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결박(結縛)과 해탈(解脫)을 밝히다
❙ 원문
爾時, 世尊欲重宣此義, 而說偈言:
「眞性有為空, 緣生故如幻.
無為無起滅, 不實如空花.
言妄顯諸眞, 妄眞同二妄.
猶非眞非眞, 云何見所見?
中間無實性, 是故若交蘆.
結解同所因, 聖凡無二路.
汝觀交中性, 空有二俱非.
迷晦即無明, 發明便解脫.
解結因次第, 六解一亦亡.
根選擇圓通, 入流成正覺.
陀那微細識, 習氣成暴流.
眞非眞恐迷, 我常不開演.
自心取自心, 非幻成幻法,
不取無非幻, 非幻尚不生,
幻法云何立? 是名妙蓮華,
金剛王寶覺, 如幻三摩提,
彈指超無學. 此阿毘達磨,
十方薄伽梵, 一路涅槃門.」
於是阿難及諸大衆, 聞佛如來無上慈誨祇夜伽陀, 雜糅精瑩妙理清徹, 心目開明歎未曾有.
이시, 세존욕중선차의, 이설게언:
「진성유위공, 연생고여환.
무위무기멸, 부실여공화.
언망현제진, 망진동이망.
유비진비진, 운하견소견?
중간무실성, 시고약교로.
결해동소인, 성범무이로.
여관교중성, 공유이구비.
미회즉무명, 발명갱해탈.
해결인차제, 육해일역망.
근선택원통, 입류성정각.
타나미세식, 습기성폭류.
진비진공미, 아상불개연.
자심취자심, 비환성환법,
불취무비환, 비환상불생,
환법운하립 시명묘련화,
금강왕보각, 여환삼마제,
탄지초무학. 차아비달마,
시방박가범, 일로열반문.」
어시아난급제대중, 문불여래무상자회기야가타, 잡유정영묘리청철, 심목개명탄미증유.
❙ 해설
이때 세존께서 이 이치를 거듭 밝히기 위하여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참다운 성품에는 유위(有爲)가 없으니
인연으로 생기므로 허깨비와 같다네.
함이 없고 생기거나 사라짐이 없으니
실재하지 않는 것이 허공 꽃과 같다네.
허망을 말하여 진실을 밝히지만
허망과 진실이 둘 다 허망이라네.
오히려 진실도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닌데
어찌 보는 견[見.根]과 보이는 소견[所見.塵]이 있겠느냐?
중간에는 진실한 성품이 없으니
그러므로 서로 의지하고 있는 교로(交蘆)와 같다네.
맻힘과 풀림이 그 원인은 같으니
성인과 범부가 두 길이 아니라네.
서로 의지하고 있는 갈대의 성품을 보면
공[空.無]과 유[有]의 두 가지가 모두 아니라네.
어두워 미혹하면 곧 무명(無明)이요
열리어 밝으면 그대로 해탈이다.
매듭을 푸는 데는 순서가 있으나
여섯이 풀리면 하나 또한 없어진다.
육근 가운데 원통(圓通)을 선택하여
그 흐름에 들어가면 바른 깨달음에 이르리라.
아타나(阿陀那)의 미세한 식(識)이
습기로서 폭류를 이룬다.
진(眞)과 비진(非眞)으로 혼동할까 염려되어
나는 항상 말하지 않았노라.
자기 마음에서 자기 마음을 얻고자 하면
원래 환(幻) 아닌 것이 환법(幻法)이 되고
취하지 아니하면 환(幻) 아닌 것도 없으며
환(幻) 아닌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환법(幻法)이 어떻게 생기겠느냐?
이것이 묘련화[妙蓮華]요
이것이 금강왕보각[金剛王寶覺]이며
이것이 여환삼마제[如幻三摩提]이니
손가락 한 번 튕기는 순간에 무학(無學)을 초월한다네.
이러한 가르침[阿毗達磨]이 바로
시방의 여래[薄伽梵]께서
열반에 도달하시는 외길이로다.
이때에 아난과 대중들이 부처님 여래의 위없는 자비로운 가르침과 게송[祇夜伽陀]을 듣고, 뒤섞인 것이 깨끗하고 밝아지며 오묘한 이치가 맑고 통하여, 마음의 눈이 열리고 밝아져서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찬탄하였다.
❙ 보충
진성무위공(眞性有為空) 연생고여환(緣生故如幻)
참다운 성품에는 유위(有爲)가 없으니, 유위는 인연으로 생기므로 허깨비와 같다. 인연으로 생긴 것은 자체 성품이 없으므로[無自性] 진실하지 않다. 진성(眞性)은 본성(本性)이며 앞에서 말한 상주진심(常住眞心) 성정명체(性淨明體), 여래장묘진여성(如來藏妙眞如性), 성각묘명(性覺妙明) 본각명묘(本覺明妙)이다. 유위(有為)는 함이 있는 것으로, 앞에서 말한 근진식(根塵識)이 다 유위법이다. 장진론(掌珍論)에서는 여환연생고(如幻緣生故)라고 표현하고 있다.
무위무기멸(無為無起滅) 불실여공화(不實如空花)
진성(眞性)은 함이 없고 생기거나 사라짐이 없으니, 실재하지 않는 것이 허공 꽃과 같다. 허공 꽃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이다. 장진론(掌珍論)에서는 불실(不實)을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의 불기(不起)로 표현하고 있다(實→起). 본성 자리에는 일어남이 없다. 이해하기에는 불기(不起)가 좋다.
언망현제진(言妄顯諸眞) 망진동이망(妄眞同二妄)
허망을 말하여 진실을 밝히려고 하지만, 허망과 진실이 둘 다 허망한 것이다. 상대적인(妄↔眞)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 상대를 초월한 또는 상대가 끊어진 절대적인 것이라야 참된 진실이다. 유(有)는 무(無)를 전제로 하여 있는[有] 것이고, 무(無)는 유(有)를 전제로 하여 없는[無] 것이다. 모든 상대적인 것은 진실하지 못하다. 거지가 왕의 행세를 하더라도 왕이 아니고 거지일 뿐이지만, 왕이 거지 행세를 하더라도 왕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야부(冶父) 스님은, 바른 사람이 삿된 법을 말하면 삿된 법이 다 정법으로 돌아오고, 삿된 사람이 바른 법을 말하면 정법이 다 삿된 법으로 돌아간다고 했다(正人說邪法 邪法悉歸正, 邪人說正法 正法悉歸邪)
유비진비진(猶非眞非眞) 운하견소견(云何見所見)
진성(眞性) 자리는 오히려 진실[眞]도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妄]도 아닌데, 어찌 보는 견[能見.根]과 보이는 소견[所見.塵]이 있겠느냐? 근진식이 본래 없다는 말이다. 본성은 진과 망을 초월한 것으로, 상대성을 벗어난 절대적인 자리인 것이다. 아난은 번뇌가 맺혀[結] 있다고 생각하지만 깨달은 입장에서는 주객(主客)이 모두 허망한 것이다.
중간무실성(中間無實性) 시고약교로(是故若交蘆)
중간에는 진실한 성품이 없으니, 그러므로 서로 의지하고 있는 교로(交蘆)와 같다. 주(근)(內) → 식(마음)(中) ← 객(진)(外) 이 각각 있는 것 같지만 본래 없다. 근경상대(根境相對)하여 식생기중(識生其中)이라고 하지만, 내(內) 외(外) 중간(中)은 본래 없다. 이것은 인연으로 생기는 법을 설명한 것일 뿐이고, 내 외 중간은 분리되거나 독립적이고 자체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 의존하여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전혀 진실하지 않다. 인연과 생멸을 초월한 것이 진성(眞性)이다.
결해동소인(結解同所因) 성범무이로(聖凡無二路)
맻힘과 풀림이 그 원인[根]은 같으니, 성인과 범부가 두 길이 아니다. 맺힌 것과 푸는 것이 모두 육근을 원인으로 한다. 성인과 범부가 두 길이 아니다. 성인도 육근을 풀어서 성인이 되었고, 범부도 육근이 맺혀서 범부가 되었다. 진성(眞性)에서 보면 성인과 범부가 둘이 아니다. 미(迷)하면 범부이고 오(悟)하면 성인이다.
여관교중성(汝觀交中性) 공유이구비(空有二俱非)
서로 의지하고 있는 갈대의 성품을 살펴보아라. 공[空.無]과 유[有]의 두 가지가 모두 아니다. 범부는 육근이 있다고 보고(육근을 자기라고 본다), 성문과 연각은 육근이 없다고 하는 아공(我空)을 얻었다고 하지만 이러한 두 가지가 다 틀렸다. 범부는 상견(常見) 곧 유견(有見)에 빠졌고, 소승은 단견(斷見) 곧 공견(空見)에 빠졌다. 그러나 진성(眞性)은 공(空)도 아니고 유(有)도 아니다.
미회즉무명(迷晦即無明) 발명갱해탈(發明便解脫)
마음이 어두워 미혹하면 곧 무명(無明)이다. 범부는 육근이 있다고 착각하여 진성(眞性)을 잃어버리고, 소승은 육근이 없다고 착각하여 진성(眞性)을 잃어버렸다. 열리어 밝으면 그대로 해탈이다. 무명(無明)은 밝지 못한 것이니 그 반대는 발명(發明)인 것이다. 따라서 무명은 본래 없는 것이다.
해결인차제(解結因次第) 육해일역망(六解一亦亡)
매듭을 푸는 데는 순서가 있다. 육근의 매듭을 푸는 데는 순서가 있다. 높은 계단을 올라갈 때 단박에 갈 수가 없고 한 계단씩 올라가야 한다. 예를 들어 아공(我空)을 이룬 후, 법공(法空)을 이루고, 그 후에 구공(具空)을 이루는 것과 같다. 여섯이 풀리면 하나 또한 없어진다. 아래에서는 약총해제(若總解除) 상불명일(尙不名一) 육운하성(六云何成) 이라고 했다. 만약 여섯 매듭이 모두 풀리면, 오히려 하나라고 할 것도 없는데, 어찌 여섯이 성립되겠는가.
근선택원통(根選擇圓通) 입류성정각(入流成正覺)
육근 가운데 원통을 선택하여, 그 흐름에 들어가면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 관세음보살이 육근을 푸는 방법은 동(動)→정(靜)→문(聞)→각(覺)→공(空)→멸(滅) 순서이다. 소리가 날 때 마음이 소리에 끌려가는 것이 동결(動結)이고, 소리가 그친 후 마음이 고요함에 끌려가는 것이 정결(靜結)이고, 소리가 있든 없든 마음이 소리를 아는 놈에 끌려가는 것이 문결(聞結)이다. 여기까지 해결하면 아공(我空)을 얻는다. 그리고 내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에 끌려가는 것이 각결(覺結)이고, 그 자리가 텅 비었다는 것에 끌려가는 것이 공결(空結)이다. 여기까지 해결하면 법공(法空)을 얻는다. 그 후 아공과 법공을 다 제거했다고 하는 것에 끌려가는 것이 멸결(滅結)이다. 여기까지 해결하면 구공(具空)을 얻는다. 따라서 아공(我空)을 얻고 법공(法空)을 얻은 후 구공(具空)까지 생기지 않아야 바른 깨달음을 얻는다.
타나미세식(陀那微細識) 습기성폭류(習氣成暴流)
아타나의 미세한 식이 습기로서 폭류를 이룬다. 아타나식(阿陀那識)은 아뢰야식이고 제팔식이다. 생명(몸과 마음)을 생성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집지식(執持識)이라고도 한다. 아타나식은 몸과 마음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생명체가 생기는데 아나타식이 이를 주관한다. 아타나식이 생명의 근원이다. 아타나식은 아주 미세하여 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심층의식)과 유사하다. 아타나식에는 생명에 관한 모든 정보(씨앗)가 들어있다. 아타나식이 현행(現行) 하면 우주가 생성되기도 한다. 습기(習氣)는 버릇인 종자 정보 업을 말하며 폭류(暴流)는 윤회를 말한다. 아타나식이 상속한다. 앞생각이 뒷생각을 상속하기 때문에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고 무아(無我)이다.
진비진공미(眞非眞恐迷) 아상불개연(我常不開演)
진(眞)과 비진(非眞)으로 혼동할까 염려되어 나는 항상 말하지 않았다. 진(眞)은 진성(眞性)이고 비진(非眞)은 무명(無明)이다. 아뢰야식은 진(眞)과 망(妄)이 함께 하는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이다. 이러한 아뢰야식이 매우 미세하여 정확하게 모르면 착각할 수 있으니까 말하지 않았다. 아뢰야식 자체를 <나> 라고 고집할 수 있으므로 제육식만 설명하고 아뢰야식은 말하지 않았다. 아뢰야식이 비록 근본 자리이지만 깨닫지 못한 자에게는 허망한 망상의 근본이기도 하다. 아뢰야식은 깨달으면 무아(無我)인 진성(眞性)이고, 깨닫지 못하면 망아(妄我) 식신(識神) 진아(眞我)이다.
자심취자심(自心取自心) 비환성환법(非幻成幻法)
자기 마음에서 자기 마음을 얻고자 하면, 원래 환(幻) 아닌 것이 환법(幻法)이 된다. 중생은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으로 나누어 본다. 이러한 견상이분은 본래 허망한 것이며 모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진실이 허망하게 된다. 진심에서 아뢰야식이 어떻게 생기고 삼세(三細)가 어떻게 벌어졌는가에 대한 답이다.
불취무비환(不取無非幻) 비환상불생(非幻尚不生) 환법운하립(幻法云何立)
취하지 아니하면 환(幻) 아닌 것도 없으며, 환(幻) 아닌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환법(幻法)이 어떻게 생기겠느냐? 견상이분이 모두 다 허망하며 마음에서 생긴 것이다. 일심(一心)에서 견분[見分.心.能]과 상분[相分.境.所]으로 갈라진 것이다. 주관의 마음이 객관의 마음을 보는 것으로 모두 진실이 아니고 허망한 것이다. 따라서 집착하지 말고[不取], 거짓인 줄 분명하게 알아야[了幻] 한다. 그래서 원각경에서는 지환즉리(知幻卽離) 부작방편(不作方便) 이환즉각(離幻卽覺) 역무점차(亦無漸次) 라고 했다.
시명묘련화(是名妙蓮華) 금강왕보각(金剛王寶覺) 여환삼마제(如幻三摩提)
진(眞)과 망(妄)을 다 떠난 자리가 바로 상대를 초월한 절대의 경지이다. 이것이 묘련화[妙蓮華]요, 이것이 금강왕보각[金剛王寶覺]이며, 이것이 여환삼마제[如幻三摩提]이다. 법화경을 묘련화라고 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법화(法華)이다. 제석천왕이 가지고 있는 금강과 같은 보배로운 깨달음이며 금강반야(金剛般若)이다. 이것은 닦을 것도 없고 증득할 것도 본래 없다. 그래서 환(幻)과 같은 삼마제이다. 삼마제(三摩提)는 마음이 평등하고[等持], 정혜(定慧)가 균등한 것을 말한다.
탄지초무학(彈指超無學)
이러한 도리야말로 손가락 한 번 튕기는 순간에 무학(無學)을 초월한다. 아공 법공 구공을 얻는 것이 무학을 뛰어넘는 것이다.
차아비달마(此阿毘達磨) 시방박가범(十方薄伽梵) 일로열반문(一路涅槃門)
아비달마는 비교할 수 없는 법[無比法]으로서 최상승법을 말한다. 이러한 가르침이 시방의 여래[薄伽梵]께서 열반에 도달하시는 외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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