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서 요즘 유행하는 쇼트 영상.
제가 즐겨보는 영상들은 주로 가벼운 웃음을 주는 영상들인데... 그 중에 하나, 엄마가 잠시 자리 비운 사이에 아이들이 엄마 회장품으로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색칠해놓은 영상이었습니다.
잠깐 웃다가 아주 가슴 아픈 옛 일 하나가 떠올라 금세 미소를 지웠습니다.
철없을 때 저지른 잘못이라 핑계를 대 보지만, 그 일은 낙인처럼 제 기억 속에 찍혀져 있다가, 제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솟구쳐 올라 그러지 말라고 마음의 행로를 되돌려놓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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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있기 전까지 그 아이를 미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문득문득 그 아이가 생각날 때면 늘 함께 따라오는 가슴 저릿한 후회.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늘 같은 크기로 변하지도 않은 채 따라다닌다.
그날, 큰방 문을 열었을 때, 어머니의 화장대 앞에서 놀란 얼굴로 돌아보던 다섯 살 그 아이. 하얗게 분칠 된 얼굴의 입술 주위엔 빨간색 루즈가 어지럽게 채색되어 있었다. 아이는 어떻게든 그 상황을 만회해 보려고 나를 보며 웃으려고 애를 썼지만 내 몸엔 순식간에 소름이 돋았다.
그 일이 있기 전 일 년 전쯤 아래채에 새 식구가 이사를 왔다. 장애인 부부와 아들 하나 딸 하나, 네 식구였다. 중증 언어장애를 가진 아저씨는 장롱에 무늬를 새겨 넣는 기술자였고, 경증의 언어장애를 가진 아주머니는 알아듣기 힘들긴 했지만 말을 할 수는 있었다. 물론 수화를 더 편해했지만...
“아.띠.매..띠.따.에..까.자..띠.따.에..짜.뽀.러..까.자~”
우리 식구 중 어머니가 그 아주머니의 말을 제일 잘 알아들으셨다.
“그래. 밥 안쳐놓고 시장에 장 보러 같이 가자.”
나이가 한참 아래인 아주머니를 어머니는 동생 대하듯 하셨고, 장 보러 가는 길엔 늘 함께 하셨다. 다행히 두 아이들에겐 언어장애가 없었다.
착하고 귀엽고 총명한 아이들이었다.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다가 우연히 보게 된 네 식구의 저녁 대화, 그 경이롭던 풍경을 잊지 못한다.
두 아이 손들이 눈부시게 허공을 춤추며 다녔다.
때론 이마를 치기도 하고, 가슴을 어루만지던 손이 갑자기 다른 손등을 내려치기도 하고, 손가락이 펴졌다 접혀졌다, 동그라미를 만들기도 하고... 두 아이를 보며 웃고 있는 아저씨 아주머니의 눈빛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막내였던 나에게 초등학교 2학년인 남동생과 다섯 살인 여동생이 한꺼번에 생긴 것이다. 이웃의 정이 그리웠던지 아이들은 나와 우리 식구들을 금세 따랐고, 나의 일과엔 그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과 하나가 추가되었다. 동생이 없던 나로서는 그 일과가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일이었었다. 일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근처 학교 운동장에서 공놀이를 하며 놀았고, 저녁에는 흔히 같은 밥상에 마주 앉았으며, 밤늦게까지 같이 TV를 보다가 아이들이 잠들면 하나씩 안고는 아래채로 옮겨주곤 했었다.
누가 장애인의 아이들이라고 놀리기라도 할라치면 씩씩거리며 찾아가서 혼을 내주기도 여러 차례. 두 아이는 어느새 내 동생들이 되었다.
“나가! 당장 나갓!!”
내 표정이 너무 무서웠던지 애써 웃어보려던 그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고, 우는 아이를 떠밀 듯 밀어내고 문을 쾅 닫았다. 내 마음도 그 순간부터 닫혀버렸다.
다섯 살 난 여자아이 호기심에 충분히 해볼 수 있는 일이었는데도 나는 아직까지 그날 내가 왜 그렇게 화가 났었는지 알 수가 없다.
내 나이 열다섯 살, 부모의 장애가 그 아이들의 미래에 큰 장해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만한 나이이다 보니, 우리와 같이 사는 동안만이라도 그 아이들이 티 없이 맑게 자라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당시의 내 눈으로 볼 때는 벌써 어른 흉내를 낸답시고 이상하게 화장을 하고 있는 그 아이의 철없는 짓이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혀 화가 났었던 게 아닐까 하고 짐작만 해볼 뿐이다.
그날 이후 그 아이는 내 근처에 오질 못했고, 내 마음을 돌려보려고 내가 귀여워했던 재롱들을 멀찍이서 부리기도 했었지만 나는 눈길 한번 주질 않았다. 오히려 눈에 보일 때마다 눈을 부라리고 화를 내며 더욱 미워하기만 했다.
속에서는 ‘내가 왜 이러지. 어린아인데 그럴 수도 있잖아. 이러면 안 돼.’ 하는 생각들이 수시로 들었지만 한번 틀어진 내 마음을 나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와 그 아이 오빠가 사정도 모른 채 난감해했었고, 뒤늦게 눈치 채신 아버지와 어머니, 형이 그러지 말라고 수차 당부도 했었지만, 이미 틀어진 내 마음을 되돌릴 수가 없었다.
그 아이도 나와의 관계개선에 점차 지쳐가던 어느 날 밤. 저녁부터 아래채에서 조금씩 다투는 소리가 새어 나오더니 급기야,
“아줌맛!! 아빠가 엄마를 죽일라 해요!! 아줌맛!!!”
아이들 울부짖는 소리가 나자마자 어머니는 아래채로 내달렸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어머니가 뛰어 들어가신 그 방안에는 아저씨가 아주머니 가슴에 올라타고 앉아 식칼로 아주머니 목을 겨누고 있었다. 둘 다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울부짖고 있었고, 아이들은 방구석에서 두려움에 떨며 울고 있었다.
용감하신 어머니,
“애들 엄마를 죽일 작정이가!! 이기 무신 짓이고!! 당장 칼 안 내려놓나!”
마구 호통 치시며 아저씨를 떠밀어서 넘어뜨리고는 식칼을 뺏고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서니, 그 방안에서는 속 시원히 울어 볼 수 없어 그간 쌓이기만 했던 한들이 꺽꺽거리는 그들만의 울음소리에 맞춰 풀려나고 있었다.
남자 아이는 먼저 돌아가고 여자아인 울다가 잠이 들었다. 눈물 부빈 자국을 눈가에 붙인 채 쓰러져 잠든 그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후회가 물밀 듯 밀려들었다.
그때서야 다시 그 아이가 장애인을 부모로 둔 다섯 살짜리 불쌍한 여자아이로 보였던 것이다.
'도대체 내가 그동안 무슨 짓을 한 거지?'
끔찍한 장면을 봐서인지 며칠을 고민하던 어머니는 아래채 식구들을 내보내셨다. 부부 싸움이야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지만, 칼을 들이대며 싸우는 사람들과는 도저히 같이 못살겠다는 이유로.
학교를 다녀오니 아래채가 비어있었다.
상처 입힌 그 아이 마음을 다시 어루만져줄 기회도 없이 그 아이가 떠난 것이다.
그 아이를 통해서가 아니면 속죄받을 수도 없는 죄 하나가 그날 내 가슴에 낙인으로 찍혔다.
그 아이, 이제 오십대 중반의 중년 여인일 텐데 이름도 얼굴도 모르니, 나는 어디에서 그 죄를 속죄받아야 하나?
첫댓글 장애인으로 산다는것
장애인부모의 자식으로 산다는것
장애인의 이웃으로 산다는것
우리 사회의 모두에게 낙인이 아니겠습니까.
알면서도 결코 열리지 않는 사회적 소통의 길
여러 단체에서도 많은 노력을 하고 결실도 맺어가니
마음의 짐을 내려 놓으시고.. 소통과 화해의 장에
동참 하시면 됩니다.
제가 보는 영상들 중에
한국인들에 대해 외국인들이
올려놓은 영상들도 있는데
한국에서는 누가 어려움을 당하면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 어려움을 나누거나 돕는
그런 영상들도 있어요.
그런 영상을 볼 때는 제 어깨도
으쓱해집니다.
부족하거나 결핍이 있는 사람들..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돌보며
함께하는 사회가 되기를, 저도 그런
사회의 일원이기를 늘 바라며 삽니다.
살다보면 남몰래 마음 한켠에 속죄할 거리가 누구나 있을수 있지요.
저도 있구요.
그냥 참회하며 덮고 그러다 잊어가며 사는거지요.
글을 쓰면서 벌써 속죄 받으셨으니
이젠 잊어버리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냥 제 가슴의 낙인으로 놔두고
혹 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꺼내서 저를
비추어보는 거울로 삼으며 살고
있습니다. ㅎ
마음자리님도 어린아이였으니 어쩔수없었지요.
그 애는 잊었을겁니다.
마음자리님도 잊으세요.
억지로 잊진 않고, 그냥 한번씩
추억 되살려보고 반성의 거울로
삼을려구요. ㅎ
가끔은 살아가면서 석연찮은 일로 떠오르는 순간? 일로 남아 있는게 있지요
이것도 죄? 아니면 그럴수도 있지...하면서 ㅎ 죄?의 한계는 어디까지?
내 맘속의 서연찮음으로?
죄라는 것이 마음에 남는 흉터 같은
거 아닐까 생각합니다.
흉터는 남았지만 무겁지는 않으니
그냥 가지고 가려구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