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소송 원고들 사연
■양영수(梁榮洙. 1929.7. 89세. 광주 대성초등학교 1회 졸업. 대구 양로원 생활)
2015년 2월 후생연금 199엔 지급 당사자.
“아버지는 늘 집을 비우시는 날이 많았습니다. 어머니한테 “아버지 어디 가셨느냐”고 하면 서울 가셨다고만 했습니다. 5학년 무렵 어느 날 어머니가 솜바지를 싸서 어디 다녀온다고 해서, 몰래 어머니 뒤를 따라가 보니 경찰서 유치장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일본 순사가 항상 아버지 먼저 끌고 가거나 찾아 다녔습니다.
오빠는 징용으로 끌려가 집에 없고, 아버지가 늘 쫓겨 다니면서 어머니는 뒷바라지 하시느라 가정 형편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일본에 조금이라도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버지를 덜 괴롭힐 것 아니냐. 내가 좀 힘들더라도 집안이 좀 편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순진한 생각에…. 그때 열 네 살이었습니다.”
■오철석(吳哲錫. 1936.11. 82세. 목포산정초교 졸업 故오길애의 유족)
“누님은 1944년 12월 7일 지진에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난데없이 딸이 사망했다는 소식에 집안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비탄에 빠져 있던 부모님의 모습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누님을 빼앗긴 한과 분노 때문에 저는 동경 올림픽을 하던 해 도쿄를 방문해, NHK에서 한국어 통역을 하던 친구와 함께 한일회담 당시 김종필과 오히라가 비밀 회담을 했다는 요정까지 일부러 찾아가보기도 했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손을 마주잡고 과거의 잘못을 털고 좋은 관계로 발전해 가기를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잘못을 덮고 가려는 것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심선애(沈善愛. 1930.6. 88세. 광주 수창초등학교 졸업. 요양병원 생활)
2015년 2월 후생연금 199엔 지급 당사자.
“1944년 3월 수창초등학교 졸업 후 얼마 동안 가사 일을 돕고 있던 중이었는데, 1944년 5월경 주위로부터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출발 당일에서야 부모님께 일본에 가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 드렸더니, 집에서는 한 바탕 난리가 났습니다. 특히 남달리 저를 예뻐하셨던 할머니는 “다 큰 자식 일본 보내 죽일 셈이냐”며 그 자리에서 혼절할 정도였습니다.
일본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가족한테도 절대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얘기하지만, 일본 갔다 온 사람은 모두 일본군을 상대한 위안부로 취급해 왔기 때문에, 창피해 말을 할 수 없었고 항상 조심해 왔습니다.”
■김재림(金在林.1930.2. 88세. 화순 능주초등학교 졸업. 요양병원 생활)
2015년 2월 후생연금 199엔 지급 당사자.
“기차가 광주를 빠져나와 어느새 다음 역이 고향인 화순 능주역이라고 하니까, 그때부터 마음이 이상해졌습니다. 늘 보던 고향 역을 지나가려니까 뭔가 잘 못 된 것 같아 뛰어 내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한테 어디 간다는 말 한마디 못 전하고 가게 된 것이 그렇게 죄스러웠습니다. 가난이 무엇이기에 결국 있는 사람은 뒤로 쏙 빠지고 나처럼 없이 사는 사람만 이렇게 당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일본 다녀 온 것을 몇 몇 사람은 알고 있었는데, 도중에 그 소리가 시어머니 귀에까지 들어갔는지 결혼을 엄청 반대했습니다. 처녀 몸으로 일본 갔다 왔다는데 몸이 온전하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일본에 다녀 온 사실은 집안 형제간하고 아들과 딸만 알지, 아무리 친한 사람도 얘기를 지금까지 못했습니다.
구십 다 된 상태에서 바라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어린 아이들을 일본에까지 데려다 그 고생을 시켰으면, 당연히 그 대가를 지불하고, 사과도 해야 합니다.”
원고 김재림 피해 사실(2017.3.27).hwp
원고 심선애 피해 사실(2017.3.21).hwp
원고 양영수 피해 사실(2017.3.27).hwp
원고 오철석 피해 사실(2017.3.27).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