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敏榮 예술의 전당 이사장] "文化와 삶의 質을 높이는 것"
요즘 사람들은 누구나 문화생활을 즐긴다고 말한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집에 가면 대채로 아파트이기 때문에 난방이 잘 되어있고 안락한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텔레비전으로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들으며 프로스포츠 중계도 본다. 어디 그뿐이랴. 웬마만한 음식은 전화만 결면 한 시간내에 배달되고 술이며 고기며 맘것 먹는다. 인척이나 친구집도 번거롭게 찾아갈 필요 없이 전화 다이얼만 돌리면 무슨 이야기든지 할 수 있다. 그것은 미국에 이민간 친구나 남아공에 파견 나가 있는 친척에게도 가능하다. 그런데 왜 우리들에게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느니, 反文化的이니 하는 질책성 말들이 오가는 것일까.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소위 高級文化에 대한 無知나 기피현상 때문이다. 물론 문화는 다 한 가지이지 또 고급문화는 무엇인가고 반무할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항변하는 사람들에게 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래전 부터 사회학자들은 문화를 대중문화와 고급문화로 나누어 왔다.
즉 고급문화란 미술, 문학, 연극, 무용, 오페라, 음악, 건축 등을 일컫는다. 바로 여기서 문명의 이기를 잘 활용해서 편리하게 사는 것이 과연 문화생활이냐 하는데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문화생활이란 高級文化의 생활화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가족과 함께 발레를 감상하러 간다든가, 교향악연주나 오페라를 관람하고 미술관에 다니면서 그림에 매료되는 것, 그리고 명작이나 화제가 되는 소설을 읽는 것 등이 엄격한 의미에서 문화생활이고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라 하겠다. 흔히 중산층이라고 하면 자기집을 갖고 자가용을 몰며 문명의 이기를 마음껏 누리는 계층을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80% 이상이 자신들이 중산층 이라고 느끼고 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중산층이란 月給의 몇 펴센트를 문화비로 쓸 줄 아는 계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언젠가 대학의 요직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표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가 보고자 하는 작품은 『홍도야 우지마라』와 같은 樂劇이었다. 그동안 예술의 전당에서는 세계적인 예술단들이 수시로 와서 공연을 해도 표를 부탁한 적이 없던 그 인사가 지나도 한참지난 구닥다리 아극을 한다니까 표 부탁을 해온 것이다. 필자가 그에게 표를 얻어주면서도 어딘가 찜찜하다는 생각과 함께 우리 사회의 문화지표를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은 성페테르크(舊레인그라드) 의 세계적인 오페라단이 와서 3일 동안 공연한 적이 있었다. 그들이 가저온 작품은 러시아인들도 쉽게 보기 어려운 『이고르公』이라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그 아까운 공연에 관객이 반도 차지 않았었다. 그렇게 뛰어난 공연임에도 관객이 없어 파리를 날리고 막을 내린 것이다. 얼마나 아까운 작품인가.
好衣好食 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는 것이 문화생활이 아니다. 비록 차가 없어 10여리를 걸어서 오는 한이 있더라도 좋은 연극하편, 아름다운 발레 한편를 감상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文化生活이고 소위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공연장은 대부분 젊은 사람들로 채워진다. 서양의 공연장에 가보면 머리가 희끗희끗한 준.장년들이 가득차 있다. 거기서 정치도 하고 사교도 한다. 저들은 음침한 호텔방이나 룸살롱 같은 데서 사교를 하는 것이 아니다.
저들은 하루 저녁을 굶는 한이 있어도 돈으로 오페라 한편, 교향학 연주를 관람한다. 서양인들이 평소 교양 있어 보일 정도로 매너가 세련되어 있는 것도 실은 고급문화를 생활화한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꽤 잘 사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있다든가, 폭력이 판을 치는 것도 고급문화가 국민 개개인에 스며들어 있지 못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고급문화의 생활은 젊을 때부터 습관화되어야한다. 1년에 단 몇 번이라도 오페라. 연극. 발레. 음악회 등을 찾는 습관을 기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생활자세이다. 그것이야 말로 각자가 사람의 질을 높이는 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