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펜, ‘쓰리두들러 2.0’의 소개 동영상. <출처: 3Doodler>
점이 모이면 선이 되고, 선이 모이면 면이 된다. 기하학의 기본 원리다. 수업 시간에 모눈종이 위에 X축과 Y축을 긋고 좌표를 찾아 점을 찍어 선으로 이으면서 그래프를 예쁘게 그리려 식은 땀을 흘리던 기억이 선하다. 우리는 점·선·면을 익혔다. 그럼 면이 모이면 뭐가 될까.
답은 입체다. 선은 1차원, 면은 2차원이다. 면이 모이면 우리가 사는 세상, 3차원이 된다. 선을 긋던 펜으로 면을 만들고, 그 면을 모아 입체 도형을 그릴 수 있다면 어떨까. 이런 기기는 이미 세상에 있다. ‘3D프린팅 펜’(3D펜)이다.
최초 상용 3D펜, ‘쓰리두들러’
처음 상용화된 3D펜은 ‘쓰리두들러’(3Doodler)다. 장난감 개발자 맥스웰 보그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출신 피더 딜워스는 2010년 워블웍스(WobbleWorks)를 세웠다. 워블웍스의 첫 번째 제품이 쓰리두들러였다.
이들이 가지고 나온 아이디어는 간단하다. 3D프린터가 물건을 그리는 방식을 펜으로 옮기자는 것. 워블웍스는 사용하던 3D프린터가 오작동해 쪼개져 나온 결과물을 접붙일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3D펜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밝혔다.
이미지 목록 쓰리두들러를 사용 중인 모습. | 쓰리두들러로 만든(또는 그린) 입체 조형물. |
3D프린터가 물건을 만드는 방식은 여러가지다. 이 가운데 가장 널리 쓰이는 방식이 열가소성수지(FDM) 방식이다. 열가소성수지는 열을 가하면 물렁물렁해지는 재료를 가리킨다. 보통 ABS나 PLA 같은 합성 플라스틱을 일컫는다. FDM 방식 3D프린터는 재료를 녹인 뒤 노즐로 한층한층 쌓으며 물건을 만든다. 케이크에 생크림을 얹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케이크 빵이 없고 생크림만으로 모양을 만든다는 점, 그리고 생크림이 금방 플라스틱으로 굳어진다는 점이 다르다.
워블웍스는 플라스틱을 녹여 물체를 그려내는 노즐을 따로 떼내 펜으로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FDM 방식 3D프린터를 만드는 핵심 부품이 노즐이다. 노즐은 재료로 쓰는 플라스틱 막대를 뜨겁게 끈적한 상태로 만든다. 이게 안에서 굳지 않도록 일정한 속도로 밀어내면서 노즐 밖으로 나간 뒤에는 재료가 바로 식어 굳어지게 해야 한다. 그래야 재료를 ‘쌓아’ 입체적인 물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제조 과정은 까다롭지만 워블웍스는 단순하면서도 재밌게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펜으로 그림을 그리듯 누구든지 3D펜으로 물건을 만들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름도 3D와 낙서꾼(두들러, doodler)을 합친 쓰리두들러라고 지었다. 이들은 저렴한 가격에 쓰기 쉬운 제품을 제공하기 위해 3년 동안 제품 개발에 매달렸다. 2013년 2월 킥스타터에 시제품을 선보였다.
워블웍스는 제품 제작비로 한 달 동안 3200만원(3만달러)를 모으겠다고 나섰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이들은 한 달 만에 25억6400만원(234만달러)를 모았다. 제품을 대량으로 만들기 충분한 자금이 모인 덕에 쓰리두들러는 처음으로 상용화된 3D펜이라는 자리를 차지했다. 국내에서도 12만5천원에 쓰리두들러를 살 수 있다. 워블웍스는 올해 초 더 작고 가벼운 3D펜 ‘쓰리두들러2’를 선보였다. 킥스타터에서 초기 제품 제작비로 17억원(155만달러)을 모았다
쓰리두들러가 복잡한 3D프린터를 간단한 펜으로 옮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자 많은 회사가 개량된 3D펜을 내놓았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제품 2가지를 더 보자.
펜에 가까운 3D펜, ‘릭스’
펜과 비슷하게 만들어 사용성을 개선한 3D펜, 릭스(Lix)
릭스(Lix)는 투박한 쓰리두들러보다 훨씬 펜에 가까운 3D펜을 만들었다. 3D 프린팅 펜 릭스는 말 그대로 입체적인 물체를 ‘그려내는’ 펜이다. 기존 펜이 활동하는 영역은 종이고, 스마트펜의 활용 영역이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의 디스플레이 속이라면, 릭스의 영역은 바로 공간이다. 허공에 물체를 그려내는 것만으로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입체 물체를 뚝딱 완성할 수 있다.
릭스의 원리는 이렇다. 보통 350도에서 450도 사이의 열에 의해 녹는 ABS나 PLA 소재를 릭스 펜 뒤에 삽입한다. 소재는 두꺼운 끈처럼 만들어져 쉽게 끼울 수 있다. 펜 몸통 속에 들어간 소재가 펜촉의 열처리장치를 통과하며 강한 점성을 띠게 되고, 이 점성을 띤 소재로 그림을 그려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허공에도 자유자재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까닭은 펜촉을 통과해 공기중으로 나온 소재가 빠른 속도로 굳는 덕분이다. 흔히 ‘글루건’이라고 부르는 고체형 접착제를 쏘는 기기의 원리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릭스로 만든 결과물. 다른 3D펜보다 훨씬 정교하다.
릭스는 작고 가볍다. 무게는 40그램, 크기는 보통 쓰는 볼펜 정도다. 재료로 쓰는 플라스틱 두께도 1.75mm밖에 안 된다. 우리가 보통 쓰는 샤프 연필이 0.5mm다. 노즐이 작은 만큼 정교하게 작업을 할 수 있다. 전원도 컴퓨터 USB 포트에서 마이크로USB 포트로 끌어다 쓴다.
릭스는 지난 2014년 5월 말 킥스타터에서 초기 제작비 12억원(73만파운드)을 모았다. 15만원(140달러)에 예약 판매를 시작할 예정이다.
플라스틱 안 쓰는 안전한 3D펜, ‘크레오팝’
3D펜이라고 모두 플라스틱만 써야할까. 아니다. 다른 재료를 쓰는 3D펜도 있다. ‘크레오팝’이다. 크레오팝은 플라스틱을 녹이지 않는다. 펜에 빛을 비추면 굳는 특수 잉크(포토몰리머)를 담고 이걸 내보내며 자외선을 쏴 굳힌다. 열을 가해 플라스틱을 녹이지 않아도 되니 냄새도 안 나고 전기도 적게 먹는다. 전원선을 꽂지 않고 배터리를 충전해 쓰면 되니 간편하다. 또 350도가 넘는 열을 가하는 부품도 없어 아이들이 쓰기에도 안전하다.
크레오팝은 지난해 8월 중순 크라우드펀딩 웹사이트 인디고고에서 초기 제작비로 2억2400만원(20만달러)을 모았다. 지금은 119달러(13만원)에 예약 구매를 진행 중이다. 올 4월 출시될 예정이다.
플라스틱 대신 특수 잉크를 쓰는 3D펜 크레오팝.
아직은 장난감에 가까운 3D펜, 가능성은 무궁무진
3D펜은 평면 속에 그림을 그리던 펜의 영역을 우리가 사는 3차원 세상으로 넓혔다. 마치 3D프린터가 했듯이 말이다. 아직 3D펜은 장난감 수준이다. 3D프린터처럼 정교한 작업을 하려면 따로 도면을 만들어 평면 위에 모양을 만든 뒤 다시 이어붙여야 한다.
하지만 3D펜만 지닌 장점도 있다. 일단 3D프린터보다 훨씬 친숙하다. 사용법을 익히기 쉽다. 컴퓨터가 없어도 쓸 수 있기 때문에 컴퓨터 그래픽을 어려워하는 이도 쓸 수 있다. 3D프린팅 원리를 익히는데 활용해도 되겠다. 인위적인 느낌보다 손맛을 살리고픈 예술가도 3D펜을 반길지 모르겠다. 가격도 보통 수백만원대인 3D프린터보다 훨씬 저렴하니 취미용으로 하나쯤 구비해 봄직하다.
애초에 3D펜을 개발한 워블웍스는 쪼개진 3D프린팅 조형물을 붙이려는 데서 3D펜이라는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3D펜은 3D프린터를 거드는 정도에 머물지도 모른다. 그러나 3D프린터가 프린터보다 훨씬 큰 가능성을 열어젖혔듯 3D펜도 모태인 3D프린터보다 더 큰 잠재력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재와 기술이 개발되면 3D프린터만큼 정밀한 작업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3D펜은 어떤 미래를 그려갈까. 그건 전적으로 3D펜을 쥔 우리 손에 달렸다.
참고자료
· [IT탐구영역] 3D 프린터 <블로터>
· 3D 프린터로 아이폰 케이스 ‘출력’해보니 <블로터>
· 쓰리두들러 웹사이트
· 쓰리두들러 킥스타터 페이지
· The New 3Doodler 2.0 Is A Streamlined Plastic Squirting Machine <테크크런치>
· 릭스 웹사이트
· 릭스 킥스타터 페이지
· 크레오팝 웹사이트
· 크레오팝 인디고고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