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배사 창원지회에서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읽기 7회차를 진행하였습니다.
■ 일시 : 2024. 3. 19 화요일 PM.6:30~8시
■ 장소 : 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 옥포관
■ 읽은 부분 : 이충무공전서 2권 126쪽 ~ 236쪽.( 이충무공전서 권6. 난중일기2 - 갑오년, 을미년 일기 5월까지)
■ 참석자 : 내이포판옥선, 동자갑선, 상유, 백의종군로악양, 손자병법, 진해현감, 웅천현감, 홍패, 남포, 미신불사, 하성군 총 11명
■ 다음 모임 안내 : 2024. 4. 16 화요일 PM 6:30~8시
■ 장소 : 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
■ 읽어올 분량 :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권 7 ( 2권 238쪽~343쪽 ) 난중일기 3(을미년 6월부터~ 병신년 일기)
■ 가까운 지역에 계시는 다른 지회 분들도 참석하시고 싶으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이번 읽기 모임에서는 1시간 정도를 웅천현감님께서 설명하시며 중간 중간 궁금한 것 질의응답하면서 진행했습니다. 그 후 함께 읽기를 하며 느낀 점을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며 마무리했습니다. 일기 내용 중 웅천현감님께서 강조하시는 것 중심으로 난중일기에서 발췌 위주로 했습니다. 질의응답과 회원들의 느낀 점, 난중일기 부분설명 순서로 정리했습니다.
<질문>
• 권관이 종9품이라는데 내용을 보면 중요한 일을 맡아서 했던 것 같다. 당시 권관의 지위는 어느 정도였나?
⇨ 권관이라는 직책은 경국대전에 나온다. 15세기말 또는 16세기 초에 생겼다. 만호 사이사이에 권관이 들어가 있다. 권관은 종9품으로 기지장이다. 만호는 종4품이다. 하지만 품계는 큰 의미가 없다. 만호 하던 사람도 자리가 없으면 권관으로 갈 수도 있었던 시대다. 만호는 중앙에서 임명하는 관리다. 품계는 큰 의미가 없고 역할이 더 중요했다.
• 을미년 4월 20일에 남해현령 기효근을 효시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하는데 다시 유임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 너무나 중대한 일이라 집행하지 않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의제기를 해 유임된 것 같다.
<회원들의 느낀 점 나누기>
• 홍패 - 설명해주시는 것을 듣는 시간이 감사하다.
• 동자갑선 - 이해를 위해 각주를 먼저 읽고 본문을 읽다 보니 각주의 한자를 한 자 한 자 뜯어보다가 소비포라는 지명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에피소드! ㅎㅎㅎ
저녁 모(暮), 바 소(所), 아닐 비(非), 갯가 포(浦), 올 래(來) - ‘소비포’
• 남포 - 혼자 읽을 때는 전체 흐름을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맥을 잡아주니 이해가 쉬워졌다. 항상 볼 때마다 새롭다는 느낌이다.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해야겠다.
• 하성군 - 3년 동안 난독증으로 글을 못 읽었다. 오늘을 계기로 빠진 난중일기를 4월 1일부터 까페에 올리겠다.
• 손자병법 - 이런 훌륭한 책을 번역해줘서 감사하다. 김완의 ‘해소실기’번역본에 거북선 꼬리 부분이 잘못 번역된 걸 본 적이 있다. 이 책을 바이블처럼 읽는다. 전체적 그림이 안 보였는데 종합적으로 설명해주니까 쉽게 이해가 된다.
• 백의종군로 악양 - ‘가소롭다’라는 말이 너무 많다. 우습다. 어이가 없다. 기가 찬다. 왜 그렇게 비아냥거리는 표현이 많은지 모르겠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일기니까 가능할 수도 있겠다. 누가 본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솔직한 마음속을 표현한 것일 테지.
• 미신불사 -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대단한 분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는데 명나라 장수가 왔을 때 접대하는 부분, 섬세한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 상유 - 수군, 격군은 무엇이 동인이 되어 목숨 걸고 싸웠을까? 의병이나 승병을 보면 애국심이 우리나라의 힘이었지 않을까 싶다.
매일의 일기, 관습, 제도, 각종 제사 등이 자세하고, 매일 만났던 인물들을 상술하여 여러 역사적 상황들을 고증하는 데도 유효한 자료로 활용 가능할 것 같다.
• 손자병법 - 영화 ‘대립군’이 떠오른다.(2017년 작품)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어린 ‘광해’(여진구)에게 조정을 나눈 ‘분조’를 맡기고 의주로 피란한다. 임금 대신 의병을 모아 전쟁에 맞서기 위해 머나 먼 강계로 떠난 광해와 분조 일행은 남의 군역을 대신하며 먹고 사는 대립군들을 호위병으로 끌고 간다. 이 영화를 한번 보는 것을 추천한다.
• 손자병법 - 격군과 사부 등은 급여가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본영 각 배 사부와 격군으로 급료 받은 사람들을 점고했다는 일기를 보고 급료를 받았는지 궁금하다. 칠천량 해전 공원 영상관에서 보여주는 영상에서도 가족을 위해 돈을 벌러 군인이 된다는 장면이 나온다. 난중일기를 읽다보면 예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눈에 보이기도 한다.
• 진해현감 - 일기를 읽다보면 어머니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히 느껴진다. 꿈을 꾸고 해몽하는 장면과 점을 치는 장면은 재미있었지만, 전염병으로 고통 받거나 죽은 이들의 이야기 뿐 아니라 굶주리다 못해 서로 잡아먹는 참혹한 상황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어려운 상황에서 둔전을 경작하거나 소금을 굽고, 물고기를 잡아 자급자족하는 모습, 꼼꼼하고 세세하게 숫자로 표현하는 모습은 본받을만하다고 느껴졌다. 큰 강둑도 자그마한 틈 하나로 무너질 수 있듯이 철저한 대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유비무환의 정신을 배울 수 있었다. 편 가르기 하지 않고, 뇌물이 아닌 선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나라를 위한 일에 유익하게 하려는 두예 이순신도 인상 깊었다.
함께 읽기의 즐거움,
장군님의 내면과 교감하는 시간,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기쁨,
소통하며 쌓아가는 끈끈한 정....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券6, 난중일기2(갑오년, 을미년)
(2권 126쪽 ~ 236쪽)
계사년에는 우울한 가운데 선조는 이순신에게 계속 출전 명령을 내린 것을 볼 수 있었다. 9월 12일 큰 변화로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장을 받게 된다. 그러나 장계 메모를 보면 10월 1일이 되어서야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책을 받게 되었으며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병력 모집에 애쓴 흔적이 많이 보인다.
1594년 명. 일 간에 강화가 진행됨, 암울한 위기상황이 계속되며 일기 내용도 우울하다.
3월에 당항포 등의 전쟁에서 이겼다. 명나라 수군이 구원을 구실로 들어왔으나 싸움에는 소극적이었다. 이같은 명나라의 태도에 항의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10월에는 육군의 곽재우, 김덕령 등과 함께 공격하여 장문포의 왜군을 격파하였다. 그럼으로써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1595년 휴전 상태가 계속되는 속에서
전쟁은 뜸했으나 이순신은 여전히 다가올 싸움에 대비하였다. 둔전을 경작하여 군량을 준비하고 배와 무기를 만들었다. 활쏘기를 하면서 단련하기도 하였다. 아직 웅천 등지에 있는 적들의 동태에 대해서도 항상 경계하였다. 그런 중에도 견내량 등지에서 작은 전투가 일어났다.( 이 해는 원본일기가 남아 있지 않아서 내용이 상대적으로 적다.)
난중일기(亂中日記) 2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 이순신50세
<1월> 가서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계속되는 암울함
초1일(경진)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어머님을 모시고 함께 한 살을 더하게 되니, 이는 난리 중에도 다행한 일이다. ⇨ 「진으로 돌아가는 일을 임금님께 보고하는 장계」(1594년 1월 17일)에 따르면, 이순신은 1593년 12월 12일 전라좌수영으로 복귀했었다. 그 후에 여수로 피란 내려온 어머니를 찾아뵈었던 듯하다. 좌수영에 머물던 이순신은 1월 17일에 다시 한산도 진영으로 복귀했다.
초6일(을유) 비, 동헌에 나가 남평[나주시 남평읍] 도병방을 처형했다.
초8일(정해) 맑음. 동헌에 앉아 (*동헌방에 앉아 배 첨지 및 남의길과 종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늦게) 공무를 보았으며, 남원도병방을 처형했다.
⇨ 당시 남평과 남원의 병력 모집은 0%였다. 도병방은 병력모집 책임자로서 군사모집을 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처형당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이순신이 연해안에서 형벌을 가혹하게 해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다’ 는 기록이 있다. (웅천현감님 설명)
⇨ 「선조실록」 선조 30년 (1597)1월 27일에, 윤두수가 “신이 남원에 있을 때, 이순신이 군관을 남원에 보내 군사를 모집하다가 그곳 병방을 참하기까지 하여 백성이 잇따라 소란하고 곡성이 하늘에까지 사무쳤습니다. 군관을 불러서 물어보았더니, 그들이 멀고 가까운 친척까지 붙잡아갔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보건대 군사를 모을 즈음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많았습니다.‘라는 기록으로도 나온다. 당시 윤두수는 선조의 명령으로 남부지역을 시찰하고 있었다. (출처 : 난중일기 184~185쪽 /박종평 역/글항아리)
12일 – (신) 맑음. 아침 식사 후에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하고 재삼 타이르시며 조금도 이별하는 것으로 탄식하지는 않으셨다. 선창에 돌아와서는 몸이 불편한 것 같아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14일(계사) 흐리면서 큰바람이 불었다. (*아침에 조카 뇌의 편지를 보니 설날 아산 선산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무려 200여 명이나 산소를 둘러싸고 음식을 구걸하므로 제사 올리는 것을 물렸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19일(무술) 흐리다가 늦게 맑아졌다. 바람이 크게 불었다. (*해가 진 뒤에 더 거세어졌다.) 아침에 떠나 당포 바깥 바다에 이르러 바람을 따라 반돛을 달고 순식간에 어느덧 한산도에 이르렀다. 활터 정자에 올라앉아 여러 장수들과 이야기하였다. 저녁에 원元수사가 왔다. ㅇ 소비포권관[이영남]에게서 들은 영남 여러 배의 사부와 격군들이 거의 다 굶어 죽게 되었다는 말은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20일(기해) 맑으나 큰바람이 불어 몹시 추웠다. (춥기가 살을 에는 듯하였다.) 각 배에 옷이 없는 사람들이 목을 움츠리고 추위에 신음하는 소리는 차마 듣기 어려웠다. 군량도 도착하지 않아 이 역시 답답했다.
21일(경자) 맑음. 아침에 본영 격군 742명에게 술을 먹였다. ㅇ 광양현감[최산택]이 들어왔다.
ㅇ 저녁에 녹도만호가 와서 보고하는데, 병들어 죽은 시체 214명을 거두어 묻었다고 했다.
22일(신축) 맑음. 날씨가 따뜻하고 바람도 없었다. 활터 정자에 올라앉아 진해현감 [정항]을 시켜 교서에 숙배례를 행하게 하고, 종일 활을 쏘았다. (녹도만호가 병으로 죽은 시체 217명을 거두어 묻었다고 했다.)
* 숙배례 ① 종친• 백관이 임금에게 공손히 절하는 예. 전정에서 국궁사배함. ② 서울을 떠나 임지로 가는 관원이 임금에게 작별을 아뢰는 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 숙배례는 사은숙배(謝恩肅拜)를 말한다. 단령(공복의 일종)을 입고, 임금의 은혜를 감사히 여겨 머리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여 네 번 절을 한다. 숙배는 국왕에 대하여 표시하는 일종의 충성과 복종의 서약 의식이다.
(출처 : 난중일기 190쪽 /박종평 역/글항아리)
24일(계묘) 맑고 따뜻했다. 아침에 산역 일로 목수 41명을 송덕일이 거느리고 갔다. ...
25일(갑진) 흐리다가 늦게 맑았다. 송두남과 이상록 등이 새로 만든 배를 몰고 올 일로 사부와 격군 132명을 거느리고 갔다.
28일(정미) ....전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 추위에 굶주리고 병들어 죽은 시체가 즐비한 암울한 중에도 배를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등 자신의 할 일을 꿋꿋이 계속해 나가는 장군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월> 거제로 모여드는 적을 무찔러라
초1일(경술) 맑음. 늦게 활터 정자에 올라가 공무를 보았다. 청주 사는 겸사복 이상이 왕명서를 가져왔는데, “경상감사 한효순의 장계에 ‘좌도에 있는 왜적들이 합하여 거제로 들어가서 장차 전라도 지경을 침범할 것'이라 하니, 경은 삼도수군을 합하여 적을 무찌르라."는 내용이었다.
초2일(신해) 맑음. (*아침에 도망가는 군인들을 실어 내던 사람들의 죄를 다스렸다. 사도첨사가 와서 전하기를, 낙안군수[신호]가 파면되었다고 했다.) 늦게 활터 정자에 올라갔다.(동궁께 올린 달본의 회답이 내려왔다. 각 관포의 서류들을 처결하여 보냈다.) 활10순을 쏘았다.
초3일(임자) 맑음. 큰바람이 불었다.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한쪽 눈이 먼 말을 보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초5일(갑인) 맑음. (새벽) 꿈에 좋은 말을 타고 바위가 첩첩한 큰 산마루로 곧바로 올라가니 아름다운 산봉우리들이 동서에 뻗쳐 있고, 또 산마루 위에 편평한 곳이 있어 거기다 자리를 잡으려다 깨었는데,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어떤 미인이 혼자 앉아 손짓을 하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으니 우스운 꿈이다. 아침에 군기시에서 받아온 흑각궁 100장과 화피 89장을 낱낱이 계산하여 서명했다.... 원수[권율]의 회답이 왔는데, 심 유격(일본과 외교적 교섭을 행하던 명나라의 유격장군 심유경)이 벌써 화친을 결정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간사한 꾀와 교묘한 계책을 헤아릴 길이 없고, 이전에 그들의 술책에 빠졌는데, 또 이와 같이 빠지니 한탄스러운 일이다.
초7일(병진) 맑음. 서풍이 크게 불었다....ㅇ 고성현령[조응도]의 보고에, 적선 50여 척이 춘원포에 도착했다고 했다. (삼천포권관과 가배량권관 제만춘이 와서 서울 소식을 전하였다. 이경복을 도망간 격군들을 붙잡아 오기 위해서 내보냈다.) ㅇ 이날 군대를 다시 편성하고 격군들을 각 배에 옮겨 태웠다.
초8일(정사) 맑으나 동풍이 크게 불고 날씨가 몹시 찼다. 아침에 순천부사가 와서 말하기를, 고성 소비포에 적선 50여 척이 드나든다고 하기로 즉시 제만춘을 불러 지형의 편리함과 불편함 여부를 물었다. 늦게 활터 정자에 올라가 공문을 처결하여 보냈다.
초9일(무오) 맑음. 새벽에 우후가 2선과 3선(전라좌수영의 여러 척 전선 중에 1선[상선이라고도 함)은 수사가 타는 배를, 2선은 우후가 타는 배를, 3선 이하는 한후장 참퇴장 돌격장 등 군관이 타는 배를 가리킴)을 거느리고 소비포 뒤쪽으로 띠풀을 베러 갔다. 아침에 고성현령이 왔다. (돼지도 가지고 왔다.) 그래서 당항포에 적선 드나드는 것을 묻고, 또 민생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는 참혹한 상황이니 장차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를 물었다.
⇨ 전쟁이 일어난 지 1~2년 사이의 처참한 풍경이다. 전쟁 3년째인 1594년 봄에는 더욱더 심각했다. 「선조실록」1594년 3월 20일에는 “굶은 백성이 사람 시체의 살을 베어 먹은 뒤에 남은 흰 뼈가 성 높이처럼 쌓였다. 살아있는 사람까지 서로 잡아먹었다. 심하게는 아버지와 아들, 형제들이 서로를 잡아먹고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류성룡의 「난후잡록」에는 선조가 서울로 돌아온 뒤에 성안의 기근이 심해 죽은 사람이 태반이었고, 길 위에 있는 시신을 다투어 잘라갔기에 흰 뼈가 길에 널려 있었으며, 그 시신들은 동대문 밖에 오간수구에 쌓아놓았는데 성높이에 이르는 것이 두세 곳이었다고 한다. 또 사람이 서로를 잡아먹었는데, 아버지와 아들, 부부가 서로를 가리지 않았고, 죽은 사람이 있으면 순식간에 살을 베어갔기에 피와 살이 낭자했다고 한다. 「쇄미록」1594년 4월 3일에는 “영남과 경기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일이 많아 6촌의 친척까지도 죽이고 씹어먹는다. 최근에는 혼자 길을 가는 사람을 쫓아가 죽이고 먹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출처 : 난중일기 203쪽 /박종평 역/글항아리)
초10일(기미) 이슬비가 개이지 않고 큰바람이 불었다. 오후에 조방장[어영담] 및 순천부사가 와서 저녁내 이야기하며 왜적 토벌할 일을 의논했다.
15일(갑자) 맑음. 새벽에 거북선 2척과 보성 배 1척을 가목(명예목이라 하며, 뱃전 위의 여러 곳에 가로로 걸쳐 놓은 두꺼운 목재이다. 배의 대들보 역할을 하며, 양쪽 끝이 뱃전 밖으로 내밀어지게 설치하고 이 위에 갑판을 깐다.) 벌목하는 곳으로 보내서 초경[오후 7~9시]에 실어 왔다.
17일(병인) 맑음. 따뜻하기가 초여름 같았다. 아침에 (*지휘선을 연기에 그을리는 일 때문에) 활터 정자 위로 올라가 공무를 보았다....ㅇ 우수사가 들어왔는데, 거느리고 온 전선이 다만 20척이니 한심스러웠다.
21일(경오) 맑음. (맑고 따뜻했다. 몸이 불편해서 종일 신음하였다.) 순천부사와 우조방장[어영담]이 와서 견내량 복병한 곳을 가서 살펴보았다고 했다.....유시[오후 5~7시]에 벽방 망보는 장수[제한국]가 와서 고하되, 구화 앞바다에 왜선 8척이 와 머물러 있다고 하므로 (*배에 내려와서 삼도에) 진격할 것을 전령하고, 제홍록[삼봉 망장, 원균의 군관]이 와서 보고하기를 기다렸다.
□ 23일부터 27일까지는 빠졌음.
28일(정축) 맑음. 아침에 활터 정자에 올라 종사관 [정경달]과 함께 종일 이야기했다. ㅇ 장흥부사[황세득]가 들어왔다. (*우수사(이억기)를 처벌하였다.)
<질문> 이순신의 「충청도 수군절도사가 진에 도착하도록 독촉해주시기를 임금님께 청하는 장계」(1594. 2.25)와 「지체해 머물러 있는 여러 장수를 처벌해주시기를 임금님께 청하는 장계」(1594.2.25.)의 내용을 살펴보면, 기한보다 늦게 온 우수사 관할의 부사를 우수사 이억기가 처벌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기한보다 늦게 온 장흥부사는 우수사 관할 영역이므로 우수사 이어기을 처벌한 것이다.
29일 (무인) ("맑음, 종사관과 아침 식사를 함께 하고 또 작별술을 마시며 종일 이야기하였다. 장흥도 함께 했다.) 벽방 망보는 장수 제한국의 보고에 왜선 16척이 소소포로 들어왔다고 하므로 전령하여 알리도록 했다.
<3월> 당항포에 있는 적선을 불태우다/전염병으로 고생하다
초3일(신사) 맑음....유시[오후 5~7시]에 벽방 망장[제한국]이 달려와 보고하기를, 왜선 6척이 오리량[고리량]과 당항포 등처에 나뉘어 정박해 있다 하므로 즉시 배들을 집합하라 전령하고 큰 부대는 흉도 앞바다에 진을 치게 하고 정예선 30척은 우조방장 어영담이 거느리고 적을 공격해 무찌르기 위해 초저녁에 배를 띄워 지도(통영면 용남면 지도리)에 이르렀다. ([이르러] 밤을 보내고 사경[오전 1~3시]에 출발했다.
초4일(임오) 맑음. (*사경에 배를 띄워) 진해(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동리) 앞바다에 이르러 왜선 6척을 뒤쫓아 잡아서 불태워 없애고, 저도(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구복리 저도)에서 2척을 불태워 없앴다. 소소강에 14척이 들어왔다 하므로 조방장[어영담]과 원수사에게 함께 진격하여 토벌하도록 전령하고, 고성 땅 아자음포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초5일(계미) 맑음. (*새벽에) 겸사복[윤붕]을 당항포로 보내서 적선을 깨뜨려 불태웠는지를 탐문하였더니 우조방장 어영담이 급히 보고하기를 '적도들이 우리 군사들의 위엄을 겁내어 밤을 타서 도망했으므로 빈 배 17척을 남김없이 불태워 버렸다." 하며, 경상수사[원균]의 보고도 같은 내용이었다. (우수사 이억기]가 보러 왔을 때 비가 크게 퍼붓고 바람도 세차게 불어 바로 자기 배로 돌아갔다.) 이날 아침 순변사에게도 공문을 보내 토벌을 독촉하였다. (*우조방장, 순천부사, 방답첨사, 배 첨사[배경남] 등이 와서 서로 이야기하는 동안) 원元 수사가 배에 이르자 여러 장수들은 각각 돌아갔다. 이날 저녁 광양의 새 배가 들어왔다.
초6일(갑신) 맑음. (*새벽에 탐망군이 본즉, 적선 40여 척이 청슬로 건너온다고 했다. 당항포의 왜선 21척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는 긴급 보고를 했다. 늦게 거제로 향하는데, 역풍으로 간신히 흉도[가조도]에 이르자 남해현령(기효근)이 보낸 급보에, "명나라 병사 두 사람과 왜놈 여덟 명이 패문을 가지고 들어왔기에 그 패문과 명나라 병사를 올려 보냅니다."라고 하였다. 그것을 받아서 살펴보니, 명나라 담 도사[담종인]의 '적을 치지 말라는 패문'이었다. 나는 몸이 몹시 괴로워 앉고 눕기조차 불편했다. ⇨ 이순신은 이날부터 계속 병으로 고생했다. 3주 이상 몸이 극도로 불편한 상황이 계속된다. 이때의 이순신 병은 당시 유행했던 전염병 때문으로 보인다. 전염병에 걸려 전력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었으므로 이 패문은 이순신을 도와주는 상황으로 작용한다.
초7일(을유) 맑음. 몸이 극도로 불편하여 뒤척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아랫사람을 시켜 패문에 대한 회답을 만들라 하였더니, 글 모양을 이루지 못했다. 원수사가 손의갑을 시켜 지어 보냈으나 역시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병중에 억지로 일어나 앉아 글을 짓고 정사립[이순신의 군관]을 시켜 써 보내게 했다. ㅇ 미시 [오후 1~3시]에 출발하여 이경[오후 9~11시]에 한산도 진중에 이르렀다.
초8일(병술) 맑음, 병세는 별로 더하거나 덜함이 없었다. 기운 또한 쇠약해져 종일 고통스러웠다.
19일 (정유) 맑음, 몸이 불편했다. 종일 신음했다.
20일(무술) 맑음, 몸이 불편했다.
23일(신축) 맑음. 몸이 여전히 불쾌했다.
<4월> 조방장 어영담이 죽다
초1일(기유) 맑음. 일식이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지 않았다. 장흥부사[황세득] 진도군수(김만수], 녹도만호[송여종]가 여제를 지내기 위해 돌아간다고 고했다. 충청수사 [구사직]가 보러 왔다.
초3일(신해) 맑음. 이날 여제를 지냈다. 삼도 군사들에게 술 1천 80동이를 먹였다. 우수사[이억기]와 충청수사[구직]가 함께 앉아서 군사들을 먹였다.
*여제 : 「경국대전」에 따르면, 전염병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다. 청명, 7월 15일, 10월 1일에 지낸다. 송여종이 지낸 여제는 청명에 지낸 여제로 보인다. 「군 복무 기피자들이 많은 여러 장수의 죄에 대해 처벌을 임금님께 청하는 장계」(1594년 4월 20일)에 따르면, 1594년 1월 처음으로 진에 여역(전염병)이 크게 번져 많은 사망자와 환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1594년 1월부터 4월까지 전라 좌도 사망자 606명, 환자 1373명 발생, 전라 우도는 사망자 603명, 환자 1878명, 경상 우도는 사망자 344명, 환자 222명, 충청도는 사망자 351명, 환자 286명으로 총 사망자는 1904명, 환자는 3759명이었다. 전체 수군의 약 10%가 사망했고, 약 20%가 병에 걸린 상태였기 때문에 여제를 지낸 듯하다. 이태진은 16세기 후반 실제 인구가 900만 명 내지 1000만 명이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을 계기로 급감해 17세기 중후반에는 700만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이태진, 『새 한국사』, 까치글방, 2012, 388~391쪽)
초5일(계축) 흐림. (*새벽에 최천보가 세상을 떠났다.)
초6일(갑인) 맑음. 별시 보는 과거장을 개설했다. 시관은 나와 우수사[이익기]·충청수사[구직]요, 참시관은 장흥부사·고성현령·삼가현감·웅천현감으로, 시험 보는 것을 감독했다.
초9일(정사) 맑음. 시험을 마치고 방을 내붙였다. (큰비가 왔다.) ㅇ어 조방장[어영담] 이 세상을 떠났다. 애통함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
12일(경신) 맑음. 순무어사 서성이 내 배에 와서 이야기했다. 우수사, 경상수사[원균], 충청수사도 함께 와서 술을 세 순배 돌렸다. 원 수사는 짐짓 취한 체 광증을 부리며 함부로 무리한 말을 뇌까리니 순무도 괴이함을 이기지 못했다. (뜻하는 바가 지극히 흉악하였다.)
25일(계유) 맑음. 새벽부터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고통스러웠다. (*아침에) ㅇ 보성군수[김득광]가 보러 왔다. (*밤새도록 앉아서 앓았다.)
26일(갑술) 맑음. 통증이 지극히 심해져서 거의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 전염병으로 최천보와 어영담이 죽다.
<5월> 계속되는 장맛비...
바다에 떠있는 수많은 우리 배를 바라보며 자신감을 갖는다.
5월말까지 장마가 계속되어 배에서 생활한다. 이순신이 거처할 육상의 집이 없었다.
초2일(기묘) 맑음. 새벽에 회가 (*계집종들과 함께) 어머님 생신상 차려 올릴 일로 돌아갔다. 우수사, 흥양현감[배홍립], 사도첨사[김완], 소근첨사[박윤]가 보러 왔다. 기운도 점점 차도를 보였다.
초3일(경진) 맑음. 아침에 흥양현감이 휴가를 고하고 돌아갔다. (늦게) 장흥부사와 발포만호[황정록]가 보러 왔다. 군량 비축을 위한 공명고신 3백여 장 및 왕명서 2통이 내려왔다.
* 공명고신 : 발급하는 사람이 현장에서 임의로 발급할 수 있도록 받은 사람의 이름을 기록해놓지 않은 백지 임명장인 공명첩의 하나.
초8일(을유) 맑음. 원수의 군관 변응각이 원수의 공문 및 계초와 왕명서를 가지고 왔는데, "수군을 거제로 진격시켜 적이 두려움과 의혹을 일으켜 물러나 도망가게 하려고 한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경상우수사 및 전라우수사를 불러 의논하고 계책을 정했다. 충청수사[이순신]가 들어왔다. (밤에 큰 비가 왔다.)
초10일(정해) 비가 계속 내렸다.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멀리 바라보니 많은 배들이 온 바다에 깔려 있었다. 적이 비록 쳐들어온다 해도 섬멸할 만했다. (*늦게) ○ 우수사우후[이정충] 및 충청수사[이순신]가 와서 장기를 겨루었다. (*원수의 군관 변응각도 함께 점심을 먹었다. 보성군수[김득광]가 저물녘에 도착했다. 비는 종일 그치지 않았다.) ㅇ 아들 회가 바다로 나갔다. (*소비포권관이 약물을 보내왔다.
14일(신묘) 비가 종일 내렸다. 충청수사, 낙안군수, 임치첨사[홍견], 목포만호[전희광] 등이 보러 왔다. (*영리를 시켜 종정도를 그렸다.)
16일(계사) 흐리고 가랑비가 내렸다. 저녁에 큰비가 내려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지붕이 새서 마른 데가 없었다. 여러 배의 사람들이 거처가 괴로울 것이 무척 염려스러웠다.
20일(정유) 비가 오고 큰바람이 불었다. 웅천현감 및 소비포권관이 보러 왔다. ㅇ홀로 앉아서 종일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밀어 많이 한스러웠다. 호남 방백(이정암)의 허물이 나라를 저버리는 것이다.
* 호남 방백의 ••••저버리는 것이다 : 호남 방백은 당시 전라도관찰사 이정암이다 『제승방략』의 분군법에 따라 전라우도 연해 14고을을 전라우수사에게 소속시켜 왔으나 이정암이 1593년 윤11월에 이것을 5고을로 축소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통제사 이순신이 추진하던 전선 250척 건조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정암은 이 외에도 수군에 소속된 연해안 고을의 군사와 군량을 육군으로 징발하며, 긴박한 전쟁 중임을 망각하고 백성들의 편의에 따라 수륙군을 바꾸어 방비시키도록 해 달라는 무모한 장계를 올려, 이순신이 긴급하게 이를 중지시켜 달라는 장계를 올리게 하기도 했다. 또 이순신이 건의한 한산도 과거장 개설을 반대하며, 심지어 처벌을 주장하기도 했다. 수군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순찰사 이정암의 이러한 처사들로 말미암아 이 무렵 이순신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21일(무술) 비가 계속 내렸다. 웅천현감과 소비포권관이 와서 종정도놀이를 하였다.
24일(신축) 잠깐 맑더니 저녁에 비가 왔다. (웅천과 소비포가 와서 종정도를 놀았다. 해남도 왔다. 오후에는) 우수사와 충청수사가 와서 종일 이야기했다.
* 종정도 : 넓고 큰 종이에 옛 벼슬의 이름을 품계와 종별을 따라 써 놓은 그림, ‘승경도’라고도 함. 실내 오락으로 윷놀이하듯 말을 써서 내기하는 놀이
<6월> 우울의 연속...명나라 수군이 오다
초5일(임자) 맑음. ... 금산 및 그 처자 3명이 아울러 전염병으로 죽었다. 3년이나 눈앞에 두고 미덥게 부리던 자라 하룻저녁에 죽어 간 것이 놀라울 뿐이다.
12일(기미) 바람은 크게 불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가뭄이 매우 심했다. (농사가 더욱 염려스러웠다. 이날 어두울 무렵에 본영 격군 7명이 도망갔다.)
15일(임술) 맑음. 맑음. 오후에는 비가 뿌렸다. 신경황이 영의정[유성룡]의 편지를 가지고 들어왔는데,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이보다 더할 수가 없었다. 지사 윤우신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슬픈 회포를 그칠 길이 없다. ㅇ순천부사와 보성군수가 급히 보고하기를, "명나라 총병관 장홍유가 호선을 타고 100여 명을 거느리고서 바닷길을 거쳐 벌써 진도 벽파정에 이르렀다."라고 했다....언문 편지[부인의 편지]에는 면[막내아들]이 더위를 먹어 심하게 앓는다고 했다. 참으로 애가 타고 답답하다.)
18일(을축) 맑음. (*아침에) 원수의 군관 조추년이 전령을 가지고 왔는데, 원수가 두치에 이르러 광양현감[최산택]이 수군을 옮겨다 복병을 정할 적에 사사로운 감정을 썼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군관을 보내어 까닭을 묻는다는 것이었다. 놀라울 따름이다. (*원수가 그 처얼남 [서처남]조대항의 말을 듣고 사사롭게 행동한 것이 이렇게도 심하니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이날 경상우수사가 초청했으나 가지 않았다.)
<7월> 면과 유성룡을 걱정하는 마음
11일(정해) 궂은비가 오고 큰바람이 종일 불었다. (*그치지 않았다. 울이 가는데 어렵게 고생할 것이 많이 걱정되고 면의 병이 어떠한가도 염려된다.) 계문의 초안을 직접 작성했다. (*경상 순무[서성]의 관문이 왔는데, 원元 수사가 불평의 말을 많이 하였다는 것이었다.) 오후에 군관들과 더불어 활을 쏘았다.
12일(무자) 맑음, 공무를 본 후에 활을 쏘았다. (*아침에 소근포첨사가 보러 와서 과녁과 화살 54개를 만들어 바쳤다. 서류를 처결하여 나누어 주었다. 충청수사, 순천부사, 사도첨사, 발포만호, 충청우후가 함께 와서 활을 쏘았다. 저녁에 탐선이 들어와 어머님께서 평안하시다는 것을 살폈으나 면의 병세는 위중하다는 것이었다. 지극히 걱정스런 마음이건만 어찌하랴.) 유정승[유성룡]이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순변사[이일]에게 왔다고 하나 이는 필시 질투하는 자들이 말을 만들어 그를 헐뜯고자 하는 것이리라.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이날 밤 심사가 극히 어지러워서 홀로 빈방에 앉아 있는데 내 마음을 스스로 걷잡을 수 없었다. 걱정으로 더욱 번민하여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만일 유정승이 어찌 되었다면 나랏일을 어찌할 것인가. 어찌할 것인가.)
13일(기축) 비 오는 가운데 홀로 앉아 면의 병세가 어떤가를 생각하고 글자를 짚어 점을 쳐보니, (*군왕을 만나보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으니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으니 두 괘가 다 좋은 것이었다.) 좋은 괘를 얻어 조금 마음이 놓였다. (*또 유 정승의 점을 친즉, "바다에서 배를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고, 다시 치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다. 저녁내 비가 오는데 홀로 앉은 정회를 이길 길이 없다. 늦게 송전이 돌아가는데, 소금 1섬을 주어 보냈다. 오후에 마량첨사와 순천부사가 보러 왔다가 어두워져서야 돌아갔다.) 비가 올지 갤지를 점쳐 보니, ("뱀이 독을 뱉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장차 큰비가 내리겠다. 농사일이 걱정스럽다. ("밤에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초경[오후 7~9시]에 발포의 탐선이 편지를 받아서 돌아갔다.)
14일(경인) 비가 계속 내렸다. 어제저녁부터 빗발이 삼대 같았다. 집이 새어 마른 데가 없어 간신히 밤을 지냈다. (*점괘 얻은 그대로이니 참으로 절묘하다.)
27일(계묘)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밤에 꿈을 꾸었는데, 머리를 풀고 크게 울었다. 이것은 매우 좋은 징조라고 한다. 이날) 충청수사, 순천부사와 더불어 (수루에 올라) 활을 쏘았다.
<8월> 나랏일만 머릿속에 가득하다
초2일(정미)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초1일 한밤중에 꿈을 꾸니 부안 사람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로 따져 낳을 달이 아니었으므로 꿈이지만 내쫓아 버렸다. 몸이 편안한 것 같았다.
초3일(무신) 아침에 흐리다가 저물녘에 개었다. 충청수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수루방을 도배했다.)
초4일(기유) (*아침에) 비가 뿌리다가 늦게 개었다. (*충청수사 및 순천과 발포 등이 와서 활을 쏘았다. 수루방의 도배를 마쳤다.)
⇨ 세병관에도, 활터 정자에도 방이 있었다. 계사년에 비가 샌다는 이야기를 보면 그 당시 사람이 거처할 공간이 못된 것 같다. 제승당(운주당)은 갑오년 전반기까지도 안 만들어졌다. 권준이 제승당 짓는 것을 반대했다. 갑오년 8월 일기를 보면 수루방에 도배를 하고 거처할 공간이 된 것 같다.
11일(병진) 큰비가 종일 내렸다. (*이날 밤 모진 바람이 불고 큰비가 내렸다. 지붕이 세 겹이나 벗겨져 삼대같이 비가 샜다. 새벽까지 앉아서 밤을 지샜다. 양편 창문은 모두 바람에 찢기고 젖었다.)
17일(임술) 흐림. (*저물녘에 비가 내렸다.) 원수[권율]가 오정에 사천으로 와서 군관을 보내 이야기하자고 하므로 (곤양군수의 말을 타고) 원수가 머무르고 있는 (*사천 원의 사처로) 곳으로 갔다. 교서에 배한 후에 공사 간의 인사를 마치고 그대로 이야기하니 오해가 많이 풀리는 빛이었다. 원元 수사를 몹시 책망하니 원수사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우스웠다.
26일(신미) 맑음. 공무를 보았다. (*아침에 각 고을과 포구의 서류를 처결해 보냈다.) 흥양보자기 막동이란 자가 장흥 군사 30명을 그의 배에 몰래 싣고 도망간 죄로 처형하여 효시했다. (늦게) ㅇ 활터 정자에 올라가서 활을 쏘았다.
29일(갑술) 맑으나 북풍이 크게 불었다. 공무를 보았다. (아침에 마량첨사와 소비포권관이 와서 함께 밥을 먹었다. 늦게 활터 정자에 옮겨 앉아 서류를 처결해 보냈다. 도양의 목동 박돌이의 죄를 다스렸다. 도둑 3명 중 장손은 장 백 대를 때리고 얼굴에 도자를 먹물 들였다.) о 남해현감이 들어왔다. 의병장 성응지가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슬프다.
30일(올해) 맑고 바람도 없었다. (아침에) 남해 [해남의 착오] 현감 현집이 보러 오고, 늦게 우수사, 장흥부사, 충청우후, 웅천현감, 거제현령, 소비포권관도 왔다 (*허정은도 왔다. 이날 아침 탐선이 들어왔다.) 들으니 아내의 병세가 아주 위중하다고 한다. (*벌써 생사 간에 결말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랏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 없다.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꼬. 심히 고통스럽고 답답하구나.) 김양간이 서울로부터 영의정 [유성룡]의 편지와 심충겸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분개한 뜻이 많이 적혀 있었다. 원元 수사의 일은 참으로 해괴하다. 내가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했다 하니 이는 천고에 탄식할 일이다.
<9월> 아내의 병을 걱정하다/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번 싸워도 위태함이 없다
초1일(병자) 맑음. (*앉았다 누웠다 잠을 못 이루고 촛불을 켠 채 뒤척이며 지새웠다. 이른 아침에 세수하고 고요히 앉아 아내의 병세에 대해 점을 쳤더니, "중이 환속하는 것 같다는 괘를 얻고, 다시 쳤더니, "의심이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아주 아주 좋다. 또 병세가 나아 갈 것인지와 어떤 소식이 올지 여부를 쳐 보니,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 같다"는 괘였다. 이 역시 오늘 중에 좋은 소식을 받을 징조였다.)
초2일(정축) 맑음. (*아침에 웅천현감[이운룡]과 소비포권관[이영남]이 와서 함께 아침을 먹었다. 늦게 낙안군수[김준계]가 보러 왔다. 저녁때 탐선이 들어왔다.) 들으니 아내의 병이 나아지기는 하나 원기가 몹시 약하다고 하니 매우 걱정스럽다.
초3일(무인) 비가 조금 왔다) 새벽에 밀지가 들어왔는데, "수륙 여러 장수들이 팔짱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라고 했다. 3년 동안 해상에 있으면서 그럴 리가 만무하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맹세하고 죽음으로써 원수 갚을 뜻으로 날을 보내지만, 험고한 곳에 웅거하여 소굴 속에 들어 있는 적이라 경솔히 나아가 칠 수는 없는 일이요, 또 더구나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번 싸워도 위태함이 없다.” 하지 않는가.
20일 (을미) 바람 불고 비가 왔다. 홀로 앉아 간밤 꿈을 생각해 보니, 바닷속에 있는 외로운 섬이 달려가다가 내 눈앞에 와서 머뭇거리며 서는데, 그 소리가 우레 같아 사방에서는 모두 놀라 달아나고 나만 혼자 서서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경했다. 참 장쾌했다. (*이것은 왜놈이 화친을 애걸하고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내가 준마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었는데, 이것은 임금의 부르심을 받아 올라갈 징조다. )
28일(계묘) 흐림, 새벽에 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적을 칠 일로 길흉을 점쳐 보니 많이 길했다. (*첫 점은 “활이 살을 얻은 것과 같다는 것”이었고, 다시 치니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다. 바람이 고르지 못했다. 홍도 바다에 진을 쳤다.
<10월> 수륙 양군이 호응하여 장문포 적을 공격하다
초4일(무신) 맑음. 곽재우, 김덕령 등과 함께 약속한 뒤 군사 수백 명을 뽑아 육지에 내려 산으로 올라가게 하고, 선봉을 먼저 장문포로 보내 들락날락하면서 싸움을 걸게 했다. 늦게 중군을 거느리고 가까이 접근하여 수륙이 서로 호응하니, 적도들은 갈팡질팡하며 기세를 잃고 동서로 분주한데, 육군은 왜적이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되돌아 즉시 배가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날이 저물어 칠천 [칠천도]으로 돌아와 진을 쳤다.
⇨ 장문포해전은 윤두수가 직접 왕에게 쫓으라고 해서 육군과 수군 합동작전을 벌이게 되었다. 하지만 성과 없이 끝나게 되었고, 그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윤두수는 좌의정에서 물러나게 된다.
<11월> 항복한 왜인을 훈련시키다
초3일(정축) 맑음. (*아침에) 김천석이 비변사의 공문을 가지고 항복한 왜인 야여문[미우위문] 등 3명을 데리고 진陣에 왔다.
초5일(기묘) 흐리고 가랑비가 내렸다. 송한련이 대구 10마리를 잡아 왔다.) 순변사 [이일]가 그 군관을 시켜 항복한 왜인 13명을 압송했다.(*밤새도록 큰비가 왔다.)
초7일(신사) 늦게 개었다. (아침에 대청에 나가 항복한 왜인 17명을 남해로 보냈다.)
초8일(임오) (*새벽에 잠깐) 비가 뿌리더니 늦게 개었다. (*배 만들 목재를 운반해 왔다.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영의정[유성룡]은 모양을 이상하게 차리고, 나는 관을 벗은 채 함께 민종각 집에 가서 이야기하다가 깼다. 이 무슨 징조인지 알 수가 없다.)
11일(을유) 동지다. 새벽에 망궐례를 드린 후 군인들에게 죽을 먹였다. 정담수가 보러 왔다.
14일(무자) 맑음. (*아침에) 우병사[김응서]가 항복한 왜인 7명을 그 군관을 시켜 영솔해 왔다. (그래서 곧바로 남해현으로 보냈다. 이함이 남해로부터 왔다.)
25일(기해) 흐림. 새벽꿈에 이일[순변사]과 만나 내가 많은 말을 하며, “이같이 국가가 위태하게 된 날을 당하여 몸에 무거운 책임을 지고서도 나라의 은혜를 갚겠다고 생각은 하지 않고, 배짱 좋게 음란한 계집을 끼고서 관사에는 들어오지 않고 성 바깥 여염집에 있으면서 남의 비웃음을 받으니 그 마음은 어떠한 것인가. 또 수군 각 고을과 포구에 육전의 병기를 배정하고 독촉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이것은 또한 무슨 이치인가." 하니, 순변사가 말이 막혀 대답을 못 하는 것이었다.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니 한바탕 꿈이었다. 식후 대청에 나가 앉아 공무를 보았다. (*처결해 나누어 주었다. 조금 있자니 우우후와 금갑도만호[이정표]가 와서 피리 소리를 듣다가 저물어 돌아갔다. 흥양의 총통 만드는 색리들이 와서 회계를 밝히고 돌아갔다.)
□ 11월 29일부터 12월 30일까지는 빠졌음.
(*) 친필 일기의 일기 외 기사 (4)
(이 기사 내용은 장계를 작성하기 위한 초고로 보인다.)
...수군은 곧 파탄이 나서 그만둘 형편입니다. 모(이순신)의 한 몸이야 만 번 죽어도 참으로 달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랏일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정경달은 종사관으로서 온 정성을 다해 둔전을 경작하며, 둔전의 일을 감독하고 검사해 왔습니다. 그런데 전 방백 [순찰사]이 보낸 공문에 따르면, '도[전라도] 안의 일은 책임자가 있으니, 둔전을 통제하고 경작하는 것을 검사하는 일은 실로 그 [정경달]의 임무가 아니다. 게다가 '다른 도[경상도]의 바다 진영에 멀리 있어, 또한 경작을 검사할 수도 없다. 라고 하니, 지금부터는 그 어떤 검사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함양 수령 [군수]으로 임명되었다."고 합니다. 가슴만 탑니다. 추수할 때까지만 이라도 그대로 있으면서 검사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장계를 올립니다. (갑오년 10월 17일~21일 일기 참조 이때 잉임 요청이 받아들여져서 10월 중순 이후에 종사관이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이충무공전서』 권1. '잡저'에 「상모인서」로 실려 있다.)
쓸쓸히 바라보다 蕭望(소망)
쓸쓸히 비바람 부는 밤 애타는 마음에 잠 못들 때, 긴 한숨만 거듭거듭 눈물 떨구고, 또 눈물 떨구네. 산과 바다에는 이미 부끄러움만 가득 물고기와 새까지 슬픔에 잠겼네. 전쟁으로 위급한 나라 누가 위기를 이겨 낼 수 있을까? 뱃전을 두드리며 몇 년 동안 세운 계책도 지금은 성스러운 임금을 속인 것일 뿐, 쓸쓸히 비바람 부는 밤 애타는 마음에 잠 못들 때, 쓸개가 찢긴 듯 아픈 마음 살점을 베인 듯 쓰라린 아픔 긴 한숨만 거듭거듭 눈물 떨구고, 또 눈물 떨구네. 쓸개가 잘린 듯 쓰라린 아픔 살점을 베인 듯 아픈 마음 산과 바다는 참혹한 빛 띠고 물고기와 새까지 슬픔에 잠겼네. 이백 년 태평세월 빛나는 문화, 꽃피웠지만 전쟁으로 위급한 나라 위기를 이겨 낼 사람이 없구나. 몇 년 동안 방비할 계책을 세웠어도 나라를 회복했던 제갈공명 생각나고 승승장구했던 곽자의가 그립구나 | 蕭蕭風雨夜 耿耿不寐時 長嘆更長嘆 淚垂又淚垂 山河猶帶慚 魚鳥亦吟悲 國內有蒼勢 誰能任轉危 扣舷經歲策 今作聖君欺 蕭蕭風雨夜 耿耿不寐時 傷心如裂膽 懷痛似割肌 長嘆更長嘆 淚垂又淚垂 懷痛如搉膽 傷心似割肌 山河帶慘色 魚鳥亦吟悲 昇平二百載 文物三千姿 國有蒼皇勢 人無任轉危 經年防備策 恢復思諸葛 長驅慕子儀 |
흰색 접는 부채는 358자루다.
별선 453자루 안에서 7월 10일에 순변사에게 15자루를 보냈다.
....
이상은 명나라 장수에게 선물로 주려 한다.
....
가볍고 작은 대나무 48개 안에서 30개를 충사[충청수사]에게 보냈다.
대죽 78개는 군관 등에게 주었다.
차중 44개는 우사[우수사]에게 보냈다.
⇨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이순신과 중국 진의 학자. 장군이었던 두예(222~284)의 선물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두예는 군진에 있을 때 자주 서울에 있는 높은 사람들에게 선물을 보냈다. 사람들이 까닭을 물으니, ‘단지 방해할까 두렵기 때문이지,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우리나라 충무공 이순신 같은 사람은 임진란에 수군을 거느리면서도 틈만 나면 장인을 모아놓고 부채 등을 만들어 높은 사람들에게 선물해 끝내 중흥의 공을 이뤘다. 이는 오랫동안 뜻있는 사람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이다.” 이순신과 두예는 모두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한 뇌물이 아니라, 나라를 구하기 위해 방해받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선물을 활용했다.(난중일기 698쪽/박종평 역/ 글항아리)
⇨ 이순신이 부채를 선물하고 장부에 써놓은 것이다. 그래서 두예 이순신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후 이순신을 탄핵하는 논의가 될 때, 선물을 받았던 사람들은 이순신의 편을 들어주게 되는 효과도 가져왔다. “너도 책상 받았지?”라는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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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좌수영] 전선 7척 안에 새로 건조한 5척은 이미 정비해 왔고, 전에 건조한 것은 2척이고, 그중 1척은 의병, 1척은 개조한 것이다.
순천 10척 안에 새로 건조한 것은 3척, 전에 건조한 것은 1척, 영의 배 1척, 방답 5척이 있다.
흥양 10척 안에 본현[흥양현]에서 새로 건조한 것은 2척, 전에 건조한 것은 2척, 영의 배 1척, 사도 5척이 있다.
낙안 3척 안에 본군[낙안군]에서 새로 건조한 것은 1척, 전에 건조한 것은 1척, 영의 배 1척이 있다.
광양 4척 안에 본현[광양현]에서 새로 건조한 것은 2척, 전에 건조한 것은 1척, 영의 배 1척이 있다.
보성 8척 안에 본군[보성군]에서 새로 건조한 것은 2척, 전에 건조한 것은 2척, 녹도 2척과 발포 2척이 있다.
방답 4척 안에 새로 건조한 것은 4척이다.
여도 3척 안에 새로 건조한 것은 3척이다.
발포 3척 안에 새로 건조한 것은 3척이다.
사도 4척 안에 새로 건조한 것은 4척이다.
녹도 3척 안에 새로 건조한 것은 3척이다.
⇨ 이순신의 「진으로 돌아가는 일을 동궁께 보고하는 장달」(1594년 1월 17일)에 따르면 “순천은 원래 수량과 추가 건조하는 것 모두 10척이고, 흥양은 10척, 보성은 8척, 광양은 4척, 낙안은 3척이었는데 모두 이미 건조가 끝났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전선 수는 위의 메모와 일치한다. 다른 지역의 전선 수까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1594년 1월 전후 시기에 작성한 메모로 보인다. 이 메모 속 전라 좌수군의 전체 전선은 59척이다.
5월 3일, 창고 물건을 일일이 뒤적이며 장부와 대조하면서 검사했다. 군량미는 349섬 14말 4되이다. 사들인 메밀[곡식의 일종]은 두 번을 합해 83섬이다. 합계는 432섬 14말 4되다. 그중에 현재 남은 것은 65섬 12 말 4되다.
⇨ 아주 꼼꼼하면서도 정확하게 숫자로 기록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을미년(乙未年) 1595년, 선조 28, 이순신51세
<1월> 나라와 여든 살 되신 어머니를 생각하다
초1일(임술) 맑음.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있으면서 생각이 나랏일에 미치자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렀다. 또 병드신 팔십 노친을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새벽엔 여러 장수 및 모든 병종의 군사들이 와서 해가 바뀐 인사를 하였다. 원전과 윤언심, 고경운 등이 보러 왔다. 모든 병종의 군사들에게 술을 먹였다.
초5일(무인) 맑음. 공문을 처결하였다. 봉과 울이 들어왔다. 어머님이 평안하시다고 들으니 다행이다. 밤이 새도록 온갖 생각들이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12일(을유) 흐리고 큰바람이 불었다. 각 고을과 포구의 공문서를 처결하여 보냈다. ㅇ늦게 순천부사가 돌아간다고 고했다. 영남우후 이의득이 보러 왔다. (밤 12시에 꿈을 꾸었다.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오셔서, "13일에 회의 혼례식을 하도록 보내는 것이 적합하지 않은 듯하다. 비록 4일 후에 보내도 방해됨이 없다."라는 가르침이셨다. 완전히 평상시와 같으셨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홀로 앉아 있었다. 그리움에 쏟아지는 눈물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14일(정해) 맑음. 동풍이 크게 불었다. 몸이 불편하여 누워서 신음했다. 영등만호와 사천현감[기직남],여도만호가 보러 왔다. (사천현감이 와서 이르기를, "새 수사 선거이가 병에 걸려 사직원을 냈기에, 진주목[목사] 배설이 임명되었다."라고 했다.)
19일(임진) 맑음. 대청에 나가 공무를 봤다. 옥구의 피란민 이원진이 왔다. 장흥부사[배흥립], 낙안군수[김준계], 발포만호[황정록]가 들어왔는데 기한 늦은 죄로 처벌했다. 조금 있다가 여도 전선에 불이 나서 광양·순천·녹도전선 4척이 연이어 불탔다. 통탄함을 이길 수 없었다.
22일(을미) 맑음. 종일 큰바람이 불었다. 원수군관 이태수가 전령을 가지고 와서 여러 장수들이 왔는지 안 왔는지를 알아보고 간다고 했다. 늦게 수루 위로 나가서 불을 낸 여러 배의 장수와 색리들을 처벌했다. 초경 [오후 7~9시]에 금갑도만호가 있는 집에서 불이 나서 다 타버렸다.
<2월> 둔전을 경영하여 군량에 쓰다
초9일(임자) 비. 꿈을 꾸었다. "..... "특이한 징조가 많아 기록해 놓는다.)
11일(갑인) 비. 늦게 잠깐 개었다. 황숙도와 분, 허주와 변존서가 돌아갔다. 종일 공무를 보았다. 저물녘에 왕명서가 들어왔는데, 둔전을 검칙(점검) 하라는 것이었다.
15일(무오) 맑고 따뜻했다. 새벽에 망궐례를 행하여 하례를 드렸다. 우수사[이억기]와 가리포첨사[이응표], 진도군수도 함께 와서 참례했다. 지휘선을 연기에 그을렸다.
19일(임술) 맑음. 아침에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보았다. 거제현령, 무안현감, 평산포[김축]·회령포[민정붕] 만호, 허정은도 왔다. 송한련[이순신의 군관]이 와서 말하기를, "잡은 물고기를 군량과 바꾸었다."라고 했다.
27일(경오) 한식. 맑음. 원균이 포구에서 배 수사 설(후임 배설)과 교대하려고 여기 이르렀기로 교서에 숙배하게 하였더니 불평한 기색이 많으므로 재삼 타일러 힘써 따르게 하여 강행했다고 한다. 그 무지한 것이 가소로웠다.
⇨ 원균은 경상우수사에서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 때문이었다. 「선조실록」 선조 27년(1594) 11월 12일과 12월 1일, 선조 28년(1595)2월 4일, 「수정선조실록」 선조 27년(1594) 12월 1일에 나온다. 류성룡은 수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원균을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원균 대신 배설이 임명된 듯하다.
29일 (임신) 맑음. 고여우가 창신도로 나갔다. 배 수사(배설)가 와서 둔전 만들 일 등을 의논했다. 신 조방장도 왔다. 저녁에 옥포만호 방승경과 다경포만호 이충성 등이 교서에 숙배례를 행했다.
<3월> 풍신수길이 바다를 건너오려고 하다
초1일(갑술) 맑음. 삼도에서 겨울을 보낸 군사들을 모아 임금께서 내려 주시는 무명베를 나누어 주었다.
11일(갑신) 흐리고 큰바람이 불었다. 사도 주부 조형도가 와서 좌도의 적세 및 항복한 왜인들이 보고한 바를 말하기를, "수길이 출병한 지 3년이나 지나도 끝내 효과가 없으므로 군사를 더 내어 바다를 건너와서 부산에 진영을 만들려고 하는데, 3월 11일에 바다를 건너오기로 벌써 정해졌다."고 했다.
16일(기축) 비. 사도첨사 김완이 들어왔다. 그에게서 들으니, 전 충청수사 이 입부[이순신]가 군량 2백여 석이 조도어사(지방관을 감찰하는 역할) 강첨에게 포착되어, 그 때문에 잡혀서 심문당한다고 했다. (그의 사돈 이호문도 역시 붙잡혔다고 한다.) 또 충청 새 수사 이계훈이 배에서 불을 냈다고 하니 놀라움을 이길 수 없다.
* 이충무공전서 각주 : 이계훈李繼勛 : 이덕열(1534~1599)의 「양호당일기』에는 '이계정'으로 나와 있다.「선조실록 」 에도 '이계훈'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고, '이계정'만 보인다. 이계정은 1539년(중종 34) 생으로, 흥양현감을 지낸 최희량의 장인이다. 자가 경윤, 본관은 원주이며 거주지는 전라남도 영암이다. 1570년(선조 3)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이계정」, 「여지도서 하」 전라도 영암 인물; 「융경4년 경오식4월16일문무잡과복시방목」(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7일(경인) 비가 걷히는 듯했다. 아들 면과 허주, 박인영 등이 돌아갔다. ㅇ 이날 군량을 계산하여 표를 붙였다. ㅇ 충청우후 [원유남]가 급히 보고하기를, "수사 이계훈이 실수로 불을 내서 물에 빠져 죽고, 군관 및 격군 모두 140여 명이 불에 타 죽었다." 하니, 참으로 놀랄 일이었다.
24일(정유) 흐렸으나 바람은 없었다. 공문을 처결하였다. 늦게 세 조방장[박종남·신호·권준]과 함께 활을 쏘았다.
⇨당시 조방장을 3명까지 둘 수 있었던 것 같다.
<4월> 웅천에는 아직 왜적들이 있다
초10일(임자) 맑음, 구화역 역졸이 와서 아뢰기를, "적선 3척이 또 역 앞에 왔다."라고 하므로 삼도 중위장들에게 각각 배 5척씩을 거느리고 견내량으로 달려가서 형세를 보아 무찌르게 했다.
19일(신유) 맑음. 박 조방장[종남]은 수색하고 토벌하는 일로 배를 탔다. (아침에 청혼서와 사주단자를 썼고, 더불어 조카 해의 혼례 비품을 구비했다. 이영남이 '임금님께 보고하는 글에 대한 회답'을 갖고 내려왔는데, "남해현령(기효근)을 효시하라."고 했다.)
22일(갑자) 맑음. 오후에 미조항첨 이운룡, 적량만호 고여우, 영등만호 조계종과 두 조방장이 함께 왔기에, 정사준이 보낸 술과 고기를 함께 먹고, 남해(남해현령 기효근)가 군령을 어겼으니 효시하라는 글을 보았다.
⇨ 그러나 을미년 6월 13일에 기효근이 유임된다.
25일(정묘) 맑고 바람도 없었다. 구화역졸 득복이 경상우후[이의득]의 급한 보고를 가지고 왔는데, "왜의 배 대·중·소 아울러 50여 척이 웅천에서 나와 진해로 향한다." 하였다. 그래서 오수 등을 정탐하러 내보냈다.
30일(임신) 맑음. 활 10순을 쏘았다. (아침에 '원수[권율]가 임금님께 보고하는 글'과 '기 . 이 두 사람의 범죄 사실 진술서를 읽어 보았다. 원수가 근거 없이 망령되게 임금님께 보고한 일이 많았다. 반드시 부적절한 것에 대한 질책이 있을 것이다. 이런데도 원수 자리에 둘 수 있겠는가. 이상하다.)
<5월>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크다
초5일(정축) 비가 계속 내렸다. 유시[오후 5~7시]에 잠깐 개었다. 활 3순을 쏘았다. 우수사[이억기]와 경상수사[배설], 여러 장수들이 함께 모였다. 신시[오후 3~5시] 말에 종사관 유공진(서인 출신, 2대 종사관)이 들어왔다. 이충일, 최대성, 신경황이 함께 왔다.
16일(무자) 흐리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탐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님은 평안하시다하고, 아내는 불이 난 후로 심신이 많이 상해서 담천[가래와 기침]이 더 심해졌다고 했다. 무척 걱정된다. 비로소 해 등이 잘 간 것을 알았다. 활 20순을 쏘았는데 권동지가 잘 맞혔다.
17일(기축) 맑음. 아침에 나가 본영 각 배 사부와 격군으로 급료 받은 사람들을 점고했다. 늦게 활 20순을 쏘았는데 박·권 두 조방장이 잘 맞히었다. 이날 소금 가마솥 하나를 쇳물을 부어 만들었다.
⇨ 격군은 의무병으로 급료가 없다. 그런데 위 문장으로 보면 급료를 받았는지 궁금하다.
⇨ 군량을 자체 해결하기 위해 소금을 굽기 시작했다.
⇨ 당시 염전에 소금 구울 때 쓰는 가마솥에는 토분과 철분이 있었다. “소금 구울 가마솥을 주조했다.는 기록을 참조하자면, 이순신 진영은 쇠로 만들어진 가마솥을 사용해 소금을 제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에는 바다에서 먼 지방의 경우 소금이 금처럼 귀했다고 한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수군의 각 진에서는 군 복무중인 수군을 시켜 소금을 굽고, 해초(미역, 김 등)을 다서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이를 흉년 때 구휼하는 데 사용케 했다. (출처 : 난중일기 333쪽/ 박종평/ 글항아리)
29일 (신축) 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종일토록 퍼부었다. 사직의 위엄과 영험을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치는 바가 있다. 장수의 직책을 띤 몸으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며, 입으로는 교서를 외면서 얼굴에는 군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이 있다.(⇨본서, 권5 난중일기 2』 계사년(1593) 9월 15일 뒤의 '일기 외 기사 중에 이날 일기와 같은 문장이 있다.
첫댓글 일곱번째 스터디 내용을 공유해 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매번 꼼꼼하게 올려주셔서 함께 있는것 같아요
1.갑오년의 전라감사 이정암의 여러 결정이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계획에 차질을 주었으니..
2.선거이의 후임자로 새로 온 충청수사는 이계정입니다.언젠가 저도 이계훈이라고 썼던 적이 있었습니다. 격군님께서 짚어주셔서 수정한 적이 있습니다. 해남출신 원주이씨 이계정입니다.
3.4월 5일.새벽에 최천보가 세상을 떠났다..작년 신군안 의병장 임명첩 보물 지정 승격 학술대회를 준비하면서 고흥 최천보는 신군안의 고모부가 되셨습니다.
4.1선이 상선이라고도 하고 수사가 타는 배이기군요..대장선도 1선인지 궁금합니다~
요즘 난중일기를 창원지회 덕분에
다시 읽어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2. 네에... 신정역주이충무공전서에 실린 그대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아래 각주에 이계훈을 이계정이라고 설명하고 있네요. 각주까지 옮기지 않다보니 ... 각주 추가로 올렸습니다,
4. 대장선도 1선인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 여쭈어봐야겠습니다.
꼼꼼하게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웅천현감님께 여쭈었더니 상선, 대장선도 1선으로 같은 배라고 하네요.
전란이 터진 지 3년째 갑오일기 요약정리 감사합니다. 왜군은 물론 질병과 굶주림 그리고 명군까지 적은 사방에 있었고, 통제사는 하루도 이 싸움을 거른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선조는 수군장수들이 팔장만 끼고 있으면서 적을 치려는 방책을 세우지 않는다는 밀지를 내리고 있으니 일기 내용이 우울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공부모임에 함께 참여 할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강의를 해주시는 교수님, 강의내용을 공유 해주시는 지부장님 고맙습니다.
늘 적극적인 참여와 공감글에 감사드립니다. 장군님의 정신을 전파하는 일에 앞장설 기회가 온다면 더 좋겠지요. ㅎㅎ
후기 정리는 공유하면서 함께 나누어서 좋고, 복습의 효과가 있는 것 같아 저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일석이조라고나 할까요?
공부하는 창원지회 열정을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동지회도 응원합니다^^
대단하십니다.
분량을 좀 줄이시고 오래 가시죠?
괜한 걱정입니까?
저희야 늘 감사하지만요!
건강을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설명을 잘 전달하기 쉽지 않아 강조할 만한 난중일기 부분을 옮겨쓰는 선택을 하게 되었네요. 전부를 필사하는 여수지회보다는 수고가 덜하니...
오래갈 수 있도록 할게요~~
이충무공전서 읽기 7회차 / 15회차 !
대항해 순항 중입니다
지회장님 정리 덕분에 복습합니다
4월 16일 8회차 함께 읽어요~
네에....
이충무공전서읽기 순항 중....
끝까지 어깨동무하며 동행해요.
늘 든든하게 지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창원지회
천재들만모여 공부하는자리 실감함합니다 난 한번에 읽지도못하고 며칠이걸려 겨우 눈팅으로만 읽었습니다
기억에 토정비결을 만들정도로 재능가 이정암이 외 걸림돌같은생각을 해봤습니다
한번 읽어보는기회를 주심에 고마움으로 대신합니다
우수사님의 열정을 누가 따라가겠습니까.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6월 정규답사 때 아산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