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김경식 출처 http://cafe.daum.net/historiaDei
한국신학의 학맥을 찾아서는 크리스찬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글로서 한국교회의 교파 중 예장 합동과 통합, 그리고 감리교의 주요한 영향을 끼친 미국의 대표적인 신학교인 웨스트민스터, 프린스턴, 드루 신학교등이 실려있습니다. 연재순으로 올립니다.
<한국신학의 학맥을 찾아서(1) - 프린스톤 신학교>
보수/개혁, 다양성 존중 학풍 형성
크리스찬신문 이혜자 기자
한국신학은 지금까지 서구신학의 절대적(?) 영향하에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서구에서 학위를 받아왔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신학자들이 수많은 신학교 가운데 영미 지역에 있는 몇몇 학교들에 편중돼 학위를 한 것 또한 한국신학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신학은 어떤 특정한 신학적 명제나 사조에 국한되기 어렵다고 한다. 이는 신학자들이 국내에 돌아와 다양한 현장에서 다양한 활동들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학위를 한 신학자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그동안 어떤 분야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그리고 하고 있는지를 그들이 학위를 한 신학교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학교선정은 한국교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미국, 독일신학교들을 중심으로 했으며 이들 신학교들의 초기 모습과 최근의 동향을 함께 알아볼 예정이다.
개신교의 전래와 함께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프린스톤신학교는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교회와 신학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쳐왔다. 이는 프린스톤에서 수학한 수많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장로교 안에서 그리고 장로교 밖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비롯, 초기 한국사회 지도자 중 많은 수가 프린스톤에서 수학을 했는데 이는 미국에서 건너온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초기 선교사들 중 상당수가 프린스톤 출신이었던 것.
1920년대 프린스톤에서 수학한 한국교회 지도자들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박사이자 최초의 신학교 교수였던 남궁혁(1924, Th.M), 연세대 초대 총장이었던 백낙준(1925, Th.B), 광복 후 한국 기독교연합회의 초대 회장, 총무와 기독교교육협회의 초대 회장 등을 역임했던 김관식(1926 Th.M), 서울장로회신학교 교장, 총회신학교 교수 및 교장직을 역임했던 박형룡(1925, Th.B),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창립자이자한신대학 명예학장을 지낸 김재준, 전 영락교회 담임목사이자 숭실대학 학장을 지냈던 한경직(1929, Th.B), 독립운동가였던 윤하영과 송창근 등을 들 수 있다.
이 당시 프린스톤은 선교의 열정에 불타올라 외국 학생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여 세계교회의 성장과 일치를 위한 지도자들을 양성하는데 힘썼는데 이러한 학교의 분위기는 한경직, 백낙준 목사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1940~60년대는 신사훈(1942~43, 45~46), 전경연(1949, Th.M 신약학 한신대 명예교수), 전성천(1951, Th.M 기독교교육 예장 성남교회 원로목사), 한태동(1953, Th.M 56, Ph.D 교회사 연세대 명예교수), 이영헌(1953, Th.M 교회사 장신대 은퇴교수), 이종성(현 기독교학술원 원장), 박상증(1957, Th.M 현 갈현성결교회 담임목사) 문동환(1955), 문익환(1956), 황성규(Th.M 한신대 명예교수) 등이 프린스톤에서 수학했다.
프린스톤신학교는 학생들에게 항상 말씀을 상황과 함께 상고하며 실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상황에의 관심은 도식화되어가기 쉬운 전통적 장로교회와 그 신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는데 한국에서는 특히 문동환, 문익환 목사가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편 이 시기에 한태동 박사가 우리나라 신학생으로서는 처음으로 프린스톤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60~70년대 프린스톤에서 수학한 사람들로는 오태환(1960, Th.M 부산신학교 은퇴교수, 금광교회 원로목사), 정경숙(1963, Th.M 한일장신대 은퇴교수), 곽선희(1964, Th.M 현 소망교회 담임목사), 김병서(1964, Th.M 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나학진(1968, Th.M 75, Ph.D 서울대학교 은퇴교수), 박종삼(1968, Th.M 숭실대 사회사업학과 교수), 김용복(1969, Ph.D 한일장신대 전 총장), 박조준(1969, Th.M 현 갈보리교회 담임목사), 홍성현(1972, Th.M 75, Ph.D 현 수송교회 담임목사), 심상권(1973, Th.M 현 상담문화연구원 원장), 나채운(1974, Th.M 장신대 은퇴교수), 장상(1977, Ph.D 현 이화여대 총장) 등이 있다.
한편 프린스톤에서 수학한 현직 신학과 교수로는 강남대 김흡영(M.Div·Th.M 조직신학), 계명대 오우성(M.Div 신약학), 그리스도신학대 김문형(Th.M 신약신학), 나사렛대 유승원(Th.M 신약학), 대전신대 배정훈(Th.M 구약학), 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 전용란(Th.M 신약학), 부산장신대 박만(Th.M 조직신학), 서울여대 문영빈(Ph.D 과학과 신학) 장경철(Th.M, Ph.D 조직신학) 최재덕(Th.M 신약학) 황영훈(Th.M, Ph.D 목회상담학), 숭실대 박종삼(Th.M 기독교문화), 연세대 박준서(Ph.D 구약학), 영남신대 김영도(Th.M 교회사), 이화여대 정희성(Th.M 목회상담학), 장신대 김도일(M.Div 기독교교육학) 윤철호(Th.M 조직신학) 임성빈(Ph.D 기독교윤리학) 임창복(Th.M 기독교교육) 조숙자(MRE 교회음악) 현요한(Th.M, Ph.D 조직신학), 전주대 이신형(Th.M 조직신학), 총신대 심창섭(Th.M), 한남대 이달(Th.M 신약학), 한신대 김영일(Th.M 실천신학) 이병학(Th.M 신약학) 장일선(Th.M 구약학) 황성규(Th.M 신약학), 한일장신대 구춘서(Th.M 조직신학), 박종기(Th.M 신약학) 호남신대 차종순(Th.M 역사신학) 등이 있다.
이밖에 강석렬(1980 Th.M 기독교교육 서울장신대 은퇴교수), 서경석(84 M.Div 서울조선족교회 담임목사), 최두열(1990 Th.M 소망교회 부목사), 서정오(1991 Th.M 동숭교회 담임목사) 등도 프린스톤에서 수학했다.
현재 프린스톤신학교에는 현재 전세계 25개국에서 온 740여 명의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이중 여성은 270여 명. 한국학생은 전체 학생의 10% 정도이며 그 중 반은 한국인 2세들이라고 한다. 전학생의 80%가 장학금을 받으며 특히 박사과정은 수업료 전액이 면제돼 생활비만 필요하다. 도서관에는 신학분야에 관련된 도서만 70여만 권에 이르러 학문을 위한 모든 준비를 해놓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장신대 임성빈 교수는 “프린스톤은 장로교 전통이 강하지만 동시에 에큐메니칼 적”이라고 전제한 뒤 “보수적인 것부터 진보적인 것까지 포용적으로 받아들인다”며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프린스톤신학교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최근 프린스톤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현숙씨는 학“문적으로 뛰어난 학생들이 많다보니 서로 경쟁적 따뜻한 분위기가 잘 느껴지지 않는 것이 흠”이라며 “입학하자 마자 토론수업까지 영어로 소화해 내야 하기 때문에 어학 준비를 철저히해 오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프린스톤신학교는
미국 장로교 최초의 신학교인 프린스톤은 1812년 창립되었다. 그러나 실제적인 역사는 17세기 전반에 펜실베니아에서 시작됐던 로그 칼리지(Log College)로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 로그 칼리지는 1746년 교조적인 정통주의의 보루가 되어버린 하버드와 예일대학에 비해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장로교회를 위한 목회자를 양성하겠다는 취지 아래 지금의 프린스톤신학교의 전신인 ‘뉴저지대학](The College of New Jersey)을 설립했다. 그러나 뉴저지대학이 거센 근대화의 학문성에 치우쳐 복음적인 목회자 양성과 근대학문의 수련이라는 종래의 설립목적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 장로교단은 독자적인 신학교 설립을 심각히 고려하게 된다. 이러한 고려는 제2차 대각성운동의 선교열기와 그에 따른 본격적인 목회자의 양성이라는 시대적인 긴급성에 의해 구체화되어 결국 1812년 오늘날의 프린스톤신학교가 설립되게 되었다.
프린스톤의 신학적 전통은 칼빈과 녹스(Knox)에서 비롯되는 개혁교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초대학장인 알렉산더 이후의 100여 년은 구 프린스톤 신학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통과 교회쪽에 관심을 편향했던 구 프리스톤의 보수적 전통은 20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이 등장함으로 진통을 겪게 된다. 논란 끝에 프린스톤신학교는 자유주의 신학흐름에 참여하게 됐다. 그러나 프린스톤 신약학 교수였던 메이첸 교수는 이에 강력히 반발, 1929년 프린스톤과 결별을 선언하고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토신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프린스톤신학교는 이후 상황(현장)에의 관심, 즉 정치 사회적인 관심을 포괄하는 제반윤리의 문제에 개혁신앙의 전통을 바탕으로 참여하려는 노력을 펼쳐왔다.
프린스톤신학교에는 현재 57명(2001년 기준)의 교수가 있다. 대부분이 장로교 출신이지만 감리교 루터교 성공회 침례교 로마 카톨릭 그리스도교회 그리스도연합교회 개혁교회 등 타교단 교수들도 상당수. 현재 한국인으로는 이상현 교수가 유일하게 활동하고 있다. 프린스톤는 명문 신학교답게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교수들이 많다.
우선 구약학에는 탄탄한 성서언어의 지식을 배경으로 본문비평을 추구하는 로버트(Roberts), 세우(Soew) 그리고 본문비평과 함께 양식사 등의 제반 방법론들을 망라해 성서에 보다 신학적으로 접근하려는 밀러(Miller), 전통적인 접근방법들의 지평을 여성신학의 입장에서 새롭게 넓혀 보려는 스캔펠드(Sakenfeld) 등이 있다. 신약학에는 누가와 사도행전을 문학비평적으로 접근하려는 가벤타(Gavenbta)와 공관복음서를 문화해석학적으로 해석하려는 블런트(Blount), 초기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의 권위자인 찰스워쓰(Charlesworth)가 활동하고 있다.
초대교회사의 맥베이(Mcvey), 칼빈과 초대교회사의 맥키(McKee), 미국교회사의 무어헤드(Moorhead) 등도 역사신학 분야의 거장들. 또한 전통적인 철학적 입장에서 기독교철학을 전개하는 알렌(Allen), 금세기 들어 가장 각광받는 인물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조나단 에드워드 해석의 권위자인 이상현 교수, 신진 바르트 해석자인 맥코믹(McComack), 인정받는 틸리히 해석자이자 문화인류학적 배경을 가지고 해방신학, 여성신학, 포스트 모더니즘 등을 해석하려는 테일러(Taylor), 미국윤리학회 핵심을 이루고 있는 레흐만(Lehmann)의 수제자로서 그 해석의 권위자이자 의료윤리에 관심이 많은 더프(Duff), 미국 윤리학계의 중도적 입장을 대표하는 중견 윤리신학자인 스택하우스(Stackhouse) 교수도 빼놓을 수 없다.
실천신학 분야에서는 미국 기독교교육계의 한 계보를 이루는 로더(Loder)와 그의 라이벌(?)인 플라워(Flower)의 직제자인 오스메르(Osmer), 새로운 목회상담의 영역을 추구하는 캡스(Capps) 교수 등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신학의 학맥을 찾아서(2) -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정통 보수주의 신학 학풍 형성
크리스찬신문 이혜자 기자
미국 필라델피아에 자리잡고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북장로교 신학의 본산인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정통보수주의의 기수로 이름을 날렸던 메이첸 교수가 1929년 설립한 학교다. 메이첸 교수는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기로 한 북장로교의 정책에 강력히 반발하며 프린스톤신학교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후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개혁신학의 전통 위에 자유주의 신학과 세속적 도전으로부터 기독교 교리 전통을 방어하는 기독교변증학적 성향을 강하게 보여왔다. 웨스트민스터의 이러한 성향은 국내 신학에도 강력한 영향을 끼쳐 웨스트민스터 출신들을 중심으로 한국 보수주의 신학의 맥이 형성되게 되었다. 한철하 박사(Th.M 조직신학 아세아연합신대 명예총장)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국내에 바른 신앙, 즉 보수정통신학을 수립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웨스트민스터가 설립된 것이 1929년이기 때문에 초기 한국 교회 지도자들 중 웨스트민스터 출신을 찾기란 쉽지 않다. 웨스트민스터에서 수학한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자는 성경주석가로 잘 알려진 정암 박윤선 목사. 박목사는 1979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졸업생 중 처음으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기도 했다.
전 연세대 교수였던 한태동(B.D 교회사) 박사와 총신대 교수로 활동하다 내수동교회에서 24년간 사역했던 박희천 목사(Th. M)도 웨스트민스터에서 수학했다. 현 예장고신 교단 총무인 전호진 박사(선교학)와 새생명운동본부 대표본부장, 예장 장신총회 부흥사회 대표회장 등을 역임한 이주영 목사, 전주대학교 초장을 역임했던 서울교회 이종윤 목사도 웨스트민스터 출신.
또한 서울대 교수이자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공동대표인 손봉호 박사, 사랑의교회 담임목사이자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을 맡고 있는 옥한음 목사, 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이자 강변교회 담임목사인 김명혁 목사(Th.M) 등도 웨스트민스터에서 수학한 사람들이다. 이밖에 신성종(제2 대전중앙교회) 권성수(대구동부교회) 장은일(전주서문교회) 나선균(성북중앙교회) 목사도 웨스트민스터 출신이다.
박일철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교수, 홍창표 미네소타 주립대학 은퇴교수는 웨스트민스터에서 수학한 후 미국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한 신학자들.
한편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수학한 현직 신학과 교수로는 고신대 황창기(현 고신대 총장) 박영돈(Ph.D 교의학), 개혁신학연구원 손석태(M.Div M.A.R 현 개혁신학 연구원 원장), 광주신학대 정규남(현 광신대 총장), 서울기독대 이강평(D.Min 실천신학 현 서울기독대 총장), 아세아연합신대 김준수(D.Min, M.Div 목회상담학) 박응규(M.Div Th.M Ph.D 역사신학) 원종천(M.Div Ph.D 교회사) 한상화(Ph.D 조직신학) 허주(M.Div 신약학), 천안대 성종현(D.Min), 장동민(Ph.D 조직신학), 총신대 김인환(M.Div Th.M 구약학) 김정우(Th.M Ph.D 구약학) 김의원(Th.M 구약학) 유상섭(M.Div 신약학) 서철원(Th.M 교의학) 김길성(Ph.D 조직신학) 김광열(M.Div, Ph.D 조직신학) 박희석(Ph.D 교회사) 황규명(Th.M, D.Min 상담학) 신국원(M.Div, Th.M 기독교철학) 이상원(Th.M 조직신학), 평택대 이광희(Th.M D.Min 실천신학), 칼빈대 김의환(현 칼빈대 총장, 전 총신대 총장 역사신학), 한국성서대학교 이호우(Ph.D 교회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박형용(Th.M 신약학 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유영기(Th.M 신약학) 김재성(Ph.D 조직신학) 정승원(M.Div, Ph.D 조직신학) 오덕교(Ph.D 역사신학) 등이 있다.
웨스트민스터에서 최초로 박사학위 받은 국내 신학자는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오덕교 교수로 알려졌다.
웨스터민스터신학교는 지금 새로운 변화를 꾀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졸업생들에 따르면 그동안 웨스트민스터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보다는 학문탐구 쪽에 훨씬 무게중심을 두었다고 한다. 이는 현대의 세속적 도전들에 대해 어떻게 서든지 기독교 신앙을 지키겠다는 강한 신념에 따른 결과. 그러나 최근 들어 웨스트민스터는 목회자 양성과 선교 등 실천신학 분야에 부쩍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박응규 교수는 “웨스트민스터에서도 본문비평, 역사비평 등을 비판적으로 가르친다”고 전제한 뒤 “일각에서는 웨스트민스터가 무조건 보수적이라고 오해하기도 한다”며 “그러나 개혁신학 전통에서 제대로 공부하길 원하는 사람이라면 웨스트민스터를 선택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피력했다.
인터뷰/웨스트민스터신학교 행정부총장 J. 스탠포드 카슨
“21세기 웨스트민스터, 목회자 양성·현장 바탕으로 한 실천적 사역에 관심”
“한국학생들은 정말 훌륭합니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학교 분위기도 활기있게 만들지요.”
최근 방한한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스탠포드 카슨 행정부총장은 한국학생들이 공부뿐만 아니라 기도도 열정적으로 하고 노래도 잘한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학문탐구에 있어 창의력이 조금 부족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현재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는 43개국에서 온 700여명의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다고 한다. 이 학생들은 100여개 교단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여학생도 100여명에 이른다. 한국인 2세들을 포함한 한국 학생은 130여 명. 카슨 행정부총장은 “전임교수는 23명이며 다수가 장로교 출신이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동의하는 타교단 교수들도 받아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전임교수 중 아직까지 여성은 없는 실정. 카슨 행정부총장은 “신학적인 이유 때문에 웨스트민스터는 여성안수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교수로는 받아들일 수 있다”며 “여건이 형성되지 않아서 채용하지 못할 뿐 일부러 여성을 배제한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한편 카슨 행정부총장은 “웨스트민스터에서는 그동안 헬라어 히브리어를 전 과정에서 요구했으나 최근 M.A(Master of Arts)과정인 도시선교, 기독교교육, 성경적상담학에는 헬라어와 히브리어 과목 이수를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며 “이는 문화적으로 민감한 목회자를 키우기 위해 학문성보다는 실천적인 것을 강조하자는 새로운 흐름에 따른 변화”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 카슨 행정부총장은 “그동안 웨스트민스터는 학문성을 매우 강조해왔으며 세속적인 도전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고수하기 위해 조금은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모습을 보여왔다”면서 “그러나 21세기 웨스트민스터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일, 현장을 바탕으로 한 실천적 사역에 보다 관심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카슨 행정부총장은 프린스톤신학교과의 관계에 대해 “내년 학기에 우리 교수 한 사람이 프린스톤에서 가르치기로 했다”며 “상호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전했다.
카슨 행정부총장은 웨스트민스터에서 공부하길 원하는 한국 학생들이 영어뿐만 아니라 헬라어, 히브리어를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와 함께 하나님의 종으로서 헌신하겠다는 열정이 넘치는 사람, 목회자로서 준비가 된 사람들이 웨스트민스터에 오면 보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신학의 학맥을 찾아서(3) - 드루 신학교>
다양한 신학사상 소개 교두보 역할
크리스찬신문 이혜자 기자
드루대학교는 1866년 미국 감리교회 총회가 세운 미국 최초의 대학원 수준의 학교다. 본래 신학대학으로 출발했으나 후에 종합대학으로 개편됐다. 국내 신학교들이 종합대학으로 개편된 후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는 것과는 달리 드루의 경우는 아직까지 정체성의 위기를 크게 겪고 있지는 않는다고 한다.
드루 출신들은 드루의 학풍을 '진보적'이라고 평가한다. 학문적으로 개방돼 있어 다양한 신학적 견해들이 자유롭게 논의될 수 있기 때문. 최근 드루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최순양씨는 "드루는 미국 감리교 계통 학교에서 제일 진보적인 학교"라며 "특히 피식민지 사람들, 여성, 동성애자들과 같은 비주류에 대해 관심이 많다"고 전했다.
드루신학교에는 현재 200여 명의 한국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이는 전체 학생 중 1·3을 차지하는 수다. 미국 학생을 제외하면 거의 한국 학생이며 특히 박사학위 과정에 한국 학생들이 많다고 한다. 이와 관련 국내 신학박사 학위자들 가운데 드루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은 50여 명에 이르고 있다. 이는 다른 학교와 비교해 볼 때 월등히 많은 수다. 김득중 총장(감신대)는 "신학적으로 개방적인 드루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한국 신학계에 골고루 퍼져 있다"며 "드루 출신들이 국내에 다양한 신학사상을 소개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설명했다.
드루에서 박사학위를 한 국내 신학자로는 강일구(1992 레오1세의 신학에서 본 에큐메니칼 모델), 고광필(1990 소렌 킬케고올의 자아의 문법), 권진관(1990 역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의 대두:민중신학의 관점에서의 기독교정치윤리 현 성공회대학교), 김기홍(1983 20세기 초 장로교 갈등), 김덕기(1992 예수의 말씀 전승과 비유에 대한 후기 현대적, 윤리적-정치적 해석; 데리다, 푸코, 그리고 리꾀르의 사상에 비추어서), 김득중(1978 부활의 신학자인 마가복음서 저자), 김병오(1996 부끄러움과 폭력: 아내를 때리는 한국남편에 대한 심리-사회적 이해), 김성대(1999 한국 개신교 찬송가의 토착화), 김순환(한국개신교예배의 상징영역과 성만찬 성물의 문화접변화와의 관계), 김승철(2000 검열, 자유 그리고 저작술: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 (1799)의 해석학적 재구성), 김영일(1981 구약성서에 나타난 억압의 어휘), 김준우 (1992 한국사회의 죽임의 우상들과 생명의 신학 현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김진영(1998), 김형동(1998), 김홍기(1991 존 웨슬리의 사상과 민중신학에서 시험된 사회적성화 신학), 나형석(1996 폴 틸리히의 설교신학), 남호(1999 신학박사 한국 개신교의 결혼과 장례 예식에 있어서의 예배 토착화), 노세영, 류기종(1984 철학박사 폴 틸리히의 신(神)이해와 나가주나의공(空)사상의 비교 연구), 목창균(1986 슐라이에르마허의 하나님 교리에 대한 발전) 박노권(1994 돈 브라우닝의 목회학 방법론에 대한 비판적 분석 및 평가), 박용우(1987 D.Min 한국신학생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의미), 박익수, 박종수(1993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장 신점: 그 성격과 역할), 박충구(1991), 성기호(1990 앨버트 B. 심프슨의 저술에 나타난 전천년설을 중심으로 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교리), 사미자, 신재식(1997 변화, 리듬, 그리고무위: 신의 실재에 대한 동아시아 관점에서의 새로운 해석), 오우성(1988 신학박사 로마서 7:14-25의 주석사: 회심의 의미), 윤갑수(2000 D.Min), 윤동철(1998 조직신학), 이상성(1998 조직신학 민중의 운동으로서의 한국교회 : 민중신학의 교회론 정립을 위하여), 이상훈(1990 Ph.D A Study of the thedogical an Thropology of the Second Councie of Orange, A.D.529), 이성민(1994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에게서 나타난 말씀과 성례전의 통일성), 이세형(1996 도교적 입장에서 본 신과 악의 재해석), 이세형, 이승준(1997 복음주의적 성향의 한국 개신교 형성에 있어 종말론의 중요성, 1883-1945), 이형기(1980 에라스무스와 루터에 있어서 인간론 비교), 임승안(1995 요한 웨슬레의 신학적 인간론: 라틴 서방교부 전통(어거스틴)과 희랍 동방교부 전통(닛사의 그레고리)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 정규남(1975 구약에 나타난 궁중 예절), 정성민(2001 폴 틸리히와 칼 바르트의 비존재 이해 비교 연구), 정희성, 조기연(1996 교통과 연합의 우주적 사건으로서의 예배), 조태연(1992 먹고 마심에서 온 사람의 아들(Matt 11:19). A Study of the Table Fellowship in Qumran and Q), 차명호(2000 성례: 폴틸리히와 폴리뭐의 시각에서 본 일상적 언설에 관한 포스트 모던적 반성), 최재락(종교 심리학) 한인철(1992 창조의 과정속에 있는 기독교: 죤캅의 과정 - 관계적 기독교 이해에 대한 비판적 연구), 허도화(1998 에네스트 티 캠벨 : 1960년대의 예언적 설교) 등이 있다.
이 중 현직 신학과 교수로는 감신대 김득중(총장·신약학) 김홍기(역사신학) 박익수(신약학) 박충구(기독교윤리) 서창원(M.Div 조직신학) 이성민(실천신학), 강남대 박종수(구약학), 계명대 오우성(신약학), 나사렛대 임승안(역사신학), 광신대 정규남(총장), 대전신대 김덕기(신약학), 목원대 박노권(목회신학), 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 김기홍(교회사) 허도화(예배와 설교학), 부산장신대 김형동(신약학), 서울신대 노세영(구약학) 목창균(조직신학) 조기연(예배학), 최재락(종교와 심리학), 성공회대 권진관(조직신학), 연세대 한인철(조직신학), 이화여대 정희성(목회상담학), 조태연(신약학), 장신대 사미자(종교와 심리학) 이형기(교리사 및 기독교사상사), 평택대 김진영(목회상담), 한신대 김영일(구약학), 협성대 나형석(실천신학) 이세형(조직신학), 호남신대 신재식(조직신학), 호서대 강일구(역사신학), 성결대 윤동철(조직신학) 성기호(성결대 명예총장), 천안대 김병오(상담학),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허도화(예배와 설교학), 한국성서신학교 김순환 등이 있다.
이 밖에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감신대 김영래(M.Div 기독교교육), 한국성서신학교 이호우(S.T.M 교회사), 강남대 이숙종(S.T.M 기독교교육), 배제대 장춘식(M.A 성서신학) 등도 드루 출신.
한편 전 신민당 대표였던 정일형 의원, 그의 아내이자 국내 최초의 여성 여성 변호사로 활동했던 이태영 여사도 드루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크리스챤아카데미 이사장, 감신대 이사장을 역임한 홍현설 목사와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였던 신사훈 박사도 드루에서 수학했다. 50, 60년 대에 기독교의 입장에서 탁월한 비판이론을 수립했던 신사훈 박사는 국내에서 최초로 드루에서 Ph.D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대 초 국내에 종교다원주의 논란을 일으켰던 전 감신대 학장 변선환 박사도 드루에서 두 차례 수학했으며(1962-63, 66-67), 전 목원대 교수이자 현 통일연대 고문인 박순경 박사 등도 드루에서 수학한 인물.
최근 몇 년 전부터 드루는 포스트 모던이즘이나 탈식민주의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한다. 전세계 교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도 신학적 토론이 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드루대학교는 미국연합감리교회에서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에큐메니칼적 성향이 강하다.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은 교수들도 상당수.
최순양씨는 "드루에서는 학문적인 것뿐만 아니라 비주류 사람들에게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며 "다양성을 존중하는 학교이니 만큼 드루에서 공부를 원하는 학생들은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충고했다.
<한국신학의 학맥을 찾아서(4) - 튀빙겐 대학교>
개혁 전통 존중하는 통전적 학풍 지향
튀빙겐대학교는 1477년 바덴뷔르템베르크의 초대공작인 에버하르트 백작에 의해 세워졌다. 종합대학인 튀빙겐 안에는 현재 개신교 신학부와 카톨릭 신학부를 위시해 법학, 경제학, 철학, 의학, 컴퓨터 과학 등 다양한 학부가 있다.
유럽의 중세대학들은 전통적으로 신학, 철학, 법학, 의학의 4학부로 구성돼 설립됐다고 한다. 독일의 대다수 신학대학은 이러한 전통 아래 우리나라와는 달리 종합대학 안에 신학대학이 있다. 또한 한 대학 안에 개신교와 카톨릭 신학부가 공존하는 경우가 많다. 튀빙겐도 그 중 하나. 튀빙겐 개신교와 카톨릭 신학부는 같은 건물을 쓰고 있으며 학문적 교류도 매우 활발한 편이다. 최근 독일에서는 단과대학으로서의 신학대학도 설립되고 있지만 튀빙겐과 같이 오랜 역사를 가진 대부분의 대학은 종합대학의 중추적 학부로서 신학부가 있다.
튀빙겐 개신교 신학부는 대체적으로 진보적 학풍과 보수적 학풍 모두가 수용되는 통합적인 학문의 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각에서는 상당히 '진보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국내 신학계에서는 수용되기 어려운 아주 급진적인(?) 현대신학 이론도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튀빙겐이 급진적이지 않다는 의견도 만만찮다. 서울신대 유석성 교수는 "독일의 신학에 대해 일부 교회와 사람들은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생각한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대부분의 독일 대학과 신학자들은 자유주의 신학·신학자가 아니다"면서 "튀빙겐대학교 역시 학문적 자유는 있으나 자유주의 신학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유교수는 또한 "튀빙겐은 오히려 성서에 충실하면서 개혁적 전통을 존중하며 온전한 학문성을 추구하고 있다"며 "튀빙겐대학교는 독일 내에서 오히려 보수적 성향을 띤 신학부라고 말할 수 있다"고 전했다.
사실 튀빙겐의 학풍을 진보·보수로 나누기는 어렵다. 국내 신학교와는 달리 교수가 어떤 성향이냐에 따라 학교의 성향도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튀빙겐이 진·보수를 뛰어넘어 다양한 신학적 논의가 이뤄질 수 있는, 열려있는 학교라는 것. 튀빙겐 개신교 신학부는 또또한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국제 에큐메니칼 및 선교운동에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한편 장신대 김창선 교수는 "신학의 본질적인 면을 철저히 탐구하는 튀빙겐 신학적 학풍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김교수는 그러나 최근들어 신약과 구약의 연계성을 강조하는 성경신학이 발달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2000년 튀빙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종범 박사는 "튀빙겐 신학이 변함없어 보이는 것은 독일 신학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분위기에 쏠리지 않고 합리적으로 판단해 나가기 때문"이라고 전제한 뒤 "그렇다고 해서 사회의 관심사나 현대의 요구를 무시하지는 않는다"며 "사회현상에 대해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나 분위기에 이리 저리 쏠리지는 않는 것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미국신학은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독일의 신학은 제도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다"면서 "튀빙겐 역시 제도, 집단을 중시하는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국내 신학자 가운데도 튀빙겐에서 수학한 사람이 상당수에 이른다. 국내 신학자 가운데 튀빙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처음 받은 사람은 위르겐 몰트만의 제자로도 유명한 김균진 교수(1976 Dr.theol 조직신학,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연세대)다. 김교수의 뒤를 이어 이성희(1983 Dr.theol), 성종현(1984 Dr.theol 신약학,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죄용서와 그 구약적 초기 유대교적 전제 조건들·현 장신대 교수), 김명용(1985 Dr.theol 조직신학, 오늘이 토론 현장에서본 칼바르트의 신 개념·현 장신대 교수), 이동주(1986 Dr.theol 선교신학, 한국 혼합주의의 선교신학적인 문제 연구·현 아세아연합신학대학 교수), 김지철(1987 Dr.theol 신약학, 하나님의 감추어진 지혜로서의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현 장신대 교수), 박용삼(Dr.pril 선교신학·현 숭실대 교수), 위형윤(1988 Dr.theol 신학의 실천이론,에큐메니칼 성례전으로써 세례·현 안양대 교수), 배경식(1989 Dr.theol 조직신학·현 한일장신대 교수) 등이 1980년대 튀빙겐에서 수학했다.
1990년대 튀빙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국내 신학자로는 유석성(1990 Dr.theol 기독교윤리, 디트리히 본회퍼의 기독론적 기본결단·현 서울신대 교수), 송순재(1991 Dr.rer.soc 기독교교육·현 감신대 교수), 조효임(1992 철학박사 J.S. 바하의 리토르넬로 형식·현 천안대 교수), 오성종(1993 Dr.theol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조병하(1994 Dr.theol 천안대, 암브로시우스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 홍명희(1994 Dr.theol 개신교 부부관의 표현으로서 교회 결혼예식), 양금희(1995 Dr.theol 기독교 교육철학, 프랑케와 슐라이에르마허에 있어서의 인간학과 기독교 교육사상·현 장신대 교수), 김도훈(1997 Dr.theol 조직신학, 노장철학과 기독교 창조론. 생태학적 시각에서 본 노장철학과 기독교 창조론의 기본사고 비교·현 장신대 교수), 이은재(1997 Dr.theol 성서해석자로서의 필립·야콥·슈페너-그외 로마서 주해를 중심으로), 김충렬(1997 Dr.theol 한국목회상담에 칼, 쿠스타프 융 심층심리학의 적용 가능성·현 통합 서남노회 목사), 김창선(1998 Dr.theol 신약학, 예수의 고난, 예수의 간접적인 고난예고와 이것이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에 대한 주석학적인 연구) 장해경(1998 Dr.theol 신약학·현 아세아연합신학대학 교수) 등이 있다.
또한 이종범(2000 Dr.theol 대중매체를 통한 문화적 에토스 전달-현대 유교 사회의 기독교 에토스 전달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동정·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목연구소), 최순봉(2001 Dr.theol 복음의진리: 갈라디아서 1, 2장의 전승사적 연구·현 광신대 교수) 등은 21세기에 튀빙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
이들은 한국 교회에 독일의 전통적인 신학을 소개하고 에큐메니칼 운동을 소개하며 신학적 윤리·평화문제를 소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튀빙겐대학교
튀빙겐대학교에는 3만 명의 학생들이 수학하고 있다. 이 중 신학부 학생수는 개신교 신학부 2000명을 포함, 약 3000명. 신학부에서 공부하는 한국 학생은 약 20여 명 정도. 현재는 모두 개신교 신학부에 재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신교 신학부는 초기부터 개혁전통이 강했다. 루터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이러한 개혁신학적 전통은 17세기와 18세기에까지 튀빙겐에 이어졌다. 비판적 역사신학의 영향을 받게 된 것은 19세기부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튀빙겐은 아돌프 슐레터와 칼 하임 교수를 영입하며 큰 변화를 겪게 된다. 1898년 튀빙겐에 온 슐레터 교수는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연계성을 찾기 위한 시도를 전개했으며 1920년 초빙된 하임 교수는 신학과 현대 자연과학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튀빙겐 개신교 신학부에는 현재 18명의 전임교수가 있다. 2000명의 학생 중 70%는 목회자 과정을 밟고 있으며, 21%는 중등학교 종교교사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고 있다.
튀빙겐 신학부 출신 가운데는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은 철학자·신학자들이 상당수 있다. 우선 서양 철학사에 큰 영향을 끼친 헤겔(1770~1831)을 꼽을 수 있다. 헤겔은 프랑스혁명(1789)이 일어나던 당시 신학부 학생이었다. 또한 '예수전'을 쓴 슈트라우스, 현대 신학사를 빛낸 칼 바르트, 루돌프 불트만, 폴 틸리히, 디트리히 본회퍼 등도 튀빙겐을 거쳐갔다. 위르겐 몰트만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 또한 카톨릭 신학부의 한스 큉과 발터 카스퍼 교수 등도 세계적인 신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오늘날 세계의 정신사와 신학을 창조하고 이끌어가는 학문과 학자가 는 곳이 바로 튀빙겐인 것이다.
지금 튀빙겐은 상당한 변화를 겪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튀빙겐 신학을 이끌었던 유명 교수들이 최근 몇 년 사이 모두 은퇴한 것이 주요 원인. 새롭게 등용된 신진교수들이 21세기 튀빙겐에서 어떤 신학적 흐름을 형성할 지 주목되고 있다.
<한국신학의 학맥을 찾아서(5) - 하이델베르그 대학>
보수에서 진보까지...다양한 신학색깔 공존
독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하이델베르그대학은 1386년에 설립되어 지금까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설립자인 선제후 루프레흐트 1세와 이곳을 최초의 바덴 주립대학으로 만든 카를 프리드리히의 이름을 따서 '루프레흐트-카를 대학'이라고도 부른다. 하이델베르그대학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하이델베르그대학 신학부 역시 세계의 신학을 주도하며 명성을 떨쳐왔다. 또한 게르하르트 폰 라드, 군터 보른캄 등 세계적인 신학자들이 하이델베르그에서 교수로 활동해 왔다.
현재 독일 대학의 신학부들은 수준이 거의 평준화되어 있는 상태. 또한 우리나라나 미국의 신학대학과는 달리 교단이 아닌 국가가 대학을 지원하기 때문에 교단에 따라 진보 혹은 보수적인 성향을 띠는 따위의 일은 없다. 그래서 대다수 독일의 신학대학은 학교별로 특징적인 학풍을 말하기 어렵다고 한다. 학교가 아니라 교수에 따라 학교의 학풍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이델베르그 신학부도 마찬가지.
그러나 하이델베르그 신학부 출신들은 하이델베르그가 다른 어떤 대학보다도 다양한 테마를 다양하게 배울 수 있는 학문의 전당이라고 말한다. 아주 보수적인 신학부터 아주 진보적인 신학까지 여러가지 색깔이 공존한다는 얘기. 하지만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상대방을 폄하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없다고 한다. 서로 다른 신학의 색깔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어울려 열린 마음으로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하이델베르그인 것이다.
하이델베르그대학 신학부는 지금까지 정통 독일신학의 맥을 이어왔다. 시대나 유행에 현혹되지 않고 신학의 본질적인 면을 꾸준히 탐구해 온 것. 그래서 어느 시대 어떤 신학이 유행(?)했다고 말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1970년대 하이델베르그에서 박사학위를 한 성공회대 손규태 교수는 "하이델베르그의 신학을 시대별로 특징짓기란 매우 어렵다"면서 "굳이 따지자면 60년대에는 역사로서의 계시에 대해, 70년대에는 타이센을 위시한 성서의 사회경제사적 해석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같다"고 전했다. 80년대 하이델베르그에서 공부한 한 채수일 교수 역시 "하이델베르그 신학은 거의 변함이 없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신학과 경제문제를 논하는 경제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선교신학이 붐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말했다. 1지난 2000년 하이델베르그에서 학위를 받은 임홍빈 박사는 "하이델베르그는 최근에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신학에 관심을 갖는 것 같다"면서 "또한 봉사신학부를 따로 두고 있을 만큼 봉사신학에 대해 열정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손규태 교수는 "하이델베르그는 과거 유럽(독일)의 테두리 안에서 신학을 탐구했지만 지금은 선교신학, 에큐메니칼 신학 등을 통해 제3세계와도 학문적 교류를 하고 있다"며 "타문화, 타종교에 대해서도 점점 더 문호를 개방하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신학자 가운데 하이델베르그 신학부에서 가장 먼저 신학박사 학위를 한 사람은 우리나라 민중신학의 기틀을 마련한 안병무 박사이다. 안병무 박사는 1960년대 독일에서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을 연구했으며 이를 토대로 한국에 돌아와서 민중과 민족의 실존에 대해 가르쳤다.
안박사의 뒤를 이어 1970년대 김영한(1974 기독교철학, 훗셀과 나토르프-훗셀의 현상학과 나토르프의 신칸트 이론에 있어서 철학의 최후 정초 문제학에 대하여·현 숭실대 교수) 손규태(기독교윤리·현 성공회대 교수)가 하이델베르그에서 수학했다. 1980년대는 김광채(1989 어거스틴의 정의관) 등이 공부했다. 하이델베르그 출신 국내 신학박사들이 급격히 증가한 것은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채수일(1991 선교학·현 한신대 교수), 권호덕(1991 조직신학, 종교개혁신학 특히 칼빈의 신학을 수용한 에르와르 뵐·현 천안대 교수), 이광진(1994 신약학·현 목원대 교수), 고덕신(1995) 구순자(1996 쉘링의 자유론에 나타난 신론과 그 신론에 대한 틸리히의 수용), 이후천(1996 선교신학, 아시아의 문화토팍화신학: 한국의 감리교 신학자들, 대만의 송천성 그리고 스리랑카의 알로이시우스 피어리스에 있어서 문화토팍화 이해·현 협성대 교수), 임걸(1996 하나님의 말씀, 선동와 교회-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신학의 조직신학적 기초들), 강성영(1997 기독교윤리, 현실, 신앙과 삶-세계 속의 하나님의 현실과 비종교적 해석의 윤리적 의미와 상관성), 노태성(1997 공관복음의 하나님의 가족사랑: 원시 기독교의 한상영역에 관한 편집사적, 사회사적 연구), 신준호(1997), 한국일(1997 선교신학, 독일어권의 선교신학에 있어서 선교와 문화·현 김옥순(1998 봉사신학, 디아코니아신학의 교회론적 사회-정치적 단초들이 한국장로교회에 주는 의미), 박찬웅(1998 요세프루스와 누가에 나타난 세례 요한상과 나사렛 예수상에 관한 사회사적-편집비평적 비교연구), 이승렬(1999 봉사신학, 한국개신교 사회봉사의 역사와 그 사회봉사적 사역의 갱신에 대한 전망) 등이 90년대 학위를 받았다.
또한 김동춘(2000 구원의 프로그램으로서 Gemeinschaft-Gemeinschaft 개념의 축면에서 본 위르겐 몰트만의 삼위일체적, 생태적 구원이해), 김윤규(2000 한국과 요한 크리스토프 블륨하르트에게서의 영성, 한국 개신교회를 위한 지침들), 임홍빈(2000·현 한신대 강사), 박정수(2001 죄용서-그 종교적, 사회적 차원), 송강호(2001 인류공동체를 위한 회심: 다문화권 사회속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전제로서의 변혁적 학습) 등이 가장 최근 신학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다.
하이델베르그대학 신학부는
1386년 대학의 설립과 함께 시작된 신학부는 하이델베르그의 가장 핵심적인 학과였다. 이는 중세대학들이 신앙과 정경에 그 근본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이델베르그 신학부의 최초 강의는 성서해석과 조직신학으로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하이델베르그는 초기부터 신학부가 학생들의 신앙고백을 실행하는 장소가 아니라 건전하고 합리적인 학문적 바탕을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곳임을 분명히했다.
마틴 루터와 필립 멜란체톤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하이델베르그대학 전체, 특히 신학부를 재정비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하이델베르그 신학부의 초점은 성서해석에 맞춰져있다.
이후 하이델베르그 신학부는 엘렉토르 칼 프리드리히, 리차드 로테, 에른스트 트뢸치, 바르틴 디벨리우스, 게르하르트 폰 라드, 군터 보른캄, 한스 폰 캄펜하우젠, 빌헴름 한 등을 위시로 세계신학을 주도하게 된다.
오늘날 하이델베르그의 신학은 성서신학, 역사적·에큐메니칼적 그리고 사회적 목회연구 그리고 종교철학에서의 연구가 주요 관심사로 등장하고 있다. 현재 하이델베르그 신학부에는 1000명의 학생이 재학중에 있으며 이들 중 대다수가 개신교 신학부 학생들이다. 카톨릭 신학부는 매우 미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학부에 재학중인 한국학생은 30~40명 정도. 하이델베르그는 원래 학생들에게 학비를 받지 않지만 최근 15학기째부터는 학비를 받는 것으로 체제를 바꾸었다고 한다.
<한국신학의 학맥을 찾아서(6) - 스위스 바젤 대학교>
이혜자 기자
동양전통과의 만남, 기독교 사회주의가 학문의 기저
독일 남부 푸라이부르그 지역과 프랑스 엘사스 지역에 인접해 있는 바젤대학은 스위스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1460년에 창립된 바젤대학은 초창기의 유럽대학들처럼 신학부로 출발했지만 후에 종합대학으로 성장했다.
바젤시는 역사적으로 볼 때 휴머니즘 정신을 바탕으로 학문 및 종교정책을 수립해왔다. 루터의 종교개혁 영향으로 1592년 바젤에서도 개혁운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칼빈이 활동하던 제네바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신정국가를 꿈꾸며 자신의 신학적 입장과 견해를 달리하는 동료들을 처형하고 있을 때 바젤시는 이를 피해 도망했던 학자들, 특히 에라스무스와 같은 인본주의적 개혁사상가들의 은닉처가 되어 준 곳.
뿐만 아니라 바젤은 19세기 당시 교회의 냉담한 반응 속에서 자연주의적 교육이념을 펼쳤던 페스탈로찌를 재정적으로 지원했으며 서구 기독교를 향해 신의 죽음을 선포한 니체에게 강의를 허락할 만큼 포용력있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2차 세계대전 도중 나치의 횡포를 피해 망명한 칼 바르트와 칼 야스퍼스라는 두 극단의 사상가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여건을 마련대 주기도 했다.
바젤의 이러한 휴머니즘 전통은 바젤대학 신학부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바젤대학은 유럽대학의 여느 신학부와 다르게 기독교와 불교, 기독교와 힌두교 등 동양전통과의 학문적 만남은 물론 기독교 사회주의와 맑스주의간의 실천적 대화를 주된 학문의 기저로 삼고 있다. 이와 관련 우리나라 신학자들 중 감리교 계통의 변선환 윤성범 신옥희 김광식 이은선 김승철 정지련 박사 등은 동양전통과 기독교의 만남을 주제로 학위논문을 썼으며 기장의 오영석 정권모 김원배 박사 등은 기독교 사회주의를 주제로 학위논문을 썼다.
바젤대학 신학부의 전성기는 야스퍼스와 함께 강의했던 신전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로부터 비롯됐다고 평가된다. 이후 바젤대학 신학부는 조직신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대학으로 알려지게 됐다.
한편 바젤대학은 바르트가 활동하던 1950년대부터 베른학파에 속해있는 자유주의 신학자 프릿츠 부리에게 강의하도록 했다고 한다. 바르트와 부리는 서로 상반된 견해를 가진 신학자들이었지만 바르트 계열의 정통주의 신학노선이 신학부 전체를 획일화시키는 현상을 우려하면서 의도적으로 그와 맞설 수 있는 자유주의 신학자 부리를 불러왔던 것. 바르트 사후 바젤의 조직신학은 프릿츠 부리, 하인리히 오트, 로호만 등에 의해 주도됐다. 조직신학 분야 외에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신학 내의 학문 분과로는 성서신학과 교회사 그리고 실천신학을 들 수 있다.
현재 바젤대학 신학부는 약 200여 명의 신학생들이 재학하고 있는데 독일에서 온 학생들도 30~40명에 이른다. 한국·일본 등 아시아권에서 온 학생들은 많진 않지만 꾸준히 수학하고 있는데 이는 바젤대학이 동양의 종교 및 문화적 전통에 높은 평가를 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바젤에서 수학한 국내 신학자로 대표적인 인물은 전 감신대 학장이었던 변선환 박사. 국내 신학계에 종교다원주의 논쟁을 일으켰던 변선환 박사는 1976년 '선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의 관점에서 본 그리스도의 궁극성'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받았다.
이 밖에 김광식(1974 조직신학, 사람다움으로 나타나신 하느님: 하느님 신앙과 기독교적 신관의 만남·현 협성대 총장), 김승철(1989 역사신학, 무의 희망: 지눌과의 대화로 본 파울 슈쯔의 종말론·현 경성대 교수), 김원배(1991 하나님의 혁명과 민중-민중신학의 삶의자리와 그 전거·현 기장 총회교육원 원장), 김중은(구약학·현 장신대 교수), 박숭인(2000 상황신학과 해석학), 신옥희(1976 원효와 칼 야스퍼스의 신앙이해와 한국 기독교 신앙에 대한 그의 의의), 오영석(1983 조직신학·현 한신대 총장), 유광웅 (1984), 이원재(1994 칼 야스퍼스에 있어서의 초월자 체험과 최수운에 있어서의 신체험), 이은선(1988 페스탈로찌와 왕 양명의 인간교육에 있어서의 종교적·철학적 근거-그들의 인간론과 교육론을 바탕으로 한 윤리학의 기초설정을 위한 시도·현 세종대 교수), 이정배(1986 조직신학·현 감신대 교수) 임희국(1994 교회사, 블룸하르트의 생애와 신학에 나타난 예수승리:우주론적 기독론의 씨앗·현 장신대 교수), 정미현(1995 바르트와 로마드카의 계사와 역사이해 연구), 정승훈(1992 칼 바르트와 헤겔좌파) 등도 바젤에서 수학한 학자들이다.
<한국신학의 학맥을 찾아서(7) - 도시샤 대학 신학부>
기독교 정신과 국제주의에 입각한 자유스러운 학풍
일본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샤대학 신학부는 1875년 대학의 설립과 함께 시작됐다. 동지사(同志社)대학으로도 불리는 있는 도시샤대학은 일반인들에게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인 윤동주와 정지용이 나온 학교로 잘 알려져 있다.
도시샤대학은 해방을 전후로 상당수의 한국인이 유학했던 학교. 특히 신학부 출신이 많아 해방 이후 한국교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해방 전에는 정대위 윤성덤 김태묵 서남동 등이 도시샤대학 신학부에서 수학했으며 해방 후에는 강근환 기원형 김호식 박영배 김영일 김수진 반병섭 노홍섭 김병순 등이 수학했다.
도시샤대학 신학부는 전반적으로 진보적 색채를 띠고 있다고 한다. 이는 도시샤대학이 일본조합교회의 영향 아래 설립된 학교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일본조합교회는 전통적으로 좌파 성향이 강했던 교단. 그러나 1942년 일본 개신교파가 '일본기독교단'으로 통합된 이후로 각 대학의 신학적 차별이 없어졌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일부 교단 환원주의자들은 일본기독교회(장로교), 감리교 등 소수 교단을 만들어 나갔고 교단 신학교도 세웠다. 현재 일본기독교단에 속해있는 대학은 도시샤대학 신학부와 동경신학대학 두 곳이다.
도시샤대학은 종합대학이지만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학교인 만큼 지금도 신학부가 중심적인 학부 구실을 하고 있다. 도시샤대학 신학부는 전통적으로 역사신학이 강하며 그런 이유로 조직신학도 역사신학으로 분류되고 있다고 한다.
도시샤대학 신학부가 한국 신학계의 주목을 받는 것은 국내에 민중신학과 토착화 신학의 문을 연 양대 신학자, 서남동과 윤성범이 공부한 곳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죽재 서남동은 1936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세 나이에 도시샤대학 문학부 예과를 1년 수료한 후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쌓았다. 도시샤에서의 신학공부는 서남동에게 있어 신학의 시발점이 되었다. 1941년 신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한 뒤 서남동은 한국신학대학(한신대학교의 전신), 연세대학교 신학과 교수 등을 지내며 독자적 신학노선을 구축, '민중신학'을 창출하여 한국은 물론 제3세계 신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1941년 도시샤대학 신학부를 졸업한 해천 윤성범 목사는 신학의 토착화와 한국적 신학을 주창한 인물. 바르트의 제자이기도 했던 윤목사는 단군신화 논쟁(1963), 유교의 진리체계와 접목시킨 '성(誠)의 신학' 논쟁(1973)을 불러일으키는 등 기독교와 한국사상과의 만남을 통해 한국적 신학을 정립하려고 노력했다. 1977년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장에 취임한 그는 국내 유교·불교 학자들과도 폭넓은 교유를 가지며 국제 종교사회학에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국내 신학자 중 도시샤대학 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최초로 받은 사람은 현 서울장신대 총장인 민경배 박사다. 민총장은 1984년 '한국에 있어서의 씨족주의 운동과 기독교회의 상호작용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신학박사를 받았다.
민경배 총장 이전에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지낸 고 이국선 목사도 1969년 도시샤대학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또한 1974년부터 86년까지 향린교회 당회장, 91년까지 경동교회 당회장, 2000년까지 예닮교회 당회장을 지낸 바 있는 김호식 목사도 1972년 도시샤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한 인물.
도시샤대학 신학부에서 수학한 국내 기독교 역사학자로는 강근환(서울신대 명예총장), 민경배, 서정민 교수(연세대) 등을 꼽을 수 있으며 교회사 야사가로 유명한 김호진 박사도 도시샤에서 수학했다. 조직신학 분야에서는 현 안양대 교수인 조재국 교수가 1995년 '한국의 민중종교와 기독교'를 주제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신학부는 아니지만 서울여대 총장이었던 고황경 박사와 감리교여선교회전국연합회 회장이었던 김옥라 박사도 도시샤대학 출신이다.
도시샤대학은
도시샤대학은 1875년 전도사이자 교육자였던 니지마 조'新島襄: 1843∼1890'가 세운 도시샤에이학교'同志社英學校'가 전신이다. 설립 당시의 교사는 니지마 조와 미국인 선교사 제임스 D.데이비스(James D. Davis) 2명이었으며, 학생은 8명이었다. 1904년 도시샤전문학교로 교명을 바꾸었고, 1912년 '전문학교령'에 따라 도시샤대학이 되어 신학부와 영문과·정치경제부를 개설하였다. 1920년 '대학령'에 따라 대학이 되었다가, 제2차세계대전 뒤인 1948년 교육제도 개편에 따라 새로운 체제의 대학이 되었다.
현재 신학부·문학부·법학부·경제학부·상학부·공학부의 6개 학부와 6개 연구과를 둔 대학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속도서관에는 184만여 권의 각종 도서가 소장되어 있으며, 부설시설로는 언어문화교육연구센터·이공학연구소·아메리카연구소·인문과학연구소·학술정보센터 등이 있다. 기독교 교육시설로는 기독교문화센터가 있으며 선각자의 사상이나 지식을 배우는 채플시간, 공개강좌, 채플콘서트 등을 정기적으로 개최한다.
대학 재학생은 2만 2636명(남학생 1만 5348명, 여학생 7,288명)이고, 대학원 재학생은 2,014명(남학생 1,421명, 여학생 593명), 교수는 450명(조교수 및 강사 포함), 교수 1인당 학생 수는 50명이다. 현재 신학부에 재학하고 있는 한국학생은 10여 명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에서도 출원할 수 있다는 점, 학부·대학원 모두 특별학생(이수한 과목의 학점은 정규 학생에게 졸업(수료)학점으로도 인정된다)제도를 두고 있다는 점이 도시샤대학의 특징이다. 현재 외국인 유학생 과목으로 일본어, 일본사정을 설치하는 등 유학생 유치체제를 정비하고 있다. 또 유학생이 경제적으로도 안심하고 면학에 힘쓸 수 있도록 다양한 장학금제도를 마련하고 있는데 정규학생에 대해서는 수업료 30%를 감면하고 있다.
기독교 정신과 국제주의에 입각한 자유스러운 학풍 속에서 많은 인재를 길러낸 대학으로 유명하며, 특히 윤동주가 이 대학 영문과에 재학중 사상범으로 몰려 옥사한 바 있다. 교토 시내에 있는 메인 캠퍼스 교타나베'京田邊' 캠퍼스 외에 교토부 이마데가와시'今出川市'에 이마데가와 캠퍼스가 있다. 도시샤여자대학과 도시샤중·고등학교 및 유치원과 함께 종합학원 도시샤를 구성하고 있다. 이마데가와 캠퍼스 내에는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건립되어 있다.
<한국신학의 학맥을 찾아서(8) - 미국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
출처: 목회와 신학 93년 3월호
필자: 박용규 (현 총신대 신대원 역사신학 교수)
약력:
성균관대학교(학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Western Evangelical Seminaryl(M.A.)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Th.M.)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Ph.D.)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 -복음주의운동의 산 역사
유학을 계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서로만 접하던 세계적인 석학들 밑에서 그들의 지도를 받으며 연구하고 싶은 생각을 한번쯤은 하게 된다. 필자가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를 유학 대상 학교로 선정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
필자는 세계적인 석학들의 집산지라고 할 수 있는 이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에 대하여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돌아보면 교육의 강도가 높고 힘들기 때문에 몰래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유학시절을 회고할 때마다 거친 형상을 다듬어 준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와 그런 기회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거친 형상 다듬어준 신학교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유학의 길에 오른 것이 1985년 9월이었다. 처음 1년 동안은 포틀랜드에 있는 웨스턴 복음주의 신학교(Western Evangelical Seminary)에서 석사(M.A.)과정을 마쳤다. 그뒤 1991년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약6년을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신학석사(Th.M)와 박사(Ph.D.)학위 과정을 공부하였다. 필자가 이 학교에서 받은 인상은 모두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고무적이다. 이 학교의 가장 두드러진 장점은 복음주의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과 세계적인 석학의 집산지, 그리고 학문과 경건의 이상적인 조화를 추구한다는 사실이다. 그 가운데서도학문성, 경건성, 그리고 복음주의 신앙이라는 세가지 교육 이상은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를 세계적인 신학교로 만든 요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리노이주 디어필드시에 자리잡고 있는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는 장로교, 침례교, 복음주의 자유교회를 비롯, 각 교파를 초월하여 세계 30여개국이 넘는 곳에서 온 1400여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1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신학교육의 장이다. 교단적으로는 복음주의 자유교회(Evangelical Free Church)에 속해 있지만 교단적인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이 학교에는 석사과정으로 M. R. E., M.A. R,M.A, M.Div, Th.M프로그램이, 박사과정으로 Ed.D, D.Miss., D.Min., Ph.D. 프로그램이 있다.
복음주의 운동의 선구자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가 추구하는 신학적 입장은 복음주의이다. 복음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의미는 매우 다르게 사용될 수 있지만, 20세기 근본주의 운동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하나의 기독교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할 때, 휘튼이나 골든 코넬과 같은 학교와 함께 복음주의 운동에서 선구적인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는 근본주의 운동의 쇠퇴 이후인 1940년 이후 새롭게 발흥하기시작한 복음주의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학교 대부분의 교수들은 복음주의 신학을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으로 인식하며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 복음동지회 (NAE), 그리고 국제성경무오협회(ICBI)를 비롯한 복음주의 운동의 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헨리(Carl Henry) 박사나 캔저(Kenneth S. Kantzer) 박사 역시 여기에 몸담고 있거나 관련을 맺으면서 복음주의 이상을 신학교를 통하여 구현하려고 노력하고있다. 1989년에는 NAE의 후원 아래 "복음주의 선언(Evangelical Affirmation)"이 이곳에서 열려 다양해진 복음주의 운동과 신학을 새롭게 논의하였다.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는 역사적 복음주의 유산을 재발견하여 현대기독교사회에 보존, 적용, 확산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는 각 학과 교수진이 세계적인 학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구약신학분야에 월터 카이저(Walter kaiser), 토마스 맥코미스키 (Thomas McComiskey), 글리슨 아처(Gleason Archer)가 있고, 신약분야에는 더글라스 무(Douglas Moo), 카슨(D.A. Carson), 해리스(Harris)가 있다. 조직신학에 브라운(Brown), 캔저(Kantzer), 카메론(Cameron), 그리고 필자가 공부한 교회사분야에는 우드브리지(Woodbridge)가 있다. 학교 분야와 기독교 교육 분야에서도 교수진은 훌륭하다.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를 지원하는 학생들의 대부분은 교수들의 명성(Faculty Reputation)과 학구적 명성(Academic Reputation)을 으뜸으로 꼽고 있다. 자신들의 저술을 통하여 이미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에 학문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교수들이라 자신들이 가르치는 분야에 있어서 권위는 대단하다. 훌륭한 선생이 훌륭한 학생을 만든다는 것이 동서고금을 통해 하나의 역사적 진리이듯, 이 학교 교수들은 자신들이 엄격하면서 조직적인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도 그 수준의 노력을 요구한다.
필자가 박사과정(Ph.D.)을 밟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필자는 이미 영어를 외국어로 하고 있기 때문에 박사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독어나 불어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는 외국어 시험을 면제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 박사위원회는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거부당할 당시에는 외국 학생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하지 않은 것이 무척 섭섭하였으나 지금 돌이켜보면 감사할 따름이다. 이렇듯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키고, 그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기 때문에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
강요 않는 채플, 가득찬 예배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는 타문학과의 연계성(integrelation)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박사(Ph.D.)과정의 경우에는 어떤 분야를 전공하던 의무적으로 타분야의 박사(Ph.D.)과정 세미나를 4과목 이상 들어야 한다. 필자는 전공이 역사신학이었지만 성서신학 분야의 과목을 두 과목, 조직신학 한 과목, 고급신학서론(Advanced Prolegomena)등 타전공 세미나 4과목을 필수로 이수해야만 했다. 사실 학생들이 초기에 불만을 갖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자신의 전공도 힘겨운데 타분야 전공을, 그것도박사과정의 세미나 네 과목을 필수로 이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과정을 마친 다음에 되돌아보면, 그런 과목들이 자신의 전공에 대한 시야를 넓혀주고 또한 자신의 전공을 이해하는데 직, 간접으로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는 학문성을 추구하면서도 기독교의 생명이랄 수 있는 경건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든 교수들은 자신들의 신학과 신앙을 삶 속에서 구현하기 위하여 무던히 노력한다. 교수들 모두가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대단하다. 스스로가 경건한 삶을 살면서 경건을 학교의교과과정이나 과목이수 등 외형적인 강압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것은 두가지 채널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데, 학교의 채플과 지도교수와의 모임(Advisor Group)이 바로 그것이다. 학교의 채플 참석은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지만 시간시간 예배는 학생들과 직원 교수들로 가득찬다. 그 시간에는 직원들이 채플에 참석하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대출도 금지된다. 채플의 주강사는 교수뿐만 아니라 저명한 기독교 지도자들로 구성된다. 제3세계지도자들에게도 강단을 개방시켜 그들의 메시지를 통하여 아시아나 동구 혹은 아프리카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학생들에게 제공한다. 채플 시간에는 예배뿐만 아니라 특별강의를 하기도 한다. 이것은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가 갖고 있는 강좌(Kenneth S. Kantzer Lecture) 같은 통로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칼 헨리(Car1 Henry), 팩커(Packer), 재퍼슨(Jefferson), 워터카이(Waterkie)같은 이들의 강연은 필자의 인상에 오래 남아있다. 이렇듯 채플은 예배의 장소이자 토론의 광장이고, 석학들과의 만남의 장이다.
박사과정의 어드바이저 미팅
채플과 항께 지도교수와의 모임(Advisor Group)은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의 경건 생활을 대변하여 주는 또 하나의 얼굴이다. 모든 학생들은 입학할 때부터 자신들의 지도교수가 지정되어 있어 졸업할 때까지 그 지도교수와 일주일에 한번씩 약 1시간 동안 모임을 갖는다. 그 시간은 특별한 형식이 없으며 학생들은 개인의 문제를 지도교수와 상담하기도 하고 다른 동료들의 문제를 함께 나누기도 하고 자신의 진로의 문제를 지도교수와 상담하기도 한다. 외국 학생들에게 이 시간은 황금 같은 시간이다. 강의 시간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지도교수와의 만남을 통하여 보완하여 간다. 필자는 신학석사(Th.M.)과정에서 우드브리지 박사와 박사(Ph.D.)과정에서는 캔저 박사와 주일마다 값진 시간을 가졌다. 어드바이저 미팅도 박사(Ph.D.)과정의 경우에는 특별하게 운영된다. 박사과정의 학생들은 자신의 전공과는 상관없이 철학박사 프로그램의 책임자와 모임을 가지며 여기에는 박사과정 학생들만 참여할 수 있다. 이 시간은 함께 교제를 나누는 현장이자 문제 해결의 장이기도 하다. 매학기초에 한번씩 갖는 기도의 날(prayer Day)은 모든 학생들이 지도교수의 집에 초대 받아 점심식사를 함께 나누며 그곳에서 모임을 갖는다. 필자가 이곳에서 가장 감사했던 시간 중의하나가 바로 지도교수와 가졌던 어드바이저 미팅이었다. 우드브리지 박사와 캔저의 집에서 목격한 그들의 실존의 현장은 강의시간에 받은 인상만큼이나 강렬하였다. 그것은 일종의 도전이었다."복음적이며 학문적일 수 있느냐"의 모델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가 추구하는 신학교육의 이상 가운데 또 하나는 역사적 복음주의신앙의 계승과 발전이다. 성경의 권위를 비롯하여 역사적 복음주의의 유산을 발굴하여 이어나가려는 노력이다. 이런 복음주의 유산에 대한 입장은 신앙고백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신앙고백 제1항에는 "우리는 신구약 성경이 영감으로 기록된 원본상에 오류가 없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의 완전한 계시이며 모든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에 대한 신적 및 최종적 권위임을 믿는다"라고 되어 있다. 2항부터 12항까지에는 삼위일체, 동정녀 탄생, 대속의 속죄, 육체적 부활, 그리고 육체적 인격적 재림에 대한고백이 담겨져 있다. 모든 교수들은 전공을 불문하고 역사적 복음주의 신앙에 대한 확고한 고백이 있어야 하며 그것을 신학교육의 현장에서 구현하여야 한다는 투철한 사명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때문에 칼빈과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의 종교개혁 유산이 소중이 다루어지고 있으며 유럽과 미국의복음주의 유산을 현대적인 상황 속에서 현실과의 연계성을 고려하면서 연구되고 있다. 칼빈의 유산만 다루려고 하지는 않는다. 루터나 웨슬리 그리고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드 같은 이들의 복음주의 유산도 소중히 간직하려는 모습이 두드러진다. 트리니티는 복음적이며 학문적일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모렐 가운데 하나인 듯하다.
칼빈과 청교도 신앙을 체계화시킨 개혁주의자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의 유산과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발전시킨 개혁주의의 신학은 이 학교 교수들의 논문, 저술, 그리고 강의를 통하여 미국 기독교에 값진 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교수들이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성경 무오협회(ICBI)의 성경관의 입장, 1989년의 "복음주의선언", 그리고 교수들이 출판한 일련의 서적들은 이를 반영하여 준다. 19세기의 구 프린스톤의 신학을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려는 지난 20여년의 움직임은 그들이 얼마나 미국의 역사적 복음주의 유산을 소중히 간직하려고 하는가를 말해준다. 이처럼 복음주의 신앙에 기초한 교리적 건전성(doctrinal soundness)은 트리니티가 추구하는 신학교육의 이상이지만 이것을 이데올로기화 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사회적인 책임을 통하여 복음을 현실에 구현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함께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안고 있는 어두운 면들, 이를테면 낙태나 마약의 문제, 도시문제 등을 복음주의 유산 속에서 평가하려는 노력도 상당히 찾아볼 수 있다. 헤럴드 브라운(Herold Brown) 교수 같은 이들은 기독교 윤리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신학과 현장을 연결시키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 강조
기독교인의 사회적인 책임에 대한 강조는 일찍이 미국의 개척시대부터 시작된다. 철저한 복음적 신앙에 기초한 청교도들의 사회관과 국가관은 미국 역사의 일부분이 되었다. 이런 기독교인의 사회적인 책임이 신학교육의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구현되고 있는 것도 역사적 복음주의 신앙을 계승하려는 트리니티의 신학적 이상이다. 컨텍스트를 도외시한 신학교육은 생명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고 영향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시카고의 위성 도시 가운데 나인 디어필드에 자리잡고 있는 학교는 바로 대륙을 잇는 고속도로 I-94번과 294번을 옆에 끼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오헤어 국제공항까지는 25분의 거리이며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미시간 호수를 접할 수 있다. 한폭의 그림을 연상할 만큼 아름다운 캠퍼스 경관에 위치한 도서관과 하나하나의 교육시설은 자연스럽게 공부할 수 있는 의욕을 고취시켜준다. 또한 캠퍼스 안에 아파트가 있어 부부가 함께 생활하면서 공부할 수 있다. 아파트는 외국 유학생이 먼저 입주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주변의 아파트에 견주어 학교 아파트의 월세가 싼 편이기 때문에 외국 유학생들은 학교 아파트를 이용한다. 시카고에는 약 12만의 한인들이 살고 있으며 한인교회만도 200여 교회가 넘는다. 이민사회는 다양한 교파를 관용하는 편이기 때문에 유학생들은 교회를 선정하여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이 경우 경제적으로 상당한 도움이 된다. 학교에서도 일할 수 있으며 최근에는 유학생이 주 20시간 범위 안에서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유학생에게 기회를 열어주었다. 학교에는 장학금 혜택이 있지만 요즘은 한국의 유학생들에게는 장학금 수여를 제한하고 있다고 한다. 필자가 공부할 때만 해도 수업료 반액에 해당하는 장학금을 받았으나 지금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국가 등 저개발 국가들에서 온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로 주는 경향이라고 한다. 그러나 제한적이지만 필요한 경우 한국학생들도 학교에서 장학금(Financial Aid)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열려 있다.
어학, 추천서, 학교 성적으로 평가
대부분의 미국 신학교가 그렇듯이 외국 학생의 경우, 본국에서 목회학석사(M.Div.)나 다른 석사과정을 마치고 트리니티에서는 더 높은 학위 과정을 하기를 원한다. 본국의 신학교에서 목회학석사(M.Div.) 과정을 마쳤으면 보통신학석사(Th.M.)과정으로 입학한다. 이경우 세가지를 매우 중요하게 평가한다. 첫째는 어학실력이다. 신학석사(Th.M.) 경우에 토플 성적은 최소한 600점을 요구한다. 학문적인 수준이 높고 외국학생 이라고 배려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학교 수업을 충실히 받을 수 있는 어학실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둘째는 추천서이다. 추천서의 경우는 신뢰할 만하여야하며 지도교수를 포함한 세명의 추천서가 필요하다. 셋째는 학교성적이다. 외국학생이 지원할 경우 그 학생을 객관적으로 공평하게 평가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학교성적(G.p.4)이다. 신학석사(Th.M.)을 지원할 경우 목회학석사(M.Div)과정의 성적을 중요하게 평가하며 대학의 학교 성적을 2차적으로 참고한다. 대학성적이 우수하다고 하더라도 목회학석사(M.Div.)과정의 성적이 좋지 않다면 입학사정에 불리하다. 박사(Ph.D.)과정의 경우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제3세계 학생이 본국에서 신학석사(Th.M.)과정을 마쳤다고 해도 직접 지원하여 입학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무리 탁월한 학생이라고 하더라도 석사과정을 먼저 하기를 요구한다. 이 경우에 보통 신학석사(Th.M.)과정을 추천하는 경우가 많다. 이 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쿼터제로8학점을 이수하여 평균 B학점 이상을 받아야 하고, 논문 혹은 두개의 짧은 연구논문(research paper)을 지도교수 지도 아래 써서 통과하여야한다. 그리고 전공종합시험에 합격하여야한다.
같은 학교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철학박사(Ph.D.)학위과정의 경우는 신학석사(Th.M.)보다 입학심사가 더욱 엄격하다. 신학석사의 성적이 4.0만점에 3.5이상 이어야하고 토플성적과 GRE, 그리고 담당 지도교수로부터 추천서가 있어야 한다. 만일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석사과정을 하거나 마친 학생의 경우라면 직접 사사 받은 이 학교 교수로부터 추천서를 받을 경우 타 학교 학생이 지원하는 경우보다 다소 유리한 경우가 있다. 때문에 트리니티에서 박사학위를 하려고 계획한 학생들은 그곳에서 석사학위를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먼저 박사(Ph.D.)과정에 입학한 학생은 두개의 외국어(히브리어와 헬라어제외) 시험을 통과하여야 하며 논문과 직접 관계되어야 하는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어와 독어를 요구한다. 그리고 두개의 종합시험을 통과하여야 한다. 첫번째 시행하는 시험은 자격시험(qualifying)으로 박사(Ph.D.)과정을 계속 이수하기 위하여 거쳐야 할 과정이며 성서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등 필수과목에 대한 시험을 담당 교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구두로 치른다. 두번째 시험은 학점을 다 이수하고 논문을 쓰기 전에 치르는 전공종합시험으로 필기시험과 구두시험 두가지로 구성되며 필기시험에 합격한 사람에 한하여 구두시험을 치르게 된다. 이 모든 것을 통과한 다음에야 비로소 논문을 쓰기 위한 논문계획서를 제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이 소요된다. 과정을 이수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학생들과 과정이 힘들어 좀더 쉬운 과정으로 전환하는 학생들의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수한 사람이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자질을 갖추게 된다. 조각가가 거친 대리석을 갖다 수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모난 부분들을 다듬어 하나의 작품을 만들듯이,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의 교육과정을 통하여 거친 돌덩이에서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한국신학의 학맥을 찾아서(9) - 미국 뉴욕 유니온 신학교>
출처: 목회와신학 93년 8월호
필자: 김민웅/ 미국 길벗교회 목사
약력: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외과 (학부)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외과 (대학원)
델라웨어대학 정치학 박사과정(정치철학)
뉴욕 유니온 신학대 기독교 윤리학 박사
현 미국 뉴저지 소재 길벗교회 담임목사
뉴욕 유니온 신학교
-자유와 해방의 신학, 그 열정의 현장
유니온 신학교 풍경스케치
할렘가의 진입로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스트리트와 세 블럭을 두고 밑으로 뻗어 있는 브로드웨이 122가(2년 전 '라인흘드 니이버 스트리트'로 명명 ), 그리고 흡사 정원같은 아름다움 때문에 별칭 '가든 스테이트(Garden State) '라고 불리우는 뉴저지주를 한쪽 허리에 낀 채 흐르는 허드슨 강, 바로 그사이에 자리잡은 아담한 고딕건물, 뉴욕 맨하탄이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는 다양한 문화적 매력과 도시적 움직임이 뿜어내는 활력을 호흡하면서 자유의 정신을 만끽할 수 있는 신학실험의 현장. 인종적 복합성의 현실을 매일 경험하는 가운데 규모있는 세계적 시야의 신학을 향해 아무런 제약없이 가슴을 활짝 열수 있는 자리. 유니온 신학교는 우선 이러한 분위기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신학도의 영혼을 강렬하게 사로잡는다.
유니온 신학교의 바로 뒤 클레어몬트 애버뉴에는 미국현대사속에서 진보적 인 기독교사회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리버 사이드 처치 '가 한블럭 전체에 이르는 크기로 우뚝 서있다. 이 교회는 60년대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맥을 이어오면서 유니온 신학교의 신학적 풍토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현재 이 교회의 담임목회자는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설교자이자, 얼마전까지 유니온 신학교의 설교학 교수를 역임한 바 있는 흑인 목사 제임스 포브스이다. 그는 진보적 신학정신의 예리함과 복음주의적 설교의 영적 감동을 상호모순 없이 치밀하게 엮어내는 능력을 가진 인물로서 오늘의 교회강단이 추구해야 하는 설교의 모델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 '리버 사이드 처치' 맞은 편에는 미국 교단의 각종 본부와 사무실, 인권 단체 등이 빽빽하게 차 있는 '인터처치 센타'가 현대식 건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서는 미국교회의 주요한 움직임을 압축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분주함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리나라의 인권상황과 민주화,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이 가장 집중적으로 표출되는 현장이기도 하며 미국의 국내 및 국제정치에 대한 영향력이 만만치 않은 곳이라고 하겠다. 최근에는 이곳에서 미국교회협의회가 남북한 유엔대표부를 초청하여 정책질의와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중요한 국제기독교회의가 수시로 열리는 등 일종의 유엔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유니온 신학교와 가까운 인연으로 자연히 유니온 출신들이 이곳에서 상당수 활약하고 있다.
신학함의 의미를 묻는 곳
브로드웨이 건너편, 유니온 신학교 앞에는 그 엄격한 학문적 전통과 사상적 깊이를 자랑하는 '유대인 신학교(Jewish Theological Seminary)'가 있다. 이 학교는 유니온 신학교의 구약학 전공자들에게도 강좌를 개방하고 있어 성서해석학 비교연구에 관심있는 신학도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유니온 신학교 왼편에는 줄리아드 음악대학과 명문의 쌍벽을 이루는 「맨하탄 스쿨 오브 뮤직(Manhattan School of Music)」이 있어, 음악도들이 발랄함을 물씬 풍겨내고 있다. 국내에서는 음악도의 미국 유학하면 으레 줄리아드만을 떠올리지만 이 학교도 그에 못지 않은 수준의 국제적 명망을 지니고 있다. 이곳에서 울려나오는 악기 연습소리와, 악기를 들고 여기를 드나드는 학생들의 경쾌한 모습은 신학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예술적 영감의 세계를 자극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 학교와 대각선 방향으로 서 있는 '사범대학(Teachers' College)'은 미국 교육학의 산실이다. 이 학교는 유니온 신학교와 공동강좌 및 공동학위 프로그램을 개설, 기독교 교육학쪽으로 상호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연세대학 원주분교 교목 김영호 목사도 이 학교 출신으로서 유니온 신학교의 기독교 교육학 프로그램을 함께 수강하면서 학위를 마쳤다.
유니온 신학교의 주변 환경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육기관은 컬럼비아대학이다. 학기중에는 컬럼비아 대학의 학생들이 이 지역 주변을 그야말로 활기롭게 채운다. 대학촌만이 갖는 생기가 넘치는 곳이다. 사실 이곳에 있는 상가와 음식점, 그리고 책방들은 컬럼비아 대학생들을 주고객으로 하여 생활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니온 신학교는 컬럼비아 대학과 학점 교환제도가 있어서 일정한 학점 범위 내로 컬럼비아 대학의 강좌수강이 가능하다. 특히 사회과학과의 학문적 연관을 강조하는 학풍으로 해서 컬럼비아 대학의 강좌수강이 필요한 경우가 있으며, 두 학교 사이에도 공동학위 제도가 있다.
이밖에 여자 명문학교인 바나드 칼리지가 컬럼비아 맞은 편에 있으며, 115가와 116가 사이에 있는 서점 '바나드북스토아'는 각 분야의 신간서적을 연중 풍부하게 갖추어 놓음으로써 미국학계의 최신동향을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활력 그리고 폭넓은 교육적 환경과 함께, 혹인 빈촌 '할렘'이라는 미국의 사회적 모순이 압축된 곳이 바로 몇 블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음으로 해서 유니온 신학교는 신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하여 매우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미국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신학교가 자연의 풍치가 좋은 곳에 아늑하게 위치해 있는 반면, 유니온 신학교는 신학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미국 사회내부가 고뇌하고 있는 긴장의 경계선상에 위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에는 백인지배문화의 엘리트적 자존심이, 다른 한편에는 미국 내에서 제3세계적 존재인 흑인사회의 암울한 좌절이 깔려 있는 현실을 보고 경험하면서 '오늘의 현실과 세계 속에서 신학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끊임없이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유니온 신학교의 사회적 환경은 그 신학의 언어와 사고가 상아탑에 안주하는 소수의 신학자에게만 통용되는 현학적 관념과 애매모호한 추상성에 빠지지 않고, 구체적인 현실성과 실천의 세계를 추구하게 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학문적 훈련의 과정은 매우 혹독하다.
다양성과 현실성의 자리
1836년 세워진 유니온 신학교는 창설자들이' 충실한 학문, 진정한 경건성, 지성을 존중하는 체험(solid learning, true piety, and enlightened experience)'을 강조하였으며, 이 정신은 오늘에도 유니온 학풍의 기초가 되고 있다. 많은 경우 신학교가 현장 목회자 양성을 우선적인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 유니온은 그와 함께, 학문적 배경이 폭넓고 단단한 기독교 지식인 지도자를 육성하는 것에 일차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창립 이후의 전통으로 해서 그 학업량이 상당한 편이며, 유니온이 배출하는 인물들은 목회자만이 아니라 연극인, 영화제작자, 컴퓨터 프로그래머, 무용가, 언론인, 대학교수, 카운슬러, 정치인, 행정가, 사회운동가, 소설가, 잡지편집자, 심지어 코메디안(여기에는 설교용 조우크 북-joke book-작가도 포함된다. )등 각종 분야로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다. 말하자면, 신학교 입학은 당연히 목사가 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식의 고정관념이 없는 것이다.
애초에 장로교 교단의 공신도 가운데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인물들이 시작한 교단 신학교였음에도 처음부터 교단적 제한을 두지 않는 개방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으며, 당시의 최고 학문으로 사회적 인정을 받고 있던 대학과 의학교육의 수준에 못지 않은 전문교육을 한다는 데에 뜻을 두었다. 어느 무엇보다도 '학문의 자유'를 철저히 옹호하는 전통으로 말미암아 유니온은 1892년. 성서해석의 역사학적 비평론을 내세운 찰스 브릭스 교수에 대한장로교단의 이단 심판을 계기로 장로교단과 결별하게 된다. 이것은 유니온이 초교파 신학교로 새롭게 출발하는 전환점이었으며, 학문의 자유에 대한 전통을 다시 한번 뿌리깊게 다지는 사건이었다. 유니온은 당시 장로교 교단의 간섭과 정죄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신학의 후진성을 가져올 뿐이며, 성서에 대한 역사적 연구의 자유는 포기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이후 뛰어난 학문적 성과와 지도력을 겸비한 프랜시스 브라운 학장(1908∼16), 맥기퍼트(1917∼26) 학장 세대를 거치면서 유니온의 확고한 학풍을 형성하게 되었다.
머물고 간 거장들
1910년, 파크 애버뉴 70번가에서 부터 현재의 자리로 옮긴 유니온은 앞에서 언급한 주변환경과의 만남으로 학문의 다양성과 현실성을 보다 구체화하게 되었다. 30년대와 4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니온은 라인흘드 니이버와 폴틸리히라는 거장의 활동으로 미국과 세계신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특히 디트리히 본회퍼의 유니온 체류는 그의 신학적 현실참여를 유니온의 정신적 유산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 시기 이들의 활동에 전력의 지원을 하면 서유니온의 신학을 사회운동과 연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미국 현대 교회사에서 그 유명한 이름을 남긴 헨리 슬로안 코핀학장이 었다(1926∼45).
2차대전 이후 60년대 초반에 걸쳐 유니온은 밴 두첸 학장의 지도하에 에큐메니칼 운동에 깊은 관심을 쏟았으며 이것은 이후 제3세계의 현실과 신학에 눈을 뜨고 해방신학을 선도하게 하는 역사적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제3세계 출신 기독교 지식인들의 유학이 줄을 이었고, 유니온의 신학은 종교적, 문화적, 인종적 다원성의 환경을 두텁게 갖추게 되었다. 이 시기에 유니온에서 수학한 한국인들은 강원룡 목사, 서광선 이대교수, 현영학 전 이대교수, 박형규 목사 등으로 국내 기독교의 진보적인 흐름을 형성한 인물들이라고 하겠다. 유니온이 국내에 알려지게 된 시기도 이때이다. 그러나 국내의 분위기는 유니온의 신학을 신신학, 자유주의 신학, 성서의 영성을 인정하지 않는 신학이라고 규탄하면서 강한 반발감 내지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에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60년대말과 70년대에 유니온은 흑인신학, 해방신학의 물결을 타고 라인흘드 니이버나 폴 틸리히가 대변하다시피한 서구의 백인 진보신학의 한계를 타파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에 이어 여성신학의 소리가 점차 커지게 되었다. 제임스 콘의 흑인신학은 신학의 주제를 억압과 해방으로 압축시켰으며, 이와 접맥된 해방신학을 통해서 유니온의 신학조류는 제3세계 현실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미국과 국제정세를 바라보게 되었다. 이 시기에 한국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문동환 목사는 유니온에서 제임스 콘의 흑인신학을 연구하면서 민중신학의 교육학적 기초와 연관하는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70년대 중반에서부터 91년까지 학장을 맡은 도날드 슈라이버 교수는 대단한 활동가이자 특히 지한파로서 한국의 인권운동에 남다른 관심과 열정을 보였고 한국유학생들을 매우 잘 대해주었다. 그는 김대중 씨와도 꽤 친밀한 개인적인 연분을 가지고 있으며, 현 한완상 통일원장관이 5공화국 신군부세력에 의해 학교에서 물러나 미국에서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유니온 신학교에서 수학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줌으로써 한 장관이 이후 설교가로서 신학적인 깊이를 갖게 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제3세계 학생들과 여학생들의 비중이 현저히 높아졌고, 해방신학적 관점은 유니온의 학풍에서 기본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여성신학의 발전과 사회과학, 특히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져서 여타 신학교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마르크스주의 강좌가 개설되었다. 이 강좌를 맡았던 인물은 현재 프린스톤 대학의 흑인연구학과 과장으로 자리를 옮긴 코넬 웨스트이다. 그는 40대 초반의 학자로서 미국의 백인주류학계에서도 감탄해마지 않는 뛰어난 지식인이며, 그의 마르크스 강좌는 마르크스 고전에서부터 포스트 맑시즘에 이르는 폭넓은 것으로서 신학과 마르크스주의의 관계를 치밀하게 조명해 나간 명강의였다. 그가 프린스톤으로 간 후 마르크스주의 강좌는 진보적 학풍으로 이름난 '뉴 스쿨'과의 교환학점 제도를 통해서 보강하고 있다.
인간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여성신학의 경우 우선 유니온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포괄적 언어(inclusive language)'를 써야 한다는 원칙이 명확하다. 즉 인류를 대표하는 문법적 의미의 man, his 등의 남성명사와 소유격을 쓰는 것이 아니라 human과 his or her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가령 "Each one has his or her own viewpoint"와 같이 남성과 여성 모두를 포괄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언어사용에서부터 시작해서 여성들의 목소리와 대우가 남다르다. 예를 들어, 입학허가사정의 과정에서, 비슷하거나 거의 같은 조건의 경우 여성우선의 원칙을 따르는 형편이라 도리어 남학생들이 불이익을 보게 된다고 불평할 정도이다. 그러나 유니온은, 남성들이 이제껏 역사적으로 누려온 권리에 비하면 이것은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입장을 지키고 있다.
이와 함께, 유니온은 지금까지도 거의 대부분의 신학교에서 신학적 금기에 속하고 있는 '동성연애자(Homo-sexual)'의 문제를 과감히 신학적 주제로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유니온은 이 문제를 동성연애자에 대한 신앙적 정
죄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동성연애자들의 인권문제라는 차원에서 접근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동성연애가 성적 방종과 타락의 결과로 인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태적으로 주어진 어찌할 수 없는 생물학적 특징이라면 이들이 받고 있는 사회적 불이익과 차별은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생명의 자유에 대한 억압과 침해라는 것이 유니온의 신학적 견해이다. 이것은 또한 AIDS문제에 대한 신학적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문제는 사람의 생명을 겨냥하는 군사비에 대한 예산을 줄이는 대신, AIDS치료제 연구예산을 늘리고 개발치료제의 구입비용을 싸게 하라는 사회적 요구로 발전한다. 평화운동과 생명신학의 접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동성연애자들의 문제를 자유롭고 진지하게 다루어 나가는 분위기 속에서 유니온은 동성연애자 신학도의 수가 적지 않다. 이들은 오랫동안 여러 가지로 사회 적인 고통을 받아왔기에 정치 경제적 억압의 현실을 경험한 제3세계 출신의 유학생들에 대한 이해심이 깊고, 인간적으로도 그 내면의 성숙함이 돋보인다. 한국에서 갓 유학온 학생들의 경우 신학교라는 장에서 이들의 존재와 그 만남으로 처음에는 당황해하고 놀라지만, 이들이 보이는 인간적 깊이, 그리고 그 상처를 알고 난 뒤에는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인식이'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동성연애자의 문제는 해방신학과 함께, 유니온 신학교가 일반 기독교인들에게 오해와 편견을 받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동성연애를 조장하고 격려하는 신학이라는 식의 비난이다. 그러나, 유니온에서의 신학은 동성연애자들의 고통과 이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는 신학은 신학의 자격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80년대와 90년대 초기에 한국인 박사들이 여럿 배출되었다. 한신대학의 김이곤 교수(구약학)가 유니온 박사 한국인 1호이며, 그후 노정선 목사(기독교 윤리학/연대), 서창원 목사(조직신학/감신대), 이재훈 목사(실천신학/피어선 신학교), 정현경 교수(조직신학/이대), 구춘서 목사(조직신학/뉴욕 한인 중앙교회담임)로 이어졌다. 현재 유니온에서 박사학위과정에 있는 한국학생들은 모두 8명이며, 이들 대부분이 민중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의 관점에서 자신의 연구주제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교수들의 모양새
여기서 교수 진용을 일일히 들어서 소개하기보다는 몇몇 대표적인 교수들의 학문적 특징을 서술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유니온은 특히 라인흘드 니이버 이후 기독교 윤리학 분야가 미국신학계에 미치는 영향이 강하다. 니이버의 경우 신학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분야에까지 그의 영향력이 지대했으므로 자연 유니온의 기독교 윤리는 「기독교 정치, 사회윤리」의 맥락이 뚜렷하며, 존 베넷트와 로저 신 등이 그 전통을 이었고, 이들이 은퇴한 오늘날 니이버를 비롯한 이들 선배 거장들의 교육으로 성장해 온 여성 신학자 비벌리 해리슨과 래리 라스무신 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미국 기독교 윤리학회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비벌리 해리슨은 여성신학만이 아니라, 마르크스 경제학에도 조예가 깊고 그의 신학방법론은 사회과학적 기초가 단단하며 미국 자본주의의 분석과 기독교 윤리와의 관계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천착하고 있다. 미국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정치이슈가 되고 있는 '낙태문제(Abortion)'와 관련해서 여성의 신체에 대한 권리는 여성들 스스로에게 있다는 입장(Pro-Choice)에 서 있으며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의 문제의식과 방법론을 옹호하고, 미국의 제3세계 외교정책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한국인으로서는 노정선 목사가 해리슨 교수의 지도로 동학혁명을 소재로 해서 제3세계 상황의 폭력문제를 기독교 윤리학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학위를 받았다.
래리 라스무신은 디트리히 본회퍼 신학이 그 기저를 이루고 있으며, 권력의 문제, 성서윤리, 평화운동, 환경보호, 생명과 창조의 신학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문제에 대하여 주목하고 있으며그 또한 존 베넷트 등이 강조한,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한 사회윤리적 비판의 전통에서 성장한 신학자답게 제3세계 출신의 유학생들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높다. 그의 '십자가신학'은 고통과 억압을 감당하면서 역사의 변화를 꿈꾸는 민중신학과의 친화력으로 해서, 그의 강좌에는 민중신학부분이 반드시 들어가 있다.
조직신학의 경우, 흑인해방신학자 제임스 콘의 위치는 막강하다. 그의 강의는 열정적이며 매력적이다. 제3세계 일반의 신학경향과 흐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실로 압도적이며, 서구전통신학의 실천적 한계와 신학적 추상성에 대한 비판은 집요할 정도이다. 역사를 지배자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억압받는 민중의 시각에서 조명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여성신학에 대한 옹호도 대단하며 한국민중신학자들과의 교분도 두텁다. 70년대 민주화운동의 열기를 직접 경험한 바 있는 그는 한국학생들에 대한관심과 애정이 깊고, 두 해 전 버클리대학에서 민중신학을 강의한 바 있는 안병무 박사가 유니온을 방문했을 때 혹인신학과 민중신학간의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눔으로써 그의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서창원 목사(민중신학의 흐름), 정현경 교수(아시아에서의 여성신학), 구춘서목사(민중신학 기독론)가 그의 지도 하에 학위를 받았다.
서구신학의 전통적 흐름과 진보적 경향, 그리고 칼 바르트에 대한 보편적 주제와 관련해서는 크리스토퍼 모스 교수가 강의를 맡고 있다. 그는 백인 남성신학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인종적 편견과 문화적 우월감에서 해방된 신학자라고 할 수 있으며, 전통적인 신학개념이 갖고 있는 허를 찌르는 질문들을 통해서 학생들의 신학이해를 날카롭게 만들어 가고 있다.
이제는 강좌를 맡고 있지 않지만, (작년에 정년 은퇴한) 톰 드라이버 교수는 문화신학자로서의 명망이 높은 학자로서 특히 예배양식과 관련해서 유니온 신학에 끼친 영향력이 크다. 그는 또한 민중신학의 문화적 성격에도 주목하여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해온 바 있으며, 그의 저서에는 문화민중신학자 현영학 교수의 신학이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그의 이러한 방향으로의 관심은 유니온의 낮 예배가 창조적 정신이 가득 찬 것으로 발전되어 오는 데 공헌했으며 신학의 문화적 양태를 다양하게 검토하는 학문적 넉넉함을 그 전통으로 수립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성서신학분야에서는 구약에 여성 성서신학자 필리스 트리블, 그리고 신약에 바울서신 연구가 로빈 스크로스와 신예 혹인 성서신학자 빈센트 윙부쉬 등이 포진하고 있다.
필리스 트리블은 널리 알려진 바대로 하갈, 입다의 딸 등에 대한 연구로 이름이 높고, 그의 강의는 수술 메스처럼 예리하기 그지없다. 그의 구약학 강의는 언제나 학생들이 가득차 있으며, 학기 마지막 강의를 끝내고 나면 가르치는 교수로서는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기립박수(standing ovation)를 받는 인물이다. 그녀의 성서해석학은 문학분석을 위주로 하여 성서 텍스트 자체에 매우 충실하고 엄격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그녀의 성서해석 과제물은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으며 고도의 치밀함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성서이해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이 다소 취약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는 사회학적 분석이 텍스트에 표현되어 있지 않은 부분에 대한 상상력에 지나친 비중을 두는 우려가 있다고 경계하면서, 어디까지나 텍스트가 언급하고 있는 부분에 한해서만 해석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성서의 사회학적 분석과 관련해서는 히브리 공동체의 역사적 형성에 대한사회학적 성서연구로 명망있는 노만 고트발트의 강좌를 개설하기도 하며, 그가 강의를 맡고 있는 뉴욕 신학교와 뉴욕 대학 종교학과와 학점교환을 하기도 한다. 또한 구약개론의 시간에는 그의 저서인 「The Hebrew Bible : A Socio-Literary Introductions을 주교재로 쓰고 있기도 하다.
고트발트는 정년으로 은퇴했지만 여전히 정열적인 학문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로빈 스크로스는 초기의 불트만적 틀에서 벗어나 성서의 사회학적, 심리학적 분석방법론을 그의 해석학에 동원하고 있으며 특히 바울서신연구에 있어서는 여러 선진적인 연구를 내놓은 학자이다. 그는 사회학적 분석을 적용시켜 나갈 때도 성서텍스트의 독자적 성격에 주목하면서 신중하게 해석해 나가기 때문에 '사회문학적 분석'의 경향에 보다 가깝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흑인 성서신학자인 신예 빈센트 윙부쉬는 초기 기독교형성 사회사와 성서연구로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이외에도 신약분야에서는 유니온 출신이며 현 학장인 흘란드 헨드릭스 교수가 강좌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교회사분야에서는 초기기독교사를 옥스포드 출신의 노리스 교수가, 중세 및 종교개혁시기를 루터주의자인 데이빗드 룻츠 교수가 각각 맡고 있으며, 이후의 시기와 미국 교회사 및 인권운동의 역사체는 흑인 교회사가인 제임스 워싱턴 교수가 명성을 드날리고 있다. 특히 노리스 교수와 룻츠 교수는 교회사의 대가 로버트 핸디 교수(은퇴)와 함께 상당수의 미국신학교 교회사 주교재로 쓰이고 있는 서양교회사(A History of christian Church)를 공저하여 개정판을 거듭하는 등 그 학문적 영향력을 공인 받고 있다.
기독교 교육학 분야에서는 파울로 프레리와 함께 WCC를 통해서 활동해온 바가 있던 월리암 케네디 교수가 있다. 그는 그람치의 헤게모니론을 중심으로 해서 교육학과 사회학, 매스 미디어 분석, 그리고 이데올로기론을 결합시켜 기독교 교육의 창조적이고 비판적인 방법론을 세우는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케네디 교수는 매우 인자하고 따뜻하며, 깊이있는 인간성으로 학생들의 존경과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인밖에도 종교심리학 분야쪽으로는 여성학자 앤 벨포드 율라노프가 심층심리학을 기반으로 하여 영성의 세계를 다루어 나가고 있는데, 피어선 신학교의 이재훈 교수는 그의 지도하에 학위를 마쳤다.
이 밖에도 유니온은 매년 국제적으로 저명한 학자들을 초빙하여 강좌를 개설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독일의 진보적인 여성 신학자 도로시 죌레, 라틴 아메리카 해방 신학자 구스타보 구띠에레스, 엔릭크 뒤셀, 아시아 신학자알리우스 피에레스, 곽부란, 남아프리카의 존 그루치 등의 학자가 있으며, 각종 신학세미나를 통해서 특히 제3세계 신학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의견을 교환하는 기회를 갖고 있다.
이러한 지적 풍토 속에서 성장하는 신학도들의 정신은 따라서 국제적 시야의 폭을 가지고 있으며, 기존의 전통과 논리에 묶이지 않는 매우 자유로운 실험정신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어떠한 파격적인 이설(異說)도 논의의 주제로 선택되어 아무 제약없이 주장되거나 검토될 수 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신앙적 정죄나 규탄을 받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종류의 의문과 질문도 가능한 것이며 이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은 신학적 사고를 위축시키고 신앙의 성격을 독단적이거나 편협하게 만들뿐이므로, 그러한 생동감 있는 자유로움이야말로 학문과 신앙의 발전 모두를 위해 진정 필요한 동력이 된다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눈물의 아리랑 고개
유니온에서 개설하고 있는 학위과정으로서는 우선 학사학위 소지를 전제로 하는 목회학 석사(M.Div.)가 되기 위한 신대원 3년 과정이 있는데 유학생의 경우에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M.Div. 과정이야말로 '눈물의 아리랑고개'이다. 첫 일년과 다음해 이년째는 거의 정신차릴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학업량이 요구되고 있다. 어찌나 그 학업부담이 큰지 교목이 스트레스를 견디기 힘들어하는 학생들의 정신상담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정도이다. M.Div. 과정에서는 성서신학, 조직신학, 교회사, 조직신학 및 윤리, 실천신학, 선택, 논문 등 전체 76학점(대개의 경우 한과목이 3학점1)으로 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현장실습이 6학점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유니온의 전체 과정에서 특이한 것은 그 성적평가제도이다. A, B, C, D 식의 기존평가제도가 이기적이고 경쟁주의적인 인간형 형성에 관련된다고 해서 Credit/No Credit 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며 성적평가는 제출한 과제물과 세미나토론의 결과를 교수가 따로 자세히 기록하는 평가서로 대신하고 있다.(M.Div.의 '경우 박사 과정의 조교가 교수와 공동으로 작성한다.) 평가서의 내용은 대단히 구체적이며,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성적이 우수한 경우는 Credit with Distinction을 표시하여 기존의 평가제도를 택하지 않는 약점을 보완하면서 우수한 학업결과를 격려해주고 있다. 또한 선택과목에 한해서는 일정한 범위 내에서 과제물의 부담없이 단지 수업출석과 교재물을 충실히 예습하는 것으로 성적을 인정해주는 R(registration) 제도가 있어서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고도 학문적 관심의 폭을 넓히는 기회를 마련해주고 있다. 이러한 학제는 교수진의 일방적인 결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활발한 의견개진과 학제개편의 참여과정에서 의견이 반영되어 유니온의 전통으로 굳어지게 된 것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M. Div를 마친 학생의 경우 석사과정 인 S.T.M.(Master of sacred Theology) 일년과정(24학점)이 있는데, 유학생은 박사학위에 직접 신청해서 입학할 수 있는 경우는 없으며 일단 이 과정을 통과하면서 학교 분위기와 전공교수들과 친숙하는 시간을 갖고 나서 박사학위신청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S.T.M. 일년과정은 실로 '피말리는' 긴장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일년 뒤 박사학위과정에 입학이 성공하면 그대로 유니온에 남을 수 있지만 실패하는 경우 눈물을 머금고 학교를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영어가 아무래도 서툴고, 학교생활도 익숙하지 않은 채 한학기가 지나면(12월 21일 가을 학기 종료) 1월 6일 이전까지는 박사과정 신청을 완료해야 하므로 첫학기 성적과 수업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된다. 이 기간 중에 교수의 인정을 받고,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며 학기말 시험과 과제물을 처리해야 하니 얼마나 바쁘겠는가는 상상이 가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 과정이 정히 힘드는 경우에는 2년으로 연장해서 다소 여유있게 학교생활을 하는 방법도 있으나 교수진의 사전특별허가를 받아야 한다.
박사학위과정은 앞서 밝혔던 성서신학, 교회사, 조직신학, 기독교윤리, 종교심리학의 분야에 걸쳐 입학신청서를 제출할 수 있으며 자신의 구체적인 전공분야를 세분해서 정리하도록 해야 한다. 입학신청서류는 일찍 제출할수록 유리하며, 특히 제 2외국어의 준비는 미리 단단히 해놓고 떠나는 것이 백번 좋다. 외국유학생들이 제2외국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서 필수과정을 마치고도 1년, 2년의 시간을 전공분야의 연구가 아니라 외국어 시험준비에 보내는 경우가 많아 이에 대한 학교당국의 요구가 갈수록 엄격해지고 있다. 박사과정은 필수학점 40학점을 이수하면 제2외국어 통과를 전제로 하여 'field examinations'이라고 불리는 시험을 치러야 한다. 각 전공분야에 따라 5부문에 걸쳐 보게 되어 있는 이 시험은 여기서 상론할 수는 없으나 결코 간단치 않다. 이 고비를 넘어야 비로소 학위논문 구상에 들어갈 수가 있다. 대개의 경우 박사학위과정에 들어가서 논문을 마치기까지 최소한 5년을 잡아야 하며 이렇게라도 할 수 있다면 매우 빠른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겠다. 과정을 시작해서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사람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육학 박사(Ed. D. : Doctor of Education)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으나 제2외국어 시험이 없고 Ph. D.에 비해 그 부담이 다소 가볍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TOEFL과 G.R.E.는 일반 대학원의 박사과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요구되며 시험날짜를 잘 맞추어서 입학신청서류를 준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입학신청서의 자기 계획을 쓰는 부분은 압축적이면서도 명확하게 자신의 전공에 대한관심과 향후 방향, 그리고 유니온에 입학신청을 하는 이유를 서술해야 한다.
입학허가 여부는 3월 말이나 4월 초 또는 4월 중순경이면 통보된다. S.T.M.의 경우엔 장학금 수여가 없으므로 수소문해서 일단 국내장학금의 지원을 받도록 해야 할 것이며, Ph.D.의 경우 등록금 면제에서부터 생활비 일부지급에 이르는 여러 종류가 있다.
어학과 학비조달이 관건
두 가지만 언급하기로 하겠다. 첫째는 영어실력이 우수할 것. 학기당 각 강좌에서 요구하는 30페이지 정도의 소논문을 작성 제출하는 일이 쉽지 않고 세미나에 참석해서 발표하고 토론을 벌이는 일은 영어실력이 우선적으로 좋아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아무리 신학적 사고가 나름대로 예리하고 지식의 축적이 있다 할지라도 표현이 안되면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미국 사회다. 또한 읽어야 할 방대한 양의 과제물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이 역시 영어 실력이 충분해야 함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명심할 일이다.
둘째는, 경비문제이다. 뉴욕은 물가가 만만치 않다. 게다가 미국전역이 불경기의 여파로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옛날식으로 현지에서 어떻게 자금조달하여 공부하겠다는 생각은 비현실적이다.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지만 불안한 방식이다. 혼자와서 공부한다치고 학비를 제외한 비용을 대략 계산해 본다면 아파트 렌트, 책값을 포함한 한달 생활비가 약 1천불정도 든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곳 이민교회에서 교육전도사를 하면서 비용조달을 할 수도 있지만, 최근에는 이곳에서 자란 1.5세나 2세 신학생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아져서 그것도 과거와는 상황이 다소 달라졌다고 하겠다. 따라서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알아 볼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공부는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생활의 부담으로 해서 그렇지 않아도 어렵고 고달픈 유학의 여정에 생각지도 않은 난관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언급이 유학의 의지를 꺾는 것으로 들려서는 아니될 것이다. 실로 굳센 의지로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면서 준비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데에 뜻이 있음을 밝히는 바이다.
<한국신학의 학맥을 찾아서(10) - 미국 하버드 대학교 신학부>
출처: "목회와 신학" 1996년 6월호
필자: 김동수 (현 성산효도대 신약학교수)
필자약력:
서울신학대학 신학대학원(M.Div)
미/Harvard Divinity School (Th.M)
영/Cambridge 대학교 (Ph.D)
하버드 신학부의 역사와 위상
하버드 신학부(Harvard Divinity School)의 역사는 곧 하버드대학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본래 하버드 대학의 설립 목적이 지성있는 목회자의 양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이 미국에 온 최우선 목적은 신앙의 자유에 있었다. 그들이 미국에 정착하고 1세대 목회자들이 사라져 가면서 가장 우려했던 바는 자기들의 신앙을 지도해줄 자격있는 2세대 목회자의 부족이었다.
그래서 하버드(John Harvard) 목사의 기부금을 토대로 지성있는 목회자와 신앙있는 사회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설립된 것이 미국 최초의 대학인 하버드대학이다(1636년). 처음에는 이러한 설립자의 정신이 대학의 커리큘럼에 잘 반영되었었다. 하버드대학의 모든 학생은 고전어, 수사학, 철학과 함께 신학을 필수적으로 배워야 했다. 특히 마지막 학년에는 총장이 직접 신학 교육을 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초에 이르러 “모든 학생이 신학교육을 받아야 하는가”가 교수회의에서 논란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버드대학 교수회의의 결정으로 목사가 될 사람을 대상으로 대학원 과정으로 신학교육을 전문적으로 시킬 목적으로 독립된 전문 대학원인 하버드 신학부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1816년).
하버드의 설립정신이 하버드 대학과 하버드 신학부에 지금도 얼마나 남아있는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지성있는 목회자 양성이라는 본래의 설립정신은 아직도 최소한 상징적으로는 하버드 안에 배어 있는 것 같다. 하버드대학의 최고(最古) 교수직인 홀리스 교수직(Hollis Professorship)은 신학부 교수가 맡게 되어 있다.
또한 하버드 대학이 있는 곳의 지명도 본래는 뉴 타운(New Town)이던 것이 하버드대학의 설립자 하버드 목사의 출신학교인 영국 케임브리지대학(University of Cambridge)의 이름을 따서 케임브리지로 개명하였다.
하버드대학은 지금 미국 신학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신학 교육기관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에는 하버드 신학부에 대해서 오해가 많았다. 하버드에 신학과가 있느냐는 질문부터 하버드 신학부가 학문적으로 명성있는 학교인가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의문이 있어왔다.
하버드대학하면 현재 세계 최고의 대학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런데 하버드신학부도 그런가 하는 것이다. 미국 지성인의 삶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약해지면서 하버드 안에서 신학부의 위치가 약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의 신학 학문 세계에서 지금 하버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다.
신앙적인 측면을 접어두고 학문적인 측면만 평가한다면 하버드, 예일, 시카고, 듀크가 대학 안에 신학부를 둔 학교 가운데서 가장 명성있는 학교라는 것은 미국에서 신학하는 사람이라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이다. 미국에서는 여러 기관에서 학교, 학과의 랭킹을 발표하는데 최근에 종교학과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랭킹을 보면 하버드와 시카고대학을 최고의 대학으로 꼽고 있다.[주:NRC Rankings에서 Religion을 찾아보면 시카고가 1위, 하버드가 2위입니다. 유학정보게시판 참고하세요]
하버드 신학부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하버드 신학부가 그 노선이 자유주의 혹은 급진주의라는 것이다. 물론 위의 네 학교 가운데서 하버드와 시카고가 예일이나 듀크에 비해 그 성향이 좀더 급진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하버드 신학부의 성향을 쉽게 일반화 할 수는 없다고 본다.
하버드 신학부에 급진적인 신학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버드 신학부의 노선을 한틀에 넣기는 힘들다. 필자는 오히려 지금의 하버드 신학부의 노선을 굳이 말하자면 다양성 혹은 개방석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신약분야의 교수진을 예로 들면 다섯명의 교수진이 너무나 다양한 가운데 학문의 논의에 있어서만큼은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퀘스터(Helmut Koester)는 불트만(R. Bultmann)의 제자로서 그의 신학 사상을 이어받고 있고, 보봉(Francois Bovon)은 오스카 쿨만의 제자로 그의 신학에 충실하며, 피오렌자(Elizabeth S. Fiorenza)는 여성적 관점의 성서신학자이고, 칼라한(Allen Callahan)은 철저한 오순절 신자이며, 틸러(Patrick Tiller)는 복음주의자다.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이 안에는 여성신학을 과격하게 주장하는 그룹도 있는가 하면 복음주의학생회도 있다. 모두가 다양한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학문적인 대화에는 열려있는 것이 하버드의 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버드 신학부에 가면 모두 자유주의자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누구나 자기의 신앙과 신학 노선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학문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 하버드의 장점이다. 실제로 하버드 출신의 복음주의자 신학자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로 신학부 출신은 아니지만 하버드 고전어학과에서 신약에 관한 논문을 썼던 복음주의 신약 신학자 래드(G. E. Ladd)가 있다. 필자의 지도교수 퀘스터도 불트마니안(Bultmannian)이지만 필자에게 자기의 노선을 따라오기를 권하기보다는 오히려 필자가 가진 복음적인 신앙 안에서 학문을 발전시키기를 기대했다..[주:2001년10월 25∼27일까지 성결대학교에서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주최로 개최되었던 세계복음주의 신학자대회에 발표자로 Timothy S. Laniak 교수님이 오셨는데, 이 분은 현재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구약을 가르치십니다. 그 때 발표된 이 분의 성경해석의 기본적 자세에 관한 글을 제가 읽었었는데 정말로 보수적이시더라구요. 근데 알고보니 이 분이 하버드에서 박사학위(ThD)를 하셨다러구요. 아마 에스더서를 연구하셨죠? 정말로 하버드 신학부 출신으로 보수적이신 분이 많이 계신가봅니다.]
하버드 신학부의 특징
이렇게 다양한 신학적 입장을 가진 교수와 학생들이 모인 하버드의 특징은 무엇일까? 학문적인 우수성 외에 하버드 신학부의 장점을 들자면 하버드 신학부의 교육은 학생들의 개성을 살리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하버드 신학부는 학교에서 짜놓은 프로그램에 의해 똑같은 분야의 똑같은 사람을 양성하기 보다는 각자 나름대로의 특색이 있는 전문 지식인의 양성을 그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무슨 과정이든지 모두가 택해야 하는 필수과목이라는 것이 발달되어 있지 않다. 자신이 필요하면 지도교수와 상의하여 어느 과목이든지 택할 수 있다. 과목을 택하는데 있어서 특히 신학부뿐만 아니라 하버드대학교 소속 어느 전문대학원의 과목도 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필요 하다면 의과대학, 혹은 경영대학원 과목까지도 택할 수 있다. 실제로 연관분야의 하버드 인문학부 과목을 하버드 신학부 학생들이 많이 수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보스톤신학교협의회(BTI) 소속 학교의 어느 과목이든지 수강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개성을 살리는 교육이 박사과정이나 학문적인 목적으로 전공과목을 공부하는 과정의 학생들에게는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목회학석사과정(M.div.)의 학생들에게 기본적인 성서해석 과목과 헬라어, 히브리어 등 성서 고전어 과목도 필수로 하지 않아도 될 것인가 하는 것은 필자의 의문이다.
성서를 원문으로 읽고 해석하는 것은 성서신학을 전문으로 하는 학생들만의 일이 아니라 어떠한 분야의 신학을 하든지 모두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소양이라고 필자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버드 신학부의 또 다른 특징은 신학에서 이론과 실천의 이원론을 탈피한다는 것이다. 신학의 이론 없이 실천이 있을 수 없으며 실천도 기술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철저한 이론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버드 신학부에는 교역과정의 신학생들을 위해 몇 과목의 실천신학 과목이 개설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천신학을 독립된 하나의 과목으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또한 실천신학 교수직도 따로 없다. 이것이 실천의 약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오해려 신학의 동질성(identity) 확립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하버드 신학부의 입장이다. 실천신학을 따로 독립시키면 신학이 커뮤니케이션, 카운셀링, 행정 등 기술적인 학문이 된다는 것이다. 현재 신학부의 학장인 디만(Ronald Thiemann)은[주: 2002년 3월 현재 the Acting Dean of Harvard Divinity School는 William A. Graham이다] 이러한 현상을 신학교육의 비신학화(de-theologizing)라고 정의했다(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신학 학위 프로그램
하버드 신학부에는 크게 분류하면 석사과정(M.Div., M.T.S., Th.M.)과 박사과정(Th.D.), 비학위과정(Special Students: Resident Graduates), 그리고 방문교수과정(Visiting Scholar)이 있다. 그리고 하버드대학 안의 다른 전문대학원(GSAS라 불리는 본 대학원, 의학부, 법학부, 경영학부 등)과 연결된 이중학위 프로그램(dual degree pro-grams)도 있다. 여기서는 학위 프로그램만 소개하기로 하겠다.
M.Div.과정은 잘 아는 대로 목회자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이다(3년 과정). 한가지 하버드의 특징적인 것은 학자가 되려는 사람이 목회자가 되겠다는 사람보다 더 많다는 것이다.
Th.M.은 1년 과정의 M.Div.후속 프로그램으로 입학하려면 M.Div.학위가 필요하며 목회를 하다가 장시간 학문적인 세계를 떠났던 사람이나, M.Div.이후 박사과정의 준비의 일환으로서 이용되기도 한다. Th.M.과정을 하는 학생은 세 분야(성서학, 이론신학, 타종교)로 분류된 분야 가운데 전공분야를 하나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Th.M.에 들어왔다고 해서 박사과정 입학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M.T.S.과정은 한국 사람에게 좀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M.A.과정의 또다른 이름이라고 보면 된다. 목회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서 대학원 과정으로 자기의 전공을 택해서 신학을 공부하는 과정(2년)인데, 최근에는 신학부의 학생들이 목사가 되기를 꺼려서인지 지금은 M.Div.과정의 학생들보다도 그 숫자가 많은 편이다(95년 봄학기 현재 등록 인원을 보면 M.T.S과정 212명, M.Div. 185명, Th.M. 14명, Th.D. 62명 등이다).
석사과정의 학생은 한 학기에 평균 네 과목을 수강하고 외국어시험(독어, 불어, 스페인어,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중) 하나 이상에 합격해야 한다. M.Div.학생은 필드 웍(field work)을 해야 하는데 한국 학생들은 이민 교회에서 봉사하면 된다. Th.M.학생은 소논문이 요구되다 학과 시간에 썼던 것을 발전시켜 쓰면 되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성서학을 전공하는 Th.M.학생은 중급정도의 고전어(헬라어 혹은 히브리어)시험에도 통과해야 한다.
신학부의 최고 학위과정인 신학박사(Th.D.) 과정은 구약, 중간시대, 신약, 성서신학, 기독교 역사, 조직 신학, 기독교 윤리, 비교 종교, 종교와 사회, 종교와 문화 등의 세분된 전문분야가 있는데 신학부의 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매년 7-8명 정도만이 박사과정에 새로 들어오며 박사학위를 마치는데 평균 7-8년 걸린다.
이론신학을 하는 사람은 약간 빨리 끝날 수도 있으나 성서신학의 경우 10년이 넘게 학위를 못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된다. 학위를 하기 위해서는 2년간의 코스 웍, 외국어 시험(독어, 불어는 공통필수, 각 전공 분야별로 1-3정도의 고전어)을 더 요구하기도 한다. 신약의 경우 4년과정의 헬라어, 2년과정의 히브리어 혹은 아람어, 초급 과정의 라틴어도 요구된다.
그 밖에 신학부와 연결된 학위 프로그램으로는 하버드 본 대학원(GSAS)의 종교학과 박사과정(Ph.D.)프로그램이 있다. 종교학과는 실제로 신학과에서 같은 교수 밑에서 수업을 하고 학위에 필요한 필수과목도 거의 같기 때문에 Th.D.와 다른 점은 별로 없다. 다만 미국 사회가 다종교, 비교종교 사회가 되면서 기독교를 염두에 둔 신학부의 박사과정보다는 종교학부의 박사과정을 학생들이 더 선호하는 편이다.
또한 구약분야로 박사과정을 지원할 사람은 위 프로그램 외에 고대 근동어 언어 문명학과(Ph.D.)에 들어가서 구약신학을 전공할 수도 있다(이 두 프로그램에 지원할 사람은 신학부가 아닌 본 대학원 입학사무실로 원서를 요청해야 한다. 주소: Graduate Admission Office, Graduate School of Arts and Science, Byerly Hall 2nd floor, 8 Garden Street, Cambridge, MA 02138, U.S.A.).[주: 학교 홈페이지로 확인결과 위 주소 02년 3월 현재 사용가능하네요. 이메일 주소하나 첨부하죠. admiss@fas.harvard.edu]
그 밖에 여름방학을 이용한 신학언어 강좌가 신학부에 개설되어 있다(헬라어 초급, 중급, 히브리어 초급, 중급, 라틴어 초급, 신학 독일어, 신학 불어, 신학 스페인어). 필자는 이중 신학 불어를 수강한 적이 있는데 아주 유익했다. 한국에서느 몇 년을 배워도 외국어로 신문을 읽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는데 여기서는 언어 교육 노하우가 축적되어서인지 두 달만 배우면 신학도서를 읽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전공별 교수진
1995-6년판 하버드 신학부 카탈로그를 보면, 신학부에는 현재 전임교수 37명, 강사 34명, 명예교수 7명, 관련교수(하버드 대학의 타과 교수이면서 신학과 연계된 과목을 강의하는 교수) 31명 등이다.[주: 02년 3월현재 Permanent-32; Emeritus-9; Affiliated-84; Visiting-9이다] 이들 가운데 전임교수만 소개하는 것도 한정된 지면상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현재 외부에 널리 알려진 학자들과 앞으로 21세기에 하버드 신학부를 대표할 교수들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하버드 신학부 교수로 한국 신학도들에게 가장 친숙한 이름은 아마도 하비 콕스(Harvey Cox) 교수일 것이다. 그는 세속화의 기수로 진보적인 신학자의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의 관심사가 계속 변해왔으며 특히 그의 최근 관심사는 오순절 신학이다.
그는 그의 명저 ‘세속도시’에서 20세기 후반기에 가면서 기독교 등 모든 종교가 쇠퇴할 것을 예견했으나 오순절 교회의 성장으로 자기의 예견이 틀렸음을 고백하고 오순절운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그 결과로 ‘하늘의 불’(The Fire from Heaven)이라는 저서를 내기도 했고 이에 관한 강의로 전 세계를 순회하고 있다. 올해는 여의도순복음교회와 국제신학연구소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해 오순절신학에 대해서 강연할 예정이다.
하버드 신학부 교수 가운데 현재 하비 콕스교수보다도 더 유명한 사람은 피오렌자(Elizabeth S. Fiorenza)교수 이다. 그녀는 여성성서신학의 선구자로, 학문적인 오리지낼러티(originality)가 가장 확실히 있는 학자 가운데 하나이다. In Memory of Her와 But She Said라는 저서로 일약 여성성서신학계에 거물이 된 그녀는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북미의 성서학회(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회장을 지냈다. 그녀의 강의는 하버드대학 뿐만 아니라 인근의 신학교에서 온 학생들로 가득 찬다. 북미 성서학회에도 그녀가 가는 곳이면 사람이 몰리는 것을 보았다.
필자의 지도교수였던 퀘스터도 세계 신약학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학자이다. 그는 하버드 신학부에서 신약과 초대교회사 두 분야의 각각 교수직을 가진 유일한 교수이며, 오랫동안 Harvard Theological Review의 편집자로 일해오고 있다. 그는 불트만의 마지막 제자로서 그의 관심사는 신약정경보다는 외경에 집중해 있고 진보적인 계열의 학자다. 필자와는 신약 정경을 보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서 그와 많은 공부를 하지 못했지만 고전 문서에 관한 한 대단한 학자이다. 핸슨(Paul D. Hanson)은 묵시 문학 전문가로서 한국 구약계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밖에 카우프만(Gordon D. Kaufmann)등이 미국에 잘 알려진 진보적인 하버드 신학자 가운데 하나인데 최근 은퇴했다. 엘리자베스 피오렌자의 남편인 프랜시스 피오렌자(Francis S. Fiorenza)도 독일 뮌스터에서 칼 라너(Kahl Rahner)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은 가톨릭 신학자로 해석학, 정치신학, 포스트모던 논쟁, 신학과 과학의 관계 등을 강의하고 있는데 부인만큼은 유명하지 않지만 가톨릭 조직신학계에서 자기의 위치를 확고히 해가고 있다. 니버(Richard R. Niebuhr)는 유명한 니버(Richard H. Niebuhr)의 아들로 칼빈, 조나단 에드워드, 슐라이어마허(Schleirmacher)에 대한 대표적인 학자의 한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지금 하버드 신학부의 학장(Dean)인 디만(Ronald Thiemann)은 정통 루터교 신학자로서 칼 바르트 신학을 현대 교회에 적용하려고 노력하는 Narrative Theology School에 속해있다.
앞으로 21세기에 더욱 더 주목받을 신학부 교수로서 필자는 구약의 레벤슨(Jon D. Levenson) 교수, 신약의 보봉(Francois Bovon) 교수, 조직신학의 코클리(Sarah A. Coakley) 교수, 교회사의 홀(David D. Hall) 교수, 비교종교의 엑크(Diana L. Eck) 교수, 종교철학의 웨스트(Cornel West) 교수 등을 들고 싶다.
레벤슨 교수는 유대교 학자로서 구약과 관련된 유대교의 신학적 문제에 관심이 많으며 명강의로 유명하다. 보봉 교수는 오스카 쿨만의 제자로 누가복음, 외경 등에 전문가이며 성서해석에 있어서 센세이셔냘한 방법론보다는 원어(philology)에 충실한 역사비평적 방법론을 선호한다.
코클리 교수는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트뢸취(Troeltch)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여성신학자로 삼위일체론, 영성신학 등 전통적인 신학적 주제를 현대적으로 다루며, 급진적인 여성신학과는 대조되는 전통적인 신학적 틀에서 여성신학에도 관심이 있으며 케임브리지의 전통재로 지역교회의 문제에도 무관심하지않다. 홀은 미국 기독교 역사분야의 교수로 청교도 신학, 19세기 미국교회 부흥운동, 20세기 복음주의 운동 등을 교회사적인 관점으로 강의하고 있다.
엑크는 기독교와 인도 종교의 비교연구에 관심이 있는 젊은 여성신학자이다. 웨스트는 흑인신학자로서 프린스턴대학에서 하버드로 특별 스카우트되어 왔는데 흑인신학을 막스철학 등과 연관지어 설명한다. 그의 현재 실력이나 명성으로 보아 앞으로 그가 하버드를 대표할 신학자로 자리 매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도서관과 장학제도
도서관과 장학제도에 관한 한 하버드는 최고의 학교 가운데 하나이다. 신학부 본관에 붙어있는 ‘앤도버-하버드’ 도서관은 미국 최고(最古)의 신학 도서관이며 현재 49만권 이상의 신학도서가 소장되어 있고, 매년 4000-6000권의 신간 신학도서가 들어온다. 학문에 필요한 신학도서 가운데 교파자료 등 특수자료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책이 없다 할 정도로 많은 신학도서를 구비하고 있다.
신학부 도서관의 가장 편리한 점 가운데 하나는 도서관이 철저하게 이용자 편의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출도서의 수를 무한정으로 하는 것, 대출기간을 충분히 주는 것(석사과정의 학생에게는 두 달, 박사과정의 학생에게는 일 년), 도서관 이용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평일의 경우 밤 11시까지) 등이다.
하버드 신학부 도서관에 들어가면 학문이 살아 숨쉬는 것과 같은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컴퓨터 단말기 앞에서 정신없이 책을 찾고 서고로 같이 뛰어가는 교수와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학문세계에서는 누구나 학생이라는 기본진리를 느끼게 해준다. 신학부 도서관 이외에도 하버드대학에 소속되어 있는 여타 도서관의 천만 권이 넘는 도서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하버드 신학부는 재정적으로 비교적 넉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학박사과정(Th.D.)의 학생들에게는 통상 등록금 전액과 생활비 일부가 보조되고, 석사과정 학생의 80퍼센트 정도가 장학음 혜택을 받고 있다. 특히 한국인 학생들은 대부분 등록금 전액면제 장학금을 받고 있다. 그러나 Th.M.등 일년과정과 비학위과정에는 장학금이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런데 Th.M.학생의 경우 바로 박사과정에 들어가면 1년 후 등록금의 대부분을 돌려주기도 한다.
석사과정 입학허가서를 받으려면
아마 독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입학허가서를 받는 일일 것이다. 누구든지 하버드는 일생에 한번 가보고 싶은 학교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혹시 하버드에서 배겨날 수 있을까하고 미리 겁을 먹고 포기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 한국에서 대학교육을 착실히 받은 사람이라면 공부를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니 오히려 두각을 나타낼 수도 있다. 하버드 신학부에 들어오는 미국 학생들은 이른바 ‘하버드 공부벌레들’에 나오는 학생들과 같은 수재집단은 아닌 것이 사실이다.
필자는 복음적 혹은 보수적인 사람들이 하버드 신학부에 많이 왔으면 한다. 우리나라에서 신학유학을 할 때 학교를 결정하는 방법은 대개 자기 교파와 연결된 신학교나 자기학교 교수 출신의 학교를 하는 것이다. 신학적 성향에 있어서도 자기 신앙고백과 비슷한 학교만을 고집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오히려 나는 그 반대의 선택이 더 좋을 수도 있다고 본다. 유학의 목적이 이미 확립된 자기의 신앙관에 정보를 좀 더 쌓는 것이 아닐진대 자기의 입장과는 다른 것을 맛보는 것도 오히려 자기의 것을 확실히 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동안 하버드 한국 출신으로 하버드 신학부를 졸업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최근에는 평균 일 년에 한두명 신입생이 들어온 것 같다. 그래서 필자가 있을 동안에는 신학부에 한국인 학생이 항상 너댓명밖에 안되어 조직 같은 것도 없었으나 최근에 한인 학생회가 만들어졌다(회장 정성욱 전도사).
먼저 하버드 신학부에 입학하는 방법은 미국의 어느 대학에 입학할 때의 방법과 별로 다르지 않다. 서양 학교의 입학심사는 서류전형이다. 그래서 서류에 내가 입학하고자 하는 학교에 수학할 능력이 있다는 것과 그 의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기본적인 서류는 대학/신학교 성적표, 교수 추천서 세통, 토플(TOEFL) 성적, 에세이 등이다. 이 가운에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할까? 한국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은 토플성적이다. 그러나 토플성적은 최소 요구점수만 넘으면 최종 입학사정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물론 하버드 신학부의 경우가 최소가 600점[주: CBT로는 250점], Th.M.의 경우 620[주: CBT로는 260점]이니 신학도들에게 최소를 넘기기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의 대학, 신학교 성적이다. 성적이 골고루 좋아야 하지만 특히 자기가 전공할 분야의 성적이 좋아야 하고 성서학을 하려는 사람에게는 관련분야의 고전어 성적이 좋은 것은 유리하다. 특히 영어 외에 독어, 불어를 한 것이 성적표에 나와있으면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좋아도 안되는 경우가 있다. 한국사람이 대개 에세이에 약하기 때문이다. 에세이를 쓸 때 주의할 점은 하버드의 경우 지나치게 신앙간증식으로 쓰면 안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공부하는 분명한 목표, 하버드에 지원하는 특별한 이유, 자기와 관심사가 비슷한 교수 등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좋을 것이다(더 자세한 사항은 관련 유학정보지 등을 참고할 것).
특히 에세이를 통해 그 사람의 영어 실력과 학문적 표현력도 간접적으로 평가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일단 입학허가서를 받으면 학기가 9월 중순부터 시작되지만 일찍 도착해서 여름에 독일어나 성서 고전어 등을 택하면 학교생활에 일찍 적응하고 유학생활에 필요한 정보도 얻는 것도 좋을 것이다.박사과정에 들어가려면
한국에서 하버드 신학부에 공부하러 오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박사과정을 염두에 두고 오는데 여기를 거쳐서 다른 좋은 학교에 많이 갔지만 하버드 신학부 박사과정에 들어간 예는 많지 않았다. 30여년 동안 통계를 보면 박사과정 졸업생이 단지 세 분. 지금 공부하고 있는 분이 한 분 뿐이다. 하버드 신학부 박사과정에 들어가기는 최근들어 더욱 힘들어졌다.
하버드 신학부에서는 모든 석사과정의 신학부 학생들이 박사과정을 생각하고 공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여서 지원자가 많은데 비해 일년에 박사과정으로 뽑는 숫자가 대개 10면 이내이고 그중 7-8명이 입학한다. 자체 안에서만 10대 1이 넘는 경쟁을 해야 한다. 그래서 박사과정에 입학한 사람들의 평점(GPA)은 대개다 4,0(전과목 A)이다.
뿐만아니라 박사과정 원서를 내기 전 독일어 정도는 외국어 시험에서 통과해 있어야 하고 성서학을 전공할 사람들은 필수적으로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중급 정도 수준에 있다는 것이 성적표에 나와야 한다. 거기에다가 박사과정은 GRE성적을 요구하는데 하루아침에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는 것이 GRE 성적이다.
그래서 박사과정에 입학하려는 사람은 위의 준비가운데 미국에서 해야만 하는 성적관리 말고는 한국에서 GRE, 독일어, 고전어 등을 충분히 준비해와야 한다. 여기서 학기중에는 최선을 다해 학과 공부에 매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가지 주의할 것은 아무리 실력있는 학생이라도 오자마자 박사과정에 지원해서는 박사과정에 들어갈 확률은 거의 없다. Th.M.으로 들어온 학생도 박사과정을 염두에 둔 학생은 어차피 2년으로 늘여서 해야 한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부담이 있는 사람은 한국에서 M.Div.를 했더라도 장학금이 있는 M.T.S.에 지원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박사과정에 들어가는 데 있어서 여기에서는 무슨 과정에 들어왔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목시간에 들어가서 페이퍼로 자기의 학문적인 능력을 교수에게 인정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
유학 오기 전에 준비할 것
한국에서 준비할 것이 너무 많은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물론 영어 읽기쓰기 능력, GRE 고득점(하버드 신학부의 경우 미국인에게는 언어 영역 650점 이상을 요구하며 한국인의 경우에도 최소 500점 정도는 획듣해야 할 것 같고 600점 이상이면 입학사정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 같다)[주: 최근 시험후기가 널리 유포되면서 한국학생들의 GRE점수가 많이 인플레이션 되었다. 일반적으로 50점 이상 더 요구되는게 최근의 추세이다]이 기본적인 준비사항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 유학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학문적인 자질을 잘 닦고 오는 것이다. 즉 학문적으로 자기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와서 공부하면서 그 능력이 길러지지만 박사과정에 들어가려면 처음부터 전과목 A를 목표로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정도의 소양을 닦고 오지 않으면 안된다.
필자는 영어를 썩 잘하는 편이 못되었으나 이곳에서 공부하면서 페이퍼를 내서 B레벨의 평가를 받은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은 한국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학문적으로 페이퍼를 쓰는 법을 어느 정도 익혔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필자는 페이퍼를 쓰는 방법의 하나로 페이퍼 마감 날짜 일주일 전에 나 나름대로의 페이퍼 마감 날로 잡아 완성해 놓았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마감날짜에 임박해서, 때로는 마감 날짜 전날 밤을 새우면서 써서 제출하기 때문에 약점이 많기 마련이다.
필자는 페이퍼를 완성한 뒤 며칠 동안 그 페이퍼를 전혀 보지 않고 딴일을 하다가 다시 하루 이틀 페이퍼 수정 작업에 몰두해서 제출했는데 애초 페이퍼에 파묻혔는 때는 보이지 않던 약점들이 얼마나 많이 발견되었는지 모른다. 어떤 때는 그 중심 내용을 완전히 뜯어 고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심리가 페이퍼 마감날짜에 임박해야만 연구에 발동이 걸리게 마련인데 페이퍼 마감날짜를 일주일 앞당기는 데는 자신과의 철저한 투쟁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하버드 신학부 출신의 한국인
하버드 신학부 혹은 하버드대학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활동하는 한국인 학자로는 전 한신대 교수 박봉랑 박사(Th.D.), 김정준 박사(Th.D.), 서강대의 길희성 박사(Ph.D.), 김승혜 박사(Th.D.), 해외에는 프린스턴신학교 이상현 박사(Ph.D.) 등이 있다. 침신대 배국원 교수는 박사과정(Ph.D.)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있다.
하버드에서 석사과정을 하고 학자로서 활동하는 분들로는 연대 노정선 교수, 호서대 한미라 교수, 장신대 이형기 교수, 삼육대 이종근 교수, 해외에 보스턴대학 신학부의 정재식 교수 등이 있고, 그외 한국과 해외 등지에서 목회하는 동문이 몇몇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인적인 경험
필자는 하버드 신학부에서 신약전공으로 Th.M.을 마치고 현재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같은 전공으로 박사과정(Ph.D.) 중에 있다. 필자는 하버드 신학부를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한다. 무엇보다도 가슴이 저미어 온다. 집안사정으로 하버드에 같이 오지 못했던 아내,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으로도 그렇거니와 유학 기간 중 돌아가신 아버님의 장례식에 참석치 못한 불효 때문에 더욱 그렇다.
또한 보봉 교수와의 만남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필자는 보봉 교수에게서 신약 고급 세미나, 누가복음, 신약신학 등의 과목을 수강했는데 그로부터 철저하게 본문의 언어(philology)에 근거한 성서해석을 배웠다.
필자는 유럽 출신의 보봉 교수로부터 페이퍼에서 A마이너스를 받았으나 악명높은 유럽식 구두 시험 때문에 이곳에서 받은 성적 가운데 유일하게 B플러스를 받은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얼마나 절망했었는지 모른다. 비록 그가 그해에 유럽에서 처음와서 아무에게도 A를 주지 않았지만 박사과정을 지원할 학생이 B레벨의 성적이 있다는 것은 거의 사형선고를 받은 일이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의 그 다음 학기 보봉 교수로부터 40명의 수강생 가운데 한두명에게만 준 A를 받았을 때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 학기에는 단지 15페이지 짜리 텀페이퍼(term paper)를 쓰기 위해 내가 입수 할 수 있는 20세기에 나온 그와 관련된 영여, 독어, 불어로 된 모든 책, 아티클을 읽었다. 보봉 교수와는 인간적으로 아주 가까워져서 지금도 서신 교환을 한다.
또한 박사과정과 신약전공 Th.M. 학생만 수강하게 되어있는 신약 고급세미나반 친구들과 너무나 좋은 우정을 나누었고 그 세미나를 통해서 학문적으로 얻은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세미나에는 신약교수 전원과 신약전공 박사과정1,2년차, 신약전공 Th.M.학생이 의무적으로 참석해야하는 과목으로 1년동안 계속된다. 그 해의 세미나 인도교수와 주제가 정해지면 발표 1주일 전에 논문을 제출하여 세미나 멤버 모두가 그 논문을 읽고 와서 수업시간에는 토론만 하는 좋은 과정이다.
특히 신약 모든 교수가 다 들어오기 때문에 학생의 한 논문을 가지고 교수들 가운데서도 열띤 토론이 벌어지는 것은 너무나 좋았다. 작년에 미국 성서학회(SBL) 연례 모임에 참석했을 때는 그 세미나 멤버들이 발제자, 응답자로도 여러명 참석하는 것을 보고 하버드 신학부가 바로 21세기를 이끌어갈 신학자의 산실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하버드 신학부는 신학도라면 공부하기를 탐내볼 수 있는 좋은 학문의 전당이라고 생각한다.
주소: Admissions Office
(Registrar’s Office for Th.M. and Th.D.)
Harvard Divinity School
45 Francis Avenue
Cambridge, MA 02138
U.S.A
Th.D.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다음 주소로 문의하면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Program Administration for Th.D. Degree
Committee on the Study of Religion
Philips Brooks House
Harvard Divinity School
Cambridge, MA 02138
U.S.A
<한국신학의 학맥을 찾아서(11) - 풀러 신학교>
현장·실천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학풍
1947년 라디오 방송 설교자로 명성을 떨쳤던 찰스 풀러(Charles Fuller)에 의해 세워진 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는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에서 30여분 걸리는 파사데나에 위치하고 있다. 풀러신학교는 파사데나에 본교를 두고 있으며 여러 도시에 분교를 갖고 있다. 학생수에 있어 세계최대 규모의 초교파 복음주의 신학교인 풀러신학교는 세계 80여개국, 130여개 교단을 배경으로 한 다양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역을 위한 일꾼으로 준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풀러신학교의 신학적인 특징은 하나님 중심의 복음주의, 세계 모든 민족을 복음화하려는 선교, 모든 것을 성경에 비추어보려는 신학, 그리스도의 은혜를 함께 나누려는 예배와 사랑의 공동체, 남녀 지도자들의 영적·심리적·문화적 성장을 위해 적용하는 진리의 말씀에 대한 믿음 등을 들 수 있다.
풀러신학교는 신학대학원, 심리학대학원, 선교대학원 등 세 개의 대학원으로 구성돼 있다. 우선 풀러신학대학원은 대부분의 교단 신학교들과는 달리 목회자와 학자뿐만 아니라 평신도 지도자들과 여학생들에게도 문호를 열어두고 있다. 풀러신학교에서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는 선교. 그래서 풀러신학교의 세계선교대학원은 대학원 과정의 선교학 분야에서 규모와 다양성에 있어 세계최고의 훈련기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계선교대학원 학생의 50%는 세계 각국에서 온 선교, 교계 지도자들이며 선교사 경험이 있는 선교사들이 약 25%, 선교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나머지 25%를 차지하고 있다. 1965년 설립된 세계선교대학원은 선교경험이 있는 중견선교사, 선교지도자, 그리고 선교 헌신자들에게 대학원 수준의 선교학을 수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자유주의적 선교학이나 오순절적인 접근과는 다르게 복음주의 선교학을 이끌어가고 있는 세계선교대학원은 지난 1980년대 이후 교회성장에 있어서의 영적인 이슈, 능력전도와 중보기도, 영적전쟁, 내적치유 등에 대한 과목들이 속속 개설되면서 교내외적으로 상당한 신학적, 선교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심리대학원은 크게 임상심리학과와 결혼과 가족치료학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두 학과에서는 공통적으로 신학과 심리학의 통합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풀러신학교에서 수학하고 있는 한국계 학생들은 200여 명이 넘는다. 풀러는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로스앤젤레스 근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한인 1.5세나 2세도 상당수 진학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계 학생들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는 추세.
국내 신학자 중 풀러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초기 인물로는 전재옥(1977 아시아여성이 전개하는 모슬렘 선교사업을 위한 공동체 모델에 관한 고찰·현 이화여대 교수)과 전호진(1978·현 고신 총무) 박사를 들 수 있다.
1980년대에는 강창희(1987 신명기적 특성을 중심으로 본 산상수훈의 문학적 유사성·현 아세아연합신학대학 교수), 권용평(1987), 김기돈(1983 한국신학교육의 역사적 고찰과 개선책), 김영욱(1982), (김익원 1983 한국민족성이 한국교회성장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 김재혁( 1984 구국교회의 급성장한 원인 연구), 김정훈(1983), 김창렴(1983), 나겸일(1987), 백성흠(1986 채플을 통한 한국기독교대학의 효과적인 학원선교 개발에 관한 연구), 백학기(1987 상담을 통한 학원 복음화 방안), 송봉길(1983 신학교육이 한국교회 성장에 미친 영향), 송용조(1981 성령과 선교), 신세원(1981), 원종국(1987 제자 양서의 성서적 이론과 실제에 관한 연구), 원종흥(1987 대학복음화를 위한 효과적인 기독교 교육과정), 이광순(1985 한국여성의 선교이해·현 장신대 교수), 이용원(1985 13세기의 프란시스 교단의 선교원리와 실천에 관한 연구·현 서울장신대학교 총장), 이재범(1986 한국개신교의 성장과 오순절 형태의 특징들), 임열수 (1986 선교학·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전찬원(1983), 진희성(1984), 최정만(1985 한국 개신교 교회의 토착화의 역사적 고찰), 최종진(1983 한국적 상황에서의 신개념 분석과 교회성장과의 관계연구·현 서울신대 총장), 황청일(1985 광주제일교회의 성장과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현 한남대 교수) 등이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대에는 김남송(1993 한국보훈 및 지체장애인 실태와 선교전략 및 호산나 교회의 목회계획), 김성태(1991 상황화와 한국의 장로교회), 김수근(1996), 김용창(1998 인간의 고통과 하나님의 샬롬:동양과 서양의 인간의 고통·한에 대한 부분적 이해를 넘어 통전적인 승화의 비전을 위하여·현 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김용태(1995 한국 남자 목회자들의 결혼의 질의 생태학적 분석·현 횃불트리니티대학원대학교 교수), 김지호(1998 한국 교회의 위기 현상에 대한 진단과 대책에 관한 연구), 나동광(1998 이혼상담에 관한 연구·현 경성대 교수), 라현주(1995 교회성장을 위한 복음적 설교의 적용). 명성훈(1990 교회성장의 영적넓이), 목만수(1999), 민종기(1997 죄와 정치: 개혁신학을 중심으로), 박문옥(1994 교회갱신을 위한 교회 교육의 방향과 방법론 연구), 박상칠(1997), 손상웅(1998), 신영식(1999 창조보전을 위한 윤리 신학적 연구), 안만수(1998 국제 전도폭발 사역이 교회성장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 안승오(1998 증거 지향적인 예배를 위한 연구-한국장로교회를 중심으로), 원준자(1999 한국노인복지정책 개선 방안과 교회의 역할 연구), 이광희(1993 전통적 무속주의의 축복개념에 비추어 본 한국교회성장의 목회적 평가: 축복신학의 올바른 상황화·현 평택대 교수), 이양우(1998 1930년대부터 1994년까지 한국 장로교 역사 가운데 갱신과 확장시대의 지도력 패턴에 대한 연구), 이영기(1999 고난과 순교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교), 이현갑(1995), 임윤택(1992), 임익곤(1993 한국교회 성찬의 프락시스를 통한 교회 성장), 임홍기(1996 제자훈련이 교회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대전 동산교회 사례를 중심으로), 장향희(1994 한국교회 성장에 미치는 부흥회의 영향), 장현운(1995 교회성장이론에 따른 개척교회에 관한 연구-충은교회를 중심으로), 정두섭(1995 전주공업전문대학 복음화 전략), 정병관(1993 한국 청장년세대와의 수용자 중심적-상황적 크리스챤 커뮤니케이션·현 총신대 교수), 정재훈(1995 강단의 위기와 복음적 설교), 조연모(1996 개인 전도를 통한 교회 성장), 주준태(1994 소그룹을 통한 복음전도(송도제일교회의 사례), 최정홍(1996 신흥도시와 지역을 위한 목회), 하영복(1997 21세기 이민교회에서 여성지도력의 역할), 한경철(1991), 호태석(1995 서울 가나교회에서의 청지기 훈련을 통한 신앙 갱신 연구), 홍병호(1999 시흥 열린교회의 결혼과 가정교육에 대한 연구), 홍용표(1996 성결 불길의 전파: 한국성결교회 선교역사), 홍인종(1993 남성 학대자: 한인 이민가정 내에서 배우자 폭력에 대한 생태체계적 분석·현 장신대 교수) 등이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대에는 강병문(2000 한국 이민교회내에서 자아의 분화와 가체체계의 상관관계), 강준수(2000 선교를 위한 개교회 갱신), 고병인(2001 동반의존자 예방과 치유를 위한 사역·현 한세대 교수), 고창덕(2000 도동교회의 전도소그룹 활성화 방안에 대한 연구), 권오균(2000), 김덕수(2001 셀교회로의 교회 갱신에 있어서 리더십의 역할·현 천안대 교수), 김병철(2001 신흥대학 복음화를 위한 소그룹 전략), 남용우(2000), 신옥수(2002 위르겐 몰트만의 신학에 있어서의 만유재신론적 비전), 심수명(2001 평신도 상담자 훈련 모형에 관한 일 연구), 안경승(2000 지혜와 지도력의 예술:지혜를 통한 지도력 발달의 실천신학·현 아세아연합신학대학 교수), 오영걸(2001 한국 개신교 예배에서의 교회음악의 역할과 적용), 이정관(2000 가정과 교회의 맥락에서 본 청소년 교육), 이정서(2000 소그룹과 사회복지 목회를 통한 교회 성장에 관한 연구), 이형식(2000), 장원철(2000 새신자부 운영과 교회성장에 관한 연구) 등이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부산장신대학교 김창인 총장, 전주대학교 지영택, 한일장신대학교 이윤철, 고신대학교 양낙흥·서종대, 총신대학교 김성태, 정병관, 강병문,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마원석 교수도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밖에 강변교회 담임목사이자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명혁 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백도웅 총무, 광림교회 김선도 목사, 연동교회 이성희 목사, 교회개발원 대표 이윤호 박사 등도 풀러에서 수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신대 안경승 교수는 "선교지향적인 풀러신학교는 타문화, 타민족에 대해 매우 수용적"이라며 "이에 따라 우리의 현실 속에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구현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안교수는 이어 어느 신학교보다 현장성이 강하기 때문에 실천적인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적합한 학교라고 덧붙였다.
<한국신학의 학맥을 찾아서(12) - 시카고 신학교>
사회현장을 목회현장으로 삼는 실천적 신학교
시카고신학교(Chicago Theological Seminary)는 시카고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20분 떨어진 하이드 파크(Hyde Park)에 위치하고 있다. 하이드 파크에는 시카고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 신학부를 포함하여 장로교 교단 소속인 맥코믹신학교(McComick Theological Seminary), 유니테리안 교단 소속인 미드빌롬바드신학교(Meadvill·Lombard Theological Seminary), 천주교 소속인 천주교신학교(Catholic Theological Seminary), 루터교 교단 소속의 루터교신학교(Luthern School of Theological at Chicago) 등이 밀집해 있다. 인근에는 미국침례교단 소속인 북침례신학대학원, 언약교단 소속인 노스팍신학대학원, 성공회 소속인 시베리-웨스턴신학대학원, 감리교 소속인 게레신학대학원, 복음적인 자유교회 소속인 트리니티신학대학원, 천주교 소속인 먼델레인신학대학원 등과 분포되어 있어 중서부 신학의 중심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 신학교들은 상호 등록제를 통해 각 학교에서 오픈하는 과목들을 자유롭게 수강할 수 있다.
현재 시카고대학 안에 위치하고 있는 시카고신학교는 미국 연합그리스도교회 교단 소속 신학교로서 1855년 세워졌으며 박사과정시 시카고대학 신학부에서 학점의 반 이상을 수강해야 하는 등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시카고신학교는 미국 연합그리스도교단 학생뿐만 아니라 개신교와 천주교, 동방정교회 나아가 유대교 계통의 학생까지 수학하고 있는 초교파, 범교단적 신학교이다.
시카고신학교는 설립 때부터 목회실습교육을 중요시했다고 한다. 학생들은 교회와 지역사회의 문화와 생활에 대해 배우고 이 커리큘럼은 신학교육에 입문하는 실습교육의 구성요소였다. 모든 과정의 학생들은 다방면의 목회사역지에 참여하여 일정한 지도와 감독을 받아야 하며 자신 스스로의 평가와 사역실습보고를 해야 한다.
시카고신학교는 역사적으로 교수와 학생 모두 시민운동에 매우 적극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학생들과 교수들은 사회적 문제와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성명서 등을 발표하면서 대처하곤 했다. 현재의 신학생들도 다양한 사회운동과 인권단체 활동에 가담하고 있다.
이와 관련 시카고신학교는 마틴 루터 킹 명예학위를 주는 최고의 고등기관으로서도 명성이 자자하다. 이 상은 1986년 남아프리카공화국 기독교의 반 인종차별 운동에 앞장섰던 투투주교에 수여되기도 했다.
시카고신학교를 거쳐간 한국동문으로는 미국장로교(PCUSA) 총회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총회장에 선출된 이승만 목사(69)를 꼽을 수 있다. 또한 권명수(1998), 김옥연(1997 가정폭력 피해자를 위한 치유목회-한인과 한인교포를 중심으로), 김의식(1996 한국유교 가족제도 속에서의 부부외도에 관한 연구), 김창주(2001 신학의 해체인가 새로운 신학인가: 이사야 40-55장을 중심으로), 김필진(1996 상호성, 협력, 정의에 기초한 새로운 인간공동체 모색: 한국 상황의 관점·현 대전신학대학교 목회상담학 교수), 송순열(1995 사도행전에 나타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God-Fearers): 역사적 배경과 문학적 기능을 중심으로·현 한신대 신약학 교수), 오성주(2000 분단이데올로기로부터 오는 문화적 편견을 극복하기 위한 제의 공동체론 연구), 오성춘(1986 목회학적 관점에서 본 방언현상의 비평과 이해·현 장신대 목회상담학 교수), 이상직(1986 화이트 헤드 철학에 있어서 종교상징론의 이론과 실천·현 호서대 조직신학 교수), 이정기 (1998), 임경수(1999), 현경식(1997 요한복음 고별담화에 있는 사랑 윤리에 대한 수사학적인 연구·현 전주대 신약학 교수), 황헌영(1998 한, 수치와 분노: 피해자들이 겪는 악의 경험에 대한 자기심리학적 접근)도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밖에 림택권(DMin 목회학·현 아세아연합신학대학 총장), 김춘기(Th.M 현 장신대 신약학 교수), 박주수(Ph.D 현 장신대 목회상담 교수), 이달(Ph.D 현 한남대 신약학 교수), 임영택(Ph.D 현 협성대 기독교교육학 교수)도 시카고신학교에서 수학했다.
장신대 오성춘 교수는 시카고신학교가 매우 실천적인 학교로 특히 임상목회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신학의 학맥을 찾아서(13) - 에모리 대학교>
비판적 학문의 자유와 보수적 신앙이 하나로
미국의 동남부 중심인 애틀랜타에 자리잡은 에모리대학교(Emory University)는 1836년 설립되어 현재의 옥스퍼드칼리지가 있는 자리인 옥스퍼드에서 첫 수업을 시작했다. 미국 연합감리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에모리대학교는 원래 미 연합감리교의 유명한 감독이었던 존 에모리를 기념하여 세운 학교다. 1914년 미 연합감리교는 신학대학을 애틀랜타에 설립할 것을 결의하고 1915년에 에모리대학교의 일부가 되게 하였다. 그 당시 에모리는 정식대학교로 출범하였고 캔들러(Candler) 감독의 이름을 따서 캔들러신학부(the Candler School of Theology)로 명명하였다.
캔들러신학부의 목적은 현대사회 안에서의 교회와 목회사역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를 높이고, 소명받은 자로서의 의미 있고 창의성 있는 교역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함양함에 있다. 이러한 능력 발휘는 졸업 후의 목회현장에서가 아니라 신학교 재학 중에 제공되는 다양한 현장실습 프로그램과 목회실습과 인턴과정들을 통하여 제시, 점검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에모리의 신학교육은 실제적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신학교육이 목회와 선교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현대인들의 심리적,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인 상황에 대해 둔감한 편이지만 에모리에는 목회의 중요한 문제들을 직접 현장 속에서 발견하고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에모리의 신학은 에큐메니칼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흑인신학만이 아니라 남미의 해방신학과 여성신학이 자유롭게 논의된다는 점에서 에모리는 학문의 자유가 거의 완벽하게 보장된 곳이다.
1965년 에모리의 교양학부 종교담당 교수였던 알타이저가 ‘타임’지에 ‘신은 죽었다’라는 표제의 글을 실은 이후 에모리는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에모리는 성시비판학과 같은 자유주의 신학의 유산을 내버리지 않았으며 도리어 비판적 학문의 자유와 복음적 신앙을 결합해내려는 노력을 부단히 했다.
1979년을 전후해서 에모리의 신학노선은 런연이라는 경건하고 비판적이며 관용적인 신학자에 의해 서서히 새로운 전환을 이루었다. 런연은 에모리의 학풍을 쇄신하기 위해 그동안 학문적인 신학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존 웨슬리의 신학에 몰두했으며 유럽과 북미의 부르주아 계층의 급진신학을 넘어 남미의 해방신학의 새로운 등장에 귀를 기울였다. 런연의 노력으로 에모리는 복음주의적인 학자들과 급진적인 학자들이 상극하지 않으면서 더불어 신학할 수 있는 분위기를 이루게 되었다.
에모리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 신학자들로는 전 서울신대 학장이었던 조종남 박사(1966 요한 웨슬레의 세례관에 대한 연구)를 먼저 꼽을 수 있다. 조종남 박사 이후 1970년대 들어서 맹용길(1974 하나님의 명령-칼 바르트의 신학적 윤리에 관한 연구· 전 장신대 교수), 박영식(1975), 박은규(1975 디아스포라 회중의 코이노니아와 제자의 도리: 그리스도 안에서 돌보는 공동체) 등이 박사학위를 받았다. 80년대에는 김관련(1982 실천신학 ·현 협성대 교수), 남재현(1982 박정권의 사회정치이념: 정치윤리적 신학적 한 연구 기독교윤리학 ·현 연세대 교수), 이계준(1980 신학박사), 이기춘(1985 신학박사 교류분석에 기초한 한국에서의 자각과 성장목회-몰트만의 교회론을 참조하며 실천신학 ·현 감신대 교수), 이원규(1981 종교와 통합: 종교적 헌신과 아노미 삶의 만족도와의 상관관계 종교사회학 ·현 감신대 교수), 장영일(1987 탄원시에 나타난 억압의 주제 ·현 장신대 교수) 등이 학위를 받았다.
또한 90년대에는 방성규(1999 하나님 경외의 재발견: 사막교부들의 금언에 관한 연구), 신민규(1996 미국 돌봄목회의 개관과 한국신학교 상황내에서의 이의 잠재적 기여), 안석모(1992 토착적 목회양호와 목회신학을 위하여: 찰스 걸킨의 목회해석학에 비추어 본 한국의 恨 케이스 실천신학 ·현 감신대 교수), 이후정(1991 존 웨슬리 신학에 있어서의 새창조론 역사신학 ·현 감신대 교수), 정연락(1995 신누가복음-사도행전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말씀: 누가신학의 한 연구 ·현 안양대 교수), 정중호 (1990 철학박사 모세의 노래(신 32:1-43)와 호세아-베가의 갈등 구약신학 ·현 계명대 교수) 등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00년에 들어서는 김정선(2000 트라우마와 주변성: 여성주의적 트라우마 이론을 이용한 미국내 한국 이민자들을 위한 목회적 돌봄과 목회상담을 위한 개념적인 모델 목회상담 ·현 한일장신대 교수)이 학위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감신대 김외식(실천신학), 박종천(조직신학) 교수, 목원대 박은규(실천신학) 교수, 성공회대 정재현(철학적 신학) 교수, 고신대 최덕성 (역사신학)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박형용 총장도 에모리에서 학위를 받았다.
에모리 한국동문들은 에모리가 신학을 위한 각 학문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여러 학문과의 대화는 물론이고 특히 학문하는 자세에 대한 윤리적 성찰을 통해 전문가이기 전에 통전적이고 균형잡힌 지도자를 육성하는 곳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첫댓글 제목만 조금 수정했을 뿐 원본 그대로입니다. 분량은 A4 "34페이지 분량"입니다. 하루에 조금씩 "13일 동안" 나누어 보신다면 다 보실 수 있을 듯합니다. 원래 조금씩 따로 올라와 있던 것인데 제가 한꺼번에 묶어놓다 보니 분량이 많아지게 되었네요. 위에 있는 내용도 비판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한국신학의 흐름"을 대략적이라도 알아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올려 보았습니다. 그런데, 켈리포니아에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건 어떻게 된거죠?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와 어떤 연관이 있나요?
윗글과 관련하여 이왕이면, "철저한 개혁주의 전통을 지향하는 신학교"도 같이 알아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하지만 쉽지 않네요. 특히, 바울-어거스틴-칼빈-웨민에 충실한 신학교가 어디 일까요? 고신의 이병수 교수가 리폼드 신학교 출신이라던데, 리폼드 신학교의 성향은 어떤지 또 궁금해지네요.
리폼드 신학교의 수준과 성향은 모르지만 고신의 이병수교수는 조금 알지요. 예전에 선교학 강의를 한 학기 들은 경험이 있는데,선교학 내용을 떠나서 이교수 스타일은 부흥사 장경동목사와 별로 다를게 없는 두리뭉실,좋은게 좋은,잘 해보자입니다. 학교의 성향이 중요하지만 보수적인 성향의 신학교 출신 목사들 중에도 왜그리 이상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지...
리폼드는 수준이 떨어집니다. 멘체스터가 좋습니다. 화란 자유대학도 좋구요, 많이 잇겠지요?
이름만 리폼드인가보군요. 멘체스터나 화란 자유대학은 바울-어거스틴-칼빈-웨민의 신학에 충실한가요? 저는 개인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이 좋거든요. 그런데, 아는 게 워낙 없어놔서 모르는 게 천지네요. 궁금증만 많군요.
똥통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묻지 말아 주세요. 그냥 똥통 같은 느낌이니깐....
ㅎㅎㅎ 똥통 속에도 구더기가 있고, 그 구더기조차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혁주의'님께서 좀 더 관대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쥴리앙님, 참고자료로 힘써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염려스러운 것은, 이런 학맥자료로 한국교계의 계보를 이해하는 것에는 도움이 될 지 모르지만, 오히려,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전부터, 학연,지연을 따라서, 판을 짜는 습성을 한민족이 오래전부터 익혀왔던 것입니다.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도 있었지요, 그런 습성이 끼친 영향력 말입니다. ^^....저의 학맥을 넷상에서 전혀 공개하지 않는 이유를 아실런지...
홀리죠이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참고 자료로 올린 것 뿐이지만, 제 생각이 짧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론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