 이후 250년간 통일신라가 유지되면서 전혀 다른 미감을 지닌 석탑이 유행하였으나,
고려가 건국된 직후 옛 백제 영토에서 아련히 사라진 백제계 석탑의 미감을 지닌 석탑이 등장하였으니,
고려시대 백제계 석탑이다.
대표적인 석탑이 백제시대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거의 동일한 양식인 성북리 오층석탑.
정림사지 석탑 대비하여 성북리 오층석탑에서 볼 수 있는 백제석탑의 미감을 분석해보면,
-옥개석보다 좁은 기단, 평평한 기단, 낮은 기단
-평박광대(얇고 평평하며 넓고 큼)하고 끝단에서 살짝 반전을 이룬 옥개석
-옥개석의 두 낙수면이 만나는 내림마루가 선이 아닌 우동 (높이와 넓이가 있는 마루)
-많은 부재를 사용
-1층의 우주(모서리기둥)가 엔타시스(위로 갈 수록 좁음)
-옥개석 네 귀퉁이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수직 방향으로 뚫힘(통일신라는 수평방향)
통일신라 250년간 숨어 있는 백제의 미감이 되살아 나온 성북리 오층석탑
이탑은 3층으로 보이는데 왜 5층 석탑인가?
석탑에서 평평한 것은 기단의 갑석과 상륜부를 받치는 노반이고, 옥개석은 빗물이 떨어지게 경사가 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맨 위층은 낙수면이 있으므로 노반이 아니라 옥개석이다.
석탑의 층수는 홀수로 이루어져 있으며, 1,2,3층 옥개석의 비율은 일정하게 감소하고 있는데,
맨 위층의 옥개석의 비율이 급격하게 감소하였으므로
4층 옥개석은 유실되고 자세히 보면 맨 위층은 5층 옥개석임을 알 수 있다.
(5) 고려시대 통일신라 석탑의 미감을 가미한 백제계 석탑
성북리 오층석탑은 백제탑을 그대로 따랐는데,
고려는 이미 통일신라의 문화를 거쳐 왔으므로,
고려초에 백제탑에 신라탑을 가미한 양식의 석탑도 등장
바로 무량사 오층석탑, 왕궁리 오층석탑, 금산사 오층석탑 등등
오늘 답사의 마지막 무량사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5-3 성주사지
(1) 성주산문 - 권화자 선생님 헤설
계급사회였던 통일신라 중기 진골에 편입되지 못하여 승진이 좌절되었던 육두품 계층이
돌파구로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당시 중국을 휩쓸던 선종의 법맥을 받아 귀국하여
지방 호족들의 지원에 힘입어 전국 각지에서 선법을 펼쳤던 아홉산문을 구산선문이라 하는데,
그 중에서 세력을 떨쳤던 곳이 낭혜화상 무염이 창건한 성주사이다.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 길은 없으나,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 4기와 아리따운 석등 1기가 광활한 폐사지위에 펼쳐져 있다.
(2) 성주사지 석조물(통일신라시대 석등과 4기의 석탑) - 김정환선생님
성주사지에는 금당터 앞에 서 있는 오층석탑에 공양하고 있는 가냘픈 석등이 반겨준다.
석등은 불교에서 불법승 삼보께 올리는 육법 공양물(등, 향, 꽃, 과일, 차, 쌀) 중에서 으뜸으로서 반야등이라고도 하며, 지혜를 상징한다.
성주사에는 오층석탑 1기 이외에도 삼층석탑이 3기나 있는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는데,
금당 뒤에 서 있는 삼층석탑 3기는 원래부터 있던 것은 아니고 주변에 산재해 있던 것을 근래 모아둔 것이다.
이곳에 있는 석탑들은 모두 1층 탑신석과 기단 갑석 사이에 굽형의 별석 받침을 넣어
존숭의 의미를 담아 탑신이 불사리를 모신 불탑임을 상징하고 있다.
아니.. 지선생님, 모범을 보이셔야지요? 문화재구역에 발을 담그시고!
참한 석등만 보면 아리따운 아가씨가 생각난다 하시니... 문화재청에 전화 할 수도 엄꼬.
상대석 뿐만 아니라 하대석에도 연꽃잎이 이중으로 정성껏 조각되어 보면 볼 수록 정감이 간다.
성주사지 폐허 속 부처님 팔짱끼고 최용출 선생님^^ 반가웠습니다.
이제 완전히 재미들린 풍경!
5-4. 무량사
시간도 지혜도 세지 않는 무량의 도를 닦는다는 무량사.
현재 남아 있는 석조물로 보아 고려초 창건된 무량사의 주불전인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불교계의 위상이 올라간 조선 인조때 지어진 2층 중층 불전이다.
무량사는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하고 임금이 된 것을 비판하며 평생을 은둔한 천재시인이자 승려였던 매월당 김시습이
말년을 머물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무언가 사격이 다른듯 보이는 만수산 무량사! 일주문만 봐도...설레인다!
(1) 당간지주 (無量寺幢竿支柱) - 황보명숙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는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의 양쪽에 서서 이를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드물게 당간이 있으나 대부분 두 기둥만 남아 있다.
기둥 끝은 안쪽면에서 바깥쪽으로 둥글게 다듬었고,
앞뒷면의 가장자리에는 테두리 선을 돌렸으며, 양 옆면 가운데에는 세로로 돌출된 띠를 새겼다.
마주 보는 기둥의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2개의 구멍(간공)을 각각 뚫어 놓았다.
돌기둥 사이에는 당간 받침돌(당좌)이 끼워져 있는데,
그 중앙에 당간을 받는 기둥자리를 파고 그 주위를 둥글고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2) 무량사 천왕문에 들어서면
천왕문에 들어서자 마자 선생님들이 일제히 카메라를 켜신다.
천왕문을 창틀로 해서 극락전-오층석탑-석등이 일직선에 놓이는 무량사 최고의 걸작 장면이다.
(3)무량사 석조물(석등과 석탑) -지종석 선생님
유홍준 교수는 무량사 최고의 포토존이 석등 뒤쪽 나무 아래 있는 가로등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라 하였는데,
그쪽 방향에서 햇볕이 드는 오전에는 뒤쪽 우거진 나무 그늘 때문에 석조물의 품격있는 아름다움이 살아나지 못한다하시며,
오후, 햇살이 아무런 방해 없이 석조물을 때리는 곳 (위 사진 찍은 곳)에서라야 고품격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고,
예의 지론을 펴신다.
석탑은 옥개석이 평박광대하고 갑석의 부연 등에 각이 지지 않고 경사면 부재를 사용하였으며
옥개석 내림마루에 우동이 새겨져 있는 등 백제미감을 가득 품고 있으면서도,
기단의 폭이 옥개석 보다 넓은 등 통일신라 석탑의 미감도 가미되어 있다.
남겨진 무량사의 창건 기록이 없지만,
장대하면서도 아름다운 석탑을 통해서 필시 고려 왕조의 지원을 받은 위상이 느껴진다.
(4) 극락전(보물 제356호)과 아미타소조삼존불상 - 황보명숙
극락 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으로,
극락세계에서 영원히 평안한 삶을 누린다 하여 아미타전
또는 무량한 지혜와 무량한 덕,무량한 수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량수전이라고도 한다.
통일 신라 후기의 석등과 고려의 5층석탑, 조선시대의 2층극락전까지...
이 극락전은 무량사의 중심 불전으로서 한국에는 흔치 않은 2층 불전인데,
외부에서는 2층으로 보이지만 내부는 층 구분 없이 하나로 트여 있는 중층건물로서,
법주사 대웅보전,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불전에 꼽힌다.
아래층의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4칸이며, 1층 내부 기둥이 통기둥으로 올라가 2층의 외부 기둥이 되었다.
극락전의 공포는 조선 시대의 다포 형식으로 조각과 장식이 화려하다.
공포는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 부재로
지붕을 받쳐서 하중이 점차적으로 내려와 기둥으로 연결...
밋밋한 것보다 장식을 더해 화려하고 장엄하게 연출한 것을 볼 수 있다.
안에 들어가 보면 소조아미타 여래삼존좌상이 극락전의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는데,
17세기 대규모 사찰에서 널리 조성되었던 대형의 소조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다.
가운데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양쪽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셨다.
주불인 아미타불은 극락전이 중건된 연대와 같은 인조 11년(1633)에 조성된 것이며
흙으로 빚은 소조불로는 동양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등을 거치며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선 승군들의 헌신으로
왕실과 백성들의 지지를 얻으며 만들어져 한층 고조된 불교의 위상을 보여 주고있다.
이 삼존상은 아미타·관음·대세지라는 분명한 아미타삼존 도상을 보여주고 있고,
17세기 대형불에서 나타나는 삼신불,삼세불 등이 나타나는것과 다르게
아미타 불상과 협시 보살로 이루어진 삼존도상이 드물어 그 가치가 더욱 크다.
이미 발견된 복장발원문을 통해 현진(玄眞)이라는 조각승과 1633년이라는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어
조선후기 조각사 연구는 물론 조각 유파 연구에도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조선후기 불교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불상과 불화들이 많이 생기고, 그에 따라 전문 조각승들과 화승들이 많이 나오고
그에 따른 작품들이 나오는데 그중에 17세기 대표적인 조각승이 현진스님이다.
특히 이러한 소조상들은 거대한 규모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불신의 전체적인 모습이 단순화 된 감이 있으나 양대 전란이후 자존심과 자신감을 회복하고자 노력했던 당시 불교계의 저력을 느낄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5) 매월당 김시습(설장스님)의 서러운 생애? - 전미리 선생님
생육신의 한사람이자 유학과 불교에 능통한 학자이자 문인으로 전국을 떠돌다 무량사에서 생을 마침.
김시습의 영정 (자화상)이 모셔진 편액도 걸리지 않은 전각에서 서러운 김시습의 생애를 처절하게 풀고 계시는 전미리 선생님과 처절함을 몸소 느끼시는듯..황재성 선생님의 비장한 모습!
(6) 부도밭 - 지종석선생님
김시습의 사리탑에서도 옷 속으로 파고 드는 추위도 아랑곳 않고, 쉼없이 열정적 설명하시는 지선생님
무량사는...그냥 무량한 감동이었다.
무조건 가고 또 가고 싶은 사찰이 오늘 또 하나 생겼다.
* 오늘의 찬조
- 변함없이 명품식혜: 전미리 선생님
- 달달한 귤 : 이청미 선생님
- 점심 막걸리와 맥주: 김노운 선생님
넘넘 잘 먹고 마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