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안 보이는 항암 치료에 몸도 마음도 지쳐가지만, 독자에게 한 내 말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희망을 연구하고 실험하리라. 이 추운 겨울이 지나고 내년 봄 연구년이 끝날 무렵에 멋진 연구 결과를 발표할 수 있다면, 난 지금 세상에서 가장 보람된 연구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작년 12월 장영희 서강대 교수가 본지에 보내온 '2008 겨울, 희망편지―비켜라, 암!, 내가 간다'의 마지막 구절이다.
9일 타계한 장 교수는 본지 칼럼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영미시(英美詩) 산책' '아침논단' 등을 통해 고난에 굴복하지 않는 도전 정신과 긍정적 삶의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작가였다.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한 장 교수는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95년부터 서강대 교수로 재직해왔다. 김현승의 시를 번역해서 한국문학번역상을 수상했고,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으로 올해의 문장상을 받았다.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아 두 다리가 불편했던 고인은 2001년 유방암에 걸렸으나 두 번의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받은 끝에 회복됐다. 그러나 2004년 9월 척추로 암이 옮아왔다. "신(神)은 인간의 계획을 싫어하시는 모양이다. 올가을 나는 계획이 참 많았다." 장 교수는 당시 3년간 본지에 연재하던 칼럼 '장영희의 문학의 숲' 중단을 알리는 마지막 글을 이렇게 시작했다. 이어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고 썼다. 이런 다짐대로, 그는 오뚝이처럼 병마를 이기고 이듬해 강단에 다시 섰다. 그러나 지난해 암이 간까지 전이되면서 학교를 휴직하고 최근까지 치료를 받아왔다.
장 교수는 세 차례에 걸쳐 암과 싸우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2006년 두 번째 암 투병을 이겨낸 뒤에는 이렇게 썼다. "지난 3년간 내가 살아온 나날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른다. 힘들어서, 아파서, 너무 짐이 무거워서 어떻게 살까 늘 노심초사했고 고통의 나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결국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열심히 살며 잘 이겨 냈다. 그리고 이제 그런 내공의 힘으로 더욱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 갈 것이다." 장 교수는 투병 기간 중에도 '문학의 숲을 거닐다' '생일' '축복' 등의 책을 펴냈다.
장 교수는 장애우의 정당한 권익을 찾기 위해서 실천에 나선 행동가였다. 2001년 미국 하버드대 방문교수 시절, 7층짜리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꼭대기 층에 살던 그는 3주 동안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장 교수는 이 아파트를 관리하던 보스턴 굴지의 부동산 회사를 상대로 싸워 사과와 함께 보상을 받아냈다.
유력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는 장 교수의 스토리를 머리기사로 소개했고, NBC TV와 지역 방송들도 앞다퉈 소개해 5400만 미국 장애인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장 교수는 당시 인터뷰에서 "장애인 학생들에게 '스스로 일어서라'고 가르쳐온 내가 적당히 타협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장영희 교수는 최근까지 에세이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샘터)을 마무리하느라 바빴다. 유작(遺作)이 된 이 책 프롤로그에서 그는 "생각해 보니, 나는 지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적을 원한다. 암에 걸리면 죽을 확률이 더 크고, 확률에 위배되는 것은 '기적'이기 때문"이라며 삶에 대한 강한 집념을 적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라며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그는 이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10일 빈소를 찾은 손병두 서강대 총장은 "투병 사실을 듣고, 장 교수에게 강의 수를 줄이라고 권유했는데 듣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떠났다. 하지만 암과 싸우고 있는 환자와 그 가족들, 장애로 힘들어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장영희'라는 따뜻한 촛불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독신이었던 장영희 교수의 유족으로는 어머니 이길자 여사와 오빠 장병우 전 LG 오티스 대표, 언니 장영자씨, 여동생 영주·영림·순복씨 등이 있다. 장 교수의 정신적·학문적 후원자였던 아버지 고(故) 장왕록 서울대 명예교수는 1994년 심장마비로 먼저 세상을 떴다.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13일 오전 9시 서강대에서 장례미사를 치른 뒤 천안공원묘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02)2227-7550
고(故) 장영희 교수 추모 물결… 서강大엔 대자보
"선생님, 오늘은 비가 많이 내리네요. 하늘도 많이 슬픈가 봐요. 선생님껜 항상 받기만 한 것 같아요. 수업 한번 들은 적 없는데 무작정 찾아간 제게 인턴 추천서도 써주시고 장학금도 받게 해주시고…. 선생님,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이제 편히 쉬세요."
온종일 주룩주룩 비가 내린 11일 오후, 고(故)
장영희 서강대 교수의 연구실이 있는
서강대 하비에르 인문관 앞에 장 교수를 기리는 대자보가 나붙었다.
대자보를 쓴 박경담(25·서강대 4학년)씨는 "장 교수님의 수업을 한번도 듣지 않았지만, 2007년 5월 무작정 찾아가서 '인턴 추천서를 써달라'고 부탁드렸다"고 했다. 장 교수는 흔쾌히 승낙했다. 박씨는 장 교수의 추천서 덕분에 그해 가을 미국 버지니아주(州)의 한 시민단체에서 인턴으로 일할 수 있었다. 작년 11월, 박씨는 부친이 운영하던 식당이 문을 닫자 다시 한번 장 교수에게 도움을 청했다. 장 교수는 암 투병 중에도 그가 교수 추천 장학금을 탈 수 있게 추천서를 써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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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일 고(故) 장영희 교수의 연구실이 있는 서강대 하비에르 인문관 앞 게시판에 붙은 ‘대자보 편지’를 지나가던 학생들이 보고 있다./박순찬 기자 ideachan@chosun.com
박씨는 "선생님은 도움을 청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힘을 보태주셨다"며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내가 필요할 때만 선생님을 찾아갔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장 교수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는 12일 오후까지 제자와 지인 등 1600여명이 다녀갔다. 제자들은 저마다 나직이 흐느끼며 스승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영문과 웹사이트와 연결된 인터넷 추모 게시판에도 영문과 재학생과 졸업생은 물론, 다른 과 출신 제자들의 안타까움이 이어졌다.
2년 전 장 교수의 수업을 들은 한 제자는 "수업 때마다 '사랑은 젊음에 대한 의무이다. 항상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게 인상 깊었다"며 "종강할 때 피자를 시켜먹고 단체사진을 찍어 나눠 가진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라고 아쉬워했다.
미국 뉴욕에서 유학 중이라는 한 졸업생은 "제자가 걱정할까 봐 아무렇지 않은 듯 보내신 선생님의 신년 메일을 지난 4월에야 뒤늦게 확인했다"며 "유학을 오기까지 이끌어주시고 격려해 주셨지만 보답할 기회가 없어져 절망적이고 가슴이 메어진다"고 했다.
장 교수와 이야기 한번 제대로 나눠보지 못했다는 한 경영학과 졸업생은 "군 복무 중에 선생님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느낀 따뜻함을 아직 기억한다"며 "조문을 마치고 나와 세브란스 병원에서 신촌기차역으로 건너가는 육교 위에 서서 비를 맞으며 울었다"고 했다.
13일 오전 9시 서강대 이냐시오 성당에서 열리는 장례미사에서 제자 대표로 조사(弔辭)를 낭독할 사람은 이경순(여·39·박사과정)씨다. 지난달 13일 장 교수가 병상에서 손수 이씨에게 메일을 보내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조사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씨는 "하겠다고도, 안 하겠다고도 차마 답장하지 못했다"며 "선생님이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신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했다.
서강대 영문과 이성범 학과장은 "장례 절차를 마치고 유족들과 협의한 뒤 이번 학기 안으로 학내·외 인사를 초청해 고인(故人)을 기리는 '추모의 밤' 행사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