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좇아 성결케 하라.
역대하 29:1~19
who?
최근에 우리들이 묵상하고 있는 역대하는 유다 왕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왕이 죽으면 그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를 보면 그 왕의 삶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몇 분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곱 살에 왕이 되었던 요아스 왕은 신하들에 의해 암살되어 다윗성에 장사되었지만, 왕실의 묘실에는 장사되지 못했습니다(대하 24:25). 하나님의 은혜로 형통하였던 웃시야 왕은 교만에 빠져 나병환자가 되었는데, 그가 죽을 때에는 왕들의 묘실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대신 왕들의 묘실 주변의 땅에 들어갔습니다(대하 26:23). 그러나 그의 아들 요담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기에 왕실의 묘실에 묻히게 되었습니다(대하 27:9). 오늘 본문에서 소개되고 있는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는 왕실의 묘실에 묻히지 못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업적을 남겼어도 다윗 왕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한 왕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다윗 왕실의 묘실 중에서 다윗 다음으로 가장 높은 곳에 장사된 왕은 누구일까요? 아마 눈치 빠르신 분들은 알아차리셨을 겁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히스기야 왕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죽은 후에 다윗 왕실의 묘실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장사된 훌륭한 왕이었습니다(대하 32:33).
저는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난 후에 믿음의 후대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히스기야 왕처럼 살아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도 후대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요?
히스기야는 25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29년간 예루살렘을 다스렸던 왕입니다. 그의 아버지 아하스 왕은 바알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힌놈의 골짜기에서 아들들을 불살라 바치는 가증한 일을 행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주변 나라들을 통해서 유다를 치심으로 나라가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의 침략으로 인해 하나님의 집과 왕국에 있던 재물들을 앗수르 왕에게 내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로 상황이 심각할 때 아하스 왕이 회개해야 마땅하지만, 아하스 왕은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부수고, 여호와의 전 문들을 닫고, 예루살렘 구석구석에 우상의 제단을 쌓음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습니다.
자, 어렸을 적부터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의 행위들을 보고 자랐습니다. 25세의 젊은 나이에 왕이 된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의 뒤를 따를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부모는 자녀들에게 생각과 행동의 준거기준이 됩니다. 어렸을 적부터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부모의 모습을 답습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좋은 역할 모델입니다. 나의 삶에 목표를 제공해주고, 나에게 동기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좋은 역할 모델이 필요한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히스기야는 그의 아버지 아하스 대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 왕을 역할 모델로 삼은 것입니다. 2절에 보면,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3~4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해 첫째 달에 여호와의 전 문들을 열고 수리하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동쪽 광장에 모으고”
여기서 ‘첫째 해 첫째 달’이라는 것은 히스기야가 왕에 즉위한 첫째 해, 첫째 달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히스기야는 왕에 즉위하자마자 가장 첫 번째로 한 일이 아버지 아하스 왕에 의해 닫혔던 여호와의 전 문들을 열고, 아버지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입니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모습은 철저히 다윗을 뒤좇은 것입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가지고 온 일이 아닙니까? 다윗에게 하나님의 궤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이었듯이, 히스기야에게도 성전은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임재하시는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히스기야처럼 누구를 모델로 삼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육신의 부모가 신앙의 역할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신앙이 자녀들에게 계승되고 발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 일이 어렵다면, 성경이나 교회 안에서 존경할만한 역할 모델을 찾는 일이 중요합니다.
what’s problem?
히스기야는 다윗을 본받아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한 길로 행하였습니다. 5절에서 9절에 보면, 히스기야는 현재 유다 백성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에서부터 비롯된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모두 6절부터 9절까지를 한 음성으로 읽겠습니다.
6 우리 조상들이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얼굴을 돌려 여호와의 성소를 등지고
7 또 낭실 문을 닫으며 등불을 끄고 성소에서 분향하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므로
8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하시고 내버리사 두려움과 놀람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신 것을 너희가 똑똑히 보는 바라
9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조상들이 칼에 엎드러지며 우리의 자녀와 아내들이 사로잡혔느니라
히스기야가 생각할 때, 조상들의 죄는 하나님을 버린 일이었습니다. 조상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린 것입니다. 그래서 조상들은 낭실 문을 닫고, 등불을 끄고, 성소에서 분향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조상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마음으로 하나님께 등을 돌리니까 이런저런 불경건한 죄들을 저지른 것입니다. 여기서 ‘낭실’은 성전의 ‘현관문’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낭실 문을 닫았다는 말은 성전의 모든 기능을 마비시켰다는 의미입니다. 또 제단에는 불이 꺼지지 말아야 합니다. 레위기 6장 8절에 보면, “제단의 불이 그 위에서 꺼지지 않게 할 것이요”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제단에는 항상 불이 활활 타올라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목사의 가슴에 불이 붙으면 성도들은 목사의 가슴에 붙은 불구경하러 오고, 성도들이 가슴에 불이 붙으면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의 가슴에 붙은 불구경하로 온다.” 여러분, 하나님의 집에는 항상 불이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히스기야 왕 때에는 하나님의 집에 불이 꺼져 있었습니다. 불이 꺼져 있으니 당연히 성소에서 분향할 일도 없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악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 왕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 왕이 닫았던 낭실 문을 열고, 꺼진 등불을 켜고, 하나님께 대한 분향과 번제를 회복하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현실 파악은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그 아버지 아하스 왕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않음으로 주변 열국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때로는 아람 왕에게(대하 28:5), 때로는 르말야의 아들 베가에게(대하 28:6), 때로는 북 왕국 이스라엘에게(대하 28:8), 때로는 블레셋에게(대하 28:18), 때로는 앗수르에게 침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대하, 28:20). 그런데도 아버지 아하스 왕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대하 28:22)”하였던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현재 유다가 당하고 있는 문제의 원인을 더러운 우상숭배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이제 너희는 성결하게 하고 또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성결하게 하여 그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애라(5절).”
부산에 가면 아름다운 해운대 해수욕장이 있습니다.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오면서 모래를 끌어다가 놓아서 해운대 해수욕장은 아름다운 모래사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초부터 모래사장이 파도에 휩쓸려 예전의 경관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고 합니다. 할 수 없이 부산시는 관광 제1명소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해마다 수천 톤의 모래를 퍼 날라 인공 모래사장을 조성해야만 했습니다. 어느 날, 모래가 사라지는 원인을 밝혀 보려고 부산시 관계자와 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이 해운대에서 모래가 사라지는 원인이 해운대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설치된 영동대교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1980년대 초에 중앙도와 영도를 잇는 왕복 4차선 대교를 건설하면서, 바다에 세운 몇 개의 교각이 해류의 흐름에 영향을 미쳐 20킬로미터나 떨어진 해운대의 모래가 휩쓸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설득력 없는 주장이라고 웃었지만, 이 분은 해안선 모형실험을 통해 그의 주장이 사실임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영도 앞바다에 세워진 작은 구조물의 영향 때문에 해운대 백사장의 수천 톤 모래가 파도에 쓸려간 것처럼, 영적인 세계에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김진홍, 「교회여 어찌하여」, 예찬사, 「생명의 삶 플러스」, 두란노, 2018년 11월호, p. 269에서 재인용.
성전에 자리 잡고 있던 더러운 우상들을 내쫓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에서 겪어야만 하는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깨어지거나,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우상의 문제로 인해 겪고 있는 문제는 없습니까?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정확하게 문제의 원인을 파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히스기야가 과거 아버지가 저질렀던 죄들을 찾아내어 그 죄들을 청산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처럼, 나의 과거의 모습을 철저히 반성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현재와 미래의 삶을 풍요롭게 가꿀 수 있는 비결입니다.
what?
그렇다면 히스기야왕이 죽은 후에도 왕의 묘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장사될 정도로 후대들에게 존경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가 행한 종교개혁 때문입니다. 다윗 왕이 성전을 준비하고,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지었다면, 히스기야 왕은 성전을 회복시킨 왕이었습니다. 개혁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것을 회복시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성전을 성결케 하여 성전을 성전 되게 만들었습니다.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성전을 깨끗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과 레위 인들을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11절에 보면, 히스기야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불러 모아 놓고 “내 아들들아 이제는 게으르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히스기야 왕의 격려를 받은 레위 사람들 중에 각 가문에서 두 명씩, 총 14명의 자원자들이 일어났습니다(12절~14절).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 들어가 더러운 우상들을 바깥으로 끌어내면, 성전 안에 들어갈 수 없었던 레위 인들은 성전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더러운 우상들을 받아 바깥 기드론 시내에 버렸습니다(16절). 성전을 성결케 하는 일은 히스기야 왕이 즉위한 첫째 달 초하루에 시작되어 16일 만에 마치게 되었습니다(17절).
그런데 이러한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15절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우리 다함께 15절을 한 음성으로 읽겠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형제들을 모아 성결하게 하고 들어가서 왕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명령한 것을 따라 여호와의 전을 깨끗하게 할새”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전건축을 준비하였던 것처럼, 히스기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전을 깨끗하여 하였습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명령한 것을 따라” 행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혁의 원리는 한 개인 뿐만 아니라 각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한다면 매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저는 최근 바나바훈련원 사역자 영성훈련을 수료하면서 동기들과 함께 말씀묵상 일천번제를 결단했습니다. 매일 「생명의 삶」으로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범과 지시와 약속의 말씀을 받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4장에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이틀이 지나서, 한 사람이 죽을 병에 걸린 아들을 고쳐달라며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집으로 도로 돌려보내시며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왕의 신하였기 때문에 당시 권세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자신의 집에 방문하여 병든 아들을 고쳐주지는 못할망정 말 한 마디 선포하고 자신을 집으로 돌려보낸 것으로 인해 마음이 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신하는 자신의 권세와 자존심을 예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내려놓고 순종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종들의 보고를 받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시간에 아들의 죽을 병이 고침 받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과 온 집 안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요 4:47~54). 하나님의 말씀은 살리는 말씀이요, 능력의 말씀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을 붙들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의 삶을 괴롭히는 어두움의 것들이 떠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개혁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었습니다.
둘째로,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성결운동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성결하게 하다”, “깨끗하게 하다”라는 문장이 모두 9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히스기야 시대에는 성결에 대한 요구가 강하게 일어났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시대가 악할수록 성결이 더욱 요구됩니다.
성결은 우상의 제거로부터 출발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제사장과 레위 인들을 시켜 성전 안에 있던 더러운 우상들을 모두 끄집어내게 했습니다. 우리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고전 3:16).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온갖 더러운 것들을 끄집어내어 바깥 기드론 시냇가에 갖다버리기 원하십니다.
에베소서 5장 3절에서 5절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고 있습니다.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저와 여러분은 회개를 통해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깨끗하게 비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을 제거하는 일이 중요합니다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더러운 귀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에게 들어갔던 귀신이 쫓겨 나가 쉴 곳을 찾으러 이곳저곳을 헤매게 됩니다. 그러나 더러운 귀신은 더 이상 쉴 곳을 찾지 못하게 되자 예전에 살던 사람에게로 되돌아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더러운 우상들을 기드론 시냇가에 모두 내다버린 겁니다. 이 사람이 철저히 회개한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집이 깨끗이 청소되고 수리되었지만, 정작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없어 집이 텅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귀신 입장에서는 얼마나 좋은 일이겠어요? 그래서 이 귀신은 신이 나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갔습니다. 이 사람의 나중 형편이 예전보다 더욱 심하게 된 것이죠.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하시면서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마 12:43~45). 여러분, 과연 무엇이 문제입니까? 회개만으로 충분한가요?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회개가 중요하지만, 회개는 성결의 출발점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성결의 완성은 어디에서 이루어질까요?
성결은 속죄의 피로 완성됩니다.
히스기야 왕은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와 어린 양 일곱 마리와 숫염소 일곱 마리를 끌어다가 여호와의 제단에 드려 나라와 성소와 유다를 위하 속죄 제물로 삼았습니다.
우리 다함께 22절을 찾아 한 음성으로 읽어볼까요?
“이에 수소를 잡으매 제사장들이 그 피를 받아 제단에 뿌리고 또 숫양들을 잡으매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또 어린 양들을 잡으매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이 짧은 한 구절의 말씀에서, “잡고 피를 뿌리고…잡고 피를 뿌리고…잡고 피를 뿌리고”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실제로 그 모습이 어떨지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제사장들이 일곱 마리씩의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과 숫염소들을 잡아다가, 그 가죽을 벗기고, 그 피를 받아다가 제단에 뿌릴 때, 이게 결코 쉬운 일이었겠어요? 대단히 수고롭고 처리해야 될 일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처럼 수고로운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24절에 보면, 이 피는 바로 온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히 9:22).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속죄의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를 위해 속죄의 피를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의 의는 이것 뿐 예수의 피 밖에 없네.”라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성결은 속죄의 피로 완성됩니다. 히스기야 왕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었고, 성결운동이었습니다. 성결은 회개로부터 출발하지만,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날마다 주님의 보배로운 피가 나를 정결케 하며, 나의 의와 능력이 되심을 고백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what’s then?
과연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결과는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쁨입니다.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을 다루고 있는 역대하 29장의 가장 마지막 절인 36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갑자기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하여 예비하셨으므로 히스기야가 백성과 더불어 기뻐하였더라.”
역대하 29장은 슬픔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결과는 기쁨으로 끝이 납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역대하 29장을 통해서, 삶 속에서 기쁨을 누리는 비결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며 살아갈 때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이 기쁨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 성결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