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번뇌(煩惱)
부산 사하구의 이층 단독 주택들이 밀집해 있는 골목으로 낡은 지프 한 대가 들어섰다. 한은 골목의 빈자리에 주차시키고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리던 그는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차가 정말 많군.”
주차를 시키기 위해 근처 골목을 두 바퀴나 돌고 난 다음이었다. 수원도 차가 많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대한민국 2위의 대 도시다웠다. 골목은 군데군데 켜져 있는 가로등으로 그리 어둡지 않았지만 그리 늦지 않은 시간인데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광주를 출발한 지 두 시간만에 도착한 곳이었다.
한이 걸음을 멈춘 것은 그가 차를 주차한 곳에서 200여 미터 떨어진 다음 블록의 단층 양옥 앞에서였다. 그가 초인종을 누르자 인터폰은 아무 말도 없었는데 찡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어딘가에 그를 지켜보고 있는 카메라가 있다는 뜻이었다.
거실로 들어선 그를 반기며 맞은 사람은 강재은 이었다. 검은 생머리를 묶지 않아서 더 숱이 많아 보이는 그녀는 신발을 벗는 한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가 찾아온 곳은 국정원의 부산 안가 중 한 곳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데도 금방 헤어진 사람을 만나는 기분이군요. 철대인 어르신!”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들은 한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별명은 어디서 들었소?
“석준씨요.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아주 어울리는 별명이에요. 그 별명을 듣는 순간 바로 당신이 떠오르는 게 그처럼 이미지와 딱 들어맞는 별명은 처음 들어봤어요.”
강재은의 말을 들어며 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중세 무림도 아니고 21세기에 별명이 철대인이라니, 이렇게 시대감각과 뒤떨어지는 별명을 가진 사람도 드물 것이다.
“식사했어요?”
강재은은 자신의 말에 더 이상 대응을 하지 않는 한을 보며 말했다. 그녀는 한과 농담을 나눌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아예 하지 않고 있었기에 그녀의 얼굴 어디에도 실망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당신도 하지 않았소?”
“저도 아직이에요.”
“늦었는데 왜?”
“당신이 안 먹을 것 같아서요. 밥 생각 같은 건 당신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을 테고, 엑셀을 밟기 바빴을 것이 뻔하니까.”
강재은은 웃으며 한을 부엌으로 이끌었다. 식탁은 보자기에 덮여 있었는데 보를 걷자 깔끔하게 차려져 있는 음식들이 드러났다.
자리에 앉아 묵묵히 수저를 놀리던 한이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하던 강재은에게 궁금한 눈빛을 던지며 물었다.
"이 음식들 당신이 한 거요?"
"왜요? 입에 맞지 않아요?"
그녀가 직접 한 음식이라는 말이다.
"아니, 맛있소. 그런데 언제 음식을 할 시간이 있었소? 하루 이틀 한 솜씨가 아닌데?"
"국정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저는 대학교 앞에서 혼자 자취를했어요. 어렸을 때도 돌아가신 어머니가 오랫동안 병을 앓을 셔서 제가 아버지 식사를 차려드려야 했죠."
그녀는 김치를 입 안에서 우물거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강재은도 의외로 소탈한 성품이어서 그렇게 격식을 차리지 않는 여자였다. 그리고 한을 상대하면서는 더욱 그렇게 되었다. 한은 과묵하고 무뚝뚝한 사람이어서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가 까다로운 예의범절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눈치 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식사를 끝내고 소파에 마주 앉은 그들 사이의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강재은의 분위가가 변했다. 도착하자마자 한이 강재은에게 이종하의 행방을 묻지 않은 것은 그녀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급박했다면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을 것이고, 그녀가 입을 열지 않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여는 것은 이곳에서 지금까지 고생해 온 그녀를 재촉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이종하가 배를 구한 듯해요."
"그렇다면 조만간 출발하겠군."
"그래요. 아마 내일이나 모레가 될 것 같아요."
"날짜가 특정될 수는 없는 거요."
"그건 어려워요. 저희가 아는 선장에게서 정보를 받고 있는데 그도 이종하가 밀항선을 구했다는 것 이외에는 구체적인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아요. 이종하가 밀항선을 구했다는 정보도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다고 해요. 이종하가 워낙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고 있으니까."
"고생했소."
"약속은 잊지 않은 거죠?"
한을 바라보는 강재은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전에 한이 그녀와 통화하며 했던 약속이다. 한은 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요."
"이종하를 잡으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준다고 했어요!"
"잊지 않았소."
한의 대답을 들은 강재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시간이 지나도 그 미소는 가실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녀의 미소를 보며 한이 얼마나 불안해하는 지는 전혀 관심없는 그녀였다.
"빗발이 점점 거세지네요!"
강재은은 인상을 찌그리며 말했다. 그녀는 쓰고 있던 우산을 접으며 재빨리 조수석에 올랐다. 한이 부산에 도착할 무렵 달을 삼켜 버렸던 짙은 먹구름은 품고 있던 물기를 털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거칠게 비를 뿌리고 있었다.
한은 윈도우 브러시를 작동시키며 차를 출발시켰다. 강재은은 이종하의 정보를 주고 있는 선장과 만날 약속을 잡아 놓았다. 그들은 그 약속 장소로 가는 길이었다.
한이 도착한 곳은 용두산 공원이 뒤로 보이는 언덕이었다. 고급 주택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었는데 뒤로 기반 작업이 끝나 가는 아파트 공사장이 있었다. 그들이 차를 세운 장소는 공사장과 3층 주택의 사이 공간이어서 주의해서 보지 않는다면 잘 눈에 띄지 않았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곳은 불야성을 방불케 하는 유흥가였다. 그러나 불과 한 블록떨어져 있는 주택가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빗줄기는 그들이 출발할 때보다 더 굵어져 있었다. 마치 양동이로 들이 붓는 듯해서 주택가는 물론이고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유흥가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늦는군요. 시간은 잘 지키는 사람인데"
강재은은 차의 대쉬 보드에 설치된 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녀에게서는 담담하지만 냉철한 빛이 묻어나고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안가에서 보았던 밝고 부드러운 모습은 사라지고 베테랑 정보원의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곧 올 거요."
한은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시트에 등을 기댔다. 그의 귓가로 40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향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승용차의 소음이 들리고 있었다. 한의 얼굴은 급한 기색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어서 그를 보는 강재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거의 포기했지만 정말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잠시 그 자세로 차장을 부술 듯이 두드려 대는 빗줄기를 바라보던 한이 허리를 세웠다. 동시에 그들이 탄 차의 옆에 회색의 중형 승용차가 다가와 섰다.
한과 강재은은 차에서 내려 승용차의 뒷좌석에 탔다. 아쉬운 쪽은 그들이었다.
정보를 주는 사람을 이 폭우 속에서 외문 밖에 없어 타기도 불편한 지프로 갈아타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등발 한 번 좋으시구만."
차에 타는 한을 본 운전석의 사내는 큰 입을 벌리고 웃으며 말했다. 딱 벌어진 어깨와 그 어깨를 덮은 숱이 많은 긴 머리. 그리고 시커멓게 탄 얼굴과 귀밑에서부터 턱을 휘어 감는 구레나룻이 산적을 연상시키는 40대 중반의 중년인이었다.
"윤 선장님, 남 얘기 하지 마세요."
강재은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흐흐흐, 어째 편드는 게 분위기가 묘하네."
음충맞은 웃음을 흘리며 생긴 것과 다르게 강재은에게 큰 눈으로 눈웃음을 치던 사내는 뒤로 몸을 돌리고 한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한이 그 손을 잡자 사내는 거칠게 손을 두어 번 흔들고 놓았다.
"윤백현이요."
"임한입니다."
"강 대리. 술 약속이 있어. 용건만 빨리 끝냅시다."
한과 악수를 마치자마자 사내는 강재은을 보며 말했다. 강재은이 고개를 끄덕인 후 한을 보았다. 윤백현에게 필요한 것을 물어보라는 뜻이다. 한이 윤백현의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배가 뜰 수 있습니까?"
"내일까지는 어려울 거요. 기상청에서 내일까지는 파도가 높을 것이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모레 오전부터는 배를 띄우는데 어려움이 없소."
"밀항선이 출항한다면 모레 저녁이 되겠군요. 그런데 이종하가 밀항선을 구했다는 것은 확실한 정봅니까?"
한의 물음에 윤백현은 기분이 나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곳에서 태어나 조각배부터 지금의 내배를 가질 때까지 바닷바람만 46년을 쐰 사람이요. 믿을 만한 사람에게서 들은 말이니 틀림없소."
"이종하가 구한 밀항선이 누구 소유의 배인지 확인은 되지 않습니까?"
한의 질문에 윤백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밀항에 대한 것은 배 타는 사람들 사이에도 극비 중의 극비요. 걸리면 작살나니까. 밀항선을 구하는 사람에 대한 소문은 나도 그 사람이 구한 밀항선이 누구 소유의 배인지는 당사자들 외에는 알 수 없소. 서로 인생을 걸고 하는 짓들이니 거래가 성사된 후에는 입에 자물쇠를 채우지. 밀항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라면 어느 정도 소문이 날 수도 있지만 시작 단계에서는 배 임자를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하오."
"윤 선장님이 볼 때 밀항선이 출발한다면 남항이나 북항 중 어느 항구가 되리라고 생각합니까?"
"임한 씨가 잘 몰라서 그러시는데 부산의 남항이든 북항이든 항구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고 밀항하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요. 위험 부담이 너무 커서 밀항하는 자들 중 그렇게 출발하는 자는 거의 없소. 선장이 해경에 밀항자를 넘길 작정을 하고 있다면 몰라도."
"왜 그렇습니까?"
"항구를 출발하는 모든 배는 출입항 신고소에 신고를 해야 합니다. 의무죠. 게다가 부산항을 출발하는 모든 배들은 항구를 벗어나기 전에 해경에 의해 철저한 검문을 받소. 출입항 신고소에 신고한 승선 인원과 물자 등이 실제로 일치하는지 철저하게 수색 당하오. 밀항자가 그들의 눈을 벗어날 가능성은 정말 희박하오. 선장으로선 너무 큰 모험이지."
한은 윤백현의 말을 들으며 일이 생각보다 복잡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이종하는 해경의 검문을 통과한 이후에 배를 탈 가능성이 높다는 말인데 그가 어떤 방법으로 밀항선을 타리라고 생각합니까?"
"연안 인근의 바다에서겠지. 쪽배를 타든 보트를 타든 검문을 지난 배와 접촉해 배를 탈 거요. 그리고 공해상으로 가서 일본에서 마중 나온 배로 갈아타겠지. 밀항자의 대부분이 이 방법을 사용하오. 가장 안전하니까."
윤백현의 말을 들은 한의 눈빛이 강해졌다.
"윤 선장님. 이 일은 며칠 이내로 결판이 날 겁니다. 이종하가 구한 배가 누구 소유의 배인지 알아봐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윤백현은 한의 흑백이 뚜렷한 두 눈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는 피식 웃으며 덥수룩한 구레나룻을 한번 쓸어내렸다.
"남한테 아쉬운 소리는 안 하게 생긴 양반한테 부탁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무거워지는구만. 알았소. 강 대리와의 인연이 하루 이틀이 아닌데 내가 강 대리 얼굴을 봐서라도 소홀할 수는 없지. 최선을 다하겠소. 하지만 일이 간단한 것이 아니니까 너무 기대는 하지마시구려."
"윤 선장님, 부탁해요."
강재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뻗어 곳곳이 굳은살이 박혀있는 윤백현의 큰 손을 잡았다. 윤백현도 웃으며 강재은의 손을 한번 힘 있게 잡았다가 놓았다.
경찰청은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에 있다. 경찰청은 본관과 남관 그리고 북관의 세 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수사국장실은 본관 건물의 5층에 있었다.
수사국장 유정기는 창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저녁부터 내리던 비는 막바지인 듯 많이 가늘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오후 세 시라는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고 바람도 세차게 불고 있어서 거리에는 우산 밑에 잔뜩 웅크리고 종종 걸음을 치는 몇 사람의 행인들이 보일 뿐이었다.
'이번에 조폭과 사채업자가 연계된 갈취(겁을 주어 금품을 빼앗는 행위)범들의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한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들의 피해가 너무크다.'
최근 경찰은 전 수사력을 동원해 갈취 사범 검거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악질적인 사채업자와 그들의 사주를 받는 조폭들의 폭력을 동원한 채권 회수는 사회의 고질병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 고질병이 불치병으로 발전하려고 하는 중이었다.
신용카드 발급 조건이 완화된 이후에 경제 사정이 악화되면서 무분별하게 발급된 카드는 카드빚을 진 사람들을 양산했다. 그들이 카드빚을 갚기 위해 사채를 이용하고 그것을 변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갈취 사건도 큰 폭으로 증가하여 통상적인 수사 활동만으로는 갈취범의 확산을 막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 사람들도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을 불법으로 감금하고 폭행하거나 산으로 끌고 가 생매장한다고 위협하면서 무덤을 파게 한 후 목만 내놓고 묻어버리는 극단적인 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을 용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채권 회수 절차를 규정한 법. 민법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번 갈취사범 검거 작전의 주된 목표는 그러한 사채업자와 조폭의 연계 고리를 끊고 채무자에 대한 그들의 불법 행위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다. 이번 작전의 취지는 검찰과 법원도 공감하는 바여서, 검거된 대부분의 피의자들에 대해 검찰과 법원도 구속영장의 발부를 적극적으로 행사하고 있었다.
"뚜우우, 뚜우우."
인터폰의 부저가 울리는 소리에 유정기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가 책상 위에 놓여진 인터폰의 통화 스위치를 누르자 부속실에 있는 최수현 경사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국장님, 수원동부경찰서 김현일 서장의 전화가 와 있습니다."
"김 서장이? 돌려주게."
"알겠습니다."
최 경사의 음성이 사라진 후 인터폰에서 김현일 서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국장님, 김현일입니다."
"음, 웬일인가?"
유정기는 어제 오전 수원동부경찰서에 들르긴 했지만 김현일 서장과 특별한 인간적 친분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업무적으로도 서장이 국장에게 직접 전화할 일은 많지 않다. 김현일이 그에게 전화할 일이 없는 것이다.
"임한 경장에 대한 일 때문에 전화 드렸습니다.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임 형사? 무슨 일이 있나?"
유정기의 질문에 김현일은 잠시 숨을 고르는 듯 말을 멈추었다가 입을 열었다.
심각한 어조였다.
"지금 임 형사는 일 때문에 부산에 출장 가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임 형사에 대한일로 전화가 왔습니다."
왠지 김현일이 뜸을 들이는 느낌이어서 유정기는 짜증이 났다.
"위에서? 무슨 일로?"
그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짜증을 느낀 듯 김현일의 음성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딴에는 중요한 일인 듯해서 전화를 했는데 잘못하면 역효과가 날 판이었다.
대답하는 그의 음성이 빨라졌다.
"임한 형사에 대한 인사이동을 요청하는 전화였습니다. 임한 경장을 포천 경찰서로 전출시키라는 부탁 전화였는데 거절하기 곤란한 곳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김현일의 대답을 들은 유정기의 미간에 내천자가 그려졌다. 그가 임한에게 수사국으로의 발령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하루 전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경찰서장이 거절하기 곤란할 정도라면 그보다도 윗선에서 전화가 왔다는 뜻이다.
"어디서 온 전화였나?"
"본청 차장님이셨습니다."
"신동우 차장님이?"
"그렇습니다."
"그분이 일개 형사의 인사 조치를 부탁하는 전화를 했다는 건가?"
유정기는 미간이 찌푸리며 믿기 어렵다는 듯 반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동우 차장은 경찰 내에 4명(2001년,2004년 현재는 5명)밖에 없는 치안정감으로 안팎으로 신망이 두터워 차기 경찰청장 1순위로 꼽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임한이라는 일선의 말단 형사를 알 리도 없거니와 일개 경장의 인사를 부탁하는 전화를 했다니 유정기로선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저도 전화를 받고 놀랐습니다. 국장님."
"흠"
"국장님이 오셨던 얘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거물들의 신경전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유정기는 김현일의 속이 들여다보여 혀를 찼다. 하지만 아랫사람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공연히 새우등 터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알았네. 내가 처리하지. 임형사에 대한 인사는 내가 연락할 때까지 보류하게."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유정기는 신동우 차장의 소재를 파악하고 바로 사무실을 나섰다.
14층의 차장실에서 집무를 보고 있던 신동우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유정기를 웃으며 맞았다.
"유국장이 무슨 바람이 불어내 사무실에 왕림하셨나?"
신동우의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보며 유정기는 간단하게 목례했다. 신동우는 소파로 자리를 옮긴 후 오른편에 유정기를 앉게 했다.
"유 국장, 무슨 일인데 그렇게 얼굴빛이 묘해?"
신동우는 175센티미터 정도의 보통 키였는데 본래 통뼈 소리를 들을 만큼 골격이 굵은데다가 경찰입문 후 수십 년 동안 취미 생활로 시작한 유도가 현재 6단인 고단자로 체구가 컸다. 체구만큼이나 속도 넓고 유머 감각도 있어서 후배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하기로 유명한 사람이기도 했다.
"차장님, 여쭤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날도 어둠침침한데 너무 진지하잖아! 뭐, 어쨌든 말해 보게나."
"차장님, 임한이라는 형사 때문에 수원 동부 경찰서의 김 서장에게 연락하셨습니까?"
"임한? 아! 그 친구. 그래. 전화했네. 포천으로 보내라고 했었지. 왜?"
유정기의 입에서 뜻밖의 얘기가 나와서인지 신동우의 얼굴엔 어리둥절한 기색이 엿보였다. 유정기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신동우의 표정에서 임한에 대해 중시하는 어떤 느낌도 받을 수 없었다. 그가 신동우를 알고 지낸 세월도 20년이 넘는다. 신동우는 그의 사법연수원 선배이기도 했다. 그의 표정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정도인 것이다.
"어디서 부탁을 받으신 겁니까?"
"그렇지 뭐. 아는 친군가?"
"예. 제가 수사국에 데려다 쓰려고 생각하고 있던 친구입니다. 이미 언질을 준 상태이기도 하구요."
"그래? 그런 줄 알았으면 김 서장에게 전화를 하기 전에 자네 의견을 들어 보았을 텐데. 하지만 그 친구 평이 별로 안 좋던데"
신동우가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그 말에 유정기의 표정도 어리둥절해졌다. 상식적으로 임한의 계급은 그가 설사 어떤 평판이 있던 간에 신동우의 귀에 들어갈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이요?"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지만 그 임한이라는 친구가 미군 기지를 한번 뒤집어엎은 적이 있는가 봐. 내게 부탁한 사람이 그 친구에 대해 아주 안 좋게 이야길 하더군. 그 친구를 좀 조용한 곳으로 보내서 민감한 시기가 지날 때까지 머무르게 할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고. 경찰 전체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는데 그 말을 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어서 무시하기는 어려웠네."
박송원의 사무실에서 박송원과 임한이 나누는 대화를 들은 그였다. 그는 신동우가 말한 미군 기지를 뒤집어엎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건 사정이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임경장이 꼭 잘못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사건이었고, 제가 알기로는 미군 쪽에서도 그 일에 대해서는 공개하지 않기로 한 걸로 압니다. 차장님. 그에 대한 인사를 누가 부탁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유 국장이라도 그건 곤란한데"
신동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신동우가 저렇게 말한다면 대답을 강요할 수는 없다. 유정기는 화제를 바꾸었다.
"차장님. 그 친구는 제가 불러 쓰기로 결정을 이미 내리고 통보까지 했습니다. 제가 데리고 있으면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철저하게 감독할 테니 그 부탁을 하셨다는 분에게는 잘 설명해 주십시오."
"쓸 만한 친구인가 본데 알았네. 우리 식구이고 유 국장이 데리고 있겠다고 그렇게 원하는 친구를 조직 밖의 사람이 원하는 대로 인사 조치할 수는 없는 일이지. 하지만 그 친구의 인사 조치를 부탁한 사람은 나도 무시하기는 곤란한 사람이야. 어물쩍거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뭉갤 수 있는 사람이 아닐세. 자네 핑계를 좀 댈 테니 그 친구를 자네 밑으로 빨리 데리고 와. 그리고 내 얼굴을 봐서라도 그 친구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잘 관리하게."
신동우는 경찰 전체를 통틀어 그 위로 몇 명이 없는 고위직 인사이고 그만한 힘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신동우가 무시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면 압력을 넣은 사람의 신분이 정말 심상치 않다는 말이다.
"알겠습니다."
유정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동우가 한의 인사 조치에 대해 고집을
부린다면 그도 방법이 없었다. 경찰은 계급이 지배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빛줄기가 가늘어지는 대신에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많이 약해져 있었다. 한은 거실에 앉아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간은 자정을 넘기고 있었고 비까지 내리고 있어서 창밖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하지만 그렇게 짙은 어둠도 한이 사물을 보는 것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한시간쯤 전 안방으로 들어가 누운 강재은의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한의 귓전을 간질였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듯 뒤척이는 기색이 느껴졌다. 강재은이 매력적인 여자라는 것은 사내라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여자가 불과 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나무문 하나를 두고 잠 못 이루며 뒤척이고 있었다.
한이 아무리 여자의 심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강재은의 행동에 묘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가 첩보원으로 교육받았고 도덕규범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현대 여성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여자가 남자와 단 둘이 있는 집안에서 문을 잠그지 않은 채 침상에 누워 잠 못 이루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한도 알고 있었다.
한은 눈을 깜박였다. 그는 부산에 와서 그녀를 만나며 자신을 향한 그녀의 감정을 눈치 챌 수 있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한의 시선이 천천히 자신의 두 손으로 향했다. 그의 손은 전체적으로 크고 마디가 굵었다. 손가락이 길었지만 운동을 오래한 사람치고는 굳은살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어두웠는데 그에게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표정이었다.
'이 전쟁이 본격화되면 나는 지금의 생활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손에 죽어간 다카하시를 생각하고 있었다. 다카하시가 대명회 일본 지회에 소속되었던 자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다카하시가 죽을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아니 과연 적이라는 이유로 자신에게 사람을 죽일 권리가 있을까?
그러나 그의 앞에 놓인 미래는 감상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다. 한순간의 감상으로 손에 사정을 둔다면 아마도 그는 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없는 처지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미래였다.
공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진 이상 회가 그를 반드시 제거할 대상으로 삼을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과 그들이 부딪친다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상대의 목숨을 노리게 될 것이다.
그의 고민은 깊었다. 회의 인물들이 그의 능력에 버금가는 초인들이 아니라면 그가 이처럼 번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체포해서 법정에 세울 수 있는 자들이었으면 그는 형사로 계속 남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들의 체포가 가능한 일인가?
한은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지며 고개를 저었다.
현재의 그가 갖고 있는 능력이라면 지난날 일본에서 만났던 두 명과 같은 고수들이 연수합격한다 해도 어렵지 않게 제압이 가능했다. 그러나 회에는 그런 자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수뇌부는 아직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그들의 능력은 추측 불가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한은 그의 앞에 펼쳐진 피할 수 없는 혈로를 보고 있었다. 그 피의 길에는 다카하시의 죽음과는 전혀 다른 죽음이 수없이 놓여져 있었다. 그 죽음의 몫은 타인의 것이 될 수도 있고 그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있었다.
그는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전장에 발을 들여놓기를 주저하지 않았지만 고민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가 민간이었다면 고민은 줄어들겠지만 그는 경찰, 그것도 형사였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는 출세나 권력, 부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의 능력으로 그러한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지금 그가 선택한 길보다 훨씬 수월할 것이다. 어느 누가 그가 쏟아 내는 섭혼대법과 천단 무상진기의 기세를 이겨낼 수 있겠는가. 원하는 모든 사람을 수족처럼 부릴 능력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그처럼 쉬운 길을 가려고 했다면 그는 경찰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직업을 그처럼 아끼고 사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평범한 경찰관으로 서민들의 옆에 남아 있고 싶었고, 그런 생활을 하다 정년퇴직을 하고 싶었다.
한은 두 손을 향했던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돌렸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그들의 행동은 이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속된 하부 조직원들조차 회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고 움직이는 자들이다. 그들의 목적을 알아내고 그들의 힘을 무력화해야 한다. 서울의 사대조직을 이미 장악한 그들이다. 그들의 뿌리를 뽑지 않는다면 밤의 세계를 아무리 쓸어 낸다 해도 그들은 언제든 잡초처럼 되살아 날 것이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쓸쓸함이 묻어나는 한숨이었다.
스님의 말씀이 옳았다. 나와 같은 능력을 가진 자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도 이 나라와 민생에 해가 되는 일을 하는 존재로. 천지의 이치는 정녕 스님의 말씀처럼 공평한 것인가? 그들과 나는 이미 공존할 수 없다. 그들 개개인의 능력은 결코 나에 못지않다. 그런데도 그들은 힘을 드러내지 않으려하고 은인자중한다.
한의 시선은 다시 그의 두 손을 향했다.
내게 전해진 힘은 그들을 막기 위한 것인가? 무상진결과 내 몸 안에 숨어있는 힘은 인위적인 것이다. 회의 고수들이 진결상의 무예를 알아보는 것과 동시에 강한 적의를 들어내는 것은 내게 진결을 전했던 자들이 예전부터 회와 적대했다는 것을 뜻한다. 초우서점의 아저씨는 무슨 생각으로 내게 진결을 전했을까? 내가 회와 부딪치게 될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건가? 그 어린 시절의 나를 보면서?
한의 눈빛은 점점 더 어둡게 가라앉아 갔다.
천단 무상의 경지는 아직 내게 요원하다. 무상강기와 무상검도의 한계를 아직 보완하지 못했다. 그들의 수뇌부에 있는 자들이 내 예상보다 뛰어나다면. 내가 쓰러지는 것은 정해진 결과다. 그러나 설사 쓰러진다 해도 나는 가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이 더 필요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내게 더 이상의 시간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에게 더 이상의 시간을 허락할 수 없다. 내가 다시 입산한다면 회는 그 세력을 더욱 공고하게 할 것이고 내가 무예를 완성할 동안 그들도 이 나라 안에서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세력을 완성할 것이다.
한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둠에 잠긴 그의 장대한 신형은 막강한 기세로 사방을 압도하고 있었다. 어둡게 가라앉았던 그의 두 눈이 강렬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리고 삶은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이다. 행동은 반드시 선택을 동반하는 것이고, 선택을 해야하는 순간이라면 그는 언제든 그것을 마다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비록 그것이 처절한 번뇌를 동반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피할 수 없다면 맞서 주겠다. 죽여야만 한다면 죽여주겠다. 그것이 이 나라를 위하고 민생을 위한 것이라면 결코 피하지 않겠다.
한은 신형을 돌렸다. 앞으로 자신의 행로에 대한 결심을 굳힌 그였지만 그의 어깨에 드리워진 무게가 가벼워진 것 같지는 않았다. 명분은 있었지만 지금은 중세가 아니었다. 그는 21세기 선진국 도약을 눈앞에 두고 있는 법치국가의 형사인 것이다.
뒤척이던 강재은은 어느 틈에 잠들었는지 그녀의 고른 숨소리가 적막한 집 안에 규칙적으로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