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신을 매장하지 말고 화장하라. 훌륭한 화장시설을 만들어 사회에 기증하고 장묘문화 개선에 앞장서 달라."
1998년 8월 고(故) 최종현 SK그룹 회장은 폐암 투병 끝에 눈을 감으며 가족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화장을 꺼리던 당시 분위기에서 지도층 인사가 솔선수범하며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던 큰 뜻이 12년 만에 세종시에서 결실을 맺었다.
최 전 회장 유지에 따라 조성된 첨단 종합장례시설 '은하수공원'은 지난 12일 충남 연기군 남면 고정리에서 문을 열었다. SK그룹(회장 최태원)이 500억원을 들여 지어 무상 기부한 장례문화센터로, 장례식장·화장장·봉안당 등을 갖추고 있다. 한국토지주택공사가 SK그룹의 기부 시설을 중심으로 총 36만㎡ 부지에 잔디장·수목장·화초장 같은 자연장지(6만8000㎡) 등을 더했다. 세종시가 정식 출범하면 은하수공원 전체는 세종시에 기부채납될 예정이다.
22일 오전 찾아간 은하수공원 주차장에는 버스 10여대가 늘어선 가운데 조용한 분위기였다. 시설 안이 인파로 부산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의외로 조용했다. 화장장에 들어서자 그 이유를 금세 알 수 있었다. 깔끔하게 꾸며진 10개의 유족대기실 안에서 유족들이 각기 따로 대기하고 있어, 다른 화장시설에서와 같이 북적이거나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한쪽에선 버스에서 내린 관을 안내요원이 운구용 미니차량에 싣고 고별실로 이동하고 있었다. 고별실에서 유족들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애통해하며 고인과 마지막 작별하는 의식을 가졌다.
유족 전태광(54·서울 양천구)씨는 "최신 시설과 유족을 배려한 공간 배치가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화장장 안내를 맡은 안누리(23)씨는 "유족들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해 정숙한 가운데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꾸민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봉안시설에선 서울시설공단 추모공원건립단 직원 10여명이 시설을 꼼꼼히 살피며 사진을 찍는 등 벤치마킹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시설을 만들기 위해 SK그룹이 들인 정성은 각별했다. 최태원 회장이 직접 공사장을 찾아 꼼꼼히 살폈고, 공사를 맡은 SK건설 임원진도 수시로 현장을 챙겼다. SK건설은 "최 전 회장 유지를 받들어 설계부터 시공, 자재까지 애정을 쏟았다"고 말했다.
기업인의 기부로 탄생한 선진 장례시설은 보기 드문 사례다. 혐오시설로 외면받기 일쑤인 화장시설을 민·관·지역사회가 협력해 만든 것이어서 의미가 더 크다. 최 전 회장의 뜻이 뒤늦게 결실을 맺은 이유는 당초 SK그룹이 2001년 서울에 화장장 건립을 추진했지만 주민 반대로 무산되면서 세종시로 내려오게 된 속사정이 있다.
지상 3층 규모의 장례식장(1370㎡)은 접객실·빈소·안치실 등을 갖췄다. 화장장(3035㎡)에는 화장로 10기와 고별실, 유족대기실 등을 마련했다. 화장로는 자동화된 무공해 첨단시스템으로 분진·매연을 완벽히 처리해 무취(無臭)·무연(無煙)으로 가동된다.
납골시설인 '봉안당'은 2만여기 수용 규모로 제례실 및 야외 봉안시설을 갖췄다. 은하수공원의 특징은 화장된 유골을 인공시설이 아닌 자연 속에 안장하는 '자연장'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잔디장지의 경우 비석과 봉분이 없고 1기당 면적은 불과 0.36㎡(0.11평)에 불과하다. 수목장지(1만2327㎡)에는 추모목 1그루를 가족용으로 사용하는 가족목과, 여러 개인이 공동 사용하는 공동목이 있다. 장미나무를 활용한 화초장지도 만들어졌다. 공원에는 수목장 등 선진 장례문화를 소개하는 홍보관도 있다. 부인과 함께 홍보관 한쪽에 적힌 '이 세상에서의 소풍을 마치기 전 당신은 어떤 말을 남기시겠습니까'란 문구를 음미하던 이경래(65·대전 유성구)씨는 "화장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꿀 수 있도록 잘 꾸민 것 같다"고 말했다.
정순교 은하수공원관리사무소장은 "반경 2㎞ 안에 첨단 화장시설과 장례식장, 납골시설, 자연장지까지 함께 갖춘 곳은 국내에서 여기뿐"이라고 자랑했다.
이상창 은하수공원관리사무소 행정팀장은 "부산·울산 등 전국 각 지자체의 견학이 이어지고 있다"며 "모범적 장례문화를 선도하는 중심지가 되게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자료원 ; 조선일보 2010년 1월 25일 A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