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 부터 63년전인 1942년 양력 4월24일
봄 기운이 가득한 중국 산동성 제남시에서 한 사내
아이가 태어났다.
그 이름이 바로 훗날 불세출의 가수로 이름을 날리게된
가수 배호의 탄생이었다.
중국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3지대에서 광복군 위관급
장교로 독립운동을 하며 교민보호위원이던 부친 배국민선생과
모친 김금순여사 사이에서 3대독자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적부터 사내아이처럼 울음소리가 동네가 다 떠나갈
정도로 엄청 컸고 또 유난히 아이가 예쁘게 생겨서 동네
사람들의 귀여움을 한몸에 받았다고 한다.
1946년 해방후 인천수용소를 거쳐 임시정부에서 특별히
주선한 독립운동가출신 집안의 혜택으로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당시 창신동은 종로구에 속함) 적산가옥 81번지로
이주하게된다.
어릴적부터 배호는 노래에 대한 재주가 많았으며 주변에서
노래를 잘해서 동네 사람들의 귀여움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취미인 노래가 훗날 그의 인생을 가수의 길로 인도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많은 독립운동가 가족들이 기거 하였으며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다 1950년 창신초교 2학년 재학중에 6.25가 일어나자
그의 부친이 광복군 출신이라는 이유로 반동분자로 몰려 인민군의
추적을 피해 일제히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된다.
부산으로 내려간 배호는 이모 김금숙 여사가 운영하는 모자원에서
생활하게 되며 전쟁이 종지부를 찍자 다시 서울로 올라가 남은 학업을
마쳤으며 계속되는 집안의 어려움과 부친의 병사로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부산 삼성중 2학년을 마치고 그의 꿈인 음악가의 꿈을 실현 시키기 위해 외삼촌들이 있는 서울로 홀로 상경하게 된다.
우선 외가쪽의 외삼촌들을 살펴보자면
첫째 외삼촌은 경찰 경무국장을 역임한 김광보씨며
둘째 셋째 넷째 외삼촌들 모두 음악에 이름난 김광옥(중국 음대교수)
김광수(작곡가) 김광빈(작곡가/피아니스트)씨 들이었다.
서울로 올라와 외삼촌 댁에서 숙식하며 낮에는 학업에 밤에는
외삼촌들이 일하는 카바레에서 허드렛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
했으며 또 외삼촌들로 부터 음악기초공부를 배우며 그의 전공인
드럼을 익히게 된다.
그의 뛰어난 감각과 재능으로 드럼 솜씨는 금방 빛을 보게 되었고
1958년 그의 나이 16세에 드디어 대중 음악계에 밴드마스터로 입문을 하게된다.
16세에 소년 배호는 외삼촌들과 작곡가 김인배가 지휘하는
대중음악계 드럼 밴드마스터로 활동하게 된다.
이렇게 배호의 운명은 음악가의 길로 인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밴드마스터로 활동하면서 카바레 출연가수보다
더 많은 인기를 얻게되었고 시간이 날때마다 틈틈히
드럼을 익혀나갔으며 60년대 초반에 동두천 미8군 부대
에 들어가 음악을 익혔으며 1963년 약관의 나이 21세때
처음으로 막내외삼촌 김광빈씨로 부터
예명을 배호로 짓고 <굿바이> <사랑의 화살>을 최초로
취입하게 된다.(마라마운트)
그러나 이때 배호의 초기 목소리는 성숙된 저음이 발달되지 않은
애조띠고 허스키한 부분이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듬해 1964년에 김광빈 곡인 <두메 산골>과 그외 5곡을
정식데뷔곡을 톱힛트사에 취입하게 된다.
이때 배호의 음색은 앞써 발표된 2곡의 목소리보다 조금
성숙되어 가는 저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또한 이때 주변 음악인들의 도움으로 <배호와 그악단>이라는 12인조
악단을 구성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악단장이었던 배호는 악보를 통째로 읽지 못했다 하지만
목소리로 음을 흥얼거리면 악단을 지휘했으며 그의 연주실력은
어느 누구 보다도 더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밴드를 움직이면서 노래를 했기때문에 노래하는 밴드
마스터로 이름이 나기도 했다.
배호의 초기 노래들은 정통 트로트로 출발하지 않고 서구풍
발라드나 맘보풍 탱고풍의 곡들이었다.
밴드마스터로 주로 외국음악에 길들어졌고 미8군에서 외국 곡들을
즐겨 불렀기 때문에 트로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정식데뷔곡 <두메 산골>을 취입할때 악보를 보게 된 배호는
"삼촌 제가 이런 촌스런 노래를 왜 불러야 해요"
라는 불평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자 외삼촌은 인기가수로 크게 성공하려면 트로트를 해야해,
라며 배호를 크게 설득했다고 한다.
음악장르가 트로트와 거리가 멀었고 또한 당시 그의 목소리 등장은
가요계를 크게 놀라게 했다.
역대 선배가수들과는 전혀 색다른 창법의 등장으로 그만큼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1964년 정식 데뷔곡 <두메 산골> <그대 만이> <굿바이>
등을 발표하고 이듬해 1965년도에 같은 악단의 밴드마스터이자
작곡가인 김인배(前KBS악단장)씨 에게 영화 주제가 <황금의 눈>
<내몸에 손대지 마라> <잃어버린 세월>등을 지구레코드에서
취입하고 김강윤 감독의 영화 <황금의 눈>에 출연하게 된다.
*황금의 눈(김강윤 감독,1966년에 개봉됨)
그리고 1966년도에 신세기사에서 김기웅작곡의 영화주제가
<홍콩66번지>를 취입한다.
<홍콩66번지> 일명 <국경없는 밤거리>라는 희귀한 노래로
기존 배호의 노래와는 비교도 할수없는 서구적인 발랄한
스타일의 노래였다.
그러다 무리한 활동과 건강관리가 잘되지 않고 동료들과
식사도중에 먹은 돼지불고기를 먹고 만성 신장염이라는
큰 병을 얻게 되는 비운을 맞았다.
신장염으로 온몸이 퉁퉁 붓고 활동도 힘들어 졌으며 호홉이
곤란할 정도로 악화가 되어버렸다.
투병중 김인배씨의 소개로 음악 전문가들인 작사가 전우씨와
작곡가 라규호씨등을 만나 <누가 울어> <안개속으로 가버린 사랑>
<해당화 피는 마을>과 그외 작곡가 김강섭/진성화/고수마씨등을
만나 총 12곡의 노래를 뉴스타사에서 취입하게 된다.
투병중에 녹음된 노래라서 호홉이 짧고 음이 끊어지며 병색이
짙게 녹음이 되어 듣는이를 하여금 가슴이 짜릿하게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무명 가수의 그림자를 벗어나질 못했고
당시 뉴스타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그의 앨범이 크게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앞써 그가 발표했던 노래를 들어본 작곡가 배상태씨가
무명가수의 호소력짙고 폐부를 찌르는듯한 감정을 느끼고
자기가 작곡한 <돌아가는 삼각지> 악보를 가지고 배호가
일하는 을지로 카바레에 찾아갔으나 몸이 좋지 않은 배호가
밴드를 정리하고 청량리 자신의 집에서 요양을 하고 있다는
애길 듣고 그의 집으로 찾아가 <돌아가는 삼각지>를 취입을
권유하였다.
여러 의견이 충돌하였으나 배상태씨의 간절한 설득으로
악보를 보게된 배호는 이 노래는 내가 꼭 해보고 싶었던
노래라면서 취입하기로 결정하고 배상태씨의 기타반주에
맞춰서 신곡 <돌아가는 삼각지>를 단 몇시간 연습한뒤
당시 장충동 녹음실에서 힘들게 녹음을 했다고 한다.
투병중이라서 당시 녹음을 담당했던 녹음기사는 여러번
녹음을 껏다켰다 하면서 겨우 완성을 시켰다고 한다.
그런 관계로 호홉이 짧고 음이 끊어지며 병색이 더욱
짙고 깡패목소리 같다는 평을 받게되었다.
(67년 3월에 녹음을 하고 4월에 앨범이 발매된)
그러나 그의 비난은 오래가지 않았고 67년 6월부터
KBS대구방송을 시작으로 점점 히트하기 시작하면서
그해 전국집계 5개월 22주 연속 1위를 행운을 얻게
되었다.
무명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이제서야 큰 인기를 누리게
된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