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19년 02월
06일
☞ 산행날씨: 흐린날씨에 지독한
미세먼지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25km/ 9시간 35분소요
☞ 참석인원: 수헌, 산으로, 현오님과
함께
☞ 산행코스:
목장입구-동여주C.C-203봉-188.5봉(분기점)-안부-220.5봉-162.5봉-원수골-안부
대포산-안부-무명봉-무명봉-영동고속도로-신세계 여주
프리미엄
아울렛-210.5봉
안부-안부-금강C.C클럽하우스-무명봉-안부-146.5봉-본두배수지-영화교차로
버스
정류장-알뜰주유소-영진골프랜드 입구-유송타일-T자 삼거리-오계리
도로
학다리골
입구-여주C.C-그늘집-달성서공 묘-암릉-북성산
전망대-북성산-군부대
갈림길-군부대
갈림길-259.7봉-삼거리-구능 교차로-무명봉-여주
종합
전술훈령련장
관리대-쉼터-벙커봉-칼바위-130.1봉(고양바위)-117.0봉-임도
82.2봉-강릉김공
묘-왕대리 입구-백석1리 버스 정류장-백석
교차로-백석2리
경로당-백석보건
진료소-인공수로-내양3리 버스 정류장-이화산업 여주공장
입구
내양2리 버스
정류장-내양1리 버스 정류장-48봉-양화진(양화천/남한강
합수점)
☞ 소 재 지: 경기도 여주시 가남읍, 여주읍,
능서면
구정 전전날 수헌아우와 함께 만뢰(병천)지맥
2구간을 마치고 난 후라 그런지 생각보다
몸뚱아리가
좀 피곤하다...구정 전날 연로하신 누님과
형님댁을 들렸다가 구정날에 은사스님의 사찰에서
부모님
제사를 모시고 나서 집에와서 휴식을 취하려고
하니 출가한 딸 내외가 세배를
왔다.
갑자기 내가 늙어가는 느낌이라 조금은 서글픈
느낌이다.
가족들과 저녁 늦게까지 있다가 늦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지난해 12월에 대한산경표의 산줄기를 찾아가는 첫번째로 문혜지맥을 끝내고
대한산경표상의
양화지맥을 개척하기 위해같이 가기로 한 수헌, 산으로, 현오님을 만나기 위해
동서울터미널로 향한다 .
작성자: 박흥섭(산으로)...초록샌
선이 양화지맥
대한산경표의 양화지맥(녹색)은 양화천 합수점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서 동여주C.C 윗쪽에 있는
독조지맥 능선의 203봉에서 시작해서 대포산. 북성산을 지나 양화진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마루금이다
양화지맥이란?
남한강과 남한강의 지류인 양화천을 구분하는 수계
산줄기로 산줄기의 유래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한남정맥 문수봉(403.2m)에서 북쪽으로 갈라진 산줄기 좌측의 모든 물줄기는
경안천을 거쳐 한강에
합류하고 우측의 물줄기 청미천을 거쳐 먼저 남한강에
유입되었다가 경안천과 다시 만난다.
대한산경표는 분기점에서 그 산줄기로 인하여 갈라진
좌우의 물줄기가 다시 만나는 합수점에 끝나는
산줄기를 주된 산줄기로
보아서,
한남정맥
문수봉(403.2m)에서 독조봉 분기봉(441.7m),
마수고개,
해룡산(367.2m),
국수봉(423.8m),
넋고개,
정개산(433.4m),
천덕봉(632.1m),
남이고개,
앵자봉(670.2m),
염치고개,
해협산(527.7m),
236.7봉을 거쳐
경안천이 한강에 합류하는 분원리에서 끝나는 62.7km의
산줄기가 주된 산줄기(1차 지맥)가 되고 이 산줄기와 함께한 하천에서 이름을 얻어
“경안지맥”이라 칭한다.
경안지맥(앵자지맥) 약
5.5km
지점인 양지리조트 뒤
441.7봉(독조봉 분기봉)에서 또 하나의 산줄기가
동쪽으로 분기하고,
분기점 좌측의 모든
물줄기은 복하천을 거쳐 남한강에 합류하고 우측의 물줄기은
청미천 또는 양화천을 거쳐 남한강에 먼저
유입되었다가 복하천과 다시 만난다.
이 또한 분기점에서 그 산줄기로 인하여 갈라진
좌우의 물줄기가 다시 만나는 합수점으로 향하는 산줄기를
주된 산줄기로 보아서,
분기봉(441.7m),
독조봉(434.2m),
좌찬고개,
건지산410.4m),
봉의산(323.5m),
대덕산(309.4m),
사실현,
큰바래기산(414.1m),
마국산(441.3m),
해룡산(201.4m),
기관산(110.5m)를 거쳐
복하천과 남한강의 합수점에서 끝나는
57.3km의 산줄기가 주된 산줄기(2차 지맥)가 되고,
이 산줄기와 함께한
하천에서 이름을 얻어 “복하지맥”이라 칭한다.
복하지맥 약 22.5km
지점인
큰바래기산(414.1m)에서 또 하나의 산줄기가 동쪽으로
분기한다.
분기점 좌측은 모든 물줄기은 양화천을 거쳐
남한강에 합류하고 우측의 물줄기은 청미천,
연양천,
소양천 등을 거쳐 남한강으로 먼저 유입되었다가
양화천과 다시 만난다.
이 또는 분기점에서 합수점으로 이어진 산줄기를
주된 산줄기로 보아 큰바래기산(414.1m),
노성산(307.8m),
돌박지산(146.8m),
설성산
분기점,
문드러니고개,
철갑산(224.4m),
대포산(251.7m),
북성산(257.6m)을 거쳐
양화천과 남한강의 합수점에서 끝나는
48.2km의 산줄기가 주된 산줄기(3차 지맥)가 되고,
이 산줄기와 함께한
하천에서 이름을 얻어 “양화지맥”이라 칭한다
신산경표는 한남정맥 문수봉(403.2m)에서 북쪽으로 갈라진 산줄기 중 앵자지맥을
1차 지맥,
독조지맥을
2
차 지맥,
해룡지맥을
3차 지맥으로 보고 있으나,
대한산경표는
경안지맥(신산경표 앵자지맥)을 1차 지맥,
복하지맥(신신경표 독조지맥 일부 +
해룡지맥)을 2차 지맥,
양화지맥(신산경표 독조지맥 일부)을 3차 지맥으로,
신산경표 독조지맥의 일부(대포산 분기봉,
신통산,
종군이봉)는 지맥에서 제외되어
청미북단맥(가칭)이라 한다.
조선시대에 우리나라 산줄기와 물줄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신경준은 『산수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의 근본에서 만 갈래로 나뉘는 것이
산이요,
만 가지 다른 것이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은 물이다”
등산을 해 본 사람이라면 계곡은 올라가면서 여러
갈래로 갈라져 길을 찾기가 어렵고,
능선은 내려오면서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방심하면 엉뚱한 곳으로
내려오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 선조들도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일찍이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산줄기는 한 지점에서 수없이 많은 갈래로
갈라진다.
수많은 산줄기를 단순하게
정리하고자 할 때 어떤
기준을 우선으로 적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에는 큰
차이가 발생한다.
이에 대한 고심에서 산과
물은
별개가 아니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선조들의 자연관에
주목하여 우리나라의 산줄기를 불완전하나마
“대한산경표”로 정리하게 된 것이다.(수헌님
자료인용)
그런데 이 오갑지맥과 독조지맥이 한 물줄기 즉, 청미천을 공통된 물줄기를 안고 있으니
이는 우선
‘山自分水嶺’의 대원칙에 위배된다는 의심을 갖기에 충분함에도 그 누구도 둘의 관계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의심과 궁금함은 여기에서 시작되는데, 하나의 산줄기에서 다른 하나의 산줄기가 가지를 칠 때, 그
물줄기는
오직 하나여야 한다는 진리! 여기서 우리 선조들은 산줄기와 물줄기는 둘이 아닌 하나라는
이른바
‘산줄기, 물줄기의 동일체의 원칙’인 ‘산자분수령’의 원리를 발견하였던 것인데 이 경우
청미천은
2개의 산줄기를 안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혹시나 그 두개의 산줄기를 보는 시각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인데, 산줄기의 기본은 물줄기와 산줄기일 것이나, 이 청미천의
경우
신산경표상의 부용지맥 일부와 오갑지맥 전부를 잇는 산줄기가 이 청미천과 함께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앵자지맥과 독조지맥을 물줄기와 산줄기 동일체의 원칙에서 달리 볼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렇게 단순하게 보는 게 산줄기
이론이기도 하다.
누구나 쉽게 마루금을
그을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이 독조지맥은
지맥의 철갑산과 신통산 중간 어느 지점에서 대포산(252m)으로 빠져 북성산(258m)을
지나 양화천과 남한강의 합수점으로 가야할
것이고 이럴 경우 그 이름은 신산경표와 구분하기 위하여 물줄기인
양화천의 이름을
따서 '양화지맥(楊花枝脈)'으로
이름하자는 것이다.
이게 대한산경표의
산줄기를 보는 시각이자 자세이다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의
저자 현오 권태화님 블로그 인용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4명이 동서울 터미널에서 조우를 한 다음에 07시 20분에 출발하는 장호원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명절 이틀날이라 그런지 터미널은 한산하고 버스에는 우리를 포함하여 40인승 버스에
10명도 안되는
승객을 태우고 장호원으로 향하는데 이른 새벽에 집을 나와서 그런지 다들 깊은 잠에
빠진다
태평리 버스 터미널(08:15)
깊은 잠에 빠졌다가 버스가 이천I.C를 빠져나오면서 잠에서
깨어난다.
버스는 해룡지맥이 지나가는 이천 하이닉스 반도체 앞을 지나 3번 국도를 타고 태평리를
향한다.
이 도로 10년전에 뻔질나게 다녔는 길이 아닌가...예전에 5년동안 모임에서 골프
월례회를 한일C.C
(현재 솔모로C.C)에서 할때 참으로 참으로 많이 다녔는데 베낭을 메고 이곳을
찾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ㅋㅋㅋ
잠시 후 버스는 가남읍 소재지가 있는 태평리 터미널에
도착한다.
터미널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가남읍 금당리로 향하는데 산이나 도로의
지형지물을 인지하는데는
정말 神의 한수라 불리는 ‘산으로님’이 이 지역의 택시기사도 잘 모르는 길을 귀신같이
찾아간다.
우리 4명은 어쩌면 찰떡궁합인지도 모른다...꼼꼼함과 섬세하고 디테일한 수헌아우님, 산에 관한한
해박한 지식으로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을 비롯해
책을 2권이나 저술한 脈산행의 大家 현오님,
나 범여는 노가다 출신으로 ‘답은 현장에 있다’는 신념으로 현장에 가서 부딪히는 무대포 스타일이다
그러다보니 이제 서로의 눈빛만 봐도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연장자라 맨날 아우님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지만...
택시요금 12.600원을 지불하고 목장입구에 내리니 독조지맥 4구간 때 걸었던
철갑산이 보인다.
들머리에서 바라본 철갑산(鐵甲山:225m)의 모습
여주시 가남읍 안금리와 금당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 아래는 아리지C.C가 자리를
잡고 있고 그 밑으로는 여주J.C에서
충주로 이어지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간다
산 아래에 철갑사라는 절이 있어서 붙혀진 지명으로 옛날에 엿장수가 철갑투구를 쓰고
대포산에 올라 대포를 쏘았다고 붙혀진
지명이라는데 선뜻 이해가 잘 안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통사와 철갑사가 모두 환희산에 있었다고 하였으나,
『범우고』에는 모두 폐사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로 보아 1799년(정조 23) 이전의
어느 때인가 폐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장입구에서 바라본 동여주C.C의 모습
산행을 시작하는데 실질적인 대장역할을 하는 산으로님은 내가 보는 입장에선 약간
소심하다.
동여주C.C 안쪽으로 들어가서 카트 도로를 따라 능선으로 올라가는게 가장 빠르고 편한데
산으로님은 민폐를 끼친다고 하면서 목장 옆쪽으로 우회를 하여 분기점으로 접속하자고
한다.
그러는 것을 내가 우겨서 골프장 안으로 들어가자고 한다...2016년 2월 14일에
독조지맥
마지막 구간을 하면서 지나간 경험도 있고 하여...
예전에 그랜드C.C였던 동여주C.C는 남한산성 아래에 있었던 남성대 골프장이 위례신도시
조성으로
인해 택지로 수용되는 바람에 그 대체지로 이곳을 인수한 군인공제회에서 운영하는 군
프장이다.
그러기에 민간 기업이 운영하는 골프장과는 조금 다른 편이다.
산행을 시작하다(08:40)
첫번째 난관에 부딪힌다...골프장에서 설치한 휀스가 나온다
서로 합심하여 휀스를 통과하여 골프장 도로에 올라선다
카트 도로에 올라서니 캐디 언니가 이곳에 들어오면 안된다고 한다... 그건 나도
알어...
쉿 하면서 후배들을
먼저 가라고 하고 예비역 군인들의 부부인듯 한 골퍼들에게 다가가서
볼이 잘 맞느냐는 등 골프에 관해 이것 저것을 물으면서 관심을 표하니 캐디가 금방
달라진다.
이러는 사이에 후배들은 쏜살같이 도망(?)을 가고...여자분에게 철조망 넘으면서
줏은 골프공을
하나 주었더니 엄청 좋아 한다
동여주C.C 마운틴 코스 7번홀의 모습
카트 도로를 재빨리 도망가는 후배들
동여주C.C 마운틴 코스 8번홀 티박스
8번홀 티박스를 지나 골프장을 빠져 나간다
골프장 도로를 버리고 급경사의 오르막인
능선으로 올라간다
급경사의 오름길에 우리나라 맥산행의 大家
신경수 선생의 시그널을 만난다
203봉(09:10)
이곳이 신산경표에서 독조지맥이라 불리는
곳으로 대한산경표상의 양화지맥은 신산경표상의
독조지맥에서 갈라져 해룡지맥이 시작되는
큰바래기산(414m)서 시작하여 다시 독조지맥으로
들어서 이곳까지 왔으니 오늘
산행이 마지막 구간이 되는 셈이다
신산경표와 대한산경표의 합수점이 여기서
갈라지니 이름하여 양화지맥인데 이곳부터
양화지맥의 이름으로 시작되는 개척산행이
되는 셈이다
서래야 선생은 이곳을 능선 아래 마을
지맥을 따와서 금당봉이라 했는 영 믿음이 가질 않는다
여주시 가남읍 금당리(金塘里) 는
금곡천이 동서로 흐르며 자연마을로는 소댕이, 조촌동, 안강골 등이 있다.
소댕이는 옛날 물무재 너머에 백천
조(趙)씨가 터를 잡았다 하여 조촌동이라 불러오던 곳인데,
해방 이후 송당들이란 앞들 이름을 따서
송당동이라 하였다가 변음 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소댕이의 소는 솔의 변음이고 댕이는
등성이를 뜻한다. 야산 등성이에 있는 마을이다.
조촌동은 금당2리에서 금당1리로 넘어가는
물무재 너머 왼쪽편에 옛날 백천 조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조촌은
좁말(좁은골)의 한자표기어이다. 안강골은 조선 효종 때
금당2리에서 금당1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조촌동 안으로 조씨와 송씨 몇 호가 터를 잡고
편안하게 살았기 때문에
안강(安康)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현오님께서 영역 표시를
한다
203봉에서 좌측으로 조금 더
진행하는데...
188.5봉(09:15)
앞서가던 산으로님께서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검색을 하더니만 여기가 양화지맥 분기점이라
한다
본격적인 양화지맥 개척산행을 시작한다
조금을 더 진행하니 얼마나 오래됐는지 빛이 완전히 바래버린 竹泉선생의 흔적을
만난다
우측 능선 아랫쪽엔 남여주C.C가 보인다... 이 근처엔 반경 10km 이내엔 10여개의 골프장이 있다
안부(09:20)
안부에서 올라선 다음에 우측 능선으로 꺽어진다
220.5봉(09:38)
고수들의 여유
162.6봉(09:40)
이곳에서 독도에 아주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좌측으로 약간 꺽어지는 부분에서 우측의 잡목이 있는 곳으로 치고 나가야
한다.
잡목을 헤치고 나가니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잠시후에 우측 능선으로 내려서고...
등로에는 측량을 하고난 후에 박은 지적도근점이 보인다
잡목의 저항을 받으면서 가다가 내려서니 도로가 보인다
원수골(09:42)
여주시 하거동에서 가남읍 안금리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여주I.C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오다가 우측으로 들어서 남여주C.C와 동여주C.C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으며
고개 우측 윗쪽에는 대포산이 있다.
도로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올라선다
큰 수술이후 급경사의 오르막길에는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까지 많은 고통과
통증이 수반된다
등로에 올라서 좌측으로 올라가니...
대포산으로 향하는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뚜렸한 능선을 따라서 우측으로 길게 갔다가 좌측으로 향한다
안부(09:53)
대포산(大包山:251.4m:09:58)
경기도 여주시
하거동과 가남읍 안금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산불감시초소와 3등 삼각점이 있다.
지명의 유래는
산정상부에 있는 바위가 대포를
닮아 대포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하며 북쪽 사면에
오래된 절터가
있는데 언제 창건된 사찰인지는 알 수 없고 석탑재와 기와조각이 발견되었다.
여주JC 동쪽에
위치하며 대포산 북쪽으로 영동고속도로가 지나며 고속도로 건너편에 여주
프리미엄 아울렛이 있다.
산자락 동쪽에
대법사(大法寺)가 있고 서쪽에는 조선 중기 임진왜란의 명장 이순신(李舜臣)의 조카로
노량해전
등에서 싸웠고 정묘호란때 전사한 이완(李莞)장군의 묘소가 있다.
산 아래쪽에서
발원하는 안금천은 가남읍 안금리에서 발원하여 서북방향으로 흘러 대신천으로
합류하는
한강수계의 지방하천으로 양화천의 제2지류이며 하천연장 5.33km, 유로연장은 6.36km,
유역면적
16.28㎢이고 하천의 이름은 발원지의 지명에서 유래하였다
대포산 정상 삼각점(△장호원 303 / 1988복구)
대포산 정상의 산불감시초소
산불감시초소 요원이 명절을 쉬러 갔는지 초소는 비어있다.
가야할 북성산이 보이고...
남여주C.C 너머로 미세먼지에 가려버린 강금산이 아련히
보인다.
강금산(剛金山: 280m)은 일명 개금산
또는 갱금산으로 불리며 가남면 금곡리 , 송림리,
점동면 덕평리, 부구리 경계에 걸쳐 있는
산으로 청미천과 오갑산을 바라보는 가남읍
동부 지역의 대표적인 산으로 옛날 이
산에 개와 같은 모양의 크기의 금을 묻어 두었는데,
억수 같이 비가 내리고 난 직후 산
안개속에 그 형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때 안개 속을 해 집고
이 금덩이를 캐려고 그 형상을 따라 산
속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들어갔으나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후 욕심에 눈이 어두우면 결국 비참한
종말을 맞는다는 교훈과 함께, 마을사람들이
식목을 하여 다시는 그때 개와 같은 금의 형상이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한다.
그 후 아무도 다시는 금덩어리를 찾으려
하지 않고 마을도 평안하게 살아온다 한다.
지금도 그 개만한 금 덩어리는 강금산
어딘가에 묻혀있을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부터 이 산에는 개만한 금빛이 비추어
많은 사람들이 금에 욕심을 내어 그 위치를
확인 하고자 산으로 올라가면 보이지 않고
산에서 내려오면 또 금빛이 보였다고도 한다.
이는 산이 외로움에 금빛을 띠어 아름답게
하여 많은 사람들을 산으로 유혹하여 외로운
정을 달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명 개금산 또는 갱금산
이라한다. (여주시사 자료인용)
대포산 정상에서 산으로님이 가져온 막걸리 한통을 나눠 마시면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약 8개월만에 처음으로 막걸리 한잔을 마셨는데 알싸한 느낌이라 아직은 술을 마실때가
아닌가 보다
다시 길을 나선다
대포산으로 내려가는 길은 엄청나게 좋다
안부(10:16)
무명봉(10:25)
무명봉에서 뚜렸한 직진 등로를 버리고
잡목을 헤치며 우측으로 꺽어져야 한다
능선을 따라서 내려니...
등로 좌측으로는 kcc여주공장과
영동고속도로 여주휴게소가 아련히 보인다
갑자기 등로가
사라지고...
무명봉(10:31)
좌측으로 내려서니 맥길은 영동고속도로가
가로막고 있다
산에 관한한 신신령님과 동급(?)으로
신의 경지에 오른 산으로님도 난감한 모양이다
우측 능선으로 치고
내려간다
절개지 아랫쪽엔 원주쪽으로 달리는
영동고속도로가 보이고 그 너머로는 신세계아울렛이다
수로를 따라서
내려가서...
철계단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관리용 철문이
열려있다
철계단을 내려선 다음에...
고속도로 가변 차선을 따라서 여주J.C 방향으로 향한다
자동차들이 너무 과속하여 상당히 위험하다.
고속도로를 빠져
나온다
영동고속도로 토끼굴(10:52)
토끼굴을 빠져나와 좌측으로 꺽어져 수로를 따라서 걸어간다
고속도로를 따라서 철계단쪽으로 가는데...
중간에 개구멍(?)이 있어서 개구멍으로 빠져 나간다
개구멍을 빠져나와 절개지로 올라섰다가 내려서니 여주 신세계 프리미엄 아울렛이
나온다
여주 신세계 프리미엄 아울렛(11:03)
아울렛 도로를 따라서 가다가...
우측으로 꺽어져 코너에서 도로를 버리고 능선으로 향한다
절개지 능선으로 올라서니...
이런 표식들이 많이 보인다
능선에 올라서서 좌측으로 꺽어지니...
등로는 뚜렸하다
210.5봉(11:21)
210.5봉 정상에는 kt이동통신탑이 서있다.
우측으로 살짝 꺽어져 내려가니...
뚜렸한 등로 아래로...
KCC여주공장과 KCC 그룹에서 운영하는 금강C.C 페워웨이가
보인다
안부(11:25)
이 골프장의 홀과 홀 사이에 있는 능선이 양화지맥길인데 맥길을 훼손하지
않고
아주 골프장이 설계가 잘 되어 있는데, 선견지명이 있으신지 地勢의 맥이 그대로
살아있다.
KCC 장상영 회장님께서 산을 잘 아시는 모양인가?
하기사 재벌일수록 풍수와 관상. 맥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일례로 예전에 故이병철 삼성그룹 회장님은 신입사원 공채 면접시험때 본인 직접
신입사원의 관상을 보고 채용했고, 선경(SK)그룹 故최종현 회장도 을지로에
있는
SK사옥이 氣가 너무 세다고 하여 기를 다스리는 돌거북을 묻고 건물을 지었다고 하는
일설이 있다.
슬라이스가 많이나는 홀인가?...능선에 공이 많이 보이는데 잠깐동안 10개를 넘게
줏는다.
오늘 이 골프장은 휴장인가 보다...라운딩하는 골퍼들이 한명도 안 보인다
안부(11:29)
다시 능선으로...
좌측에 금강C.C 클럽하우스가 보이는데 휴장이라 주차장이 텅텅
비어있다.
카트 도로도 토끼굴을 만들어놔서 골프장에 들어가지 않고도 무사히 골프장을
통과한다
금강C.C클럽하우스(11:35)
골프장 능선을 완전히 벗어나...
등로는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진다
등로는 희미하게 보이고...
무명봉(11:43)
무명봉을 내려서니 후배들이 밥상을 펼치고 있다
점심시간(11:45~12:55)
점심먹고 다시 출발
나무에 쓰여있는 글씨는 뭔 뜻인지?
쓰러진 잡목과 말라버린 자리공으로 인해 등로는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우측 능선 아래에 있는 축산농가의 축분냄새로 코끝이 알싸하다
안부(12:58)
다시 오르막길
146.5봉(13:03)
완만한 내리막길
등로에서 바라본 KCC여주공장
등로 바로 아래에는 본두배수지가 있고 그 너머로 마산과 춘천을 잇는 중부내륙고속도로 남여주I.C가 보인다
배수지 끄트머리에서 좌측으로 내려선다
배수지 철조망을 따라서 내려간다
본두배수지 정문(13:08)
배수지 정문에서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영화교차로가 보이고...
우측에는 꽤나 큰 규모의 영화엔지니어링 공장이 보인다
영화교차로(13:11)
영화교차로에서 333번 지방도로를 따라서 걷는다...도로가
맥길이다
영화교차로 버스 정류장(13:12)
가야할 북성산이
짙은 미세먼지로 인해 멀게만 느껴지고 목이 상당히 아프다
6차선의 넓은 도로를 버리고 구도로로 접어든다
우측 도로가 여주 프리미엄 아울렛과 여주I.C로 가는 길이다.
알뜰주유소(13:18)
주유소 뒷쪽으로는 영진골프랜드 P3골프장이 보이고...
영진골프랜드 입구에서 도로를 무단횡단한다
여주건축자재 아울렛쪽으로 향한다
유송타일(13:23)
유송타일 야적장과 양평해장국 사이 시멘트 도로쪽으로 향한다
절개지쪽으로...
좁은 도로를 지나니...
전원주택이 보이고...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땅이 상당히 질척거린다
T자 갈림길(13:35)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가다가...
좌측으로 꺽어진다
가야할 여주C.C와 북성산이 보이고...
(주)에스이티와 고물상을 지나고...
범여에겐 늘 못마땅한 도로명 주소
오계리 도로(13:42)
여주시 능서면 오계리 봄바우골에서 학다리골로 넘어가는 도로인데 좌측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고, 우측 여주읍내쪽 방향은 여주배연구회와 현대가설 입간판이 보이는 곳이다.
여주시 능서면에 있는오계리(梧溪里)는 면답골천이 마을을 굽이굽이 흐르며, 자연마을로는
갸짐말, 오리울, 학다리가 있는데 갸짐말은 옛날에 기와집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리울은 북성산 산신세를 지내고 있는 마을로, 과거에는
정월에 여자와 남자를 뽑아 제물을
올리고 제주를 뽑아 집집마다 모든 사람이 나와 산신제를
모셨으며 학다리는 들이 학의 다리처럼
길게 뻗은 모양이라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오계리는 순계라고도 불리우며 숨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다.
여주C.C를 바라보며 농로를 따라서 걷는다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올라가야 가는데 그냥가도 금방 다시 이 길을
만난다
좌측으로 올라가니 묘지가 나오고 묘지 뒷쪽으로 올라서니...
잡목의 저항이 엄청나게 심하다... 갈 길이 먼데 괜히 올라왔나
싶다
조금만 능선에서 우측으로 급하게
꺽어진다
조금전에 헤어졌던 길을 다시 만나고...
민가를 지나니...
또 다시 한적한 도로를 만난다
학다리골 입구(13:52)
바로 앞쪽이 지맥길이고 그 너머가 골프장이다
이곳에서 바로 치고올라 골프장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우회를 할 것이냐 고민을
한다.
오늘 실질적 리더인 산으로님이 골프장과 분란을 일으키지 말고 좌측으로 길게 우회를
한잔다
도로에서 바라본 오계리 학다리골 마을의 모습
학다리 마을은 들이 학의 다리처럼 길게 뻗은 모양이라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골프장 개구멍(13:56)
학다리마을을 지나 우회를 하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 도로옆에 있는
골프장
철조망에 개구멍이 하나 보이는게 아닌가...후배들이야 호화준족이라 우회를
해도
해가 떨어지기 전에 양화진 합수점에 도착을 하겠지만 문제는 나
아닌가.
시간을 줄여볼 겸 골프장과 부딪히기로 하고 개구멍으로 들어가니 후배들도
무대포 범여를 따라서 개구멍 안으로 들어온다
개구멍을 통과하여 골프장 안쪽 도로로 들어선다
여주C.C 코스 개요도
여주C.C ACE코스 3벌홀의 모습
예전에 서코스로 불렸던 에이스 코스... 이 코스가 여주C.C에서 난이도가 높은
코스이다.
골프장에 들어서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뭐 이리 골프치는 사람들이
많은지...
여주C.C는 내가 골프 회원권을 갖고 있는 곳이라 좀 아는 편이다
지금 동계 비수기라 2월15일까지 주중 그린피가 15만원인데 8만원으로 깍아주고,
카트비도
무료이니 사람이 많을수 밖에 없겠구나...나같은 주주회원이야 69,000원으로
혜택이
없으니 별 흥미가 없다... 이곳은 회원권을 가진 친구 4명이 와야 혜택이 많기에
그리 자주오는 편은 아니다
카트 도로에 올라서니 캐디가 우리를 보고 이곳에 들어오면 안된다고 한다.... 그건
나도 알어
후배들에게 무조건 조용히 하면서 빨리 가라고 해놓고는 내가 뒷처리를 해볼
요량이다
그런데 한 홀에 2팀씩 플레이를 하니 자연히 시간이 지체될 수 밖에... 잽싸게
골프장을 빠져나갈 궁리를 한다.
더군더나 ACE코스 3번홀이 핸디캡 1번홀이라 시간이 더 지체되니 우리는 통과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4번홀에 들어서니 앞 팀이 밀리는지 티삿이 늦어지는 바람에 이곳에서
기다린다.
이 팀의 캐디는 안면이 있는 친구다...골프채가 아닌 베낭을 메고 골프장에 들어왔으니 몰라볼 수
밖에...
앞팀이 그린에서 퍼팅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경기과에 신고를 한
모양이다.
5번홀 오르막길을 부지런히 올라가고 있는데 경기과 직원이 카트를 타고 오다가
멈춘다.
아마도 나를 알아보는 캐디가 회원이라고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재빨리 5번홀을 지나 능선으로 올라간다... 그 바람에 엄청나게 시간을 줄인 셈이다
그늘집(14:22)
그늘집 뒷쪽으로 올라서니...묘지가 보인다
달성서공 묘(14:26)
아마도 골프장과 관련된 묘지인 듯 싶다
묘지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올라선다
묘지에서 바라본 여주(驪州)
여주 지역은 처음 삼한시대에 마한(馬韓) 땅에 속했다가 삼국이 생기면서 백제땅에
속했으며, 그 후
고구려가 세를 확장하면서 고구려 영역에 속했다. 그리하여 고구려
장수왕 63년(서기 475)에 여주에 대한 지명의 명칭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골내근
현(骨乃斤縣)이라는 지명으로 기록이 되었다.
골내근현(骨內斤縣)에서 한자어 뼈 골(骨) 자는 음차로 누런색(黃)을 뜻하는 것이고
안 내(內)자는 음차로 내(川)를 나타내고 도끼
근(斤) 자는 음차로 고을 촌(村)을 나타내는
말로 ‘누런내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 당시 골내근현을 통과하던 여강
지역은 점동면의 삼합리에서부터 도리, 처리, 흔암리,
우만리, 단현리,연라리, 상리, 하리, 왕대리, 백서리까지 강변으로 다른 강의 유역과는
달리 전혀 평야를 형성하지 않고 모두 강변이 가파랐다.
따라서 그 옛날 홍수가 나면 물이 누런색(누런 내: 黃川)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지금도 여주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한강은 홍수 철에는 물이 누런색이다.
따라서 깊은 골짜기에 누런색의 내(川)가 흐르는 마을이란 뜻으로 지어진 순수한 우리말을
한자로 음을 표기 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후 신라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여주(당시 골내근현) 땅은 신라의 영토가 되고
경덕왕(景德王) 16년(757년)에 황효(黃驍)라고 고쳤는데 황효란 이름이 어떤 유명한
말(馬)이 원인이 된 지명인지 아니면 늘은(확장된) + 날래(급작히)의 우리말 음을 한자로
표기(누루 황+날낼 효)해 쓴 것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원인이 어떻게
되었든 이후의 지명은 계속해서 말(馬)과 관련된 여주(驪州)의 검은말
려(驪) 자를 중심으로 지명이 계속 변천해 나갔는데. 그것은 지명변천에 따른 여주군의
연혁을 보면 쉽게 확인이 된다.
어원의 유래에서도 여주의 지명이 말과 관련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한자사전에서 찾아보면 여주의 려(驪)는 검은 말 려, 가라말 려, 검은 말 리라고 하며
뜻을 나타내는 말마(馬)와 음(音)을 나타내는 ‘려’가 합하여 이루어진 형성 글자이다.
또 「한국 고전 용어사전」에 려(驪)는
“① 고대 우리나라에 있었던 나라 이름. 가야(伽倻)·
가락(駕洛)의 다른 이름. ② 가라말, 검은 말. 흑색의 말을 ‘여’라고 하며 속칭 ‘가라’라고 한다.”라고
설명된 것으로 보아 여주의 지명유래는 아무래도 말과 관련성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묘지에서 북성산 오르는 길은 코가 땅에 닿을만큼 급경사이라 체력을 딸리고 정말
힘이든다
급경사의 능선에 올라서니 로프가 처져있는 뾰족한 岩陵群이 나온다
암릉(14:36)
이곳은 마치 둘레길같은 느낌이다
운동기구와 쉼터의자도 보이고...
북성산 전망대(14:39)
북성산 전망대에 도착하니 세종대왕 능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난간의 디자인이 한글로
되어 있고 북성산
등산 안내도와 세종대왕과 한글, 여주의 노래 안내판이 있다.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전망대에 있는 북성산 등산 안내도
세종대왕과 한글 안내판
전망대에서 바라본 여주시 능서면 일대
능서면은 여주시의 서북부에 위치하고 구조적으로 주민의 43%가 농업 종사하고 있으며
평야지대가 펼쳐진
전형적인 농업지역으로 전국 최고의 미질을 자랑하는 여주쌀의 주산지며
여주시내 동서남북으로 뻗은 사통팔달 교통망의 중심에선 교통의 요충지로 성장 잠재력이
무한한 지역이며, 또한 한글(훈민정음)을 통하여 민족문화의 원형을 이룩하신 조선 4대
세종대왕 및 소헌황후의 합장릉과 제17대 효종대왕 및 인선황후의 쌍릉은 신륵사와 더불어
여주군 관광명소의 한곳으로 문화재의 숨결이 깃들어 살아 숨쉬는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고장이다.
고려말(1200년경) 이 지역은 한강 유역 마을인 현 흥천면 상백리로부터 귀백리와
효지를 거쳐 남면과
이천을 경유하여 가는 교통 역마소이었으며 이를 말마당이라 불렀다.
고종 32년(1895) 한강 주변을 수계면, 양화천 주변을 길천면이라
칭하여 오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로 부군면폐합시 수계면과 길천면13개리를 합하여 능서면이라 칭하였다.
본래는 새종대왕을 모신 영릉 서쪽에 위치한다하여 능서면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옛날 속칭 양화나루으로 유입했기 때문에 양화천이라고 부르며 또 행정구역 명칭에 흥천면이
생기기 이전 고천면으로 부를때 그 지명 역시 이 하천 때문에 부르던 것이며 하천명 역시
오랫동안 길천이라고 불렀는데, 그 원류는 이천군 설봉면 남부에서 시작해서 우리관내
가남면
상황리를 경유하는 물과 태평리 신해리를 경유하는 물이 정단리와 양거리 사이에서 합류하여
대하천을 이루어 매류리와 용은리 사이, 구양리와 신근리 사이, 백석리와 율극리 사이, 상백리와
내양리 사이를 경유항 양화군으로 유입 남한강에 합류되는 하천으로 많은
평야와 옥토를
조성해주고 관수에 큰 힘이 되는 하천이다.
또한 천연기념물 황쏘가리가 서식하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보호가 절실한 곳이다.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북성산 정상으로 올라간다.
좌측에 북성산 정상이 보이나 군부대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어 갈 수 없는
곳이다
군부대 원형철조망을 넘어서니 북성산 정상이 나온다.
북성산(北城山:257.6m:14:43)
여주시 능서면
신지리와 여주읍 월송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은 군부대가 있어
갈 수가 없는
곳이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건치 연혁에 "예종 원년(1469)에 영릉을
부의 북성산
기슭으로 옮기고 천령현을 혁파하여 부에
소속시키고 지금 이름으로 고쳐
목으로
승격시켰다."고 하고, 산천조에 "북성산은 주 서쪽 7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옛 성터가
있다."라고 하여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여지도서』에는 "주 서쪽 7리에 있는데 옛날 성터가 있다. 지금은 두 능(英陵, 寧陵)의
주산이
되었다."고 하여 북성산이
여주의 진산(鎭山)이자 두 왕릉의 풍수상 주산(主山)임을
명기하고
있으며, 더불어 옛날
성터가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북성이란
이름이 그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한다.
『1872년지방지도』에는 북성산을 주맥으로 자리 잡은 왕릉의 풍수상 명당 국면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전후좌우를
감싸주는 사신사(四神砂)를 과장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지도상에 '영릉주산회룡고주(英陵主山回龍顧主)'라 하여 명당 국면을 감싸 안는
산세가 다시
주산을
되돌아보는 풍수상 길국의 형세임을 강조하고 있다.
과거 지뢰매설지역이라고 조심하라는 경고판이 많이 보인다
이곳은 옛날 북성산성이 있었던 곳인데 여주시 능서면 신지리(新池里)에 있는
산성이라 하여
‘신지리성지(新池里城址)’라고도 하였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
조선시대의 지리지·읍지 대부분에 ‘유고성지(有古城址)’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는 폐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42년에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科)〉를 편찬할 때 조사가
이루어졌고 이후 부분적으로 조사가 진행되었다.
석축식 산성으로, 능서면
신지리와 여주읍 월송리 경계의 북성산(275m) 정상부에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어 고려시대까지 이용한 성곽으로 추정된다. 남북 방향으로 긴
장타원형에 남고북저(南高北低), 동고서저(東高西低)의 형태를 하고 있다.
전체 길이는 약 1,150m이지만 대부분의 성벽은 붕괴되었고 길이 10m가 남아 있다.
현재는 성벽을 따라 군 참호가 조성되었다.
성 안에는 치성 4개소, 건물터 3개소, 우물터 1개소 등이 확인되었다.
북서쪽 평탄지에 있는 타원형 우물터는 남북길이 3.8m, 동서길이 2.7m이다.
군부대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북성산 정상까지 가보기로 한다
실질적인 북성산 정상(14:47)
철조망 옆길로 지맥길이 이어지건만 리딩을 맡고있는 산으로님이 우회를 하자고 하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벙커가 있는 곳에서 좌측 능선으로 내려간다
산으로님이 선두로 가는데 안 따라서 갈 수가 없다.
갈림길(14:51)
좌측 군부대 밑이 맥길인데 편안한 우회길을 내려오다보니 너무
내려와버렸다
다시 오르막길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우측의 희미한 길로 올라선다
이게 뭐여!... 철조망 옆으로 등로가 있네.
하옇던 범생이(모범생) 스타일인 산으로, 수헌 아우님들 땜에 뭔
개고생이람
때로는 무대뽀로
단순 무식하게 사는것이 훨~~~편할때가 있는데...ㅋㅋㅋ
북성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군사도로로 내려선다.
2~3분이면 올 길을 갈 길이 바쁜데 25분이란 시간을 허비했다
뒤돌아 본 북성산 정상의 모습
도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군부대 갈림길(15:13)
이곳
역시 맥길 가운데에 군부대가 점령하고 있어서 좌측이나 우측으로 우회를 해야 한다
우리는 우측으로 우회를 했다.
계속해서 지뢰가 매설되었던 지역이라고 산꾼을 겁박한다
군부대 철조망을 벗어나 등로에
복귀한다
등로에 들어서 뒤돌아 보니 우측이 아닌
좌측으로 와야 편할 듯 싶다
좌측의 군사도로로 내려오다가 보면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이래서 개척산행이
힘드는가 보다
등로를 조금 가다가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진다
등로 주위에는 군 벙커들이 많이
보인다
259.7봉(15:23)
259.7봉 정상 1등 삼각점(△여주
11 / 1988재설)
259.7봉 정상에서 바라본 여주시와
남한강의 모습
택리지(擇里志)를 저술한 이중환은 그의
저서에서 여주를 이렇게 기록했다.
“첫째 주산이란 수려하고 단정하고,
청명하고 아담한 것이 으뜸이다.
둘째는 주산이 뒤에서 내려온 산맥이
끊어지지 않으면서 들을 건너 갑자기 높고 큰 봉우리가
솟아나고 지맥이 감싸면서 골판을 만들어
궁내에 들어온 듯 하며, 주산의 형세가 온중하고
풍대하여 겹집이나높은 궁전같은
곳이다.
셋째는 사방에 산이 멀리 있어 평탄하고
넓으며, 산맥이 평지에 뻗어 내렸다가 물가에서 그쳐
들판터를 만드는 곳이라
적혀있다”
큰 들을 끼고있는 여주는 세번째 등급에
드는 땅인 셈이다.
산이라고 하기에는 낮게 발달된 구릉은
능선이 잘 발달되어 있으나 높지도 않고, 수려하지도
않으며, 청명하지도 않다. 단지
아담하기만 하다. 능선이 유순하며 때론 들로 숨어버려 氣가
융숭하거나 옹골차지
못하다.
이런 산은 재물복이 많고 벼슬복이 있으나
단지 귀기(貴氣)가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 흠이다.
좋은 시절 벼슬을 하고는 시절이 다하면
낙향하여 사는 삶이 제격인 곳이 여주이다.
들이 평평하고 멀리 큰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여주는 남한강(여강)이 군의 중앙을
가로질러
예부터 수운(水運)의 중심지였으며 물줄기와 충적평야의 풍요로움과 포근함은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보면 소양강이 있는 춘천과 더불어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59.7봉 정상 에서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서는데 상당히 미끄럽다
아직도 지뢰지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 원형 철조망을 지나
내려오다가...
뚜렸한 내리막길을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진다
낙엽이 많이 쌓여있는 등로가
나오고...
암릉구간이 나온다
암릉구간을 조금 더
진행하니...
내리막길이 나오는데 갑자기 등로가 사라져
버린다.
등로가 없는 급경사의 내리막을 치고
내려오니...
북성산으로 이어지는 군사도로로
내려선다
군사도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삼거리(15:43)
맞은편에는 공군부대가 자리잡고 있고
우측에는 공군부대아파트 버스 정류장이 있다
좌측 도로로 꺽어지니 군부대 안에 공군
갈보리교회가 보인다
도로에서 올라서서 군부대 담벼락 옆으로
올라선다
군부대 철조망을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철조망을 끼고 우측으로...부대 안쪽에
배수지 물탱크가 보인다
철조망 끄트머리 직전에 좌측 능선으로
들어선다
잡목을 헤치면서 걸어
가다가...
급하게 우측으로 꺽어져 나오니 이천에서
여주로 이어지는 42번 국도가 길을 막는다
구능교차로(15:56)
42번 국도가 지나가면 좌측으로 가면
세종대왕 묘소가 있는 영릉과 효종대왕릉 가는 길이다
도로를 무단횡단하여 서여주 나들목
방향으로 향한다
영릉(英陵:사적제195호)
조선왕조 제4대 임금인 세종과 왕비
소헌왕후 심씨의 능으로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원래 영릉은 소헌왕후가 죽은
1446년(세종 28) 광주 헌릉 서쪽에 조성하여 그 우실(右室)을 왕의
수릉(壽陵)으로 삼았다가 1450년 왕이
죽자 합장했는데 이 능은 〈국조오례의 國祖五禮儀〉
치장조(治葬條)를 따른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능의 석물은 병석에서
영저(靈杵)·영탁(靈鐸)·지초문양(芝草紋樣)을 배제하고 구름문양과 12지신상만
조각해 조선병석문(朝鮮屛石紋)의 기본을
확정했으며, 혼유석(魂遊石)의 고석(鼓石)을 5개에서 4개로
줄이는 등 제도상 고친 것이 약간
있었다
세조 때 이 영릉이 불길하다는 의논이 대두했으나 서거정(徐居正)이 "천장(遷葬)함은
복을 얻기 위함인데
왕자가 다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고 반대하여 옮기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 여주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는 세조의 유언으로 병석과 석실의 제도를 폐지하고 회격(灰隔)으로 합장했다.
능 앞에 혼유석 2좌를 놓아 양위(兩位)임을 표시했을 뿐 상설제도는 단릉(單陵)과 같다
광릉(光陵)에는 동자석주(童子石柱)에 12지신상을 표시했는데 이보다 1년 후에 천릉한
영릉에서는 12지(支)를 문자로 기록했고, 그 이후에는 난간에 24방위까지 넣은 새로운
왕릉상설제도를 이루었고, 광주에 세워졌던 신도비는 능을 옮길 때 땅에 묻었던 것을 1974년에
발굴해 세종대왕기념관 앞뜰에 옮겨놓았다.
효종릉(孝宗陵)
孝宗(이호 ; 1619-1659, 제위 10년)과 비(妃)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張氏 ;
1618-1674)의
寧陵은 바로 근처에 세종(世宗)과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의 영릉(英陵) 바로 옆에
있다.
석물(石物)들을 별도로 제작한 쌍릉(雙陵)의 형식을 하고 있는 영릉은 조금 특이한 위치를
하고 있는데, 두 릉의 위치가 좌우로 나란하게 조성된 것이 아니라 앞(인선왕후) 뒤(효종릉)로
비스듬하게 위치하고 있다.
그 연유는 본래 영릉(寧陵)은 효종 승하후 현 위치가 아닌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東九陵)
소재의 태조(太祖) 건원릉(建元陵) 서쪽의 위치에 조성했는데, 석물(石物)에 틈이 생겨
누수의
염려가 있다고 하여 여주 세종의 영릉(英陵) 곁으로 천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두 봉분의 위치가
특이한 것은 풍수설(風水說)로 볼 때 왕성한 산 혈맥의 생기를 모두 받게 하려다 보니 현재와
같은 특이한 위치 조성이 되었다고 한다.
효종(孝宗)의 릉에만 곡장(曲墻)이 설치되어 있어 쌍릉(雙陵)의 형식임을 알 수 있지만,
기타 나머지 석물(石物)은 모두 각각 별도로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두 봉분(封墳) 모두 병풍석(屛風石)은 없이 난간석(欄干石)만으로 호위하고
있다.
인조(仁祖)의 둘째{봉림대군}로 태어나 8년간의 청나라 볼모생활을 보낸 효종은
귀국 후 형 소현세자(昭顯世子)죽음으로 세자에 책봉되고 인조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효종은 청나라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으로 굴욕을 씻고자 북벌(北伐)의
계획을 세워 군비를 정비하고 군정(軍政)에 힘썼으나 끝내 북벌을 감행하지 못하고
승하해 버렸던 안타까운 인물이기도 하다.
효종 재위 시절에는 전라도 지역에 대동법을 시행하여 성과를 올렸고, 청나라에서 들여온
역법(曆法)으로 새로운 시헌력(時憲曆)을 시행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으나, 숙원이었던
북벌의 한을 풀지 못한 안타까운 생을 보냈으며, 청나라의 힐책(詰責)으로 북벌 의지를 잠시
접어두면서도 러시아의 남하(南下)에 청(淸)의 요청을 받아들여 나선(羅禪)정벌에 참여한 것을
보면 북벌(北伐)의 의지는 효종의 지상목표이자 국가 숙원사업이었던 것이다.
인선왕후 장씨(張氏)는
우의정(右議政)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딸로
광해군 10년(1618)에
태어나 14세에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렸고,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
심양에 8년간 있으면서 현종(顯宗)을
생산하고 내조를 하다가 효종 즉위와 함께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효종 승하후 왕대비로
지내다가 57세의 나이로 현종(顯宗) 15년(1674)에
승하했으며, 슬하에 현종과 다섯 공주를
두었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서여주 나들목으로
향하다가...
우진자원 간판이 있는
우측의 도로로 올라간다
다시 도로를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세종대왕릉 가는 길
표지기가 있는 길
시멘트 도로가 보이는 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무명봉(16:02)
시멘트 도로로 내려선 다음에
도로를
따라서 계속 직진한다
여주종합전술훈련장
관리대(16:07)
부대는 철수했건만 지맥길 가운데 있는
부대의 철문은 굳게 잠겨있다.
본분을 다하고 철수를 했으면 맥길은
돌려줘야 하는거 아닌가
이곳에서 떡하나와 두유로 허기를 면하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다시 길을
떠난다(16:17)
우측으로 철조망을 끼고 우회길을
걸어간다
철조망을 지나니 밤나무밭이 나오고
좌측으로 올라간다
잡목의 저항이 상당히
심하다
철수한 군부대는 계속해서 산꾼을
겁박한다
군부대는 끝나고...
마루금으로 복귀한다
쉼터(16:33)
박석고개 이정표를 만나 좌측 능선으로
향한다
박석고개는 여주시 능서면 번도리 독골마을
서쪽에 있는 고개로 박석(薄石:넓고 얇은 뜬 돌:
①박(받)+석(새,사이)
②박(밭)+석(사이) ③박(받)+석(돌)이 깔려 있었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벙커봉(16:37)
아직까지 갈 길이 많이 남았는데 날씨가
흐려서인지 아님 산속이라 그런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칼바위(16:42)
칼바위 이정표 앞에는 Y자 갈림길이
있는데 구양리로 내려가는 길이고 맥길은 2시 방향으로
이어진다.
여주시 능서면에 있는 구양리(九陽里)는 고양바위가 있어서
고양이, 구앵이 또는 구양이라 부르던 것이
지금 지명의 유래가 되었으며, 양화천이 남북으로 뻗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양달땀, 용달땀이 있다.
양달땀은 구양리 양달쪽에 있는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달땀은 구앵이 남쪽에 있는 마을로,
산자락 끝의 평야 라는 뜻을 가졌다.
날씨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다들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130.1봉(16:46)
130.1봉 정상에는 고양바위가 구양리의
지명유래가 된 바위이다
산으로 아우님!...범여가 보기엔
불가사의한 존재처럼 보인다...전생에 산신령이었나?
117.0봉(16:54)
117.0봉 정상에 있는 지적 삼각점
표지판(경기180)에는 표고가 115.16m라고 적혀있다
뚜렷한 등로를 따라서
간다
임도(16:55)
다시 완만한 능선을
올라선다
下心을 하라네요
82.2봉(17:02)
등로 곳곳에 박혀있는
지적삼각점
빠른 걸음으로 숲길을
걷는다
민가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강릉김공
묘(17:05)
묘지를 내려서서 농로를
따른다
농로 우측에는 여주쌀 연구회 영농조합법인
가공센터가 있다
농로에서 좌측의 도로쪽으로 꺽어진다
왕대리(旺垈里)
입구(17:09)
여주시 능서면에 있는 왕대리는
남한강이 마을을 따라 남북으로 뻗어 흐르며. 자연마을로는
새능, 송탄광, 장자터가 있는데,
새능은 신릉동왕터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새로 된 효종
영릉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송탄광은 장자터 남쪽에 있는 마을로
송탄유를 짜는 공장이 있었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장자터는 새능 남쪽에 있는 마을로
장자(부자)가 살았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왕대리란 지명은 고려 제32대 우왕
14년(1338) 6월에, 우왕이 이성계에게 쫓기어 이곳에
머물러 있다가 태조3년(1394) 4월에
피살되었으므로 왕터 또는 왕대라 부른 것에서 유래하였다.
왕대리 표시석 아래에 있는 왕대리
유래
첫댓글 형님 대단하십니다.
넘사벽입니다.
맥길에 발들여 놓지마소...맥길은 뽕과 같아 한번 빠지면 못나오니. 대간이나 정맥같은 꽃길이나 댕기소.
사람꼴이 말이 아니외다...그나저나 BOSS대장한테는 나와바리 구역에 갔다고 절대 얘기하지마소
힘들고 어려운 걸음하셨네요 ㅎ 없는길 찾아댕기고 ....대단하십니다. ㅎㅎ
명절은 잘 쉬었는기요?..개척산행 참으로 어렵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