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살리는 사람들
출애굽기 1장 15-22절, 사도행전 9장 36-42절
한 문 덕 목사
[부활절기를 보내며]
19세기 미국의 최고 시인으로 알려진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1882)의 시는 매우 아름다운 구절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쓰라린 아픔을 겪은 사람입니다. 1831년 24세의 나이로 매리 포터라는 여성과 결혼을 했는데, 이 여성은 출산을 앞두고 떠났던 여행에서 아이를 유산하고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8년의 세월 동안 고통 속에 보내다가 재혼을 하였는데, 이 여성마저도 어느 날 부엌에서 화재 사고를 당해 큰 화상을 입고 이튿날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 뒤 롱펠로우는 우울증에 빠졌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단테의 신곡을 번역하는데, 그 때까지 나온 번역 중 가장 훌륭한 번역 중에 하나가 됩니다.
롱펠로우가 75세가 되어 그의 임종이 가까운 어느 날 한 기자가 그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두 부인의 사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그토록 아름다운 시들을 쓸 수가 있었습니까?”
롱펠로우는 마당에 서 있는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소. 저 사과나무는 몹시 늙었지. 그러나 해마다 꽃이 피고 맛있는 열매가 달린다오. 해 마다 옛 가지에서 새 가지가 조금씩 나오기 때문이라오. 나는 나 자신을 늙은 가지라고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소. 나는 언제나 나를 새로운 가지라고 생각했소.”
롱펠로우가 아내를 잃은 아픔을 간직한 채 쓴 시가 그 유명한 인생찬가(A Psalm of Life)입니다. 몇 구절 여러분에게 읽어 드리겠습니다.
슬픈 목소리로 내게 말하지 말라.
인생은 다만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 중략 ~
인생은 현실! 인생은 진지한 것!
무덤이 삶의 목적지가 될 수는 없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영혼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인생이 가야 할 곳, 또한 가는 길은
향락도 아니요, 슬픔도 아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저마다 행하는 그것이 목적이며 길이다.
~중략~
인생이란 드넓은 싸움터!
노상에서 잠이 든다 하더라도
말 못하고 쫓기는 소같이 되지 말고
싸움에 뛰어드는 영웅이 되라.
아무리 즐거워도 ‘미래’를 믿지 마라.
죽은 ‘과거’는 그대로 묻어 버려라.
행동하라. 살아 있는 ‘현재’에 충실하라.
내 안에는 꿋꿋한 마음이, 머리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 중략 ~
자, 우리 모두 일어나 일하자!
어떤 운명에도 굴하지 않을 용기를 가지고
끊임없이 이루고 도전하면서
일하며 기다림을 배우자.
우리는 지금 부활 절기를 보내고 있고, 오늘은 부활절 셋째 주일입니다. 부활신앙은 그리스도교 탄생의 씨앗이고, 모든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어떤 운명에도 굴하지 않을 용기를 얻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 그저 생존을 위한 삶을 살다가 예수를 따라 나선 뒤, 인생이 진지한 것이며, 의미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인생은 그저 헛된 꿈이 아닙니다. 세상이 몰고 가는 대로 쫓겨 가는 것이 아니라, 싸움에 뛰어든 영웅처럼 끊임없이 이루고 도전하는 것이 곧 삶입니다. 십자가 죽음 앞에서 무력하던 제자들은 이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따라 새 힘을 얻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욥바에서의 베드로와 여제자 다비다]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베드로는 초대교회를 이끄는 수장으로서 사방을 두루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전합니다. 룻다라는 곳에서는 8년이나 중풍병으로 누워 있는 애니아를 고쳤는데, 마침 룻다로부터 16킬로미터 떨어진 욥바라는 곳에서도 와달라는 요청을 받게 됩니다. 욥바에 살고 있던 다비다라는 여성이 병이 들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여성은 선행과 구제 사업으로 자신의 인생 전부를 삼은 사람이었고, 이 여성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과부들이 이 여성을 그냥 보낼 수가 없어서 베드로를 불렀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욥바의 다락방에 도착해서 거기 있는 사람을 내보내고 하나님께 기도를 한 다음 다비다를 일으켜 세웁니다. 그러자 다비다는 다시 살아났고, 이 일로 주님을 믿은 사람이 더욱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베드로가 이 여인을 살릴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기도의 힘이었고, 또한 예수님께서 활동하셨을 때, 예수님과 함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던 예수님께 배운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이야기에서 주목해서 볼 부분이 있는데, 바로 다비다를 여제자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제자를 뜻하는 마테트리아는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서 여기에 단 한번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즉 다비다는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였다고 성서는 강력하게 증언하고 싶어하고, 여제자의 특징은 바로 선행과 구제 사업을 많이 하였다는 것입니다. 원문을 그대로 옮겨 보면, “그녀는 선행과 자신이 행한 자선으로 꽉 차 있었다.”입니다.
당시 과부들은 사회 속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비다는 이런 여성들의 후원자였고, 과부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즉 다비다는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는 여인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 준 사람이었고, 그래서 오늘 여인들은 다비다를 다시 살려내는데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즉 서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 교회가 어떻게 서로를 도우며 생명을 살리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해갔는지 잘 보여 줍니다. 당시 여인들은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이들이 아니었지만, 성경은 이들을 주목해서 보고 있습니다. 다비다를 살려 냄으로써 선행과 구제 사업이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예수께서 그리하셨듯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고통당하는 이들과 함께 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주는 자들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우리 생명사랑교회에 부임할 때, 공동의회를 앞둔 한 주 전에 공청회를 하였습니다. 그 때 제가 전 교인들 앞에서 제 목회 계획을 간단하게 보고하고, 교인들의 질문에 답변을 했습니다. 그 때 장모세 집사님께서 제게도 기회를 주시면서 교인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 달라고 해 주셨습니다. 그 때 제가 여러분에게 제 목회와 관련해서 두 가지를 부탁 드렸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진리를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가르치는 기회가 제게 왔을 때 저를 보내달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땅에서 어려움을 당하며 눈물로 지내는 분들을 위한 현장 예배에서 저를 설교자나 다른 일로 부르면 그 때에도 제가 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흔쾌히 허락해 주셨고, 그래서 지금 저는 전국 각지에서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갑니다. 오늘 오후에는 세월호 4주기 기억예배의 성찬 배찬 위원으로 갑니다. 지난 주 목요일에는 한신대 신학대학원 구약해석학세미나에 이영미 교수님께서 불러 주셔서 후배들과 함께 수업을 하였고, 다음 주일 오후에는 청주 북문 교회의 1일 교사수련회 강사로 가게 됩니다. 제가 가서 하는 모든 사역이 주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듣기 원하는 이들에게, 소망과 위로를 구하는 이들에게 힘이 되길 바랍니다.
[생명을 살리는 사람들]
삶의 의욕을 상실한 이들이 다시 일어서도록 힘을 불어넣어주고, 생명을 살리고, 희망을 되찾게 해 주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일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의무이자 사명임을 우리는 늘 자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바로 생명을 살리는 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서 본문도 생명을 살리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여러 면에서 서로 대치가 됩니다. 이집트 왕은 대제국의 왕족이요, 자유인이고 남성입니다. 반면에 산파들은 하층민을 상징하는 히브리인이요, 노예이고 여성입니다. 한쪽은 강자이며 다른 한쪽은 약자입니다.
힘 센 군주인 이집트 왕은 약자인 히브리 산파들에게 히브리 여인이 낳은 아이가 아들이거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아들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히브리 가족의 대를 끊으려는 이집트 왕의 의도를 잘 보여 주고 있는데, 히브리 산파는 왕보다도 하나님을 훨씬 더 경외하였기 때문에 남자 아이들을 살려 줍니다. 화가 난 이집트 왕은 자기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산파들을 꾸짖지만, 산파들은 임기응변의 말로 위기를 모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파라오는 훨씬 더 악랄한 계책을 마련하여 선포합니다.
오늘 본문은 생명을 죽이려는 자와 생명을 살리려는 자의 싸움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계속 이어지고, 큰 틀에서 출애굽기 전체의 주제이자, 사실은 구약성경 전체의 주제와 이어집니다. 즉 이스라엘은 “선과 생명”을 위하여 선택받은 자이고, 히브리의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는 분이시며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구약 본문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첫째 생명을 살리는 일에 매우 미약해 보이는 산파들이 큰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등극하여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자 히브리 백성과 이스라엘 자손은 큰 곤경에 처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불어나는 것을 두려워한 바로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 혹독하게 일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소용이 없자 이번에는 히브리 산파들을 시켜 사내아이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소용이 없자 사내아이는 모두 강물에 버리라는 끔찍한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과정에 반기를 들고 아이를 살리는 일에 모두 여성들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출애굽의 역사에서 그동안 모세를 떠올리고, 그를 영웅으로 높이 평가했지만, 사실 출애굽의 역사는 히브리 산파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미리암의 노래로 끝이 납니다(출애 1:15-15:21). 모세를 살리게 한 것도 이집트의 공주이고, 그를 먹이고 키운 것은 누나와 어머니였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바울의 활약을 주로 기억하지만, 오늘 읽은 것처럼 초기 기독교 역사에는 수많은 여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우리가 무심코 넘어갈 수 있지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는 손길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담임목사는 교회의 대표이고, 장로님들은 교인들의 대표가 되어서 외부 행사나 큰 일에는 언제나 목사와 장로들이 두각을 보일 수밖에 없지만, 한 교회가 세워지고 유지되고 발전하고 부흥하고 성숙하는 데는 언제나 교인 전체의 활동과 노력이 있습니다. 보이는 부분뿐만 아니라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늘 애쓰고 수고하는 손길들을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발견하는 두번째 깨달음은 히브리 산파들의 재치와 기지입니다. 산파들은 꾸짖는 파라오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히브리 여성들이 힘이 좋아 자신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애를 낳아 버린다고 하면서 이집트 왕과 맞서고 있습니다.
사실 산파는 생명이 잘 태어나도록 돕는 직업입니다. 그리고 한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만큼 고귀한 시간도 없을 것입니다. 살리는 직업인 산파에게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이집트 왕이 얼마나 잔학한 인간인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죽이려는 세력이 있고, 살리려는 세력이 있습니다. 정의 편에 서는 자도 있지만, 불의한 일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악을 행하는 이들의 모략은 참으로 치밀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대범함은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을 행하는 자들에 맞서 어떤 방식으로 싸워야 할 지 평소에 꾸준히 훈련을 해 두어야 합니다. 오늘 히브리 산파는 이것을 보여 줍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힘의 종류가 있습니다. 강하다고 해서 무조건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힘의 역학 관계는 매우 복잡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솝이야기 중에 해와 바람이 서로 내기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해와 바람이 서로 힘이 세다고 자랑하다가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자를 강자로 인정하는 데 합의합니다. 바람이 먼저 외투를 벗기기 위해 나그네를 향해 세차게 바람을 불어댔지만 그럴수록 나그네는 외투를 더욱 꽉 여몄고, 결국 바람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해는 자기 차례가 되자 나그네에게 따뜻한 볕을 내리 쬐었고, 이내 나그네는 땀을 뻘뻘 흘리며 외투를 벗습니다. 해가 이긴 것입니다.
바람은 강풍으로 옷을 벗길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했지만, 외투를 여미는 나그네의 저항을 생각하지도 못했고, 또 외투를 벗기는 다른 방법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세고 강하고 많고 높은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더 높이, 더 멀리, 더 세게 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인생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중국, 한국, 일본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는 우화 중 딸에게 가장 힘센 신랑을 구해 주려는 아빠 쥐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빠 쥐는 딸에게 강한 남편을 주려고 가장 힘이 세다는 해를 찾아 갑니다. 그러자 해가 구름에 비하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듭니다. 구름이 끼면 해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쥐는 그 말을 듣고 구름을 찾아가는데, 구름도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바람이 불면 자기는 휙 날아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바람을 찾아가 자기의 딸과 결혼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바람 역시 자기보다 더 강한 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바람은 벽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벽이 가로막고 있으면 바람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쥐는 다시 벽을 찾아가는데, 벽에게 뜻밖의 말을 듣습니다. 벽은 이 세상에서 쥐가 가장 무섭다는 것입니다. 쥐는 날카로운 이빨로 벽에 구멍을 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쥐는 큰 깨달음을 얻고 늠름한 청년 쥐에게 자기 딸을 시집보냅니다.
이집트 왕은 자신의 권력으로 히브리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모두 없앨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기의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될 것처럼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 산파의 재치와 기지, 담대함이 있었고, 모세의 부모처럼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아기 모세의 운명에 맡기면서 갈대상자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왕은 이스라엘 자손을 멸절시키려고 했지만 오히려 자신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됩니다.
1996년 목포에 살던 조호연 씨는 회사 직원들과 회식을 하고 2차로 신한비치호텔 나이트클럽에 가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서 바가지 요금으로 웨이터와 시비가 붙자, 호텔을 운영하던 조폭들이 조씨 일행을 무차별로 폭행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조호연 씨는 다음날 나이트클럽에 사과를 요구했지만, 나이트클럽 사장은 오히려 조폭을 데리고 조모씨 회사를 찾아가 깽판을 치고 위협을 합니다. 조호연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검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는데, 조폭들은 조씨의 동생을 납치하여 구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호연씨는 조폭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역 일간지였던 광주일보 하단에 대통령께 올리는 탄원서라며 5단짜리 광고를 게시하였습니다. 이어 메이저 신문들이 이 탄원서 광고 사건을 기사화 하고 방송국에서도 취재하고 방송을 하게 되었고, 이것을 본 김영삼 대통령은 내무부 장관과 경찰청장을 불러서 ‘나라꼴이 어떻게 되려느냐’고 격노하여, 경찰은 조직폭력배 소탕에 나서고, 일시적이었지만 목포는 조직폭력배가 없는 도시가 됩니다. 한 사람의 불굴의 정신이 잠시이지만 세상을 바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는 다른 관점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지닌 강점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삶의 중심을 잡고 삽니다.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세상의 위력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본의 힘, 권력의 힘만을 따를 지 모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과 정의를 동반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힘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부활의 소망으로 모든 죽음의 세력을 넘어 섭니다.
오늘 히브리 산파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근원이며, 생명을 유지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히브리 산파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들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십브라와 부아라는 이름을 명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들의 행적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생명을 죽이려는 바로 왕에게 맞선 이들이었고, 그래서 이후 사람들은 이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생명을 살리는 일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 역사에도 길이 남을 이름들이 있습니다.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 있고,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끝까지 독립 투쟁에 나선 이들이 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세상의 공의를 세우고 생명을 살리려는 사람들이 있어 왔습니다. 거대 권력이 행하는 부패에도 물들지 않고, 양심을 걸고 고발한 사람들도 있고, 이 땅의 민주화와 더 좋은 사회를 위해 자신의 일생을 아낌없이 바친 이들도 있습니다. 이번 주 목요일이 4.19 혁명 58주년이 되는데 여러분 시간 내셔서 4.19 민주묘지에도 다녀오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역사 속에서 옳음과 생명의 길을 걸어간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여야 하고, 우리 또한 그들의 뒤를 이어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 모범이 되는 인물들이 많지만 우리가 존경하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전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이었다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 산파는 힘없는 이들이었고, 제국의 왕 바로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목숨 부지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했기에 왕의 명령에 적극적으로 저항했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우리가 세상의 관점으로 인생을 살다보면 수많은 위기의 순간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할 수 있다면, 그래서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굴복할 수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바로 생명을 살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하여 왔습니다. 이 부활의 계절에 우리 생명사랑 교우들은 언제나 생명을 선택하며, 생명의 길로 가시길 기원 드립니다. 생명의 길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고 번성하는 여러분 되시길 기원합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가난한 과부들을 돌보며 선행과 구제에 힘썼던 다비다처럼 우리의 삶이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삶이 되게 하여 주소서. 누군가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어야 하듯이, 너무 많은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시고, 욕심과 탐욕으로 움켜 쥔 손이 되지 않게 하소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제국의 왕의 명령에도 저항할 줄 알았던 히브리 산파처럼 우리에게도 담대한 용기를 주셔서, 어둠의 세력 몰아내고, 따뜻하고 밝은 세상 만드는데 애쓰게 하여 주소서. 우리교회가 올 한해 생명을 살리고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도록 주여! 늘 우리 곁에서 도와주소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도 끝없이 밀려오는 일들을 처리하느라 많이 지쳤습니다. 마음의 여백이 사라진 자리에 때로 불평과 원망이 깃들고, 함께 도우며 살라고 보내 주신 이웃들이 귀찮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주일 아침, 주님 전에 나와 기도하고 찬양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느껴지고, 늘 우리 곁에 든든히 서 계신 당신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흔들릴 때라도 주님을 믿으니 우리는 걱정 없습니다. 오늘 주님 앞에 우리가 준비한 예물 드립니다. 일주일 동안 애쓰며 땀 흘리며 산 삶의 결실을 드립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 허락하신 것 감사하며 드립니다. 우리의 예물을 받으시고 온전히 주님만 영광 받으시옵소서. 이 예물들이 하나님 나라 선교 사역에 널리 널리 쓰이게 하여 주소서. 꼭 필요한 일들을 해내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새 희망을 전하는 도구가 되게 하여 주소서. 봄이 왔지만 여전히 추운 겨울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따뜻한 봄 소식이 되게 하소서. 다시 한번 모든 것이 당신께로부터 온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세상으로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생명의 영으로 충만하여 저 성문 밖으로 나아가십시오. 그 곳에 가셔서 나눔과 섬김과 돌봄을 통해 하나님의 샬롬을 이루어 나갑시다.
* 축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떠올라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 속에 있는 모든 어두움을 흩어 버리길,
십자가의 능력, 부활의 기쁨이 온 세상에 가득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고,
늘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