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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때 장렬한 최후… 사후 청백리에 녹선 최진립 1568년(선조1)-1636년(인조14)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潛窩), 시호는 정무(貞武)
종가에서 귀중한 한 장의 사진을 보았다.
장군의 유묵(遺墨) 가운데 국한문을 혼용한 편지 사진이었다. 한글이 세종 때 창제되었지만 한동안 국가 공문서나 선비 사회에서는 널리 쓰이지 못했다.
대신 한글은 부인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래서 부인과 의사소통을 할 때 종종 한글이 쓰였다. 이는 그러한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자료다.
학봉 김성일 선생이 임진왜란 당시에 진주성 대첩을 거둔 뒤 진주성에서 순국하기 전 부인에게 보낸 편지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장모 모시고 설을 잘 쉬라는 당부와 ‘너무 그리워 말고 편히 계시오’라는 마지막 구절이 기억에 남아 있다.
최진립 장군이 남긴 기량서(寄亮書)라는 편지는, 자신의 둘째아들에게 보낸 것이다. 당시 맏아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 편지는 병자년(1636) 2월 초3일에 쓰여졌다. 당시 장군은 69세의 노구였다.
그리고 같은 해 용인 험천에서 적들과 싸우다 전사했다.
사후에 판중추부사 김시양은 “최진립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려는 뜻은 속으로 본래 정해서 창졸간에 전사한 유와는 다르니 그 문에 정려를 내리소서”라고 했고 지금 소위 신라의 고총인 ‘개무덤’ 앞에 정려되어 비와 비각이 함께 남아 있다.
이 편지는 아들에게 보내면서 그 말미에 며느리에게 한글로 적은 특징이 있다.
장군은 경주 현곡면 구미동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부친을 여의었고 25세 때 임란을 당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찔렀다. 27세 때 무과에 급제한 뒤 정유재란 때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왜적을 토벌했다.
이러한 공적으로 난이 끝난 뒤 선무공신에 녹선되었다. 그 뒤 오위도총부 도사, 마량진 첨절제사, 경원도호부사, 가덕진 수군첨절제사, 경흥도호부사, 경기 충청 황해 삼도수군통제사(인조11년) 직 등을 역임했다.
장군은 63세 때 공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임명되었다. 공조참판 직은 종3품의 고위직. 문치주의를 채택했던 조선시대에는 문과 출신의 문신이 이러한 직을 맡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이 직이 무과 출신의 장군에게 내려진 것은 능력과 국왕의 신임이 그만큼 두터웠음을 의미한다.
장군은 평생을 근신한 태도로 살았다. 종가의 사랑채는 ‘충의당’이지만 본래는 ‘흠흠당(欽欽堂)’이었다. 지금도 현판이 남아 있는데 이는 공경하고 공경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장군은 즉시 상소를 통해 사직했으나 윤허되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당시의 자료를 보면, ‘최진립은 무인으로서 몸가짐이 청근(淸勤)했기 때문에 이 직을 제수한 것이다’라 적고 있다. 무인이면서 무인답지 않고 선비의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장군이 남긴 한 장의 편지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문신에 못지않은 달필이다.
장군은 돌아가시던 해인 병자년에 공주의 영장이 되었다. 그 뒤 두 달 만에 남한산성이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 포위당했다.
경기감사 정세규가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勤王)하면서 장군이 나이가 많은 것을 배려해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자 강개하게 말하기를, “내가 늙어서 장수의 일을 감당할 수는 없지만 함께 따라 갈 수는 있습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동참했다.
용인 험천 지역에서 중과부적으로 몰리자 사람들을 둘러보고 “너희들은 반드시 나를 따를 것이 없다. 나는 여기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죽을 것이다”라 하며 활을 쏘며 분전했다.
난이 끝난 뒤 시신을 수습할 때 바로 그곳에서 온몸이 화살로 맞은 채 발견되었다. 당시 또 다른 감동적인 일화가 전해온다. 전황이 불리하자 자신을 평생 따르던 두 종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했다.
이때 환갑을 넘긴 종들은, “주인이 목숨을 버려 충신이 되는데 어찌 우리 종들이 충노(忠奴)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변하며 함께 목숨을 바쳤다.
종가에서는 이들의 영령을 기려 장군의! 불천위 제사 뒤 상을 물려 제사를 지내고 있다. 반상(班常)의 구분이 엄격했던 조선 시대에 양반들이 상민도 아닌 종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한 것이다. 지금도 이 제사의 전통은 이어오고 있다. 지금 종가에는 종노비와 비각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잠곡 김육이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글을 지은 바 있다. 제목은 ‘최진립청백사절포증의(崔震立淸白死節褒贈議)’. 청백의 최진립 장군이 난을 만나 목숨을 바쳐 절개를 지킨 사실을 기려 증직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논한 글이다.
그는 장군의 청풍대절(淸風大節)을 기린 뒤, ‘저 먼 시골의 무인 가운데 이러한 절행(節行)이 있는 이가 있었는가?’라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그는 논의의 말미에 청백리(淸白吏)로 녹해야 함을 역설했고, 공감을 얻어 모두 시행되었다.
장군은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정무공(貞武公)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청백리에 녹선 됨과 아울러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과 아울러 ‘충렬사우(忠烈祠宇)’라는 사액까지 내려지는 최고의 기림을 받았다.
현재 용산서원은 지방문화재로, 충의당은 지방민속자료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종가에는 장군이 심은 노거수 한 그루가 있다. 이 나무는 1905년에 갑작스럽게 고사했다가 1945년 경에 소생했다. 이는 일제에 의한 국권 상실과 이후 광복과 연관되어 널리 회자됐다.
노거수 앞에 장군의 얼을 길이 기리는 차원에서 기마 동상 건립을 추진 중이다.
‘잠와선생실기’가 목판으로 간행되었고 1975년에 국역되었다. 실기 서문은 청대 권상일과 해좌 정범조가 썼고 행장은 학사 김응조가, 묘갈명은 약산 오광운이, 묘지명은 홍문관 부제학 권해가, 신도비명은 용재 조경이 각각 지었다.
충신 최진립 장군의 집 ‘충의당’ |
이조는 내남면사무소가 있는 마을이다. |
2007년 08월 20일 [경주신문] |
<xscript language="xxjavascript"> </xscript> <xform name="login_form" method="get" action="login.php"> </xform> 이조는 내남면사무소가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마치 떠나가는 배의 형세를 하고 있는 행주형국(行舟形局)의 명당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은 배가 침몰하는 것을 방지하기위해 우물을 파지 않는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의 명장 정무공 최진립(崔震立 1568~1636) 장군이 살았던 곳이며 공의 3째 아들(東亮)로 이어지는 세계적인 명문가 교리최부자가 지금의 교동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만석꾼에 12대 진사의 기틀을 마련했던 배경이 된 마을이기도 하다. 이 마을은 개400년 전통 이은 최부자집 배출 의 무덤으로 알려진 큰 무덤이 있어 ‘개무덤’이라고 불렀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이야기가 전한다.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직한 개의 무덤이라는 이야기와 신라 진성여왕의 간부인 각간 위홍의 무덤으로 질녀인 진성여왕과 놀아난 그의 행실에 빗대어 개무덤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같이 전해오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이곳이 미역내, 별내, 박달천의 세 거랑이 만나는 지점으로 갯거랑이 모인다고 ‘갯모듬[浦會]’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개무덤이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이 마을이 ‘포회(浦會)’로도 불렸다고 한다. 또 마을의 안산인 고위산의 천룡바위가 마을 앞 냇물에 비치는 풍광이 아름다워 ‘가암(佳岩)’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개무덤이라는 마을이름이 이조가 된 것은 예전에 이곳이 윤씨네들이 10여 호가 살았는데 이들이 마을을 많이 도왔다고 해서 ‘이조(伊助)’라고 했다고 한다. ‘이조(伊助)’가 300여 년 전의 문헌에 이미 등장한 것으로 미루어 오래전부터 이조라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조는 면사무소가 위치한 큰 마을인 ‘개무덤(이조)’을 이조1리, 그 남쪽 거랑 건너편의 ‘새각단(전포)’을 이조2리, 동쪽 산기슭에 자리한 ‘용산’을 이조3리로 구획하고 있다. 행주형국(行舟形局)의 명당 이조1리는 경주최씨 집성촌으로 정무공이 살았던 집인 종가댁 충의당을 중심으로 정무공의 후예들이 80여 호가 생활하고 있다.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으며 방울토마토, 토마토, 딸기를 생산하고 있다. 방울토마토는 2농가에서 2천여 평, 토마토는 10여 농가에서 1만여 평, 딸기는 10여 농가에서 1만여 평을 경작하고 있다. 총 230가구에서 500여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올해 100살의 김분술(노국댁) 할머니로 아직도 집안일을 할 정도로 건강하고 기골이 좋은 편이다. 동제 이 마을은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아침에 동제를 지낸다. 제관은 마을사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당목 마을 북쪽에 있는 오래된 회나무이다. 일제강점기 때에 회나무 안에 거지들이 살다가 불을 내서 나무가 죽었다가 3년 만에 싹이 나고 되살아났다고 한다. 또 6.25때 미군들이 이곳에서 보초를 서면서 나무에 석유를 뿌리고 불태워 죽었지만 몇 년 만에 또다시 되살아났다고 한다. 지금은 무성하게 잘 자라고 있고, 영험 있다고 빌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개의 무덤 있어 ‘개무덤’ 개무덤 이 마을에는 개무덤과 관련해 다음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어느 여인이 남편을 일찍 사별하고, 남매를 훌륭하게 키우고 죽었다. 염라대왕은 이 여인을 아들 집 개로 환생하게 해주었다. 개가 자라자 아들 최씨가 개를 잡아 먹으려고 했다. 이를 눈치 챈 개가 달아나 버렸다. 최씨는 개를 찾아다니다가 한 스님을 만났는데 개가 어머니가 환생한 것이며 평생을 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하다가 절 구경도 한 번 못하고 돌아가셨으니 구경이나 잘 시켜 드리라는 이야기와 함께 개가 누님 집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누님 집에서 개를 찾은 최씨는 개를 업고 팔도를 두루 돌며 명산대천을 구경시켜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곳에 이르자 개가 발로 땅을 파더니 죽어버렸다. 최씨가 슬피 울며 개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 후 최씨는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천작도(天作棹) 이 마을은 마치 배가 나아가는 형상이라고 하는데, 마침 개무덤 자리에 돛대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어 사람들은 마을이 길할 징조라며 이 바위를 매우 신령스럽게 생각했다. 과연 마을은 해마다 풍년이 들고 질병이 없었다. 그러나 강동의 양동마을에서는 그곳 못에 이 바위가 비치기만 하면, 흉년이 들고 괴질이 나돌았다고 한다. 그래서 양동사람들이 돛대처럼 생긴 바위를 깨뜨렸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이 애통해 하며 마을에 복을 준 바위의 깨진 조각을 모아 무덤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개무덤’이라 하였다. 그리고 무덤 위에 다시 잘 생긴 바위를 돛대처럼 세우고 ‘하늘이 만든 노’라는 뜻의 ‘천작도(天作棹)’라 불렀다. 정무공 3살 때부터 살아 충의당(忠義堂) 이 건물은 병자호란 때 순절한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 3살 때부터 살았던 집이다. 처음엔 흠흠당이라고 했으나 1760년경 건물을 중수하면서 충의당으로 고쳐 불렀다. 앞쪽의 충의당을 중심으로 뒤에 흠흠당과 고방채, 그 뒤에 안채를 배치한 ‘ㅁ’자형 구조이다. 충의당은 정면 4칸, 옆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왼쪽 2칸은 온돌, 오른쪽 2칸은 마루를 배치했다. 정무공은 임진왜란 때 창의해 전공을 세우고 선조 27년(1594)에 무과에 급제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서생포(西生浦)의 적을 격멸하고, 권률(權慄) 도원수와 함께 도산(島山)에서 크게 적을 무찔러 선무원종이등공신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는 69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용인에서 적의 대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했다. 다음해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인조 18년(1640) 충신정려(忠臣旌閭)를 받았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다. 정무공 부조묘(貞武公不祖廟) 경주최씨 정무공파 종가인 충의당(忠義堂)에 있는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의 부조묘이다. 정무공 정려비각(貞武公旌閭碑閣)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정문으로, 인조 18년(1640)에 정려 받아 개무덤 남쪽에 세운 정려비각이다. 종 제사 지내는 상전 남강서당(南岡書堂) 이조 서쪽에 있던 서당으로 남강 최언경(崔彦璥)이 지었다고 한다. 고속도로 서편에 있었는데 관리가 안 되고 노후 되어 20년 전에 헐었다. ‘수족당’이라고도 했다. 충노각 최진립 장군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평생을 도우다 병자호란의 용인전투에서 장군과 함께 장렬히 전사한 충성스러운 노비 옥동(玉洞)과 기별(奇別)의 뜻을 기리고자 장군의 후손들이 2000년에 세운 비각이다. 이 두 노비들은 장군의 사당에서 불천위제향을 받들 때 제상을 물려놓고 옥동과 기별의 신위를 모셔 장군의 후손들이 제배하고 충노의 은공을 기려오고 있다. 종은 제대로 사람대접조차 받지 못하던 터에 종의 제사까지 지내주는 일은 당시의 사회관습으로써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가문은 지금까지도 종의 제사를 지내오고 있고, 최근 비각까지 세우는 인간애를 실천함으로써 명문가다운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수족당(睡足堂) 최제익(崔濟翼)이라는 선비가 공부하였다고 하는 남강서당에 있는 서재. 화주배기 이 마을에서 공부하던 경주최씨(慶州崔氏)가 과거에 급제하여 화주(솟대)를 세웠다고 하는 곳으로, 지금의 내남면사무소 부근 삼성생활예술고등학교 자리라고 한다. 활인당(活人堂) 옛날 이곳에 빈민 구제를 위하여 곳간을 지어놓고 곡식을 저장하였다가, 흉년이 들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활인당이 있었던 곳으로, 이조 동쪽에 있다. 옛날 전염병 환자를 이곳에다 격리·수용하였다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의 내남의원 자리이다. “저기 돌이 걸어간다” 선돌 개무덤에 있던 돌을 양동사람들이 와서 깰 때 돌의 일부분이 북쪽으로 뛰어가는데 마을 여자들이 “저기 돌이 걸어간다”고 해서 그 자리에 섰다고 한다. 개무덤 북쪽 논둑에 있다. 도덕골 송단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조천(伊助川) 남쪽의 미역내, 동쪽의 별내, 서쪽의 박달천이 이조에서 합수하여 이조천이 되며, 기린내의 상류를 이루는데 ‘상내(湘川)’거랑이라고도 한다. 마도랑 덕천·부지·이조·용장의 경계를 이루면서 흐르는 내로, 남쪽(마)에서 북쪽으로 흐른다고 ‘마도랑’이라고 했다. 혹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이곳에서 말의 물을 먹였다고 한다. 비복(飛伏)테 새각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임진왜란 때 적을 막기 위해 이 골짜기에 날랜 군사들이 매복해 있었다고 한다. 고기가 형산강 거슬러 오를 수 있게 정무공과 같은 불세출의 충신과 12대 400년을 유지해온 최부자라는 세계적인 명문가를 배출한 개무덤은 보기 드문 명당 마을이다. 배가 나아가는 형국이라는 개무덤. 배에 짐이 가득 실리면 떠나가듯 부자가 되면 이 마을을 떠난다고 한다. 교리 최부자가 그랬고, 일본에도 이 마을 출신의 부자들이 많다고 한다. 앞으로도 이 마을의 땅기운을 받아 명문가와 부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면 좋겠다. 이 마을은 형산강 상류에 위치한 마을이라 상수원보호구역이고, 경주남산에 인접한 국립공원지역이어서 각종 규제가 많아 다른 마을에 비해 낙후된 마을이라고 한다. 정주권 사업이 이루어져 마을이 좀 개발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또한 형산강 상류에 있는 이곳에 예전에는 고기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각종 어종이 형산강을 거슬러 올라올 수 있도록 고기들이 다닐 수 있는 어로를 확보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최병준(80·경주향교 전교), 최병완(75·전 문교부 총무국장), 최병윤(70·전 국세청장), 최상용(66·고려대 교수), 최영기(52·서라벌대 교수), 최석규(50·서라벌대 교수) 등이 있다. 도움 말씀을 주신 최채량(75·정무공 14세손 충의당 정무공 종가댁 종손)님과 마을을 안내해주신 최병웅 이장, 김경태 새마을지도자님께 감사드린다. |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
병자호란때 장렬한 최후… 사후 청백리에 녹선 최진립 1568년(선조1)-1636년(인조14)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潛窩), 시호는 정무(貞武)
종가에서 귀중한 한 장의 사진을 보았다.
장군의 유묵(遺墨) 가운데 국한문을 혼용한 편지 사진이었다. 한글이 세종 때 창제되었지만 한동안 국가 공문서나 선비 사회에서는 널리 쓰이지 못했다.
대신 한글은 부인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래서 부인과 의사소통을 할 때 종종 한글이 쓰였다. 이는 그러한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자료다.
학봉 김성일 선생이 임진왜란 당시에 진주성 대첩을 거둔 뒤 진주성에서 순국하기 전 부인에게 보낸 편지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장모 모시고 설을 잘 쉬라는 당부와 ‘너무 그리워 말고 편히 계시오’라는 마지막 구절이 기억에 남아 있다.
최진립 장군이 남긴 기량서(寄亮書)라는 편지는, 자신의 둘째아들에게 보낸 것이다. 당시 맏아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 편지는 병자년(1636) 2월 초3일에 쓰여졌다. 당시 장군은 69세의 노구였다.
그리고 같은 해 용인 험천에서 적들과 싸우다 전사했다.
사후에 판중추부사 김시양은 “최진립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려는 뜻은 속으로 본래 정해서 창졸간에 전사한 유와는 다르니 그 문에 정려를 내리소서”라고 했고 지금 소위 신라의 고총인 ‘개무덤’ 앞에 정려되어 비와 비각이 함께 남아 있다.
이 편지는 아들에게 보내면서 그 말미에 며느리에게 한글로 적은 특징이 있다.
장군은 경주 현곡면 구미동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부친을 여의었고 25세 때 임란을 당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찔렀다. 27세 때 무과에 급제한 뒤 정유재란 때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왜적을 토벌했다.
이러한 공적으로 난이 끝난 뒤 선무공신에 녹선되었다. 그 뒤 오위도총부 도사, 마량진 첨절제사, 경원도호부사, 가덕진 수군첨절제사, 경흥도호부사, 경기 충청 황해 삼도수군통제사(인조11년) 직 등을 역임했다.
장군은 63세 때 공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임명되었다. 공조참판 직은 종3품의 고위직. 문치주의를 채택했던 조선시대에는 문과 출신의 문신이 이러한 직을 맡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이 직이 무과 출신의 장군에게 내려진 것은 능력과 국왕의 신임이 그만큼 두터웠음을 의미한다.
장군은 평생을 근신한 태도로 살았다. 종가의 사랑채는 ‘충의당’이지만 본래는 ‘흠흠당(欽欽堂)’이었다. 지금도 현판이 남아 있는데 이는 공경하고 공경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장군은 즉시 상소를 통해 사직했으나 윤허되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당시의 자료를 보면, ‘최진립은 무인으로서 몸가짐이 청근(淸勤)했기 때문에 이 직을 제수한 것이다’라 적고 있다. 무인이면서 무인답지 않고 선비의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장군이 남긴 한 장의 편지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문신에 못지않은 달필이다.
장군은 돌아가시던 해인 병자년에 공주의 영장이 되었다. 그 뒤 두 달 만에 남한산성이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 포위당했다.
경기감사 정세규가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勤王)하면서 장군이 나이가 많은 것을 배려해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자 강개하게 말하기를, “내가 늙어서 장수의 일을 감당할 수는 없지만 함께 따라 갈 수는 있습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동참했다.
용인 험천 지역에서 중과부적으로 몰리자 사람들을 둘러보고 “너희들은 반드시 나를 따를 것이 없다. 나는 여기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죽을 것이다”라 하며 활을 쏘며 분전했다.
난이 끝난 뒤 시신을 수습할 때 바로 그곳에서 온몸이 화살로 맞은 채 발견되었다. 당시 또 다른 감동적인 일화가 전해온다. 전황이 불리하자 자신을 평생 따르던 두 종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했다.
이때 환갑을 넘긴 종들은, “주인이 목숨을 버려 충신이 되는데 어찌 우리 종들이 충노(忠奴)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변하며 함께 목숨을 바쳤다.
종가에서는 이들의 영령을 기려 장군의! 불천위 제사 뒤 상을 물려 제사를 지내고 있다. 반상(班常)의 구분이 엄격했던 조선 시대에 양반들이 상민도 아닌 종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한 것이다. 지금도 이 제사의 전통은 이어오고 있다. 지금 종가에는 종노비와 비각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잠곡 김육이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글을 지은 바 있다. 제목은 ‘최진립청백사절포증의(崔震立淸白死節褒贈議)’. 청백의 최진립 장군이 난을 만나 목숨을 바쳐 절개를 지킨 사실을 기려 증직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논한 글이다.
그는 장군의 청풍대절(淸風大節)을 기린 뒤, ‘저 먼 시골의 무인 가운데 이러한 절행(節行)이 있는 이가 있었는가?’라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그는 논의의 말미에 청백리(淸白吏)로 녹해야 함을 역설했고, 공감을 얻어 모두 시행되었다.
장군은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정무공(貞武公)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청백리에 녹선 됨과 아울러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과 아울러 ‘충렬사우(忠烈祠宇)’라는 사액까지 내려지는 최고의 기림을 받았다.
현재 용산서원은 지방문화재로, 충의당은 지방민속자료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종가에는 장군이 심은 노거수 한 그루가 있다. 이 나무는 1905년에 갑작스럽게 고사했다가 1945년 경에 소생했다. 이는 일제에 의한 국권 상실과 이후 광복과 연관되어 널리 회자됐다.
노거수 앞에 장군의 얼을 길이 기리는 차원에서 기마 동상 건립을 추진 중이다.
‘잠와선생실기’가 목판으로 간행되었고 1975년에 국역되었다. 실기 서문은 청대 권상일과 해좌 정범조가 썼고 행장은 학사 김응조가, 묘갈명은 약산 오광운이, 묘지명은 홍문관 부제학 권해가, 신도비명은 용재 조경이 각각 지었다.
충신 최진립 장군의 집 ‘충의당’
이조는 내남면사무소가 있는 마을이다.
2007년 08월 20일 [경주신문]
이조는 내남면사무소가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마치 떠나가는 배의 형세를 하고 있는 행주형국(行舟形局)의 명당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은 배가 침몰하는 것을 방지하기위해 우물을 파지 않는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의 명장 정무공 최진립(崔震立 1568~1636) 장군이 살았던 곳이며 공의 3째 아들(東亮)로 이어지는 세계적인 명문가 교리최부자가 지금의 교동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만석꾼에 12대 진사의 기틀을 마련했던 배경이 된 마을이기도 하다.
ⓒ 경주신문사
이 마을은 개400년 전통 이은 최부자집 배출
의 무덤으로 알려진 큰 무덤이 있어 ‘개무덤’이라고 불렀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이야기가 전한다.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직한 개의 무덤이라는 이야기와 신라 진성여왕의 간부인 각간 위홍의 무덤으로 질녀인 진성여왕과 놀아난 그의 행실에 빗대어 개무덤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같이 전해오고 있다.
ⓒ 경주신문사
또 다른 이야기는 이곳이 미역내, 별내, 박달천의 세 거랑이 만나는 지점으로 갯거랑이 모인다고 ‘갯모듬[浦會]’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개무덤이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이 마을이 ‘포회(浦會)’로도 불렸다고 한다. 또 마을의 안산인 고위산의 천룡바위가 마을 앞 냇물에 비치는 풍광이 아름다워 ‘가암(佳岩)’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개무덤이라는 마을이름이 이조가 된 것은 예전에 이곳이 윤씨네들이 10여 호가 살았는데 이들이 마을을 많이 도왔다고 해서 ‘이조(伊助)’라고 했다고 한다. ‘이조(伊助)’가 300여 년 전의 문헌에 이미 등장한 것으로 미루어 오래전부터 이조라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조는 면사무소가 위치한 큰 마을인 ‘개무덤(이조)’을 이조1리, 그 남쪽 거랑 건너편의 ‘새각단(전포)’을 이조2리, 동쪽 산기슭에 자리한 ‘용산’을 이조3리로 구획하고 있다.
행주형국(行舟形局)의 명당
ⓒ 경주신문사
이조1리는 경주최씨 집성촌으로 정무공이 살았던 집인 종가댁 충의당을 중심으로 정무공의 후예들이 80여 호가 생활하고 있다.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으며 방울토마토, 토마토, 딸기를 생산하고 있다. 방울토마토는 2농가에서 2천여 평, 토마토는 10여 농가에서 1만여 평, 딸기는 10여 농가에서 1만여 평을 경작하고 있다. 총 230가구에서 500여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올해 100살의 김분술(노국댁) 할머니로 아직도 집안일을 할 정도로 건강하고 기골이 좋은 편이다.
동제 이 마을은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아침에 동제를 지낸다. 제관은 마을사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당목 마을 북쪽에 있는 오래된 회나무이다. 일제강점기 때에 회나무 안에 거지들이 살다가 불을 내서 나무가 죽었다가 3년 만에 싹이 나고 되살아났다고 한다.
또 6.25때 미군들이 이곳에서 보초를 서면서 나무에 석유를 뿌리고 불태워 죽었지만 몇 년 만에 또다시 되살아났다고 한다. 지금은 무성하게 잘 자라고 있고, 영험 있다고 빌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개의 무덤 있어 ‘개무덤’
개무덤 이 마을에는 개무덤과 관련해 다음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어느 여인이 남편을 일찍 사별하고, 남매를 훌륭하게 키우고 죽었다. 염라대왕은 이 여인을 아들 집 개로 환생하게 해주었다. 개가 자라자 아들 최씨가 개를 잡아 먹으려고 했다. 이를 눈치 챈 개가 달아나 버렸다. 최씨는 개를 찾아다니다가 한 스님을 만났는데 개가 어머니가 환생한 것이며 평생을 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하다가 절 구경도 한 번 못하고 돌아가셨으니 구경이나 잘 시켜 드리라는 이야기와 함께 개가 누님 집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누님 집에서 개를 찾은 최씨는 개를 업고 팔도를 두루 돌며 명산대천을 구경시켜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곳에 이르자 개가 발로 땅을 파더니 죽어버렸다. 최씨가 슬피 울며 개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 후 최씨는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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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작도(天作棹) 이 마을은 마치 배가 나아가는 형상이라고 하는데, 마침 개무덤 자리에 돛대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어 사람들은 마을이 길할 징조라며 이 바위를 매우 신령스럽게 생각했다. 과연 마을은 해마다 풍년이 들고 질병이 없었다. 그러나 강동의 양동마을에서는 그곳 못에 이 바위가 비치기만 하면, 흉년이 들고 괴질이 나돌았다고 한다. 그래서 양동사람들이 돛대처럼 생긴 바위를 깨뜨렸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이 애통해 하며 마을에 복을 준 바위의 깨진 조각을 모아 무덤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개무덤’이라 하였다. 그리고 무덤 위에 다시 잘 생긴 바위를 돛대처럼 세우고 ‘하늘이 만든 노’라는 뜻의 ‘천작도(天作棹)’라 불렀다.
정무공 3살 때부터 살아
충의당(忠義堂) 이 건물은 병자호란 때 순절한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 3살 때부터 살았던 집이다. 처음엔 흠흠당이라고 했으나 1760년경 건물을 중수하면서 충의당으로 고쳐 불렀다. 앞쪽의 충의당을 중심으로 뒤에 흠흠당과 고방채, 그 뒤에 안채를 배치한 ‘ㅁ’자형 구조이다. 충의당은 정면 4칸, 옆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왼쪽 2칸은 온돌, 오른쪽 2칸은 마루를 배치했다.
정무공은 임진왜란 때 창의해 전공을 세우고 선조 27년(1594)에 무과에 급제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서생포(西生浦)의 적을 격멸하고, 권률(權慄) 도원수와 함께 도산(島山)에서 크게 적을 무찔러 선무원종이등공신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는 69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용인에서 적의 대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했다. 다음해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인조 18년(1640) 충신정려(忠臣旌閭)를 받았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다.
정무공 부조묘(貞武公不祖廟) 경주최씨 정무공파 종가인 충의당(忠義堂)에 있는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의 부조묘이다.
정무공 정려비각(貞武公旌閭碑閣)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정문으로, 인조 18년(1640)에 정려 받아 개무덤 남쪽에 세운 정려비각이다.
종 제사 지내는 상전
남강서당(南岡書堂) 이조 서쪽에 있던 서당으로 남강 최언경(崔彦璥)이 지었다고 한다. 고속도로 서편에 있었는데 관리가 안 되고 노후 되어 20년 전에 헐었다. ‘수족당’이라고도 했다.
충노각 최진립 장군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평생을 도우다 병자호란의 용인전투에서 장군과 함께 장렬히 전사한 충성스러운 노비 옥동(玉洞)과 기별(奇別)의 뜻을 기리고자 장군의 후손들이 2000년에 세운 비각이다. 이 두 노비들은 장군의 사당에서 불천위제향을 받들 때 제상을 물려놓고 옥동과 기별의 신위를 모셔 장군의 후손들이 제배하고 충노의 은공을 기려오고 있다. 종은 제대로 사람대접조차 받지 못하던 터에 종의 제사까지 지내주는 일은 당시의 사회관습으로써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가문은 지금까지도 종의 제사를 지내오고 있고, 최근 비각까지 세우는 인간애를 실천함으로써 명문가다운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수족당(睡足堂) 최제익(崔濟翼)이라는 선비가 공부하였다고 하는 남강서당에 있는 서재.
화주배기 이 마을에서 공부하던 경주최씨(慶州崔氏)가 과거에 급제하여 화주(솟대)를 세웠다고 하는 곳으로, 지금의 내남면사무소 부근 삼성생활예술고등학교 자리라고 한다.
활인당(活人堂) 옛날 이곳에 빈민 구제를 위하여 곳간을 지어놓고 곡식을 저장하였다가, 흉년이 들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활인당이 있었던 곳으로, 이조 동쪽에 있다. 옛날 전염병 환자를 이곳에다 격리·수용하였다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의 내남의원 자리이다.
“저기 돌이 걸어간다”
선돌 개무덤에 있던 돌을 양동사람들이 와서 깰 때 돌의 일부분이 북쪽으로 뛰어가는데 마을 여자들이 “저기 돌이 걸어간다”고 해서 그 자리에 섰다고 한다. 개무덤 북쪽 논둑에 있다.
도덕골 송단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조천(伊助川) 남쪽의 미역내, 동쪽의 별내, 서쪽의 박달천이 이조에서 합수하여 이조천이 되며, 기린내의 상류를 이루는데 ‘상내(湘川)’거랑이라고도 한다.
마도랑 덕천·부지·이조·용장의 경계를 이루면서 흐르는 내로, 남쪽(마)에서 북쪽으로 흐른다고 ‘마도랑’이라고 했다. 혹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이곳에서 말의 물을 먹였다고 한다.
비복(飛伏)테 새각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임진왜란 때 적을 막기 위해 이 골짜기에 날랜 군사들이 매복해 있었다고 한다.
고기가 형산강 거슬러 오를 수 있게
정무공과 같은 불세출의 충신과 12대 400년을 유지해온 최부자라는 세계적인 명문가를 배출한 개무덤은 보기 드문 명당 마을이다. 배가 나아가는 형국이라는 개무덤. 배에 짐이 가득 실리면 떠나가듯 부자가 되면 이 마을을 떠난다고 한다. 교리 최부자가 그랬고, 일본에도 이 마을 출신의 부자들이 많다고 한다. 앞으로도 이 마을의 땅기운을 받아 명문가와 부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면 좋겠다.
이 마을은 형산강 상류에 위치한 마을이라 상수원보호구역이고, 경주남산에 인접한 국립공원지역이어서 각종 규제가 많아 다른 마을에 비해 낙후된 마을이라고 한다. 정주권 사업이 이루어져 마을이 좀 개발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또한 형산강 상류에 있는 이곳에 예전에는 고기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각종 어종이 형산강을 거슬러 올라올 수 있도록 고기들이 다닐 수 있는 어로를 확보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최병준(80·경주향교 전교), 최병완(75·전 문교부 총무국장), 최병윤(70·전 국세청장), 최상용(66·고려대 교수), 최영기(52·서라벌대 교수), 최석규(50·서라벌대 교수) 등이 있다.
도움 말씀을 주신 최채량(75·정무공 14세손 충의당 정무공 종가댁 종손)님과 마을을 안내해주신 최병웅 이장, 김경태 새마을지도자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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