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칩 어름에서 외 1편
홍신선
한두 겹씩 나날이 도까워지는 햇볕 속에
벌써 옆 마을에선 터앝 골 타는 트랙터 소리 요란하다.
튀는 감흥인지 업고 놀자는 수작인지
저 소리들 햇볕의 긴 등짝에 어부바로 업혀
공중에 솟구치다 추락하다 거듭 되솟구처 오른다.
간 겨울 허물어진 배수로의 돌들을 다시 제자리에 끼워 맞추다
뻑적지근 아픈 등허리 기댈 곳 없어
나는 잠시 허공을 등받이로 젖혀 앉는데
마침 꽃다지 두엇 재채기 쏟다 얼굴 들어 슬그머니 나를 올려다본다.
옳거니 저들이 제 안에서
물도 꼭꼭 씹어 삼키는 소리가
이내 안면 활짝 펴고 깔깔댈 웃음소리가
흥타령처럼 튀는 저 트랙터 소리보다 문득 그윽하니 크겠구나.
나는 가는 귀먹은 한시절을 풍경처럼 문밖에 걸어둘 마련인데
무릇 막돌만 개인으로 제 자리 끼어 앉는 건 아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숨어 제 목숨 가부좌 틀고 정좌하는
익명의 푸새들이
머지않아 개개인들로 저 대동의 푸른 뜨락에 비집고 끼어 앉으리니.
이 봄날 길 곁 매화목 한 그루
주둥이에 흰 밥알들을 묻히고 선
내 어린 날의 나인 듯 한결 더 으늑하게 깊어진 한낮을 지켜섰다.
고요 감옥
언제부터의 입감(入監)이었나
늙어가는 이 수형(受刑)은 얼마간 세월을 더 착취해야 하나
귀촌 뒤 묵묵히
몇 해를 가부좌 틀고 들어앉아 지낸
고요는 사면 벽이 견고한 뇌옥(牢獄) 아니던가
뒷산에서 겨우내 얼어든 시간을 발굽으로 파헤치거나
쓰라린 허기를 목쉬게 울던 고라니들 문득 산 넘어 어디론가 뜨고
절정의 장관에 올랐다 금세 눈사태로
허공을 허물고 굴러내리는 왕벚꽃들
때를 알아 모두 저리 제 길 가는 것뿐이라고
내가 내 안에 갇힌
나를 만나 따끔하게 세뇌나 시키는
오늘도
일과를 빼곤 들앉아 속절없이 면벽 놀음을 하는
오
고요 감옥.
홍신선
월간 시문학 시추천(1965년).
시집 서벽당집 황사바람 속에서 삶의 옹이 직박구리의 봄노래
연작시집 마음경 등 다수.
현대문학상, 불교문학상, 김삿갓문학상, 노작문학상, 이형기문학상 등 다수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