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으로 양주 경계까지 14리이고, 서쪽으로 교하현까지 21리, 남쪽으로 양천현 경계까지 26리고, 북쪽으로 파주 경계까지 19리인데 서울과는 37리 거리다.
건치연혁 고봉현(高峯縣)은 본디 고구려 달을성현(達乙省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고봉이라 이름 바꿔 교하군 속현으로 만들었다. 행주(幸州)는 본디 고구려 개백현(皆伯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우왕(遇王)-일명 왕봉(王逢)이라 한다.-이라 고쳐 한양군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기에 행주로 바꾸고 -일명 덕양(德陽)이라고도 한다.- 현종 9년에 고봉ㆍ행주 두 현을 모두 양주에 예속시켰다. 부원현(富原縣)은 본디 과주 용산처(果州龍山處)인데, 고려 충렬왕 11년에 부원 황조향(荒調鄕)이라 고쳤으니, 본디 부평부(富平府) 속현이었는데 본조 태조 3년에 비로소 고봉 감무(監務)를 설치하고, 행주ㆍ부원ㆍ황조향을 고봉에 예속시켰다. 태종 13년에 고봉ㆍ덕양 두 현의 이름에 가리어 지금 이름인 고봉으로 고쳐 현감으로 만들었다. 성종 2년에는 경릉(敬陵)ㆍ창릉(昌陵) 두 능이 있어 군으로 승격하였다. 관원 군수ㆍ훈도 : 한 사람씩.신증 연산 갑자년에 본군을 혁파하고 그 지역을 비워 놀이터로 만들며 나머지 땅은 갈라 이웃 고을에 붙였고, 지금 임금 초년에 다시 군을 설치하였다. 군명 달을성(達乙省)ㆍ고봉ㆍ행주ㆍ개백ㆍ우왕ㆍ왕봉ㆍ덕양. 성씨 고봉 : 고ㆍ진(秦)ㆍ강(康)ㆍ송ㆍ전(田). 행주 : 최ㆍ김ㆍ강(康)ㆍ부(夫)ㆍ은(殷)ㆍ기ㆍ고ㆍ전(田)ㆍ칙(則)ㆍ나(那)ㆍ차(車)ㆍ이(李) : 다른 곳에서 온 성이다. 용산 : 변(邊)ㆍ이ㆍ강(康) : 모두 다른 곳에서 온 성이다. 건자산(巾子山) : 황보(皇甫). 산천 장령산(長嶺山) : 군 북쪽 18리 지점에 있다. 대자산(大慈山) :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고령산(高嶺山) :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성지산(星知山) : 군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건자산(巾子山) :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견달산(見達山) : 군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건지산(巾之山) : 군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혜음령(惠陰嶺) : 군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압도(鴨島) : 군 남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둘레는 22리다. 갈대가 생산되는데 선공감(繕工監)에서 해마다 베어가 나라 살림에 쓴다. 박만도(朴萬島) : 군 남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둘레가 10리다. 가둔천(街頓川) : 군 동쪽 5리 지점에 있는데, 물 근원이 양주 홍복산에서 나와 교하현 학당포(學堂浦)로 들어간다. 북포(北浦) : 군 남쪽 20리 지점에 있는데, 양화도(楊花渡) 하류다. 덕수천(德水川) :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물근원이 청당동에서 나와 북포로 들어간다. 토산 웅어ㆍ게ㆍ은구어. 봉수 소질달산 봉수(所叱達山烽燧) : 군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북쪽으로 파주 대산(大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서울 모악(母岳)에 응한다. 고봉성산 봉수(高峯城山烽燧) :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서쪽으로 교하현 금단산(黔丹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봉현(蜂峴)에 응한다. 봉현 봉수(蜂峴烽燧) : 군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서쪽으로 고봉 성산에 응하고, 동쪽으로 서울 모악에 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 정이오 기(記)에, "태조께서 천명을 맡은 지 3년 만인 갑술년에 도성을 한양에다 정하고, 고봉을 갈라 현으로 승격시켰다. 태종이 왕위에 오른 지 15년 갑오 가을 8월에 고봉ㆍ덕양을 합치고 왕지를 받들어 고양이라 이름을 바꿨으니, 대개 덕양은 곧 형주를 겸한 명칭이었다. 홍희(洪熙) 기원 갑진년 8월에 현감 하군(河君)이 처음 와 공관이 무너지고 더러워도 수리하지 않는 것을 돌아보고 '이렇게 되어서는 왕인(王人 왕의 사신)을 예대할 수 없다.' 하였다. 다음 병오년 봄에는 거의 다 무너졌으므로 감사 심도원(沈道源)에게 고하여 조정에 전문(轉聞)하게 하여 윤허하는 교지를 받들었다. 재목을 모으고 장인을 불러 그해 가을 8월에 역사를 시작하였다. 집이 높고 아름다우며 제도가 크고 넓으니, 질서가 있게 단단하여 한 가지도 빠진 것이 없다. 담장을 두르고 꽃나무를 섞어 심어서 무성하였다. 동헌 앞에는 못을 파 연을 심었고, 서헌(西軒) 앞에는 돌을 빼고 우물을 팠다. 여름과 봄 사이는 햇볕이 명랑하고 연꽃이 향기로우며 샘물이 차고 맑으니, 이것은 또 다른 현에는 없는 것이다. 문묘와 학교를 건립하고, 남별관(南別館)과 옛 관청도 옛 제도에 보태기도 하고 새 집을 창건하기도 하여 차례로 이루니 웅장한 모습이 서로 바라보인다. 무신년 11월에 공사를 마치고 하군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기문을 청하였다. 대저 하군이 고양을 다스림과 고양이 하군을 만남이 다른 때가 아니고, 오늘이 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리요. 지금 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되어 백성은 수송하는 수고로움이 없으며 오직 밭 갈고 우물 파는 것을 일삼았으니, 원된 자는 정령이 번거롭지 않아도 공이 쉽게 이루어졌음을 알겠다. 더구나 하군은 인으로 어루만져 사랑하고 의로써 시행하고 있다. 그 역사에 무리 지어 달려와서 공역을 도운 것이 반드시 분명하다. 수령은 백성과 가까운 관직이니 백성이 편하면 이것으로 족하다.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은 감사를 공경하는 데에 있고, 감사를 공경하는 것은 성심으로 법을 준행하는 것 뿐이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지금 감사는 주ㆍ현과 한 마음으로 하지 않는 자가 많다. 감사는 오로지 주ㆍ현을 사찰하고자 하고, 주ㆍ현은 오로지 가려서 덮어두려 한다. 그러지 말고 성심으로 함께 하며, 주ㆍ현이 다스림을 이루지 못하는 바가 있거든, 가르칠 만한 것은 가르치고 독촉할 만한 것은 독촉할 것이다. 그래도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 중에서 심한 자를 가려 한 둘을 쫓아 버려 여러 사람을 경계하는 것이 옳다.'하였다. 심공과 하군은 한 마음으로 함께 다스린 자라 할 수 있다. 하군의 이름은 부(傅)이며, 전조 재상이었던 원정공(元正公) 집(執) 후손이다. 관직에 있어서나 일을 처리하는 데에 모두 가법(家法)이 있으니, 이번 일만 보아도 사람됨을 알 수 있다. 내 하군과 같은 고을인 진주 사람이므로 문사(文辭)가 졸렬하지만, 사양하지 아니하고 그를 위해서 기쁘게 쓰는 바이다."하였다. 학교 향교 : 군 동쪽 1리 지점에 있다. 역원 벽제역(碧蹄驛) : 군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중국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기 하루 전에 이 역에서 반드시 유숙한다. ○ 예겸(倪謙) 시에, "길은 왕경(王京)으로 들어가는데 이 밤 기온이 차다. 두 행렬의 횃불이 말안장에 번지는구나. 청산을 지나온 것이 얼마나 될까. 분명히 눈을 들어 보지 못하였네."하였다. ○ 기순(祈順) 시에, "초가에 우는 닭이 4경을 알렸는데 가라말이 객을 재촉해 왕경에 가자 한다. 많은 역부(驛夫)는 분주해 구름 모으는 것 같고, 여러 횃불은 얼기설기 불성[火城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줄지어 늘어세운 횃불]이런가 의심한다. 좋은 산은 길을 껴서 경치를 분변하기 어렵고 다리를 지나 흐르는 물은 소리만 들리네. 날이 환하게 밝자 가랑비 내리는데, 황은(皇恩)을 선포하는 것이 이번 걸음에 있다."하였다. ○ 동월(董越) 시에, "사신이 전번에 산을 바쁘게 지나는데 가려는 맘 급해 바라보는 눈이 아찔하다. 초목은 무정(無情)하다고 나를 웃을 것이다. 풍랑은 곳곳마다 제영을 남기지 않았네. 돌아가는 행장엔 청유막(靑油幕)을 가졌고, 가는 말은 그대로 벽옥 발굽 뒤집는다. 기러기가 물가를 따른다는 것을 비로소 믿겠다. 진흙 눈의 자취가 동서를 함부로 가네."하였다. 신증 왕창(王敞) 시에, "사성(使星)이 어젯밤에 요서(遼西)에 비치더니, 동쪽으로 돌아와서 벽제역을 지난다. 준마 뼈에 채찍질 해 천리마를 재촉하고, 향기로운 혼이 땅에 가득하니 당리(棠梨) 꽃이 떨어졌네. 수목은 여름에 들어 겹 그늘에 합쳤고, 새는 사람을 멈추기 위해 뜻이 있게 운다. 청쇄(靑鎖 궁문)를 떠나온 뒤에 꿈에도 그리웠는데, 문득 사적(仕籍)을 통해 금규(金閨)에 올린 것을 보았네."하였다. 덕수원(德水院) : 덕수천 남쪽 언덕에 있다. ○ 이색이 덕수에서 비를 만나 지은 시에, "성문을 나기 전부터 비가 동이로 쏟더니 성문을 나서니 경위(涇渭 경수는 흐리고 위수는 맑음. 즉 사물의 청탁을 이른다.)를 분간하기 어렵다. 예전에는 흥이 나면 빗속에도 중의 집을 보았는데, 오늘은 시름 깊어 여관에서 빗소리만 듣는다. 벽을 사이한 빠른 우레는 샘에 돌이 떨어지고 처마에 가득한 찬 기운 남에 구름이 핀다. 남북으로 잦은 나그네 길 꺼리지 않는 건 반쯤은 나의 어버이, 반은 임금을 위해서."하였다. 인후원(仁厚院) : 군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이태원(梨泰院) : 군 동남쪽 50리 지점에 있다. 중방원(重房院) : 군 동쪽 50리 지점에 있다. 신증 흥복원(興福院) : 군 북쪽 6리 지점에 있다. 불우 대자암(大慈菴) : 대자산에 있다. ○ 서거정 시에, "산속에서 여윈 말 채찍질하고, 절 안에서 고승과 이별한다. 빽빽한 수목엔 구름도 어둡고 명랑한 모래엔 물이 절로 맑다. 거친 둔덕에 예전 빗돌을 찾고 기우는 날에 전조의 능(前陵)을 조상한다. 가을을 슬퍼하는 객이라 말라. 다락집 오르니 한이 많네." 하였다. 정인사(正因寺) : 경릉 동쪽에 있다. ○ 김수온(金守溫) 중창기에, "능침에 절이 있음은 무슨 일일까. 대개 사왕(嗣王)이 선왕을 추모하여 능침 측근에 절을 세워 인사(仁祠)로 삼아서 삼보를 높이고, 명혼(冥魂)을 천도하기 위한 것이다. 한ㆍ당 이래로 영명(英明)하고 의로운 임금이 그렇게 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것은 제왕이 근본에 보답하고 영구하게 추모하는 데에 극진함을 다하는 도리였다. 천순(天順) 기원 가을 8월에, 우리 의경대왕(懿敬大王)이 승하하시었으므로 고양군 동쪽 봉현(蜂峴)에 장사하였다. 장사한 다음 해에 세조 대왕께서 내수사에 전지(傳旨)하기를, '내 아들 의경이 불행하게 수명이 짧아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다. 초상 장사에 일이 거창하였으니, 거듭 나라를 번폐스럽게 하지 않고자 한다. 너의 내수사는 현실(玄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절 한 구역을 만들어라. 혹시라도 폐단을 끼치지 말고 완성하게 하라.' 하였다. 드디어 그 해 모월 모일에 능 동쪽에 절 터를 잡고 넓혀 역사를 시작하였는데, 열두 달을 지나 마쳤다. 신묘년 봄에 우리 인수 왕비(仁粹王妃) 전하께서, '절을 그때 급속하게 지었으므로 재목이 매우 좋지 못하고 지음새가 정밀하지 못하였다. 가령 오래 되지 않아 썩고 허물어지면 무엇으로써 후세에 보일 것인가.' 하고, 이에 판내시부(判內寺府) 신(臣) 이효지(李孝智)에게 명하여 그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게 하였다. 그리고 궁중에서 물품 중에 일찍이 절약한 것을 쌀과 베로 계산한 약간을 내수사에 주었다. 장차 날을 가려서 예전 집을 철거하고 새로 창건하려는 데, 대왕대비 전하께서, '의경 대왕과 예종 대왕 두 능의 현실이 아주 가까와서 한 절의 종소리가 서로 들릴 만한 곳이다. 만약 인수 왕비의 개축하려는 원심(願心)을 인해서, 힘을 합치고 재물을 함께 하여 정인(正因)의 일을 도우면 공이 쉽게 이루어지고, 내가 의경ㆍ예종을 위해 천복(薦福)하는 정성도 또한 거의 이루어질 것이다.' 하였다. 이에 내수사에 특별히 신칙하여 돈과 곡식을 더 내도록 하고, 이어 진실로 모자라면 수시로 알리게 해 보태도록 하였다. 그 해 2월에 시작했는데, 부역시키지 말고 백성을 뽑아 노역에 싻을 주도록 명하였다. 마침 서울 가까운 지역에 흉년이 들어 늙은이 젊은이를 막론하고 앞을 다투어 품팔아 먹었다. 삽을 멘 자가 구름같이 모이고 동아줄 당기는 데 개미처럼 붙어 두드리거나 치는 것을 보지 않아도 사람들이 기꺼이 일에 나아가므로, 겨울 10월에 이르러 일이 이루어졌으니, 총 1백 19칸이었다. 방앗간과 변소도 각각 제자리에 있고 바르고 칠한 단청을 휘황 현란하게 하였다. 전당(殿堂)과 골마루가 통활 장려하고, 방과 헌함과 문이 선명 정밀하였다. 집이 높다랗고 상설(象設)이 빛나서 사찰로서 아름다움이 봉선사(奉先寺)와 서로 첫째 둘째로 될 만하다. 전당 제도와 칸살의 넓고 좁음은 모두 전일에 판화엄 대선사 설준(判華嚴大禪師雪峻)이 아뢰어서 윤허를 받은 대로였다. 인수왕비 전하께서, '절은 있으나 곡식이 없으므로 중이 의지할 곳이 없다.' 하여 특히 미곡 백 섬을 시주하여, 본곡(本穀)은 남겨 두고 이자만 이용하여 식륜(食輪)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무릇 집기 등속도 죄다 여유 있게 구비하였다. 계사년 4월 초파일에 낙성 법회를 크게 열고 대승(大乘) 여러 경(經)을 인출하였다. 이날 오색 구름이 있고 이상한 향기가 골에 가득하며 서기(瑞氣)가 하늘에 뻗쳤다. 원근에 있던 중 수 만여 명이 쳐다보고 절하며 일찍이 없던 일임을 감탄하였다. 신은 엎드려 생각하건대, 모자 사이 은혜와 부부 사이 윤기(倫氣)는 천지간 떳떳한 의리에 근본한 것으로 천자로부터 서인까지 통한 것이다. 우리 의경대왕과 예종대왕은 한창 시절이었고 성덕이 새로워지는 중이었는데, 문득 여러 신하들을 버렸다. 이 때문에 대왕대비 전하와 인수왕비 전하께서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한 정에서 나오는 것이니, 비록 천지를 다하고 만고에 이르도록 변하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그러나 온 나라 신민이 한갓 두 대비가 선왕의 명복을 위해서 삼보를 독실히 믿고, 사찰을 장엄하게 한 것이 이 같음을 알 뿐이고, 두 대비가 모자간의 은혜를 돈독히 하고 항려(伉儷)간의 예의를 삼가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밝히는 것이 억조 군생이 보고 감동하는 기회가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큰 역사를 마쳤으나 한 가지 일이라도 백성을 수고롭게 함이 있을까 걱정하고, 큰 공덕은 완성했으나 한 자만큼의 베라도 나라 것을 소비했을까 염려하여, 그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신 전전긍긍한 심회는 또 신민들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 주상 전하께서 두 대비 전하의 지극하신 뜻을 받들고, 선왕의 지극하신 은택을 생각하여 시절 따라 친히 거둥하여 몸소 희생과 폐백을 능에 드리며, 신정(宸情)이 생생하여 서리와 이슬에 출척(怵惕)하는 감회를 견디지 못하신다. 그리하여 절이 능침 곁에 있으므로 이에 왕지(王旨)를 내려, '우리 인수 왕비께서 시주하신 전지(田地)와 노비 외에 여러 가지 요역(徭役)을 다 면제하고, 승도(僧徒)들을 편히 살게 하여 번뇌가 없게 하라.' 하시었고, 은사(恩賜)가 여러 번이나 많았다. 이것은 대개 사왕(嗣王)이 선왕을 추념하여, 근본에 보답하고 처음을 생각하는 지극하신 덕으로서 진실로 천재(千載)에 없었던 성스러움이었다. 이것은 대개 효도로써 백성을 다스리는 극치(極致)로서 신명에 통하고, 불승(佛乘)을 감동시켜서 하늘의 온갖 복을 받음이 억만 년일 것이며, 자손 만대에 한없는 경사를 누릴 것이다. 아, 성한지고." 하였다. ○ 정인지 시에, "원릉은 채색 구름 가에 엄숙하고, 사찰은 빼어난 메 앞에 높다랗다. 금벽 채색 빛나서 아침 햇볕이 쬐고, 달랑거리는 풍경 소리는 바람이 멀리 전한다. 불등(佛燈)은 넓게 삼천계(三千界)를 미치고 국운은 응당 억만 년에 뻗치리라. 정맹(精猛)한 두타(頭陁)는 법좌에 올라 묘법을 말하고, 진전(眞詮)을 부연한다." 하였다. ○ 최항(崔恒) 시에, "달은 주림 삼계(珠林三界)의 그림자를 흩고, 비는 금지 시방(金地十方)의 추위를 나눈다. 후산(緱山)에 학이 가니 공연히 구슬프고, 정수(鼎水)에 용이 옮기니 다시 아득하다." 하였다. ○ 서거정 시에, "목어(木魚)가 소리나니 아침 멧부리 고요하고, 돌말[石馬]이 소리 없는데 새벽 능침이 춥다. 주수(珠樹)에 두견이 우니 봄이 적적하고, 정호(鼎湖)에 용이 가니 달이 망망하다." 하였다. ○ 노사신(盧思愼) 시에, "교산(橋山)에 아름다운 기운이 성한데, 탑묘(塔廟)는 원침(園寢) 앞에 높다랗다. 바다도 안 보이는 구름 탄 신선이 멀고, 공덕이 성취하니 각월(覺月)이 불등(佛燈)을 전한다." 하였다. ○ 성임 시에, "서쪽으로 능원을 바라보니 어디쯤인가, 송추(松楸)에서 보일락말락 절문 앞일세. 산 중에는 구름이 아침마다 변하고, 달 아래 종소리가 밤마다 들려온다." 하였다. 나암사(羅巖寺) : 군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소화사(小華寺) : 군 남쪽 15리 지점, 호숫가에 있다. ○ 고려 인분(印份) 시에, "파초 잎이 발 밖에서 우니, 산에 비 오는 줄 알겠고, 돛대가 봉우리 위에 나오니, 바다에 바람 있는 줄 알겠다." 하였다. 어침사(魚沈寺) : 고령산에 있다. 흥복사(興福寺) : 무을고리(無乙古里)에 있다. 사묘 사직단: 군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하나는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고, 하나는 행주에 있다. 여단(厲壇) : 군 북쪽에 있다. 능묘 경릉(敬陵) : 분조 덕종(德宗)의 능이다.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는데, 서울과의 거리는 30리쯤이다. ○ 강희맹 시에, "노반(露盤)이 구름가에 솟았으니, 멀리 원릉이 절 앞에 있는 줄 알겠다. 만 구렁 송추에는 아름다운 기운이 감쌌고, 상방(上方) 종 소리는 묘한 여운(餘韻)을 전한다. 조정에 나아가던 금학(禁鶴)을 일찍이 어느 날이던가. 교산(橋山)에 장사한 것도 이미 옛날이었다. 큰 경사는 마침내 보력(寶曆)을 빛나게 했다. 하찮은 신하는 머리 조아리며 말을 마친다." 하였다. ○ 최숙정(崔淑精) 시에, "생학(笙鶴)으로 하늘에 조회하며 돌아오지 않는다. 성 서쪽 10리쯤이 곧 후산이구나. 연기와 노을은 송(松)ㆍ삼(杉)이 서 있는 길을 어둡게 잠갔고, 구름과 안개는 범과 표범 굴을 깊게 감추었다. 이날 빈번(蘋蘩)은 깨끗하여 제물로 올릴만하고, 당년 궁검(弓劍)은 아득하여 부여잡기 어렵다. 두견새 소리 괴로워라 마음 상한다. 봄 바람에 눈물 뿌리니 점점이 아롱진다." 하였다. 신증 : 연산군 10년에 소혜왕후(昭惠王后)를 부장하였다. 창릉(昌陵) : 본조 예종의 능이며, 안순왕후(安順王后)를 부장하였다. 경릉 북쪽에 있다. 고려 공양왕릉(恭讓王陵) : 견달산(見達山)에 있다. 최영묘(崔瑩墓) : 대자산에 있는데, 무덤 위에 지금도 풀이 나지 않는다. ○ 변계량 시에, "위엄을 떨쳐 나라를 구하노라 살쩍이 하얗고, 말 배우는 거리 아이도 그 이름을 다 안다. 한 조각 장한 마음만은 응당 죽지 않았으리. 천추에 길이 대자산과 함께 우뚝하다." 하였다. 성령대군 묘(誠寧大君墓) : 다자산에 있다. 월산대군 묘(月山大君墓) : 군 북쪽 2리 지점에 있다. 신증 황치신 묘(黃致身墓) : 군 북쪽 16리 지점, 덕수촌(德水村)에 있다. 김전 묘(金詮墓) : 군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고적 고 고봉현(古高峯縣) : 지금 관아(官衙)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봉(峯)을 봉(烽)이라 한 곳도 있다. ○ 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한씨(漢氏) 미녀(美女)가 달을성현 높은 산 위에 봉화를 올려서 안장왕을 맞이하였던 까닭으로, 뒤에는 고봉으로 이름하였다." 하였다. 왕봉 폐현(王逢廢縣) : 곧 행주이다.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 김부식이 이르기를, "한씨 미녀가 개백현(皆伯縣)에서 안장왕을 맞이하였던 까닭으로 왕봉이라는 이름으로 고쳤다." 하였다. 부원 폐현(富原廢縣) : 군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과천현(果川縣)에 내속하였는데, 곧 용산처(龍山處)이다. 지금 성 밑 10리 지역은 한성부(漢城府)에 속하였다. 황조향(荒調鄕) :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주섭리(注葉里)라는 속칭이 있다. 율악 부곡(栗岳部曲) : 고봉현에 있다. 군 서쪽 12리 거리다. 장사향(長史鄕) : 군 동쪽 10리 지점 건지산 밑에 있다. 파을곶소(巴乙串所) : 행주에 있다. 건자산소(巾子山所) : 건자산 밑에 있다. 인물 고려 기홍수(奇洪壽) : 행주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글씨를 잘썼고 문장에 능하였다. 장성하여서는 무반(武班)을 좇아 벼슬이 특진벽상 삼한삼중대광 문하시랑(特進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郞)에 이르렀고, 시호는 경의(景懿)다. 기수전(奇守全)ㆍ기자오(奇子敖) : 정중부(鄭仲夫)가 난을 꾸민 이후로 권신(權臣)이 잇달았으나, 자오는 조용하게 도리로써 끝까지 왕실을 보좌하여 옛 왕업을 잃지 않게 하였다. 막내딸이 원나라 순제(順帝)의 제2왕후가 되어, 태자 애유식리달랍(愛猷識理達臘)을 낳았으므로 원나라에서 자오에게 병덕승화육경공신(秉德承和毓慶功臣)으로 추증하고 영안왕(榮安王)으로 봉하였다. 본조 기건(奇虔) : 청렴하고 조촐하여 현달(顯達)하였다. 벼슬이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무(貞武)다. 우거 본조 신효(申曉) : 과거에 장원으로 뽑혔고, 사간원 정언으로 파직되었다. 시골에 돌아가 벼슬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서호산인(西湖散人)이라 하였다. 효자 본조 배철중(裵鐵重) : 호군 형효(護軍亨孝) 아들이다. 어미 이씨가 악질(惡疾)에 걸렸는데 철중이 손가락을 끊어 약에 타서 먹였더니 어머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전하 3년에 정려하고 복호(復戶)하였다. 열녀 본조 석금(石金) : 고을 아전 식배(植倍) 아내이다. 노산군(魯山君) 때에 식배는 역당에 연좌되어 사형되었다. 석금이 6일 동안이나 먹지 않고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나는 예(例)에 의하여 먼 지방에 유배될 것이며 반드시 데리고 가는 자에게 몸을 더럽히게 될 것이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하고는, 드디어 목매어 죽었다 신씨(申氏) : 참판 송영(宋瑛) 아내다. 영이 죽자 3년 동안 여묘하고 친히 제사 지냈다. 복을 마치고도 조석 전(奠)을 생시와 똑 같이 하였다. 전하 3년에 정려하고 복호하였다. ≪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 군(郡)으로 고쳤다. 고읍 행주(幸州) : 서남쪽으로 30리 강변에 있는데 본디는 백제의 개백(皆伯)이다. 문주왕(文主王) 원년에 고구려가 취하여 왕봉(王逢)으로 고치고, 뒤에 신라로 돌아가 경덕왕(景德王) 16년에 우왕(遇王)으로 고쳐 한양군(漢陽郡)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에 행주로 고치고, 현종(顯宗) 9년에 양주(楊州)에 속했다가 본조 초에 이에 속하게 되었다. ○ 읍호는 덕양(德陽)이며 고려 성종(成宗)이 정하였다. 부원(富原) : 남쪽으로 50리에 있으며, 한성부조에 자세하다. 성지 고봉고성(高峯古城) : 옛 현 북쪽에 있다. 행주고성(幸州古城) : 옛 현 남쪽에 있다. 고토성(古土城) : 사포면(蛇浦面) 들판 가운데에 남은 터가 있다. 봉수 해포(醢浦) : 서남쪽으로 25리에 있다. 역참 혁폐ㆍ행주역(幸州驛)ㆍ벽제참(碧蹄站). 방면 원당(元堂)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5리다. 구이동(九耳洞) :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다. 사리대(沙里垈)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다. 하도(下道) :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다. 구지도(求知道)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0리다. 중면(中面) : 서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다. 사포(蛇浦)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다. 송산(松山) : 서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다. 오른쪽으로 5면이 모두 국변을 연해서 들이 있다. 혁폐 황조향(荒調鄕) : 서쪽으로 35리에 있는데, 지금 주엽리(注葉里)이다. 본디는 원평(元平)에 속했으나 본조 태조 3년에 여기에 속하게 된 것이다. 장사향(長史鄕) : 남쪽으로 25리에 있다. 율악(栗岳) 부곡(部曲) : 서쪽으로 22리, 고봉(高峯) 근처 땅이다. 건자산소(巾子山所) : 서남쪽으로 20리인데, 별아산(別阿山)이라 부른다. 진도 행주진(幸州津) : 양천(陽川) 공암진(孔巖津)과 마주 있다. 임의진(壬意津) : 서쪽으로 35리며, 김포(金浦) 간로(簡路)와 통한다. 사원 문봉서원(文峯書院) : 숙종 무진년에 건립하여 기축년에 사액하였다. 민순(閔純) : 개성편에 보인다. 남효온(南孝溫) : 자는 백공(伯恭)이고, 호는 추강(秋江)이며, 의령(宜寧)사람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김정국(金正國) : 장단(長端)편에 보인다. 기준(奇遵) : 자는 자경(子敬), 호는 복재(服齋)인데 행주(幸州) 사람이다. 중종 신사년에 화를 입었으며, 벼슬은 전항에 이르렀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정지운(鄭之雲) : 자는 정이(靜而), 호는 추만(秋巒)이며 경주 사람인데, 청렴한 명성과 곧은 절개의 소유자였다. 홍이상(洪履祥) : 자는 원례(元禮), 호는 모당(慕堂)이며 풍산(豐山)사람이다. 벼슬은 대사헌 증 영의정(大司憲贈領議政)이었다. 이신의(李愼儀) : 자는 경측(景則), 호는 석탄(石灘)이며 금의(金義)사람이다. 벼슬은 □조 참판에 이르렀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이다. 이유겸(李有謙) : 자는 수익(受益), 호는 만회(晩懷)이며 우봉(牛峯) 사람이다. 벼슬은 호조 참의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기공사(紀功祠) : 순조(純祖) 신축년에 세웠으며,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권율(權慄) : 자는 언신(彦愼)이며 안동 사람이다. 벼슬은 호조 판서 도원수 영가부원군(戶曹判書都元帥永嘉府院君)이었으며 시호는 장렬(莊烈)이다. 능침 희릉(禧陵) : 원당리에 있으며, 중종비(中宗妃)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 능으로 기신은 3월 2일이다. 초장(初葬)은 헌릉(獻陵) 오른쪽 언덕에 했었는데, 중종 무자년에 이 곳으로 천장(遷葬)하였다. ○ 직장(直長)과 참봉이 10명씩이다. 효릉(孝陵) : 희릉 서쪽 언덕에 있으며, 인종 대왕 능이다. 기신은 7월 1일이고,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를 합장하였는데, 기신은 7월 29일이다. ○ 별첨(別添) : 참봉이 1명이다. 명릉(明陵) : 경릉(敬陵) 동쪽 언덕에 있는데, 숙종대왕 능이다. 기신은 6월 8일이고,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도 합장하였다. 기신은 8월 4일이다. ○ 별첨 : 참봉이 1명이다. 익릉(翼陵) : 경릉 동쪽 언덕에 있는데,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 능이다. 기신은 10월 26일이다. ○ 영(令)ㆍ참봉이 1명씩이다. 홍릉(弘陵) : 창릉(昌陵) 왼쪽 언덕에 있으며, 영조비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 능인데, 기신은 2월 15일이다. ○ 영ㆍ참봉이 1명씩이다. 순회묘(順懷墓) : 경릉 왼쪽 언덕에 있는데, 명종조(明宗朝) 순회세자 묘다. 기신은 9월 26일이고 공회빈(恭懷嬪) 윤씨 기신은 2월 3일이다. ○ 수위관(守衛官)이 2명 있다. 소현묘(昭顯墓) : 효릉(孝陵) 오른쪽 언덕에 있으며, 인조 조의 소현세자 묘이다. 기신은 4월 26일이다. ○ 수위관이 2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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