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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포션 이름 (파라샤) | 모세오경 (토라) | 예언서 (하프타라) | 신약 (브리트하다샤) |
나쏘 / 계수 / 들어올린다 | 민 4:21-7:89 | 삿 13:2-13:25 | 요 11:1-11:54 |
<단락 1> 민수기의 히브리어는 ‘미드바르 (광야)’ 입니다. 광야 (히 : 미드바르)란? 하나님의 음성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 광야와 같은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만을 듣고 움직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광야는 약속의 땅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적인 훈련과정입니다. (새번역) 디모데전서 4장 8절에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의 훈련은 범사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 말씀합니다. 경건의 훈련은 이 세상 (히 : 올람 하제)과 올 세상 (히 : 올람 하바)에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 즉, 예슈아의 피로 인해 구원이 시작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올 세상에 들어갈 준비 (히 : 미크라 코데쉬, 예행연습)를 해야 합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예슈아를 믿기 때문에 핍박과 환란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5장 10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좁은 길로 나아가는 삶을 사는 이유는 예슈아께서 다시 오시면 이 땅에서 부활할 것을 믿으며, 이 땅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서 왕 노릇하며 살아갈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불편한 환경이 오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1절에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고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말씀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집중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전능자의 그늘 아래입니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사람은 반석 (말씀) 위에 삶의 기초를 제대로 세우기 시작합니다 (마 7:24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수 많은 폭풍이 아직 우리의 삶 가운데 몰아닥치지 않았을 뿐이지, 인생의 폭풍은 반드시 옵니다. 문제는 그 폭풍을 견딜 기초가 우리의 삶 가운데 놓여져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세상 이는 인생의 폭풍을 돈과 권력과 인간관계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폭풍은 사람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전능자의 그늘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음성 (말씀)을 듣고 행하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경험할 때에 비로서 인생의 폭풍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능자의 임재 안에서 우리의 삶을 온전히 내어드리게 되어졌을 때에 하늘의 능력이 풀려나게 됩니다 (경건의 신비). 하나님의 음성을 들길 원한다면, 우리 마음의 주파수를 하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대부분 우리의 의지에 달린 문제입니다 (시 95:7, 요 10:27). 양은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시작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훈련을 통과하지 못하고 넘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광야에서 3가지 직분을 통하여 사람을 세우십니다.
1. 민 4:2 레위 자손 중에서 고핫 자손을 ... 계수할지니 ... 22. 게르손 자손도 그 조상의 가문과 종족에 따라 계수하되 29. 너는 므라리 자손도 그 조상의 가문과 종족에 따라 계수하되
첫째, 하나님은 광야에서 레위 지파를 세우십니다. 원래 희생제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가 가족을 대신하여 희생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장자들이 금송아지 우상숭배에 참여하게 되자, 그들의 권리를 박탈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참여하지 않은 레위지파 (게르손 자손, 고핫 자손, 므라리 자손, 코하님 자손)에게 이 땅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섬길 수 있는 제사장의 특권을 주십니다. 제사장의 첫 번째 임무는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를 진행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두 번째 임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토라를 가르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에게 이러한 삶을 요청하시는 이유는 제사장의 삶과 예배를 통하여 하늘을 비추어 내는 거울의 역할로 부르신 것입니다 (마 5:14). 우리 또한 예슈아를 통하여 멜기세덱 반차의 제사장으로 하늘 성소를 섬기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히 9:11, 벧전 2:9). 그래서 제사장은 어느 날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와 토라훈련을 통하여 (제사장 훈련)을 통하여 세워집니다. 제사장 (예배자)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예배자는 자신의 생각, 감정, 계획, 뜻,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의 기업은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 27:4). 제사장의 축복기도문 (히 : 비르카트 코하임)이 민수기에 나옵니다.
1) 민 6: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복을 주시고,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복은 왕이신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눈동자로 지키시는 분이신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전한 자가 될 수 있도록 ‘신실하게 훈련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슈아는 마태복음 12장 50절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말씀하십니다.
(1) 민 6: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히 : 샬롬)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에게 비추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가 우리에게 임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강 (히 : 샬롬) 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샬롬은 ‘평화’라는 뜻도 있지만, ‘온전함’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온전함이란?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세상과 사람은 우리를 온전히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항상 아쉬운 것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히 기쁘시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물질적인 복이나, 이 땅에서 성공하는 복만을 구하는 자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비추어달라고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레위’의 뜻은 ‘연합’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과 연합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러나 죽지 않는 자아의 전형적인 문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자아를 예슈아의 십자가에 못 박고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은 참된 안식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상태가 되는 것이며 (시 62:5), 하나님과 연합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에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말씀합니다. 예슈아는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러 나왔다가도 형제와 다툰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그것을 가서 풀고 와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 5:23-24).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사람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로움과 사랑을 나누며, 자기 희생과 댓가지불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2) 민 6:2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둘째, 하나님은 광야에서 나실인를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레위 지파를 정렬하시고 나서, 모든 사람들이 레위인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온전히 헌신할 기회를 열어주셨습니다. 나실 (히 : 나지르)의 뜻은 ‘헌신하다, 구별되다, 절제하다’ 입니다. 나실인은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어 한정된 기간 동안 하나님을 위하여, 세속적인 쾌락을 멀리하고, 자신의 시간, 재능, 자원을 여호와께 드리게 됩니다. 아모스 2장 11절에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실인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말씀합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와 나실인을 원하지 않았으며, 거짓 선지자 아마샤의 음성을 좋아했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적당히’ 섬기고 싶어하는 마음들이 늘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예슈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자신을 흔들어 깨우지 않는다면, 지금의 신앙에 만족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슈아는 하나님과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주셨습니다.
나실인의 서원의 내용은 첫째,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기쁨을 세상으로부터 오는 즐거움으로 채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삭도를 머리에 대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나의 머리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셋째,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죽음은 죄의 값으로 온 것이기 때문에 부정한 것을 뜻합니다. 한정된 기간 동안 (통상적으로 30일에서 100일) 하나님을 위하여, 세속적인 쾌락을 멀리하고, 자신의 시간, 재능, 자원을 여호와께 드리게 하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실인으로 헌신한 사도 바울 (행 18:18, 행 21:22-26) 이 있으며, 세례 요한 (눅 1:15-17)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나실인으로 살았습니다. 이는 구약에 나온 제사장들만이 (목회자)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닌 어느 누구나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는 나실인 서원을 법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번주 예언서 (하프타라)에는 삼손이 등장합니다. 삼손의 이름은 태양, 빛입니다. 그러나 삼손이 나실인으로 살지 못하게 한 유혹은 큰 유혹이 아니었습니다.
(1) 삿 16:15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드릴라의 이름은 밤의 여인 (밤의 히브리어 : 라일라)입니다. 태양과 밤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사단은 작은 타협을 통하여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영적 파산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죄에 대해서 작은 타협들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교만, 판단, 분노, 게으름, 시간소비, 세상적인 생각, 너무 성급한 말로 인해 넘어집니다.
3) 민 7:2 이스라엘 지휘관들 곧 그들의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들이요 그 지파의 지휘관으로서 그 계수함을 받은 자의 감독된 자들이 헌물을 드렸으니
셋째, 하나님은 광야에서 지휘관 (리더, 족장)을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시고 계십니다 (벧전 2:9). 요한계시록 20장 6절에 ‘...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말씀합니다. 천년 왕국 시대에 왕의 직분을 감당하는 자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간 자입니다. 우리는 예슈아를 믿는 순간 이 땅을 다스리는 왕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러한 일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상적이고 추상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에게 져서 복종하게 되어지면, 하나님과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대항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을 죽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현실의 삶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낼 것인지 실제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정, 환경, 염려 등의 자리를 하나님께 맡겨드리며, 그가 통치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 때,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왕의 기름부으심입니다. 왕의 기름부으심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모셔드리는 자에게 흘러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왕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높은 권세의 자리에 올라가 사단 마귀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물은 위에서부터 흐르게 되어지는 것처럼, 내가 주님 보다 높아져 있다보면 기름부으심은 당연히 받지 못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