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818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5 : 충청도 의림지가 있는 제천
제천시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정인지는 그의 시에서 제천을 “지세가 가장 높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틀리지 않아 충주시보다 100여 미터가 더 높다. 충북 사람들은 제천 사람들을 두고 “속곳 바람으로 십 리를 달려도 끄떡없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제천 사람들의 강인하고 끈질긴 기질을 나타낸 것이다. 제천시의 한 면이 된 청풍을 이승소는 시를 통해 이렇게 칭송하였다.
호남의 50성을 두루 다녀보았지만 경치 좋은 땅, 오늘에야 그윽한 정취에 맞네. 백 척의 푸른 다락 바람을 내려다보아 산뜻하고, 푸른 벽 천 길이나 쇠를 깎아 만든 듯싶다. 산이 좋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납극(蠟屐, 나막신에 초를 바름. 진나라의 현인 완부는 나막신을 좋아하여 납을 발라 윤이 나게 하였다 함)을 하려고 생각하고, 강이 맑으니 나를 불러서 먼지 낀 갓끈을 빨게 한다. 도
원이 반드시 인간세상이 아닌 것은 아니다. 고기잡이 늙은이를 따라 이 생을 보내려 한다.
이승소가 말한 도원은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구절로, “무릉의 고기잡이하는 사람이 어선을 타고 도원에 들어가 진(秦)나라 때 피난 와서 사는 사람을 만났는데, 참 살기 좋은 곳이었다. 돌아올 때 곳곳에 표를 하고 다시 찾아갔으나 찾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만큼 청풍의 경치가 아름답고 살고 싶어지는 곳이었다는 이야기다.
제천군과 청풍군이 합쳐져 하나의 군이 된 것은 1914년이었다. 제천은 산이 낮아서 훤하고 명랑하며 또한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들이 많았다고 한다. 북쪽에 있는 의림지(義林池)는 김제의 벽골제(碧骨提), 밀양의 수산제(守山提)와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3대 인공 수리시설로 알려졌는데, 신라 때 큰 둑을 쌓고 물을 막아서 논에 물을 대던 곳이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신라 진흥왕 13년(552)에 악성 우륵이 의림지를 쌓았으며 그 뒤 7백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박의림이라는 현감이 다시 쌓아 의림지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서편에 있던 후선정(候仙亭)은 김씨 집안의 것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대신 순조 7년에 새로 세운 영호정(暎湖亭)과 경호루(鏡湖樓) 등의 정자가 서 있다.
의림지 © 유철상의림지는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와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3대 인공수리시설로 알려졌는데, 신라 때 큰 둑을 쌓고 물을 막아서 논에 물을 대던 곳이다.
제천의 북쪽은 평창과 가깝고 동쪽은 영월과 경계가 맞닿았다. 이중환은 그곳을 “만첩 산중에 있는 깊은 산골이므로 참으로 난리를 피하고 속세를 피할 만하다”라고 하였는데, 『동사강목』을 지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이 제천에서 태어났고, 생육신의 한 사람인 원호가 기거했던 곳이기도 하다.
직제학을 지냈던 원호는 단종이 강원도 영월에서 연금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서 벼슬을 내놓고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 번자리에 살면서 관란정(觀瀾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원호는 날마다 이 정자에 올라 단종이 있는 곳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짓고 탄식하다가 날이 저물면 비로소 돌아가고는 하였으며, 철 따라 나는 과물(果物)을 나무 상자에 넣어 정자 밑을 흐르는 시냇물에 띄워서 단종에게 보냈다고 한다.
한편 송학면 포전리(浦田里)는 개울가에 밭이 있어서 지어진 이름으로 개앗마을로도 불리는데, 강원도 영월로 가는 관행 길 근처 주막이 있는 길가에 있어 주막거리라고도 불렸다. 나그네들이 쉬어 가던 그 주막집에서 하룻밤 묵으며 주막과 마음의 풍경을 「주막집에 자면서」라는 시로 남긴 사람이 김시습이었다.
외로운 주막에서 쓸쓸히 밤늦도록 앉았는데
나무 끝에 뜨는 달이 시원하고도 고요해라.
무슨 일로 서편 창가의 내 마음을 흔드는가?
외로운 베개에 의지하며 화포 금할 길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