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파오(旗袍)의 원류 한국은 한복, 일본은 기모노가 있듯이, 중국은 치파오라는 전통의상이 있다. 선이 자연스럽게 흘러 내리는 듯 하고, 모양이 우아한 치파오는 중국 여인들이 특히 즐겨입는 복장이다. 이 치파오는 16C 중엽, 만족의 민족의상이었다.이런 치파오를 누가 설계했으며, 어떻게 보급되었는지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징뽀후라는 동북부 지역에 만족 어민집 딸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와 같이 고기잡이를 했는데, 매일 햇볕에 그을리고 바닷물에 젖다 보니 얼굴이 까맣게 타서 사람들에게 '까만 여자애'라고 불렸다. 이 처녀는 얼굴도 예뻤지만 손재주가 뛰어나 대대로 물려 내려온 넓은 치마를 뜯어 고쳐 헝겊으로 단추고리를 댄 긴팔 원피스를 만들어 입었다. 어느날, 당시 만족 왕의 꿈에 선왕이 나타나더니, 북국에 한 사람이 흙 용을 타고, 머리엔 평평한 검은 투구를 쓰고, 손에는 팔각 백옥도장을 들고, 몸에는 12열쇠가 달린 옷을 입은 황후가 황제를 도와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전국 각지에서 처녀들을 모았지만 마음에 드는 처녀를 고르지 못한 흠차 대신은 어느날 그곳에 놀러온 '까만 여자애'를 만나게 되었다. 때 마침, 이 처녀는 몸에 단추가 많이 달린 긴팔 원피스를 입고(12열쇠가 달린 옷), 머리에는 흙 대야(평평한 검은 투구)를 이고, 손에는 사각형 두부(팔각 백옥도장)을 쥐고, 토담장(흙 용)을 타고 앉아 번화한 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흠차 대신이 보니 이 처녀야 말로 황제가 말하는 황후가 틀림 없었다. 그 '까만 여자애'를 궁중에 데리고 가 헤이황호후(黑皇后)로 봉했다. 하지만 궁중생활에 적응을 못하던 황후는 땅에 질질 끌리는 넓고 긴 치마를 입기가 불편하다고 단추가 많이 달린 긴팔 원피스로 고쳐 입고 다녔다. 이 일을 안 황제는 황후가 제멋대로 궁중복장을 고친 것은 죄가 있다고 여겨, 궁중에서 내쫓으면서 발로 찬 것이 급소를 때려 황후는 죽게 되었다. 관동에 있던 고향 사람들은 까만 처녀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삼일동안 울며, 그녀를 기념하기 위해 생전에 그녀가 입던 긴팔 원피스를 만들어 입었다. 이상하게도 이 옷을 입은 처녀들은 모두 몸매가 예뻐졌는데, 이는 죽은 황후가 암암리에 그녀들을 위해 치장을 해준 것이란 이야기도 전해진다. 물론 이것은 민간 전설에 불과하다. 심의와 피오 파오는 한대부터 관복으로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X자형 깃에 품이 넓고, 길이가 발등까지 닿으며, 소매가 넓으면서 끝이 좁고, 팔꿈치 부분이 원호 형태였다. 파오의 스타일은 시대별로 다르게 나타났지만 품이 넓고 길이가 긴 것이 가장 전형적인 것이었으며, 대체로 지식인이나 지배계층에서 즐겨 입었다. 소수민족이나 유목민족 지구에서 유행한 파오는 일반적으로 말타기나 활쏘기 등 격렬한 활동을 하기에 편리하도록 몸에 꽉 끼는 것이었다. 이러한 파오는 대체로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고 소매가 좁으며 품이 몸에 맞았다. 역사적으로 한족들도 이렇게 몸에 꽉 끼는 스타일의 파오를 여러 차례 수용한 적이 있었다. 조(趙)의 무령왕(武靈王)이 추진한 호복(胡服: 북방 유목민족 복장) 차림의 말타기와 활쏘기가 비교적 전형적인 사례이다. 당대(唐代)에도 호복은 일시에 유행하였는데, 개원(開元: 713~741) 천보(天寶: 742~755) 연간에 호복은 호장(胡粧: 유목민족 치장), 호기(胡騎: 유목민족의 말타기), 호악(胡樂: 유목민족의 음악)과 함께 당시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요(遼) 금(金) 원(元)과 청(淸) 왕조 등 소수민족 정권의 통치시기에 몸에 꽉 끼는 파오는 복식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청대는 통치시기가 가장 길면서도 안정되었기 때문에 파오는 전형적인 복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파오는 한대부터 관복으로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X자형 깃에 품이 넓고, 길이가 발등까지 닿으며, 소매가 넓으면서 끝이 좁고, 팔꿈치 부분이 원호 형태였다. 파오의 스타일은 시대별로 다르게 나타났지만 품이 넓고 길이가 긴 것이 가장 전형적인 것이었으며, 대체로 지식인이나 지배계층에서 즐겨 입었다.
청파오 순치 원년에 청나라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면서 치파오는 중원 일대에 보급되었고, 나중에 만족과 한족들의 생활이 융합되면서 치파오도 한족 부녀들에게 점차 받아들여지고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중국이 신해혁명을 거치면서 치파오는 전국으로 펴졌고, 1920년대 말부터 30년대 초까지 서방의 미니스커트가 유행하면서 치파오의 길이도 따라서 짧아져 무릎을 약간 넘겼고, 옷소매도 짧아졌다. 1930년대 중엽에 이르러 치파오의 길이가 다시 길어져 땅에 닿았으며, 옆 트임이 점점 높아져 허벅지에 이르렀고, 허리선은 잘록하게 만들어 여인의 곡선미를 살렸다. 1940년대 와서는 치파오의 길이가 다시 짧아졌을 뿐만 아니라 옷소매가 완전히 없어졌다. 이렇게 치파오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여러 모양과 색상이 다양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뽐내게 되었다. 또 체형에 따라 그 아름다움도 달라, 마른 체형, 뚱뚱한 체형, 키 큰 체형, 키 작은 체형 모두가 입어도 아름답다. 파오의 종류 의미상에서 보면 치파오(旗袍)는 만주족들이(남녀 불문) 입던 창파오(長袍)이지만, 팔기(八旗)의 여성들이 평상시에 입던 창파오만이 후세의 치파오와 혈연관계를 가지고 있다.(그림1) 예복으로 사용한 차오파오와 망파오 등은 통상적으로 치파오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치파오의 발전 그후 치파오는 중국과 서양이 융화된 새로운 스타일로 발전하였으니, 치파오가 서양의 영향을 받아 개량된 것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성공으로 중국의 마지막 봉건왕조가 붕괴되면서, 서양식 의상이 중국에 자유롭게 보급될 수 있었으며, 아울러 전통적인 예교와 교화 관념이 희석되고 복제(服制)의 엄격한 등급도 사라졌다. 이로써 의상에 있어서 평민화 국제화 현상이 출현하게 된 것은 자연적인 추세였으며, 치파오도 오랜 전통의 속박의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주족 정권의 패망으로 당시에 치파오를 입는 사람들은 아주 적었다. 서양식과 중국식이 혼용되면서 옛날 만주족 여인들의 전통적인 창파오는 사라지고 새로운 스타일의 치파오가 출현하기 시작하였다.이리하여 패션 스타일은 청왕조 때의 화려하고 복잡한 양식에서 간결함을 지향하면서, 색상도 우아함을 추구하고 여성의 자연미 표현을 중시하였다. 치파오는 처음에는 마갑(馬甲)의 형식으로 출현하였다. 마갑은 길이가 발등까지 내려오는데 짧은 솜저고리 위에 걸쳐 입었다. 그후 마갑을 소매가 있는 양식으로 개량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신식 치파오의 추형이다.(그림5) 이러한 신식 치파오를 유행시킨 이들은 상해 지역의 여학생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여학생들은 지식여성의 대표로써 사회의 이상형이었다. 그녀들은 문명의 상징이자 유행의 선도자였기 때문에 사회 유명인사나 화류계 여인 등은 모두 여학생 차림을 하고 다녔다. 1930~40년대는 치파오 전성기로 그것의 기본적인 윤곽은 이미 성숙되었다. 신해혁명 이후 북벌전쟁 시기에 유행한 신식 치파오는 만주족 여인들의 창파오와 달랐다. 1930년대 후기에 출현한 개량 치파오는 구성상에서 서양식 재단 방법을 흡수하여 품을 더욱 몸에 맞게 만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