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효 아키텍트-78] 회화 모티프의 공학적 구조미 추구, 건축가 장윤규
매일경제 2021.03.19
[효효 아키텍트-78] 프리츠커상을 받은 중국 건축가 왕수(王澍·Wang Shu·1963)의 건축은 국가가 적극 지원한 공적(公的) 건축이다. 항저우 남부 산군(山群)에 위치한 중국미술대학교 샹산캠퍼스는 철거 지역에서 나온 옛 기와와 벽돌을 재활용한다고 높이 평가받았으나, 현지를 방문했던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는 '멀쩡한 민가를 부수었다'고 전한다.
서울 안국동 사거리 복합문화시설 '도화서길'(2020)은 공적 건축과 사적(私的) 건축 간 타협의 산물이다. 도화서길은 경복궁 인근에 들어선 동양화에서 이미지를 차용한 건물이다. 건물 뒤편은 램프를 설치했다. '산책하는 길'의 적용이다. 건축의 사회성과 공공성을 고려해 찾아오는 사람에게 경관을 조망하는 권리를 주자는 취지다. 동양화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이유는 기원(起原·origin)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 도화서길 / 사진 제공 = 운생동 건축사사무소
'도화서길'은 최고 14층 3개 건물로 이뤄져 있다. 두 개 건물은 새로 짓고 한 개 건물은 리모델링을 했다. 건물 외부에 마당이 세 개 있다. 지상 6·10·14층(옥상)에 정원이 있다. 시행사는 경복궁, 인사동, 북촌 등과 인접한 이 땅을 '건축물' '히스토리' '문화 콘텐츠'라는 세 가지 요소에 집중했다.
건축물 외관은 조선 회화사 최고의 금자탑인 겸재 정선(謙齋 鄭敾·1676~1759)이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의 바위 모습을 본떴다. '인왕'은 삼청동 뒤편 인왕산을, '제색'은 비가 온 후 막 갠 풍광을 일컫는다. '인왕제색도'의 구도는 그림을 보는 사람이 봉우리 가까이 다가선 듯한 압도적인 중량감을 표현한다.
램프를 돌듯 건물 내부를 돌아 오르다 6층의 탁 트인 공간에서 인왕산·북악산·경복궁을 조망할 수 있다. 건물 외피에서 보이는 아치형 디자인은 국왕의 존재를 상징하는 궁중회화인 일월오병도(日月五峯圖 또는 日月五岳圖)를 연상케 한다.
중국의 관념주의(觀念主義)든 한국의 실경주의(實景主義)든 산수화는 어차피 판타지다. 역사적 맥락을 고려한 건축물 구현은 대단히 어렵다. 조선조 도화서 화원은 임금의 터럭 하나라도 잘 못 그리면 목이 달아나는 프로 화가들이다. 문인화는 지배층인 사대부(士大夫)만의 예술 장르로 자리 잡았다. 장윤규는 목숨을 걸고 그림을 그렸던 예술가들이 머물렀던 터에 건축물을 설계했다.
건축은 태양에 가까워질수록 녹아내리는 밀랍 날개를 단 이카로스(Icaros)와 같은 '꿈'이 결코 아니다. 아름답지만 결코 도달하지 못할 이상이나 꿈을 펼치는 게 아니다. 장윤규는 대학원 시절 김종성(1935)의 강의를 들었다. 수평적으로 소통하는 세미나 방식이었으며 슬라이드로 세계 유명 건물을 섭렵할 수 있었다. 그를 통해 근대 건축의 시발점인 미스 반데어로에(Mies van der Rohe·1886~1969·이하 미스)의 건축 철학을 배웠다. 미스는 당대 유리, 철 등 이전 건축가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재료들을 쓴 실험적 건축가였다.
미국 시카고 일리노이 공대(IIT) 건축대학 건물인 크라운홀(1956)은 시카고 근교 판즈워스(farnsworth)와 함께 미스 미니멀리즘 건축의 정수를 보여준다. 김종성은 1956년부터 1964년까지 IIT에서 공부를, 1961년부터 1972년까지 미스 건축사무소 소속으로 캐나다 토론토 도미니언센터 프로젝트 등에 참여했다. 김종성은 미스가 사망하기 전 8년 동안 같이 일했다. 1966~1978년 IIT 건축대 교수, 1972~1978년 IIT 건축대 학장 서리 등 건축교육자로서의 맥도 이었다.
실험적 작품에 심취한 장윤규가 김종성이 설립한 '서울 건축'(SAC)으로 가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실무에서 배운 건 용도에 따른 건축 전형이다. 김종성의 '힐튼 호텔'(1978~1981)은 호텔이라는 프로토 타입(proto type·原型) 을 제시한다. 전체적인 톤은 블랙이고, 유리를 많이 사용했다. 70년대 후반 국내 건물 외피 재료는 주로 돌을 사용했다. 김종성의 경주 우영미술관(1994·옛 선재미술관) 역시 미술관의 전형을 제시한다. 장윤규는 서울건축을 나와 10년 가까이 프리랜서에 가까운 실험적인 건축 아틀리에를 경험하다 2002년 건축사사무소 '운생동'(韻生同)을 설립했다.
▲ 예화랑 / 사진제공 = 운생동 건축사사무소
베이스패널(시멘트 압축 패널)을 외장재로 사용한 서울 강남 예화랑(2006)은 건물 외관 벽(wall)이 기둥 역할을 한다. 건축의 외관이 공간의 일부가 된 것이다. 외관 월이 건물 형태에 영향을 준다. 예화랑은 1978년 서울 종로 인사동에서 시작해 1982년 강남 신사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강남에 문을 연 첫 번째 화랑이었다. 화랑 사업은 호흡이 길다. 깔고 앉은 부동산과 보유한 컬렉션의 가치가 상승돼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건축주는 이미 외국 유학을 한 2세 체제로 넘어가 있었다. 건축주는 건축가와 함께 설계를 구상할 만큼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 크링 / 사진 제공 = 운생동건축사사무소
입면(파사드)을 잘라내 파동이 퍼져나가는, 대형 부조(浮彫·relievo) 작품을 보는 듯한 서울 강남 대치동 '크링'(KRING·네덜란드어 '원'이라는 뜻)은 단순한 주택문화관(모델하우스)이 아닌 확장된 개념의 문화관을 방향으로 정했다. 크링은 내부도 원으로 통일되어 있다. 신차 발표회, 패션쇼 등 프로그램에 따라 바뀌는 무대가 중심인 공간을 설계했다. 당시 건축주인 금호그룹의 기업 정신을 담으려고 했다. 입면은 외부로 내부 구성원들의 철학을 드러내는 또 다른 부분이다.
장윤규는 서울 대학로 객석 빌딩에 대안공간인 갤러리 '정美소'를 운영했다. 성북동으로 건축사무소를 옮기면서 따라온 갤러리는 전시 공간이 따로 없다. '장윤규의 갤러리'는 자신이 설계한 공간이 될 수도 있다.
'건축은 생존이자 도덕'이라고 말하고 도덕에 방점을 둔다. 건축은 사회성을 고려해야 한다. 커뮤니티, 마을 만들기 등 공공 건축이 특히 중요하다. 아파트 단지도 가장자리의 동선을 바꿈으로서 도시의 주체가 된다고 말한다. 과거에는 공간과 형태 즉 안(內)이 건축 자체였으나 지금은 바깥(外)을 고려해야 한다. 도시, 사회, 삶과의 관계 등 요소들이 더 중요하다. 건축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
성동구 성수동1가 성동문화복지센터(2013)는 도시의 길에 관한 이야기이다. 수평적 거리와 광장을 적극 수용해 건물 안에서 수직적, 수평적, 3차원의 광장을 제공하는 도시 구조를 집약하는 건축이다.
▲ 성동문화복지센터 / 사진 제공 = 운생동 건축사사무소
성동구청이 운영하는 이 건물은 재활의원과 아트홀, 사회복지관, 도서관 등이 들어서 있다. 1층부터 5층까지 여러 방향으로 뻗은 계단이 밖으로 드러난다. 외부에서 보이는, 건물을 둘러싸며 올라가는 계단은 '길'이자 '광장'이라는 개념을 가로지른 대각선 형태로 표현했다. 건물 자체를 걸어 다닐 수 있게끔 제안한다. 시민에게는 폐쇄적이고 거리를 둔 관공서가 열리길 원하는 개념이다.
해외 명품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가 즐비한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건축면적 272.65㎡, 높이 15층에 불과한 '몽유도원도 타워'(2018)다. 건물 직벽 외피로 흰색 세라믹 패널로 굽이굽이 산등성이를 표현했다. 볼륨감 넘치는 외관이 정면에서는 물론 옆에서 봤을 때도 쉽게 눈에 띈다. 빛에 따라,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느낌을 준다.
인체 실루엣과 동양화에서 표현된 몽환적인 산등성이 형태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세라믹 판 자체를 굽히지 않고 잘라 나열해 곡선을 표현했다. 다이내믹한 공간성과 도시 뷰, 한강 뷰 등 파노라마 뷰를 즐길 수 있는 '내부로부터의 건축'을 추구했다.
▲ 한내 지혜의숲 외부 / 사진제공 = 운생동 건축사사무소
장윤규의 '내부로부터의 건축'은 공공 건축인 노원구 한내 지혜의숲 도서관으로 이어진다. 공간을 이루는 기본 단위를 책꽂이 월인 가구적 구조로부터 시작한다. 과거의 월이 고전적이며 공간적 소통을 막아서는 구조적 한계를 가졌다면, 책꽂이 월은 유동하는 공간을 구성해 소통하고 통합되며 적절이 독립되는 이중적인 미로 구조를 재현한다. 지붕을 이루는 비대칭 삼각 프레임은 책꽂이 벽의 연장이며 다양한 지붕 형태의 겹침 사이로 자연의 빛을 받아들이는 틈새 장치다.
▲ 한내 지혜의숲 내부 / 사진제공 = 운생동 건축사사무소
한내 지혜의 숲 운영주체는 주민이다. 복도와 방의 구분이 없다. 설계하는 방식도 바꾸었다. 책꽂이(가구)를 먼저 설계하고 지붕, 외피의 순이다. 삼각 프레임 내 연속된 천장의 가구는 조명과 에어컨 박스 역할을 한다. '운생동'의 다양한 건축적 작업은 각기 다른 프로토 타입의 오리진을 찾는 과정을 탐구하게 했다.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운생동' 사무실은 대부분 아파트 거주자인 직원에게 '집 = 단독주택'이라는 경험을 겪게 한다. 서양식 단독주택의 거실은 가든의 기능과 역할이다. 아파트 생활자들은 단독주택을 선망하나 수도, 전기 등이 고장나면 대부분 전구 하나 바꿀 줄 모른다. 몸을 움직여 직접 고치는 법을 체득해야 한다. 주택은 단 한 평이라도 공공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게 장윤규의 생각이다. 건축을 대하는 방식은 도시를 바꾼다.
먼 미래란 없다. 현재가 곧 미래다. 1년 이상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코로나 팬데믹이 현실이다. 코로나 상황에 대한 대책은 방역 등 의료 범주에만 머무른다. 건축적 대안 중 하나로 트레일러를 제안한다. 건물을 짓는 거에 비하면 실용적이다. 코로나 이전에도 지구 온난화와 황사 미세먼지로 인해 길은 온실화되었다. 길을 커뮤니티 센터로 쓰자는 개념이다.
▲ 트레일러+컨테이너 주택 조감도 / 사진제공 = 운생동 건축사사무소
화물 운송용 사각 컨테이너는 공사장 사무실이나 농가 창고, 전원주택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축가들은 컨테이너의 기능 확장에 눈을 돌리고 있다. 미국 건축가 그룹 '오피스 오브 모바일 디자인'(Office of Mobile Design)은 새로운 형태의 생태마을을 실험하고 있다. 컨테이너의 업그레이드 버전쯤 된다. 도어 시스템·바닥 시스템·태양열 시스템 등에 환경적 요소를 결합한다. 컨테이너 여러 개를 연결하면 주민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이 된다.
운생동 건축사사무소 직원들은 업무 시간 3분의 1은 '새로운 건축'에 할애한다. 다른 건축과 도시를 계속 제안해 실험실처럼 일한다. 유튜브인 '건축공감'은 '한국건축300선' '건축가 인터뷰' 등을 아카이브로 만드는 작업이다. 상업적 건축 수주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종로구청+소방서' 리모델링 공모에 당선돼 기본설계 안을 정리 중이다.
미술 교육을 받은 적 없는 장윤규는 붓 펜으로 한지 캔버스에 드로잉을 한다. 드로잉은 건축적 작업과 밀접해 보인다. 건축 디자인의 50%는 영감(靈感)에서 얻는다. 또 다른 50%는 리서치를 통한 결과 도출이다. 상황 분석, 방향 정립 등 연구 시간을 가져야 좋은 작품을 얻는다. 장윤규는 공학과 미학의 결합체인 건축의 핵심을 공학적인 구조미로 본다.
[프리랜서 효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