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장면의 예문 수필입니다.)
가슴에 묻은 말
박숙자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 분의 말씀을. 벙어리는 아닌데 말을 잃어버렸다. 내가 태어나기 전이다. ‘풍을 맞았다’고 했다. 뇌속의 터진 혈관은 하루아침에 건장한 젊은이를 쓰러뜨렸다. 마비된 육신을 살린다고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온갖 약초를 대령했지만, 일으켜 세우진 못했다. 기억 속의 그 분은 방 안에서 화석으로 존재했다. 운명이다.
여름날, 또래 친구들과 소꿉놀이를 한다. 지천으로 깔린 풀을 뜯어 반찬을 만들어도 신이 나지 않는다. 더위에 지친 우리는 제 풀에 흩어져 집으로 향했다. 편히 뒹굴 곳은 그래도 만만한 내집이다. 열려있는 삽짝문을 옮길 듯 괜스레 힘을 써본다. 빨랫줄을 지탱하는 장대를 이러저리 만져본다. 마른 옷가지가 팽팽한 줄 위에서 골리 듯 한들거린다. 한낮의 무료함에 몸을 비튼다.
순간, 귀속을 울리던 매미가 울음을 멈춘다. 매미도 더위에 숨이 차나? 갑작스런 고요가 낯설다. 무심코 시선을 돌리다 그만 기겁했다. 어른 키만한 구렁이가 담 위에 걸쳐져 있지 않은가. 조금 전 내가 지나온 담장이다. 퉁퉁한 몸뚱이가 마당으로 떨어질 것 같고, 슬슬 넘어갈 것도 같고, 순간 뱀이 사람을 똬리처럼 감아서 죽인다는 말이 떠올랐다.
얼결에 그 분, 할아버지 방문을 열어젖혔다. 거동을 못하는 할아버지는 방에만 계셨는데, 심신이 많이 약해져서 걸핏하면 화를 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괴성을 질렀다. 알아듣지 못하니 무섭기만 했다. 그래도 뱀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길은 할아버지 방이다. 평소에는 근처에 얼씬도 못했는데, 의외였다.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당황했다. 잔뜩 움츠리고 구석 자리를 찾았다. 방안에는 무서운 할아버지도, 자주 화를 내는 할아버지도 아닌 분이 앉아 계섰다. 처음으로 할아버지를 자세히 보았다. 부드러운 눈길과 손짓은 가슴에 묻어 둔 천 마디 말을 대신했다.
그러나 손녀를 위해 뱀을 쫓아주기엔 할아버지의 다리는 너무 가늘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 방의 문턱에는 차오지를 찢고 유리를 붙여 놓았다. 그 유리조각은 할아버지의 세상보기 였다. 답답함을 이기는 것은 유리 너머로 밖을 살피는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이미 알고 계셨다. 뱀이 많은 산골에서는 흔한 일이라는 것을, 손녀의 숨이 가라앉는 것을 보더니 귀한 화가자를 두 개나 주셨다. 그 화가자는 할아버지를 위해 큰아버지가 서울에서 사 왔고, 누구도 손 댈 수 없는 귀한 보물이었다. 할아버지가 보인 자상함은 충격이었다.
당시 시골은 거의 초가였고, 그 볏짚 사이로 뱀이 곧잘 둥지를 털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런 뱀을 굳이 쫓아내지 않았다. 심지어 집을 지키는 업이라며, 그 업이 나가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였다. 어린 맘에 걱정이 되었다. 낮에 본 구렁이가 우리집 업이었나? 혹시 우리집이 망하는 것은 아닌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려나. 알 수 없고, 풀 수 없는 걱정거리가 생겼다. 낮에 구렁이를 보앗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해 여름이 그렇게 지나갔다. 다행히 걱정했던 할아버지도 돌아가시지 않았고, 그 해 농사도 잘 되었다는 할머니의 웃음을 보며, 덩달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구렁이는 그저 동물이었다. 우리집을 지킨 것도 아니었고, 더운 날, 더는 짚더미 속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저 제 살 길 찾아떠난 것 분이었다. 그런데도 구렁이가 업이라는 말이 싫지 않았다. 구렁이 사건으로 할아버지와 나만 아는 화과자 비밀도 생겼고, 할아버지가 무서운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안 것도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 따뜻함을 갖고 계셨지만, 할아버지는 힘들어 했다. 육신의 고통이 마음으로 전이되어 심하게 흔들렸다. 한 남자의 삶이 병마에 갇혀 좁은 방에서 허우적댔다. 생존하시는 것만으로도 집안의 구심점인데, 정작 본인은 살아있음을 통곡했다. 낙향한 선비의 고고함은 흔적이 없고 병든 노인으로 말라갔다. 가장과 장손의 책임을 다 하지 못함은 평생의 한이었다. 그런 자괴감으로 사람을 싫어했다. 쓸모 없는 폐인으로 스스로를 박제했다.
결국 한 발도 내딛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먹이를 찾아 땅을 헤집는 수탉의 튼실한 두 다리가, 저녁놀을 비켜가는 어리 새의 날개짓이 얼마나 부러웠을까. 할아버지의 감지 못한 눈은 유리창 밖의 세상에 대한 미련이자 풀지 못한 한뿐이었다.
이따금, 그 분의 처절한 절규가 들린다. 선연하게 떠오른다. 잊으리라, 흘러보내리라. 유년에서 멈춘 할아버지의 기억을 이젠 접어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떠나지 못한 그 분의 음성이 깃가를 맴돈다.
걷고 싶다. 저 바람 속을 걷고 싶다.
(*수필 동인지 ‘여울물’ 제 4집(2023)에 실린 글입니다.)
작품 설명(핵심장면에 대하여)
이 수필은 할아버지를 그리는 글이다. 할아버지를 긍정적으로 회고하였다.
내가 이 글을 ‘참고 글’로 가져온 이유는 ‘핵심장면’의 보기 글로 하기 위해서 이다.
할아버지을 기리고, 그리워 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구렁이 때문에 무섭기만 하였던 할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가면서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에 변화가 왔다. (이것이 작가가 수필을 쓰도록 했다. 이것을 모티브 라고 한다.)
무섭기만 한 하아버지가 인자한 할아버지로ㅡ, 이 변화가 작가로 하여금 이 글을 쓰는 동기를 부여했다. 그러므로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그만큼 중요하다.
그렇다면, 이 수필에서 할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간 내용을 기술한 ‘4단락’이 핵심장면이다.
이 수필에서 핵심장면은 아주 구체적으로 적었다. 이야기 만들기는 어떤 사건을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중에서도 핵심장면은 추상적인 표현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독자가 쉽게 이해한다. 추상적 표현은 감각적으로 느끼기에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추상적 표현은 관념으로 느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후로 할아버지를 긍정적으로 표현하는데 작가의 생각을, 관념을 추상적으로 표현해도, 핵삼장면 등에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했으므로 이해가 된다.
첫댓글 선생님 안녕 하세요
올려주신 수필 잘 읽었습니다
가르침의 핵심 잘 기억하고 글을 작성 해보겠습니다
언제나 감사한 맘으로 가르침 잘 배우고 있는데 글을 적다 보면 중구난방이 되어 버려서 민망 스럽습니다.
늘 감명 깊게 쌤글 지도로 보고 있어요 감사힙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