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의 유래 - 자라바우,자르바,자래바위,굴암(窟岩),별암(鼈岩) (틀린 부분이나 새로운 사실이 있으면 댓글 부탁 합니다 *~^^~*)
별암(鼈岩)은 삼한시대에는 진한계 호로국(戶路國)으로 불리웠으며 함창,점촌, 호계지역이 이곳에 속하였는데,삼국시대에는 호측현(虎側縣)혹은 배산성(拜山城)이라고도 하였다. 통일신라 시대인 경덕왕 16년에는 지방제도의 개편으로 9주,5소경,117군, 293현으로 분류되어 호계현(虎溪縣)이 되었으며 고려시대까지 호계현으로 불리워졌다.
자라바우는 1914년 주평시장 등 일부를 포함하여 별암리(鼈岩里)라 하고 호계면(虎溪面)에 편입 시켰다. 지금은 막곡리에 있는 면사무소가 별암에 있었고 1921년 10월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별암은 1519년경 영천사람 이씨(李氏)가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였는데 민씨(閔氏)도 이씨 만큼 소규모의 집성촌을 이루고 많이 산다. 나의 별암 동창들도 20명중 이씨와 민씨가 14명이다.
자라바우는(자래바우)는 마을앞 개울에 자라모양의 바위가 있어 자라바우 또는 별암이라 하였는데, 자라바위는 구경 한 기억이 없고 뜨거운 한여름 철이면 어린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멱을감고 놀던 "떡바우"라고하는 바위가 깊은 소(沼)근처에 있었는데 그 바위 위에 올라가 배치기(?) 다이빙도하고 놀았던 기억이있다. 떡바우 물속에는 물고기가 숨을수 있는 공간이 많아 대나무에 고무줄과 철사를 이용한 작살총으로 메기나 꺽쥐등을 잡아 올리는 성과도 있었다. 옛날에 많은 사람들이 놀던 그 떡바우도 지금은 콘크리트 잔재물인 별암교와 서울을 잇는 도로에 묻혀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별암은 자라바우 말고도 굴암(窟岩)이라고도 하였는데 많이 사용한 이름은 아니고 뒷산에 용이 등천하였다는 천연 석회동굴이 있는데서 비롯된 것 같다.
지금은 서울로가는 도로가 개설되어 없어지고 말았지만 영강이 흐르는 떡바우 우측을 보면 별암에서 견탄으로 넘어가는 절벽길이 하나 있었다 이 길을 "비리등"이라 했고 갱빈(호계중학교)에서 뱃나들로 넘어가는 고갯길도 비리등 혹은 비리재라 하였는데 비리라는 말은 진남의 토끼비리(兎遷-토천)나 관갑천(串岬遷)으로 불리던 잔도가 연상된다. 향토사료집에 따르면 신라 경애왕 4년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산양)을 점령하고 신라의 서울로 쳐들어가니 경애왕은 왕건에게 구원을 청하였다.왕건은 사세가 급박한지라 정기 오천으로 촉박하게 진군하였으나 고모산성에 이르러 더이상 진군할 길이 없었다.(태조왕건 드라마에 나왔슴) 장대처럼 쏟아지는 비에 강물은 홍수를 이루어 길이 없었고 앞에는 절벽이라 갈 길이 막막한데 신라는 풍전등화의 위급지경이라 한숨 푹푹!! 쉬며 고민하고 있을 때 토끼 한 마리가 절벽을 가로질러 나아가는 것을 보았다.그것에 영감을 얻어 토끼가 지나간 길을 따라 군졸들이 길을내어 이 험로를 통과하니 토(兎)는 토끼라는 얘기고 천(遷)은 오르다,옮기다는 뜻이며 그리하여 이곳의 지명이 토끼비리,토천(兎遷),혹은 관갑잔도(串岬棧道-관갑의 사다리 길)라 부른다. 강이나 바다에 접해있는 벼랑부근에 형성된 길을 "벼룻길" 이라고 하는데 별암의 비리등이나 갱빈의 비리등(재)는 벼랑이 사투리로 비루,혹은 비리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별암리 319번지에는 1982년에 10월 26일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500년에 기슴둘레 570cm ,수고 20m,수관폭 12m인 당산목이 있는데 일설에는 이성계가 나무뿌리 하나 버린것이 살아 붙어 자랐다고 하나 알 수 없는 일이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 가슴아픈 일도 있었다. 1950년 7월 중순 문경경찰서 경찰은 문경,점촌일대의 보도연맹원 200여명을 주평 앞산(일명 말무덤고개)에서 학살하였다. 또한 영순면 포내마을 뒤 야산에서는 호계면의 별암리,견탄리,태봉리 등지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이 농사일을 하던 차림으로 갑자기 호계면 지서로 끌려갔다가 문경경찰서로 옮겨진 300여명이 두명 씩 포승줄에 묶인 채 학살되었다. 별암리 사람은 약 100여명이었다. '김태관'이 쓴 "해방 후 최대의 양민참극 '보도연맹'사건"에는 영순면에서의 학살자는 경찰이 아니고 군인이라 적고 있다. 보도연맹은 1949년 6월 좌익활동을 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든 조직인데 선량한 주민들은 별 생각 없이 가입하여 죄 없는 목숨을 잃은 6.25중 벌어진 최초의 집단적인 민간인 학살의 뼈아픈 사건이 되었다.
별암리 6번지에 문경대학에는 도깨비도로가 있다. 기숙사 진입부에 위치한 신비한 도로는 50m구간은 아래쪽으로 완만한 경사가 있는 듯 보이나 차량의 시동을 끄고 세워두면 오히려 뒤로 움직이며 빗물도 도로 위쪽으로 흐르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전국에는 제주도,울산,안양 등 몇 곳이 있으며 착시현상으로 밝혀졌다. 눈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망막에 투영하지만 뇌가 이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착각을 하는 현상이라고 한다.
아픔과 뼈를 저미는 고통도 있었지만 오정산은 언제나처럼 자라바우를 품에 안고 영강은 별암을 감싸면서 나룻배,나무다리에서 시멘트다리로.. 초가집에서 슬라브의 양옥집으로 변모해가고 오솔길,골목길에서 큰 도로로 바뀌어갔지만 고향의 정취는 언제나 추억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자라바위도,느티나무도, 골뱅이골목도,떡바우도 말없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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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옛 고향 냄새나는 이야기 잘 보고 어린날 생각이나는 군요
읽어주심 감사~꾸벅!! 이왕 생각난 고향속으로 기양 푹~빠져 봅시다 ㅎㅎ
학술논문 수준의 고향소개입니다. 우리 동네의 유래를 이렇게나 정리하고 계시다니... 감탄!
부족하고 정리되지 않은 부분이 많슴다!! 얘기가 없어도 우리 고향은 항상 우리의 기억속에 살아 있습니다 ㅋㅋ
오매불망 기다린 보람이 있었구랴. 고마우이 친구야.. 우리 아부진 미리 눈치를 차린 어머니의 도움으로 털모산 외갓집 다락에서 보름동안 숨어 계시며 보도연맹 참살을 피하셨다고 합니다.강가에 있는 느티나무는 우리 별암 친구들에게 추억이 많은 곳이죠.
그랬구나~큰일날뻔 했네요? 느티나무도 이젠 늙어 땜빵질 많이 했더라 ㅠ.ㅠ
옛날, 까까머리일때 그 느티나무 밑에서, 그애(?)어깨위에 손을 올려 놓았는데 사시나무 떨듯 어찌나 떨었는지.....30여년이 지난뒤에 할머니가 된 그애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 할머니왈 "이 빙신아! 그때 뽀뽀도 한번 못해주냐? " 그래서 "지금 해주랴?" 했더니 지금은 안된다는구먼.
에휴~~ 아쉽다..... 우째 그랫을까? 지금부터라도 후회 할 일은 하믄 안돼~~~~
옛날에는 참~ 순진했나뷰!!! 기양 능금빛 순정이던가? 그래도 가슴은 벌렁벌렁~~~
안다리 걸기라도 했어야 했남????
지금이라도하슈!!! 구경이라도하게~
안돼여...절대로 안돼여........
와우~ 대단하네요. 이리도 자세히.. 고향의 역사에 관해 잘 배우고 갑니다...^^
자세히는 적지 못했구요~ 그냥 아는데로 나열일 뿐이죠~ 다른 동네분들도 고향얘기 좀 올리면 좋을텐데요!!
선배님 덕에 고향의 역사를 다시한번 배웠습니다 고마움을 전합니다.....
허허!! 뿌리가 있기에 마음 든든합니다. 여우도 죽을때면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머리를 둔다지요?
별암리 가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고장이군요 자랑스런 고향 자라바우네요...
우리 고향은 자랑스럽지요~~마을마다 특색이 있어요!!봉서는 말그대로 鳳이 깃들고 이런 마을 아닙니까???ㅎㅎ
별 생각없이 살다가 떠났는데 그렇게 많은 사연이 있었나요?
마음의 고향은 늘 아름답답니다. ^^~*
T.T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