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배사 창원지회에서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읽기 6회차를 진행하였습니다.
제가 게을러 포스팅이 늦었습니다.
■ 일시 : 2024. 2. 20 화요일 PM.7:00
■ 장소 : 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 노량관
■ 읽은 부분 : 이충무공전서 2권 처음 ~ 123쪽.( 이충무공전서 권5. 난중일기1 - 임진년, 계사년 일기)
■ 참석자 : 내이포판옥선, 동자갑선, 상유, 백의종군로악양, 손자병법, 진해현감, 웅천현감, 홍패, 남포, 합포 총 10명
■ 다음 모임 안내 : 2024. 3. 19 화요일 PM 6:30
■ 장소 : 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
■ 읽어올 분량 :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권 6 ( 2권 126쪽~236쪽 ) 난중일기 2(갑오년, 을미년 일기)
■ 가까운 지역에 계시는 다른 지회 분들도 참석하시고 싶으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은 일기를 많이 썼다고 합니다. 난중잡록과 쇄미록을 예로 들 수 있는데 그 외에도 많은 기록이 남아있답니다. 난중일기를 쓴 이순신 장군도 당시의 분위기에 따라 기록을 남겼으므로 지식인으로 볼 수 있으며 문(文)의 수준이 매우 높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조경남의 난중잡록 -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조경남이 선조 15년(1582년) 12월부터 인조 15년(1637년)까지 약 57년간 국내외에서 일어난 주요한 사건들을 일기체의 형식으로 기록하여 남긴 기록물. 그 중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두 차례 전화가 책의 주요 기록을 차지하기 때문에 난중잡록이라 이름붙인 것.
▪오희문의 쇄미록 - 조선시대 선비 오희문이 1591년(선조24) 11월 27일부터 피난생활을 시작하여 한양으로 돌아온 다음날인 1601년 2월 27일까지 만9년 3개월간 임진. 정유 양란을 피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지내던 일을 기록한 일기. 주된 내용은 임진왜란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난을 피해 도망 다니던 고생담. 이 과정에서 민중의 삶이 매우 생생하게 묘사되어 생활사, 일상사, 풍속사, 사회경제사 연구에 꼭 필요한 자료가 되며, 당시 사회상을 알 수 있지요.
- 오희문은 학문에 뛰어났으나, 과거급제를 못해 정식으로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의 아들 오윤겸은 인조 때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손자인 오달제는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 청나라까지 끌려가 죽음을 당한 삼학사(三學士)가운데 한 사람이다.
■ 난중일기를 쉽게 이해하며 읽는 방법을 웅천현감님께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 시대적 흐름이나 배경을 이해해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2) 난중일기에는 주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가 많이 수록되어 있으므로 등장인물과의 관계와 대화 내용, 등장인물의 만남과 헤어짐을 연결하며 읽어보라.
예 > 임진년 2월 14일 : 아산(어머님)문안차 나장 2명을 내보냈다 ⇨ 3월 4일 : 아산에 문안 갔던 나장이 돌아왔다. 어머님이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다행다행이다.
(3) 시기별로 주제를 파악하며 읽으면 쉽다.
예: 임진년 1월 ~ 4월까지는 전쟁준비. 군사와 무기 준비시킴
계사년 2월~4월초 : 웅천에 있는 왜적과 대결한 시기
(4) 용어의 뜻을 알고 읽어라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券5, 난중일기1(임진년, 계사년)
(2권 처음 ~ 123쪽))
난중일기(亂中日記)
-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이 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간의 군중 생활을 직접 기록한 진중 일기이다
현재 7책 205매가 전해오며 충청남도 아산시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임진왜란 시기의 군사, 전쟁사 연구의 결정적 사료로 그 가치가 인정되어,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다 또 일기의 역사적 배경으로서 임진왜란이라는 세계사적 의미가 내포된 기록물로 인정받아 2013년 6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정유일기는 두 책이 있고, 8월초 4일부터 초8일까지의 일기는 중복되어 있다.
이순신의 친필일기와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내용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이충무공전서』편찬자가 친필일기내용을 정자로 옮겨 판각에 올릴 때, 자기들의 주관적 의견으로 많은 내용을 생략했기 때문이다. ⇨ 이충무공전서에 생략된 난중일기 친필본 부분은 ( )표시 안에 기록해 두었으니 참고하시면 됩니다. 이순신 장군은 날씨에 대해 엄청 꼼꼼하게 기록했는데 이충무공전서에서는 날씨 부분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해 아주 간단하게 생략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하네요. 수군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옮겨서 생긴 결과라고 합니다.
또 『이충무공전서』에는 수록되어 있는데, 친필일기 중에는 언제 잃어버렸는지 알 수 없으나, 없어지고 보이지 않는 부분들도 있다. 예를 들면, ①임진년 정월 초1일부터 4월22일까지의 부분 ②을미년 1년 동안의 부분 ③무술년 10월 초8일부터 11월 17일까지의 부분들이다. 무술년의 그 부분은 『재조번방지초』에 수록되어 있다. 이충무공전서에만 일기가 실린 부분을 볼 때 원본이 더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기장 표제 | 매수 | 내용 |
壬辰日記 | 27 | 임진5월1일~4일, 5월 29일~6월10일, 8월24일~28일 계사2월2일~3월22일 |
癸巳 | 30 | 계사 5월1일~9월15일 |
日記 甲午年 | 52 | 갑오 정월1일~11월28일 |
丙申日記 | 41 | 병신 정월1일~10월11일 |
丁酉日記 | 27 | 정유4월1일~10월8일 |
(丁酉) | 20 | 정유 8월4일~무술 정월4일 |
日記 戊戌 | 8 | 무술 9월15일~10월7일 |
합계 | 205 |
- 출전(出典) : 이충무공전서 2. 권5 <참고 1>
난중일기(亂中日記) 1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 이순신48세
<1월>
임진년 1~4월 일기는 친필일기가 남아있지 않고, 『이충무공전서』에 전사(轉寫)된 내용만 남아있다.
1일 :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우신)과 조카 봉과 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님天只을 떠나서 두 번이나 남쪽 지방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포를 이길 길이 없다. 병사의 군관 이경신이 병사의 편지와 설 선물과 또 장전과 편전 등 여러 가지 물건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 전라좌수영과 돌산도 사이에 쇠사슬을 설치하기 위한 작업에 대한 기록을 남김
11일 : 이봉수가 선생원 돌 뜨는 데를 가보고 와서 보고하되, “벌써 큰 돌 17덩어리에 구멍을 뚫었다.”라도 했다. 서문 밖 호자가 네 발 쯤 무너졌다.
16일 : ...방답의 변선 군관과 색리가 병선을 수선하지 않았으므로 장을 때렸다. 우후와 가수도 역시 제대로 단속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해괴하기 이를 데 없다. 자기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돌아보지 않으니 앞날의 일도 역시 짐작하겠다.성 밑에 사는 토병 박몽세가 석수로서 선생원에 있는, 쇠사슬에 사용할 돌을 뜨는 곳에 가서 사방의 이웃에 있는 개에게까지 피해를 끼쳤으므로 장 80대를 때렸다.
17일 : 맑음. 춥기가 한겨울과 같다. 아침에 순찰사(이광)과 남원 반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
초2일 – 나라의 제삿날(명종 비 인순왕후 심씨의 돌아가신 날)이라 사무를 보지 않았다.
23일 – 둘째 형님(요신)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24일 – 맏형 (희신)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 나라의 제삿날 : 왕이나 왕비, 대비가 사망해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는 날. 관리들이 나라 제삿날에는 출근을 하지 않거나 사무를 보지 않았다. 술과 고기를 마시고 먹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들어서도 안 되는 날.
사무를 보지 않았다. : 부좌(不坐 좌기하지 않았다.)의 좌기는 공식적인 업무 장소 즉, 동헌과 같은 곳에 나가 하급관리들을 모아놓고 정식 절차를 밟아 사무를 보는 것 혹은 일상 근무를 뜻하는 용어다. (난중일기/박종평 역/글항아리 24쪽 참고)
<용어 해설>
- 어머님天只 : ‘천지天只’는 어머니를 높여서 부르는 말
- 남중南中 : 남쪽 지방
- 병사兵使 :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약칭
- 장전長箭 : 철촉이 있는 전투용 화살의 일종으로 화살의 무게는 1냥(37.5g)
- 편전片箭 : 속칭 ‘애기살’, 길이가 매우 짧아 촉을 제거한 길이가 8치(약 37cm), 통아에 담아서 시위에 매어 쏜다
- 동헌 : 지방의 감사監司 병사兵使 수사水使 그 밖의 수령 및 지휘관들이 공무를 처리하는 대청이나 집
- 별방別防 : 별부방군사의 준말, 규정된 유방병留防兵 외에 별도로 징발한 군사, ‘별조방’, ‘조방’이라고도 부름
- 점고點考 : 관련 내용을 점검하기 위해 일일이 명부에 점을 찍어 가며 헤아리는 것
- 전문箋文 : 나라에 길흉사가 있을 때 임금에게 바치는 표문
- 객사 : 고려, 조선시대 때, 궐패를 모셔두고 왕명을 받들고 오는 벼슬아치를 묵게 하던 관아, 객사 동헌은 대청이 딸린 객사
- 방답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 선생원 :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취적리 신산마을에 있었던 조선시대 역원
- 호자 : 해자, 성 주위에 빙 둘러 못을 파서 만든 방어 시설
- 진무鎭撫 : 조선시대 병영 수영 진영 등에 소속된 서리. 전선 감독, 해도 순시 등의 직무를 띤 군관.
- 망궐례望闕禮 : 외관外官이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궐패 闕牌에 절하던 의식
- 색리色吏 : 감영, 군아의 아전
- 장杖 : 원문의 결장決杖은 죄인에게 곤장을 치는 형벌, 태형
- 우후虞候 : 조선시대 병사 또는 수사에 참모장격인 무관
- 가수假守 : 임시로 임명된 수령 또는 지휘관
- 반자半刺 : 판관, 감영 유수영 및 주요 주 부 소재지에서 지방장관의 속관으로 민정의 보좌역할을 담당한 종5품 관리
- 여도 : 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 여호리
- 천자선 : 전선戰船(판옥선)의 크기를 천자문 자호字號 순서대로 말할 때 가장 큰 배, 대개 수군 영진營鎭의 지휘관이 타는 배
- 우등계문優等啓聞 : 진무鎭撫들의 활쏘기 시험에서 우등한 사람들에 대한 보고
- 대가단자 代加單子 : 대신 가자加資할 단자, 조선시대에 아래 품계에서 위 품계로 올리는 것을 가자加資라고 하는데, 어떤 사람의 공로를 가지고 그 본인을 올리지 않고
아들이나 사위 등을 올리는 것을 ‘대신가자’라고 한다
- 좌기坐起 : 관청의 우두머리들이 정규의 위의를 갖추어 공무를 집행하는 절차를 밟는 것
- 감목관監牧官 : 지방의 목장 일을 맡아 보던 종6품의 관직
- 사복시司僕寺 : 조선시대 임금의 수레와 말을 맡아 보던 관청
- 물론物論 : 물의物議 또는 여론의 지탄
<2월>
▪ 19일~27일까지 전라좌수영에서 출발하여 이목구비 → 여도 → 흥양전선소 → 녹도 → 발포 → 사도 → 개이도 → 방답을 순시하며 전쟁 준비한 기록
2월 일기는 전쟁준비를 하면서도 계절의 변화를 섬세한 감정으로 표현하는 부분이 많이 보이네요. 장군님의 감수성이 충만한 모습을 엿볼 수 있었어요.
초1일 – 망궐례, 그물을 쳐서 피라미떼 2천여마리 잡음. 그대로 전선 위에 앉아 우후와 더불어 술을 마시면서 함께 새봄의 경치를 감상했다.
초2일 – 쇠사슬 설치위한 돌덩이 실어오기
초3일 – 화대석 4개 실어오기
초4일 – 동헌에 나가 공무를 마친 뒤 북봉의 연대 쌓는 데로 올라가 보니 쌓은 곳이 매우 좋아서 무너질 리 만무했다. 이봉수가 부지런히 일한 것을 알 수 있었다. 해자 구덩이 돌아봄 ⇨ 올해 신년회 때 북봉연대봉수대에 올라간 것이 기억에 남네요.
초8일 – 거북선에 쓸 돛 베 29필 받음. 동헌 뜰에 석주 화대 세움.
초9일 – 이원룡에게 쇠사슬을 꿸 긴 나무를 베어오게 함
초10일 – 순찰사의 편지를 보고 뇌물 받은 통역관들의 흉악스러움 표현
11일 – 신선(조선 중기의 한 병종(兵種)을 점고함
14일 – 아산 문안차 나장 2명을 내보냈다.
15일 – 석수들이 새로 쌓은 포구 구덩이가 많이 무너졌으므로 벌을 주고 다시 쌓게 함.
19일 – 순시를 떠나 백야곶 감목관이 있는 곳에 이르니 승평(순천) 부사(권준)가 그 아우를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생도 왔다. 비온 뒤라 산꽃이 활짝 피어 아름다운 경치를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해질 무렵에 이목구미에 이르러 배를 탔다. 여도에 이르니 영주 원(흥양현감 배흥립)과 여도 군관(김인영)이 나와 맞았다. 방비를 검열했다.
20일 – 전선은 모두 새로 만들었고 무기도 역시 어느 정도 완비되었다. 늦게 떠나서 영주(고흥)에 이르니 좌우의 산꽃과 들가의 봄풀이 그림 같았다. 옛날에 영주가 있다더니 역시 이 같은 경치였던가.
22일 – 아침에 고우를 마친 뒤 녹도로 갔다. 먼저 흥양전선소에 이르러 배와 기구들을 친히 점검하였다. 대포 쏘는 것도 보았다.
23일 – 비가 몹시 쏟아져 일행 상하가 모두 꽃비에 젖은 채 발포에 들어서니 해는 이미 저물었다.
24일 – 사도의 전선 점고
25일 – 여러 가지 전쟁 방비의 결함이 많으므로 군관과 색리들에게 벌을 주고 첨사를 잡아들이고 교수는 내보냈다. 방비가 다섯 포구 중에서 가장 못하건만 순찰사가 표창하는 장계를 올렸게 때문에 죄상을 단속하지 못하니 가소로운 일이다.
26일 – 이른 아침에 배를 출발하여 개이도에 이르니 여도 배와 방답 마중배가 나와 기다렸다. 날이 저물어서야 방답에 이르러 무기를 점고함. 장전과 편전은 하나도 쓸 만한 것이 없어 참으로 답답했으나 전선은 조금 완전하니 반가웠다.
27일 – 북봉에 올라가 지형을 살펴보며 성과 해자가 엉성하여 걱정함.
29일 - ...순찰사의 공문이 도착하였는데 중위장을 순천부사로 고쳐 정했다 하니 탄식할 일이다.
⇨ 1592년(임진년) 초부터 이순신과 권준은 자주 만나고 있었다. 이 날 공문내용은 제승방략체제에 따라 그의 휘하에서 활동해야 하는 권준을 순찰사가 임의로 육군의 중위장으로 임명하게 됨으로써 그의 통솔권이 침해를 받은 결과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순신도 유사시 권준을 수군의 중위장으로 기용하려는 뜻이 있었기 때문에 순찰사의 처사를 애석하게 여긴 것이다. 권준은 임진전쟁이 발발한 후 경상우수사의 구원 요청이 있었을 때 제일 먼저 달려와 이순신과 군사에 관한 약속을 하였지만 이순신의 1차 출전인 옥포해전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전라도순찰사가 권준을 육군의 중위장으로 임명하였으므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지휘를 받아도 좋다는 순찰사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후 권준은 이순신의 휘하로 복귀하여 제2차 출전 때부터는 전라좌수군의 중위장을 맡았다. 이후 권준은 이순신 휘하의 핵심 지휘관으로서 함께 작전을 수립하고 전투를 수행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출처 : 이순신 파워인맥,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 (20쪽) /제장명 저/행복한 미래)
<용어 해설>
- 선창 : 굴강과 같은 의미, 군선의 안전한 정박을 위하여 설치한 군사시설
- 순巡 : 1바퀴, 각 사람이 화살 5대씩 쏘기를 마치면 1순
- 공초供招 : 범죄 사실을 진술함
- 공장公狀 : 수령, 찰방이 감사 병사 수사를 공식으로 만날 때 내는 관직명을 적은 편지
- 석주화대石柱火臺 : 야간에 불을 밝히기 위해 돌기둥으로 만든 화대. 현재 진남관 앞뜰에 석주 2개가 세워져 전해오는데, 좌수사 이순신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함.
<3월>
초1일 – 망궐례를 행하였다. 식후에 별군(‘군기시 별군을 일컫는 말로, 오로지 화기를 담당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때 설치한 병종)과 정병(정규 병력)을 점고하고 하번군((복무가 끝난 군사들)을 점고하여 놓아 보냈다. 공무를 마친 뒤에 활 10순을 쏘았다.
초2일 –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나라의 제삿날(중종의 비 장경왕후가 돌아가신 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승군 백 명이 돌을 주웠다.
초3일 - 오늘은 명절인데 비가 이렇게 와서 답청(삼월삼짇날에 들에 나가 파랗게 난 풀을 밟고 놀았다)도 할 수 없었다.
초4일 – 서문 밖 해자 구덩이와 성벽을 더 올려 쌓는 데를 순시. 승군들이 돌 줍는 것이 성실하지 못하므로 우두머리 중에게 매를 때렸다. 아산에 문안 갔던 나장이 돌아왔다. 어머님이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다행다행이다.
초5일 – 좌의정 류성룡이 편지와 『증손전수방략』이란 책을 보내왔다. 그것을 본즉, 해전과 육전, 불로 공격하는 전술 등에 관한 것을 낱낱이 말했는데, 참으로 만고에 뛰어난 저술이다.
초6일 – 무기를 검열해보니 활, 갑옷, 투구, 통아. 환도가 깨지고 훼손되어 모양을 갖추지 못한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색리와 궁장, 감고 등을 처벌했다.
12일 – 경강선(세곡을 운반하거나 한강에 배다리를 놓는데 사용)을 점고.
14일 – 큰 비가 종일 왔다. 이른 아침에 순찰사(이광)과 만날 일로 순천으로 가는데, 비가 몹시 쏟아져 가는 길을 분간할 수 없었다. 간신히 선생원에 이르러 말에게 먹이를 먹이고 해농창에 이르니, 길 위에 물이 거의 3자나 괴어 여기저기 돌아서 겨우 고을에 닿았다. 저녁에 순찰사와 만나 그간 막혔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 2월 29일 일기에서 순찰사가 순천부사 권준을 육군의 중위장으로 임명해 탄식했던 심정을 순찰사에게 전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만남 이후 이순신은 권준을 자신의 중위장으로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순신의 소통 방법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0일 – 순천 관내를 수색하고 살피는 일이 제 기한에 미치지 못했으므로 대장과 색리와 도훈도 등을 추궁하고 논죄함.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일찍 들어왔다.
21일 – 몸이 불편하여 아침내 누워 앓다가 늦게야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23일 – 보성에서 보내올 판자를 때에 맞추어 들여오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공문을 띄워 색리를 추궁하고 잡아들이도록 하였다. 순천부사가 사령으로 올려보낸 소국진에게 장 80대를 때렸다. 순찰사가 편지를 보내서 하는 말이 “발포 권관은 군사를 거느릴 만한 재목이 못 되므로 처치하겠다.”하므로 아직 갈지 말고 그대로 유임하여 방비에 종사하게 하도록 답장을 보냈다.
24일 –순찰사의 편지 중 ‘영남 관찰사(김수)의 편지에 말하되, ’도주(대마도주 종의지)의 공문에 진작 배 1척을 내어 보냈는데, 만일 귀국에 도달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바람에 깨어진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이 극히 흉악하고 거짓된 것이다. ...그 간사한 속임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25일 – 맑으나 큰 바람이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마친 뒤에 활 10순을 쏘았다. 새로 쌓은 성을 순시해보니 남쪽이 9발 쯤 무너져 있었다.
27일 – 배를 타고 소포에 이르러 쇠사슬을 가로질러 설치하는 것을 감독하며 종일토록 기둥나무 세우는 것을 보았다. 겸하여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도 시험하였다.
28일 – 활 10순을 쏘았는데, 5순은 모두 명중하였고, 2순은 4발 명중하고, 3순은 3발 명중하였다. ⇨ 지금의 점수 계산으로 보면 84점
29일 – ...아산으로 문안 보냈던 나장이 들어왔다. 어머님이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다행 다행이다.
<4월>
초1일 – 망궐례
초2일 – 식후에 몸이 몹시 불편하더니 전점 통증이 심해져서 종일 밤새도록 신음했다.
초3일 – 기운이 어지러워 고통스럽게 밤을 새웠다.
초4일 – 아침에 비로소 통증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초7일 – 나라의 제삿날(중종 비 문정왕후가 돌아가신 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사시(오전9~11시)에 비변사에서 비밀공문이 왔는데, 영남관찰사(김수)와 우병사(김성일)의 장계에 의한 공문이었다.
11일 – 비로소 베로 돛을 만들었다,
12일 –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 현자 포를 쏘아 보았다.(거북선 최종 테스트 완료)
15일 – 나라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해 질 무렵, 영남우수사(원균)의 전통에 “왜선 90여척이 나와서 부산 앞 절영도에 정박하여 머물렀다.”하였고, 이와 동시에 또 수사의 공문서가 왔는데, “왜선 350여척이 벌써 부산포 건너편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므로 즉시 장계를 올리고 겸하여 순찰사와 병사와 우수사에게도 공문을 보냈다.
16일 – 영남우수사의 공문 - “부산 거진(巨鎭)이 벌써 성이 함락되었다.”라고 했다.
17일 – 영남우병사(김성일)가 공문을 보냈는데, “왜적이 부산성을 함락시킨 뒤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물러가지 않는다.”고 했다.
18일 – 순찰사의 공문이 왔는데, “발포권관은 이미 파직되어 갔으니 가장을 곧 정해 보내라.”고 했으므로 나대용(전라좌수사의 군관)을 그날로 정해 보냈다.
영남우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동래도 함락되었고 양산군수(조영규)와 울산군수(이언하) 두 원도 조방장으로서 성(동래성)에 들어갔다가 모두 패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19일 – 아침에 품방(성 밖 해자에 부속된 함정)을 파는 일로 군관을 정해 보냈다.
20일 – 영남관찰사의 공문에 전라도 수군이 전선을 정비하고 후언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임금께 아뢰었다고 한다.
21일 – 맑음. 성 위에 군사를 벌려 세우는 일로 과녁 터에 앉아서 명령을 내렸다. 오후에 순천부사(권준)가 달려와서 약속을 듣고 갔다. ⇨ 2월 29일 일기 참조, 순찰사 중위장으로 출전하게 된 상황에서 좌수사에게 왔던 것으로 보인다.
22일 – 새벽에 탐망도 하고 부정 사실도 조사할 일로 군관들을 내보냈다.
23일부터 30일까지는 빠졌음.
<용어해설>
- 거진(巨鎭) : 첨절제사의 병영. 절도사의 병영은 주진(主鎭), 절제사, 첨절제사의 병영은 거진(巨鎭), 동첨절제사, 만호, 도위의 병영은 제진(諸鎭)이라 한다.
<5월>
1일 – 수군들이 일제히 본영 앞바다에 모였다. 이 날은 흐리나 비는 오지 않았으며 남풍이 몹시 불었다. ⇨ 본영까지 오는데 3일 걸리는 곳도 있었다.
2일 – 남해현령(기효근)과 미조항첨사(김승룡), 상주포, 곡포, 평산포 만호 등이 왜적의 소문을 듣고는 벌써 도망해 흩어졌고, 무기 등 물자도 죄다 흩어버려 남은 것이 없다.‘라고 했다. 참으로 놀랍고 또 놀라웠다. 오시(오전11시~오후1시)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 결진하고 여러 장수들과 함께 약속하니 모두 즐거이 나갈 뜻을 품는데, 낙안군수(신호)는 회피하려는 뜻을 가진 듯한 것이 한탄스러웠다. 이날 군호는 용호라 하고 복병은 산수라 했다.
초3일 – 가랑비가 아침내 왔다. (경상우수사의 답장이 새벽에 왔다. 오후에 광양현감(어영담)과 흥양현감을 불러서 함께 이야기하는 중에 모두 분한 마음을 나타냈다. 본도 우수사 이억기)가 수군을 끌고 오기로 서로 약속했는데 방답의 판옥선이 첩입된 군사를 싣고 오는 것을 보고 우수사가 온다고 좋아하였으나 군관을 보내어 알아보니 방답의 배였다. 놀라움을 이길 수 없었다. 조금 뒤에 녹도만호(정운)가 알현을 청하기에 앞으로 불러들여 물으니, “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서울 가까이 다가가니 통분한 마음을 이길 길이 없으며, 만약 기회를 늦추다가는 뒤에 후회해도 소용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이 때문에 곧) 중위장 이순신을 불러 내일 새벽에 떠날 것을 약속하고 즉각 보고서를 수정했다. 이날 여도 수군 황옥천이 집으로 도망간 것을 잡아다가 목을 베어 군중에 매달았다.
초5일부터 28일까지는 빠졌음 ⇨ ▪1차 출동(옥포(5/7), 합포(5/7), 적진포 해전(5/8))
29일 – 사천해전 상황. 적선을 불태워 없앤 것이 13척이었다. 군관 나대용이 탄환을 맞았으며, 나도 왼편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으로 뚫고 나갔으나 중상에는 이르지 않았다.(활군과 격군 중 탄환 맞은 사람이 또한 많았다.)
▪ 제2차 출전 : 5월 29일~6월 10일
사천해전(5/29)
당포해전(6/2)
당항포해전(6/5)
율포해전(6/7)
<6월>
1일 – 사량 뒷바다에 진을 치고 밤을 지냄
2일 – 당포 앞 선창에 이르니 적선 20여척이 줄지어 정박해 있으므로 둘러싸고 서로 싸움을 시작했다. 왜 대선 20여척이 부산으로부터 바다에 줄지어 들어오다가 우리 군사들을 바라보고는 도망쳐서 개도로 들어갔다. ⇨ 당포해전 일기와 장계가 일치함.
3일 – 개도 협공. 추도 부근을 수색하고 살핀 후 고성 땅 고둔포에 정박하고 밤을 보냈다.
4일 – 우수사(이억기)가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돛을 달고 나타났다. 착포량에서 잤다.
5일 – 고성 당항포에 이르니 왜의 큰 배 1척이 크기는 판옥선만한데, 배 위에는 누각이 우뚝하고 적장이 그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중간 배가 12척이요 작은 배가 20척이었는데, 한꺼번에 무찔러 깨뜨리니 화살에 맞아 죽은 가가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왜장의 머리 7급을 베었고 남은 왜적들은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 『당포파왜병장』에서는 대선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으로 총 26척으로 나온다. 난중일기의 배 척수와 다름.
7일 – 맑음. 적선을 탐색하기 위해 아침에 떠나 영등 앞바다에 이르러 적선이 율포에 있다는 말을 듣고 복병선을 시켜 가보게 했더니 적선 5척이 먼저 우리 수군을 알아채고 남쪽 넓은 바다로 바쁘게 달아났다. 우리 여러 배들이 일제히 뒤를 쫓아 사도처사 김완이 한 척을 통째로 잡고, 우후 이몽구도 1척을 통째로 잡았으며, 녹도만호 정운도 1척을 통째로 잡았다. 왜적의 머리는 합하여 모두 36급이었다.
8일 – 맑음. 우수사(이억기)와 (함께 일을 의논하면서) 바다 가운데 머물러 정박했다.
- 6월 11일부터 8월 23일까지는 빠졌음.
<8월>
24일 – 아침밥을 객사 동헌에서 정영공(정걸)과 함께 먹고, 곧 첨벽정으로 옮겼다. 우수사(이억기)와 점심을 같이 하였는데 정조방도 함께 했다. 삼경(오후11시~오전1시)에 달빛을 타고 행선하여 사천 모사랑포에 이르니 동녘은 이미 밝았지만 새벽 안개가 사방에 끼어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25일 – 당포에 이르러 경상우수사(원균)와 배를 매고 서로 이야기했다.
26일 – 견내량에 이르러 배를 멈추고 우수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순천부사 권준도 왔다. 저녁에 배를 옮겨 각호사(거제시 사등면 오량리) 앞바다에 이르러 잤다.
27일 – 영남우수사(원균)와 함께 의논하고 배를 옮겨 거제 칠내도(칠천도)에 이르자 웅천현감 이종인이 와서 이야기했다. 저물녘에 제포 서쪽 원포로 건너가니 밤이 벌써 이경(오후 9시~11시)이었다. (이날 밤에는 꿈자리도 많이 어지러웠다.)
- 29일부터 계사년(1593년) 1월까지는 빠졌음.
■ 친필 일기의 『일기 외 기사』 (40쪽~44쪽)
- 전쟁 초기 전라 순찰사였던 이광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함(난중일기 1592년 3월 14일 “이른 아침에 순찰사(이광)을 만나러 순천으로 갔고,...3월 17일에 순찰사에게 보고하고 돌아왔다는 내용이 나오므로)
⇨ 이 메모는 이순신의 『나라에 대한 의무를 하지 않은 사람의 죄를 가족과 친척에게 연대책임을 지우는 것을 면제하라는 명령‘을 취소해주시기를 임금님께 청하는 장계』(1592.12.10.)와 거의 내용이 일치한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 이순신49세
<2월>
1일 – 종일 비가 왔다. 발포만호(황정록)와 여도 권관(김인영), 순천부사(권준)가 와서 모였다. 발포 진무 최이가 두 번이나 군법을 어겼기에 처형했다.
2월 5일 – 경칩이라 둑제를 지냈다.
7일 – 새벽에 떠나 곧장 견내량에 이르니, 우수사(경상우수사)원평중(원균의 자(字))이 벌써 먼저 와 있었다. 기 숙흠(기효근의 자(字))이 와서 봤다. 이영남ㅁ과 이여념도 왔다.
9일 - (첫 나발을 불고 두 번째 나발을 불고 나서 다시 천기를 본즉, 비가 많이 내릴 것 같아 떠날 것을 그만두었다.) 큰 비가 종일토록 오므로 그대로 머무르고 출발하지 않았다. ⇨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10일 – 웅천 웅포에 이르니 적선들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는데, 두 번이나 유인해 보았으나 진작부터 우리 수군을 겁내는 터라 잠깐 나올 듯하다가 바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어서, 끝내 잡아 무찌르지 못하니 참으로 통분 통분하다.
12일 – 3도 군사가 일제히 새벽에 떠나 바로 웅천 웅포에 도착하니 적도들이 어제와 같이 나왔다 물러갔다 하며 아무리 꾀어보아도 끝내 한바다로 나오지 않았다.
16일 – 맑음. 늦은 아침부터 큰 바람이 불었다. (들으니 정정승(정철)이 사은사로 북경에 간다고 하였다. 노비단자를 정원명에게로 부치면서 그것을 가져다가 사신 가는 일행에게 전하라고 일러 보냈다.) ⇨ 정철은 서인이며, 정원명은 정철의 아들이다. 이순신은 당색에 관계없이 성의를 표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7일 – 선전관이 왔다는 말을 듣고 노를 재촉하여 진으로 돌아오다가 도중에서 선전표신을 만나 받들어 본즉,‘급히 적의 돌아갈 길목으로 달려가서 도망하는 적을 끊고 몰살하가.“는 내용이었다.
18일 – 군사들을 송도에 복병하게 하고, 모든 배들을 시켜서 꾀어내게 하니 적선 10여척이 뒤를 따라 나왔다. 경상도 복병선 5척이 날쌔게 먼저 나가 쫓을 적에 다른 복병선이 뛰어 들어가 둘러싸고 수없이 쏘아 대니, 왜적의 죽은 것이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20일 – 적과 교전할 때....곧 호령하여 호각을 불고 초요기를 세워 싸움을 중지시켜서 여거 배들이 다행히도 크게 상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흥양 1척, 방답 1척, 순천 1척, 본영 1척이 서로 들이받아 깨졌다.)
22일 - ....왜적들이 갈팡질팡할 때, 전선을 합하여 바로 찌르니 적들은 세력이 나뉘고 약해져서 거의 모두 섬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발포 2호선과 가리포2호선이 배 위로 올라타 습격을 당하게 된 것은 통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
23일 –최천보가 양화로부터 내려와서 명나라의 소식을 자세히 전하고, 또 조도어사의 편지를 전했다.
28일 – 여러 배들이 돛을 올리고 급히 가서 작은 섬을 에워싸니 경상수사(원균)의 군관과 가덕첨사의 사후선 등 아울러 2척이 섬에서 들락날락하여 그 태도가 황당했다. 그래서 그들을 묶어서 원수사에게 보냈더니 수사가 크게 성을 냈다. 그것은 본의가 모두 군관을 보내 고기 잡는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 오자는 데에 있었던 때문이었다.
30일 – 종일토록 비가 계속 내렸다. 뜸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용어 해설>
- 둑제(纛祭) : 옛날 제도에 둑(纛)은 군중에서 대장 앞에 세우는 기인데, 큰 삼지창에 붉은 삭모(槊毛 - 창머리에 다는 가는 털)를 많이 달았다. 둑제는 군대가 출동할 때 그 기에 지내는 제사다.
<둑기>
<세종실록> 오례의에 실린 둑기를 옮겨 그린 것.
둑은 검은 소의 꼬리로 만들었는데 군법의 신 치우의 머리를 상징하는 깃발이다. 이 깃발에 제사를 지내 전쟁의 승리와 안녕을 기원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노비단자 : 지방 관리들이 사신의 여비로 올려보내는 명세서. 지방 관리들이 사신의 여행에 필요한 물품과 비용을 올려 보낼 때 그 물품 내용을 기록한 명세서.
사은사 : 조선이 사대관계에 있는 명. 청에 보냈던 사절단의 한 종류. 특히 명. 청이 조선에 도움을 준 경우, 감사의 듯을 전하기 위해 파견했던 사절이다.
선전표신(宣傳標信) :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선전관이 휴대하던 원형의 부신(符信). 한 면에 宣傳이라 쓰고, 다른 면에는 어압(御押 - 수결도장)이 있다.
조도어사(調度御史) : 조도는 공물로 바치는 토산물을 부과하는 것을 말함. 조사어사는 왕명으로 그 일을 감찰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인 듯하다.
<3월>
초2일 - ...원 영공(원균)의 옳지 못한 일을 들으니 깊이 탄식할 따름이다.
초3일 – 아침에 비가 왔다. 오늘은 답청절인데, 흉악한 적들이 물러가지 않으므로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에 떠 있으며, 그나마 명나라 군사들이 서울로 들어간 여부조차 듣지 못하니 답답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초6일 – 새벽에 떠나서 웅천에 이르니 적도들이 육지로 도망쳐 산허리에 진을 쳤으므로 군관들이 철환과 편전을 비 퍼붓듯 쏘아대니 죽는 자가 무척 많았으며, 사로잡혀 갔던 사천 여인 한 사람을 빼앗아 왔다.
12일 – 식후에 이억기에게 가서 바둑을 두었다.
14일 – 여러 배들을 출동시켜 배 만들 재목을 실어왔다.
15일 – 우수사와 여러 장수들과 관덕정에서 활을 쏘았다. 우리 편 장수가 많이 이겼다. (우리 편 장수들이 이긴 것이 66분(分)이었다.)
17일 – 맑음. 종일토록 큰 바람이 불었다.(우수사와 활을 쏘았다. 그가 아주 형편이 없으니 우스운 일이다.) 신경황이 와서 전하기를 임금의 분부를 가져온 선전관(채진, 안세걸)이 본영에 왔다고 하였다. (곧 돌려보냈다.)
- 23일부터 4월까지는 빠졌음
<용어 해설>
답청절(踏靑節) : 봄날 푸른 풀을 밟는다는 데서 생긴 풍습.
분(分) : 활쏘기를 할 때 점수를 계산하는 단위.
■ 1593년 3월 22일 일기 뒤 친필 일기의 『일기 외 기사』 (58~76쪽)
<58쪽~59쪽>
▪감결((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에 보낸 공문))하는 일이다. 지금 섬오랑캐가 일으킨 변란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 이제는 황폐한 유적이 되었다.
▪약속하는 일이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들어보지 못한 흉악한 변란이 우리 동방의 예의의 나라에 느닷없이 닥쳤다. ~ 약속하는 사연대로 하나하나 받들어 행하라.
⇨ 이 감결 초안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순신의 장계 『왜적을 무찌른 일을 임금님께 보고하는 장계』(1593년 4월 6일)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장계에는 4월 5일에 선전관 채진과 안세걸 등이 다시 왔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감결은 그 뒤에 작성된 듯하다.
<58쪽>
▪9월 1일, 사경에 배를 출발해 몰운대에 도착했더니, 경상우수사가 먼저 그의 소속 장수를 여럿 이끌고 있었습니다. 돌아서 다대포 앞바다에 도착했습니다. ~ 적선 50여척을 깨부수었습니다. 해도 저물었습니다.
⇨ 이 메모는 1592년 9월 1일의 부산대첩과 관련된 것으로, 이순신의 장계 1『부산포에서 왜적을 쳐부순 일을 임금님께 보고하는 장계』(1592년 9월 1일)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이 장계에서는 100여척을 격침시켰다고 나온다.
<59쪽~60쪽>
▪ 아주 뜨거운 날씨인데도 삼가 살피지 못했습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지난 번 물러나 돌아온 뒤에는 다시 소집해도 사람들의 마음이 이미 무너졌기에 세력을 합치기 어렵습니다.
⇨ 이 편지 초안은 류성룡에게 1593년 여름에 보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60쪽>
▪뜨거운 날씨가 지독한데도 삼가 살피지 못했습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전에 앓으셨던 학질은 지금은 어떠십니까......보내주신 편지를 일찍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철환 맞은 곳의 아픔 때문에 즉시 나아가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 의병에 들어갔습니다.
⇨ 이 편지 초안은 앞의 1593년 3월 22일 일기 뒤와 비슷하다. 류성룡에게 1593년 7월 27일~28일에 쓴 것으로 보인다.
<60쪽~61쪽>
▪무찔러 없앤 일입니다. 전에 선전관 조명이 갖고 온 임금님께서 분부하신 서장에 따라 ~ 달아나 피하려던 때에 여러 배가 한꺼번에 쫓아갔습니다.
⇨ 『당포에서 왜적을 쳐부순 일을 임금님께 보고하는 장계』 1592. 6.14 내용과 유사함.
<61쪽~62쪽>
▪ 묻고자 하는 내용으로 보내 주신 편지를 일찍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철환 맞은 곳의 아픔 때문에 즉시 나아가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 그런즉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지 않을 수 없으며, 형세를 자세히 살펴서 처리해야 합니다.
⇨ 이 편지 초안은 이순신의 총상 이야기로 보아 1592년 하반기에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62쪽>
▪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 물으시는 것을 자세히 살폈습니다. 영체가 평안하시다니 지극히 기뻤습니다. 말씀하신 어교(魚膠)는 난리가 일어난 되에는 전례에 따라 정해진 고을에서 조금도 바치지 않아 다만 곧 30장을 올려 보내겠습니다. 우러러 부끄러울 뿐입니다.
⇨ 류성룡의 『군문등록』(1596년 6월 28일)에는 활과 화살을 만들기 위한 어교가 없다고 군문의 각 어전(魚箭)에서 바치게 하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위의 편지 초안에 류성룡에게 또 1596년에 작성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62쪽 ~ 63쪽>>
불볕더위가 이처럼 심한데도 엎드려 살피지 못했습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그립습니다.~ 형세를 살피고 시름하며 괴로워하고,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
⇨ 이 편지 초안은 앞의 1593년 3월 22일 일기 뒤와 비슷하다. 류성룡에게 1593년 7월 27일~28일에 쓴 것으로 보인다.
<63쪽 ~ 67쪽>
▪가뭄과 불볕더위가 아주 지독한데도 엎드려 살피지 못했습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전에 앓으셨던 이질은 지금은 어떠십니까.... 이(李). 백(白) 두 장수의 죽음은 이 또한 모두 스스로 얻은 것입니다... ~ 사람들의 마음이 뿔뿔이 흩어진 것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어떻게 다스려 합칠 수 있겠습니까.
⇨ 이 편지 초고는 전라 순찰사 이광에게 1592년 하반기에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李). 백(白) 두 장수의 죽음 ⇨ 이와 백은 1592년 6월 5일과 6일의 용인전투에서 전사한 이지시와 백광언으로 추정된다. 이지시와 백광언은 조선중기의 무신이다. 용인전투 당시에 백광언은 우군 선봉장, 이지시는 좌군 선봉장으로 나아갔다가 함께 전사했다. 이광 등의 용인전투 패전으로 선조는 평양에서 의주로 다시 피란했다.
<67쪽 ~ 68쪽>
▪불태워 없애고 곧바로 사천 선창에 도착했습니다. ~ 그래서 그 당항포에.
⇨ 이순신의 『당포에서 왜적을 쳐부순 일을 임금님께 보고하는 장계』(1592년 6월 14일)의 내용이다.
<68쪽 ~ 69쪽>
엎드려 살피지 못했습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그리운 마음이 간절해 제 마음을 가눌 수 없습니다. 일찍이 태체(정승)께서 평안치 않으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변방에서 먼 바다를 지키느라 안부도 쉽게 여쭤보지 못했습니다. ~ 수확할 사이까지만이라도 그대로 있게 할 수는 없겠습니까.
⇨ 난중일기 1592년 일기 맨 마지막 장에 별도로 붙여 놓은 편지 초안. 그러나 1594년 7월에 작성된 장계 관련글(1594년 11월 28일 일기 뒤)와 비교해보면 비슷하다. 1594년 6월~7월 사이에 류성룡에게 보낸 편지인 듯하다. 정경달의 『반곡난중일기』 1594년 7월 8일에는 함양부사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얼마 뒤에 또 종사관직에 있었기에 임명되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일기 외 기사 해설 출처 : 난중일기 /박종평 역/글항아리
(계사년 5월 7일 출전 후, 견내량에 모인 수군 장수들의 주요 전술 편제)
⇨ 1593년 5월 1일 일기 앞에 있는 메모로 1593년 월 10일 작성한 것으로 보임
5월 초 10일 거제 견내량의 진중
전라 좌 우수군 대장 (이순신, 이억기) 경상도 중위장 김승룡
경상 우수군 대장 (원균) 전위장 기효근
전라 좌수군 중위장 권준
전라 우수군 중위장 구사직
전라 좌수군 좌부장 신호(낙안군수)
전부장 이순신李純信 (방답첨사)
중부장 어영담(광양현감)
척후장 김완, 김인영(사도첨사, 여도권관)
유군장 황정록(발포만호)
우부장 김득광(보성군수)
후부장 가안책, 대장代將 송여종(전라좌수영 군관, 낙안군수 신호 소속)
참퇴장 이응화
<5월>
초4일 : 이날은 곧 어머님 생신이건만 가서 축수의 술잔을 드리지 못하게 되니 평생의 한이다.
7일 – 발포의 도망갔던 수군을 처형하였다.
10일 – 선전관 고세충이 왕명서를 가지고 왔는데, 대개 부산으로 나아가 돌아가는 적들을 무찌르라는 것이었다.
12일 – 순찰사의 공문과 송시랑(송응창)의 패문을 가지고 왔다. 새로 만든 정철총통을 비변사로 보냈다.
13일 - ...바다의 달빛은 배 위에 가득 차고 백 가지 근심이 가슴을 치밀어 혼자 앉아서 이리 저리 뒤척이다가 닭이 울어서야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14일 - (피란 중인 임금의 사정과) 명나라 군사들의 하는 짓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러웠다...경상도 수사 원 평중(원균)이 와서 술주정을 부리므로 온 배안의 장병들이 놀라고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16일 - ...명나라 장수가 중도에서 늦추며 머뭇거리는 것은 교묘한 계략이 없지 않은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나라를 위한 걱정이 많았는데, 일마다 이와 같으니 더욱더 탄식이 우러나와 눈물을 지었다.
18일 – 이른 아침에 몸이 몹시 불편하여 온백원 4알을 먹었다. 잠시 후 시원하게 설사를 하고 나니 몸이 조금 편안해진 듯하다.
24일 - ...미시(오후 1시~3시)에 명나라 관원 양보가 진문에 당도하므로 우별도장 이설을 보내 맞이하여 배에까지 인도해오니 무척 기뻐하였다. ...우리 수군이 성대하다고 매우 칭찬하였다. 예물단자를 주니, 처음에는 굳이 사양하는 듯하다가, 결국 받고는 무척 기뻐하며 두 번 세 번 감사하는 것이었다.
25일 – 송시랑이 수군의 허실을 알고자 하여 자기가 데리고 온 야불수 양보를 보낸 것인데, 수군이 이렇게도 성대하니 기쁘기 비할 데 없다.라고 하였다.
27일 – 경상도 병사(우병사 최경회)의 답장이 왔다. 원수사는 송경략이 보낸 불화살을 혼자서 쓰려고 꾀한 것이다. 매우 가소롭다. → 명나라 화전(불화살)은 당시 조총과 맞설 수 있는 무기로 평가됨
<용어 해설>
온백원(溫白元) : 위장병을 치료하는 데 가장 잘 듣는 약인데, 이순신은 위장이 좋지 못하여 언제나 이 약을 복용하였다.
야불수(夜不收) : 긴급한 일을 전하기 위하여 밤에도 중지하지 않고 달리는 파발군.
<6월>
초1일 – 황정욱과 이영이 강가에 나가서 함께 이야기하더라고 하니,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89쪽 설명 참고)
초3일 – 지휘선의 배 밑을 연기로 그을리기 위해 좌별선으로 옮겨탔다. 막 활을 쏘는데 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온 배에 비가 새지 않는 곳이 없어 앉을 만한 마른 데가 없었다. ⇨ ‘연기를 그을리는 일’은 나무로 만들어진 배가 바닷물과 각종 벌레로 인해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 『노인의 금계일기』1599년 3월 21일~22일에 따르면, 그가 탄 명나라 배는 나무판 틈에 석탄을 발라 비가 내리거나 파도가 험해도 빗물이나 바닷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며 우리나라 배와의 차이를 이야기했다. 당시 조선의 배는 누수가 심했다.
초7일 – 본도 우수사 우후(이정충)가 보러 와서 서울 소식을 낱낱이 전하였다. 지극히 가증스럽고 한탄스러움을 이길 수 없었다.
초8일 – 경상도 수사의 우후(이의득)가 군관을 시켜 생전복을 선사하였기에 구슬 30개를 답례로 보냈다. 각 고을의 담당 아전 11명을 처벌했다. 옥과 향소는 지난해부터 수군을 영솔하는 일을 성실하게 하지 않아서 결원이 많이 발생하여 수백 명에 이르렀는데, 매번 거짓말로 꾸며 댔기 때문에 이날 형벌을 집행하여 목을 베어서 일반에게 보였다.
11일 – 비가 오락가락하였다. 아침에 왜적을 토벌할 공문을 만들어서 영남수사(원균)에게 보냈더니, 술에 취해 정신이 없었다.(없다고 핑계하면서 회답이 없었다. 오시에 충청수사 정걸의 배로 갔으나, 충청수사는 내 배에 와서 앉아 있었으므로 잠깐 이야기하다 헤어졌다. 그길로 우수사의 배로 간즉, 가리포 첨사 (구사직)와 진도군수(김만수), 해남현감(위대기)등이 우수사와 함께 술자리를 차려 놓고 있었다....)
12일 –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털인들 무엇을 꺼리겠는가마는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16일 – ....적의 계략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다.
20일 – 제삿날이므로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22일 – 맑음. (처음으로 전선을 만들기 위하여 자귀질을 시작했다. 목수 214명이 일을 하였다. 본영에서 72명, 방답에서 35명, 사도에서 25명, 녹도에서 15명, 발포에서 12명, 여도에서 15명, 순천에서 10명, 낙안에서 5명, 흥양과 보성에서 각 10명이었다. 방답에서 처음에는 15명밖에 보내지 않아서 다당한 군관과 아전을 처벌하였는데 그 정상이 아주 간교하였다. 본영 제 2호선(우후선)의 무상 손걸을 본영으로 돌려보냈는데, 못된 짓을 많이 저질러서 가두었다가 붙잡아오라고 하였더니, 이미 들어와 인사를 하는 것이므로 제 마음대로 드나든 죄를 다스리고, 그와 함께 우후의 군관 유경남도 처벌하였다. 오후에 가리포 첨사가 왔다. 적량의 고여우와 이효가도 왔다. 저녁때 소비포권관 이영남이 보러 왔다.) ⇨ 아주 중요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충무공전서에는 몽땅 생략되어 있음
23일 – 새 배에 쓸 밑판을 다 만들었다.
24일 – 영등 탐망꾼이 와서 아뢰되, “적선 500여척이 23일 밤중에 모두 소진포로 모여들어왔는데, 그 선봉은 칠천량에 이르렀다.라고 했다.
25일 – 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적을 토벌할 것을 의논하였다.
<7월>
5일 – 진양(진주)가 함락되었다는 긴급 보고가 광양에서 또 왔다.
15일 –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오니 나그네 회포가 어지럽다. 홀로 배뜸 밑에 앉았노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은 뱃전에 비취고 정신도 맑아져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이에 닭이 이미 울었다.
19일 – 저녁에 광양현감이 진주에서 피살된 장수들의 명부를 보내왔기에 보니 비차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 없었다.
29일 – 새벽꿈에 아들을 얻었다. 포로로 잡혀간 사내아이를 얻을 징조였다.
<8월>
17일 - 상선 (지휘선)을 연기로 그을리기 위해 좌별도선에 옮겨탔다.
⇨ 6월 3일에 훈증을 하고 다시 훈증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2~3개월에 한 번 정도씩 훈증을 한 듯하다.
<9월>
10일 – 날이 저물 무렵 우수사 배로 가서 (내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오기를 청하여) 방답첨사와 함께 술을 마시고 헤어졌다.
11일 – 정수사가 술을 마련해 가지고 보러 왔다. 우수사도 오고, 낙안군수와 방답첨사도 와서 함께 마셨다.
12일 – 식후에 소비포권관(이영남), 유충신, 여도만호(김인영)등을 불러서 술을 먹였다.
⇨ 술과 관련된 이야기
9월 16일부터 12월까지는 빠졌음
◆ 진관체제와 제승방략제를 설명해달라는 회원이 있었어요 ⇨ 이 부분은 격군학습방 4번 '진관체제와 제승방략체제', 2번 '임진왜란 시기 수군의 전투 편제'를 읽어보시면 도움될 것 같습니다.
격군학습방 4번 '진관체제와 제승방략체제' - https://cafe.daum.net/jjmkssm1545-1598/kL0j/4
2번 '임진왜란 시기 수군의 전투 편제' - https://cafe.daum.net/jjmkssm1545-1598/kL0j/2
난중일기는 요약하기가 쉽지 않네요. 각자 읽고 느낀 것을 나누는 시간으로 하는게 좋을 것 같아요.
이끌어주시는 웅천현감님께 감사하고,
함께 읽고 나눌 수 있는 우리 회원들이 있어 즐거운 시간의 연속입니다.
첫댓글 우와~
정리해서 올려주신 글도 정성이 가득하십니다~
덕분에 아침에 <난중일기> 공부하고 갑니다.
아침 일찍부터 난중일기 공부하시고..
복 받을 겁니당~ㅎㅎ
지회장님이 올리시는 글을 모아놨다가 출력해서 묶으면 책이 됩니다요..ㅎㅎ
자세한 설명을 곁들였으니 해설은 덤이고요..ㅎㅎ
고생많으셨습니다.
과찬의 말씀을요.
웅천현감님께 들은 설명 중 일부는 흘리고
몇몇 부분은 제가 임의로 자료 찾아 첨가했지요. 흘린 부분은 동자갑선닝께서 추가로 설명 덧붙여주셔도 좋습니다~ㅎㅎ
정리를 잘해주어 복습 예습 공부잘합니다, 위 내용중에 답청절이라는 글만보면 모르겠는데 봄에 푸른 풀을밟는다는 데서생긴 풍습 이라는 해설을 보고 60년데 전후까지 논 밭에 겨울내내 보리가 월동을 하는데 땅이얼어 부풀어올라 날씨가 가뭄이계속되면 말라죽어요 보리가 이럴때 집에 아이어른 할거없이 보리밭에나가서 밟기를 해요 봄 새뿌리가 들 뜨 있는 것을 뿌리내리는것을 도와주는일 을 해본 기억있습니다
일명 보리밟기라하구요 봄비가 충분하면 밟기를 중단합니다,
옛풍습을 몸소 체험하신 이야기가 더 솔깃하네요. 보리밟기의 풍습이 답청과 연결되는군요.
전쟁 준비 중에도 아름다운 봄경치에 매료되고 '꽃비'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장군님의 감성이 충만한 부분을 엿볼 수 있었어요.
우선, 방대한 분량이군요. 저희는 못 따라 갈 것 같습니다. 저희는 2월 모임에서 옥포파왜병장 부분을 읽고 견내량으로 넘어가려고 하니, 이 기회에 차라리 2차출동을 공부하고 넘어가자는 의견이 있어서, 그렇게 하기로 하고 멈췄는데....더구나 모임 주기도 2달에 한번이라서 진도는 더욱 따라가기가 어려울 것 같군요.
작년에 저는 고흥을 놀러가면서 난중일기 임진년 2월 부분을 읽고 갔었지요. 武將이면서도 자연 풍광에 대한 감수성과 표현력이 뛰어나다는 점을 새삼느꼈습니다.
그리고 난중일기 요약이라....오호 ... 정말 수고하셨네요....ㅎㅎ
부산지회는 아주 꼼꼼하게 공부하시네요. 저희는 깊이는 부족해도 일단 한번이라도 읽고 넘어가자는 방향으로 잡고 갑니다. 요약이라기보다 제 마음가는 부분 위주로 몇 자 끄적여보았지요. 뒤로 갈수록 힘이 빠져 과감하게 생략. 책에 있는 부분을 옮겨적는 게 큰 의미가 있지는 않겠지요. 배경을 알아야하는 몇 부분을 제외하고는요.
각자 마음에 와닿은 부분을 나누는 것이 의미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오달제가 오윤겸의 아들이었군요. 그가 청나라로 끌려가서 아내에게 보내 시가 있어요. 당시 그 마음이 얼마나 상심하였을까요... 그때 나이 스물여덟이었군요.
한가할 때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寄內(기내, 아내에게 부치다)
琴瑟恩情重(금슬은정중) 부부 은정은 중한 것인데,
相逢未二朞(상봉미이기) 만난 지 두 해도 못되어,
今成萬里別(금성만리별) 이제는 만리 밖 이별하게 되니
虛負百年期(허부백년기) 백년해로 약속 헛되이 등졌구려
地闊書難寄(지활서난기) 길은 멀어 글 띄우기 쉽지가 않고
山長夢亦遲(산장몽역지) 산이 높아 꿈도 역시 더디겠지요
吾生未可卜(오생미가복) 이 내 목숨 점 칠 수가 없으니
須護腹中兒(수호복중아) 부디 당신 뱃속 아이를 보호해 주오
감사합니다.
한문에 능한 송현마을님 덕분에 한시도 접하게 되네요^^
@진해현감 찾아보니 오달제는 오윤겸의 아들이 아니라 오윤해(吳允諧)의 아들이라고 나오네요. 한번 더 확인해 보심이...
@송현(松峴)마을 아~네
확인해보겠습니다
@송현(松峴)마을 오희문의 아들이 오윤겸만 있었던 게 아니라 오윤해도 있었네요.
오희문에게는 4남 2녀가 있었는데, 오윤겸이 장남, 남동생 오윤해, 오윤함, 여동생 오숙란, 남동생 오윤성, 여동생 오숙진이 있었네요.
오윤겸에게서 5남 5녀의 자녀가 있었지만 오달제는 없습니다.
동생 오윤해의 아들이 오달제네요.
이름이 알려진 사람 중심으로 설명을 하다보니... 관계의 오해가 생기게 애매하게 표현한 것 같아요.
'그의 아들 오윤겸은 인조 때에 영의정을 지냈고, 손자인 오달제는 ...'
오달제가 오윤겸의 아들로 인식할 수도 있게 표현이 명확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진해현감 아하, 그렇군요. 상세한 설면 감사합니다. 또한 그 시절에 여자의 이름이 전해온다는 점도 기억해둘만 한, 드문 사례인 것 같습니다.
지회장님
후기 잘 읽어습니다.
밑줄 치고, 색깔도 이쁘게 올려주니 이해하기 쉽고 읽는 재미도 있네요.
세심한 배려에 감사합니다. 애쓰셨어요.
늘 건강하길 기원합니다~♡
늘 생글섕글 웃는 모습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
적극적 공감에 감사드려요~^^
창원 지회장..진해현감님은..대구가톨릭대 <이순신학괴> 박사과정..입학하셔도 될 것 같아요...ㅎ
저 머리 아프게 공부하는 거 좋아하지 않아요. 부담없이 즐기는 정도만으로...ㅎ
6회차 ’이충무공전서 읽기’ 순항중!
3월
이충무공을 기억하는 축제 시작이네요~
이충무공의 안골포해전 뮤지컬콘서트 (3.21-22 저녁)
군항제 전야제 3. 22(금) 개막
3. 19 저녁 7회차
난중일기 2 (갑오년, 을미년 일기) 같이 읽어요~
벚꽃 개화시기가 빨라 올해는 군항제도 빨리 시작하는군요.
이충무공 읽기에 내이포판옥선님이 함께 해서 든든합니다~
늘 감사해요
창원지회 보기 좋습니다. 하동지회도 못 따라오게 더 열심히 공부 해야겠다. ^^
김여물님
오랜만이에요.
하동지회가 앞서 가도 됩니당~~ㅎㅎ
마음가는만큼 시간 형편이 허락되는 만큼씩 읽는 거죠. 😊
창원 지회장님 덕분에 난중일기 복습 잘했습니다.
아무나 대신할 수 없는 열정에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과찬이십니다. 배운 것 정리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창의력을 요하는 일이 아니라서 부담이 덜하지요. ㅋ
늘 적극적인 격려에 힘을 내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선생님이 있으니 더욱 좋겠습니다
네
학생들이 열심히 해야 가르치는 사람도 뿌듯하시겠죠. 귀한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이 내용만 이해를 해도 박사급은 되지않을까요
박사급은 아무나 되는 건 아니죠.
우린 이순신 정신을 배우는 사람들로 삶에서 조금이나마 적용하도록 노력하는데 의미를 두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진해현감 지회장님!
날름 받아 먹기는 좋으나
이 많은 자료를....
갸냘픈 몸 편찮을까 걱정입니다.
천천히 오래 버티는 자가 성공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남명손서님
저 전혀 갸날프지 않아요. ㅋ
전혀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난중일기 베낀 게 대부분이라 실제 설명 자료는 얼마되지 않습니다.
매월 세째 주 화요일 6시 30분에 스터디 하니 시간되는 날은 함께 해요. 간접전달이 어찌 직접 듣는 것만 하겠습니까.
와~~우리는 언제 따라갈꼬~~갈길이 멀어요~~꼼꼼한 정리 감사합니다.
함께 가면 길이 멀게 느껴지지 않을 거예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쁘겠습니다.
덕분에 난중일기 공부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난중일기는 많이 읽으셔서 익숙한 내용이겠지만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부분과 친필일기의 차이를 볼 수 있다는게 조금 다른 점이켔지요.
진짜
이글만 몇번 읽어봐도 많은것을 알게될듯 싶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니 감사합니다~^^
창원지회 화이팅
지부장님 짱~~!
많이 배우고 갑니다
웅천현감님 덕분에 놀고 먹고 수다떨던 우리지회도 스터디가 시작된 것이지요. ㅎㅎ
통영지회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