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 타는숲ㅡ40
26. 보석 주머니
혼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난 김주식은 시내 곳곳
을 세 시간 동안이나 택시로 누비고 다니면서 은행의
각 지점에다 12개의 가명구좌를 개설했다. 그가 회사
로 돌아온 것은 네 시가 거의 다 된 무렵이었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비서가 메모된 종이를 가지고
들어왔다. 출타 중 그에게 걸려온 전화 내용이었다.
여러 건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그의 눈을 끈 것은 조
운관광 미스 심으로부터 온 두번의 기록과 시경수사
과로부터의 것이었다.
김주식은 먼저 시경수사과의 번호부터 눌렀다. 담당
형사의 맥빠진 변명같은 수사 진전에 대한 중간 통보
였다. 다음 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미스 심에게 전
화를 걸었다.
"네! 미스 심입니다."
언제 들어도 명랑한 목소리였다.
"응, 나 김상문데."
"아, 상무님! 그렇잖아도 두번이나 전화를 드렸어
요."
"웬일로 전화를 다 했지?"
"왜, 제가 전화 드리면 안 되나요?"
"하도 뜻밖이라서 그렇지."
"오늘 저녁 때 시간이 어떠세요?"
"말씀만 하시면 시간이 문젭니까?"
김주식이 능청을 떨었다.
"그러시지 말구요."
"그래 괜찮아. 무슨 일이야, 대관절?"
"그저 좀 한가하기도 하고 의논드릴 말씀도 있고 해
서. 저녁 사주시지 않겠어요?"
"하아 돈이 있어야지 허허허."
"농담 마시구요. 제가 살께요."
"오오케이 몇시에 어디서?"
"지난번처럼 요 앞에서 기다리면 안 될까요?"
"좋아!"
"여섯시 정각에 나가 있을께요."
수화기를 내려놓은 김주식은 곧장 속주머니 속에서
통장과 도장들을 꺼내 봉투에 넣은 다음 일어나 출입
문의 도어 쪽을 안으로 눌러 잠갔다.
윗저고리를 벗어붙인 그는 자신이 깔고 앉았던 소파
를 옆으로 눕혔다. 바닥에 엷은 헝겊 한 장이 앙상하
게 덮여 있었다. 아무래도 적당치가 않았다.
그는 방 한쪽 구석에 놓인 사무실용 옷장으로 다가
갔다. 그것을 옆으로 비스듬히 눕히고 아래쪽에 생긴
틈으로 봉투를 밀어넣었다. 위아래로 두 개의 문이
달린 나무로 된 양복장이 너무 무거워 하마터면 손
끝이 끼일뻔했다.
그는 이윽고 시계를 들여다본 뒤 코노래까지 부르면
서 지하실에 있는 이발소로 내려갔다.
김주식이 미스 심을 태워 데리고 간 곳은 역시 워커
힐 쉐라톤 호텔이었다.
"저녁 식사하고 오늘은 아예 방 하나 빌려서 푹 쉬
고 갈까?"
식탁에 마주 앉으며 김주식은 그런 농담까지 했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거의 다
먹을 때까지 두 사람의 대화는 일상에 관한것들 뿐이
었다. 왜 만나자고 했는지 궁금했지만 김주식은 묻지
않았다. 이윽고 미스 심이 본론을 꺼냈다.
"상무님, 보석에 대해서 잘 아세요?"
"그걸 알면 금은방을 했지 월급장이를 하고 있겠
어?"
"아이, 그럼 얘기는 하나마나네요."
"얘기야 들을 수 있지. 뭔데?"
김주식의 얼굴에 떠오르는 흥미로움을 놓치지 않고
살피며 미스 심이 핸드백에서 반으로 접힌 흰 봉투를
꺼냈다. 그 속에서 명함 반만한 크기의 두꺼운 종이
를 꺼내 김주식 앞으로 밀어놓았다. 종이의 한가운데
에 셀로판지로 싼 것이 스카치 테입으로 붙여 있었
다. 반짝하고 빛나는 것이 김주식의 눈에 띄었다.
"이거 다이어 아니야?"
"그래요. 다이어먼드인데 진짠지 가짠지 알 수 없
어, 혹시 상무님께서 간단하게 알아볼 수 있는 방법
을 아시나 하고."
"웬 건데? 보석상에서 사면 보증서가 딱 붙어 나오
잖아?"
김주식은 쌀톨만한 것이 붙은 종이쪽을 유심히 들여
다보면서 말했다.
"그건 저도 알지만 그런 데서 파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죠."
"그럼 누가 알로 갖고 있는 걸 샀나보지?"
"아직 산 건 아니지만 결혼 때를 대비해 사려구요."
"물건 주인이 어디서 샀는지 물어봐 거기서 감정하
지 그래."
"그게 글쎄 그렇지 않다니까요."
미스 심은 자꾸만 말을 흐렸다.
"그런 게 아니라면 밀수품이로구먼?"
"말하자면 그런 셈이죠."
"이런 것 하나쯤은 누구라도 가져올 수 있으니
까."
"상무님께서 아시는 데가 있으면 감정 좀 해다 주실
래요?"
김주식은 그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들여다보던
다이어먼드를 미스 심에게 건네 주며,
"혹시 일본 관광객이 가져온 것 아냐?"
하고 물었다.
미스 심이 흠칫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짐작이 맞구먼. 감정이야 내가 잘 아는 곳에 가
서 부탁해 불 수 있겠지만. 그런데 이걸 가져온
사람이 한 개만 가져오지는 않았을 텐데?"하고 김주
식이 떠보듯 물었다.
"잘 모르긴 해도 루비랑 사파이어 등 제법 많이 가
져왔나봐요. 아는 사람중에서 살 사람이 있으면 소개
해 달라는 걸 보니. 그런데 절대 비밀로 해야 된
다면서 쉬쉬 하기만 하니 어디 겁이 나서 소개나 하
겠어요?"
"몇 개나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값을 싸게 해서라
도 한꺼번에 살 사람을 찾아야지, 한 개씩 팔려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다가 들키는 날엔 그도저도 다 뺏
기고 콩밥까지 먹게 될걸."
김주식이 아는 체 걱정까지 해주었다.
"그러니까 저 같은 사람에게 부탁하는 게 아니겠어
요?"
"호오, 미스 심이 신용을 단단히 얻은 모양이군. 이
런 비싼 물건을 돈도 받기 전에 들려 내보내는 걸 보
면."
"몇 해 전부터 해마다 한두 차례씩 오던 분인데 한
번도 이런 것 갖고 와서 팔아 달란 적이 없었어요."
"그거야 모르지. 누가 광고해 가며 파나. 어쨌
든 알아봐 주지. 이리줘."
"혹시 상무님 주변에서 이런 거 한꺼번이 아니더라
도 살 사람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그럼 미스 심에게 구전이라도 생기나?"
"그야 제가 소개했는데 커미션 안 주려구요."
"그렇다면 내가 한번 알아봐 주지. 이런 것은 파는
사람도 문제지만 사는 사람도 믿을 수 있어야 해. 피
차 비밀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러니까 상무님께 의논드리려는 것 아녜요."
"혹시 또 다른 사람에게 말한 일 있나?"
"아녜요. 상무님께 처음 얘기한 거예요."
김주식은 반으로 접은 봉투를 조끼주머니 안에 넣었
다.
"흘리시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제가 아는 사람은 보
석은 아니지만 남의 귀중품을 맡았다가 나중에 주인
이 물건이 바뀌었다고 펄펄 뛰는 통에 고스란히 생돈
을 물어주었다지 뭐예요."
미스 심은 그저 지나치는 얘기처럼 말했다.
"혹시 미스 심이 그런 사람한테 걸려든 것 아닌가?
유리 쪼가리를 내주고 나중에 진짜 다이어였는데 바
뀌었다고 할 사람은 아니야?"
"그럴 만한 사람이라면 제가 이런 걸 가져오겠어
요?"
"그 친구 미스 심한테 관심 가진 거 아닌가?"
"호호호, 그건 모르죠. 젊은 분이니까."
"헤에?"
김주식은 의미 있게 웃는 표정이었다. 얘기가 끝나
면 또 지루했던 노름판에 가자고 끌지 않을까 염려한
것과는 달리, 김주식은 가다가 들를 곳이 있다면서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오는 길에 김주식은,
"그 친구한테 무엇무엇을 얼마나 가져왔는지 물어보
고 알려주면 한꺼번에 살 사람이 있나 알아봐 줄 수
있어."하고 말했다.
"그럴께요.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저도
구전이 한꺼번에 생기고. 상무님이 소개해 주신
다면 나눠 가져요."
미스 심이 농담처럼 웃으며 말했다.
"구전 대신 뽀뽀나 한 번 해주면 돼."
김주식의 말투도 농담조였지만 강한 욕구가 느껴지
는 끈적한 눈빛이 따라와 감겼다.
"아이 망칙해! 사모님이 알게 되면 저야 그렇다치고
상무님께서 어떻게 되시게요."
김주식은 집까지 데려다 주지 못해 미안하다면서 버
스를 갈아탈 수 있는 곳에서 그녀를 내려주었다.
김주식은 그 길로 최기태가 묵고 있는 아파트로 갔
다. 이곳에 올 때는 언제나 그랬지만, 오늘은 더욱
먼 거리로 뱅글뱅글 돌아 뒷골목으로 해서 왔다. 혹
시나 미행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주는
조심성이었다.
최기태는 술에 취해 자고 있었다. 그의 침대 밑에
숨겨둔 것을 처리할때까지 한국에 남아 거든 다음 일
본으로 출국하기로 결정한 지도 2주일이지났다.
"또 한 차례 기회가 올 것 같아."
김주식이 담배를 피워물며 아직 잠이 덜 깬 눈으로
일어나 앉는 최기태에게 말했다.
"기회?"
"그래, 몰래 들여온 보석 주머니야."
"보석 주머니?"
최기태는 비로소 화들짝 놀라 잠이 깨는 듯했다. 그
는 내심 한 1년 죽은 듯이 지내다 어느 정도 기억들
이 희미해지면 작은 빌딩이라도 하나 사서 다방과 당
구장, 술집 따위를 개업해 살았으면 하는 것이 꿈이
었지만, 지금 손에 들어온 것으로는 빌딩커녕 그저
주택가 어귀 같은 데 있는 2층짜리 구멍가게용 건물
도 구입하기 어렵겠다는 판단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판에 또 한번의 큰 사업이 있다니. 내친 김
에 한번 더 모험을 하는것이 좋겠다고 두 사람은 의
견 일치를 보았다.
"가까운 시일일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김주식이 빙긋 웃으며 그에게 쪽지 한 장을 내밀었
다. 개설했던 12개 통장의 구좌번호였다. 외출할 때
마다 적당한 현금을 가져다 고루 조금씩 입금시켜 두
라는 말과 함께,
"고급 신사복을 사 입고 넥타이, 라이터, 손수건,
시계 등 소지품 모두를 고급으로 준비해. 누가 보더
라도 돈 많은 중년 사업가처럼 보이도록 말야."하고
당부했다.
그는 그야말로 기회의 여신이 자기를 인도해 주는
것 같은 행복감에 젖었다. 회사에서 추진하는 일은
현금 탈취 사건으로 필경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고, 오정숙의 독 오른 분풀이가 독침이 되어 자
신에게 날아오리라는 것이 뻔했지만. 그는 눈썹 한
개 까닥해지지 않았다.
김주식은 오히려 정부 지명이 삼정개발에 떨어지도
록 유도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삼정
개발의 실질적 2인자인 박영준의 운명을 자신의 손아
귀에 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정부 지명
이 삼정에 떨어진다 해도 박노걸이나 박영준에게 전
화 한 통이면 그 권리를 포기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
고, 최후에 가서는 삼정의 경영권을 손아귀에 쥘 수
도있을 것이다.
그가 세운 계획은 지금까지 단 한치의 작은 오차도
없이 착착 진행되고있었다.
다음날 오후, 미스 심은 김주식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명동 한복판에 있는 R호텔에서 김주
식은 지난 밤 가져갔던 다이어먼드를 돌려주며 감정
결과 진짜가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진짜일 수밖
에 없었다.
강석현이 이번 작전을 위해 3개월치 월급을 몽땅 털
어넣어 산 최고급 다이어먼드였기 때문이다.
"친구가 보석상을 하는데 그 정도 질이라면 얼마든
지 사겠다는 거야.그러니 정확한 걸 물어봐. 내 연결
해 줄께."
김주식이 선심쓰듯 말했다. 미스 심은 그 사람이 속
한 관광단을 인솔해 1박2일간 경주 관광을 떠나는데
여행기간 동안 의사를 타진해 보겠다고 약속하고 헤
어졌다.
미스 심은 그 길로 강석현에게 전화를 걸어 김주식
의 반응을 소상하게 일러 주었다. 강석현은 버릇처럼
달력을 보았다. 주말까지는 사흘의 여유가 있었다.
장성군의 이복만으로부터 강석현을 찾는 전화가 온
것은 다음날 오전 10시경이었다.
"금방 연락을 받었는디 금요일, 그러니께 모레 오후
8시 50분에 김포에 도착하는 대한항공편으로 온다는
구먼요."
이복만은 금요일 아침 첫차로 올라와 전화를 하겠다
고 했다. 강석현은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남대문에 있
는 귀금속과 보석 따위 이미테이션을 파는 액세서리
상가로 나와 3芟5부 정도로 커팅된 루비사파이어
등 알맹이들과 진주목걸이, 1캐럿이 넘는 큐빅 들을
여러 개 샀다. 한 달치 월급을 가불한 돈을 몽땅 털
어 사모은 것들은 상당한 양이었다.
"그래, 이걸 한꺼번에 팔겠다고 했단 말이지?"
경주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면서 미스 심이
내민 종이쪽지를 들여다보던 김주식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종이에는 크기 별로 보석명이 나열돼 있었는
데, 다이어먼드뿐만 아니라 수백만원은 족히 나갈 만
큼 큰진주 목걸이도 끼여 있었다.
"이렇게 많은 물건을 한꺼번에 살 만한 사람이 있을
까요?"
미스 심이 엄청나다는 투로 물었다.
"미스 심이 몰라 그렇지 이런 장사를 하는 세계에서
이 정도는 보통이야. 아, 들어보지도 못했나? 수십억
짜리 금괴를 밀수입하거나 수백억짜리 부동산을 사고
파는 것을 마치 공기돌 굴리듯 한다는 사람들 얘길."
"그 분도 그 점을 의심하던데, 상무님이 중개하시니
까 염려 안 해도 되겠네요."
"이까짓 다 해봐야 한 장도 채 안 될 텐데!"
"이렇게 많은데 그것밖에 안 될까요?"
"이런 뒷거래는 제 값을 받기가 어렵지. 사는 사람
도 그 점을 노리는 거니가 또 그 것들을 하루 아침에
처분할 수 있나. 오래 묻어 두었다가 하나씩 팔아야
하기 때문에 그 금리와 위험 부담까지 생각해야 할
거고 하여튼 물건 주인하고 흥정을 해 봐야겠
지."
"그럼 살 사람과 그 분을 만나게 해 줘야 하나요?"
"그게 제일 좋겠지만, 이런 경우 팔 사람이나 살 사
람은 다 같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지. 그 사람
은 뭐래?"
"가급적이면 물건과 돈을 맞바꿀 때만 만났으면 하
던데요."
"내 그럴 줄 알았지. 언젠가 오래 전에도 이런 거간
을 든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중간에 선 사람들이 흥
정을 끝낸 뒤 본인들끼리 만났지."
"그때도 이렇게 많았나요?"
"응, 꽤 많았어. 그건 그렇고, 그럼 별수 없이 미스
심과 내가 중간 역할을 해야겠군 그래."
김주식은 하던 말을 서둘러 마무리짓고는 곧 사무적
인 태도로 나왔다.
"그렇지만 너무 어마어마한 일이 돼서 제가 중간에
서기가 좀 그렇네요!"
"그래도 현재 우리 둘만 아는 일이니까 그 편이 안
전할 거야. 상대방도 미스 심을 믿고 있는 모양이니
까."
"제가 가서 말해 보죠. 그런데 우선 살 사람이 얼마
에 사겠다는 건지 먼저 물어보셔야 되잖아요?"
"목록이 적힌 이 종이를 가져가 보이면 당장에라도
알 수 있지. 내일중으로 연락해 줄 수 있을 거야."
"김상무님, 정말 조심하세요."
"내 걱정일랑 말고 미스 심이나 흥정 잘해. 구전이
생겨도 단단히 생기는 일이니까."
저녁식사가 끝난 뒤 김주식은 가봐야 할 데가 있다
면서 지난번처럼 미스심을 도중에 내려주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시내의 번잡한 도로를 따라 이리저리 몇
바퀴 돈 다음 최기태의 아파트로 갔다.
최기태는 그 날 종일 다니면서 온라인으로 은행에
입금시킨 명세서를 내놓았다. 두 사람은 밤이 이슥하
도록 이마를 맞대고 앉아 이번 일의 계획을 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