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천리 길을 걷노라면(여섯 번째)
(공주→강경, 2016. 10. 22∼10. 23)
瓦也 정유순
금강 천리 길 여섯 번째 길을 걷기 위해 새벽걸음으로 공주시 우성면 평목리로 나서는데 멀리서 계룡산은 닭 벼슬을 곧추세우고 무사장도를 빈다. 평목리는 공주보 우안(公州洑 右岸)에 있는 마을로 다섯 번째 마지막지점의 금강 고마나루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다.
<계룡산>
논의 벼들도 노랗게 익어 추수가 한창이고, 밭에서 거둬들인 들깨를 방망이로 터는 아낙의 모습은 옛날 우리 어머니들의 참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충남 봉수산(鳳首山, 534m)에서 발원하여 금강의 넓은 품으로 들어오는 유구천(維鳩川)도, 금강을 가로 건너는 천안∼논산 고속도로와 공주에서 부여로 가는 651호 지방도로가 함께 층(層)을 이루고 아침햇살에 기지개를 활짝 편다.
<들깨 터는 모습>
<고속도로(위)와 지방도로(아래)>
갈꽃이 바람에 산들거리고 미로를 찾아가듯 갈대밭을 소리 내어 스치면서 흰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 있는 길을 지난다. 그리고 억새가 솜털 같은 깃으로 가을을 간질이면 하늘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방긋 웃는다. 강 따라 길 따라 찾아 들어간 곳은 공주시 우성면 옥성2리 작골마을이다.
<갈대 밭>
<옥성2리 작골마을>
젊은 사람이 적어서 그런지 마을은 조용하기만 하고 움직이는 사람이 좀처럼 보이질 않는다. 추수가 끝난 논의 벼는 포기자국만 남았는데, 밭의 콩과 구기자(枸杞子)는 주인의 손길만 애타게 기다린다. 감국(甘菊)이 활짝 핀 고샅길에는 ‘사육신 김문기선생현창비(死六臣 金文起先生顯彰碑)’ 표지석이 보여 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가 본다. 아마 작골 마을은 김령김씨(金寧金氏) 집성촌 같다.
<콩>
<구기자>
<감국>
충의공백촌김문기(忠毅公白村金文起, 1399∼1456)는 조선시대 초기 문신으로 함길도관찰사와 공조판서를 역임한 분으로 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왕에 오른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된 충신으로 처음에는 사육신(死六臣)에 포함이 안 되었었는데, 최근에 후손들의 청원으로 사육신에 이름이 오르고, 가묘를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모셨다고 한다.
<사육신 충의공김문기선생 현창비>
<육신정>
마을을 돌아 강변길로 나오니 625호 지방도로 공사구간 끝이 나오고 도로는 자동차가 한 대도 안 다니는 한적한 도로다. 도로변에는 추수한 벼를 깔아 놓아 햇볕에 건조시킨다. 마주보는 야트막한 언덕은 도로공사로 허리가 잘리고 그 자리에는 생태교량(生態橋梁)을 놓아 겨우 연결해 놓았다.
<생태통로(교량)>
<도로변 벼 건조>
가로수로 심어 놓은 매실은 열매가 익어도 보아주는 이 없이 스스로 탈골을 하고 씨앗만 유골처럼 외롭게 가지에 매달려 있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를 지루하게 걷다가 강변의 갈대와 물억새를 마나자 반갑기 그지없다. 당장 뛰어가 갈꽃과 억새꽃을 꺾어 모자와 배낭에 꽂으며 치장도 해본다. 억새꽃이 살랑거리는 억새밭이 금방 작은 음악회의 즉석무대가 된다. 성악을 하는 도반의 열창이 끝나자 함께한 도반들의 요청에 의해 <숨어 우는 바람소리>를 호흡조절이 안된 상태로 불러본다.
<가지에 말라 붙은 매실>
<억새>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공주시를 벗어나 청양군에 접어들어 아침나절을 마감할 겸 중식을 위해 칠갑산장곡사로 이동한다. 청양군 대치면에 있는 장곡사는 대웅전이 상∙하로 나누어 있는 게 특색이다. 그리고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법당인데, 하대웅전에는 약사불이 모셔져 있고, 상대웅전에는 비로자나불과 약사불이 모셔져 있는 것이 다른 절과 비교된다.
<칠갑산장곡사 일주문>
<장곡사 전경>
<하 대웅전>
대중가요 <칠갑산>으로 더 알려진 칠갑산의 품에 안긴 아담하면서도 좁은 계곡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가람을 배치한 장곡사는 철조약사여래좌상(鐵造藥師如來坐像)과 석조대좌(石造臺座), 미륵불괘불탱(彌勒佛掛佛幀),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毘盧舍那佛坐像)과 석조대좌(石造臺座), 금동약사여래좌상 등 여섯 점이 국보급 문화재로 지정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상 대웅전 철조약사여래좌상 및 석조대좌>
장곡사를 돌아 나와 하루에 비빔밥 천 그릇을 판매한다는 식당에서 때를 기다리느라 조금 늦은 점심을 하고 다시 금강 변인 청양군 청남면 천내리로 나와 왕진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강둑을 따라 자전거 길과 도보길이 4대강사업 덕분인지 포장이 잘되어 있고, 동강리 하천변에는 주말을 이용하여 찾아온 사람들로 오토캠핑장이 북적거린다.
<자전거도로와 보행 길>
<금강변 오토캠핑장>
청양군에서는 제법 큰 들을 가지고 있는 청남면 들녘에는 콤바인이 바삐 움직인다. 옛날에는 쌀 한 톨을 얻기 위해서는 “농부가 일곱 근의 땀을 흘려야 하고, 여든여덟 번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었는데, 요즘은 자동화된 농기구들이 발달하여 이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어느 집의 울타리에는 지난여름에 열렸던 포도송이가 주인을 기다리다 지쳐 말라붙은 채 덩그러니 매달려 있어 한 알을 따서 입속에 넣어보니 너무 달콤하다.
<추수>
<말라붙은 포도>
한참을 더 내려가니 수중생태계가 잘 발달된 하중도(河中島)가 물길의 흐름을 조절하고, 그 밑으로 멀리 백제보가 보이는 지점에는 왕진(汪津)나루가 나온다. 과거 왕진나루는 청양군 청남면과 부여군을 잇는 주요 교통로였다. 강경포구 등과 함께 물류의 집산지였으며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의 외곽나루로 ‘왕이 다녀간 나루’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하중도>
총길이 311m의 백제보(百濟洑)는 4대강사업으로 2011년 10월 열여섯 개의 보 중 두 번째로 준공된 보(洑)로 수문 두 개가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백제보 좌안으로는 백제보전망대와 홍보관이 멀리 보인다. 이 보 옆을 지나면서 “물은 고이면 썩는다”라는 만고의 진리를 다시 새겨본다.
<백제보>
왕진지구 생태공원을 지나면 멸종위기1급인 ‘미호종개’ 서식지가 나온다. 미호종개는 미꾸리과에 속하는 어종으로 ‘유속이 완만하고 수심이 얕은 모래 속에 몸을 완전히 파묻고 사는 물고기’로 산란기는 5∼6월로 추정되지만 생활환경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서식지는 지천(枝川)과 금강이 마나는 지점으로 지천은 칠갑산에서 발원하여 이곳 금강으로 합류한다. 어둠이 찾아오는 저녁 무렵에 이 지천을 건너 아주 낮은 언덕을 넘어 들어선 곳이 부여군 규암면 금암리 동궁마을이다.
<미호종개 서식지 표지판>
곤한 잠을 자고 여명이 오기 전에 덤으로 계룡산 신원사를 둘러본다. 신원사(新元寺)는 계룡산에 있는 절로 651년(백제 의자왕 11년) 열반종의 개조(開祖)인 보덕(普德)이 창건하였으며 1298년(고려 충렬왕)에 무기(無奇)에 의해 중건되었고, 조선 태조 때 무학(無學)이 삼창을 하면서 영원전(靈源殿)을 지었으며, 1876년(고종13년)에 보연(普延)이 다시 중수하였다고 한다. 경내에는 계룡산의 산신제단(山神祭壇)인 중악단(中嶽壇)이 있다.
<계룡산신원사 대웅전>
중악단은 신원사 대웅전 우측 뒤편에 자리 잡은 산신각으로 계룡산신을 모시는 제단(祭壇)이다. 산신각 중에는 전국 최대 규모 라고 하며, 조선 태조는 1394년(태조3년)에 북쪽 묘향산의 상악단, 남쪽 지리산의 하악단과 함께 영산(靈山)으로 꼽히는 3악의 하나인 계룡산의 신원사 경내에 계룡단(鷄龍壇)을 세우고 산신제를 지내오다가 1651년(효종2년)에 단이 폐지되었으며, 1879년(고종16년) 명성황후의 명으로 다시 건축하고 이름을 중악단(中嶽壇)으로 고쳤다고 한다.
<중악단>
자주 옆으로 지나면서도 처음 들른 신원사를 빠져나와 서둘러 조반을 하고 부여군 규암면 금강 변 백마강레저파크에 도착한다. 백마강레저파크는 백마강교에서부터 부산(浮山)입구 까지 하천부지를 따라 조성되어 있는데, 강 건너가 부소산이고 숲 사이로 보이는 게 낙화암과 고란사이다.
<부소산 낙화암>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게 하는 코스모스 밭을 거닐다가 레저파크 끝에 있는 부산으로 간다. 부산(浮山)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 ‘성난 용의 심술로 억수 같은 비가 석 달 동안 내려 청주에서 홍수로 떠내려 온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규암면 진변리 금강 변에 위치하고 있다. 부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미소를 머금고 합장하는 좌불(座佛)이 반겨준다.
<코스모스 밭>
<부산(浮山)>
<부산 좌불>
이산에는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다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 1585∼1657)가 낙향한 후 북벌계획에 관한 상소문을 올리자 “경의 뜻이 타당하고 마음이 아프지만 뜻을 이루기엔 너무 늦다(誠以至痛在心有日暮途遠意)”고 답을 내렸다고 한다.
<지통재심 일모도원>
뒤에 우암 송시열이 “지통재심(至痛在心) 일모도원(日暮途遠)”의 8자를 써서 아들 민서(敏敍)에게 전했으며 1700년(숙종26)에 손자 이이명이 바위에 이 8자를 새겼는데, 이것이 부산각서석(浮山刻書石)이다. 이 각서석 위로 지은 정자(亭子)의 이름은 대재각(大哉閣)이라고 하는데 이는 <상서(尙書)>의 “대재왕언(大哉王言 : 크도다 왕의 말씀이여)”에서 따왔다고 한다.
<대재각>
부산을 넘어 백강나루로 나온다. 백강나루는 규암면 진변리마을 앞에 있는 나루다. 금강에는 고란사나루에서 유람객을 태운 황포돛배가 가을 물살을 가르고, 주렁주렁 열린 강변의 대추와 감은 자꾸만 호주머니에 숨긴 손을 꺼내게 만든다. 역시 가을은 아무 것도 간진 것 없이 입맛만 다셔도 저절로 배가 부르는 풍요의 계절이다.
<황포돛대 유람선>
백제대교를 건너자마자 이곳 출신 “껍데기는 가라”의 시인 신동엽(申東曄, 1930∼1969)의 시비가 보여 잠깐 들른다. 신동엽은 서사시 <금강>에서 “동학운동이 상징하는 민족적 수난과 고통의 과정을 통하여 이 땅의 주인이 한민족 스스로이며 민중 그 자체임을 소중하게 일깨워주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신동엽 시비>
신동엽의 시비가 있는 곳에서 궁남지로 이동한다. 궁남지(宮南池)는 말 그대로 ‘궁궐의 남쪽에 있는 못’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연못’이라 하여 일반 정원의 조그만 연못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신라의 안압지는 위풍당당한 남성상이라면, 궁남지는 백제의 차분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포근한 여성상이다.
<궁남지>
<궁남지 포룡정>
수양버들이 하늘거리는 주변 길은 산책하기에 좋고, 못 가운데에 조성된 조그만 섬과 정자(抱龍亭)는 신선이 노닐기에 안성맞춤이며, 연못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이들과 어울려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백제 서동(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와의 아름다운 사랑의 전설이 깃든 궁남지에는 국화축제가 시작되었는지 국화로 만든 조형물들이 궁남지주변에 수를 놓는다.
<국화로 만든 백제금동대향로 모형>
다시 백제대교를 건너 규암면 금강변 자온대라는 바위 위쪽에 세워진 수북정(水北亭)으로 간다. 자온대(自溫臺)는 백제시대 왕이 왕흥사(王興寺)에 행차할 때마다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구들돌이라 명명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위치가 불분명하며, 수북정은 부여팔경의 하나로 조선 광해군 때 양주목사를 지낸 김흥국이 건립한 것으로 그의 호를 따서 수북정으로 부른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날렵한 팔작지붕의 형태다.
<수북정>
오후에는 부여군 임천면에 있는 백제 수도 ‘웅진성’과 ‘사비성’의 외곽 성이었던 ‘성흥산성(聖興山城)’으로 간다. 백제시대의 산성으로 축성연대 등 기록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귀중한 유물로 백제 동성왕 23년(501년)에 ‘위사좌평 백가’를 시켜 성을 쌓았다고 전하는데, 당시 이곳 지명이 ‘가림군’으로 ‘가림성’으로도 불린다.
<성흥산성>
<성흥산성 바위의 소나무>
<성흥산성 정자 터>
백가는 자신을 이곳에 보낸 것이 좌천으로 생각하여 불만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령왕이 난을 평정하고 백가의 시신을 금강에 던졌다고 전한다. 이곳은 백제 멸망 후에는 부흥운동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위에 서서보니 산 정상을 중심으로 수평이 되게끔 ‘태뫼식’ 산성으로 ‘군창지와 우물터’ 등 시설을 갖춘 요새 중의 요새 같다. 정상의 늙은 느티나무는 질곡의 역사를 가슴에 품은 채 사람들의 재롱을 받아주며 말없이 서 있다.
<성흥산성 느티나무>
성흥산성에서 내려오는 길에 근처의 ‘대조사(大鳥寺)’에 들린다. 대조사는 백제의 고승 겸익이 창건 했다고 전하는데, 현존하는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법당 뒤의 고려 때 세웠다는 높이 10m의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은진 관촉사의 미륵불처럼 불균형의 극치를 이루며 오뚝한 코에 눈을 부릅뜨고, 옆의 소나무는 용틀임을 하는 자세로 우산처럼 서 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
성흥산성에서 장암면 장하리에 있는 삼층석탑으로 이동한다. 장하리 삼층석탑은 정림사지오층석탑을 충실히 모방한 탑이며, 고려 때 건립된 백제계 석탑으로 기단부가 낮고 좁은 것이 특징이다. 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찰이 있었던 게 사실이나 푯말에는 사찰 이름이 없다.
<장하리 삼층석탑>
가야할 길은 먼데 낯 시간이 짧아져 괜히 발걸음만 속절없이 바빠진다. 부여군 세도면에서 황산대교를 건너면 논산시 강경읍이다. 금강하류에 위치한 강경은 조선조부터 일제강점 초기까지 금강을 따라 발달된 수운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어 대구 평양과 더불어 3대 시장의 명성과 영화를 누리었던 곳이다. 그러나 1931년 호남선 개통과 육상교통의 발달로 그 영화는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쇠퇴하다가 최근에 젓갈시장을 중심으로 명성을 되찾아 가고 있어 그나마 조금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 같다.
<강경 황산나루>
<강경젖갈전시관>
소설 ‘소금, 불의 나라, 은교’ 등의 작가 박범신의 문학비가 있는 황산근린공원 주변에는 ‘김장생 조광조 이이 이황 성혼 송시열’ 등 6인의 현인을 모신 ‘죽림서원(竹林書院)’, 김장생이 금강이 굽어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서 후학들에게 강학을 하던 ‘임이정(臨履亭)’, 김장생의 제자인 송시열이 스승을 가까이 하고 싶어 건립된 ‘팔괘정(八卦亭)’ 등 유물이 있다. 그리고 팔괘정은 이중환이 택리지를 썼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죽림서원>
<임이정>
<팔괘정>
멀리 금강 상류를 바라보니 지금까지 스쳐왔던 흔적들이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 버린다.
<강경 금강변 억새>
첫댓글 강경까지 가셨으면 그 옆 함열, 함라도 들여보시잖구? ㅎㅎ
울 엣집 잘있던지요?
다음 달에 용안, 성당포구, 웅포를 지나갑니다.
요즘은 시골에 빈집들이 많아서 좀 쓸쓸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