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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절 결박(結縛)과 해탈(解脫)을 밝히다
❙ 원문
阿難白佛言: 「世尊. 如來雖說第二義門, 今觀世間解結之人, 若不知其所結之元, 我信是人終不能解. 世尊. 我及會中有學聲聞亦復如是, 從無始際與諸無明俱滅俱生, 雖得如是多聞善根名為出家, 猶隔日瘧. 唯願大慈哀愍淪溺. 今日身心云何是結? 從何名解? 亦令未來苦難衆生, 得免輪迴, 不落三有.」 作是語已, 普及大衆五體投地雨淚翹誠, 佇佛如來無上開示.
爾時, 世尊憐愍阿難及諸會中諸有學者, 亦為未來一切衆生為出世因 作將來眼, 以閻浮檀紫金光手摩阿難頂. 即時十方普佛世界六種振動, 微塵如來住世界者各有寶光從其頂出, 其光同時於彼世界來祇陀林灌如來頂, 是諸大衆得未曾有. 於是阿難及諸大衆, 俱聞十方微塵如來異口同音告阿難言: 「善哉, 阿難. 汝欲識知俱生無明, 使汝輪轉生死結根, 唯汝六根更無他物. 汝復欲知無上菩提, 令汝速證安樂解脫寂靜妙常, 亦汝六根更非他物.」
阿難雖聞如是法音心猶未明, 稽首白佛: 「云何令我生死輪迴 安樂妙常同是六根, 更非他物?」
佛告阿難: 「根塵同源, 縛脫無二, 識性虛妄猶如空花. 阿難. 由塵發知, 因根有相, 相見無性, 同於交蘆. 是故汝今, 知見立知, 即無明本. 知見無見, 斯即涅槃 無漏眞淨. 云何是中, 更容他物?」
아난백불언: 「세존. 여래수설제이의문, 금관세간해결지인, 약부지기소결지원, 아신시인종불능해. 세존. 아급회중유학성문역부여시, 종무시제여제무명구멸구생, 수득여시다문선근명위출가, 유격일학. 유원대자애민윤익. 금일신심운하시결? 종하명해? 역령미래고난중생, 득면윤회, 불락삼유.」 작시어이, 보급대중오체투지우루교성, 저불여래무상개시.
이시, 세존연민아난급제회중제유학자, 역위미래일체중생위출세인 작장래안, 이염부단자금광수마아난정. 즉시시방보불세계육종진동, 미진여래주세계자각유보광종기정출, 기광동시어피세계내기타림관여래정, 시제대중득미증유. 어시아난급제대중, 구문시방미진여래이구동음고아난언: 「선재, 아난. 여욕식지구생무명, 사여윤전생사결근, 유여육근갱무타물. 여부욕지무상보리, 역여속증안락해탈적정묘상, 역여육근갱비타물.」
아난수문여시법음심유미명, 계수백불: 「운하령아생사윤회 안락묘상동시육근, 갱비타물?」
불고아난: 「근진동원, 박탈무이, 식성허망유여공화. 아난. 유진발지, 인근유상, 상견무성, 동어교로. 시고여금, 지견입지, 즉무명본. 지견무견, 사즉열반무루진정. 운하시중, 갱용타물?」
❙ 해설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비록 두 번째의 결정적인 이치[第二義門]를 말씀하셨으나, 지금 세상에서 맺힌 매듭을 푸는 사람을 관찰해 보건데, 만약 그 매듭이 맺힌 근원을 알지 못하면 이 사람은 끝내 매듭을 풀지 못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를 비롯하여 이 모임에서 더 배울 것이 남아있는[有學] 성문들도 역시 이와 같아서, 처음이 없는 때로부터 온갖 무명과 더불어 생멸을 수없이 거듭하였으므로, 비록 이와 같이 다문(多聞)한 선근(善根)으로 인하여 출가를 하였으나 오히려 하루씩 걸러서 심하게 앓는 학질에 걸린 사람과 같습니다. 원하옵건대 대자비를 베푸시어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오늘의 이 몸과 마음이 어찌하여 이렇게 맺혔습니까? 어찌하면 매듭이 풀리겠습니까? 또한 미래에 고난을 받을 중생들로 하여금 윤회를 벗어나고 삼계(三界)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여 주소서.」 이렇게 말하고는 여러 대중들과 함께 오체를 투지하고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면서 정성을 드려서 부처님 여래의 위없는 가르침을 기다렸다.
그때 세존께서 아난을 비롯하여 이 모임에서 더 배울 것이 남아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또한 미래의 모든 중생들이 세간(世間)을 벗어나는 인연으로 삼고 또한 장래의 길잡이를 만드시기 위하여, 염부단(閻浮檀)같은 자금색의 빛나는 손으로 아난의 정수리를 어루만지셨다. 즉시 시방의 부처님세계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고, 그 세계에 계시는 수없이 많은 부처님의 정수리에서 보배로운 광명이 나왔고, 그 광명이 동시에 그 세계로부터 기타림으로 와서 여래의 정수리에 대이시니, 여러 대중들이 일찍이 없었던 일을 얻었다. 그때 아난과 대중들은 시방의 수없이 많은 여래께서 아난에게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아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함께 들었다. 「착하구나. 아난아. 네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무명[俱生無明]을 알고자 하는데, 이 무명이 너로 하여금 생사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도록 결박한 근본이며, 그것은 오직 너의 육근(六根)이며 다른 것이 아니다. 또한 네가 위없는 깨달음을 알고자 하는데, 너로 하여금 안락(安樂) 해탈(解脫) 적정(寂靜) 묘상(妙常)을 속히 증득하도록 하는 것도 역시 너의 육근이며 다른 것이 아니다.」
아난이 비록 이와 같은 법문을 들었으나 마음이 아직 분명하지 못하여, 머리를 조아리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어찌하여 저로 하여금 생사에 윤회하게 하는 것도 육근이고, 안락과 묘상을 얻게 하는 것도 모두 육근이며 다른 물건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육근(六根)과 육진(六塵)은 근원이 같고, 결박(結縛)과 해탈(解脫)이 둘이 아니므로, 식성(識性)이 허망하여 허공 꽃[空花]과 같으니라. 아난아. 육진으로 말미암아 아는 육식이 생기고, 육근으로 말미암아 육진의 모습이 있게 되었으니, 모습인 상[相]과 보고 아는 견[見]이 본래 독자성이 없어서, 마치 꼬여서 서로 의지하고 있는 갈대인 교로(交蘆)와 같으니라. 그러므로 네가 지금 견문각지(見聞覺知)에서 알음알이[知]를 세우면 곧 무명의 근본이 된다. 견문각지에서 알음알이[見]를 없애면 이것이 곧 열반이며 번뇌가 없는 참다운 청정인 것이다. 어떻게 그 가운데에 다시 다른 물건을 용납하겠느냐?」
❙ 보충
아난이 여섯번째 운다
아난은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도(道)를 구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하기 전에 반드시 두 가지를 먼저 알고 수행하여야 한다고 하셨다. 이것이 이결정의(二決定義)이다. ①인과는 동일하다. ②번뇌의 근본은 육근이다. 지금부터는 이결정의 중 육근(六根)에 대한 설명이다.
아난이 자신의 현재 공부 상태를 학질(瘧疾.말라리아)에 비유하고 있다[猶隔日瘧]. 학질에 걸리면 하루는 아프다가 그 다음날에는 멀쩡하다고 한다. 또 그 다음날에는 다시 아프다. 아플 때는 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떤다고 한다. 몸이 저절로 떨린다. 오한이 나서 아프다가 또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공부에 비유하면, 어떨 때는 다 아는 것 같고 어떨 때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은 그런 상태를 말하고 있다. 공부할 때는 아는 것 같지만 공부를 놓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다시 번뇌에 흔들리게 되어 고통속으로 들어간다. 즉, 불법(佛法)에 대하여 내가 뭘 아는 것도 같고 또 모르는 것도 같은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늘 공부하여야 한다.
그래서 아난이 부처님께 묻는다. 아난은 아라한이 못되었다. 유학성문(有學聲聞)은 아직 도를 얻지 못한 자로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을 말한다. 아라한이 되어야 무학(無學)이다. 원래는 진심 하나뿐인데, 공적영지할 따름인데, 눈도 없고 코도 없는데, 그동안 무명으로 인하여 업을 짓고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다. 어떻게 하면 원래의 진심(공적영지)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어떤 것이 맺힌 근본이 되고 또한 어떤 법에 의지해야만 그 맺힌 번뇌의 결박을 풀 수 있습니까?
육근(六根)이 번뇌의 근본이다
매듭을 풀기 위해서는 매듭이 맺힌 자리를 알아야 풀 수 있다. 의사가 환자를 고칠 때도 병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고칠 수 있다. 중생이 윤회하는 원인은 무명(無明) 때문이다. 무명의 원인은 육근이고 깨달음도 역시 육근에 의지한다. 안락(安樂.樂) 해탈(解脫.我) 적정(寂靜.淨) 묘상(妙相.常)은 열반사덕(涅槃四德)으로서 상락아정(常樂我淨)과 같은 말이다. 이것들이 모두 육근으로 인한 것이다. 육근에 의하여 번뇌가 생기지만 또한 육근을 의지하여 진심을 깨달을 수 있다. 육근으로 인하여 번뇌의 속박이 있고 또한 육근으로 말미암아 열반을 얻을 수 있다. 육근의 결박은 생사윤회(生死輪廻)이고 육근에서 벗어나는 것은 안락묘상(安樂妙常)이다.
보조국사 지눌(知訥)의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에는 인인지이도자(人因地而倒者) 인지이기(因地而起)라는 말이 있다. 땅에 넘어진 자, 그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 넘어지면 땅을 짚고 일어서서 다시 길을 가면 된다. 육근에 의하여 번뇌가 생기지만 또한 육근을 의지하여 진심을 깨달을 수 있다. 명상을 할 때 온갖 생각이 일어나서 힘들게 하지만, 그 생각이 진짜가 아니고 번뇌임을 알아차리면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육근(六根)과 장자(莊子)의 혼돈(混沌) 이야기
혼돈이란 단어는 장자(莊子)에 나온다. 남쪽의 왕인 숙(儵)과 북쪽의 왕인 홀(忽)이 중앙의 왕인 혼돈(混沌)의 땅에서 자주 만났다. 혼돈이 그들을 잘 대접해 주었고, 숙과 홀은 혼돈의 대접에 보답하려고 의논을 하였다. 사람들에게는 모두 7개의 구멍이 있는데, 혼돈은 구멍이 없으니 하루에 하나의 구멍을 뚫어주었다. 일곱째 되는 날 혼돈의 몸에 7개의 구멍이 뚫리며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다. 혼돈(混沌)은 하늘과 땅이 생기기 이전의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혼돈의 세상에는 주객(主客)도 미추(美醜)도 시비(是非)도 없다. 혼돈은 능엄경에서 말하는 상주진심(常住眞心)과 비슷한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구멍은 육근(六根)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이며 육근으로 인하여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근진동원(根塵同源) 박탈무이(縛脫無二)
주[主.六根]와 객[客.六塵]의 근원이 같다. 주가 없으면 객이 없고 객이 없으면 주가 없다. 주객이 사라진 자리가 진심(법신)이다. 여래장 묘진여성이다. 인식하는 주관이 사라지면 인식대상인 객관도 사라진다. 내(주관)가 사라지면 모든 경계(객관, 대상)는 동시에 사라진다. 주객이 사라지면 만상(萬象)은 하나로 화합하고 이것이 본래의 모습인 중도실상(中道實相)이다. 따라서 무자성(無自性)이고 상즉(相卽)이고 상조(相照)이다. 근(根)과 진(眞)은 원래 하나이다. 근이 없으면 진이 없고, 진이 없으면 근이 없다. 근과 진은 무자성(無自性)이다. 상호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근(根)과 진(塵)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육식(六識)이 생기는 것인데, 육식(六識)은 무자성인 근진(根塵)에 의하여 생겨난 것이므로 식(識)도 역시 허망한 것이다. 근진식(根塵識) 셋은 같은 뿌리이며 또한 같은 여래장성이다.
중생은 육근과 육진을 다르게 본다. 육근을 자기 자신[自]이라고 여기고 육진을 바깥 대상[他]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근과 진은 둘이 아니고 근원이 같다. 중생은 속박과 해탈을 다르다고 여기지만 둘이 아니다. 속박과 해탈은 다른 것 같지만 근원이 같기 때문에 둘이 아니다. 유마경의 핵심 사상인 불이법문(不二法門)과 같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고,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다. 법성게의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인 것이다. 법의 성품에서 보면 모든 존재가 다 동등하여 두 모습이 없다. 법성은 청정하여 모습이 없고 허공과 같다.
견성(見性)-(無明)-견정(見精)(육근)-(시각현상)-색공(色空)(육진)-안식(眼識)(육식)
우리가 '본다' 라고 하는 것은, 보는 견정이 대상인 색공과 마주쳐서 시각현상을 인식하면 시각현상을 아는 안식이 생긴다. 견정과 색공과 안식은 동시에 일어난다. 이러한 시각현상은 견성이 일으킨 착각일 뿐이다. 그 착각이 무명이다. 무명이 바로 주객으로 갈라지는 생각이다. 따라서 주객으로 갈라지는 착각만 하지 않으면 육근 육진 육식은 없고 본래 진심인 견성만 남는다. 견성은 모양이 없다. 공적(空寂)하다. 본래 없다.
주관(견정)(根)과 대상(색공)(塵)이 모두 견성(見性)에서 나왔다[同源]. 견성이 견정을 나툴 때 동시에 색공이 나온 것이다. 견정-색공-안식은 동시에 일어난다. 일어나는 자리는 견성이다. 안식은 주객을 두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시각현상은 견성이 일으킨 착각일 뿐이다. 결박[縛]은 견정과 색공을 통하여 나타난 시각현상을 아는 것으로서 우리의 현실을 말한다. 육근과 육진에 결박이 되어있는 상태이다. 눈만 뜨면 시각현상을 본다. 주객으로 갈라지는 착각(무명)만 없으면 견성만 남게 되는데 이것이 해탈[脫]이다. 견성은 모양이 없어 공적하다.
식성허망(識性虛妄) 유여공화(猶如空花)
분별심은 허망하여 허공 꽃과 같다. 식성(識性)은 앞의 칠처징심에서 말한 식심(識心)이고 망심(妄心)이고 분별심(分別心)이다. 성(性)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①본성(本性)은 순수하고 청정한 자리이고 ②습성(習性)은 순수하지 못한 망심이다. 육근 육진 육식이 모두 허망한 것이다. 모든 식(識)은 인연에 의하여 생기기 때문에 허망한 것이다[因緣成空]. 안식(眼識)은 아홉 가지 인연으로 생기므로 허망하다.
근진식(根塵識)은 교로(交蘆)와 같다
근(根)-진(塵)-식(識)은 서로 의존하여 존재한다. 육진(六塵)으로 말미암아 육식(六識)이 생기고[由塵發知], 육근(六根)으로 말미암아 육진(六塵)의 모습(相)이 있는 것이다[因根有相]. 육근 육진 육식은 상호의존 하므로 본래 독자성이 없어서 마치 꼬여서 서로 의지하고 있는 갈대인 교로(交蘆)와 같다. 초기경전 [갈대묶음의 경] (쌍윳따니까야 2-67)에는, 두 개의 갈대 묶음은 서로 의지하고 있을 때만 서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두 개의 갈대묶음에서 어느 하나를 떼어내면 다른 하나도 쓰러진다. 잡아함부(雜阿含部) 갈대경에는, 갈대 세 묶음을 빈 땅에 세우려고 할 때는 서로서로 의지해야 서 있을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如三蘆立於空地 展轉相依而得竪立]. 근진식(根塵識)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심은 청정하다
견문각지[知見]에서 내가 안다는 견해[知]를 세우면[知見立知] 즉, 분별심을 일으키면 이것이 바로 무명의 근본이다[即無明本]. 시각현상[知見]은 견성이 일으킨 착각이라고 알면 분별심이 없어진다[知見無見]. 이것이 바로 열반이다[斯即涅槃]. 그래서 금강경은 보살(菩薩)은 무아상무인상무중생상무수자상(無我相無人相無衆生相無壽者相)이라고 했다. 결박이나 해탈의 원인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육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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