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략결혼, 스스로 어둠 속에 갇히다
그 무렵 일본은 덕혜옹주를 일본 왕족과 결혼시킴으로써 한국인들의 기억에서 그녀의 존재를 지워버리고자 했다. 그렇듯 막후에서 자신의 혼사 문제가 거론되고 있었지만 당사자인 덕혜옹주에게는 어떤 선택권이나 결정권이 없었다. 당시 그녀는 정신분열증이 악화되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손님이 찾아 왔는데도 아무 말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크게 웃어젖히는 바람에 상대를 놀라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의 혼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일본 왕실에서는 덕혜옹주의 남편으로 쓰시마의 36대 도주 24세의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를 내정했다. 도쿄제국대학 영문과 3학년 이었던 그는 다재다능한 청년으로 대마고등학교 교가를 작사 작곡하고 대마도지에 시를 기고 했으며 유화를 잘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가 폐번치현(廢藩置縣. 번을 새로운 중앙집권적 행정구역인 현으로 바꿈) 이후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자 후원자였던 사다코 왕후가 의도적으로 덕혜옹주와 맺어주었다.
소 다케유키도 정략결혼의 희생자였다. 덕혜옹주가 아무리 고귀한 신분에 지참금도 많다지만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을 아내로 맞이해야 하는 그 역시 심사가 편할 리 없었다. 그렇지만 왕실의 일원으로서 명령이 떨어진 이상 순종하는 것이 그들의 생존방식이었다.
1931년 5월 8일 덕혜옹주가 결혼식을 치르자 조선 백성들은 비탄에 빠졌다. 조선일보는 그녀의 결혼식 사진을 게재하면서 의도적으로 남편 소 다케유키의 얼굴을 지워버리기까지 했다.
소 다케유키는 신혼 초기 각종 행사에 덕혜옹주와 부부동반으로 나타났는데 표정이 밝았다고 한다. 그러나 덕혜옹주의 증세가 심해지면서 갈등이 깊어졌다. 그 무렵 일본 사회에서 정신병은 부끄러운 일로 취급받았으므로 소 다케유키는 두문불출 하며 아내를 간병 했고, 그녀가 자꾸 밖으로 뛰쳐나가려 해서 발목에 족쇄를 채워놓기도 했다.
[영상자료 – 덕혜옹주 소설 OST:
부제목- 눈물꽃]
-눈물꽃
가사-
바람에 스치듯
내 아련한
지난 기억
속에
햇살 속에서
내 손등
위에
꽃잎을 놓아주던
내 님이여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내 가슴에
꽃이 눈물이
되어 흐르네.
사랑아~~ 나를 지나가네.
이제와 내가
세상 속에
돌아온 이유를
알고 싶은지
내 뺨에
흐르는 내
기억들 모두
꽃 되어
내 가슴에
피네
눈물로 내
맘에 흐르네.
일본의 의도대로 그때부터 덕혜옹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사라졌다. 남편 소 다케유키도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외부와의 교류를 끊어 버렸다. 침묵의 나날 속에서 그녀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 귀족들의 근황을 담은 《황실황족성감》에 덕혜옹주가 1932년 8월 14일에 딸 소 마사에(宗正惠)를 낳았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그 후 태평양 전쟁의 패전으로 일본에 미군정이 들어섰다. 1947년 10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신적강하(臣籍降下), 즉 '왕족의 특권을 포기하고 평민이 된다는 결정’에 따라 일본의 왕족들은 연금을 비롯한 각종 면세 특권을 박탈 당했다. 이때 소 다케유키도 백작이라는 작위와 재산상의 특권을 잃었다. 이왕가 역시 왕족으로 간주 되었으므로 덕혜옹주에 대한 지원도 끊어졌다.
궁지에 몰린 소 다케유키는 간병에 지쳐버렸는지 1946년 그녀를 마쓰자와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10년 뒤인 1955년에는 영친왕 부부와 협의한 끝에 이혼했다. 그리하여 덕혜옹주는 어머니의 성씨인 양(梁)과 봉호인 덕혜를 조합한 ‘양덕혜’(梁德惠)라는 이름으로 따로 호적에 등재되었다.
이혼과 함께 소 다케유키가 혼례물품과 딸 마사에의 한복, 생활용품 등을 돌려보내자 영친왕 부부는 화가 치밀었던지 그것들을 모두 문화여자단기대학 학장 도쿠가와 요시치카에게 기증해 버렸다.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와 이혼한 그 해에 가츠무라 요시에라는 일본 여성과 재혼하여 2남 1녀를 얻었다.
현재 쓰시마 이즈하라 항구의 시미즈 공원에는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결혼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31년 10월 덕혜옹주 부부가 대마도를 방문했을 때 쓰시마의 조선인 단체인 상애회 회원들이 성금을 모아 팔번궁신사 경내에 ‘이왕가종백작가어결혼봉축기념비(李王家 宗伯爵家御結婚奉祝記念碑)를 건립했다. 그런데 1955년 두 사람이 이혼하자 주민들이 쓰러뜨린 후 방치하다가, 2001년 부산-쓰시마 직항선박인 씨플라워호 취항으로 한국인 관광객이 늘어나자 전시용으로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파랑새처럼 날아가다
조국에서 잊히고 남편에게 버림받은 덕혜옹주는 자신만의 세계에 웅크린 채 꿈꾸듯 살아갔다. 이런 그녀의 존재가 어린 시절 약혼할 뻔했던 김장한의 친형 김을한 기자에 의해 세상 밖으로 알려졌다.
1950년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으로 부임한 김을한 기자는 소 다케유키에게 전화를 걸어 덕혜옹주의 근황을 물었지만 입원중이라는 냉담한 답변을 받았다. 그는 영친왕을 만나고 나서야 그녀가 매월 1만원에 달하는 비싼 입원비를 내고 마쓰자와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길로 병원을 찾아가 보니 옹주는 멍한 눈빛으로 독방에 홀로 앉아있었다. ‘한때 고귀했던 왕녀가 저토록 초라한 몰골로 변하다니…….’ 비감에 젖은 김을한 기자는 그 때부터 정부 요인들을 찾아가 덕혜옹주를 조국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영친왕의 귀국조차 용인하지 않던 속 좁은 이승만 정부가 덕혜옹주의 신변에 신경 쓸 리 만무했다.
1956년 8월 29일자 일본 마이니치신문에 덕혜옹주와 관련된 또 하나의 비보가 게재되었다. 당시 24세였던 그녀의 딸 마사에가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가출했다는 것이었다. 경찰이 수색작업에 나섰지만 그녀는 영영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게 덧없는 세월이 흘러갔다. 한국에서는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이 종말을 고했고, 1961년에는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 소장이 정권을 잡았다. 그해 11월 12일 미국 방문길에 오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도쿄에 들렀다. 그때 김을한 기자는 박정희를 찾아가 덕혜옹주의 귀국을 간청했다. 그러자 망국의 왕족을 돕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익하다고 여긴 박정희는 전폭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1962년 정초에 고종황제의 손자 이우공의 부인 박찬주 여사가 둘째아들 이종과 함께 CAT 편으로 그녀를 데리러 일본으로 날아갔다. 그리하여 1월 26일, 51세의 덕혜옹주는 38년 동안의 원치 않던 일본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를 실은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착륙하자 소학교 동창 민용아와 당시 72세였던 유모 변복동이 눈물을 흘리며 맞이했다. 변씨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땅바닥에 엎드려 큰 절을 올리기까지 했다. 그녀는 이후 1972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성을 다하여 옹주를 돌봐주었다.
덕혜옹주는 곧바로 창덕궁 낙선재로 가서 순정효황후 윤씨를 만난 다음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했다. 그해 해 2월 8일 그녀는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고 ‘이덕혜’란 이름을 되찾았다. 그해 3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위원회는 〈구황실재산법〉을 제정하고 왕족들에게 생계비를 지원했다. 그 혜택을 받은 덕혜옹주는 7년 동안 병원에 머물다. 1967년 5월, 퇴원하여 낙선재에 들어갔다.
1968년 가을 창덕궁 낙선재 안에 있는 수강재로 거처를 옮겼다. 그 무렵 전 남편 소 다케유키가 낙선재로 찾아왔지만 그를 미워하던 종실 관계자들이 매몰차게 쫓아냈다. 어렵사리 옛 아내를 만나러 왔던 소 다케유키는 허탈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1985년 77세의 나이에 쓰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소 다케유키는 일본 왕실의 일원으로서 일왕의 명령에 따라 결혼했지만, 아내의 심화된 정신병 때문에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유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생전에 쓴 시에는 덕혜옹주를 ‘사랑하는 아내’로 묘사하고 있다. 덕혜옹주도 1989년 4월 21일 창덕궁 수강재에서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곳에는 옹주가 맑은 정신일 때 썼다는 한 장의 낙서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