嶺南學脈 (14) 耕隱 李孟專
李孟專을 비롯하여 趙旅?金時習?南孝溫(또는 權櫛을 대신 꼽기도 한다.)?元昊?成聃壽 등을 生六臣이라 한다. 사육신과 대칭되는 생육신은 비정상적인 수단으로 정권을 잡고 왕위에 오른 首陽大君(世祖)에 충성을 거부하고「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不事二君)」는 대의명분을 실천, 평생을 초야에 숨어 폐인으로 자처한 사람들이다.후세 사람들은 이들의 행위에 대해「절의(節義)」의 본보기로 곧잘 내세웠다.
「절의」란 유교가 표방하는 실천윤리의 하나이다. 유교는 앎(知)을 중시했지만 그것을 실천(行) 하는 것도 중요시 했다. 훗날 金宗直?李滉?宋時烈 등이 李孟專 등 생?사육신의 절의를 높이 산 것은 바로 이들이 보여준 행동이 유교의 실천이념의 한 전형이었기 때문이다.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가 집권한 것은 실로 신진 사류(士類)에 큰 파문을 던진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사육신은 생명을 버렸고, 생육신은 평생을 두문(杜門) 혹은 방랑으로 보냈으며 죽림칠현(竹林七賢)의 고사를 본받아 청담(淸談)으로 날을 보낸 일파도 생겨났다. 더 나아가 이 사건은 사류간에 세력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어 기내(畿內)를 근거로 하는 훈신구가(勳臣舊家)의 세력과 영남의 재야 사림의 대립을 낳는다. 이 대립은 점차 사상?향토?처세 등 여러 요인으로 교분이 나누어지게 된다.
기내(畿內)의 훈구세력은 대부분 文宗의 고명(顧命)을 받고, 단종을 보필하다가, 세조의 집권 후에도 계속 정권에 참여해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정신상?절의상으로는 비판의 여지가 있으나 정치의 현실에 입각한 치화(治化)를 이룩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鄭麟趾?申叔舟 등과 그 후의 徐居正?成俔 등 많은 인물이 꼽힌다.
이에 비해 영남의 재야사림이란 吉再?金叔滋의 학통을 잇는 성리학파의 金宗直 일파를 말한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은 나중에 사화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된다.
절의의 본보기인 생육신중 李孟專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그는 생육신중에서도 趙旅와 더불어 전형적인 영남출신이었다.그의 자는 伯純, 호는 耕隱이며, 본관은 碧珍이다. 그는 병조판서 審之의 아들로 태조 때(1393)에 금오산 밑인 선산군 구미읍 荊谷리 (현 구미시 신시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누대로 성주군 초전면의 흠실에서 살았으나, 선산으로 옮긴 것은 그의 아버지 때였다. 그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없어 그의 어린 시절의 성장과정은 뚜렷하지 않다. 그는 冶隱 吉再의 문하에서 학문과 도덕을 닦아 유학에 밝았다고 한다. 또한 성품이 청렴?강직하여 물질을 탐하지 않고 의(義)라고 생각되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굽히지 않았으며, 효성이 지극했다는 전형적인 유학자의 모습으로 그의 프로필이 많이 소개되어 왔다.
1427년(세종9년)24세에 그는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오른다. 이어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에 올라 왕조에 대한 간언의 직을 수행한다. 이때 首陽大君이 국권찬탈의 저의를 드러내 좌의정 金宗瑞를 살해하고 이어 영의정 皇甫仁 이조판서 趙克寬, 찬성 李穰 등 반대파 중진들을 권문에서 주살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어서 鄭본?趙遂 등을 유배하여 뒤에 이들을 죽이고,「安平大君이皇甫仁?金宗瑞 등과 역적을 꾀했다」는 구실로, 안평대군을 유배하는 이른바 계묘정난(癸卯靖亂)을 일으켰다. 李孟專은 이 일에서 언관(言官)으로서의 힘의 미약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외직을 자원, 居昌현감으로 궐문을 나온다. 현감으로 청백리록에 기록될 만큼 청렴 결백한 선정을 베풀고 있을 때, 그는 수양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았다는 실로「청천벽력 같은」소식을 듣는다.
그는 즉시 현감직을 버리고, 비분한 마음을 간직한 채 선산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의 초인적인 절의 행위는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李孟專은 그의 호(耕隱)가 풍기는 것과 같이 전원 속에 묻힌다. 문을 닫고 일체의 손님도 사절하고 방안에 칩거하기 시작한다.누가 찾아오면 그는 짐짓 청맹과니 행세를 했다. 눈 멀고, 귀가 먹었다고,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청맹과니 행세는 너무나 완벽해서 집안 사람들 조차 그가 진짜 눈멀고 귀먹은 줄 알았다고 한다.「눈은 어두워지려 하고 귀는 먹으려 하니, 보고 듣는 것이 민첩하지 못해 바보 같구나 (眼欲昏昏耳欲聾見聞無敏與癡同)」하는 그의 시 구절은 이때의 참담함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그 후 그에게는 조정으로 돌아오라는 부름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완강했다.아예 대궐 있는 쪽을 향해 앉는 것 까지도 거부할 정도로 그는 철저하게 절의를 나타냈다. 그는 매월 초 하룻날 아침에 해를 향해 절을 했다. 남들이 왜 그러냐고 물으면「기도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실 그 행위는 동북쪽의 단종의 적소가 있는 영월 쪽을 향한 요배 였다.
그의 철저한 청맹과니행세는 결국 金宗直에게 만은 들키고 만다. 李孟專은 金宗直의 아버지 金叔滋와 함께 吉再의 문하에서 공부한 만큼 절친했다. 김 숙자의 아들 金宗直은 평소 李孟專을 존경하여 자주 찾아 문병을 했다. 하루는 김 종직이 문병하니 李孟專이 흔연히 마주앉아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말은 간곡하고 깊은 내용을 담았다. 김 종직은 놀라서「선생님의 병이 거의 나았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李孟專은「병이 나은 것이 아니다. 이제 너를 보니 내가 가슴이 탁 트이는 듯 하다」고 말했다. 이때 비로소 김 종직은 이분이 거짓으로 눈멀고 귀먹은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김 종직은 이 맹전의 참뜻을 간파했던 것.
李孟專은 90세(1481)에 세상을 떠났지만 죽을 때까지 눈멀고 귀먹은 행세를 했다.실로 30여년을 그런 생활을 한 것이다. 그는 유학적 삶의 방법을 온몸으로 보인 것이다.
만년에 김 종직 만을 만났을 뿐, 완전히 밀폐된 생활을 했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김 종직은 이 맹전의 권유로 관직에 나왔다고 한다. 즉 김 종직이 세태를 비판하자 이 맹전은「자네와 같은 젊은 이가 세상에 나가야 하네. 그리하여 야은(冶隱)선생에게서 배운 그 학문을 세상에 널리 펴야 하네」하고 그의 출사(出仕)를 권유했다는 것이다.
그는 빈한과 외고집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그의 집은 얼마나 가난했던지 아침 저녁 식사도 제때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가 살던 집의 우물을 죽정(竹井)이라 하고 연못을 국담(菊潭)이라 불릴 정도였다.「죽」과「국」으로 연명한 그의 삶을 그런 식으로 빗대어 부른 것이다.
생?사육신의 절의행위와 더불어 그의 행위는 그 후 선산을 중심으로 한 영남사림의 행위규범으로 은연중 작용했다. 宋時烈은 그를 조선의 3인자(仁者)로 꼽았으며, 李滉?金宗直 등이 그를 추모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조선후기에 와서 숙종 때에 그는 비로소 함안의 西山書院, 선산의 月巖書院에 趙旅? 元昊? 金時習? 成聃壽? 南孝溫 등과 함께 제향 되었다.
이어 정조 때에는 이조판서 겸 홍문? 예문 양관의 대제학에 증직 되었으며 靖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를 모시는 사당은 영천군 자양면 원각동에 있는 龍溪書院과 龍溪祠이다. 용계서원은 숙종 45년에 자양면 성곡동(토동)에 건립했으나, 최근 자양 댐 공사로 수몰지구에 들어가 현 원각동으로 옮긴 것이다.
그의 직계 손은 1천호 가량 추산되고 있으며, 영천군 자양면에 1백호, 금호읍에 2백호,청통면에 1백여호가 살고 있고, 청송군 부남면과 파천면에 2백여호, 칠곡군 동명면에 2백호가 살고 있다.
▲참고문헌=耕隱先祖實紀 生六臣先生集 韓國史(진단학회) 朝鮮名人傳 韓國思想史
<李夏錫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