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3/23 기상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2011 - 미국의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Taylor, Elizabeth) 사망 테일러 [Taylor, Elizabeth Rosemond, 1932.2.27~2011.3.23] 8차례 결혼ㆍ이혼 화제… '세기의 미녀'로 불려 세기의 미녀로 불렸던 전설적인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23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울혈성 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고 외신들이 보도했다. 향년 79세.
- 전희한 디자인 작품 중에서...
2009 - 우표디자이너 전희한(全喜翰) 별세 전희한 전 우표디자인 실장님이 오늘 3월 23일 아침에 지병으로 별세하셨습니다. 수원 연화장에 계십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한국테마클럽 카페 필테마 자유게시판(부고) http://cafe.daum.net/philthema
2006 - 쿠바의 재즈 가수, 작곡가 피오 레이바(Leyva, Pío) 사망 레이바 [Leyva, Pío, 1917.5.5~2006.3.23]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의 피오 레이바 사망 쿠바 출신 재즈 뮤지션 그룹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의 보컬리스트이자 작곡가인 피오 레이바(Pio Leyva)가 8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3/24/2006032470288.html
12개 중 11개. 한국이 쇼트트랙 세계선수권서 금메달 신기록을 세웠다. 2004년 3월 22일(한국시각)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폐막한 대회 마지막 날 경기서 한국은 남녀 1000m와 3000m, 계주, 남녀 개인종합 1위를 차지하며 전체 12개 세부종목 가운데 11종목 우승을 쓸어담는 사상 최고의 ‘금 잔치’를 벌였다. 쇼트트랙 세계최강국인 한국은 은메달과 동메달도 3개씩을 보태 2002년에 세웠던 종전 최고성적(금8·은7·동1)을 뛰어넘으며 3연속 종합우승을 일궜다. 한국이 시즌을 결산하는 세계선수권서 이 같은 성과를 올린 이유는 현 남녀 세계랭킹 1·2위에 올라있는 안현수와 송석우, 최은경과 변천사가 기량을 100% 발휘했기 때문. 이승재, 김현곤, 고기현, 김민지 등 동료들도 계주 등서 제 몫을 다했다. 미국은 남자 세계랭킹 3위이자 2002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1500m 챔피언인 아폴로 안톤 오노가 1000m 준결승서 이승재의 레이스를 방해하다 실격당하는 등 한 종목에도 결승에 진출하지 못해 노메달에 그쳤다. /조선
[어제의 오늘]2001년 우주정거장 미르 15년간의 임무 마치고 퇴장 ㆍ물리학 등 과학 발전에 ‘공로’ “미르호는 추락 직전 남태평양 상공에 긴 오렌지 빛 꼬리를 끌고 날아갔다. 잔해는 빛을 내며 넓게 퍼진 채 1분30초가량 ‘진귀한 쇼’를 펼쳤다.” 사실 미르호는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 간 우주개발 경쟁의 산물이었다. 소련은 최초의 유인우주선 ‘스푸트니크’를 발사해 우주시대의 기원을 열지만, 미국의 아폴로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하면서 추월당한다. 심은령 기자 rainda@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3-22 21:09:0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3222109055&code=100100
2001 - 캐나다 태생의 환경보호운동가 데이비드 맥타가트(McTaggart, David) 사망 맥타가트 [McTaggart, David Fraser, 1932.6.24~2001.3.23] 그린피스 공동 창설자 데이비드 맥타가트 사망 세계 최대 환경보호단체인 `그린피스 인터내셔널`의 공동 창설자 데이비드 맥타가트(68)가 2001년 3월 23일 이탈리아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맥타가트는 이날 오후 자신의 올리브 농장이 있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지역 시골길을 혼자 운전하고 가다 반대편 차와 정면 충돌, 그 자리에서 숨졌다.
1996 - 대만 최초의 총통 직접선거에서 리덩후이 총통 당선 리덩후이 [李登輝, 1923~ ] 총통이 대만 초대 직선 총통에 당선됐다. 이총통은 1996년 3월 23일 약70%의 투표율을 보인 대만사상 첫 직접선거에서 최종개표결과 유효투표의 53.99%(5백81만여 표)를 얻어 제9대 총통에 당선됐다. 대만은 지난 연말의 총선에 이어 대선을 실시함으로써 정치 민주화를 이룩했고 리총통은 1988년 권력을 승계한 이래 12년 연속 집권에 성공했다. 대만 초대 민선총통에 당선된 리덩후이는 정치 민주화와 경제 기적을 동시에 이룩한 최초의 대만인 총통이다. 그는 지난 1988년 총통취임이래 추진해온 민주화 장정을 이번 대선을 통해 순조롭게 마감, 장제스[蔣介石, 1887~1975]-장징궈[蔣經國, 1906~1988] 총통 시절의 권위주의 체제를 국민들이 지도자를 직접 선출하는 민주체제로 이전시켰다. /조선
1990 - 한국-불가리아 국교 수립 불가리아는 북한과 우방관계를 유지하여왔으나, 한국과는 1980년대 후반부터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하여 소련의 개방·개혁 추진에 따른 불가리아의 대(對) 한국관계 개선 의지와 한국의 북방정책으로 급속히 관계개선이 진전되었다.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며, 북한은 1948년, 한국은 1990년 3월 23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1988년 11월 대한무역진흥공사와 불가리아상공회의소는 상호무역사무소 개설에 합의하였으며, 1989년 4월에는 소피아, 7월에는 서울에 양국 무역사무소가 설치되었다. 1990년 경제과학기술협력협정, 1994년 문화협정, 1995년 항공협정·이중과세방지협정, 1996년 무역협정을 체결하였다. 1991년 5월 외무장관 볼코프와 재무장관 코스토프가 방한하였다. 1992년 9월에는 소피아에서 ‘한국문화의 날’ 행사가 열려 음악·미술·무용·영화전시회가 거행되었으며, 11월에는 불가리아 체임버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이 있었다. /naver
1983 - 레이건 미국 대통령, 전략방위구상(SDI) 연구ㆍ개발을 지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1983년 3월 23일 새해 들어 처음 가진 백악관 TV연설에서 우주병기를 포함한 핵미사일 공격방어시스템인 전략방위구상(SDI:Strategic Defence Initiative)의 연구ㆍ개발을 지시했다.
- 김민종 (공중전화 카드)
1971 - 한국의 배우, 가수 김민종 출생 김민종 [Kim, Min-Jong, 1971.3.23~ ] 김민종(1971년 3월 23일 ~)은 대한민국의 가수 겸 배우이다. 1988년 석래명 감독의 영화 《아스팔트 위에 동키호테》로 데뷔했고, 1992년에는 가수로도 데뷔했다. 생애 서울예술대학과 안양예술고등학교를 동문했으며, 1988년 영화 데뷔로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로 활동하였다. 1989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로 많은 배우로 최초의 배역을 받았다. 1992년 가수 활동으로 1집 《사랑 이별이야기》를 데뷔 활동했으며, '더 블루'를 2인조 그룹으로 재결성하다가 1992년 1집 앨범으로 데뷔 활동하였다. 1991년 MBC 공채 탤런트 출신이며, 느낌, 수호천사로 출연하며, 모든 전성기를 보냈다. 1993년 2집 앨범 '하늘아래서'로 최초로 발매하였다. 파리 배경으로 뮤직비디오를 촬영을 보냈다. 2004년 신승훈 뮤직비디오 '그런 날이 오겠죠'로 많은 출연의 애정과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2009년 5월 90년대 이끌었던 '더 블루'를 재결성하였으며, 5집 앨범으로 새롭게 탄생했으나, 2010년 드라마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의 황우현의 배역을 받아 생활 최초로 선역 배우를 담당했다. 출연 /위키백과
1970 - 한글학자 최현배(崔鉉培) 사망 최현배 [崔鉉培, 1894.10.19~1970.3.23] 외솔 최현배는 주시경의 뒤를 이어 김윤경 이희승 정인승 등과 함께 일제하 및 해방 후 국가건설기에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고 보급 발전시키는데 온 생애를 바친 학자로, 1970년 3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그가 지은 `우리말본`(1937년), `한글갈`(1940년) 등 20여종이 넘는 한글에 대한 저술과 4백여편에 이르는 각종 논문과 논설,수필 등은 한글학자로서 그의 뛰어난 공헌을 보여준다. 경남 울산에서 시골선비 최병도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3세까지 한학을 공부하다 상경, 한성고보(경기고의 전신)에 진학해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일본의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잠시 국내에 있다 다시 도일해 경도제대 문학부와 대학원을 수료하고 귀국, 192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됐다. 1963년 건국공로훈장, 작고 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조선
1964 - 제네바에서 제1회 국제연합무역개발회의(UNCTAD) 열림 국제연합무역개발회의(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 UNCTAD)는 개발도상국의 산업화와 국제무역 참여를 지원하기 위해 설치된 국제연합총회의 상설기관이다. 국제연합통상개발회의 또는 운크타드(UNCTAD)라고도 한다. 1964년 개발도상국의 산업화와 국제무역을 지원하고 심화된 남북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가 독립했으나, 급속한 인구 증가와 취약한 경제구조로 인한 이들 저개발국가의 빈약한 경제는 전후 세계경제의 큰 문제로 부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인도의 독립을 위해 영국과 인도의 교섭이 시작되자, 무슬림연맹은 ‘파키스탄 계획(이슬람교도가 많은 동·서 파키스탄 지역에 독립국을 세우는 계획)’의 실현을 요구하였다. 이리하여 1947년 8월 인도국민회의파·무슬림 연맹·영국 정부의 합의에 따라 인도 독립법이 제정되고 동·서 파키스탄과 인도는 분리하여 영국연방 내의 자치령으로서 독립하였다. 파키스탄은 독립 후 얼마 동안은 인도 통치법에 따라 영국 자치령이었으나, 1956년 헌법이 제정되고 이슬람 공화국이 성립, 대통령제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정당의 난립과 정치정세의 불안정기가 계속되었고, 1958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아유브 칸은 1962년 신헌법을 제정하여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1965년의 인도·파키스탄 분쟁으로 인한 심한 타격과 ‘아유브 민주주의’에 불만을 품은 세력의 대두로 12년간 지속되어온 정권이 1969년 야히아 칸에게 이양되었다. /naver
- 'Anemones'
- 'The Red Violin' - 'The Dock at Deauville' 1953 - 프랑스의 화가 라울 뒤피(Dufy, Raoul) 사망 뒤피 [Dufy, Raoul, 1877.6.3~1953.3.23] 프랑스의 화가·디자이너. 1877년 6월 3일 프랑스 르아브르에서 출생하였다. 14세 때 커피 수입점 종업원으로 가계를 도우며 밤에는 미술학교에 다녔다. 1900년 시에서 장학금을 받아 파리의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L.보나르 문하에서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하였다. 처음에는 인상파풍의 그림을 그리다가 1905년 H.마티스의 작품에서 계시를 받고 야수파(포비슴)운동에 가담, 강한 선과 선명한 색채로 대담하게 단순화된 표현을 전개하였다. 1908년경부터는 사진과 입체파(큐비즘)의 경향에 이끌려 감화를 받고, 1913년경부터 입체파에 근거를 두면서도 점차 독자적인 작풍을 이룩하였다. 1911년경부터 장식미술에도 진출, 폴푸아레 의상실에서 직물염색 디자이너로 일하였다. 이 일은 그의 특색인 밝은 색채와 경쾌한 구도에의 기호를 한층 살렸다고 할 수 있다. 1922년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을 여행한 후, 자유분방한 선과 명쾌한 색채성을 합성한 장식적 양식을 확립하여, 유화 외에 수채화에도 뛰어나 부동의 명성을 획득하였다. 작품에는 해안의 산책길·경마장·악회·요트경기 등을 다룬 것이 많다. 이들은 단순화된 소묘와 대담한 색채의 조화 속에서 현실과 환상, 프랑스적 매혹과 우아성을 강하게 표현하여 보는 이에게 유쾌한 생의 기쁨을 준다. /네이버
1950 - 세계기상기구[WMO] 발족 세계기상기구(世界氣象機構, 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 WMO) UN(국제연합)의 전문기구로, 1879년에 창립한 국제기상기구(International Meteorological Organization, IMO)가 그 전신이다. 1947년 IMO 이사회에서 새로운 기구를 창설하기 위하여 세계기상협약을 채택하였고, 그 결과 1951년부터 44개 회원국으로 WMO가 활동을 시작하였다. 관측망 확립을 위한 세계 협력, 기상사업 설비를 갖춘 기상중추의 확립·유지, 기상정보의 신속한 교환조직 확립, 기상관측 표준화와 관측 및 통계의 통일성 있는 간행 확보, 항공·항해·농업 및 인류활동에 대한 기상학 응용, 기상학 연구 및 교육의 장려와 국제적인 조정 등을 목적으로 한다.
1940 - 히틀러-무솔리니 회담, 동맹 체결 2차대전이 일어난 지 5달 뒤인 1940년 오늘, 히틀러(Hitler, Adolf, 1889~1945)가 무솔리니와 회담을 갖는다. 두 사람인 만난 곳은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접경지대에 있는 브레너(Brenner) 고개! 알프스를 횡단하는 고개 가운데 가장 낮은 곳이어서 이미 로마시대부터 교통과 군사상 요충지로 꼽힌 곳이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이번 회담에서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 계획 등 전략을 논의했다. 이들은 이듬해까지 이곳에서 세 번 회담을 열었다. /YTN
1921 - 영국의 모터보트 및 자동차 운전자 도널드 캠벨(Campbell, Donald) 출생 캠벨 [Campbell, Donald Malcolm, 1921.3.23~1967.1.4] 영국의 모터보트 및 자동차 운전자. 수상과 육상의 속도경기에서 세계속도기록을 세우는 데 아버지 맬컴 캠벨 경과 우열을 다투었다. 그는 제트 추진 수상 비행기를 타고 최초로 공식적인 기록을 잰 활주 시도(1955. 7. 23, 컴벌랜드 얼스워터 호)에서 325.60㎞/h의 기록을 세웠다. 1964년 12월 31일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덤블영 호에서 444.6㎞/h로 그의 기록을 갱신했다. 1964년 7월 17일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에어 호 평지에서, 크기에 제한이 없고 바퀴가 4개 달린 것이면 출전 가능한 A급 자동차 부문에 제트 추진자동차를 타고 출전해 649㎞/h의 속도 기록을 세웠다. 수상 속도기록을 갱신하기 위해 코니스턴 호에서 제트 추진 선박을 타고 달리던 그는 300㎞/h 이상의 속도를 내다가 보트가 뒤집혀 죽었다. /브리태니커
1919 - 무솔리니 파시스트당 결성 1919년 3월 23일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파시즘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파시스트당을 결성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생디칼리슴을 주장한 사람들과 사회당원 등이 밀라노에 모여 무솔리니를 지도자로 하는 조직을 결성했다. 1922년 10월의 로마 진군은 파시스트당이 정권을 장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추종자들은 무솔리니를 총리로 임명하라고 요구하며 로마를 행진했다. 이탈리아 국왕은 이에 굴복해 무솔리니에게 정부 구성을 요청했다. 무솔리니는 이듬해 1월 파시스트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불법화했다. 1924년 총선에서는 중산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이후 1925∼29년 모든 노동조합의 해산, 반대파 정당의 해산, 정치범 특별 재판소의 설치 등 전체주의 독재가 이뤄졌으나 조직적인 면에서는 히틀러의 나치즘(국가사회주의)에 미치지 못했다. /브리태니커
- Fritz Lang, Igor Stravinsky, John Muir, Wernher von Braun 브라운 [Braun, Wernher von, 1912.3.23∼1977.6.16] 독일 태생의 미국 로켓기술자. 비르지츠 출생. 소년시절에 읽었던 H. 오베르트의 《행성공간으로 가는 로켓》에 자극을 받아 우주로켓 연구를 지망하였다. 1930년 베를린공과대학 재학중에는 오베르트의 조수로 소형로켓 실험을 하였다. 1934년 베를린대학에서 액체로켓에 관한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그의 연구는 독일 육군의 주목을 받아 1932년 베를린공과대학 재학 때부터 독일 육군의 문관으로 채용되었고 페네뮌데에서 로켓병기 V2호를 개발하는 팀을 이끌게 되었다. V2호는 본래 우주여행용으로 구상되고 있었던 것 가운데서 가장 소형인 로켓이었는데, 현재의 우주용 로켓의 선구가 되는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후 그 설계팀과 함께 미국에 가서 V2호의 실험을 계속하였고, 1952년부터는 헌츠빌의 미육군미사일개발부대를 지도하였다. 1955년 미국에 귀화하였다. 미국은 처음에는 그를 그다지 중용하지 않았으나, 소련의 스푸트니크에 대항하고 있던 뱅가드계획이 계속 실패하자 그의 팀이 급히 동원되어, 1958년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의 발사를 성공시켰다. 그 후 미국국립항공우주국(NASA)의 발족과 함께 로켓개발의 중심인 마셜우주비행센터에서 아폴로계획용 새턴V형 로켓 개발을 지도, 1969년 아폴로 11호에 의한, 인류의 달착륙을 성공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이어서 NASA의 장래계획 부장관(副長官)으로 유인 화성비행계획을 작성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972년 NASA를 떠났다. /yahoo
1910 - 일본의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출생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1910.3.23~1998.9.6] [역사속의 인물] 구로사와 아키라 ‘팔다리가 잘리고 피가 튀는 사실적 묘사, 휴머니즘과 유머, 화려한 색감과 미학, 다채로운 구성….’ 영화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는 ‘패전 후 침체된 사회에 희망을 준 영화인’이라는 일본 영화계의 평을 받고 있다. 1910년 오늘 태어난 그는 ‘내 머리 속에는 일본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이 동거하고 있다’는 자신의 말처럼 일본을 넘어 세계 영화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나의 사건을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야기 구조를 지닌 ‘랴쇼몽’(1950년)은 다른 영화, 소설, 드라마에서 수없이 변주됐다. ‘7인의 사무라이’(1954년)는 ‘황야의 7인’ ‘별들의 전쟁’ ‘벅스 라이프’ 등 외국 영화의 단초가 됐다. ‘화염’ ‘차이나 게이트’ 등 인도 영화와 소설 ‘칼라의 늑대’의 구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요진보’(1961년)는 서부극 ‘황야의 무법자’의 토대가 됐고, 이는 다시 ‘라스트 맨 스탠딩’ ‘스타워즈’의 인물과 구성에 차용되기도 했다. 아키라는 타협이 없는 성격과 제작 철학으로 영화사 등과 잦은 마찰을 빚기도 했다. 미국에서 ‘폭주기관차’ 제작을 준비하다 제작방침이 바뀐 미국 측과의 대립으로 중단했다. 미일 합작 ‘도라 도라 도라’의 일본 측 감독이 됐지만 20세기 폭스와 촬영 일정, 예산 등 문제로 충돌하다 감독에서 물러나고 자살 미수사건까지 벌였다. 김병구 사회2부 차장 kbg@msnet.co.kr /매일신문 2009년 03월 23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2792&yy=2009
1898 - 슬로베니아 출신의 미국 소설가, 언론인 애더믹(Adamic, Louis) 출생 애더믹 [Adamic, Louis, 1898.3.23~1951.9.4] 이민자들을 비롯한 미국 내 소수민족이 1900년대초에 겪은 애환을 글로 썼다. 애더믹은 14세 때 유고슬라비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해 1918년 시민권을 얻었다. 〈밀림 속의 웃음 Laughing in the Jungle〉(1932)에서 미국의 '다인종 문화융합정책'이 실패했음을 다루었다. 구겐하임 재단 기금으로 유고슬라비아를 다시 방문한 후, 예전의 생활로 마음편히 빠져들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 〈토박이의 귀향 The Native's Return〉(1934)에서 이때의 경험을 묘사했다. 이 작품의 속편 〈손자 Grandsons〉(1935)와 〈인생의 요람 Cradle of Life〉(1936)으로 성공을 거둔 그는 첫번째 장편소설 〈안티구아의 집 The House in Antigua〉(1937)을 내놓았다. 그후에 나온 〈내 조국 아메리카 My America〉(1938)는 회상과 사회철학이 뒤섞인 작품으로, 미국 국민이 하나로 통합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개략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애더믹은 미국이 커다란 잠재력을 가진 나라이지만 소수민족들과 기존체제 사이의 긴장이 거의 위기에 이르렀다고 믿었다. 1940년부터 미국 내 인종간의 문화를 분석한 잡지 〈커먼 그라운드 Common Ground〉를 편집했다. 정치적인 성향이 강한 애더믹은 유고슬라비아가 분열되자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으며, 미국으로 이주한 유고슬라비아인들에게 동유럽의 민주주의를 되살리자고 호소했다. 일부 사람들로부터 파괴적인 인물로 낙인 찍히면서도 티토 대통령을 지지했다. 애더믹은 손에 장총을 쥔 채 총에 맞아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정치적 견해로 미루어 타살 의혹이 짙었으나 공식적으로는 과로와 불안으로 인한 자살이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브리태니커 - Juan Gris - 'Vicente Huidobro(poet)', by Picasso and J. Gris
그리스 [Gris, Juan, 1887.3.23~1927.5.11] 스페인의 화가. 그가 그린 어두운 색의 정물화는 종합적 입체파(Synthetic Cubism)라는 회화기법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여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에서 등장한 아방가르드 미술(avant-garde art)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동료 입체파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보다 이론에 충실했던 그는 그들이 발견해낸 것들을 체계화하고 입체파의 직관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결국 입체파 양식을 널리 보급시켰다. 미술을 공부하기 전에 과학을 공부했고 1906년 파리로 옮겨 감각적인 곡선미가 특징인 아르 누보 양식의 신문삽화를 그렸다. 그는 몽마르트르에 있는 화가들의 거주지 바토 라부아에 자리를 잡았는데, 스페인 출신의 동료인 피카소도 이곳에 머물고 있어 그는 입체파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1913~14년 그는 개성적이고 원숙한 종합적 입체파 양식에 도달했으며 종이 콜라주(papier collé)를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다. 그는 모든 그림의 기본을 '평면에 채색한 건축의 일종'으로 보았고, 순수한 회화 요소를 이용하여 현실의 이미지를 종합적으로 창조해냈다. 지적이고 수학적인 계산을 직관과 감각에 조화시킨 것이 그의 탁월한 장점이다. 그의 입체파 양식은 브라크나 피카소보다 훨씬 엄격하고 고전주의적이었으나 자발적이고 직관적인 면은 다소 뒤떨어진다. 1921~27년 그리스는 자신의 종합적 입체파 화풍을 자유롭고 서정적인 화풍으로 바꾸어나갔다. /브리태니커
- Philippines 5 Piso (1986, Banknote)
1869 - 필리핀의 독립운동 지도자 아기날도(Aguinaldo, Emilio) 출생 아기날도 [Aguinaldo, Emilio, 1869.3.23~1964.2.6] [역사 속의 인물] 필리핀 독립 영웅 아귀날도 스페인과 미국에 대항한 필리핀의 독립운동 지도자. 29세에 필리핀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이후 미국의 점령에 저항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만 1964년 95세로 타계할 때까지 필리핀 국민들의 추앙을 받았다. 1869년 오늘, 필리핀 카비테주 카윗의 유력자 집안에서 태어난 에밀리오 아귀날도는 16세 때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이끄는 독립무장단체에 가입했다. 그러나 2년 후 보니파시오 그룹이 스페인 군대를 공격하려 하자 아귀날도 그룹은 전력 부족을 이유로 거절했고 보니파시오는 패배했다. 아귀날도는 이후 중심 인물로 부상했고 지도력을 잃은 보니파시오를 제거했다. 아귀날도는 미국의 지원으로 스페인을 내쫓은 뒤 1897년 필리핀 초대 대통령에 취임, 세금, 교육, 의료 등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2년 뒤 미국과의 전쟁이 벌어졌고 아귀날도는 이에 저항했으나 1901년에 체포된다. 미국이 점령한 체제에서 은퇴했던 아귀날도는 1935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마누엘 퀘존에게 아깝게 패한다. 필리핀은 미국에 이어 일본의 점령 하에 있다가 일본 패망 다음해인 1946년 독립한다. 아귀날도는 이후 국가 원로로서 각종 공직을 거쳤으며, 사후 21년 뒤 5페소 지폐의 주인공이 된다. 김지석(논설위원) /매일신문 2011년 03월 22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3588&yy=2011
1867 - 포르투갈의 장군, 정치가 노턴 드 마토스(Norton de Matos, Jose) 출생 노턴 드 마토스 [Norton de Matos, Jose, 1867.3.23~1955.1.3] José Maria Mendes Ribeiro Norton de Matos (b. March 23, 1867 in Ponte de Lima, Portugal, d. January 3, 1955 in Ponte de Lima) was a general and a Portuguese politician. http://en.wikipedia.org/wiki/Norton_de_Matos
1865 - 벨기에의 정치가 헤이만스(Hymans, Paul) 출생 헤이만스 [Hymans, Paul, 1865.3.23~1941.3.8] 제1차 세계대전 뒤 파리 평화회의에 벨기에 대표로 참가해 국제연맹 규약의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브뤼셀자유대학교에서 의회사를 가르치면서(1898~1914) 1900년 하원에 들어가 곧바로 자유당 지도자가 되었다. 1915~17년 영국 주재 공사를 지냈으며 1917년에는 경제장관으로 봉직했다. 1919~20년에 외무장관(1918~20)으로서 파리 평화회의에 벨기에 대표로 참가했으며,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제1차 대회 의장(1920)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1921년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관세동맹 체결에 공헌했으며, 그후 도스 안(Dawes Plan)을 타결짓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1924). 법무장관(1926~27), 외무장관(1927~35), 각료회의 위원(1935~36)을 지냈으며 1936년에 〈자유당 기록 Pages liberales〉을 출판했다. /브리태니커
1858 - 독일의 역사가, 정치가 크비데(Quidde, Ludwig) 출생 크비데 [Quidde, Ludwig, 1858.3.23~1941.3.5] 브레멘 출생. 1889∼1896년 《독일역사학 잡지 Deutsche Zeitschrift fur Geschichtswissenschaft》를 창간·편집하였으며, 1894년 빌헬름 2세를 풍자·비판한 소책자의 출판으로 잠시 투옥당하였다. 1890년에는 로마에 있는 프러시아역사연구소의 교수 및 간사가 되었다. 1892년 뮌헨으로 돌아와 독일평화협회에 가입, 독일의 평화운동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14∼1929년 독일평화협회 회장으로 있었으며, 1927년 F.E.뷔송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33년 나치스정권이 수립된 후 스위스로 망명하여 제네바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역사와 정치 및 평화주의(부전주의)에 관한 책들을 출판하였다. /naver
1842 - 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Stendhal) 사망 스탕달 [Stendhal, 1783.1.23~1842.3.23] 본명 마리 앙리 벨(Marie Henri Beyle). 그르노블 출생. 변호사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반항정신과 반(反)종교사상에 눈을 떴고, 혁명정부가 설립한 그르노블중앙학원에 재학하였다. 1799년 에콜폴리테크니크에 진학하기 위해 파리에 나왔으나 수험(受驗)하지 않고, 제2의 몰리에르가 되고자 관극(觀劇)과 극작에 몰두하였다. 1800년 친척의 주선으로 육군성(陸軍省)에 들어가 나폴레옹 원정군을 따라 알프스를 넘었다. 군대를 나온 후 관극·독서·낭독법 연습에 전념하고, 순회공연을 하는 여배우 멜라니 길베르와 마르세유의 식료품 도매상의 점원 노릇까지 하면서 동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819년 이후, 메칠드에의 짝사랑으로 고민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프랑스 정부의 스파이 혐의를 받고 1812년에 상심한 채 귀국하였다. 이듬해 《연애론 De l’amour》(1822)을 간행하였다. 파리에서도 여전히 문단과 사교계에 관계하면서 본격적인 문필활동을 시작하여 영국·프랑스의 각 잡지에 서평과 시사평론을 집필하는 한편, 《라신과 셰익스피어 Racine et Shakespeare》(1823∼1825)로 낭만주의 운동의 대변자가 되었다. 그 밖에도 《로시니전(傳) Vie de Rossini》 등을 썼으며, 퀴리알부인과 2년 정도 교제하였다. 현대의 진실은 소설에서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극작을 단념하고, 《바니나 바니니》 등의 단편을 쓰는 한편, 실재의 재판사건에서 힌트를 얻은 불후의 명작 장편소설 《적과 흑 Le Rouge et le Noir》(1830)을 간행하였다. 1830년에 트리에스테 주재영사(駐在領事), 이듬해 로마 근교의 교황령(敎皇領) 치비타베키아(Civitavecchia) 영사가 되어, 죽을 때까지 그 직에 있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임지를 떠나 로마의 사교계에 출입했으며, 《에고티즘의 회상 Souvenirs d’egotisme》(사후 1892년 출판) 미완의 장편 《뤼시앙 뢰방 Lucien Leuwen》(사후 1894년 출판) 등을 집필하였다. 1836년 휴가를 얻어 프랑스에 3년간 머물렀다. 그 동안 남프랑스·스위스·벨기에·네덜란드 등지를 여행하여 《한 만유자(漫遊者)의 메모 Memoires d’un touriste》(1838)를 쓰고, 이탈리아의 고사본(古寫本)을토대로 《카스트로의 수녀원장》(1839) 등의 중편(사후 《이탈리아 연대기》로 간행)을 발표하였다. 그 중 한 편을 늘려 쓴 것이 제2의 걸작 장편 《파르므의 수도원 La Chartreuse de Parme》(1839)으로 “글의 행마다 숭고함이 폭발하고 있다”는 발자크의 칭송을 받았다. 그 후 집필을 계속했으나, 관절염·신경성 뇌졸중에 시달렸고, 1841년 휴가를 얻어 귀국, 이듬해 3월 거리에서 쓰러져 죽었다. 생전부터 그는 이탈리아어로 “밀라노인 베일레,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라는 묘비명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발자크와 함께 19세기 프랑스 소설가의 2대 거장으로 평가된다. /naver
1814 - 쿠바의 극작가, 시인 고메스 데 아베야네다(Gomez de Avellaneda, Gertrudis) 출생 고메스 데 아베야네다 [Gomez de Avellaneda, Gertrudis, 1814.3.23~1873.2.1] 19세기의 위대한 낭만주의 작가이자 여류시인으로 손꼽힌다. 1836년 스페인에 가서, 1859~63년을 제외한 일생을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쿠바에 머무르는 동안 쿠바 문학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라 페레그리나(순례자)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초기 시들은 1841년 〈서정시 Poesias liricas〉로 출간되었다. 마누엘 호세 킨타나의 고전적 문체에 그녀 특유의 낭만적 상상력이 결합된 이 시들은 많은 개인적 고통에서 비롯된 염세주의 색채가 가미되어 스페인 문학에서 가장 애절한 감동작으로 꼽힌다. 시적 어법과 서정적 대목이 뛰어난 그녀의 희곡은 주로 역사적 실존인물을 다루었다. 알퐁소 10세의 삶을 다룬 희곡 〈알퐁소 무니오 Alfonso Munio〉(1844, 1869년 〈Munio Alfonso〉로 개칭)와 성서극 〈사울 Saul〉(1849)은 널리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내용인 〈사브 Sab〉(1841)를 위시한 소설들은 거의 완전히 잊혀졌다. 남편을 2번이나 잃고 많은 연인들이 있었던 그녀의 파란 많은 삶은 여러 전기물의 주제가 되었다. /브리태니커
1775 - 패트릭 헨리,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연설 헨리(Henry, Patrick, 1736~1799)는 버지니아 식민지 출생으로 독학하여 변호사가 되었고, 1763년 '목사사건'의 소송에서 당시 영국 국왕 보호하에 특권을 지닌 목사 봉급을 담배의 최저가격으로 묶어 두는 데 성공하여 명성을 떨쳤다. 1765년 버지니아 식민지의회 의원이 되어 식민지의 입법권을 주장하고, 영국의 인지조령(印紙條令)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가결하게 함으로써 전식민지에 그 이름이 알려졌다. 1774년의 제1회 대륙회의에 버지니아 대표로 참석, 각 식민지의 급진파를 대표하여 식민지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할 것을 강조하였다. 1775년 3월 버지니아 의회가 해산되자 리치먼드에서 개최된 비합법 민중대회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라는 연설을 하고 영국 본국과의 개전(開戰)을 주장하였다. 1776년 버지니아가 혁명을 일으키자, 초대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787년 헌법제정회의에는 강력한 중앙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참석을 거부, 헌법 초안의 승인에는 맹렬히 반대하여 헌법 수정 10개조를 추가시켰다. /naver
1749 - 프랑스의 수학자, 천문학자 라플라스(Laplace, Pierre-Simon) 출생 라플라스 [marquis de Laplace, Pierre-Simon, 1749.3.23~1827.3.5] 프랑스의 천문학자 ·수학자. 칼바도스의 보몽타노주에서 태어났다. 1765년 육군학교 위탁학생으로 있을 때부터 수학의 재능을 나타냈다. 1767년 파리에서 달랑베르의 인정을 받고 고등사범학교와 에콜폴리테크니크 교수로 취임하여 행렬론 ·확률론 ·해석학 등을 연구하였다. 1773년 수리론(數理論)을 태양계의 천체운동에 적용하여 태양계의 안정성을 발표하였다. 또한 오일러와 라그랑주 이래 미해결문제로 남아 있던 목성과 토성의 상호섭동(相互攝動)에 의한 궤도의 이심률과 경사각은 오랫동안 변화하지 않고 장주기변동을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 후 이 변동 한계에 관해 라그랑주와 서로 반론이 거듭되었으나, 1784∼1786년 라플라스가 《파리과학아카데미 기요(紀要)》라는 잡지에 3편의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해결되었다. 1787년 달의 공전가속도는 지구 궤도의 이심률 변동에 기인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와 같은 획기적 성과를 체계화하여 1799~1825년 《천체역학》(전 5권)을 출판하였다. 이것은 뉴턴의 《프린키피아》와 맞먹는 명저로 간주된다. 1796년 간행된 일반인을 위한 저서 《세계계도설(世界系圖說)》은 태양계의 기원에 관한 성운설의 구상을 내용으로 담고 있으며, 이것은 칸트의 설(說)을 보충 ·개정하는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네이버
1743 -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The Messiah> 런던의 왕립극장에서 공연 메사이아 또는 구세주라고도 한다. 헨델(Händel, Georg Friedrich, 1685~1759)의 대표작이자 동서고금을 통틀어 종교음악의 백미로 꼽힌다. 영국의 시인 찰스 제넨스(Charles Jennens)가 성서와 기도문를 인용하여 영어로 쓴 대본을 바탕으로 헨델이 56세 때인 1740년 8월 22일부터 9월 14일까지 24일만에 초고를 완성했다. <예언과 탄생> <수난과 속죄>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3부로 구성되며, 테너의 독창 <그대들 나의 백성을 위하라>로 시작하여 아리아와 합창곡 등 53곡이 연주된다. 연주시간은 약 2시간 20분이다. 초고가 완성된 뒤 헨델이 연주회를 거듭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악보를 수정하였기 때문에 정본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서사적 묘사라기보다도 전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존재를 강력히 호소한다. 알기 쉬운 웅장한 표현 속에 생생한 종교적 감동이 잘 나타나 있다. 1742년 4월 13일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열린 자선행사에서 초연된 이래 지금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세계 각처의 자선연주회에서 이 곡을 연주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 있다. 1743년 3월 23일 런던의 왕립극장에서 공연할 때 국왕 조지 2세는 제2부의 마지막 곡 <할렐루야 코러스>가 합창되자 감동에 겨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로부터 유래하여 오늘날의 연주회에서도 이 곡이 합창되면 청중이 기립하여 감상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naver
1606 - 플랑드르 태생의 인문주의자, 고전학자 립시우스(Lipsius, Justus) 사망 립시우스 [Lipsius, Justus, 1547.10.18~1606.3.23] 플랑드르 태생의 인문주의자, 고전학자, 윤리 및 정치 이론가. 1572년 예나대학교의 역사 및 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가 1578년 새로 생긴 레이덴대학교의 역사 및 법학 교수가 되었고, 1592년에는 루뱅대학교의 역사 및 라틴어 교수가 되었다. 그의 첫번째 학술 서적인 〈이본(異本) Variae lectiones〉(1569)은 전통적인 원전 비평(고전의 원문 확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평) 분야의 책이다. 얼마 후 그는 권위있는 라틴어 산문 원전 편집자로 자리를 굳혔고, 그가 편집한 타키투스의 저서(1574)와 세네카의 저서(1605)는 오랫동안 그 분야의 저서에 있어서 본보기가 되었으며, 지금도 주목할 만한 가치를 갖고 있다. 립시우스는 그당시에 활발히 일어났던 키케로 문체반대운동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간결하고 풍자적인 그의 라틴어 문체는 대부분 타키투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라틴어로 쓴 수많은 편지에도 그의 개성과 독특한 문체가 뚜렷이 드러나 있다. 립시우스는 고전 문학과 역사에 대한 연구로도 유명했지만 윤리와 정치 이론에 대한 평론으로 훨씬 더 유명했다. 그가 1604년에 쓴 스토아 철학 입문서는 그리스가 아니라 주로 로마의 스토아 철학을 소개하는 것이지만, 2세기가 넘도록 가장 명석하고 완벽한 스토아 철학 평론으로 남아 있었다. 그에게 있어 고대 철학자와 역사가들은 단순한 연구 대상이 아니라 그를 실제적인 도덕성으로까지 이끌어 주는 안내자였고, 그래서 그는 스토아 철학자임을 자처했다. 그가 쓴 〈데콘스탄티아 De constantia〉(1584)라는 논문은 세네카에 대한 관심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정치이론서인 〈폴리티코룸 리브리 섹스 Politicorum libri sex〉(1589)도 타키투스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브리태니커
1458 - 조선 전기의 문신, 음률가(音律家) 박연(朴堧) 사망 본관 밀양(密陽), 자 탄부(坦夫), 호 난계(蘭溪), 시호 문헌(文獻), 초명 연(然), 영동(永同) 출생이다.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校理)를 거쳐 지평(持平)·문학(文學)을 역임하다가 세종이 즉위한 후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악사(樂事)를 맡아보았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아들 계우(季愚)가 처형되었으나 그는 삼조(三朝)에 걸친 원로라 하여 파직에 그쳐 낙향하였다. 특히 저[大?]를 잘 불었고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신라의 우륵(于勒)과 함께 한국 3대 악성(樂聖)으로 추앙되고 있다.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에 제향되고, 지금도 고향 영동에서는 해마다 '난계음악제'가 열려 민족음악 발전에 남긴 업적을 기리고 있다. 시문집 《난계유고(蘭溪遺稿)》 《가훈(家訓)》이 있다. /naver
502 - 신라에서 처음으로 우경법 실시 신라 지증왕(智證王)은 즉위(卽位) 3년 만에 각 지방에 명(令)을 내려 농사(農事)를 권장하고 처음으로 소를 부려 농사를 짓는 우경법(牛耕法, 소농사)을 시행토록 했다고 한다.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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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