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역에 있는
인왕산 안내도
[독립문역~인왕사] 구간
탐방로 도중의
인왕사 일주문
인왕사 안내문
인왕사 대웅전
인왕산 국사당
인왕산 국사당에 관한
안내문
[인왕산 국사당~서울성곽(한양도성)] 구간
탐방로 주변의
암봉
서울성곽길(한양도성길)에서 바라본
북악산(좌)과 청와대(우)
서울성곽(한양도성)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안산(중앙)과 백련산(우)
[ 위 사진부터 이어지는 8장의 사진은
서울성곽의 전망바위에서
시계바늘 방향으로
360도 파노라마 조망하면서
촬영한 사진들이다. ]
서울성곽(한양도성)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백련산(좌)과 인왕산(우)
서울성곽(한양도성)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인왕산
인왕산(仁王山)
높이 : 338m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
명칭 유래
조선 개국 초기에 서산(西山)이라고 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렀다.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인데,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하였다고 한다. 서울의 진산(鎭山) 중 하나이다.
자연환경
인왕산의 높이는 338m이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암반이 노출된 것이 특징이다. 서울의 성곽은 이 산의 능선을 따라 지나며 동쪽 산허리에 북악산길과 연결되는 인왕산길이 지난다.
인왕산에는 타포니(Tafoni)가 발달한 토르(Tor)가 많다. 주로 서울시 무악동 남쪽기슭 135m 고도에 위치한다. 인왕산의 토르는 주빙하 기후에 의해 화학적 풍화가 진행되어 생성된 것과 후빙기에 절리 발달에 따른 차별침식으로 생성된 것이 있다고 한다. 흔히 타포니는 토르와 관련되어 발달한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화강암 토르에서 관찰되는데 인왕산 또한 그에 해당한다. 토르에서 타포니가 발달한 부분은 다른 부위보다 풍화가 더욱 진전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2007년과 2008년 인왕산에서 관찰된 식물은 전체 75과 232종 38변종 5품종으로 총 275종이며, 귀화종은 37종이다. 주요 출현 식물은 생태계 교란 야생동·식물인 국화과의 돼지풀, 서양등골나물 등이다.
형성 및 변천
곳곳에 약수터가 있고 경치가 아름다워 서울시민들의 유원지였으나 군사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었지만 1993년부터 개방되었다. 인왕산은 조선시대의 명산으로 숭앙되었으며, 조선 초기에 도성을 세울 때 북악(北岳)을 주산(主山),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낙산(駱山)과 인왕산을 좌우 용호(龍虎)로 삼아 궁궐을 조성하였다.
현황
봄에는 진달래가 만발하고 곳곳에 약수와 누대가 있었다. 경지가 아름다워 이를 배경으로 그린 산수가 많은데, 특히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인왕산을 등산할 수 있는 코스는 총 5개이며 각각 두시간 정도면 오를 수 있고, 인왕산을 종주하는데 3시간 정도가 걸린다. 제1코스 사직공원 입구·약수터·정상·부암동(자하문), 제2코스는 사직터널·성터·정상·부암동(자하문), 제3코스는 독립문역·인왕산 일주문·국사당·선바위·철조망문·능선길·범바위·인왕천 갈림길·정상·305능선길·기차바위·인왕아파트 갈림길·홍심약수 갈림길·부암동사무소쪽 갈림길·하림각, 제4코스는 사직터널 전 사직공원·북악스카이웨이·국사당·달팽이바위·인왕산약수·해골바위·정상, 제5코스는 경복궁역·자하문길·영추문·청와대 앞길·청운중학교·최규식 경무관 동상·자하문·성곽길·정상 등이 있다.
지하철 3호선을 이용하여 경복궁역, 독립문역, 홍제역에서 하차한 후 사직공원에 가는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서울성곽(한양도성)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인왕산, 북악산, 청와대
서울성곽(한양도성)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북악산, 청와대, 남산
서울성곽(한양도성)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남산
서울성곽(한양도성)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서울성곽길과
사진 우측에 보이는 안산
서울성곽(한양도성)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안산(중앙)과 백련산(우)
[ 이상으로 파노라마 조망 끝 ! ]
서울성곽(한양도성)의 전망바위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청와대
서울성곽길(한양도성길)에서 바라본
인왕산
서울성곽길(한양도성길)에서 바라본
안산
인왕산(338m) 정상에서
이성수
인왕산(338m) 정상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북한산의 문수봉, 보현봉, 형제봉,
북악산, 광진구 용마산
[ 위 사진부터 이어지는 8장의 사진은
인왕산(338m) 정상에서
시계바늘 방향으로
360도 파노라마 조망하면서
촬영한 사진들이다. ]
인왕산(338m) 정상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북악산, 광진구 용마산, 남산
인왕산(338m) 정상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서울 남산, 청계산, 관악산, 삼성산, 안산
인왕산(338m) 정상에서 바라본
안산
인왕산(338m) 정상에서 바라본
안산(좌)과 백련산(우)
인왕산(338m) 정상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백련산, 북한산의 족두리봉, 향로봉, 비봉
인왕산(338m) 정상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은평구의 봉산, 북한산의 족두리봉, 향로봉, 비봉,
문수봉, 보현봉, 형제봉, 노원구의 수락산
인왕산(338m) 정상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북한산의 문수봉, 보현봉, 형제봉, 북악산,
광진구 용마산
[ 이상으로 파노라마 조망 끝 ! ]
인왕산(338m) 정상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좌로부터) 북한산의 향로봉, 비봉, 문수봉, 보현봉, 형제봉,
노원구의 수락산
인왕산(338m) 정상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북한산의
문수봉(좌)과 보현봉(우)
인왕산(338m) 정상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북악산(좌)과 청와대(우)
[인왕산 정상~기차바위] 구간
산행로에서 바라본
기차바위와
그 뒤로 보이는
(좌로부터) 북한산의 족두리봉, 향로봉, 비봉, 문수봉, 보현봉,
형제봉, 노원구의 수락산
[인왕산 정상~기차바위] 구간
산행로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롯데타워(좌)와 남산(우)
기차바위에서 뒤돌아본
인왕산 정상(중앙)과 안산(우)
기차바위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북악산과
북악산 능선 너머로 보이는
수락산(좌)과 불암산(우)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북한산의 족두리봉, 향로봉, 비봉, 문수봉, 보현봉,
형제봉, 노원구의 수락산
기차바위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좌로부터) 북한산의 비봉, 문수봉, 보현봉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인왕산(좌)과 안산(중앙)
[기차바위~홍지문] 구간
능선에서 바라본
스위스 그랜드 호텔과 백련산
[기차바위~홍지문] 구간
능선에서 바라본
창의문
[기차바위~홍지문] 구간
능선에서 바라본
상명대학교 캠퍼스
[기차바위~홍지문] 구간 능선의
탕춘대성 성벽
탕춘대성
1. 개요
조선시대의 성.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해 지은 성이다.
성곽 둘레는 약 4km였으며, 성벽은 인왕산 동북쪽부터 시작하여 북한산 비봉까지 연결되었다. 탕춘대성은 이후 도성 방위를 위한 일종의 관문성(關門城)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2. 이름
인근 세검정에 있는 '탕춘대(蕩春臺)'에서 따왔다. '탕춘(蕩春)' 뜻은 '봄(春)을 질탕(蕩)하게 즐긴다'로, 연산군이 타락했던 시절에 이 일대에 있던 고찰 장의사(藏義寺)를 철거하고 정자 탕춘정(蕩春亭)을 지어 연회를 즐겼던 데에서 비롯했다. 연산군 폐위 후 탕춘정은 사라졌지만 이름은 오랫동안 남았고, 숙종 때 이곳을 지나는 성을 지으면서 탕춘대 이름을 붙인 것이다. 1754년(영조 30년)에 영조는 탕춘대 이름을 '연융대(鍊戎臺)'로 바꾸었는데, 성 이름은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한양도성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성(西城)'이란 별칭으로도 불렸다.
3. 역사
1390년대 중후반에 조선 조정에서는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도성을 쌓았다. 그러나 한양도성은 원래 조선의 수도 겸 중심지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므로 방어상으로는 약점이 많았다. 소수의 방어군으로는 수비가 불가능할 정도로 큰 성이며 숭례문과 흥인지문 주변의 저지대는 방어가 매우 힘들다는 점도 있었으며 해자가 없어서 방어에 지장이 온다는 점 등이었다. 그 중에서 상당히 큰 문제점은 주변에 가까운 산성이 하나도 없어서 유사시에 일단 대피할 곳이 없는 것과 육상에서 침공하는 적들이 주로 이용하는 서북방 방어가 취약하다는 점이었다.
문종이 이를 간파하여 북한산에 산성을 쌓으려 했으나 백성들의 고역이 심하다 하여 무산되었다. 그러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도성의 체계적인 방위가 절실하다고 느낀 선조가 다시 성을 쌓으려 했으나 전후 재정빈곤으로 무산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효종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본격적으로 논의가 시도된 것은 숙종 때였는데, 청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30여 년 간 진척을 보지 못하다가 청나라 정세변화를 틈타 1711년(숙종 37년)에야 공사를 시작하여 6개월만에 완공했으니 이것이 오늘날의 북한산성이다.
북한산성 축조 7년 전인 1704년(숙종 30년)부터 1년 전인 1710년(숙종 36년)까지는 한양도성을 수축하는 등 숙종은 전대에 미처 시행하지 못했던 도성 방위에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다. 탕춘대성을 지은 것도 그 일환이었다. 탕춘대에 성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이미 1702년(숙종 28년)에 나왔다.《숙종실록》, 음력 1702년 10월 5일 자 기사를 보면, 당시 도둑이 많이 생겨 조정에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신완이 창의문 밖 일대 지형도를 숙종에게 보이면서 "여러 군영이 힘을 합친다면 성 쌓기는 어렵지 않다"고 아뢰었다. 이후 1718년(숙종 4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공했다. 처음에 40일 정도 성의 절반을 축조했다가 겨울에 쉬었고, 다음해 봄부터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40여 일 만에 완공했다고 한다.
성곽 둘레는 약 4km였으며, 성벽은 인왕산 동북쪽부터 시작하여 북한산 비봉까지 연결되었다. 탕춘대성은 이후 도성 방위를 위한 일종의 관문성(關門城)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사실 탕춘대성을 축조하는 문제가 순탄하게 해결된 것이 아니라서 조정 내에서 싸움이 있었다.
축조를 찬성하는 측에서는 북한산이 신라 이래 전략적 요충지였고 임지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경험으로 생각해보건데 수도 방위를 촘촘하게 하기 위해서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방어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축조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북한산성과 한양도성 사이에 방어선을 형성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으며 병력도 모자라고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여기서 축조를 찬성하는 측의 손을 들어준 게 숙종이었다. 숙종이 이렇게 탕춘대성에 열정을 보인 이유는 아래와 같이 짐작되고 있다.
북한산성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유사시 피난이 쉬워야 한다. 그런데 한양도성의 북측과 북한산성의 남측은 험악해서 최단코스로 가기 곤란하고 평지를 따라서 좀 멀리 돌아서 가야 하는데 병자호란 같이 적의 기병이 급속전진하는 경우 피난을 제대로 가지도 못하고 중도에 잡히게 된다.
피난길을 거리상 최소화하려면 결국 등산을 해야 하는데 산길도 정비되어 있지 않고 방어선도 없는 산을 탄다는 거 자체가 엄청난 시간과 힘이 들어가면서 별로 멀리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나마 꼭 필요한 짐과 물자도 제대로 못 옮긴다. 따라서 북한산성과 한양도성 사이에 방어시설물이 있어야 한다.
북한산성, 탕춘대성, 한양도성이 하나로 연결되면 서로간에 안전한 통로가 만들어지며 한양도성의 물자를 탕춘대성을 통해서 북한산성에 이동시킴으로서 장기간의 농성전도 가능하고 한양도성이 함락되더라도 탕춘대성과 연결된 북부 성곽지대를 확보함으로서 적이 한양도성을 제대로 이용못하게 할 수 있다.
탕춘대성을 완공한 후 조정에서는 군사적인 시설들을 성 내에 여럿 설치했다. 우선 옛 탕춘대 터에 연무장을 지었고, 유사시를 생각하여 쌀을 비축할 선혜청 창고와 군량창고인 평창을 두었다.[4] 또한 한성부와 경기도 일대를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총융청 기지도 이곳에 설치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비용 및 인력 문제로 인해 숙종이 원래 구상했던 탕춘대성의 동쪽 성벽은 축조되지 못하고 단지 서쪽 성벽만 완공되었으므로 탕춘대성은 독자적인 성으로는 작동하지 못한 채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이어주는 통로같이 사용되게 된다.
그 이후로는 성벽을 실제 쓸 일이 없어서 점점 붕괴되다가 을축년 대홍수로 대타격을 입어서 21세기에 들어오면 탕춘대성 대부분은 헐리거나 무너졌고 일부만 남아있다.
1976년 6월 25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받았다.
[겸재 그림 길 (110) 홍지문] 왜란·호란 겪은 뒤 백성 살라고 탕춘대성 쌓았으니
cnbnews 제733호
글 : 이한성(옛길 답사가)
게재일 : 2022.10.17.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 그림 길을 마무리할 단계에 이르면서 되도록 겸재의 산수화(山水畵) 배경이 되는 곳은 빠짐없이 둘러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이 번 차에 갈 곳은 홍지문(弘智門)이다. 홍지문은 인왕산과 북한산을 연결하여 쌓은 탕춘대성(蕩春臺城) 가운데 홍제천 수문(水門) 옆 문루(門樓)이다. 탕춘대성이나 홍지문은 이미 필자의 ‘이야기가 있는 길’, ‘옛 절터 가는 길’에서 소개한 바 있어서 탕춘대성 길을 걸으며 요약하여 짚고 가려 한다.
기차바위 방향이 탕춘대성 길
배낭 가볍게 메고 한양도성 창의문(彰義門)에서 출발이다. 이 문을 비롯하여 이 지역의 역사와 옛이야기는 겸재의 장동팔경첩 속 창의문도를 소개할 때 상세히 소개하였다. 성벽을 따라 잘 다듬어진 인왕산 길로 오른다. 몇 년 사이 확 달라진 풍경이 있다. 오르고 내리는 이들은 젊은이들이 대세를 이루고 외국인들도 간간히 보인다. 오호 감동.
오르막이 끝나면 직진 길은 인왕산 정상. ‘우회전 길은 기차바위’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기차바위 방향이 탕춘대성 길이다. 잠시 돌아본다. 사대문(四大門) 안 서울 시내가 손바닥 안에 들어온다. 멀리는 서울을 둘러싼 산들이 와락 다가온다. 관악산, 청계산, 남한산성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수원의 광교산, 백운산도 시야를 벗어나지 않는다. 눈 아래로는 겸재의 그림 배경들이 펼쳐진다. 기린교가 있는 수성동을 비롯하여 필운대, 옥류동, 청풍계, 자하동, 유란동, 장동, 청와대 주변 대은암동, 경복궁…. 모두 눈 아래 있다.
뒤집어 보면 겸재가 저 아래 옥인동 인곡정사(仁谷精舍)에서 인왕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들의 배경이 되는 봉우리에 서 있는 것이다. 겸재의 그림 중에는 이 봉우리와 이어서 벋어나간 백련봉(白蓮峰: 기차바위)을 그린 그림들이 있다. 이제 기차바위를 향하여 인왕 북능선으로 출발. 겸재의 그림 속이다.
잠시 후 길옆에 부끄러운 듯이 얼굴 돌리고 앉아 있는 둥근 바위를 만난다. 무심히 지나가면 알 수 없는 바위인데 겸재 그림을 꼼꼼히 살피면 기차바위에 공깃돌이 앉아 있다. 인왕제색도, 창의문도, 인왕산도, 인곡유거도에 그려져 있다. 길 뒤편으로 돌아가서 이 바위를 보면 어김없는 해골 모양을 하고 있다. 아랫동네 유란동(경복고 주변)에서 젊은 날을 보낸 겸재는 아마도 이 능선이 익숙했던 모양이다. 얼마나 인상적이었으면 기차바위가 들어간 그림에는 이 바위를 공깃돌처럼 그려 넣었을까? 누군가가 찾아내라고 던진 겸재의 퍼즐은 아니었을까?
기차바위는 안평대군의 무계동(武溪洞)과 옆 계곡 삼계동(三溪洞) 뒤로 우뚝 서 있는 큰 암벽이다. 겸재는 언제나 시원하게 쓸어내려 그림을 그렸다. 바위 위로는 철심을 박고 줄을 길게 매어, 어린 날 긴 줄을 묶어 뒤로 뒤로 쪼르르 달리면서 기차놀이하던 때를 연상케 한다. 아마도 그런 연상이 만들어낸 이름일 것 같다. 수락산 기차바위도 이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북한산 능선은 일망무제(一望無際)의 확 트인 경관을 보여 준다. 기차바위를 지나면서 인왕산의 북 능선은 대부분 흙길로 편안하게 이어지는데 인왕산 구간 중 가장 아름다운 구간일 것이다. 봄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자연의 산철쭉이 곳곳을 붉게 물들이고, 가을에는 구절초와 벌개미취도 만난다. 능선 길에는 30~40년쯤 된 소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트레킹 코스로 그만이다. 아쉬움이 있다면 짧은 것이다.
이렇게 진행하다 보면 국가 시설물을 지나면서 가파른 하산 길이 나타난다. 이쯤에서부터 무너져 내린 성벽이 오랜 시간을 떠오르게 한다. 탕춘대성(蕩春臺城)이 시작된 것이다. 탕춘대성은 서쪽에 쌓은 성이라서 서성(西城) 또는 연융대(鍊戎臺) 옆 성이라 해서 연융대성이라고도 불렀다.
왕조 대피로 먼저 마련한 뒤 백성 걱정까지
이 성(城)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쌓은 성이며 무슨 까닭에 쌓은 성일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또 이런 병란이 올 때 어떻게 방어할까 하는 고민을 시작하였다. 선조는 의주까지 몽진(蒙塵: 피난)을 해야 했으며, 인조는 강화로 가려다가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는 부끄러운 일들이 벌어졌다. 이런 와중에서 몽진하지 말고 한양을 방어하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양도성은 평지성(平地城)인 데다가 성벽의 길이도 길어(18.6km) 조선의 국력으로는 쉽게 방어할 수 없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에 대두된 방안이 한양에 가깝고 산세가 험준하여 쉽게 방어할 수 있는 삼각산에 산성을 쌓자는 의견이었다.
숙종이 즉위한 뒤 이 문제가 구체적으로 어전회의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토의는 끝이 없었다. 무려 37년을 논의해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드디어 임금이 결론을 냈다. ‘사람의 소견이라는 것이 사람 얼굴이 다 다른 것과 같아서(人之所見如人面之不同)’ 논의해 봐야 끝없음을 알고는 그대로 공사를 밀어붙였다. 공사는 9개월쯤 걸렸다. 지금도 북한산 능선을 도도히 넘어가는 북한산성은 이렇게 쌓은 산성이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은 서로 떨어져 있어서 북한산성으로 피신하면 고립무원인 데다가 지도층만 피신하면 한양 백성들은 어쩌란 말인가? 이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자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 즉 조지서(造紙署: 세검정 앞 종이 제조 기관) 동 입구(홍제천 아래쪽 지금 홍지문 주변)에 성을 쌓아 한양도성과 북한산을 잇자는 계획이었다. 동쪽은 형제봉 능선과 보토현(補土峴: 북악터널 위 고개)으로 자연 방어벽이 되니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한양도성 ~ 현재의 평창동, 구기동 지역 ~ 북한산성이 연결되는 벨트가 형성되어 백성도 피난 갈 걱정이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숙종 36년(1710) 10월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가 올린 차자(箚子)를 보자.
옛날 우리 효종대왕(孝宗大王)께서는 도성(都城)이 완고(完固)하지 못하여, 변란(變亂)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무너질 것을 깊이 염려하시고, 일찍이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수축(修築)하여 험조(險阻)에 의거하여, 근본을 굳게 하고 나라를 보전하며 백성을 보호하는 계책을 삼았습니다. 지금 만약 북한(北漢)에 성을 쌓아 내성(內城)을 만들어 종묘와 사직단을 옮기고, 또 조지서(造紙署)의 동구(洞口)를 막아 강창(江倉)을 옮겨 설치하면, 공사(公私)의 축적(蓄積)을 모두 옮겨 들여올 수 있습니다.
昔我孝宗大王, 深以都城不能完固, 有亂則必至先潰爲慮, 嘗欲修築北漢城, 以爲據險阻固根本, 保國保民之計. 今若築北漢, 作爲內城, 移安宗社, 又塞造紙署洞口, 移置江倉, 公私蓄積, 擧皆移入.
항전 준비 마치니 항전할 일 없어져
이렇게 성을 쌓고 그 안 지역에 각종 국가와 민간의 창고를 옮기자는 제안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숙종은 1715년(숙종 41년) 탕춘대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모두 끝난 것은 1754년(영조 30년)이었다. 이 지역의 동명이 평창동(平倉洞)인 것은 그때 옮겨 간 군량 창고 평창(平倉)에서 유래한 것이다.
탕춘대성 인왕산 구간을 내려오면 홍제천변에 우뚝한 문루(門樓)를 만난다. 홍지문(弘智門)이다. 문이 완성됐을 때 숙종은 친필로 홍지문 편액을 내렸다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한다. 다행인 것은 이 성을 쌓고 이곳에서 항전(抗戰)해야 하는 국가적 재난은 없었다는 점이다.
겸재는 홍지문 그림을 두 점 남겼다. 하나는 연융대에서 창의문까지 폭넓게 그린 대작 홍지문이고 다른 하나는 홍지문과 오간수문(五間水門), 그곳을 흐르는 홍제천과 바위를 그린 수문천석(水門川石)이다. 앞산은 지금은 상명대 캠퍼스가 된 산을 우뚝하게 그렸다. 홍지문과 5개의 수문의 디테일은 정밀하다. 문루는 가로로 네 간(間), 옆으로 두 간(間)의 문루를 그렸는데 향후 홍지문 문루를 다시 복원할 때 참고하면 좋겠다. 만년에 큰 붓으로 쓸어내리던 붓놀림은 전혀 아니다. 아마도 이 그림의 주인이 될 어느 양반인지 사동을 거느리고 문으로 다가가고 문 안쪽에는 어느 양반과 두 사람이 개울 건너편을 바라보는 듯하다.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버드나무 뒤로 단아한 초가 한 채가 분위기를 돋운다. 물결의 흐름도 정교하고 바위들로 모나게 하나하나 정성스레 그렸다.
조선 후기 산기슭 나무들도 어쩌면 저리 곱게도 그렸을까. 옥소 권섭의 손자 권신응도 (홍지문) 수문루를 그렸다. 디테일한 그림은 아니고 스케치에 가까운 형태의 그림이다. 홍지문을 漢北門(한북문)이라 써 넣었고 왼쪽 위편에 산 이름도 文殊峰(문수봉)이라고 써 넣었다. 지도를 그리는 형식이 아직 남아 있는 모습이다. 북악십경첩 속의 한 폭이다. 세 명의 선비가 홍지문 전후를 지나는데 모두 타고 가는 것은 말이 아니고 나귀로 보인다. 그의 시대(1728~1786년)에는 탈 것으로 나귀가 일반적이었나 보다.
한양으로 가는 두 길에 ‘백불’이 놓인 뜻은?
이제 홍지문에 왔으니 꼭 들러 가야 할 곳이 있다. 홍지문 조금 아래에 있는 옥천암(玉泉菴) 보도각(普渡閣)이다. 그곳에는 보물로 지정(옛 기준 1820호)된 백의관세음보살(白衣觀世音菩薩)이 모셔져 있다. 이 불상은 1900년대 전후에 조선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면 한 번쯤 다녀가고 싶은 한양의 핫플레이스였다.
이곳은 겸재나 권신응의 그림처럼 물 좋고 바위 좋다. 한양에서 놀러올 만한 곳으로, 시 짓고 놀러오는 유오(遊敖)의 장소였다. 산 넘어 살던 청음 김상헌도 청나라에 죄인으로 가서 있을 때 집이 그리워 시를 지었는데 집 근처 그리운 10곳을 읊은 근가십영(近家十詠) 중 한 수가 이곳을 읊은 불암(佛巖)이다.
불암 개울 돌 제일이라 부르리 佛巖川石稱第一
시냇물은 유리 같고 돌은 매끄럽네 川似琉璃石潤滑
놀이객 밀납 바른 나막신 신고 얼마나 향했던가 幾向遊人費蠟屐
새삼 문사 끌어 대문장을 시험했네 更引書流試椽筆
취해서 산꽃 꺾어 한 곡조를 부르노니 醉折山花歌一曲
산바람은 소슬하고 산달은 빛 하얗었네 山風蕭蕭山月白
나의 집은 근처라서 자주 오고 갔었네 吾家住近往來熟
어느 날에 돌아가 예전 자취 찾아 볼고 何日歸歟尋舊跡
아울러 홍지문도 함께 유명해졌다. 그 시절 외국인들에 의해 찍혀진 사진이 10여 장 전해지고 있다. 인력거 타고 왔던 사진도 전해진다. 더구나 특이한 것은 스코틀랜드 출신 여류화가의 목판화다.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는 일본에 있는 언니에게 왔다가 1919년 처음 조선을 방문한 후 조선을 소재로 한 그림을 80점 가까이 남겼고 1921년과 1934년에는 전시회도 열었다고 한다.
그녀의 작품 중 목판화(우끼요에: 浮世繪. 일본식 목판화)로 제작한 보도각 관세음보살이 전해지고 있다. 보도각의 관세음보살은 흰 옷을 입은 백의관음(白衣觀音)이다. 관세음보살은 자비의 상징이라서 찾는 중생의 바람에 따라 그에 맞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른바 33가지의 모습인데 백의관음은 자식을 얻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원하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 서원을 이루게 하는 관세음이라고 한다.
얼마 전 보도각 백불 앞에 갔더니 젊은 내외가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요즈음도 이곳 보도각 백불(白佛)은 영험하신가 보다. 이 백불이 새겨진 바위 뒤편을 보면 바위에 돌을 갈아 털썩 붙으면 득남한다는 민간신앙을 믿었던 이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지역에 부암동(付巖: 붙임 바위)이 있고 붙임바위로 유명했던 일은 백의관음과 무관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서울 동편에는 이 백불과 4촌처럼 닮은 또 한 분의 백불이 있다. 안암동 개운사(開運寺)의 부속 암자인 길 건너 보타사(普陀寺) 백의관음이다. 이 두 백의관음은 아마도 고려 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는 ‘청와대 편’에서 이야기했듯이 문종 때 한양에 남경유수부를 설치하고 이듬해 신궁을 지었다. 그 아들 숙종은 한양으로 천도도 추진한 바 있다. 이렇듯 한양을 중시했으니 자연 왕래도 많아졌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다니는 길도 정비되고 잘 뚫려야 했다. 지금 우리 생각대로라면 당연히 의주대로(현대의 통일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개성을 출발하면 장단 ~ 파주를 거쳐 길은 갈라졌다. 하나는 개성 ~ 장단 ~ 파주 ~ 광탄 ~ 혜음령 ~ 벽지(벽졔) ~ 홍제(유진상가) ~ 홍제천 끼고 ~ 백불 ~ 창의문 쪽 고개 ~ 남경(청와대),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개성 ~ 장단 ~ 파주 ~ 양주 ~ 녹양 ~ 도봉역 ~ 창동 ~ 수유현 ~ 종암동(백불) ~ 동대문 ~ 남경으로 오는 길이다. 두 백불이 서쪽 길목과 동쪽 길목에 자리 잡고 남경을 오가는 이들에게 길잡이가 되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우연히 자리 잡은 그곳이었을까 아닐까?
한편 이 골짜기에는 범도 많고 표범도 많았다. 인왕산 호랑이라는 말이 빈 말은 아니었다. 정조 7년(1783) 2월에 “금위영이 아뢰기를 ‘한북문(漢北門) 밖에서 작은 범 한 마리를 잡아 봉진(封進)합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호랑이는 경에게 사급(賜給)하겠다. 장교는 본영에서 각별히 시상하라(禁衛營啓言. 漢北門外. 小虎一頭捉得封進. 敎以. 虎則卿處賜給. 將校自本營各別施賞.)” 하였다.
고종 18년 신사(1881)에는, 또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말로 아뢰었다.
삼계동(三溪洞) 근처에서 중표범 한 마리를 잡았고, 인왕산(仁旺山) 밖 근처에서 중표범 한 마리를 잡은 뒤에 이어 사냥을 하였는데, 오늘 신시쯤에는 옥천암(玉川菴) 뒤쪽 봉우리 근처에서 중표범 한 마리를 또 잡았기에 삼가 이것을 봉진합니다. 연이어 세 마리의 표범을 잡은 해당 장교에게 상을 주도록 논하였다.
又以訓鍊都監·禁衛營·御營廳言啓曰, 三溪洞近處, 中豹虎一頭捉得, 仁旺山外近處, 中豹虎一頭捉得後, 仍爲行獵矣. 今日申時量, 玉川菴後峰近處, 中豹虎一頭, 又爲捉得, 故謹此封進, 而連捉三虎之該校論賞.
참으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이야기이다. 이제 이어서 탕춘대성 길을 가자. 겸재나 권신응의 그림에는 성이 좌측 북한산 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민가가 막아 길은 끊겼다. 옥천암 아래 북한산 자락길로 들어선다. 지자체에서 데크 길을 잘 만들어 놓았다. 중간에 탕춘대성 길로 오른다. 옛날부터 북한산 향로봉이나 비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중간에 독바위골(甕巖)로 나가는 암문을 지나 이윽고 향로봉 아래에 닿는다. 탕춘대성 시발점이다.
이 봉우리의 본래 이름은 향림봉(香林峰) 또는 향림사 후봉(香林寺 後峰)이었다. 이 봉우리 밑에 향림사가 있었던 까닭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봉우리 좌측 길을 잡아 하산 길로 내려간다. 내려가는 곳은 연신내역이다. 하산 길 초입 향로봉 아래 계곡 안쪽 길에는 무너진 돌 축대 위로 넓은 공터가 있다. 향림사로 여겨지는 고려적 절터다. 이곳은 고려가 거란 침략을 받았을 때 태조 왕건의 재궁(梓宮: 관)을 두 번씩이나 은신시켰던 절이었다. 기록을 보자.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
향림사(香林寺)는 삼각산(三角山)에 있다. 고려조 현종(顯宗) 경술년 난리에 태조의 재궁(梓宮: 관)을 이 절로 옮겼다가, 7년 병진에 현릉(顯陵)으로 환장(還葬: 도로 장례 모심)하였으며, 9년에 거란(契丹)의 소손녕(蕭遜寧)이 다시 내침하자 여기에 이안(移安)하였다가, 10년에 다시 현릉으로 모셨다.
在三角山 高麗顯宗庚戌之亂 移安太祖梓宮于是寺 七年丙辰還葬顯陵 九年契丹蕭遜寧來侵又移安是 十年復葬顯陵.
거란이 침공하자 고려 태조 왕건의 관을 삼각산에 있는 향림사에 두 번이나 옮겨 숨겼다는 것이다. 향림사는 고려 왕조로서는 그만큼 믿을 만했고 또 은밀한 곳이었을 것이다. 북한산성 축조에 큰 몫을 한 성능(聖能) 스님의 북한지(北漢誌)에도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한 줄 설명이 더 있다. “향림사는 비봉 남쪽에 있는데 지금은 폐사되었다(香林寺 在碑峰南 今廢).”
홍지문
홍지문
탕춘대성의 정문으로 1719년(숙종 44년)에 건립했다. 숙종이 친히 '홍지문(弘智門)' 현판을 써서 걸어두었다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한성(漢城) 북쪽(北)'에 있다 하여 '한북문(漢北門)'으로 부르기도 했다. 다만, 옛 지도에는 한결같이 ‘한북문’으로 적혀있는데, 임금이 내린 이름인 ‘홍지문’으로 표기하지 않았다는 점을 두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한양도성의 4대문 이름이 '인의예지(仁義禮智)'[7]에서 따온 것이고, 위치도 한성의 북쪽이기 때문에 한양도성의 북대문을 홍지문으로 아는 경우도 있다. 물론 아니지만, 평상시에 거의 닫혀있던 진짜 북대문 숙정문을 대신하여 도성으로 가는 실질적인 북대문 역할을 하긴 했다.
조선 후기 내내 잘 있다가 1921년에 홍수로 무너져 50여 년간 방치 상태로 있었다. 그러다 서울특별시에서 1977년에 탕춘대성 일부와 함께 복원했다. 다만, 북한산성 쪽 방향 성벽은 이었으나 한양도성(인왕산) 방향으로는 교통문제로 인해 연결하지 못했다.
구조
아치형 문을 낸 화강암 석축 위에 단층짜리 문루(門樓)를 올렸다. 문루 4면의 가장자리 앞에는 벽돌로 쌓은 통여장이 놓여있다.
통여장의 바로 밑 부분 석축에 석누조 2개가 달려 있다. 이는 비가 올 때 빗물이 빨리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총 6칸이다.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전부 양성바름을 했고 그 위에 취두와 용두, 잡상을 올렸으며, 추녀 끝에는 토수를 끼웠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공포는 이익공이다. 공포 사이마다 화반을 놓았으며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다.
홍예 문 내부의 천장은 반자로 덮어 놓은 모습이다.
현재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이다. 우횡서가 아닌 좌횡서이다.
오간수대문
홍지문 바로 옆으로 홍제천이 흐른다. 이 물이 탕춘대성을 빠져나갈 수 있게 만든 구조물인 오간수대문이 홍지문과 붙어있다. 역사는 홍지문과 같다.
화강암으로 쌓은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 5개를 만들어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水口)로 기능하게 했다. 또한 석축 위에 총구 3개를 낸 여장을 8개 올렸다. 수문 전체의 높이는 5.23m, 길이는 26.72m, 폭은 6.8m로, 수구의 폭은 3.76m이고 높이는 2.78m이다. 홍예 가운데에는 서수를 장식해 두었다.
여담
홍지문 바로 옆으로 세검정로가 지나며, 상명대학교와 가깝다. 언덕을 내려온 후 홍제천 산책로로 가서 조금만 내려가면 바로 홍지문이다. 단, 비가 많이 올 경우에는 홍제천이 불어나기 때문에 출입이 통제되니 주의하자. 강한 소나기가 지나가도 물이 금세 불어나며 장마철에는 다리 넘치기 직전까지 물이 차기 때문.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과 평창동을 잇는 홍지문터널 명칭의 기원이다.
[홍지문~구기동] 구간
탐방로 도중의
세검정
세검정(洗劍亭)
요약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에 있는 정자.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호. T자형 3칸, 팔작지붕 건물이다. 기록에 의하면 세검정은 1747년(영조 23)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원래의 정자는 1941년에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은 1977년에 복원된 것이다. 명칭의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인조반정 때 이귀·김류 등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모의하고, 거사 후 이 곳의 맑은 물로 칼을 씻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현재 북악산 남쪽 기슭 백운대에서 이어지는 사천계곡을 중심으로 한 세검정 주변 일대는 경관이 아름다운 풍치지구로 유명하다.
세검정터에 관한
안내문
세검정 옆에 있는
세초(洗草) 유적에 관한
안내문
불광역 플랫폼에 있는
COVID 19를 소재로 한
시 한 수
2022년 11월 06일(일요일) 서울 [ 인왕산 & 탕춘대성 & 홍지문 & 세검정 ] 탐방기 산 : 서울 [ 인왕산 & 탕춘대성 & 홍지문 & 세검정 ] [높이 338.2m이며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구성된 서울의 진산(鎭山) 중 하나이다. 이 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이어지며 동쪽 산허리로 북악(北岳)과 연결되는 인왕산길이 지난다. 조선 초에 도성(都城)을 세울 때, 북악산을 주산(主山),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낙산(駱山)을 좌청룡(左靑龍),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았던, 조선조의 명산이다. 봄에는 진달래가 만발하고 곳곳에 약수와 누대(樓臺)가 있었다. 경치가 아름다워 이를 배경으로 한 산수화가 많은데, 특히 정선(鄭?)의 《인왕제색도》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인왕산의 표기를 ‘仁旺’이라 하였으나, 1995년 ‘仁王’으로 옛 지명이 환원되었다. 군사적인 이유로 1968년 1월 21일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3년 3월 25일 정오부터 개방되었다.] 산행코스 : [ 독립문역 1번 출구 ~ 인왕산 2차아이파크 아파트 ~ 인왕사 ~ 국사당 ~ 서울성곽 ~ 전망바위 ~ 인왕산 정상 ~ 기차바위 ~ 탕춘대성 성벽길 ~ 홍지문 ~ 세검정 ~ 신영동 3거리 ~ 불광역 방향 버스의 구기동 정류장 ] 일시 : 2022년 11월 06일(일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2시간23분 소요) * 10:54~11:10 무악동에 있는 독립문역 1번 출구에서 산행출발하여 인왕산 2차아이파크 아파트를 거쳐서 인왕사로 이동 * 11:10~11:22 국사당을 지나서 서울성곽으로 이동 * 11:22~11:24 사진촬영 * 11:24~11:31 서울성곽길 도중의 전망바위로 이동 * 11:31~11:38 사진촬영 * 11:38~11:55 인왕산(338m) 정상으로 이동 * 11:55~12:07 사진촬영 후 간식 * 12:07~12:18 기차바위로 이동 * 12:18~12:22 사진촬영 * 12:22~12:57 탕춘대성 성벽길을 따라서 홍지문으로 이동 * 12:57~13:02 세검정으로 이동 * 13:02~13:09 신영동3거리로 이동 * 13:09~13:17 불광역 방향 버스의 구기동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산행 완료 서울 인왕산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