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도 이제 차츰 바닥이 나고 이제 15년 전 일기를 닫을 때가 되었나 봅니다. 그간 엄마랑 놀아드리느라 미루어 놓았던 마지막 일기를 올립니다. 안 쓰다 보니 차츰 게으름이 나서 그냥 그만 쓸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마무리는 해야겠지요.
참, 그리고 이 이야기를 자위모가 아닌 궁시렁에 올리게 된 거에 대해 후배 여러분들께 약간의 미안함을 느낍니다. 자위모에 진을 치고 있는 1기들 등쌀에 좁은 스페이스에서 궁시렁대고 있는 우리 후배 님들, 전 처음 가입했을 때 분위기를 잘 파악 못해서 자위모는 아주 대단한 사람들 모임인줄 알았지 뭡니까. 그래서 이건 잡담이야기니까..하고 궁시렁을 이용한 겁니다. 근데..그간 쉬면서 카페 출입을 하다보니 차츰 분위기 파악을 하게 된 겁니다. 자위모는 단지 경로당이며 따라서 이 글도 자위모의 성격에 맞는 이야기란 걸... 암튼 게시판의 성격에 비해 너무 무거운 글을 올린 것 같긴 하지만, 처음에 궁시렁에 시작을 했으니 초지 일관 여기에 올릴까 합니다. 괜찮죠? ^^;; 그리고 실은 후배 님들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랍니다.
대학만 바라보고 달려오다가 막상 시험이 끝나고 나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더 이상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들도 없고, 언제 그렇게 많은 시간들이 내게 공백으로 주어진 적도 없었고 ... 그래서 전 그간 고딩이라서 하고싶어도 못했던 것을 하고, 하기 싫어도 해야 했던 것은 안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일단, 가장 하기 싫었던 것! 바로 학교 가기였습니다. 대입 후 한번도 안 갔습니다.-_-;; 사실 그때는 학교가 너무 싫어서 더 이상 왜 나가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더랬죠. 단체로 박물관에도 가고 그랬던 모양인데, 가고 싶지 않은 박물관 따위에 끌려 다니느니 전 그냥 집에서 읽고 싶었던 책이나 보며 지내자 했었죠. 아마도 그땐 혼자서 무지 잘난 척을 했었나 봅니다. 다들 -나 자신조차- 범생이로만 알고있던 제게 이런 발칙한 면이 있을 줄이야...
이렇게 저의 학교 혐오증은 시작되어서 대학교 1학년 때는 공연히 휴학까지 하게됩니다. 국민학교 입학이후 12년을 세월에 떼밀려 학교를 다니다 대학생이 되어 "휴학"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접하니 객기가 발동한 결과였죠. 아, 이젠 내가 내 학교생활을 컨트롤 할 수 있구나 그런 깨달음과 함께... 제 청춘의 방황이 그렇게 시작된 겁니다.
잠깐 이야기가 딴 데로 흘렀군요. 다시 원래의 리스트로 돌아가서, 그 다음으로 하고 싶었던 일은 술집에 가보는 것이었습니다. 합격자 발표를 며칠 앞두고 빈둥거리던 어느 날, 친구 집에 몇 명이 모여 놀다가 "카페"라는 곳에 한번 가보자고 의기투합했습니다. 동네를 헤매 다니다가 제일 만만한 곳을 하나 찍어서 네 다섯 명이 우르르..하고 들어갔습니다. 보무도 당당하게...당연히 우아하게 칵테일이나 맥주를 마실 계획이었죠.
그런데 결과는... 입구에서 거절당했습니다 -.-;;. 이른바 뺀찌를 맞은 겁니다, 미성년자라고. 것도 동네 변두리 후진 카페에서... ㅠ.ㅠ 풀이 죽어 나오던 우리는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네 옷이 너무 고딩같다, 네 머리가 너무 애 같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밖에 안나오는 도토리 키재기였죠.
다들 20번 안짝으로 고만고만한 키에, 단발머리 아님 바가지 머리, 촌스러운 옷차림... 그 중에 압권은 권 모양이 신고있던 방한화였습니다. 왜 국민학생들 신는 발목까지 오고 투박하게 생긴 하얀 방한화 아시죠? 캔디도 그려있고 남자애들 용으론 그랜다이저 그림두 야광으로 붙어있는^^... 경악스럽게도 우리 반의 귀염둥이 권 모양은 그런 신발을 고딩때까지 신고 다녔던 겁니다!!! (내 그녀의 명예를 생각해서 단지 걔 이름이 네 글자 였다는것만 밝히겠습니다.
-.-;; ) 본인은 따뜻해서 좋겠지만 이건 정말 친구들한테는 거의 만행이죠!
합격자 발표를 혼자서 보러갔다 집에 오는 길에 미장원에 들러서 머리를 볶구 왔습니다. 빠마라는걸 한 거죠. 고딩땐 특정 아이들만 하던, 대부분 아이들에겐 금지되어 있던... 엄마 다니던 동네 미장원서 파마에는 무슨 종류가 있는지, 무슨 파마가 예쁜 지도 모르는 채 무조건 "파마해주세요" 라고 해서 볶은 머리니 지금 생각하면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의 뽀글뽀글 아줌마 파마였죠. 그땐 왜 그렇게 그간의 금기를 하나씩 깨뜨리는 게 중요했는지 마냥 좋기만 했죠.
고등학교 졸업식도 안 갔습니다. 그간 졸업식은 무조건 가야 하는 줄만 알고 갔으니 이제 한번 안가 보자...뭐 이런 마음도 있었고, 다신 학교 쪽으론 오줌도 안 눈다...뭐 이런 마음도 있었죠. 아마도 개길 수 있는 한 모든 것에 개겨보자... 이런 치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 졸업앨범도 없습니다. 친구들 얼굴을 찾아볼 수 없으니 요즘은 퍽 아쉽군요.
암튼 그렇게 고딩시절을 마감하고 대딩이 되어서 휴학과 함께 질풍노도의 세월을 보내다 복학을 하니 인헌고 동문회가 어느새 조직되어 있더군요. 고딩땐 얼굴이랑 이름정도만 알고 지냈던 아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차츰 재미를 붙이게 되더군요.
그래서 연대 대구 계성고 동문회랑 조인트를 성사시킨 공로로 동문회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소개팅을 했는데 똑똑하구, 착하구, 잘생기구 ( 당시 본 애들이 "무지개 카"라고 했습니다, 아깝당...흑흑 ㅜ.ㅜ) 다 좋은데... feel 이 안 오는 그런 상대랑 동문회 이야기를 하다가 "그럼 조인트 할까?" 이렇게 된 거였습니다. ( 고등학교는 공학이라도 여대를 오다보니 남자가 아쉽더군요...^^). 그렇게 내 한몸 희생해 만든 조인트 동문회는 우리 쪽은 2기들이 전멸, 그쪽은 대거 합격, 또 우린 3기 대거(?)합격 그쪽은 비실...하면서 점차 나가리 됐습니다.
애타게 기다리던 2기가 전멸하고서 본 3기들!! 똑!소리나구, 깨물어주고 싶게 이쁘고 귀여운 넘들이었습니다. 우리 학교 전체 수석 입학도 인헌 3기 중에서 나왔었죠. 참교육 열풍을 현역으로 겪은 3기들이 들어오면서 제가 졸업한 이래로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알게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사랑하던 그 선생님들의 마지막 수업이야기며, 당시 고 3이던 그 아이들이 보여준 용기도... 너무 부끄럽고 미안했습니다. 선배라고, 그 아이들이 그렇게 힘겹게 싸우고 있을 때에 별로 도와주지도 못하고...선생님들이 교단을 떠나시는 것을 그냥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었다니...
저는 후배들 덕분에 제가 얼마나 인헌을 사랑했었는지를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카페를 만들어 이렇게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게 된 것도 후배들 덕분이지요. 고맙습니다, 후배 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