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목숨의 무게
김영수
생때같은 푸른 목숨이 무리 지어 스러진 참담한 현실을 보고 있다. 기막힌 자기 죽음을 아직 스스로 알지 못한 채 대부분의 슬픈 영혼들은 중음(中陰)의 경계를 떠나지 못하고 떠돌고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번 이태원 참사를 보면서, 내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군 복무 기간 중에 시퍼런 목숨이 떠나가는 마지막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아린 경험이 자연스럽게 눈앞에 떠 올랐다. 이제 더 희미해져서 잊혀지기 전에, 그들을 위한 진혼(鎭魂)의 마지막 글로 그 기억들을 남겨 놓아야 할 것 같아 경기도 평택에 있는 수도사(修道寺), 승방(僧房) 한켠에서 이렇게 몇 자 적기를 시작해 본다. 이 글의 바탕에는 목숨의 무게에 있어 왕후장상(王侯將相)이든, 장삼이사(張三李四)이든 ‘티끌만큼도 서로 차이 없이 똑같다’라는 믿음이 깔려 있음을 우선 밝혀둔다.
34개월 15일.
대학 1학년 때 데모를 하다 강제 징집되어 병장으로 만기 제대할 때까지 복무한 군 생활 기간이다.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데모와 나와의 상관관계는 물과 기름처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사람들을 하나의 집단 군중으로 휘어잡는 능력이 원래 없었기 때문에 데모 주동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었다. 그저 데모대 중간쯤에서 어정쩡 하게 참가하다가 남들처럼 날렵하지 못한 둔한 몸 때문에 데모할 때마다 붙잡혀 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몇 번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취조하는 형사 손에 들려 있는 데모 채증 사진 10장 중에는 환하게(?) 소리치고 있는 내 얼굴이 포함된 사진 7, 8장이 늘 있었다. 담당 형사가 ‘너는 진짜 빨갱이’라고 쉰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런데 그 말은 틀려도 한참 틀렸다고 할 수 있었다. 왜냐면 초등학교 3학년 때 미술 시간에 김일성(金日成)이를 뿔이 난 아주 무서운 도깨비로 잘 그려, 상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해, 겨울 어느 추운 날, 거주지 관할 경찰서 형사가 집으로 찾아와 ‘국가가 부른다’고 강제 징집 영장을 연애편지 전하듯 조용히 전해 주고 돌아갔다. 사실 ROTC 과정을 이수하여 짧은 기간이지만 장교로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싶었는데 그 꿈은 결국 그렇게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 데모하다가 징집된 대학생들은 논산 훈련소로 보내지 않고 서울 인근 어느 사단에서 모질게 훈병 훈련을 받게 했다. 그리고는 대부분이 최전방 보병 소총수로 울며불며 팔려(?)가게 만들었다. 그런데 나는 줄(?)을 잘 선 덕에 특과인 ‘의무병과’(주특기 번호 : 810)를 받아 6주간 후반기 교육을 경상북도 대구에서 받고, 씩씩하고 늠름한 이등병 ‘위생병’이 되었다. 그리고 자대 배치받은 곳은 최전방과 서울 중간쯤에 있는 00 병원이라는 육군 병원이었다.
대학 물을 그래도 조금 먹고 왔다고 병원 의무 행정을 보게 되었다. 환자들의 행정을 보는 일반 병원의 원무과 같은 곳이었는데 응급 상황일 경우 중환자실, 수술실 등 가리지 않고 지원을 나갔다. 물론 서울에 있는 국군 수도통합병원으로 환자 이송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주했다.
그곳 군 병원에서 생때같은 20대 초반의 기막힌 많은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뒷수습을 하게 되었다. 병원으로 들어오는 환자 병력은 주로 질병에 걸려 치료차 후송되어 들어 왔지만, 유격 훈련을 받다가, 공수 훈련을 받다가, 사단 간 훈련인 CPX 중에 부상 당해, 그리고 선임들의 무자비한 구타 때문에 아니면 자해, 자살 시도로 인해 병원으로 들어오는 병력이 계속 이어졌었다. 주로 차량을 이용하여 후송되었지만 위급한 상황에서는 헬리콥터도 동원이 되었다.
당시에는 부대 안에서 구타 사고가 빈번했고, 음주에 따른 사고도 많았다. 제대를 며칠 앞두고 부대 안에서 회식을 하다, 화장실 가는 빙판 위에서 넘어져 뇌진탕으로 후송되어 온 말년 병장 환자가 있었다. 그 환자는 며칠을 무의식인 코마(coma)상태에서 찬송가 비슷한 노래(?)를 부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22세였다. 중환자실에는 의식이 없는 환자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이 무의식 속에서 하는 말이나 행동 등을 위생병들은 기록으로 남겨, 추후 유족에게 전달했다. 심지어는 단발마 같은 유언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었다. 힘든 군대 생활을 견디지 못해, 또 이런저런 아픈 사연으로 자해하고, 자살하는 병사도 많았는데 주로 개인 화기인 소총을 이용하여 자살을 시도했고 대부분은 총구를 입에 물고 젓가락을 낀 방아쇠를 발로 당겼다.
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하고, 한 달여 만에 환자 후송에 처음으로 따라가게 되었다. 장파열 환자였는데, 전방 사단에서 후송 온 사병으로 선임 구타에 의한 장파열이었다. 환자 상태가 심각해서 수도 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 조치가 결정되었다. 엠불런스에 환자를 싣고, 선임 고참은 앞 좌석에, 나는 환자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뒷좌석, 환자 옆에 앉았다. 환자의 산소호흡기, vital sign, 수혈 상황 등을 수시로 확인하면서 서울에 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들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 병원에서 서울로 응급 후송을 할 때 넘는 제법 큰 고개가 있는데, 살아날 환자는 그곳을 무사히 넘어가고, 그 반대인 경우, 고개에 도착하기 전, 사망한다는 미신 같은 속설이 있었다. 그 고개 중간쯤을 넘고 있는데 환자의 산소호흡기에서 ‘컥’ 소리가 나면서 환자는 호흡을 멈췄고 심장 박동과 맥박이 잡히지 않았다. 병원을 출발할 때, 마지막 안간힘으로 의식의 끝자락을 잡고 군의관에게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라고 힘겹게 애원한 병사였다. 나와 선임은 차를 세우고, 번갈아 가면서 심폐 소생술인 인공호흡, 심장 마사지를 한 시간 가까이 실시했는데 우리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끝내 감지 못한 환자의 동공은 이미 풀려 있었다. 간단한 염(殮)으로 급하게 시신을 수습했고, 우리는 귀대(歸隊)해야만 했다. 수도 국군통합병원에서는 ‘숨 쉬는’ 병력만 받았고, 후송 도중 사망한 ‘숨 안 쉬는’ 사체(死體)는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체 수습이 어느 정도 된 다음, 입대 후, 몇 개월이 지났지만, 아직 집에 가보지 못한 나는 선임에게 집에 한번 가 봤으면 좋겠다고 통사정을 했다. 시간 다투어 후송할 환자가 이미 사망한 상황에서 서울 출신인 선임도 내 사정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 길로 우리는 엠불란스 사이렌을 울리면서 서울로 달려갔다. 어느새 잔치 분위기가 된 집에서 오랜만에 포식을 하고 귀대했다. 이제는 터널이 생긴 그 고개를 가끔 지날 때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내가 첫 번째로 후송한 눈망울이 선했던 스무살이었던 사병이 생각나곤 한다. 그런데 부모님에게는 그날 시신이 실린 엠불란스를 골목에 세우고 집을 찾아갔었다는 사실을 두 분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끝내 말씀드리지 못했다.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많은 사체를 수습했다. 거의 모두가 20세 전후의 젊디젊은 청년들이었다. 대부분 눈을 감지 못한 채 운명했는데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시신 중 하나는 CPX 훈련 중, 타고 있던 짚 차가 탱크의 무한궤도에 휘말리는 바람에 사망한 병사를 들 수 있다. 사람 형태가 참혹하게 흩어진 신체를 우리 위생병들이 하나하나 연결했고 특히 복합 골절이 된 두개골을 본래의 상태로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수습을 해서, 유족들이 알아볼 수 있게 했다. 어떤 시신이든 수습을 할 때는 위생병 모두는 에칠 알코올을 적신 마스크를 몇 겹씩 착용했다. 체질적으로 술을 마시지 못하는 나는 에칠 알코올에 취해 비몽사몽 간에 시신을 수습하여야만 했다.
군 생활 내내, 많은 젊은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고, 그들이 먼 길 떠나는 것을 배웅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을 때까지 끝끝내 의식의 마지막 끈을 움켜쥐고 살기 위해 필사의 몸부림을 치는 젊은 병사의 처절한 모습을 수없이 보면서 그 아픔과 슬픔을 같이했다. 그때 내 나이도 20세대 초반, 세상 물정 전혀 모르는 청년에게 타자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를 확인하는 일은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불가항력으로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해, 그리고 죽음 이후에 대해 점차 인식이 무감각하게 마비 되어갔고 익숙한 일상이 되어 갔다.
그 당시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생각은 인간의 삶과 죽음, 신과 절대자 그리고 종교였다. 그런 생각과 생각 사이에, 길어봐야 100년을 한 번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절대자와 신이 실수로 인해, 아니면 의도적으로 개입하고 간여하는 것은 절대 없어야 한다는 믿음도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는 신과 절대자가 존재한다면 20대 초반의 젊은 목숨을 저렇게 허망하게 거두어 갈 수 없다는 원망과 한탄이 어느새 매달리게 되었다. 내 인식의 한계 안에서 신과 절대자의 자리를, 그 그림자를 더듬어 보았지만 그들은 내 인식 밖의 불가촉 존재, 끝내 만날 수는 없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는 젊은 병사의 손을 잡고, 동공 풀린 그들의 뜬 눈을 내려 감길 때마다 우화 같은 윤회나 동화 같은 부활, 그리고 치기어린 장난 같은 예지 예정이 내 오감(五感)으로 느껴지지도,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았다.
이 글을 쓰는 오늘까지 이태원 참사에서 희생된 목숨이 156명에 이르고 아직도 많은 사람이 병원에서 치료 중이라고 한다. 안타깝게 떠난 희생자들은 평소 각자의 종교와 믿음에 따라 ‘더는 아픔이 없고, 기막힌 죽음이 없는 곳’으로 가기를 기원하며 다친 사람들의 조속한 쾌유를 빈다. 아울러 그동안 무심히 잊고 있었던 군 생활을 하면서 내가 떠나보낸 젊은 영혼들도 늘 편하게 잠들어 있기를 새삼 기원해 본다.
그리고 대학생 교련 반대 데모를 하다가 강제 징집되었기 때문에 당시 교련을 1년 받으면 군 생활 1개월 혜택(?)이 있었는데 그것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33개월 15일로 끝날 군 생활을 34개월 15일로 영광스럽게 마쳤음을 끝으로 밝히면서, 혹시라도 운전 중에 군 엠불란스를 만날 경우, 길 터주기를 부탁드린다. 그 안에는 시간을 다투는 우리 아들, 손자의 젊은 목숨이 있기 때문이다.
2022년 11월 8일 속초에서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