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대망호(大望號)
파도는 많이 잦아들어 있었다. 아침까지 거세게 불던 바람이 잦아 들면서 파도도 따라서 잠잠해졌다. 옅은 구름이 달을 가리고 있어서 밤바다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느릿하게 출렁이는 거대한 물결은 어딘지 음산해서 바다 속에서 무엇인가 튀어나오기라도 할 듯 했다.
바다 위를 조용히 가로지르는 작은 배가 있었다. 통통배라고 불리는, 가끔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낚싯배로 빌리곤 하는 배였다.
배안에 탄 사람의 숫자는 세 명이었다. 한 사람은 뱃사람인 듯 배의 조종을 맡고 있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낚시꾼들인 듯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배의 앞쪽에서 나란히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배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 중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모두 시선을 수평선에 주고 있는 것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늦었군요.”
입을 연 사람은 오른 쪽에서 낚싯대를 잡고 있던 사내였다. 말끝이 갈라지는 것이 불안하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그는 눌러쓴 모자로 인해 광대뼈 아랫부분만이 드러나 있는데 툭 돌출된 광대뼈와 움푹패여 홀쭉한 빰, 파리한 입술이 환자처럼 보였다.
“아직 약속한 시간이 되지 않았소. 너무 초조해 하지 마시오. 시간을 어기는 사람은 아니라고 들었으니까, 이종하씨.”
왼편에 있던 사내는 무심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종하의 초조한 음성과는 정반대의 목소리였다.
“진 실장님, 작은 인연 밖에 없었던 나를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주고 있으니 무어라 감사의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은혜랄 것은 없으니 마음에 두지 마시오. 윗분들이 당신의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에 돕는 거요. 그것만 잊지 않으면 되는 거요."
진 실장이라 불린 사내의 말을 들은 이종하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가 진운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사내가 속한 조직과 인연을 맺은 것은 오래 전 문진혁을 잠깐 도운 것밖에 없었다. 그 사실도 저택에서 그를 구한 진운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그 작은 인연이 그의 목숨을 구했다. 지금까지 그와 함께 하면 그를 보호한 진운의 능력은 놀라웠다. 그런 사내가 속해 있는 조직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앞으로 그가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재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왔소.”
진운의 말에 이종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는 전면 수백 미터 앞의 바다위에서 라이트가 규칙적으로 깜박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약속되어 있는 신호였다.
배를 조정하던 50대의 선장도 그것을 보았는지 라이트가 깜박이는 곳을 향해 배를 몰기 시작했다. 이종하와 진운이 바꾸어 탄 배는 그들이 처음에 탔던 통통배의 5배가 넘은 직한 크기의 고기잡이 배였다. 갑판에 올라선 그들을 바라보던 여섯 명의 사내 중 중앙에 있던 사내가 그들에게 다가 왔다.
“기다리느라 고생들 하셨소.”
40대 중반의 선장은 피부가 햇빛에 노출되어 검게 그을린 데다가 얼굴에 잔주름이 많아서 거칠고 노회한 인상을 풍기는 사내였다.
이종하는 여전히 불안이 가시지 않는 듯 선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박 선장님. 문제는 없겠지요?”
“흐흐흐, 해경의 검문을 통과하면 공해상까지는 특별한 검문이 없소. 일본에서 마중 나올 배가 역할을 제대로 한다면 당신이 일본땅을 밟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요. 그런 거 걱정하지 말고 일본에 간 후 나머지 잔금이나 잊지 마시구려.”
박민우는 거칠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가 듣기로 이종하는 경기도에 있는 큰 조폭 집단의 두목이라고 들었는데 말하는 투는 양아치 수준이었다. 겁먹은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몰골이었으니 박민우가 경멸할 만도 했다. 하지만 고객이다. 그는 말을 마친 후 몸을 돌렸다.
박민우의 어조는 어딘지 경멸하는 느낌이 묻어나는 말투여서 이종하는 배알이 뒤틀렸지만 참아야 했다. 뱃사람들 거친 거야 하루 이틀일이 아니다. 그리고 아쉬운 것은 그였다. 박민우의 비위를 거슬러 바다에 내던져진다면 시체도 찾지 못하게 될 것이다. 바다 위에서 배의 선장은 왕이다.
이분들 모셔라.
박민우가 막 선원들에게 지시를 내렸을 때였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그 일이 벌어진 것은.
강재은은 이맛살을 삼하게 찌푸렸다. 그녀의 단아한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갑판의 모서리를 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조타실 위에 매달려 있는 등불 덕분에 갑판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배 멀미로 몸부림치는 그녀의 모습은 그래서 더 잘 보였다.
그들은 고기잡이배를 타고 있었다. 부산에도 국정원의 지부가 있다. 파도가
잠잠해졌으니 언제 이종하가 배를 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배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이 기다림이 며칠이 될지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두 사람은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강재은이 배의 진동을 참지 못하고 배 멀미를 시작한 것이다.
강재은이 배 멀미를 억지로 참는 것을 보며 한은 속으로 웃고 있었다. 그처럼 강인한 여자가 배 멀미로 고생하는 구경은 돈 주고도 하지 못할 진풍경이었다.
게다가 토하는 모습이 이미지를 구긴다면서 억지로 참고 있는 모습이라니.
강재은이 배 멀미를 시작한 것은 십여 분전이었다. 한은 더 구경할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일찍 손을 쓰려고 했지만 강재은이 고집을 부린 탓에 지켜본 십여 분만으로 충분했다. 이 이상은 악취미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뭐하는 거예요?
강재은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 뒤에 있던 한이 그녀의 등에 손바닥을 댔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에 누가 손을 대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그녀였지만 지금은 말을 하기도 힘에 겨웠다. 기운이 없어 반항을 할 수도 없었다.
"지압을 하는 거요.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테니 좀 참아요."
한의 무뚝뚝한 말에 강재은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여자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따뜻한 말 한마디 안하는 그가 서운했다. 하지만 기대할 사람에게 기대할 일이다.
한은 강재은이 말없이 있자 등 뒤의 독맥에 위치한 요혈들을 차례로 눌러 나갔다.
찬단무상진기의 기운이 그와 함께 요혈을 통해 강재은의 경략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녀의 뒤틀렸던 오장의 기운들이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후우 어떻게 한 거예요?"
강재은은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허리를 세우며 한에게 물었다. 어느 틈에 그녀는 갑판 모서리를 짚고 있던 손을 뗀 후였다.
"내가 아는 지압술의 일종이요. 그러게 처음에 시술하겠다고 할 때 승낙을 하지. 10분 동안 공연히 고생하지 않았소."
"지금 내 걱정 해주는 거예요?"
말을 하는 강재은의 두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한은 무언가 기대에 찬 그녀의 두 눈을 무심하게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강재은은 그런 한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지만 각오를 새롭게 다지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밤바다를 바라보는 한의 눈가에 그늘이 졌다.
"이렇게 대책이 없기는 정말 오랜만이요"
"...."
강재은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종하가 밀항선을 탈 거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종하를 잡기 위해 부산항의 경비를 강화시킬 수는 없었다. 경비가 강화된 낌새를 눈치 채기라도 한다면 이종하는 밀항을 포기할 것이 분명했다. 호랑이 입을 향해 제 발로 걸어들어 갈 자는 드물었고 이종하는 성격으로 보아 그런 모험을 할 자가 아니었다.
"내 추측이 틀렸단 말인가? 이렇게 조용할 리는 없는데"
"무슨 소리에요?"
한의 중얼거림을 들은 강재은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런 것이 있소."
나직하게 대답한 한은 왼손을 들어 오른손의 팔뚝 부분을 쓰다듬었다. 검은색 티를걸친 그의 오른 팔뚝은 약간 부풀어 올라 있었는데 근육은 아니었다. 손으로 쓰다듬으며 드러난 자국은 그의 팔뚝을 무엇인가가 길쭉한 것이 휘감고 있는 형상이었다.
침묵에 잠긴 어두운 밤바다를 보며 두 사람이 각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때르르릉!"
느닷없는 핸드폰 소리에 한은 강재은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호주머니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강재은이 핸드폰을 꺼내는 것을 보며 한은 물었다.
"신기한 물건이군. 이런 바다 한복판에서도 핸드폰이 되는 거요?"
"인공위성으로 연결해주는 거에요. 경찰과는 장비가 틀리죠."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럽게 대답한 강재은은 핸드폰의 통화 스위치를 눌렀다.
"강재은입니다. 윤 선장님?"
그녀의 음성이 높아졌다. 어둠속에서 한의 시선도 빛나기 시작했다. 잠시 상대와 대화를 하던 그녀는 곧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빠르게 상대가 불러주는 것을 받아 적었다.
강재은이 핸드폰을 접자 한은 내용을 전혀 못 들은 사람처럼 물었다.
"윤백현 씨요?"
"예. 윤 선장님이 이종하가 탄 밀항선의 이름을 알아냈어요."
짧게 말을 마친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않고 예의 그 핸드폰으로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장 요원. 강재은 이에요. 박민우라는 선장이 운행하는 대망호의 현재 위치, 그리고 그 배와 우리가 타고 있는 해경호와의 거리를 알려줘요. 지금이에요."
강재은이 다시 전화를 받은 것은 3분 정도 후였다. 그녀는 상대가 불러주는 것을 열심히 수첩에 메모했다. 핸드폰을 끊은 그녀가 한을 향해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 했다.
"대망호는 지금 이 배에서 북동쪽으로 13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요. 우리는 곧 그들이 탄 배를 볼 수 있을 거예요."
강재은의 말을 들은 한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우리가 아니요."
"예?"
"장 요원이라는 사람에게 다시 전화를 해 주시오. 이 배가 대망호와 2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도달했을 때 다시 연락을 달라고."
"왜요?"
"나중에 말해 주겠소."
한은 입을 다물었다. 한은 농담을 하는 경우가 없는 사람이다. 그가 하는 말에는 언제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강재은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강재은이 그들이 타고 있는 배의 선장을 만나고 온 후 해경호는 전속력으로 북동 방향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허연 물보라가 배의 꽁무니를 따라 크게 일어났다.
멋진 풍경이었지만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밤바다의 풍경을 감상할 여유를 갖고 있지 못했다.
강재은의 핸드폰이 울린 것은 해경호가 흰 포말을 일으키며 밤바다를 질주한 지 사십 여분 지났을 때였다.
"이곳이라는군요."
핸드폰을 끈 강재은이 북동쪽의 밤바다를 보고 있는 한에게 말했다. 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 2킬로미터 전방에서 흰 포말을 일으키며 나아가고 있는 배가 보였다. 아무리 그라해도 배의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고 하나의 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 점이 대망호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한의 시선이 강재은을 향했다.
"재은 씨, 할 말이 있소. 화내지 않고 들어주겠다고 약속해 주시오."
"무슨 말인데 시작이 그렇게 거창해요? 말을 해 보세요. 듣고 나서 약속하죠."
강재은은 웃으며 대답했다. 한은 잠시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 배로 가는 것은 나 혼자요. 당신은 이 배에 있어야 하오."
한의 말을 들은 강재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화난 얼굴이다.
"왜 그래야 하죠?"
"위험하니까."
"흥, 전에도 말했지만 이 직업을 수행하면서 위험한 경우는 수도 없이 겪었어요. 당신만이 위험을 겪었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르오. 당신은 갈 수 없소. 나와 함께 가면 당신은 반드시 죽게 될 테니까."
한의 음성은 무심했지만 그 말을 들은 강재은은 전신에 오한이 드는 것을 느꼈다.
그때 한의 손길이 그녀의 상체를 스쳤다. 어깨를 털어 치미는 소름을 떨치며 막 소리를 치려던 그녀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손가락 끝을 까딱거릴 수도 없었다. 전신이 마비된 것이다. 한이 마혈을 짚은 줄 모르는 그녀는 당황했다.
한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듯 짚으며 말했다.
"놀라지 마시오. 내가 아는 방법 중 몸을 마비시키는 수법을 사용했을 뿐이요.십여 분 후면 정상적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을 거요."
한은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그 안에 여러 겹으로 접혀 있는 종이 한 장을 집어 들더니 그것을 강재은의 바지 호주머니에 넣었다.
강재은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깊고 따스했다.
"만일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 종이에 적혀있는 장소에 가보시오. 그곳에 그동안 내가 회에 대해 알아낸 모든 것을 기록해 놓은 수첩이 있소. 다녀오겠소."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그동안 그에게서 들어보지 못했던 어투여서 강재은은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를 붙잡아야 한다는 다급함과 불안으로 마음이 터져 나갈 듯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은 조타실에 들어가 선장에게 이곳에서 정지한 후 기다려 다라고 부탁했다.
국정원의 일을 오랫동안 수행해온 선장은 두말없이 승낙했다.
잠시 후 배에서 검은색의 일인용 고무보트가 내려졌다. 해병대가 주로 사용하는 침투용 보트를 축소한 형태의 보트였다. 강재은이 육지에서 준비해 온 것이다.
200여 미터를 보트에 달린 노를 저어 전진한 한은 고기잡이배에서 보트가 분명하게 보이지 않을 지점에 도착했다고 판단되자 노를 놓고 보트의 후미로 이동했다.
무심한 시선으로 바다를 응시하던 그의 오른손 장심이 바다를 향했다. 형체가 없는 거대한 힘이 그의 손바닥을 통해 흘러나와 바다를 때렸다. 아무런 소리도 없었지만 수면 아래에는 일대 장관이 벌어졌다. 수면 아래에 거대한 물의 소용돌이기 생기며 바다가 보트를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손이 허공을 격하고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바다는 몸서리치며 보트를
밀어냈다. 보트의 바닥은 물에 닿을 시간이 없었다. 한의 손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허공에 뜬 채 수십 미터의 거리를 마치 날아가는 것처럼 이동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