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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由來
始祖 : 張順翼(장순익)
始祖 張順翼(諡號는忠貞)은 張貞弼의 5世孫으로 張智賢의 셋째 아들이다. 그가 高麗 때에 金紫光祿大夫(금자광록대부), 門下侍中으로 丹陽君에 封해졌기 때문에 後孫들이 丹陽을 本貫으로 하였다.
▣ 科擧及弟者(朝鮮時代)
張莪(장아) : 文科 世宗8年(1426) 式年試同進士
張宇樞(장우추)(1694 甲戌生) : 文科 英祖26年(1750) 式年試 丙科
張亨運(장형운) (1551 辛亥生) : 文科 宣祖13年(1580) 別試 丙科
張振忠(장진충) (1623 癸亥生) : 武科 孝宗2年(1651) 別試 丙科
張德文(장덕문) (1595 乙未生) : 武科 仁祖15年(1637) 別試 丙科
張河龍(장하룡) (1607 丁未生) : 武科 仁祖22年(1644) 別試 乙科
張天江(장천강) (1591 辛卯生) : 武科 仁祖15年(1637) 別試 丙科
張應三(장응삼) (1601 辛丑生) : 武科 仁祖15年(1637) 別試 丙科
張義元(장의원) (1603 癸卯生) : 武科 仁祖15年(1637) 別試 丙科
張景(장경) (1593 癸巳生) : 武科 仁祖15年(1637) 別試 丙科
等 모두 47名의 科擧及弟者가 있다.
(文科 3名, 武科 14名, 司馬試 27名, 醫科 1明, 律科 2名)
▣ 行列字(항열자)
37世 用 甫
38世 鳳 九
39世 南 柄
40世 寧 行
41世 成 盛
42世 起 熙
43世 庠 慶
44世 宰 華
45世 重 廷
46世 揆 昊
47世 學
48世 東
49世 寅
50世 卿
51世 振
52世 範
53世 -
54世 -
55世 -
56世 -
▣ 本貫沿革
本貫所在地 : 忠淸北道 丹陽
丹陽은 忠淸北道 丹陽郡 地域의 옛 行政區域名으로 高句麗의 赤山縣 或은 赤城縣 一帶였다. 丹陽은 三國時代에 三國이 角逐을 벌였던 地域으로, 551年(新羅 眞興王12)에 百濟와 新羅의 共同作戰으로 新羅의 領土가 되어 眞興王이 巡視할 때 세운 赤城碑가 남아 있다. 757年(景德王16)에 奈提郡(내제군)(堤川)의 領縣이 되었다.
940年(高麗 太祖23)에 丹山縣으로 이름을 바꾸고 1018年(顯宗9)에 原州에 屬하였다가 뒤에 忠州의 屬縣이 되었다. 1291年(忠烈王17) 監務를 두면서 獨立하였고, 1318年(忠肅王5)에 丹陽으로 改稱하여 知郡事로 昇格하였다. 1413年(太宗13)에 郡이 되었고, 1895年(高宗 32) 地方制度 改正으로 忠州府의 管割하에 들어갔다가, 1914年에 郡面 廢合으로 永春郡을 倂合하여 丹陽郡이 되었다. 1979年에 丹陽面이 邑으로 昇格되었다.
▣ 人口數
統計廳의 人口調査에 依하면 丹陽張氏는
1985年에는 銃 7,365家口 30,521名,
2000年에는 總 10,541家口 33,295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되었다.
□ 단양 장씨 (丹陽張氏)
◆淵源(연원) 및 由來(유래)◆
시조(始祖) 순익(順翼:충정공)은 도시조(都始祖) 정필(貞弼)의 현손(玄孫)으로, 고려에서 시랑(侍郞)을 역임한 지현(之賢:자는 군망, 호는 송계)의 세째 아들이다.
그가 고려조(高麗朝)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문신의 관계로 종 2품 벼슬)·문하시중(門下侍中) 등을 지내고 단양군(丹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단양(丹陽)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1> 시조 : 장순익[張順翼]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단양(丹陽)은 충청북도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적산현 혹은 적성현이었는데
신라 때 내제군의 영현이 되었고, 고려초에 단산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에 영춘군을 병합하여 단양군이 되었다.
단양 장씨(丹陽張氏) 는 동원(同源)이면서도 계보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선단양(先丹陽)으로 불리우는 첫째 계통은 장씨(張氏)의 도시조 태사공 장정필(張貞弼)의 증손인 지현(之賢)의 아들 장순익(張順翼)이 고려때 금자 광록대부로 문하시중에 올라 단양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단양으로 삼게 되었고, 후단양(後丹陽)으로 불리우는 둘째 아들 장갑용(張甲用)과 세째 장무용(張戊用)을 관조로 하는 계통이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단양군 순익(順翼)의 아들 재일(載鎰)이 고려조에서 상장군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한문(漢文)은 고려 고종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보문각 직제학을 역임하고 나라에 공을세워 단양군에 봉해져서 가세를 일으켰다.
한편 조선조에서 황해 감사와 호조참의를 역임했던 중란(仲蘭)의 아들 윤화(允和)는 정용낭장으로 한양환도에 공을 세워 단산군에 봉해졌으며, 태종과 동갑계원으로 친분이 두터웠다. 그의 아들 지(祉)는 강원 감사를 지내고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며 매서운 절개를 지켰다.
한말에 와서는 윤덕(胤德)이 의병을 규합하여 영주, 풍기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중 부상하여 체포된 뒤에도 계속 항거하다가 총살당했다.
후단양 계통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조선 초기에 한성부윤을 역임한 덕랑(德郞)과 예조 판서에 올랐던 계증(繼曾)이 유명했고, 중종반정에 공을 세웠던 온(溫)은 정국3등 공신으로 단양군에 봉해져서, 호조참판을 지낸 강(綱), 공조참판 석규(錫奎), 사헌부 감찰 준 (準) 등과 함께 단양 장씨를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단양장씨(丹陽張氏)는 남한에 총 30,51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경기도 화성군 장안면 석포리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초원리
경기도 개풍군 남면 옥산리 경북 영풍군 장수면 호문리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서리 경북 의성군 단북면 연제동
충북 단양군 일원 경북 안동군 와용면 대동
충남 예산군 대술면 시산리
【주요파】
▲청계공파
▲사헌공파
▲정헌공파
▲호부공파
▲제학공파
▲단양백파
▲민양공파
□ 장(張)씨의 유래
총63개의 본관과 810,231명이 있다.(1985년)
우리나라의 모든 장(張)씨는 중국에서 들어왔으며, 크게 3 갈래로 볼 수 있다.
덕수 장씨의 시조 장순용은 아랍(이슬람)계의 사람으로 고려 고종 때에,
절강 장씨의 시조 장해빈은 조선 선조 정유재란 때에,
안동 장씨의 시조 장정필의 선조는 신라 말에 각각 중국에서 들어 왔으며,
그밖의 대부분의 장씨는 안동 장씨에서 분관되었다. 그러나 흥성, 나주, 순천, 진천 등은 장유를 시조 또는 선조로 하고 있으나 서로 시기나 내용이 맞지 않는다.
또한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 등에 장보고 등 장씨 성을 가진 여러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들의 본관과 계통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유래]
시조 장순익(시호는 충정)은 장정필의 5세손으로 장지현의 셋째 아들이다. 그가 고려 때에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으로 단양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단양을 본관으로 하였다.
[인구] 30,521명이 있다.(1985년)
우리 나라 각관 장씨의 기원은 중국으로부터 도래하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고려 왕건태조 창업초 개국공신인 장정필(태사공)은 신라 말에 덕수장씨 시조 선무장군 장순용은 고려 고종연대에 원나라 제국공주 출래시 시종관으로 절강장씨 시조 장해빈은 조선 선조 조 정유난 당시에 각기 중국으로 부터 입국하여 이 3인의 자손이 현재 전국에 산거 하고 있다 한다.
이외에도 신라 및 백제 태봉 발해시대에 장보고, 장웅, 장변, 장건영, 장빈, 장분, 장희암, 장무, 장일, 장문휴 같은 명장거유가 삼국유사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들의 출생지 및 관향 계통과 유래는 알 수 없다. 또한 장견은 중국관서 흥농인으로
대광공주 출래시 시종신인 8학사중의 한 사람으로 고려초에 입국하여 광종무오(고려개국 40)에 김자광록대부시중상서를 역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역시 계보를 알 수 없고 고려사에 의하면 신라말에 장유는 피난차 중국 오나라에 건너가 화어를 습득하고 귀국하여 고려 광종 때 광평시랑을 지냈고 아들 연우는 현종 때 호부상서 좌복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흥성과 흥덕장씨는 장유를 시조로 하였고, 봉성, 옥강, 옥천, 결성, 단양, 목천, 려흥, 순천등 제장씨는 장유가 장경의 아들이며 장정필의 10세손이라고 하였으나 장유가 신라에서 생장했는지 중국에서 귀화했는지 확실치 않다. 어쨌든 우리나라 장씨는 덕수와 절강장씨를 2제외한 인동(옥산) 안동, 순천, 구례, 봉성, 단양, 목천, 울진, 결성, 흥성, 흥덕, 하산, 려흥, 부안등 제 장씨는 장정필의 혈손으로서 그를 도시조로 하고 있으나 각 관계보간에 연대의 차이가 있으니 박고정정함이 좋을 것으로 안다.
도시조 장정필은 본래 중국 절강성 소흥부용흥 사람이다. 888년에 출생하여 5세 때 난을 피하여 아버지 원을 따라 동래하여 강원도 강릉에서 경북 인동 노전으로 옮겨 살았다. 18세 때 사신을 따라 입당 24세 때 대과에 장원하였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입산하여 수천제자 에게 성현의 도를 가르치니 덕비강유하고 행의효우와 문장 학행이 중화에서 뛰어나 시인이 당세부자 라고 하였다. 천자가 그의 현준함을 듣고 소명근강 하였으므로 나아가 이부상서를 지내면서 병화로 학교가 황폐되자 성균관을 창건하여 조의로 의관문물 혼상제례를 그의 제도로 준행하니 당시의 이주이여라 하였다. 소인각로 김남석의 무고로 기관 귀국하여 인동노전에서 제가 수백인에게 예의를 강학하고 조두지례를 제정하니 세인이 석서 대현이요 금동(고려)부자라 약전약후동방일인이요 동방천재지종사라 하였다. 930년(고려 태조13) 김선평 권행과 함께 향병을 모아 안동에서 후백제 견훤을 토벌하여 병산대첩의 공을 세웠고 935년에 신라를 공략하여 삼한통합에 공이 컸으므로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 태사령운사, 고창군에 옥산부원군이 더해지고 록권을 하사받았다. 후세 사람들이 그 공덕을 추모하여 인동에 노전서원을 세워 제향하고, 안동에 삼태사공 신묘를 세워 삼태사를 숭배하고 매년 춘추에 향사한다.
★ 63개의 본관과 810,231명이 있다.(1985년)
結城張氏(결성장씨) 德水張氏(덕수장씨) 安東張氏(안동장씨) 仁同張氏(인동장씨) 求禮(鳳城)張氏(구례봉성장씨) 木川張氏(목천장씨) 禮山張氏(예산장씨) 全州張氏(전주장씨) 羅州張氏(나주장씨) 扶安張氏(부안장씨) 沃溝張氏(옥구장씨) 浙江張氏(절강장씨) 丹陽張氏(단양장씨) 順天張氏(순천장씨) 蔚珍張氏(울진장씨) 知禮張氏(지례장씨) 鎭安張氏(진안장씨) 晉州張氏(진주장씨) 鎭川張氏(진천장씨) 昌寧張氏(창녕장씨) 靑松張氏(청송장씨) 興城(興德)張氏(흥성(흥덕)장씨 興陽張氏(흥양장씨) 永同張氏(영동장씨)
장씨의 내력
장씨(張氏)의 본관(本貫)은 문헌(文獻)에 40여 본(本)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30본(本) 미만으로 추정된다. 그중에서 덕수 장씨(德水張氏)와 절강 장씨(浙江張氏)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장씨는 도시조(都始祖)인 장정필(張貞弼)의 후손으로서 동원 분파(同源分派)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通念)이다.
「안동장씨세보(安東張氏世譜)」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에 의하면 태사공(太師公) 정필(貞弼)은 중국(中國) 절강성(浙江省) 출신으로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고창군(古昌郡:현재의 안동지방)에서 김선평(金宣平:신안동 김씨의 시조)·권행(權幸:본명은 김행, 안동 권씨의 시조) 등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전공(戰功)을 세워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태사(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의 작위(爵位)를 받고 고창군(古昌郡)에 봉해졌다고 한다.
한편 외래 귀화(外來歸化) 성씨(姓氏)로 알려진 덕수 장씨(德水張氏)는 뿌리를 회회계(回回系)에 두고 있으며, 원(元) 나라 세조(世祖) 때 필도지(必●赤:원래의 몽고의 직명으로 문사를 주관하는 자, 문서를 맡은 자를 뜻함)를 역임하고 노국공주(魯國公主:공민왕 비)를 배행(陪行)하여 고려에 귀화한 장경(張卿:일명 장백창)의 후손이라고 하나, 「덕수장씨족보(德水張氏族譜)」와 「고려사(高麗史)」에는 그의 아들 순령(舜龍)이 제국공주(齊國公主:충렬왕 비)를 따라 고려에 귀화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첨의평리(僉議參理)·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등을 지내고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져 덕수현(德水縣)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받아 세계(世系)를 이어온 것으로 전하고 있다.
또 다른 한 계통(系統)인 절강 장씨(浙江張氏)는 중국(中國) 항주 조강현(抗州鳥江縣) 출신으로 조선(朝鮮) 선조조(宣祖朝)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장수(將帥)로 와서 군위(軍威)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한 장해빈(張海濱)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現在)의 모든 장씨(張氏)는 장정필(張貞弼)·장순룡(張舜龍)·장해빈(張海濱) 3계통에 연원을 두고 덕수와 절강 장씨를 제외한 모든 장씨(張氏)가 장정필(張貞弼)의 후예라는 일반적인 통념(通念)에서도 정확한 계대(系代)를 알지 못해 합보(合譜)를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오늘날에 와서 장씨(張氏)는 이본(異本)이라도 통혼(通婚)을 하지 않으며, 인동(仁同)·결성(結城)을 비롯한 대다수의 장씨(張氏)가 동원(同源)임을 주장하고 범장씨(凡張氏)의 결속을 다지며 매년 봉행(奉行)되는 태사충헌공(太師忠獻公:장정필)의 시향대제(時享大祭)에 함께 참례하고 있다.
결성(結城), 구례(○○), 나주(○○), 단양(丹陽), 덕수(德水), 목천(木川), 봉성(鳳城), 부안(○○), 순천(順天), 안동(○○), 예산(○○), 옥구(옥구), 울진(蔚珍), 인동(仁同), 전주(○○), 절강(○○), 지례(○○), 진안(○○), 진주(○○), 진천(○○), 창녕(○○), 청송(○○), 흥성(興城),
□단양장씨의 내력
단양 장씨(丹陽張氏) 단양(丹陽)은 충청북도 북부, 동단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적산현(赤山縣:혹은 赤城縣)이었는데 신라 때 내제군(奈堤郡)의 영현(領縣)이 되었고, 고려 초에 단산(丹山)으로 개칭되었다. 1018년(현동 9)에 원주(原州)에 속했다가 뒤에 충주(忠州)로 이속되고, 고종 때 고을 사람들이 합단(哈丹)의 난을 물리친 공으로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1318년(충숙왕 5)에 지단양군사(知丹陽郡事)가 되었다. 1413년(조선 태종 13)에 군(郡)이 되고, 1895년(고종 32)에 충주부(忠州府) 의 관할하에 들어갔다가 1914년에 군면 폐합에 따라 영춘군(永春郡)을 병합하여 단양군이 되었다. 단양 장씨(丹陽張氏) 는 동원(同源)이면서도 계보(系譜)를 달리하는 두 계통(系統)이 있다. 선단양(先丹陽)으로 불리우는 첫째 계통은 장씨(張氏)의 도시조(都始祖) 태사공(太師公) 장정필(張貞弼)의 증손인 지현(之賢)의 아들 장순익(張順翼)이 고려(高麗) 때 금자 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단양군(丹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단양으로 삼게 되었고, 후단양(後丹陽)으로 불리우는 둘째 아들 장갑용(張甲用)과 세째 장무용(張戊用)을 관조(貫祖)로 하는 계통이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단양군(丹陽君) 순익(順翼)의 아들 재일(載鎰)이 고려조에서 상장군(上狀軍)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한문(漢文)은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여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역임하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단양군(丹陽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한편 조선조(朝鮮朝)에서 황해 감사(黃海監司)와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역임했던 중란(仲蘭)의 아들 윤화(允和)는 정용낭장(精勇郎將)으 로 한양환도(漢陽還都)에 공(功)을 세워 단산군(丹山君)에 봉해졌으며, 태종(太宗)과 동갑계원(同甲契員)으로 친분이 두터웠다. 그의 아들 지(祉)는 강원 감사(江原監司)를 지내고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隱居)하며 매서운 절개를 지켰다. 한말에 와서는 윤덕(胤德)이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영주 (榮州), 풍기(豊基) 등지에서 일본군(日本軍)과 싸우던 중 부상하여 체포된 뒤에도 계속 항거하다가 총살당했다. 후단양(後丹陽) 계통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조선(朝鮮) 초기에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한 덕랑(德郞)과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올랐던 계증(繼曾)이 유명했고,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웠던 온(溫)은 정국3등공신(靖國三等功臣)으로 단양군 (丹陽君)에 봉해져서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낸 강(綱), 공조 참판(工曹參判) 석규(錫奎),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준 (準) 등과 함께 단양 장씨를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단양 장씨(丹陽張氏)는 남한(南韓)에 총 7,365호, 30,51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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