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널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많이 남아 오가면서 보았던 옥천서원(玉川書院)으로 가보았다.
조그만 천이 있다. 이 천이 옥천(玉川)이다. 이 마을은 한 때 옥천동(玉泉洞)이라 했다. 옥천 옆 길을 건너서 입구에서 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눈에 뛰는 것은 고고하게 생긴 향나무였다. 이 향나무를 거쳐서 잘 관리된 서원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_MG_0041.JPG _MG_0041.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chosun.com%2Fweb_file%2Fblog%2F49%2F98049%2F1%2F20120522_132610_b04430873d2858c9682690c362007b2d.jpg)
삼문(三門)이 닫혀 있다.
![img14D_tmp.jpg img14D_tmp.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chosun.com%2Fweb_file%2Fblog%2F49%2F98049%2F1%2F20120522_132638_eb4503d4d7af4b63d3bed4466978c439.jpg)
삼문으로 들어가는 석계난간(石階欄干) 긑에 태극문(太極紋)의 조각 수법으로 보아 이 서원의 건물의 품위를 높여주는 것 같다.
또 바로 옆에 있는 향나무는 이 서원의 역사를 말하는 것 같다.
![_MG_0003.JPG _MG_0003.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chosun.com%2Fweb_file%2Fblog%2F49%2F98049%2F1%2F20120522_132723_c67b696eafdcdd1446fbe9633decad61.jpg)
![_MG_0019.JPG _MG_0019.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chosun.com%2Fweb_file%2Fblog%2F49%2F98049%2F1%2F20120522_132759_8e89706736ab8cf0f88d22c73292ccb4.jpg)
조선조(朝鮮朝) 顯宗8年(1667) 醴泉郡 普門面 玉泉洞 (현재의 덕률리)에 옥천정사(玉泉精舍)로 建立하였다.
옥천정사(玉泉精舍)는 명망 높은 유사가 개설한 장소가 아니고, 예천임씨(醴泉林氏) 문중(門中), 지학(志學)들이 순수하게 학문을 연마하는 강학소로 보인다.
肅宗37年(1711) 儒林에서 상현사(尙賢祠)에
사진 중 맨 윗동(棟)이 상현사(尙賢祠)
명교당(明敎堂),
![_MG_0001.JPG _MG_0001.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chosun.com%2Fweb_file%2Fblog%2F49%2F98049%2F1%2F20120522_133032_48872f55ec1ddef32a90491ad72ea902.jpg)
동재(東齋)인 항양재(涵養齋),
![_MG_0021.JPG _MG_0021.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chosun.com%2Fweb_file%2Fblog%2F49%2F98049%2F1%2F20120522_133002_681191105aad0546c4c3996037db7b41.jpg)
서재(西齋)인 흥학재(興學齋),
![_MG_0023.JPG _MG_0023.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chosun.com%2Fweb_file%2Fblog%2F49%2F98049%2F1%2F20120522_133119_193e991d8ac1dd6a11e8670bb4027549.jpg)
삼문(三門),
제사청(祭祀廳)
![_MG_0009.JPG _MG_0009.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chosun.com%2Fweb_file%2Fblog%2F49%2F98049%2F1%2F20120522_133150_981ff504b93ff7a7064a33be76165749.jpg)
5棟을 附設하여 서원(書院)의 건물구성 요소를 가지고, 林西河(諱椿 貫醴泉) 先生에 朝鮮朝 鄕中諸賢인 潘節孝 (諱儒 貫巨濟) 先生, 太西庵(諱斗南 貫永順) 선생(先生), 宋梅圃(諱福基 貫冶城) 선생를 追享함으로서 四賢을 妥靈한 書院으로 傳承해 문도나 향유들에 의해 서원옥천서원(玉川書院)이라 했다.
이제 옥천서원은 과거준비기관으로서 문예교육(文藝敎育)에 치중하고, 사당을 두어 선현향사(先賢享祀)를 하고 정치적·사회적으로 밀접한 교섭을 갖는 공적인 측면를 가지게 되었다.
高宗5년(1868) 國令으로 毁撤된 지 50 여년후인 倭政11년 (19209)에 尙賢祠, 明敎堂 2棟을 복원하여 享禮를 이어 오던 중 6.25 戰亂을 만나 閉門闕享한지 30여년만에 각지 篤志人士의 協贊과 合心誠力으로 鄕地士林의 도움을 얻어 중건하다.
林西河(諱椿 貫醴泉, 1148-1189)
고려 인종 때의 문인. 자는 기지(耆之).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한문과 당시(唐詩)에 뛰어났다. 저서에 서하(西河)선생집, 작품에 국순전(麴醇傳), 공방전(孔方傳)이 있다.
강좌칠현 (江左七賢)
고려 후기에 의를 맺어 시와 술을 즐긴 7명의 선비. 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임춘(林椿)·조통(趙通)·황보항(皇甫抗)·함순(咸淳)·이담지(李湛之) 등을 가리킨다. 중국 진(晉)나라 때의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비하여 생겨난 말이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난 이후, 문인들이 전원으로 도피하여 시주(詩酒)를 벗삼는 풍조가 유행했는데, 죽림고회(竹林高會)를 중심으로 맺어진 이들 강좌칠현(江左七賢)이 그 주류를 이루어, 청담(淸談)의 풍이 고려·조선시대에 성하게 되었다.
국순전(麴醇傳)
고려 고종(高宗) 때 문인 서하(西河) 임춘(林椿)이 지은 가전체설화(假傳體說話). 술을 의인화(擬人化)하여 교훈적으로 풍자한 작품으로 술로 인한 음탕 끝에 패망한 것을 보여줌으로써 계세(戒世)ㆍ징인(懲人)을 의도하고 있으며, 조선 전기의 소설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동문선(東文選)> 권100에 실려 있다.
내용은 순의 90대 할아버지 모(牟)가 후직을 도와 공로가 많고 청렴하므로 중산후에 봉해졌고 국씨 성까지 받았다. 그의 5세손은 강왕 때 금고(禁錮)되었고, 위나라 때 순의 아버지 주(酎)가 출세하였다가 진이 어지러워지매 벼슬을 버리고 죽림에서 놀았다. 순은 도량이 넓고 풍류가 있어 국처사라는 칭호와 신임을 얻어 국가의 중대사에 필수적인 존재가 되었지만, 왕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예법(禮法) 지사의 지탄을 받았다. 또 왕의 보호 아래 돈을 거둬 함부로 써서 비난을 받다가 벼슬에서 물러나서 죽었다는 이야기다.
공방전(孔方傳)
공방(孔方)이란 엽전에 뚫린 네모난 구멍을 가리키는 말로서, 가전체소설(假傳體小說)인 이 소설은 엽전을 의인화(擬人化)한 우화이다.
내용은, 공방(孔方)의 자(字)는 관지(貫之)요, 그 조상은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살면서 세상에 나온 일이 없었다. 아버지 천(泉)이 주(周)나라 재상으로 부세(賦稅)를 맡았고, 방(方)은 한(漢)나라 때 벼슬하여 역대 임금을 섬겼으나 재물만을 중히 여기다가 원제 때 파면되었다. 그러나 한나라에서는 방(方)의 경제술(經濟術)을 채택하여 나라가 편안하게 되었다. 당(唐)나라가 일어나자 다시 불렀으나 이미 죽고 없었다. 방의 아들 윤(輪)은 아버지에 비하면 너무 경박하다는 욕을 들었고, 나중에 수형령(水衡令)이 되었을 때 장물죄(贓物罪)로 사형되었다 는 이야기다.
贈演之(연지에게 주다)-임춘(林椿)
風生虛閣抵千金(풍생허각저천금)
滿院荒凉碧樹深(만원황량벽수심)
不覺天西殘月落(불각천서잔월락)
終宵空伴草蟲吟(종소공반초충음)
허전한 누대에 이는 바람 천금의 값어치
정원에 황량함 가득하나 푸른 나무 깊다.
하늘 서쪽 쇠잔한 달 지는 줄 모르고
밤새도록 풀벌레와 함께 벗 삼아 읊다.
潘節孝 (諱儒 貫巨濟) 先生
朝鮮朝 太宗 時節 世의 孝子로 推仰을 받았다.
太西庵(諱斗南 貫永順) 先生
朝鮮朝 中宗時 司馬兩試의 합격에 이어 文科에 及第하여 重要官職을 두르거치면서 淸白吏로 그 명성이 높았다.
宋梅圃(諱福基 貫冶城) 先生
朝鮮朝 宣祖 時 退溪 李先生의 門人으로 淸直한 선비 정신을 굳게 지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後進養成에 힘
을 쏟은 巨儒로 壬辰倭亂時에 郡伯의 卑怯逃亡으로 이를 代行 守城將으로 敵과 싸워 큰 공을 세운바 있으며 戰時
民心收拾에 크게 寄與한 바 있다.
출처 : 光陰 2012/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