芝峯類說卷十四 / 文章部七 / 歌詞
說郛云。無章曲曰謠。齊歌曰謳。吳歌曰歈。楚歌曰艷。振旅而歌曰凱。然則古詩吳歈楚艷之艷字。今人認爲美艷誤矣。
堯山堂外紀云。宋人選塡辭曰草堂詩餘。草堂者太白詩。名草堂集。見鄭樵書目。太白本蜀人。而草堂在蜀。懷故國之意也。曰詩餘者。詞爲詩之餘。而百代辭曲之祖也。按杜甫亦號草堂。世皆知杜甫之爲草堂。而不知李白之爲草堂耳。
王世貞曰。我明以詞名家者。劉伯溫穠纖有致。去宋尚隔一塵。夏公謹最號雄爽。比之辛稼軒。覺少情思。又曰。三百篇亡而後有騷賦。騷賦難入樂而後有古樂府。古樂府不入俗而後以唐絶句爲樂府絶句。少宛轉而後有詞云。蓋詞至宋而大盛。故明人無能及者。
墨客揮犀曰。蘇子瞻自言平生有三不如人。謂着棋吃酒唱曲也。故詞雖工而多不入腔。正以不能唱曲耳。余謂觀乎此言。則我國人不解音律。雖作小詞。其不能合曲固也。
王世貞曰。歌行之有獻吉也其猶龍乎。仲默于鱗其麟鳳乎。夫鳳質而龍變。吾聞其語矣。未見其人也。此蓋世貞自許之言。亦太夸矣。
按漢明帝爲太子。群臣以歌詩四章贊太子之德。一曰日重光。二曰月重輪。三曰星重輝。四曰海重潤。比太子之德。故曰重。蓋取明兩作离之義。
小說。唐宣宗愛唱菩薩蠻詞云。牧丹帶露眞珠顆。佳人折向庭前過。含羞問檀郞。花强妾兒强。檀郞故相惱。只道花枝好。一向發嬌嗔。碎挼花打人。此詞儘佳。
宮詞唐王建一百篇。宋王珪一百篇。徽宗一百餘篇。甞見中朝人合爲一集。仲初固善矣。禹玉亦工矣。徽宗不能盡美矣。
宋仁宗時。老人星見。柳耆卿托內侍。以醉蓬萊辭進。仁宗閱首句漸亭皐葉。下漸字意不悅。至宸遊鳳輦何處。與眞宗挽謌暗同。慘然久之。至太液波翻。忿然曰。何不言太液波澄。擲之地。罷不用。王世貞言。耆卿詞毋論觸諱。中間不能形容老人星。自是不佳。余謂耆卿托內侍以媒進。宜仁宗之薄其人也。不唯其詞之不佳而已。
晏叔原鷓鴣天詞曰。從別後憶相逢。幾回魂夢與君同。今宵剩把銀缸照。猶恐相逢是夢中。佳矣。
晏叔原詞有云。舞低楊柳樓心月。歌盡桃花扇底風。又朝雲信斷知何處。應作巫陽春夢去。紫騮認得舊遊踪。嘶過畫橋東畔路。
宋辛幼安題江西詞曰。江晩正愁予。山深聞鷓鴣。羅太經以爲南渡之初。虜追隆祐太后至造口。不及而還。聞鷓鴣之句。謂恢復之事。行不得也。按鷓鴣志南向。雖東西徊翔。開翅之始。必先南翥。余意幼安此句。蓋喻宋之南遷而避虜益南也。
元人詞曰。嫩綠池塘藏睡鴨。淡黃楊柳帶棲鴉。下句乃宋賀方回詞句也。雖欠老健。亦自佳矣。但上句頗劣。又藏字未穩。
明廟朝折御苑黃菊。賜玉堂官。命撰進歌詞。玉堂官倉卒不能就。時宋純以宰樞直摠府。乃借製以進。上覽之。驚喜問誰作此者。玉堂官不敢隱。以實對。乃大加賞賜。其詞至今傳于樂府。
李鰲城爲天將接伴使。天將聞我國人唱歌。問其旨意。鰲城書示曰。昔日苟如此。此身安可持。愁心化爲絲。曲曲還成結。欲解復欲解。不知端在處。天將稱好。按康伯可閨情詞曰。此度相思。寸膓千縷。蓋思與絲字同音故也。李義山詩春蠶到死絲方盡。亦此義。
我國歌詞。雜以方言。故不能與中朝樂府比並。如近世宋純,鄭澈所作最善。而不過膾炙口頭而止。惜哉。
長歌則感君恩,翰林別曲,漁父詞最久。而
近世退溪歌,南冥歌,宋純俛仰亭歌,白光弘關西別曲,鄭澈關東別曲,思美人曲,續思美人曲。將進酒詞盛行於世。
他如水月亭歌,歷代歌,關山別曲,古別離曲,南征歌之類甚多。余亦有朝天前後二曲。亦戲耳。
俗傳雇工歌爲先王御製。盛行於世。李完平元翼又作雇工荅主人歌。然余聞非御製。乃許㙉所作。而時俗誤傳云。許㙉以進士登武科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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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下筆記卷之十七 / 文獻指掌編 / 歌曲
明廟朝折御苑黃菊。賜玉堂官。命撰進歌詞。倉卒不能就。時宋純以宰樞。直緫府。乃借製以進。上覽之驚喜。問誰作此者。玉堂官不敢隱。以實對。乃大加賞賜。其詞至今傳于樂府云。我國歌詞。雜以方言。故不能與中朝樂府比。如近世宋純鄭澈所作最善。而不過膾炙口頭而止。長歌則感君恩翰林別曲漁父詞最久。而近世退溪南冥歌。宋純俛仰亭歌。白光弘關西別曲。鄭澈關東別曲思美人曲續思美人曲將進酒詞。盛行於世。他如水月亭歌歷代歌關山別曲古離別曲南征歌之類。甚多。
임하필기 제17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 가곡(歌曲)
명묘조(明廟朝) 때 어원(御苑)의 황국(黃菊)을 잘라 옥당의 관원들에게 하사하면서 가사(歌詞)를 지어 올리도록 하니, 갑작스러운 일에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때마침 송순(宋純)이 재추(宰樞)로서 도총부에서 숙직하고 있었기에 그에게 대신 지어 달라고 하여 올렸다. 상이 읽어 보고는 놀라면서 이 글을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으니, 옥당의 관원들이 감히 감출 수가 없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이에 크게 상을 내렸다. 그 가사가 지금까지 악부(樂府)에 전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가사는 방언(方言)을 섞어 쓰기 때문에 중국의 악부와 비견할 수 없다. 근세에는 송순과 정철(鄭澈)이 지은 것이 가장 훌륭한데,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장가(長歌)로는 감군은(感君恩), 한림별곡(翰林別曲), 어부사(漁父詞)가 가장 오래되었는데, 근세에는
퇴계(退溪)의 남명가(南冥歌),
송순의 면앙정가(俛仰亭歌),
백광홍(白光弘)의 관서별곡(關西別曲),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ㆍ사미인곡(思美人曲)ㆍ속사미인곡(續思美人曲)ㆍ장진주사(將進酒詞)가 세상에 유행하고, 그 나머지
수월정가(水月亭歌), 역대가(歷代歌), 관산별곡(關山別曲), 고이별곡(古離別曲), 남정가(南征歌) 등등 매우 많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경희 (역)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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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에는 퇴계(退溪)의 남명가(南冥歌)->근세에는 퇴계가(退溪歌)와 남명가(南冥歌)
*長歌則感君恩,翰林別曲,漁父詞最久。而近世退溪歌,南冥歌,宋純俛仰亭歌,白光弘關西別曲,鄭澈關東別曲<芝峯類說卷十四 / 文章部七 / 歌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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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필기 제38권 / 해동악부(海東樂府) / 관산별곡(關山別曲)
산은 흩어져 있고 물은 넘쳐흐르는데 / 春山點點水溶溶
성 위에 있는 누대는 몇 층이나 되는고 / 城上樓臺望幾重
창문에서 이원제자 노랫소리 흘러나오는데 / 綠窓歌咽梨園子
그 집은 바로 수양버들 짙푸른 속에 있도다 / 家在垂楊一色濃
평사(評事) 백광홍(白光弘)이 이 가곡을 지었는데, 옛사람의 시에, “긴 성 한편에는 넘쳐흐르는 물이요 넓은 들 동쪽에는 흩어져 있는 산이로다.[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라는 말이 있으므로 이것을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관서죽지사(關西竹枝詞)에, “푸른 창문에서 노랫소리 흘러나오는데 이것은 모두 이원제자의 집이러라.[綠窓朱戶笙歌咽 盡是梨園弟子家]” 하였다.
[주-D001] 관산별곡(關山別曲) : 조선 명종 10년(1555)에 문인 백광홍(白光弘)이 지은 기행 가사이다. 백광홍이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로 있을 때 그곳의 자연 풍물들을 두루 돌아보고 그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으로 우리나라 기행 가사의 효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기봉집(岐峯集)》에는 가사명과 가사 내용이 실려 있고, 《증보문헌비고》에는 가사명만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모두 가사명이 ‘관서별곡(關西別曲)’으로 되어 있다.[주-D002] 옛사람의 …… 있으므로 : 옛사람은 고려 시대의 시인인 김황원(金黃元)을 가리킨다. 그는 평양에 있는 부벽루(浮碧樓)에 올라갔다가 거기에 걸린 평양 산천을 읊은 시들이 신통치 못하다고 모두 불태워 버리고, 자신이 지어 걸기로 하여 해 질 무렵에야 겨우 이 한 구를 짓고는 끝내 그 시를 완성하지 못하여 통곡하며 내려왔다는 일화가 전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동주 (역) |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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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유고(錦湖遺稿) 임형수(林亨秀)생년1514년(중종 9)몰년1547년(명종 2)자사수(士遂)호금호(錦湖)본관평택(平澤)
錦湖遺稿 / 雜著 / 書關山別曲後
鬱於中而暢於外。發於言而成於聲。人心之邪正難掩。世治之汚隆可觀。夫物接而感生。事至而情動。雖無待乎督勉。而君子亦不可不愼其所自發也。故聖人於三百篇之詩。俱聽其情之自發而不容己者。斷之以無邪。其旨深矣。歲丙子間。朝家選重望。雜之以北邊列帥。今元戎李公文仲爲鍾城。前節度使南道潘公公父爲慶興。俱以宿儒出也。蜼無專一方之制。無不素度 度或作處 而預定之者。嘗念北門受寇尤劇。其民易驚。控理之勤。將臣之勞。視他倍蓰。幸今聖澤遐濡。狼煙久熄。民勤而業。卒勵而休。人煙鷄犬。堡塞相錯。紅婦農夫。閭落相連。皆罔知所賜。可無歌詠昇平。慰安將士。爲遊衍之具。飮射之物乎。遂撰歌八章曰關山別曲。實公父創之。元戎潤色之。不過宣威暢和。象賢念功。敍區域之有截。則毋貪功啓釁也。極昇平之樂事。則懼縱心弭備也。戒存於杯酌之間。禮行於飮射之際。要皆節制爲防堤。不泰不康。和節於淫。正離於若。誠所謂治世之音也。日與賓校僚佐而樂之。歌且反之。使君子得聞之。而感激思效之心。油然而生。小人得聞之。而保守疆土之念。無容少衰。諷詠之間。其潛移默運。換易人心者豈淺鮮。而異日親上事長之兵。俱自歌曲中做出。二公之見。於是乎韙矣。且觀北土任強。聲習自別。加之以武夫敢士來萃于此。羈離異域。眷戀君親。感懍愁慘之懷。忽與粗厲猛奮之音合。則易至於傷亂。二公於是。抑有所深覩矣。古之觀風採謠者。雖閭巷鄙俚之辭。俱得以錄之。此三百篇之權輿也。今於是歌。烏得已乎。有能使數百載之下。想見今日之治象。而知數君子之用心乎未也。府伯金公。好善君子也。刊諸列鎭之首曰會寧府之壁。閼逢涒灘長至後日。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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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 34 | 1539 | 기해 | 嘉靖 | 18 | 26 | 병조 좌랑이 되다. ○ 4월, 詔使 華察과 薛廷寵이 나오자 遠接使 蘇世讓의 從事官이 되다. ○ 6월, 檢討官으로 經筵에 입시하다. 곧 부수찬이 되다. ○ 7월, 文武를 겸비한 인재로 뽑혀 會寧府 判官이 되다. 대제학 蘇世讓 등의 아룀으로 체차되었다가 다시 三公의 아룀으로 재차 제수되다. |
중종 | 37 | 1542 | 임인 | 嘉靖 | 21 | 29 | 3월, 임기를 채우고 돌아오는 길에 明川 남쪽의 七寶山을 유람하다. ○ 4월, 지평이 되다. 이후 이조 좌랑, 이조 정랑, 장령, 사간 등을 역임하다. |
雜著는 〈書關山別曲後〉와 〈遊七寶山記〉이다. 〈書關山別曲後〉는 1524년에 지어진 글인데, 내용으로 추측하거나 당시 저자의 나이(10세)를 감안할 때 저자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마 會寧에 관계된 이 글을 후일 그곳의 判官이 되었던 저자가 지은 것으로 보고 잘못 넣었으리라 짐작된다. 〈遊七寶山記〉는 會寧 判官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明川 남쪽에 있는 七寶山을 유람하고 지은 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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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악집(海嶽集) 이명환(李明煥)생년1718년(숙종 44)몰년1764년(영조 40)자사회(士晦), 사휘(士輝)호해악(海嶽)본관전주(全州)특기사항오찬(吳瓚), 황경원(黃景源), 이인상(李麟祥), 이윤영(李胤永) 등과 교유
海嶽集卷之三 / 後叙 / 書林錦湖鰲山歌後 癸酉
영조 | 29 | 1753 | 계유 | 乾隆 | 18 | 36 | 2월, 정언이 되다. 崔錫恒을 비난하는 상서를 올리자 護黨하였다는 이유로 寧海에 유배하라는 명이 내렸다가 취소되다. ○ 3월, 부사과가 되다. ○ 6월, 정언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7월, 충청 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하다. ○ 10월, 문학이 되다. ○ 12월, 사서가 되다. |
林錦湖亨秀少登第。能文章善射。美風儀。氣岸卓犖豪逸。時稱國器。丙子間。出拜會寧判官。其鰲山歌,關山別曲。膾炙一世。此亦其時嘯咏中一事。退溪先生酷愛之。每稱以奇男子。晩年誦此辭而輒思之曰。安得與林士遂相對乎。盖見先輩許與之不少矣。惜乎當門之蘭。不免於斧鋤。此玄軒居士所以雪涕而不止者也。今余逾嶺。搜訪其跡。遺唾餘咳。蕩然無徵。俛仰曠感。不覺慨慷而發嘆。遂以此言誦于元戎。元戎拍案稱快。題其大雪辭于行營之永嘯堂中。復以拙筆書此歌。揭于鰲山之滌愁軒。寓其湮滅之悲。而以遂驥尾之願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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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嶽集卷之三 / 記 附遊記 / 閱波亭重修記
영조 | 30 | 1754 | 갑술 | 乾隆 | 19 | 37 | 2월, 江東 縣監이 되다. *8월 閱波亭重修 |
영조 | 33 | 1757 | 정축 | 乾隆 | 22 | 40 | 8월, 문학이 되다. |
凡作則有形。有形則變。此固然之理也。天作之大者。莫如山海。而高山或變爲深谷。滄海或變爲桑田。况人作之宮室臺榭。風雨之所萃。霜露之所侵乎。此皆自然而成。自然而化者。然而山與海天作而天變之。宮室臺榭之興廢。亦各由於人。斯豈偶然也哉。閱波亭在江東縣西江龍橋上。其創不知年代。余於今年三月。莅是邑歷斯亭。垣宇頹軒欞敝。草高於階尺餘。亭舊設站待星使。站廢亭亦廢云。時余喟然而過。居無何。邑務少暇。廩捧梢贏。遂興修改之役。使縣武劉再雄董之。鳩材雇丁。扶傾葺朽。被以朱碧。鋪以石甎。三閱旬而功告訖。余與賓客從事登臨焉。庭院一新。殊異於昔日光景。維時中秋。天宇澄晶。原壄曠朗。俯見前江。泓碧淸澈。水底游魚可數。爰有一道石梁。橫映波心。譬若白霓亘空。此其爲龍橋者歟。余顧謂賓客曰。美哉亭之望也。北詹慈城姑郭。連綿雲際。南見鳳臺龍岑。騰翥浦口。東則朴山之盤紆屈曲。西則子峰之縹緲秀聳。何其不見於前而見於今耶。噫。是皆亭之固有。而亭之廢。人厭其荒陋。不歷考其勝。亭之新。人樂其爽塏。始評論其槩。乃知山川顯晦。係於亭之興廢。其亦可哀也已。亭古無名。稱西江院。嘉靖間。頤菴宋文端公改今名。文端公余之外先。曾見其家乘。有水月亭歌。斯亭命名之義。與水月亭一般。而其盈虗消長。造化無盡之理。尤較著於斯矣。信乎陸機之言曰。川閱水而成川。世閱人而爲世。夫亭之閱世。與水俱長。逝者如斯。來者滔滔。敝而復新。新而還敝。不知旣𨓏之閱幾許興廢。而又不知方來之閱幾許廢興也。文端名亭之意。其在斯歟。悲夫。天地長遠。人生苦短。王喬赤松。不可攀援。則浸浸大暮。將無回復之期。此吾所欽羡於斯亭。而寓感於記末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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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欽 | 1566 | 1628 | | | 平山 | 敬叔 | 象村, 敬堂, 百拙, 南臯, 玄軒, 玄翁, 放翁, 旅菴 | 文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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