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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由 來
淸安李氏(청안이씨)는 始祖(시조)를 달리하는 두 派(파)가 있다.
忠元公派(충원공파)의 始祖(시조)李陽吉(이양길)의 諡號(시호)는 忠元(충원)으로 高麗末(고려말)에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여 恭愍王(공민왕)때 檢校侍郞(검교시랑),禮賓寺同正(예빈사동정)을 歷任(역임)하였으며 이때 王(왕)에게 直諫(직간)한것이 禍(화)가되어 濟州判官(제주판관)으로 내려갔다가 恭愍王(
공민왕)5年 10月 殉節(순절)하여 1等功臣(1등공신)에 祿勳(녹훈)되고 淸安君(청안군)에 封(봉)해졌다.
忠簡公派(충간공파)의 始祖(시조)李漢蕃(이한번)의 諡號(시호)는 忠簡(충간)으로 高麗(고려) 忠烈王(충열왕)때 文科(문과)에 올라 翰林學士(한림학사)와 靈光郡事(영광군사)를 거쳐 國史院(국사원)檢閱官(검열관)을 지낸 뒤1363年(恭愍王7年)紅巾賊(홍건적)을 막은 功(공)으로 推誠輔理功臣(추성보리공신)
三重大匡(삼중대광)에 冊祿(책록)되고 淸安伯(청안백)에 封(봉)해졌다.
이 두派(파)는 예전에 始祖(시조)를 李鶴年(이학년)으로 하였으나 最近(최근)에 여러가지 證據(증거)에 依(의)해 事實(사실)이 아님이 밝혀져서 이를 修正(수정)하였다.
▣ 人物
1414年 全羅道(전라도)와 忠淸兵馬節度使(충청병마절도사),兵曺判書(병조판서)를 歷任(역임)한 李光慶(이광경)1452年 原從功臣(원종공신) 2等(2등)으로 淸平君(청평군)에 封(봉)해졌고 1474年 縣監(현감)을 지낸 李基(이기)等(등)을 들 수 있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觀察使(관찰사)를 歷任(역임)한 李從周(이종주)를 비롯하여 縣監(현감)을 지낸 李臨(이임),縣令(현령)李地(이지), 府使(부사) 李經邦(이경방)과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義兵(의병)을 일으켜 크게活躍(활약)하다 開雲浦(개운포)에서 殉節(순절)하여 兵曺參判(병조참판)에 追贈(추증)된 李應春(이응춘),訓鍊院者事(훈련원자사)李德梅(이덕매),僉正(첨정)李有隣(이유인), 判官(판관) 李三韓(이삼한),領將(영장) 李訥(이눌), 嘉善大夫兵曺參判(가선대부병조참판) 李運春(이운춘),都護府使(도호부사) 李昇淵(이승연),府使(부사)李芳隣(이방인)等(등)은 官職(관직)에 오른 後(후) 善政(선정)을 베풀거나 忠節(충절)로서 當代(당대)淸安李氏(청안이씨)의 이름을 떨친 人物(인물)들이다.
이눌(李訥)
1569(선조 2)∼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의병. 본관은 청안(淸安). 자는 약우(若愚), 호는 낙의재(樂義齋). 첨정 신정(新貞)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오천정씨(烏川鄭氏)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서 《효경》과 《논어》를 배웠고, 학문보다 실천이 중요함을 알아 효제(孝悌)를 행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기집 종들과 주민·승려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고, ‘천사장(天使將)’이라는 기를 앞세우고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곽재우(郭再祐)와 화왕성(火旺城)에서 합세하여 적을 공략하였고, 통제사 원균(元均)이 패전하여 죽은 뒤에 진을 월성으로 옮겼다. 그해 9월 대구의 팔공산싸움에서 왼팔에 적탄을 맞았으나 전세를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이 끝난 뒤 사재를 털어 병화와 흉년으로 시달린 백성을 구휼하고, 자제들을 낙의재에 모아 충효의 길을 가르쳤다.
그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저서로는 《낙의재유집》 2권이 있다.
참고문헌
樂義齋遺集, 松壕汀日記, 忍心齋日錄, 東輔實記, 壬辰倡義錄. 〈梁鴻烈〉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李芳隣(이방린) (1547 丁未生) : 武科宣祖16年(1583) 別試 丙科
李樹仁(이수인) (1739 己未生) : 司馬試 正祖7年(1783) 式年試一等壯元及第
李樹敎(이수교) (1785 乙巳生) : 司馬試 純祖31年(1831) 式年試 二等
李孝相(이효상) (1774 甲午生) : 司馬試 純祖3年(1803) 增廣試 三等
李守英(이수영) (1774 甲午生) : 司馬試 燕山君7年(1501) 式年試 三等
李述賢(이술현) (1736 丙辰生) : 司馬試 英祖41年(1765) 式年試 三等
李岐淵(이기연) (1822 壬午生) : 司馬試 高宗2年(1865) 式年試 三等
李在國(이재국) (1838 戊戌生) : 司馬試 高宗22年(1885) 增廣試 三等
等 모두 8名의 科擧 及第者가 있다.
(武科 1名, 司馬試 7名)
▣ 世居地
-慶北 月城郡 安康邑 外東面
-慶北 迎日郡 淸河面 淸溪里 義城邑
-慶北 蔚州郡 溫陽面 鉢里, 彦陽面盤松里, 靑陽面栗里, 農所面 上安里
▣ 本貫 沿革
本貫所在地 : 忠淸北道 槐山
淸安(청안)은 忠淸北道 槐山郡(괴산군)에 位置(위치)하는 地名(지명)으로 道安(도안)과 淸塘(청당)이 合(합)쳐진 地名(지명)이다.道安縣(도안현)은 高句麗(고구려)때는 道西縣(도서현)이라 불리었다.757年(新羅景德王16)都西(도서)로바뀌고 高麗初(고려초)에 都西(도서)를 道西縣(도안현)으로 고쳤다.淸淵縣(청연현)은 新羅(신라)때의 淸堂(청당)으로 바뀌어 1018年(顯宗9)道安(도안)과 淸堂(청당)이 淸州(청주)에 屬(속)하게 되었다.1405年(太宗 5) 淸州(청주)에 屬(속)해있던 淸堂縣(청당현)과 道安縣(도안현)을 合(합)하여 淸安縣(청안현)이라 하였다.1895年(高宗32)地方制度(지방제도)改正(개정)으로 淸安郡(청안군)으로 昇格(승격)하였으나,1914年郡面廢合(군면폐합)으로 淸安郡(청안군)이 廢止(폐지)되었고,西面(서면)은 淸州(청주)에 編入(편입)하였고,나머지一圓(일원)은 槐山(괴산)으로 編入(편입)해서 淸安面
(청안면)이 되었다.
[집성촌]
-경북 월성군 강읍과 외동면
-경북 영일군 청하면 청계리와 의성읍
-경북 울주군 온양면 발리, 언양면 반송리, 청양면 율리, 농소면 상안리
[본관지]
-충북 괴산군 청안면
행열자(行列字)
泰 洛 海- 22세
東 植 榮- 23세
燮 烈 煥- 24세
在 圭 載- 25세
鎬 錫 鉉- 26세
潤 洙 淳- 27세
杰 柄 根- 28세
炯 熙 炳- 29세
達 坤 均- 30세
鎔 鈺 鍾- 31세
求 浩 源- 32세
種 楨 相- 33세
▣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淸安李氏(청안이씨)는
1985年에는 摠 3,086家口 12,801名,
2000年에는 摠 4,264家口 13,549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아래 글 출처 청안이씨집안모임 cafe.daum.net/leesfamily119
청안 이씨 (淸安李氏)
1> 시조 : 이학년[李鶴年]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청안은 충청북도 괴산군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1405년(태종 5) 청주에 속해있던 청당현과 도안현을 합하여 청안현이라 하다가
후에 청안면이 되었다.
청안이씨의 시조는 이학년(李鶴年)으로 고려 광종때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고
청안군(淸安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청안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학년의 후손 한번(漢藩)은 한림학사를 지내고 홍건적을 대파하여 청안군에 봉해졌으며,
아들 광경(光慶)은 조선에서 병조판서를 지낸 후 호남파(湖南派)의 중시조가 되었다.
항상(恒相)의 아들 양길(陽吉)은 상장군으로 홍건적을 물리치는데 공을세워
벽상일등공신에 책록되고 청안군에 봉해졌으며 영남파(嶺南派)의 중시조로 분파되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안이씨는 남한에 총 3,086가구,
12,80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경북 영일군 청하면 청계리
경남 울주군 온양면 발리
경남 울주군 청량면 율리
경남 울주군 농소면 상안리
경북 월성군 안강읍 일원
경북 월성군 외동면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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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이씨(淸安李氏)
[유래]
청안이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두 파가 있다.
충원공파(忠元公派)의 시조 이양길(李陽吉)의 시호는 충원(忠元)으로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 때 검교시랑, 예빈사동정(禮賓寺同正)을 역임하였으며 이때 왕에게 직간한 것이 화가되어 제주판관으로 내려갔다가 공민왕 5년 10월 순절하여 1등공신에 녹훈되고 청안군에 봉해졌다.
충간공파(忠簡公派)의 시조 이한번(李漢蕃)의 시호는 충간(忠簡)으로 고려 충렬왕 때 문과에 올라 한림학사와 영광군사(靈光郡事)를 거쳐 국사원(國史院) 검열관(檢閱官)을 지낸 뒤 1363년(공민왕 7년) 홍건적을 막은 공으로 초성보리공신 삼중대광에 책록되고 청안백에 봉해졌다.
이 두파는 예전에 시조를 이학년(李鶴年)으로 하였으나 최근에 여러가지 증거에 의해 사실이 아님이 밝혀져서 이를 수정하였다.
[가문의번영]
1414년 전라도와 충청병마절도사, 병조판서(兵曺判書)를 역임한 이광경(李光慶),1452년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으로 청평군(淸平君)에 봉해졌고 1474년 현감(縣監)을 지낸 이기(李基)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에 관찰사를 역임한 이종주(李從周)를 비롯하여 현감을 지낸 이임(李臨), 현령(縣令) 이지(李地), 부사 이경방(李經邦)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크게 활약하다 개운포에서 순절하여 병조참판에 추증된 이응춘(李應春), 훈련원자사(訓鍊院者事) 이덕매(李德梅), 첨정 이유인(李有隣), 판관 이삼한(李三韓), 영장(領將) 이눌(李訥), 가선대부병조참판(嘉善大夫兵曺參判) 이운춘(李運春), 도호부사 이승연(李昇淵), 부사 이방인(李芳隣) 등은 관직에 오른 후 선정을 베풀거나 충절로서 당대 청안이씨의 이름을 떨친 인물들이다.
[집성촌]
-경북 월성군 강읍과 외동면
-경북 영일군 청하면 청계리와 의성읍
-경북 울주군 온양면 발리, 언양면 반송리, 청양면 율리, 농소면 상안리
[본관지]
-충북 괴산군 청안면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2,801명이 있었다.
청안이씨(淸安李氏②)
시조 이한번(李漢藩 : 자 國瑞, 시호 忠簡)은 1299년(충렬왕 25)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한림학사에 이르고 1358년(공민왕 7) 홍건적이 대거 칩입하자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적을 대파한 공으로 추성보리공신(推誠保理功臣)·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르고 청안백(淸安伯)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청안(淸安)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 백여 년 사이의 세계사 실전되어 1412년(태종 12) 무과에 급제, 전라(全羅)·공충(公忠) 양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낸 광경(光慶)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헤아리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남해현령을 지낸 광경의 아들 존학(存學), 광경의 손자로 병조정랑을 지낸 숭문(崇文), 증손으로 군수를 지낸 배(培), 토산현감·충주진 영장(忠州鎭營將)을 지낸 현손 덕유(德裕) 등을 들 수 있다.
이 집안 유일의 문과 급제자 이한(李漢)은 현종 때 문과에 급제, 현령을 지냈다. 석탄(石灘) 이기남(李箕南)은 성리학에 능한 학자로 김인후(金麟厚)·박 순(朴 淳)·정 철(鄭 澈)·기효간(奇孝諫) 등과 도의로 사귀었고, 선조 때 동몽교관(童蒙敎官)·사헌부 감찰 등에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기호(岐湖) 이문룡(李文龍)은 변이중(邊以中)·박광옥(朴光玉)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박광옥과 함께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서 활약하였으며 백의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고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다.
시조 이양길(李陽吉 : 시호 忠元)은 고려조에 검교시랑(檢校侍郎)·예빈시 동정(禮賓寺同正)으로 있으면서 직간하다가 제주판관(濟州判官)으로 좌천되어 1356년(공민왕 5) 가을적(加乙赤)·홀고탁(忽古托) 등 홍건적의 침입 때 도순문사(都巡問使) 윤시우(尹時遇)·목사(牧使) 장천년(張天年)과 함께 순절하고 청안군(淸安君)에 추봉되었다. 그래서 자손들이 본관을 청안으로 하고 그곳에서 세거하다가 시조 양길의 증손 이림(李臨)이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화를 당하자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그의 아들 3형제 중 큰아들 지(地)가 금성현령을 지내고 호서에서 경주부(慶州府) 안강현(安康縣) 서도리(西島里)로 이주하였고 , 둘째아들 진사 육(堉)은 흥해(興海)로, 셋째아들 기(基)는 장기현감(長기縣監) 겸 경주진관 병마첨절제도위(慶州鎭管兵馬僉節制都尉)를 지내고 경주의 입곡(立谷)으로 각각 이주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청안이씨는 경상남·북도 일대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종주(李從周)를 꼽을 수 있다. 시조 양길의 아들인 그는 지울주사(知蔚州事) 겸 권농병마단련사(勸農兵馬團鍊使)·울주 철장관(蔚州鐵場官)을 지냈다. 그가 1399년(정종 1) 절제사로 있을 때 행려자(行旅者)를 구호하기 위해 자신의 봉급에서 출연하여 혜리원(惠利院)을 설립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는 사실이 하륜(河崙)의 《혜리원기문(惠利院記文)》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들 선(旋)이 판윤(判尹), 손자 등(登)이 군수를 지내는 등 문관집으로 가통을 이어오던 중 연산군 때 무오사화 이후 관계에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서 학문에 전념해 오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0촌 내외의 지친(至親)간인 응춘(應春)·우춘(遇春)·봉춘(逢春)·응벽(應壁)·팽수(彰壽)·방린(芳隣)·태립(台立)·유린(有隣)·승금(承金)·대립(大立)·대인(大仁)·덕매(德梅)·계수(繼秀)·삼한(三韓)·눌(訥) 등 16인이 동시에 창의하여 <일문 16의사>를 배출, 충의가문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 중 퇴사재(退思齋) 이응춘은 능해장(凌海將)으로 개운포에서 순절, 원종공신 3등으로 병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칠송당(七松堂) 이응벽은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두촌(仕村) 이팽수는 복병장(伏兵將)으로 울주(蔚州) 서생포(西生浦)에서 순절, 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고 정려가 명해졌다. 남계(南溪) 이태립은 임진왜란 중 향교에 성현의 위패를 안전하게 봉안하고 난이 끝난 후 사비로 향교를 보수했다.
영풍정(詠風亭) 이계수(李繼秀)는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창의, 한강에서 순절했다.
[人口(1985년 현재)] 12,801명이 있다.
청안이씨(淸安李氏)
[유래]
청안이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두 파가 있다.
충원공파(忠元公派)의 시조 이양길(李陽吉)의 시호는 충원(忠元)으로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 때 검교시랑, 예빈사동정(禮賓寺同正)을 역임하였으며 이때 왕에게 직간한 것이 화가되어 제주판관으로 내려갔다가 공민왕 5년 10월 순절하여 1등공신에 녹훈되고 청안군에 봉해졌다.
충간공파(忠簡公派)의 시조 이한번(李漢蕃)의 시호는 충간(忠簡)으로 고려 충렬왕 때 문과에 올라 한림학사와 영광군사(靈光郡事)를 거쳐 국사원(國史院) 검열관(檢閱官)을 지낸 뒤 1363년(공민왕 7년) 홍건적을 막은 공으로 초성보리공신 삼중대광에 책록되고 청안백에 봉해졌다.
이 두파는 예전에 시조를 이학년(李鶴年)으로 하였으나 최근에 여러가지 증거에 의해 사실이 아님이 밝혀져서 이를 수정하였다.
[가문의번영]
1414년 전라도와 충청병마절도사, 병조판서(兵曺判書)를 역임한 이광경(李光慶),1452년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으로 청평군(淸平君)에 봉해졌고 1474년 현감(縣監)을 지낸 이기(李基)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에 관찰사를 역임한 이종주(李從周)를 비롯하여 현감을 지낸 이임(李臨), 현령(縣令) 이지(李地), 부사 이경방(李經邦)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크게 활약하다 개운포에서 순절하여 병조참판에 추증된 이응춘(李應春), 훈련원자사(訓鍊院者事) 이덕매(李德梅), 첨정 이유인(李有隣), 판관 이삼한(李三韓), 영장(領將) 이눌(李訥), 가선대부병조참판(嘉善大夫兵曺參判) 이운춘(李運春), 도호부사 이승연(李昇淵), 부사 이방인(李芳隣) 등은 관직에 오른 후 선정을 베풀거나 충절로서 당대 청안이씨의 이름을 떨친 인물들이다.
[집성촌]
-경북 월성군 강읍과 외동면
-경북 영일군 청하면 청계리와 의성읍
-경북 울주군 온양면 발리, 언양면 반송리, 청양면 율리, 농소면 상안리
[본관지]
-충북 괴산군 청안면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2,801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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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이씨(淸安李氏) : 시조 : 이학년(李鶴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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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학년은 고려 광종때 예부상서를 지내고 청안군에 봉해졌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청안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그의 14세손 한번은 한림학사를 지내고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하여 청안군에 봉해졌으며, 아들 광경은 조선에서 병조판서를 지낸 후 호남파의 중시조가 되었다.
항상의 아들 양길은 상장군으로 홍건적을 대파하여 벽상1등공신에 올라 청안군에 봉해진 후 영남파의 중시조로 분파되었다.
경북 월성군 외동면 일원
경북 월성군 안강읍 일원
경남 울주군 농소면 상안리
경북 영일군 청하면 청계리
경남 울주군 언양면 반송리
호남파
世
17
18
19
20
21
22
항렬자
현 종
락 해
상 근
형 희
규 곤
行列子
鉉 鍾
洛 海
相 根
炯 熙
圭 坤
영남파
世
1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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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24
항렬자
수 석 상
영 동 연
화 빈 정
용 순 병
혁 하
진 규
락 태 해
영 동 식
환 열 섭
行列子
樹 錫 相
永 東 淵
和 彬 楨
容 淳 炳
赫 夏
鎭 圭
洛 泰 海
榮 東 植
煥 烈 燮
청안이씨 시조이양길
덕산서사
이팽수
경북 월성군 안강읍 산대리
정려각
이팽수
경북 월성군 안강읍 산대리
정려각
이운협
경남 울주
정려각
분성배씨
경남 울산 (이하형의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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