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철위부(鐵衛府)의 공자
이것은 매우 찬란하면서도 기이하게 생긴 병기였다.
이 병기는 넉 자(四尺) 길이에 자루는 눈부신 은빛인데 손잡이는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손잡이에는 손가락이 들어갈 다섯 개의 홈이 움푹움푹 파여져 있고 손잡이와 자루가 이어지는 곳에는 검은색 가죽으로 만든 장갑이 달려 있었다.
은빛 찬란한 자루 위쪽에는 다섯 가닥의 엄지손가락 굵기의 강철로 만들어진 칼날이 쫙 펼쳐진 다섯 손가락 모양으로 뻗쳐 올라갔다가 염통 모양의 호형(弧形)을 이룬 채 다시 자루의 뒷쪽으로 오므리라들고 있었다. 이리하여 일종의 갈퀴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그 다섯 대의 강철 칼날은 예리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겉으로 보기에는 다섯 자루의 잔뜩 구부러진 만도(彎刀)의 칼날처럼 생겨 푸르스름한 광채를 번뜩이고 있었다.
그 다섯 가닥의 강철 칼날이 오므라진 중앙으로 두 치 길이의 뾰족한 송곳이 흉측하게 뻗어 나와 있는데 마치 마귀 머리 위에 돋아난 뿔 같았다.
그 뿔처럼 생긴 송곳 양 옆으로 두 줄의 어린애 손바닥만 한 반달 모양의 구리로 만들어진 엷은 조각들이 매달려 있어 약간 움직이기만 하면 두 줄의 엷은 조각들이 서로 부딪쳐 맑고 카랑카랑한 음향을 내는 것이었다.
이 괴상하게 생긴 병기가 무엇인지 알 만한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의 온갖 병기 가운데 가장 위력적인 살인병기였으며 그 병기의 주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술이 고강하여 눈 깜짝할 시간 안에 수십 명의 무공이 뛰어난 고수들을 죽일 수 있었다.
이 병기는 불문(佛門)의 선장(禪杖)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다만 길이가 비교적 짧고 모양 역시 훨씬 흉악하게 생긴 점이 달랐다.
지금 그 병기는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윗쪽의 두 줄의 반달 모양으로 만들어진 엷은 조각들은 쨍그랑, 쨍그랑, 하는 소리를 내면서 마구 떨며 부딪치고 있었다.
한 쌍의 아름답고 길며 희디흰 손이 한 조각의 무명베에 기름을 묻혀서 그 병기를 꼼꼼히 닦고 있는 중이었다.
이 한 쌍의 길고 하얀 손은 한 젊은이의 것이었다. 그는 한 쌍의 바다와 같이 깊고 얼음과 같이 차갑고 꿈꾸듯이 그윽한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눈썹은 새까맣고 짙었으며 귀를 향해 뻗쳐 있고 코는 단정하게 우뚝 솟아 있었는데 붉은 입술에 하얀 치아가 대조되어 매우 준수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매번 입 언저리를 약간 움직일 때면 마치 한 가닥의 웃는 듯 마는 듯 한 신비로운 웃음이 입가로 번지곤 했다.
그는 보기 드문 미남자였다. 만약 그의 두 눈동자에서 싸늘하게 반짝이는 광채가 줄어든다면 온화하고 친절하다는 느낌을 안겨 줄 수 있으리라.
그는 몸에 한 벌의 백포(白袍)를 걸치고 있었다. 백포의 소맷자락에는 각기 한 송이의 금빛 단장화(斷腸花)가 수놓아져 있었다.
꽃 모양은 매우 독특했다. 여섯 잎의 가늘고 길면서 약간 말려 올라간 꽃잎에 아홉 개의 꽃술이 서로 교차되어 돋아나 있는 모양이었다.
그 새빨간 꽃무늬는 희디흰 소맷자락과 너무 선명하게 대조되어 보는 이의 눈을 시리게 할 것만 같았다.
단장화는 보기 드문 기화(奇花)인데 중원 일대에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고 다만 고비사막 깊숙한 바위틈에서 자라날 뿐이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이 꽃은 황혼 무렵에만 활짝 피고 한 방울의 눈물만 닿아도 금방 시들어 버린다고 한다.
젊은이의 머리카락은 숱이 많고 윤이 났는데 위로 빗어 올려져서 하나의 옥관(玉冠)으로 머리카락을 묶어 흐트러지지 않도록 했다.
허리에 하얀 비단 띠를 두르고 있는데 띠의 끝에는 하나의 자그마하면서도 운치가 있는 비취로 만들어진 좌불(坐佛)이 매달려 있었다.
이 비취로 만들어진 좌불은 그가 병기를 닦는 동작에 따라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백포의 아랫자락 역시 때때로 당겨지니 그가 신고 있는 한 쌍의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청단분저혜(靑緞分底鞋)가 얼핏얼핏 보였다가는 다시 가려지곤 했다.
젊은이의 풍도에는 의젓함, 우아함, 오만함, 용감함 등이 엿보였다. 그는 어떤 사람이든 위축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을 성싶었다.
그의 앞에 있으면 누구든지 태산에 짓눌리는 듯한 위압감을 받을 것이며 항거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이윽고 그는 손에 잡고 있던 병기를 내려놓으며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잠시 병기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나서 손뼉을 치며 나직이 불렀다.
『서운(舒雲).』
이 한 칸의 청아(淸雅)한 서재 밖에서 우렁차게 대답하는 소리와 함께 한 명의 가늘게 찢어진 눈, 들창코, 메기 같은 입을 가진 우람한 대한이 성큼성큼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 자는 그 젊은이를 보자 즉시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예를 차리더니 숨을 죽이고 눈을 아래로 내리감고 시립해 서면서 엄숙하고도 근엄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공자(公子), 천선장(天禪杖)을 손수 닦으셨습니까?』
젊은이는 껄껄 웃었다.
『하하하, 두 말 하면 잔소리지. 한 번도 남이 나의 병기를 만지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는 탁자 위에 놓인 그 한 자루의 싸늘한 내뿜고 있는 그 괴상하게 생긴 천선장이라는 병기를 손가락질해 보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떤가? 한 번 닦아주니 저 천선장은 금방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듯한 살기를 내뿜지 않는가?』
서운은 입을 헤벌쭉 벌리고 웃었다.
『정말 그렇습니다. 특히 천 제일의 고수이신 우리 공자님 마존(魔尊) 군유명(君惟明)의 손에 일단 들리게 되면…』
거기까지 말하던 서운이라고 불리던 대한은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문 밖에서 한 명의 이목이 청수한 청의동자가 자기로 만들어진 대야에 맑은 물을 담아서 들고 들어왔다.
마존 군유명이라는 그 젊은이는 자기 대야에 손을 씻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청의동자의 팔굽에 걸려 있는 두텁고 부드러운 수건에 물기를 깨끗이 닦아낸 이후 손을 내저어 청의동자가 물러나도록 했다.
비단 방석을 깔아 놓은 태사의(太師椅)에 앉으면서 군유명은 나직이 물었다.
『내일 우리들은 일찍 출발해야 하는데 준비는 모두 끝냈는가?』
서운은 재빨리 대답했다.
『공자께서는 안심하십시오. 모든 것은 이미 적절하게 매듭을 지어 놓고 출발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지요.』
군유명은 손으로 자기의 뺨을 슬슬 어루만지며 약간 감개에 젖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근년에 이르러 강호 도상(道上)의 도의가 갈수록 땅에 떨어지고 있네. 우리 철위부(鐵衛府)가 이토록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떤 일이든 간에 나의 흑우전(黑羽箭) 한 대를 보내면 깨끗이 해결을 볼 수가 있었네. 그러나 작년 가을부터 잇달아 네 번이나 구멍이 뚫렸으며 흑우전의 경고를 무시하였네. 그래서 반드시 우리 쪽 사람들이 달려가거나 혹은 내 스스로 친히 출마해야 일을 해결 짓는 경우가 생겼지. 서운, 이번에 내가 직접 출동하는 것은 강호에 마존 군유명의 무서움을 드러내기 위함도 있으나 그것 말고도 또 다른 뜻이 있는데 자네는 짐작이 가나?』
서운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건… 공자께서 명시(明示)해 주십시오.』
군유명은 냉소했다.
『매우 간단하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한 줄기 암류(暗流)가 이미 형성되어 있고, 그 한 줄기 우리를 반대하고 우리에게 타격을 주며 우리들의 일을 방해하려는 암류가 이미 형성되고 있는데 그 암흑 속의 세력을 파헤칠 결심이 서 있기 때문이네.』
서운은 놀라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를 반대하고 우리에게 타격을 주고 우리들의 일을 방해한다구요? 공자,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 누가 감히 우리 철위부의 비위를 거슬리려 한다는 것입니까? 더군다나 이 장안 및 섬진(陝晉) 일대의 팔천 리나 만 리 안에서 감히 준동하는 세력이 과연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군유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네. 바로 그런 뜻일세.』
서운은 침을 한 모금 삼키더니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은 혹시 약을 잘못 먹은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정신이 약간 흐려지거나… 그들도 마땅히 철위부의 명성과 위세가 반쪽 하늘을 진동시키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철위부는 숱한 피를 마시며 이곳에 뿌리를 박았으니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군유명은 빙그레 웃었다.
『서운, 자네는 너무 자신에 차 있군. 황궁이라 해도, 아니 높은 산과 깊은 바다마저도 옮겨지거나 사라지는데 철위부가 뭐가 그리 대단한가? 지나치게 상대방을 경시하면 못 쓰네. 반드시 하늘 밖에 하늘이 있고 사람 위에 사람이 있다는 진리를 명심해야 되네. 물론 철위부는 그렇게 쉽게 남에 의해 거꾸러지지 않을 것이네.』
서운은 눈썹을 찡그려 한 가닥의 깊고 구불구불한 주름을 잡으며 약간 불만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공자님, 내일 출타하게 되니 드리는 말씀이온데 저로서는 뭔가 개운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사실 남송성(南松城)에 있는 우리의 그 전장(錢莊)은 청표(靑豹) 양릉(楊陵이 주관하고 있고, 양릉은 우리 철위부에서 파견한 고수인데 어찌해서 하룻밤 사이에 다섯 명의 복면인에게 깨끗이 당했을까요? 전장 안팎이 수라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상대방의 내력에 대해서 전혀 실마리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양릉은 심계(心計)나 무공에 있어서 모두 다 상당히 노련하고 매섭지요. 이번에 그가 이런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다니, 실로 뜻밖입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군유명은 입을 열었다.
『너무 양릉을 탓하지 말게. 그는 이미 매우 괴로워하고 있네. 서운, 사람이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일세. 그런 점에 있어서는 나 역시 예외가 될 수는 없다네.』
서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자, 나는 이미 공자를 따른 지 십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동안 공자님의 수발을 들어왔지만 아직까지 공자가 실수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서쪽 땅에는 부처님이 있고 북쪽 땅에는 마(魔)가 있다(西土有佛, 北地出魔)'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자님은 바로 철위부의 주인이시고 북쪽 땅 수천수만 리를 통괄하시는 무림의 패주(覇主)이시니, 어떤 일이라 하더라도 공자는 틀림없이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군유명은 껄껄 웃었다.
『으하하, 자네는 강호에서 유행하고 있는 그와 같은 속담을 들먹이면서까지 나를 추켜올릴 필요는 없네. 이 군 아무개는 그와 같은 속담에 찬성할 수 없네. 물론 서쪽 땅에는 부처님이 있지. 하지만 북쪽 지방에 다만 나라는 한 사람의 마(魔)만 있는 것은 아니야. 무서운 인물들이 얼마든지 있네. 더군다나 나는 나 자신을 마라고 인정하지 않네. 모두 알다시피 군유명은 한 명의 수백여 개나 되는 상점을 지니고 있고 자본이 많은 상인이라네. 상업을 함에 있어서 다른 상인들과 다른 점은 바로 호위해 주는 호위무사를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뿐일세. 그리고 어떤 사문(邪門)이나 강호의 흑도와 백도의 인물들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네. 그밖에는 나이가 좀 젊다는 것 정도겠지. 나는 결코 마두(魔頭)가 아닐세. 그렇지 않은가, 서운?』
서운은 나직이 말했다.
『표면상으로는 그렇지요.』
군유명은 담담히 웃었다.
『나는 물론 우리 철위부의 우두머리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우리가 그저 주인과 사환의 관계로 보일 뿐이지.』
서운은 그 말을 받았다.
『그러나 공자, 그들은 이미 우리들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철위부가 어떤 곳인지 이미 눈치를 챈 듯하며 공자가 어떤 인물인지도 이미 잘 알고 있는 눈치입니다.』
군유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하는 수 없네. 그건 우리들이 날카로움을 감추지 못하고 밖으로 드러내기 때문이야.』
서운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장사를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의리와 신용을 지키고 강호의 친구들에게도 줄곧 의리를 내세워 자본을 끌어내어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온 힘을 다해서 지켜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공자, 상인들에게 우리가 무림(武林)에 몸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게 하고 강호의 친구들에게 우리가 큰 상업을 경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란 결코 쉽지 않았지요.』
군유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중의 신분을 지니기란 자고로 힘들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는 강호에서 빌어먹게 된다면 제대로 장사를 할 수가 없고, 정식으로 장사를 한다면 무림인의 대열에 끼기 힘들기 때문이지. 이와 같은 나날을 우리들은 십 년이나 견뎌냈네. 서운, 이 고충은 그야말로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서운은 미소를 지었다.
『상인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흥정을 하다가 금방 병기를 들고 칼로 치고 주먹을 내지르는 무림의 인물로 변하는 것은… 공자, 정녕 우리들의 생활은 얼마나 파란만장하고 신출귀몰한 것이었습니까?』
군유명은 입술을 핥았다.
『나는 종종 우리들이 모두 상계(商界)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약간 속박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무림에서 고수급에 든다는 자들이 무도장을 설치하고 제자를 기르는가 하면 표화물을 호송하여 그 대가를 받고 남의 재물을 노략질하는 따위의 짓거리를 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행위가 훨씬 현명하다고 느끼고 있네. 최소한 '군자는 올바른 방법으로 재물을 취한다'라는 속담에 부합되지 않는가?』
서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공자의 말씀이 옳습니다. 십 년 전, 공자가 우리같이 늙은 형제들을 데리고 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처음에는 이 고장 저 고장을 돌아다니면서 두둑한 사람들을 노략질하여 그 돈으로 점차 도박장과 술집을 개설하게 되었으며 도박장과 주루에서 기틀을 닦고 난 후에 잇달아 비단가게, 잡화상, 객주집, 전장 등으로 확장해 나갔으니…그야말로 옛날에 비해서는 훨씬 나아진 셈이죠. 그리고 심리적으로도 안정감과 만족감을 느끼게 되었지요.』
군유명은 손으로 팔걸이를 철컥, 소리가 나도록 한 번 치며 입을 열었다.
『자네들과 같은 살아 있는 보배들과 사귀기 위해서 나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남기신 상당한 가산을 모조리 탕진하고 말았네. 내가 만약에 일찌감치 머리를 좀 쓰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여전히 자네들을 데리고 남의 집이나 털고 강도질을 하는 등, 밑천이 들지 않는 장사를 하며 매일과 같이 남들과 싸우는가 하면 관부(官府)의 해포공문(海捕公文:도망친 범인을 잡으라고 각지에 돌리는 공문)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정말 견디기 어려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을 것이네. 다행히 오늘날 어느 정도의 기초를 닦게 되었기에 자네들 아홉 사람 역시 창자에 기름이 들어가 사람다운 모습을 하게 되었지. 어디 그 뿐인가? 큰 부자가 되지 않았는가?』
서운은 한 걸음 다가섰다.
『공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공자는 십칠, 팔 세에 불과한 소년이었지요. 그런데 공자는 처음 보기에는 전혀 강호에 몸담은 사람 같지는 않고 대갓집 도련님 같은 모습이었지요. 멀쑥한데다가 연약해 보여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았으며 단 일 장에 공자를 세 번 나뒹굴도록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지요.』
군유명은 빙긋 웃었다.
『그랬었나?』
서운은 겸연쩍게 웃었다.
『그 당시 우리들은 상당히 명성을 떨치고 있었지요. 공자의 모습은 매우 우리 눈에 거슬리더군요. 그 때 우리 몇 사람은 그 향선사(向善寺)의 후원에서 노략질을 할 모의를 하고 있었는데 공자께서는 뒷짐을 지고 서성거리며 고개마저 좌우로 흔들어대면서 다가왔지요. 그 모습이 아니꼽고 눈에 거슬리는 데다가 공자께서 고집을 피우고 떠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은 공자께서 일부러 훼방을 놓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면 우리들의 동정을 엿보려는 첩자일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리하여 염룡(焰龍) 방청곡(方靑谷)이 참지 못하고 가장 먼저 앞으로 달려 나가 공자에게 시비를 걸었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공자님께 대뜸 따귀 한 대를… 아! 방청곡은 그만 땅바닥에 나가떨어져서 세 바퀴나 뒹굴어야 했습니다!』
군유명은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그런 후에 자네들은 뻔뻔스럽게 나왔지. 네 명의 허우대가 우람한 사내들이 함께 덤벼들었는데 정말 대단히 사납더군. 손을 쓰자마자 나를 박살낼 것만 같았지.』
서운은 왼쪽 허리께를 어루만지며 아직도 그 아픔이 가셔지지 않은 듯한 투로 말했다.
『공자님, 그 때 공자님의 동작은 정말 신속하고도 절묘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우리 네 사람은 모두 크게 당하고 말았는데 나는 왼쪽 허리에 일격을 얻어맞고 꼭 죽는 줄만 알았습니다. 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매번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떨리고 간이 서늘해지면서 그만 그 때의 공포감을 다시 느끼며 전율을 금치 못하지요.』
군유명은 두 다리를 쭉 뻗고 다시 껄껄 웃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정말 기묘한 것일세. 서운, 내가 열다섯 살 때 이미 강호에서 가장 무예가 뛰어난 고수 한 사람을 죽인 적이 있네. 그 때 무림의 친구들은 나를 마동(魔童)이라고 불렀지. 자네들을 처음 만나게 됐을 때 내 나이 십칠 세였지. 나는 십칠 세 때만 해도 일종의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네. 그 생각이란 바로 일단 손을 썼다 하면 결코 상대방을 살려두지 않는다는 것이었지. 그러나 그 때 나는 자네들을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친구로 사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데 어울려 지금까지 함께 살아왔으며 기업의 발전에 있어서도 상부상조하며 마치 친형제나 혈육처럼 친밀하게 지내 왔는데 앞으로도 여전히 한평생 붙어 살아가야 할 것만 같네.』
서운은 기쁜 표정이 되었다.
『공자, 공자가 아니었더라면 아홉 명은 아마 그 누구도 오늘 이와 같이 호화롭게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군유명은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너무 겸손할 것은 없네. 오늘의 성공은 결코 나 혼자의 힘으로 이룩한 것이 아닐세. 자네들 모두 합심협력하고 빈틈없이 단결한 것이야말로 성공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지. 십이 년 동안 철위부의 위명은 떠오르는 태양처럼 솟아오르고 철위부의 구살(九煞)과 삼표(三豹), 그리고 일랑(一郞)의 성세(聲勢) 역시 강호를 주름잡게 되었네. 철위부의 여러 가지 장사와 매매 역시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교역량이 많아졌는데 그럴수록 모두들 솜씨를 더욱 잘 드러내더구먼. 나의 경우, 자네들을 만난 후에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면 바로 별명이 마동에서 마존으로 변한 것이네…』
서운은 나직하고 엄숙한 어조로 그 말을 받았다.
『공자님, 바깥에서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마존이라는 말을 들으면 공자님께서 사람을 파리처럼 죽이고 이리처럼 흉악할 뿐 아니라 음독하고 잔혹한 도배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기실 그들은 공자께서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대하는 수단이 달라지며 모든 사람에 대해서 똑같이 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철위부 안의 아래위 형제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 공자를 천하에서 으뜸가는 호인으로 손꼽지 않을 사람이 있습니까?』
군유명은 손을 저으며 웃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하게. 사실 나는 한 번도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하고 또 나를 어떻게 논하는지 개의치 않아 왔네. 마존이란 이 두 글자는 본래 결코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네. 그리해서 나는 좀더 우아한 명호를 가졌으면 하고 원했었네. 하지만 별명이란 남이 지어주는 것이지 내 스스로 짓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서운, 잊지 말게. 어떤 친구들은 나를 폭력적이고 호색적이며 종종 여자들을 건드리며 황제 늙은이처럼 후궁을 삼천 명이나 거느리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서운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군유명은 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몸을 일으키더니 서재 안에서 몇 걸음 서성였다. 그러다가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서운, 어제 남송성(南松城)에서 양릉이 파견해 온 사람의 전갈에서 얼마나 많은 금은을 손실 당했다고 하던가?』
서운은 안색을 가다듬었다.
『약탈당한 것은 황금 오천 냥에다 백은 삼만 냥, 그밖에 우리들이 신용 보증으로 환불해 주어야 할 은표(銀票) 십만 냥이라 하더군요!』
군유명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살상을 입은 자가 열한 명이라구?』
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곱 명이 죽고 네 명이 상처를 입었답니다.』
군유명은 다시 몇 걸음 서성이더니 평온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양릉의 짐작으로는 소현동(小玄洞)의 비각오호(飛角五豪)가 한 짓이라고 하던데?』
서운은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군유명은 서운을 바라보았다.
『무슨 근거로 그런 추측을 했을까?』
서운은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일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공자께서도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닷새 전의 그날 밤 약 삼경쯤 다섯 명의 복면인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부터 우리 남송성에 있는 열풍전장(悅豊錢莊)으로 잠입했다는군요. 그날 밤 양릉은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에…』
군유명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
『그런 것들을 나는 이미 전갈을 받아 알고 있네. 그 다섯 명의 복면인들의 체구가 우람하고 하나같이 미추도(尾鎚刀)를 사용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다섯 사람은 말 한 마디 뱉어내지 않았다고? 그들의 무공은 고강하면서 악랄하기 이를 데 없었고 동작은 매우 신속했으며 일을 처리하는 것이 매우 노련하고도 침착한데다가 심보가 악독하고 손 씀씀이가 매서웠다고? 서운, 이 몇 가지 점으로 미루어 양릉은 소현동의 비각오호의 짓이라고 판단했겠지? 그것 말고 다른 근거는 없는가?』
서운은 잠시 멈칫거리다가 나직이 말했다.
『공자, 그 당시 양릉은 노략질을 하러 온 그 사람들을 막아내지 못하고, 그 자신마저도 조그마한 상처를 입었지요. 그 일이 있은 후에 어떤 단서도 찾아내지 못하게 되자 부득이 남송성 부근의 강호 환경을 미루어서 그렇게 추측한 것 같습니다.』
군유명은 냉랭히 말했다.
『계속하게!』
서운은 다시 말을 이었다.
『양릉이 비각오호라고 추측하게 된 이유는 몇 가지가 있지요. 그 하나는 비각오호의 체구가 모두 우람하다는 것이고 다섯 명의 복면인이 생김새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둘째로는 그들 다섯 사람이 사용한 병기가 미추도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세 번째로는 비각오호가 근년에 매우 궁색한 형편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네 번째로 그들이 거처하는 소현동은 죽엽산(竹葉山)에 있는데 죽엽산은 남송성과 매우 가까워 채 이십 리도 되지 않아 탈취한 금은을 실어 나르기에 상당히 편리한 지점이라는 것이지요.』
군유명은 잠시 생각을 해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 일이 발생한 이후에 양릉은 친히 편지를 써서 나에게 보내 왔네. 그는 이 일 때문에 매우 부끄럽고 불안하다는 것이며 편지에서도 비각오호가 의심스럽다는 말을 언급했었는데 다만 의심하게 된 명확한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했네. 나의 생각으로 그는 그 스스로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고 생각되네.』
서운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양릉의 편지를 가지고 온 형제의 입으로부터 그와 같은 사실을 들었지요. 공자님, 그 당시 나 역시 이유가 약간 타당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감히 공자님께 알리지를 못했습니다. 만약 공자께서 하문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감히 먼저 들먹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은 장난이 아니고 잘못하면 비단 물건을 되찾아오지 못할 뿐 아니라 무단히 남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원한을 맺게 되기 때문에…』
군유명은 빙그레 웃으면서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그 말을 가로챘다.
『이번 일에 있어서 양릉은 정말 멍청하게 군 셈일세. 평소에 똑똑하고 수완이 좋기로 평판이 나 있는 그가 상대방에게 그토록 멍청하게 당해서 나가떨어진 것은 매우 뜻밖의 일이네. 서운, 자네는 이 가운에 어떤 미심쩍은 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서운은 잠시 망설였다.
『솔직히 말해서 공자님, 저는 이 가운데 어떤 내막이 있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다시 말을 한다면 나로서는 전적으로 양릉이 말하는 모든 경과를 믿습니다. 다만…노련한 양릉이 그렇게 나가떨어져서 비단 상대방 다섯 명의 노략질을 저지하기는커녕 상대방 쪽의 한 사람도 가로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쪽에 십여 명이나 살상을 입게 된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이삼 일이 지나도록 여전히 조금도 실마리도 찾아내지 못하다니… 양릉의 옛날 능력을 두고 말할 때 그가 이번에 보여준 태도는 아무래도 평소와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군유명은 천천히 말했다.
『그 누구도 평소와 다를 때가 있는 법일세. 서운. 양릉은 정말로 속수무책인가 보네. 그렇지 않을 때 그는 결코 편지를 보내 내가 친히 가서 이번 일을 처리해 달라고 요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네. 양릉에게는 틀림없이 그가 해결하기는 힘에 겨운 문제가 있는 것 같네. 자네도 알다시피 양릉은 웬만한 일이면 결코 남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사람일세.』
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믿습니다. 공자, 어떤 일은 편지에서 말하기 어렵지요. 어쩌면 우리들이 그곳으로 가서 경과를 좀 더 파악하면 새로운 단서를 찾을 수 있을는지도 모르지요.』
군유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쪼록 그렇게 되기를 바라네.』
서운은 나직이 말했다.
『공자님, 내일 아침에 나와 귀견수(鬼見愁) 하일랑(夏一郞)이 공자를 따라 철위부를 떠난다는 사실을 비(費) 소저도 아시는지요?』
서운의 입에서 '비 소저'라는 말이 떨어지자 군유명은 활짝 웃었다. 마치 한 알의 흥분제를 먹은 것처럼 매우 기분이 좋아져서는 두 눈에 형형히 광채를 빛내며 유쾌하게 말했다.
『그녀는 알고 있네. 내가 어디로 가겠다고 결정을 내렸을 적에는 즉시 그녀에게 알려주네.』
잔뜩 찌푸렸던 눈썹을 펴며 서운은 입을 열었다.
『공자, 정말이지 비 소저가 공자의 구원을 받아 이곳으로 온지도 근 오 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오 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며 정이 돈독해졌을 기나긴 시간입니다. 우리 모두 똑똑히 본 바가 있지만 공자께서는 매우 비 소저를 좋아하시며 비 소저 또한 공자님께 뜻을 두고 있는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지요. 공자께서 도적의 손에서 비 소저의 한 목숨을 구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공자의 준수하고 당당하신 모습과 총명하고 지혜로우신 점을 비 소저는 매우 흠모하고 있을 것입니다. 공자, 공자 역시 이제 스물일곱 살이 되었으니 모든 정신을 철위부 안팎의 일에만 쏟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륜지 대사에 대해서도 고려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군유명은 아래턱을 어루만지며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둘지 말게. 서운, 꼭 그렇게 될 것이네. 이번에 남송성으로 갔다가 온 후에 다시 별다른 사고가 없다면 자네들은 잔칫술 마실 것을 기다려도 좋을 게야.』
서운은 기뻐서 두 눈을 크게 뜨고 흥분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정말입니까, 공자?』
군유명은 환히 웃었다.
『물론. 그런 일을 어찌 장난처럼 말할 수가 있겠는가?』
서운은 손을 비비면서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빨리 갔다 빨리 돌아와야겠군요? 그래서 일찌감치 공자의 잔치를 준비해야겠습니다. 이것은 수월한 일이 아니지요. 우리들은 한 번 멋지게 잔치를 뻑적지근하게 차려야 할 것입니다. 철위부에서 십여 년 사는 동안 이 일이 가장 보람 있고 기쁜 일이 될 것입니다.』
군유명은 씨익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 자신도 이제는 약간 초조한 감이 없지 않아 있네. 자네가 아무리 서둔다고 하더라도 내 마음처럼 초조하지는 않을 것이네.』
서운은 커다란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됐습니다, 공자. 역시 공자는 수단이 좋군요. 정말 서토유불(西土有佛)입니다!』
군유명은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북지출마(北地出魔)라고들 말하는데 기실 나는 결코 출마(出魔)가 아니라 상상(湘湘) 그녀에게 푹 빠져서 입마(入魔)가 되었을 지경이라네.』
서운은 웃었다.
『비 소저 역시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여인으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공자, 자고로 '영웅에게 보검이 있어 조화를 이루고 재주 있는 사람에게는 미녀가 짝지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공자는 문무를 겸비하시고 의표 또한 당당하며 비 소저 역시도 온순하고 정숙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다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려한 용모를 지니고 계시지요. 공자와 비 소저는 그야말로 비익조, 연리지처럼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천생 연분입니다. 그야말로 하늘과 땅이 점지해준 한 쌍의 연인이라고 할 것입니다.』
군유명은 유쾌한 듯 말했다.
『고맙네. 서운, 자네의 그 입은 정말 듣기 좋은 말만 늘어놓는군…』
서운은 기억을 더듬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비 소저는 벼슬하는 집안의 출신이지만 애석하게도 운수가 좋지 못해서 그녀의 부친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그토록 공교롭게도 삼나한(三羅漢)이 거느린 몇 명 졸개들에 의해 흑마파(黑馬坡)에서 습격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공자께서 다행히 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길이었기에 삼나한의 손에서 비 소저의 목숨을 구출하였지요. 삼나한은 강호에서 열 번째 안에 드는 절세의 고수들이었지요. 그러나 공자께서는 그날 혼자 뛰어들어 비 소저를 위기에서 구출하셨지요. 이와 같은 용기는 결코 보통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군유명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기실 나는 역시 한 걸음 늦어서 상상(湘湘)의 전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하인들도 모조리 삼나한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네. 삼나한 가운데 둘째인 은나한(銀羅漢) 유달(劉達)은 상상에게 음심을 품고 그녀를 어떻게 하려고 했지. 다행히 그 유달이라는 녀석이 여색에 홀린 나머지 상상을 단칼에 죽이지 않았기에 나는 재빨리 달려가 그녀를 구출할 수 있었던 것일세.…』
서운은 나직하고 무거운 어조로 그 말을 받았다.
『공자, 비 소저의 아버님께서는 소문에 들으니까 벼슬이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에 이르렀다고 하더군요. 너무나 강직하고 소탈하며 매우 공정하기 때문에 소인배의 시기를 받아 누차 모함을 받은 끝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고 하더군요?』
군유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원래 관계(官界)에는 중상모략이 흔하여 전혀 도의와 감정을 논할 수 없다네. 상상의 부친은 의분을 느끼시고 의연히 은퇴를 하셨는데 뜻밖에도 그 자신은 액겁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만 역시 일반 강호의 도적에 의해서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서운은 나직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비 소저는 집안이 몰살당한 고통을 느꼈으나 공자의 깊고 달콤한 정에 점차 명랑해지셨지요.』
군유명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건 그렇게 이상하게 여길 점이 못 된다네. 자고로 남녀끼리 서로 좋아하는 애정은 종종 모든 관념을 바꿔 놓기도 한다네. 어떤 때는 달콤하고도 아름답고 유순하고 온화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용기를 얻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지없이 다정해진다네.』
서운은 무척 동감을 느끼는지 말했다.
『상황을 보면 비 소저는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군유명은 눈가에 웃음을 띠우고 말했다.
『나는 아직도 오 년 전의 그 황혼 무렵을 잊을 수 없네. 석양의 광채는 마치 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는데 흑마파 아래에서 삼나한이라는 작자들의 흉칙한 얼굴도 모두 저녁노을에 붉게 물들어 있었지. 그들은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 모습은 마치 귀신을 보는 듯했네. 그들은 끝내 나와 손을 쓰게 되었지…』
그는 빙그레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관을 보기 전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하더니만 그들이 바로 그러했네. 손을 쓴 결과 삼나한 가운데 은나한은 한 팔이 부러지고 철나한(鐵羅漢)은 오른쪽 눈이 멀었으며 그들의 큰형인 금나한(金羅漢) 역시 이마에 상처를 입게 되었지. 그들은 가르침을 받고서야 순순히 졸개들을 거두고 흑마파에서 물러갔으며 십여 구의 시체들과 많은 상자와 고리짝 등 물건 등을 남겼네. 뿐만 아니라 한 쌍의 눈물을 머금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눈동자도 거기 있었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더군. 물론 처량한 감이 서려 있긴 했지만…』
서운은 메기같은 커다란 입을 쩍 벌려 보이고 그 말을 이어받았다.
『그것 역시 연분이지요. 공자, 만약 공자가 조금이라도 늦게 혹은 좀더 일찍 흑마파를 지나치거나 또는 비 소저가 장안의 우리 철위부에서 머물기를 싫어했다면 공자와 비 소저의 인연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군유명은 서운을 바라보며 그 말을 받았다.
『당시 내가 상상을 구해온 후에 나는 결코 그녀를 이곳에 붙잡아둘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역시 그녀 스스로 요구를 한 것이네. 내가 생각해 보아도 괜찮을 것 같았지. 그녀의 고향인 천엽진(千葉鎭)은 말이 고향이지 가까운 피붙이는 없었네. 세상살이는 험악하고 막막하기만 한데 한 외로운 처녀가 혼자 낯설기만 한 곳으로 간다는 것도 역시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일이고 해서 그만 '좋은 사람이 되려면 끝까지 좋은 사람이 되고 부처님을 보내주려면 하늘까지 보내주라'는 속담에 부합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네…』
군유명은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아주 솔직하게 머물 것을 요청하였었지. 그런데 그와 같이 머물게 됨으로써 아, 사람이란 역시 감정의 동물이라고, 서운, 오 년이란 결코 짧은 시일이 아니었네. 나와 상상의 정감은 그렇게 해서 씨를 뿌리게 되었네. 그녀는 처세에 있어서 퍽이나 조리가 있었지. 그래서 기(琪) 누이 및 여러 사람들과 매우 잘 지내는 것이었네. 따라서 나는 자네들 역시 반드시 반대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일세. 그렇지 않은가?』
서운은 재빨리 대답했다.
『어찌 반대를 하겠습니까. 그야말로 대찬성이었죠!』
군유명은 껄껄 웃었다.
『하하, 좋아. 그 때 내 자네에게 석 잔의 술을 올리도록 하지!』
서운은 약간 허리를 굽혀 보였다.
『공자께서 어여삐 보아주시니 고맙습니다.』
군유명은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가 정히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 때 서재의 문 밖에서 어느덧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틀림없이 예의를 알고 퍽이나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군유명은 나직하고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누구냐?』
문이 열렸다. 그것도 살그머니 열려진 것이었다.
문이 열려지는 그 찰나 이 서재는 갑자기 훨씬 밝아진 것 같았다. 날씬한 모습의 그림자가 그토록 아름답게 사뿐사뿐 걸어 들어온 것이었다.
침을 삼키게 만드는 탐스러운 몸매에 수려하고 간드러진 얼굴은 마치 한 송이의 막 피어나려는 신선한 꽃과 같았다.
아니, 찬란한 이슬방울을 머금고 있는 신선한 꽃송이 같았다.
십칠, 팔 세의 처녀인데 눈썹 가와 입가가 어렴풋이 군유명을 닮아 있는 것 같았다.
이 소녀를 보자 군유명은 사랑과 연민을 함께 느끼는 듯 마주 나아가 그녀의 조그만 손을 붙잡으면서 온화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기(琪) 누이, 너는 안루(雁樓)에서 너의 비(費) 언니를 상대로 바둑을 두고 있지 않았느냐? 어찌해서 이곳으로 왔느냐? 무슨 볼일이라도 있느냐?』
한편의 서운 역시 공경하게 맞았다.
『둘째 소저.』
아름답고 유순해 보이는 이 처녀는 군유명의 유일한 피붙이였다.
그녀의 이름은 군기(君琪)라고 했으며 군유명의 친누이동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군유명은 어릴적부터 그녀에 대해서 여러모로 사랑하고 보살펴 주는 등 마치 손에 든 구슬처럼 아껴주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군유명은 비단 한 명의 오라버니일 뿐만 아니라 자상한 어머니요, 엄격한 부친이기도 하였다.
실로 군유명은 누이동생을 알뜰하게 돌보아 주었던 것이다.
군기는 옆에 있는 서운에게 고개를 약간 끄덕여 보였다. 그녀는 애써 기뻐하는 모양을 지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누가 보더라도 역시 그녀의 표정이 굳어져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버들잎 같은 눈썹도 결코 그 어색한 웃음에 의해 펴지지 않았고 두 눈동자의 우울한 빛 역시 그녀의 입 언저리에 웃음이 드리워진다고 해서 가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마치 한 가닥의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우수와 한 조각의 말로 전할 수 없는 처량함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한 가닥의 놀람과 공포, 그리고 검은 안개가 그녀의 마음을 내리누르고 있어서 언제나 명랑하고 활발하던 처녀가 이 때 만큼은 침묵과 쓸쓸한 태도를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재빨리 군유명은 그 누이동생의 이와 같이 평소와 다른 표정과 태도를 읽었다.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만 아침나절에 그녀는 안루에서 바둑을 두게 되었을 적에는 상당히 정상적이었으며 어떤 잘못된 점도 발견할 수가 없었는데 어떻게 해서 잠시 동안에 이 모양이 되었을까?
군기는 고개를 숙이며 나직하고도 힘없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제가…오라버니와 몇 마디 말씀을 나눌 수가 있을까요?』
군유명은 의혹에 찬 시선으로 누이동생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너는 언제나 할 말이 있으면 털어 놓는 성격이 아니냐? 오늘은 어째서 깍듯이 예를 차리느냐? 말해 봐라. 누이야, 네가 어떠한 생각을 하든 기탄없이 말해라.』
잠시 망설이던 군기의 입술이 약간 꿈틀거리는 것 같았으나 소리는 내지 않았고 눈초리는 거의 알아차리기 어렵게 한쪽에 엄숙히 서 있는 서운에게 슬쩍 던져지는 것 같았다.
군유명은 알았다는 듯이 빙그레 웃고는 즉시 입을 열었다.
『서운, 자네는 잠시 나가 있게나.』
서운은 허리를 굽히고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한 후 경쾌하게 물러갔으며 서재에서 나갈 때는 문까지 꼭 닫아주었다.
군유명은 태사의에 앉으면서 웃었다.
『얘기해 봐라, 너에게 무슨 걱정이라도 있느냐?』
첫댓글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