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너머 남촌
김상영
아빠에게 오토바이를 깜짝 선물하는 고명딸이 대견하다. 유튜브를 탐색하다 발견한 인간미 넘치는 영상이다. 선정적이거나 호들갑 떠는 영상이 판치는 중에 모처럼 발견한 백미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잖은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나도 조런 효녀 하나 없나 부러웠지만, 생각을 떨쳤다. 보태주지는 못할망정 딸내미에게 뭘 바라다니, 못난 아비가 아닌가. 자식에게 기대지 말라는 신부님 말씀이 귓가를 맴돈다. 냉면 먹고 싶으면 제 돈으로 사 먹고, 소고기가 간절하거든 자신에게 사주라 하셨지.
남자는 부인과 사별한 홀아빈가 보다. 용모와 입성에 공을 들인 티가 났지만 고독에 절고 우수에 젖은 느낌이 풍긴다. 나이 지긋한 내 또래라 연민의 정을 자아낸다. 뺑덕어멈인들 마다하랴, 여자 친구가 시급하겠단 생각이 든다. 공양미 삼백 석으로 아비 눈을 밝힌 심청전 같아 뭉클하면서도 오토바이의 멋들어진 자태에 눈을 뗄 수 없다. 아, 나도…. 잠자던 지름신이 도진 게다.
남자가 마냥 흐뭇해하며 올라탄 오토바이 기종이 일제 ‘혼다 레블500’이다. 물건 하나 잘 만들었네 싶어 눈독을 들여 검색했는데 아뿔싸! 품절 아닌가. 가성비까지 갖춘 오토바이일진대 마니아들이 지나쳤을 리 없고, 황혼빛 젖어 어둔한 나는 마냥 뒷북을 친다.
코로나로 수출입이 원활치 않으니, 중고조차 품귀다. 해를 넘기고도 살 둥 말 둥 하다니 참을 수 없다. 퍼뜩 살 수 있는 기종이 없나 싶어 참새 방앗간 드나들 듯 모니터를 살폈다. 떡 줄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이었다.
아내를 설득하는 작업은 항상 만만찮다. 글 쓰는 만큼이나 공을 들여야 한다. 아침부터 열 받친다고 닦아 세울까 봐 노글노글한 저녁나절을 택하였다. 간절한 심정으로 따끈한 커피 한 잔을 쟁반 받쳐 권하면서 더듬더듬 운을 뗐다.
“있잖아, 그 홀아비 참 좋겠더라.”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싶어 아내가 귀를 세운다. 효녀와 오토바이 얘기를 뒤죽박죽 이어가자니 진땀이 난다. 생각은 시끌벅적하건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척하면 삼천리라 했지. 하루 이틀 살아봤나, 오토바이 사고 싶다는 결론이 뻔한 데 변죽만 울리는 내가 답답했던 모양이다.
“무슨 소리고, 안 된다.”
차 있고 자전거도 멀쩡한데 언감생심 무슨 사치냐, 절대 불가다. 나잇살이나 먹어 꼬닥거리면 동네 사람들이 욕한단다. 과부 될까 겁나기도 했겠다.
생각은 굴뚝인데 한마디로 거절당하고 보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장기전을 펼칠 수밖에 없다. 밥상을 물릴 때마다 잘 먹었소이다 고마워하고, 설거지는 도맡다시피 하였다. 내 속이야 뻔한 걸 모를 리 없건만, 이쁘긴 하다는 표정이었다. 우울 모드가 깔린 내 모습이 연민의 정도 불러일으켰는가 보다. 꽃나비 날자 아내 맘도 아지랑이처럼 헤실헤실 풀린 어느 봄날이었다.
“사소!”
울컥한 나는 아내를 불끈 끌어안고 몇 바퀴 돌렸다. 구름 탄 기분이어서일까, 이왕이면 좋은 걸 사라는 덕분에 그 양반 오토바이보다 상위 기종을 들이게 됐다. 조금만 더 더하다가 초보치고는 한계치까지 치받은 거다.
좋은 일에는 마가 끼기 쉬운 법이다. 125cc를 몰았던 가락이 있어 덩치 큰 오토바이에 어렵사리 적응되어 다행이다 싶었더니 아니었다. 면허가 문제였다. 믿었던 2종 보통자동차 면허와 원동기 면허 모두 소용없었다. 큰 오토바이를 부리려면 오로지 2종 소형면허가 필수라 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오토바이부터 산 내가 바보 축구 온달이다. 내기바둑 둘 때 덜컥 수를 두고선 비싼 담배를 연거푸 빨아대든 아득함이었다. 쓸데없이 객기를 부렸구나 싶어서 후회막급이었다. 이 나이에, 이 복잡한 시국에 면허를 새로 따게 생겼으니 사서 고생이요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이웃들이 알면 더 낭패다.
분홍빛 세상이 잿빛으로 변했다. ‘삐까번쩍’하던 오토바이가 애물단지 같았다. 밉다 하니 업자 한다더니, 보험료도 차보다 비싸다. 대관절 네 깐 게 뭔데 스트레스를 더하나 싶기도 했다. 싫다 싫어 되뇌다 보니 오만 정이 떨어졌다.
“여보, 오토바이 팔자.”
“지금 무신 소리 하노.”
면허 따기가 버거워 끙끙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내가 말렸다. 있어 보이는 오토바이가 차와 함께 버티고 선 모습이 좋았는데 아쉬운 모양이었다. 교회 공터에서 뺑뺑이 연습을 수없이 하고도 면허시험장에서 탈락의 쓴맛을 본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2종 소형 그거 만만히 볼 면허가 아니다. 굴절, 곡선, 진로 전환, 좁은 길 코스가 잡아먹을 듯 기다린다. 천당 가는 가시밭길이다. 운전 실력과 면허시험은 따로 논다. 택시기사도 나가떨어지는 시험 아닌가. 난들 용빼는 재주 있나, 하는 수 없이 대구 근교 학원에 등록하였다. 평소와 달리 아내는 학원비가 얼마냐고 묻지 않았다. 뻔질나게 오르내리며 길바닥에 흩뿌리는 휘발윳값도 운운하지 않았다. 무면허의 터널에서 얼른 벗어나기만을 응원하는 아내가 고마웠다.
태양은 시험장 위에 붉게 떠 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나날이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맹렬한 뺑뺑이 연습 끝에 기어이 면허를 따던 날 나는 웃통을 벗어 흔들며 외쳤다.
“만세 만세이!”
믿었던 원동기 면허가 무용지물이란 걸 알았을 땐 하늘이 노랬다. 온통 잿빛이기도 하였다. 인내는 쓰나 고생 끝에 낙이 온 것이다. 그 누가 객기를, 공연히 부리는 호기라 업신여겼을까. 무작정 저지르지 않았다면 이 달콤한 열매를 어찌 맛보랴. 면허 따기 위해 진력한 몇 달이야말로 삶의 진미를 맛본 나날이 아니었을까.
사람마다 제멋에 산다. 가죽 잠바를 착 붙여 입고, 배낭을 등에 업으면 오토바이 타는 맛이 절로 난다. 팔팔한 오토바이 마니아들이 교행하며 갖가지 방법으로 동호의 예를 갖춘다. 헬멧 속 ‘할배’도 천연덕스레 손을 들어 화답한다. 늘그막에 이 무슨 과분한 대접이랴, 다시 없을 회춘이다.
그야말로 기분 째지는 인생이다. 통닭이나 막걸리 사나르러 윗재를 넘나드는 심사를 제대로 표현할 방법이 이뿐이다. 깜짝 선물에 흐뭇해하던 양반은 내 뒤에 서시라. 내리사랑이 맘 편하지, 딸내미 치사랑을 받은 터에 좋기만 할까. ‘내돈내산’ 즐거운 삶 나가신다. 남촌서 남풍 불 때 마냥 좋다는 노랫말처럼 재 너머 남촌에 내가 사나니. (16.3매)
첫댓글 ㅋㅋ 재미있어요. 중간에 양희은 노래 개사까지
~ 장면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