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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1501~1565) 윤 씨의 능인
태릉
[태릉은 제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1501~1565) 윤 씨의 능으로 봉분 1기만 있는 단릉이다. 문정왕후는 중종과 인종, 명종 3대에 걸쳐 왕비와 대비로 있으면서 정권에 개입하는 등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조선을 회오리바람 속으로 몰아넣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문정왕후에 관한 일화는 워낙 많지만 을사사화와 연계된 정난정의 일화는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다. 그녀의 아버지 정윤겸은 부총관을 지냈지만 어머니는 관비 출신이므로 위계가 철저한 조선에서 그녀가 일어설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난정은 이 기회를 반전시키기 위해 우선 기생이 되었다. 고관과 자주 어울릴 수 있는 기생은 격이 낮은 여자가 신분 상승을 꾀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녀는 바람대로 문정왕후의 남동생인 소윤 윤원형의 첩이 되었다. 마침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고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정계는 모두 윤원형 쪽으로 쏠린다.
곧바로 윤원형은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인종의 외척 윤임이 그의 조카 봉성군에게 왕위를 주려 한다고 무고한다. 이는 인종의 외척인 대윤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의 권력 다툼으로, 결국 대윤의 우두머리인 윤임 등이 반역 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고 만다. 이를 '을사사화'라고 한다.
이 기회를 이용해 정난정은 윤원형의 정실 김 씨를 몰아낸 다음 적처가 되고,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해 전매·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한다. 그럼에도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했고, 1553년에는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이 되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정난정에 대한 사가들의 평은 비난으로 꽉 차 있지만 그녀는 윤원형을 움직여 적자와 서자의 신분 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했다. 당시로서는 신분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획기적인 정책으로 좌절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문정왕후는 당의 측천무후, 청의 서태후와 비교될 정도로 억척같은 집념으로 아들을 왕으로 만든 여인이다. 그러나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8년 동안 국정을 지휘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문정왕후의 가장 큰 피해자로 그의 아들인 명종이 손꼽히기도 한다. 왕이 된 아들에게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겠느냐?"라며 호통을 치고, 왕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회초리까지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종을 눈물로 왕위를 지킨 왕으로 기억한다.]
문정왕후 윤씨의 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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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文定王后)
목차
조선 시대 반가의 여성들은 대부분 언문이나 천자문 등 소통에 필요한 기본적인 문자만 체득했을 뿐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또 혼인하면 ‘남존여비(男尊女卑)’과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절대원칙에 따라 규방에 갇힌 채 가사노동에 종사하면서 오로지 남편에 대한 순종, 출산과 양육에 몰두하는 ‘현모양처(賢母良妻)’의 길을 걸어야 했다.
여성이 남성의 부속물로 취급받았던 엄혹한 세월 속에서 문정왕후, 신사임당, 황진이, 허난설헌, 민회빈 강씨,명성왕후 등 재기발랄한 몇몇 여성들은 사회의 완고한 벽을 뚫고 자신의 뛰어난 역량을 발휘함으로써 여성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높였다.
그 가운데 특히 중종의 계비였던 문정왕후 윤씨는 뛰어난 학문을 바탕으로 오랜 세월 축적된 조선의 모순을 타파하여 백성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던 일세의 여걸이었다. 그녀는 아들 명종이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펼치며 공론을 일삼던 사림을 척결하고 불교부흥과 신분개혁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조선에 새바람을 몰고 왔다.
이런 그녀의 시도는 비록 미풍으로 가라앉았지만 유교 원리주의에 사로잡힌 남녀차별의 완강한 분위기 속에서 측천무후에 비견되는 여성 권력자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점만으로도 커다란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중종의 세 번째 왕비가 되다
문정왕후 윤씨는 1501년(연산군 7년) 10월 22일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전성부부인 이씨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이 해는 조선 유학의 태두인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남달랐는데 실록에는 ‘천성이 강한(剛狠. 굳세고 강직하다.)하고 문자를 알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형제로는 윤원개, 윤원량, 윤원필 등 세 명의 오라비와 언니 한 명이 있었고 아래로 남동생 윤원로와 윤원형이 있었다. 11세 때 어머니를 잃었는데 3년 동안 검소하게 살면서 조상하는 품이 마치 어른과 같았고, 홀아비가 된 아버지를 섬기는 데도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처럼 한결같았으며, 동기들에게도 정성을 다하여 칭찬을 받았다.
1515년(중종 10년) 2월, 장경왕후 윤씨가 세자 이호를 낳고 엿새 만에 세상을 떠났다.그러자 중종은 총애하던 숙의 박씨를 왕비로 삼으려 했지만 원로대신 정광필이 그녀의 소생인 복성군 이미가 어린 원자의 자리를 흔들 것이라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와 같은 대의명분에 굴복한 중종은 새 왕비를 맞이하기로 결정했다.
때마침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 무안현감 유옥 등이 상소를 올려 중종반정 직후 궁궐에서 쫓겨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주장했다. 그로 인해 이듬해까지 조정에서는 신료들 사이에 폐비 복위를 놓고 설전이 벌어졌다. 만일 신씨가 복위하여 왕자를 낳으면 또 다시 후사 문제가 어지러워질 것을 우려한 중종이 논의를 중지시켰다.
그렇게 폐비 복위 문제가 일단락되자 중종의 모후 정현왕후 윤씨는 서둘러 새로운 왕비 후보를 물색했다. 윤씨는 1517년(중종 11년) 2월 어린 원자 이호를 배려하여 가세가 미약한 윤지임의 딸을 최종 낙점하고 대궐로 불러들였다. 장경왕후 윤씨와 문정왕후 윤씨는 공히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의 자손으로 9촌지 간이었으므로 안심하고 원자를 맡길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판단이었다. 그렇게 해서 중전으로 책봉된 문정왕후는 세 살짜리 원자를 직접 양육하며 입지를 다졌다.
그 무렵 궐내에는 경빈 박씨, 희빈 홍씨, 창빈 안씨 등 수많은 후궁들이 임금의 총애를 다투고 있었다. 그 중에 특히 중종의 사랑을 받았던 경빈 박씨는 장차 중전이 되어 아들 복성군을 보위에 올리겠다는 야심을 품고 문정왕후를 괴롭혔다. 또 반정공신 홍경주의 딸로 궐내에 영향력이 컸던 희빈 홍씨도 아들 봉성군을 염두에 두고 그녀를 배척했다. 그녀들에 비해 가문도 미미하고 용모도 평범했던 문정왕후는 온갖 수모와 굴욕을 참아내며 절치부심 때를 기다렸다.
급변하는 정세 속에 힘을 키우다
중종의 치세는 사림파와 훈구파의 경쟁으로 정국이 변화무쌍하게 흘러갔다. 1515년(중종 10년) 성균관 유생들과 이조판서 안당의 추천으로 조정에 들어왔던 조광조와 사림이 성리학의 완고한 규범에 염증을 느낀 중종의 변심과 때맞춘 훈구파의 반격으로 1519년(중종 14년) 11월 기묘사화라는 철퇴를 맞았다. 1521년(중종 16년) 10월에는 관상감 판관 송사련과 학생 정상의 무고로 안당, 안처겸, 안처근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림파 선비들이 처형된 신사무옥이 일어났다.
연이은 대형 옥사를 통해 사림파를 몰락시킨 훈구파 신료들은 다시 중종의 후사를 놓고 치열한 암투를 개시했다. 그 대표주자는 세자 이호를 지지하는 김안로와 경빈 박씨와 복성군을 지지하는 심곤, 남정 등이었다. 1523년(중종 18년) 김안로가 남곤, 심정, 이항 등의 탄핵으로 인해 경기도 풍덕으로 유배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김안로는 4년 뒤 아들 김희를 사주하여 작서의 변이라는 기묘한 사건을 연출했다.
1527년(중종 22년) 2월 26일, 동궁에 불탄 쥐[灼鼠] 한 마리가 걸려 있고 물통의 나무 조각으로 만든 방서가 함께 발견되었다. 돼지띠인 세자 이호는 전날이 생일이었는데, 쥐는 통상 돼지와 비슷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세자에 대한 저주임에 분명했다.
곧 의금부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되었는데 범인으로 경빈 박씨가 지목되었다. 그녀의 종 범덕이가 동궁 주변을 수차례 오가는 것이 궁인들에게 목격되었고, 그녀의 딸 혜순옹주의 종들이 평소 인형을 만들어 세자를 저주했다는 것이었다. 분노한 중종은 경빈 박씨 모자를 유배형에 처했다.
1529년(중종 24년) 6년 만에 조정에 복귀한 김안로는 심정, 이항, 김극핍 등을 모함하여 신묘삼간(辛卯三奸)으로 몰아 죽임으로써 확고부동하게 권력을 손에 넣었다. 김안로는 여세를 몰아 아들 김희를 사주하여 가작인두(假作人頭) 사건을 연출함으로써 경빈 박씨 모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1533년(중종 28년) 5월 17일, 동궁의 빈청에서 괴이한 인형이 발견되었다. 인형을 고정시킨 목패에는 세자를 능지처참하고 왕비를 참형에 처해야 한다는 저주와 함께 병조 서리 한충보가 썼다는 글이 씌어져 있었다.
의금부의 수사 결과 그것은 경빈 박씨의 사위 홍여의 지시로 사헌부 서리 김형경이 처남 서수견, 노비 강손, 보모 효덕이 벌인 저주극으로 밝혀졌다. 대노한 중종은 그들을 모두 능지처참하고 경빈 박씨와 복성군마저 사사했다. 그렇듯 김안로는 교묘한 방법으로 정적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했다. 그때까지 문정왕후는 세자를 빌미로 김안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세자의 외숙부였던 윤임도 그녀의 편이었다. 그 와중에 동생 윤원로와 윤원형은 조정에서 꾸준히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대윤과 소윤 권세를 다투다
1534년(중종 29년) 5월 22일 문정왕후는 늦은 나이에 경원대군 이환을 낳았다. 이에 따라 잠잠하던 정국이 또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중신들이 세자 이호를 지지하는 대윤(大尹)과 경원대군을 지지하는 소윤(小尹)으로 갈리면서 권신 김안로와 함께 세 개의 큰 축으로 나뉘어 무한경쟁을 개시했던 것이다.
대윤의 수장은 세자의 외숙부인 윤임이었고, 소윤의 수장은 경원대군의 외숙부인 윤원형이었다.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막내동생으로 1533년(중종 28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으로 조정에 진출했다. 문정왕후는 경망스럽고 세평이 좋지 않았던 윤원로 대신 윤원형을 후원했다. 그 덕에 윤원형은 사헌부 지평, 홍문관 응교 등 청요직을 지내며 청렴결백한 이미지를 과시함으로써 젊은 관리들을 자파에 끌어들일 수 있었다.
1537년(중종 32년) 윤원형은 자신이 몸담았던 사헌부 관리들을 동원하여 문정왕후의 폐출을 기도하던 권신 김안로를 조정에서 축출함으로써 뛰어난 정치력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권력의 세 축 가운데 하나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대윤과 소윤의 격돌이 표면화되었다.
1542년(중종 37년) 중종은 두 외척이 각기 당파를 만들어 조정을 분열시킨다는 공론이 불거지자 윤임을 귀양 보내고 윤원형을 파직시켰다. 하지만 윤원형은 곧 복직되어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승정원 좌부승지, 좌승지, 공조참판 등의 요직에 임명되는 등 약진을 거듭했다.
1544년(인종 즉위년)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면서 대윤과 소윤의 경쟁은 종식되는 듯했다. 그때 윤원형은 대윤 송인수의 탄핵으로 파직되었고, 윤임은 이언적 등 사림 세력을 조정에 끌어들여 입지를 다졌다. 그런데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대윤은 졸지에 끈 떨어진 연이 되고 말았다.
인종의 갑작스런 죽음에는 문정대비 윤씨의 독살설이 널리 유포되어 있다. 그녀가 자신의 아들 경원대군 이환을 보위에 올릴 욕심으로 인종을 살해하려 했다는 것이다. 인종의 세자 시절 문정왕후가 꼬리에 불을 단 여러 마리의 쥐를 동궁에 들여보내 큰 불이 났다. 그러자 세자는 어머니가 자식을 죽이려 하니 죽어주는 것이 도리라면서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밖에서 중종이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자신의 죽음이 어머니에게는 효행이지만 아버지에게는 불효라면서 빈궁과 함께 불길을 헤쳐 나왔다고 한다.
인종이 즉위하고 나서 대비가 하사한 떡 때문에 죽었다는 설도 있다. 어느 날 인종이 문안을 드리러 가자 그녀가 평소와 달리 인자한 미소를 띠며 떡을 내놓았는데, 그 떡을 먹은 인종이 갑자기 시름시름 앓다가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야담은 오로지 문정대비의 악독함을 부각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숭유억불이라는 조선의 통치이념에 반하여 불교를 부흥시키려 했던 그녀에 대한 유학자들의 반감이 이 같은 혹세무민의 소설로 승화된 것이다. 기실 인종의 죽음은 스스로 자초한 결과였다. 효성이 지극했던 인종은 부왕이 승하하자 병중에도 불구하고 엿새 동안 식음을 전폐했으며, 5개월 동안 호곡하며 몸을 돌보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명나라 사신을 친히 접대하느라 동분서주하면서 병세가 회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을사사화, 사림에 철퇴를 가하다
1545년(명종 즉위년) 6월 28일, 최후를 직감한 인종은 이복동생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흘 후인 7월 1일에 승하했다. 문정대비는 그때부터 12세의 명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시작했다. 당시 45세였던 그녀는 중중에게 《논어》를 강론할 만큼 학문에 뛰어났으므로 직접 신하들과 정사를 논하면서 만기를 친람할 수 있었다.
이로써 정국이 역전되자 윤원형은 예조참의로, 윤원로는 군기시첨정으로 조정에 복귀한 다음중추부지사 정순붕, 병조판서 이기, 호조판서 임백령, 공조판서 허자 등과 함께 대윤 제거작업에 돌입했다. 그는 중종이 승하했을 때 윤임이 희빈 홍씨의 소생의 봉성군 이완을 보위에 올리려 했고, 인종이 승하했을 때는 성종의 셋째 아들 계림군 이유를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린 다음 정난정을 통해 그 내용을 문정대비에게 고했다.
이에 분노한 문정대비가 윤임과 유인숙 등을 치죄하려 하자 대윤을 지지하던 사림이 끼어들어 화를 자초했다. 사헌부 헌납 백인걸이 대비의 밀지에 의해 정당한 절차도 없이 대신들을 귀양 보내는 것은 지나치다고 따지고 들었던 것이다. 그러자 윤원형은 사림이 역적을 비호하고 대왕대비를 능멸했다며 엄벌에 처하라고 상주했다. 그 결과 대윤의 윤임, 유관, 유인숙 등과 더불어 사림의 이휘, 나숙, 정희등, 박광, 이문건 등 10여 명이 죽음을 당하고 수많은 관련자들이 귀양을 가거나 파직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조선시대 4대 사화의 하나인 을사사화이다.
을사사화의 여파는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1547년(명종 2년) 9월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다.’란 익명의 벽서를 발견하고 조정에 보고했다.
윤원형은 이 사건이 대윤 일파에 대한 숙청작업이 미비한 탓이라 여기고 이 기회에 대윤의 잔당을 척결하자고 문정대비에게 건의했다. 이에 따라 윤원형을 탄핵한 바 있던 송인수와 윤임의 사돈 이약수가 죽음을 당했고, 봉성군 이완도 사사되었다. 이어서 이언적, 정자, 노수신, 정황, 유희춘, 백인걸, 김만상 등 20여 명의 사림이 유배형에 처해졌다.
을사사화 이후 윤원로와 윤원형 형제는 확고부동한 권력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불화하면서 극단적으로 권력을 다투었다. 윤원형은 수시로 자신을 음해하는 형 윤원로에 맞서 병조좌랑 윤춘년을 이용하여 그를 탄핵했다. 동생들의 분쟁에 고심하던 문정대비는 결국 윤원로를 남원으로 귀양 보냈다가 이듬해 사사했다. 이 사건 때문에 문정대비와 윤원형은 형제까지 죽인 비정한 권력자라는 세간의 악평을 감수해야 했다.
획기적인 불교중흥정책을 펼치다
독실한 불교 신도였던 문정대비는 왕후 시절 여러 사찰에 내수사 관리를 보내 내원당으로 지정한 다음 정기적으로 향을 보내 복을 빌곤 했다. 명종이 즉위한 뒤 그녀는 본격적으로 불교를 부양하기로 결심하고 그 명분으로 사찰의 양성화를 내걸었다.
“승려들은 날로 번창하고 군액은 날로 감소하고 있는데 사찰은 도둑의 소굴이 되고 있다. 승려들을 핍박하여 당장 모두 환속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만약 이들을 통솔하는 자가 있다면 사찰로 피하려는 자들을 늘어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정대비의 목소리는 성리학을 신봉하고 있던 지배계층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대간에서는 연일 고려 시대 이래 빚어진 불교의 폐단과 토목공사의 부당함을 들어 극력 반대했다. 하지만 사림에 대한 을사년의 철퇴를 목도한 그들은 금세 입을 다물었다.
문정대비는 우선 중종의 능침인 정릉(靖陵) 근처에 있던 봉은사를 화려하게 중창하고 선종의 중심사찰로 삼았으며, 봉선사를 교종의 중심사찰로 삼았다. 이어서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연산군 대에 폐지된 승과를 부활하는 한편 그 동안 금지되었던 도첩제를 실시하게 하고 전국에 3백 개소의 사찰을 공인했다. 그와 함께 회암사에 있던 보우대사를 불러올려 선종판사로 임명하고, 수진대사를 교종판사로 임명했다. 당시 문정대비로부터 불교중흥의 대임을 위임받은 보우는 강력한 불교 부흥 의지를 피력했다.
“만약 나암(懶庵. 보우대사의 호)이 오늘 없다면 후세에 영원히 선(禪)이 없게 될 것이다.”
보우대사가 궁궐에 들어와 임명장을 받는 순간 선교양종(禪敎兩宗)이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이어서 사판승들이 공무를 빌미로 소관부서인 예조를 당당하게 드나들면서 《경국대전》에 실려 있던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규정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승과는 3년에 한 차례씩 실시되면서 이후 15년 동안 4천여 명의 승려를 배출했다. 임진왜란 당시 승군을 이끌고 맹활약을 펼쳐 호국불교의 상징적인 인물이 된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도 이때 승적에 이름을 올렸다.
그렇듯 보우대사는 문정대비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많은 불사를 펼쳤지만 유학자들의 끊임없는 공세에 시달렸다. 선종과 교종의 대립으로 인한 승려들의 반목도 그를 지치게 했다. 결국 그는 1555년(명종 10년) 8년 동안 맡았던 봉은사 주지와 선종판사직을 내놓고 청평사로 물러났다. 이후 그가 진퇴를 반복하자 문정대비는 정릉을 경기도 광주의 선릉 동쪽으로 이장하고 봉은사도 함께 옮겼다.
이와 같은 문정대비의 불교중흥정책은 역사 속에 그녀가 악녀로 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명종실록》의 사관은1565년(명종 20년) 4월 6일자 기사에서 아래와 같이 불교 정책의 결과를 혹평하고 있다.
‘불사를 숭봉함이 한도가 없어서 내외의 창고가 남김없이 다 고갈되고, 뇌물을 공공연히 주고받고 백성의 전지를 마구 빼앗았으며, 내수사의 노비가 제도에서 방자하게 굴고 주인을 배반한 노비들이 못에 고기가 모이듯, 숲에 짐승이 우글거리듯 절로 모여들었다.’
서얼허통으로 신분제를 개혁하다
명종 시대, 문정대비의 불교중흥을 앞장서 부추긴 인물은 윤원형의 소실 정난정이었다. 불심 깊었던 그녀는 대비에게 보우대사를 소개하는 한편 불사 중창에 거금을 기부하고 다양한 불교행사를 마련했다.
이에 감동한 문정대비는 1549년(명종 4년) 윤원형의 공이 크다는 이유로 첩의 소생이 다른 집 적자와 통혼하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물론 그 첩은 정난정이었다. 2년 뒤인 1551년(명중 6년)에는 윤원형이 조강지처 김씨를 내쫓게 해달라고 주청하자 허락해 주기까지 했다.
1553년(명종 8년) 3월, 명종은 문정대비의 명에 따라 정난정에게 직첩을 내림으로써 그녀를 합법적인 유원형의 정실로 인정해 주었다. 당시 윤원형은 종1품 의정부 좌찬성이었으므로 그녀는 단숨에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었다. 그 덕에 그녀 소생의 자식들은 천역에서 벗어나 어엿한 양반이 되었다. 그해 10월 윤원형은 정난정의 간청을 받아들여 영의정 심연원, 좌의정 상진, 우의정 윤개 등과 함께 서얼허통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인재의 우열은 타고난 기질의 순수한가 아닌가에 좌우되는 것이지 출생의 귀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 첩의 몸에서 났는데 서얼이라 하여 등용하지 않는다면 어찌 왕자가 인재를 취함에 귀천을 가리지 않는 도라고 하겠습니까.”
그 결과 대간과 이조판서 안현 등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얼호통법이 통과되었다. 그 획기적인 조치에 그 동안 숨죽이고 있던 서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때부터 억울한 일을 당한 서얼이나 평민, 노비 등이 구름처럼 윤원형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문정대비는 인간 평등이라는 불교의 이념을 받아들여 적서를 차별하지 않았으므로 종친들에게도 관대했다. 또 중종 사후 삼년상을 치른 뒤 출궁이 관례화되어 있는 후궁들을 만류하여 궁궐에 머물게 했다. 선원계보에 기록되지 않은 귀인 한씨는 선조 때까지 궐내에 살았다. 마찬가지로 천출이었던 윤원형의 소실 정난정을 따뜻하게 대함으로써 그녀의 지극한 충성을 이끌어냈다.
죽음과 함께 악녀로 매도되다
1551년(명종 6년), 명종은 즉위 6년이 지나 18세의 성인이 되었지만 모후가 수렴청정을 계속하자 내심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신진사림을 등용하여 외척들을 견제하려 했지만 대비의 단호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553년(명종 8년) 7월, 명종의 나이 20세가 되자 문정대비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임금에게 권력을 돌려주었다. 드디어 친정에 임하게 된 명종은 인순왕후의 친정에서 추천한 이량을 측근으로 등용했다. 그런데 이량은 이감, 신사헌, 권신 등 추종세력을 포섭하여 문무관의 인사관을 가진 이조와 병조를 장악한 뒤 매관매직으로 치부에 골몰했다.
이량의 월권이 금도를 넘어서자 사림파의 박소립과 윤두수가 공론을 이유로 그를 공격했고, 윤원형도 그 대열에 합세했다. 하는 수 없이 명종은 그를 외직인 평안도 관찰사로 내보냈다가 곧 이조참판에 제수하여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한데 조정에 복귀한 이량은 이전보다 더한 탐욕을 부렸다.
그 무렵 조선 팔도는 거듭된 흉년으로 인해 유랑민이 들끓고 도적떼가 창궐하여 목불인견의 참상이 연출되고 있었다. 탐관오리의 창고에는 곡식이 썩어나가는데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주린 배를 움켜쥐었다. 그런 상황에서 1555년(명종 10년) 왜구들이 전라도 일대를 휩쓴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또 1559년(명종 14년)부터 1562년(명종 17년)까지 3년여에 걸쳐 양주 백정 임꺽정이 이끄는 도적떼가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휘저었다.
1563년(명종 18년) 이량이 박소립과 윤두수를 제거하려 하자 명종은 심의겸의 도움으로 홍문관을 움직여 그를 조정에서 축출했다. 그 무렵 윤원형이 딸을 덕흥군의 아들과 혼인시키려 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듯 심약했던 명종이 이전과 다르게 능동적으로 왕권을 행사하던 1565년(명종 20년) 4월, 강건하던 문정대비가 갑자기 병석에 눕더니 그달 6일 오후 세상을 떠났다. 향년 65세였다. 그녀는 생전에 중종의 능침 옆에 안장되길 원했지만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릉리의 태릉(泰陵)에 안장되었다.
문정대비 사후 아들 명종은 중신들의 성화에 따라 윤원형과 보우대사를 제거한 다음 선교양종을 철폐하고 승과와 도첩제를 없애버렸다. 그렇게 해서 문정대비에 의해 15년 동안 반짝했던 불교 중흥의 기운이 덧없이 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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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11월11일 서울 노원구 [ 태릉 & 강릉 & 노원불빛정원 & 서울여자대학교 & 육군사관학교 ] 탐방기 09:27~10:21 3호선 연신내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출발하여 약수역에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서울 노원구 화랑로 지하 510 번지에 있는 6호선 화랑대역으로 이동 [54분 소요] 탐방지 : 서울 노원구 [ 태릉 & 강릉 ] 탐방코스: [ 화랑대역 4번 출구 ~(2.7km)~ 태릉 입구 ~ 태릉 탐방 ~ (태릉~강릉) 연결 숲길 ~ 강릉 탐방 ~(2.2km)~ 육군사관학교 제2 정문 ] 일시 : 2022년 11월 11일(금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1시간53분 소요) * 10:21~10:43 서울 노원구 공릉동 282-6 번지에 있는 6호선 화랑대역 4번 출구에서 탐방 출발하여 태릉으로 이동 [22분 소요] * 10:43~11:09 태릉(泰陵) 탐방 [태릉은 제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1501~1565) 윤 씨의 능으로 봉분 1기만 있는 단릉이다. 문정왕후는 중종과 인종, 명종 3대에 걸쳐 왕비와 대비로 있으면서 정권에 개입하는 등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조선을 회오리바람 속으로 몰아넣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문정왕후에 관한 일화는 워낙 많지만 을사사화와 연계된 정난정의 일화는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다. 그녀의 아버지 정윤겸은 부총관을 지냈지만 어머니는 관비 출신이므로 위계가 철저한 조선에서 그녀가 일어설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난정은 이 기회를 반전시키기 위해 우선 기생이 되었다. 고관과 자주 어울릴 수 있는 기생은 격이 낮은 여자가 신분 상승을 꾀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녀는 바람대로 문정왕후의 남동생인 소윤 윤원형의 첩이 되었다. 마침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고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정계는 모두 윤원형 쪽으로 쏠린다. 곧바로 윤원형은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인종의 외척 윤임이 그의 조카 봉성군에게 왕위를 주려 한다고 무고한다. 이는 인종의 외척인 대윤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의 권력 다툼으로, 결국 대윤의 우두머리인 윤임 등이 반역 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고 만다. 이를 '을사사화'라고 한다. 이 기회를 이용해 정난정은 윤원형의 정실 김 씨를 몰아낸 다음 적처가 되고,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해 전매·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한다. 그럼에도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했고, 1553년에는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이 되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정난정에 대한 사가들의 평은 비난으로 꽉 차 있지만 그녀는 윤원형을 움직여 적자와 서자의 신분 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했다. 당시로서는 신분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획기적인 정책으로 좌절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문정왕후는 당의 측천무후, 청의 서태후와 비교될 정도로 억척같은 집념으로 아들을 왕으로 만든 여인이다. 그러나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8년 동안 국정을 지휘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문정왕후의 가장 큰 피해자로 그의 아들인 명종이 손꼽히기도 한다. 왕이 된 아들에게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겠느냐?"라며 호통을 치고, 왕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회초리까지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종을 눈물로 왕위를 지킨 왕으로 기억한다.] * 11:09~11:31 (태릉~강릉) 연결 숲길을 걸어서 강릉(康陵)으로 이동 * 11:31~11:52 강릉(康陵) 탐방 [강릉은 중종과 문정왕후 윤 씨의 아들인 제13대 명종(1534~1567)과 인순왕후(1532~1575) 심 씨의 능이다. 명종은 후사 없이 죽은 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으로 등극한 후부터 8년간 문정왕후 윤 씨가 섭정했고 155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친정했지만 외척인 윤원형, 윤원로 등에 의해 정사가 좌지우지되면서 혼란을 겪었다. 인순왕후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1543년 경원대군(명종)과 가례를 올리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명종이 죽은 후 선조가 즉위하자 잠시 수렴청정을 했다. 1569년(선조 2)에 의성(懿聖)이라는 존호가 진상되었다. 아들 순회세자를 일찍 잃고 이복 조카인 하성군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사망했다.] * 11:52~12:14 서울 노원구 공릉동 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제2정문으로 이동하여 태릉과 강릉의 탐방 완료 탐방지 : 서울 노원구 [ 노원 불빛정원 & 서울여자대학교 ] 탐방코스: [ 서울 노원구 공릉동 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제2정문 ~ 노원 불빛정원 ~ 서울여자대학교 정문 ~ 서울여자대학교 캠퍼스 ~ 육군사관학교 제2정문 ] 탐방일 : 2022년 11월 11일(금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1시간12분 소요) 12:14~12:17 서울 노원구 공릉동 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제2정문에서 탐방 출발하여 노원불빛정원으로 이동 12:17~12:47 노원불빛정원(화랑대 철도공원)을 탐방 12:47~12:51 서울여자대학교 정문으로 이동 12:51~13:21 서울여자대학교 캠퍼스를 (50주년 기념관~기독교 교육관~인문사회관~중앙도서관~조형예술관~ 고명우 기념관(대학원 건물)~학생누리관~바롬인성교육관~대강당)의 코스로 탐방 13:21~13:26 서울 노원구 공릉동 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제2정문으로 원점회귀하여 탐방 완료 13:26~14:14 육군사관학교 제2정문 옆에 있는 행정안내소에서 신분증 제출하고 출입증 수령 후 준비해온 간식으로 식사 [육사 관광은 희망일 3일 이상 전에 육사 사이트 온라인서비스 섹션에서 미리 신청하여 승인을 받아야 한다. 육사 방문 가능일 : 화 ~ 금요일 육사 관광 시간(1일 2회) : 오전 10:00~12:00, 오후 2:00 ~ 4:00 금요일 오후 2시 30분에는 생도들이 실시하는 열병식인 화랑의식을 볼 수 있다.] 탐방지 :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화랑대 8경 :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의 경관과 군사문화 전통을 팔경으로 형상화하여, 화랑대의 4계절 8개 경치를 교훈ㆍ사관생도 신조ㆍ군인관ㆍ사생관 등 의미와 결합해 구성했다. ◀ 제1경 고(故) 강재구 소령 동상.그 앞을 지나며 추모하는 생도 퍼레이드 모습 - 부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 같이 바쳐 부하사랑을 실천한 故 강재구 소령의 살신성인 정신을 본받는다. ◀ 제2경 호국로에 피어난 벚꽃 아래를 걷는 생도 기마 대열 -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인자하지만 자신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게 수신(修身)할 것을 다짐한다. ◀ 제3경 초여름 하늘 위로 우뚝 솟은 교훈탑 - 장차 조국의 국방을 책임질 지(智)·인(仁)·용(勇)을 갖춘 호국 동량들의 기세가 하늘 높이 치솟는다. ◀ 제4경 한여름 범무상·쌍사자상 분수 - 범무상(汎武像)과 쌍사자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름 분수를 보며 뜨거운 열정을 불태우는 청년 사관들이 항재전장 상무정신을 되새긴다. ◀ 제5경 화랑연병장에서 행진하는 생도들의 힘찬 퍼레이드 - 삼국 통일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예전 화랑들. 이에 못지않은 기백을 가진 청년 사관들의 위풍당당한 ‘용(勇)’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 제6경 오색단풍이 물든 늦가을 화랑대 교정 - 생도들이 가을 정취 가득한 낭만적인 화랑대 교정에서 동료애를 나누며 문학과 예술에 심취해 엘리트 장교의 소양을 키운다. ◀ 제7경 겨울 눈 속의 호국 비 - 호국 비를 보면서 위국헌신의 사명감과 가치관을 내면화·신념화한다. 비문은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 제8경 눈보라 속의 화랑 연병장 풍경 - 혹한 속에서도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같이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의연함과 초지일관의 가치관을 품고 있다.] [육사 교정은 군인 양성 기관인만큼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에 근엄하고 차가운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강철희 한국건축가협회장은 “육사 교정은 김중업·김수근·이광노·김종성 등 대한민국 1세대 건축 거장들의 작품이 다 모여있는 ‘한국 현대 건축의 미니 박물관’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학교본부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설계한 고(故) 무애 이광노 건축가의 작품이다. 육사 지휘부가 입주했고 석조 건축물이다. 지하 1층~지상 3층, 연면적 6000㎡ 규모로 1980년 완공했다. 이광노 건축가는 1975년 국회의사당을 짓자마자 학교본부 설계에 착수했다. 그러다보니 국회의사당과 외관이나 구조적 측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국회의사당의 경우 1층 중앙로비인 로텐더홀은 천장이 높아 웅장한 느낌을 준다. 육사 학교본부도 비슷하다. 1층에 들어가면 천장이 3층 높이여서 시원스럽다. 눈에 띄는 점은 국회의사당과 달리 돔이 없다는 것. 학교본부 지붕은 사각형 로비에 어울리도록 초가지붕 모양이다. 박영준 육사 토목환경학과장은 “초가집은 겸손과 겸양, 섬김의 대명사로 군대 지휘부가 갖춰야할 덕목”이라며 “국가의 리더가 될 생도들이 교육생 시절에 배워야 할 덕목을 건물 설계에 녹여냈다”고 했다.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 고(故) 김중업 건축가는 프랑스 대사관, 삼일빌딩,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 등을 설계했다. ‘현대건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기도하다. 그는 1981년 육군박물관을 설계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군사박물관으로 1983년 지하 1층~지상 3층 규모로 준공했다. 전시실 2개와 강당 등으로 이뤄졌다. 전시실로 올라가는 1층 계단 창문에는 3층 천장까지 스테인드 글래스로 처리했다. 이 창문엔 사물놀이패가 신명나게 노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2층의 1전시실은 고대실로, 3층의 2전시실은 현대실로 각각 운영한다. 고대실은 선사시대부터 광복까지의 군사 자료 약 1000점이, 현대실엔 6·25전쟁과 월남전 참전 기념물, 평화유지군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최근엔 마지막 남은 대한제국 장교였던 황석 부위가 입었던 예복이 박물관에 기증됐다. 이 건물은 외관이 독특하다. 직사각형 모양 사무동 건물과 원형의 박물관 등 두 개의 매스로 이뤄져 있다. 하늘에서 보면 마치 열쇠처럼 생겼다. 그래서 육사 생도들 사이에선 ‘조국 통일의 열쇠’가 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당시 박물관 설계에 참여했던 곽재환 칸건축 대표의 설명은 전혀 다르다. 그는 “박물관이 ‘장구’를 형상화했다거나 ‘열쇠’ 모양이라는 건 엉뚱한 이야기”라고 했다. 안중근 의사를 떠올리며 ‘위국헌신 군인본분’의 핵심 메시지인 충성의 ‘충(忠)’을 은유해서 설계했다는 것. 곽 대표는 “박물관이 육사의 중심이고, 우리나라의 중심이자 세계의 중심이 되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했다. 실제로 건물 가운데 원통형 중정(中庭)은 ‘가운데 중(中)’을 형상화했고, 건물 중앙에 설치했던 분수는 ‘마음 심(心)’을 상징한다는 것. 다만 원래 분수였던 중정은 관리상 이유로 철거했다. 육사 관계자는 “박물관 유물에 습기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이유로 분수를 없앤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철거 후엔 원형 울림통 효과가 있어 공연장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했다. 이에 대해 곽 대표는 “유물 보존 대책은 다른 대안이 많지만 박물관에서 분수를 없애면 하늘의 마음을 담고자 한 김중업 선생의 설계 의도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건물 외벽은 기와색 삼각벽돌로 둘렀다. 삼각형이어서 빛에 따라 형상이나 빛깔, 색이 달라진다. 이 삼각벽돌은 솔가지를 태워 색을 입힌 것으로 기와를 만들 때 쓰는 전통 가마 방식이다. 당대 최고 벽돌장인 김영림씨가 제작했다. 박물관 기둥은 군인의 ‘세워총’ 자세를 형상화했다. 사각형 건물 끝엔 비상계단이 있는데 일부러 방향을 비스듬히 해 건물과 별개인 조형물처럼 보이는 효과를 주었다. 빗물을 받는 물홈통은 잔 모양으로 디테일을 살렸다. 육사기념관은 일명 ‘교훈탑’으로 불린다. 1962년 5월부터 사용한 교훈인 ‘참되게 자라자, 배워서 이기자, 나라를 빛내자’를 ‘지(智)·인(仁)·용(勇)’으로 다시 환원하면서 건립이 구상됐고, 이후 졸업생의 성금으로 1986년 준공했다. 김중업 건축가와 함께 한국 현대 건축의 양대 거장으로 평가받는 고(故)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했다. 김수근 건축가는 이 건물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기념관은 지상의 탑과 지상 1층~지하 2층 기념관으로 구성된다. 탑 높이는 64m로 ‘육사’를 상징하며, 탑을 받치는 5개의 지주는 육군의 별을 상징한다. 항간에는 “오각성(五角星) 탑이 제5공화국을 상징하는 것 아니냐”는 소문도 있다. 하지만 김수근 건축가와 함께 일했던 김원석 공간건축 고문은 터무니없다고 했다. 그는 “오각별은 군에서 그 자체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면서 “5공화국과 관련된 건 없다”고 했다. 육사기념관 1층엔 학교 역사관과 전사자실이 있다. 눈에 띄는 건 1층 외벽에 개교 이후 74기(2018년)까지 졸업생 명단이 한 명도 빠짐없이 동판으로 새겨져 있다는 것. 김원석 고문은 “졸업생들이 할아버지가 되더라도 긍지를 갖고 손자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게 해놓은 것”이라고 했다. 지하 2층엔 생도생활 등을 엿볼 수 있는 전시관이 있다. 꼭대기층엔 바닥면적 70㎡ 규모의 십오각형 모양 전망대가 있다. 육사 교정 전체와 태릉 일대를 볼 수 있어 조망이 뛰어나다. 탑이 지어진 1986년은 육사 개교 40주년이었는데, 10년 뒤 50주년인 1996년 기념관 형태로 바뀌었다. 그 전엔 지하에 식당과 카페테리아가 있었다. 육사도서관은 1982년 준공했다. 지하 1층~지상 2층, 연면적 6753㎡(약 2000평)짜리 건물이다. 생도교육과 학술 정보 지원 목적으로 대우그룹이 지어 기증했다. 건물에 우당(愚堂)이란 이름이 붙어있는데,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부친의 호를 썼기 때문이다. 이 도서관은 건축 당시엔 국내에서 보기 힘든 개가식(열람자가 서가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도서관)으로 설계했다. 설계자인 김종성 건축가는 “지금이야 대부분 도서관이 개가식이지만, 당시엔 도서가 분실·훼손될 것을 우려해 흔치 않았다”며 “주된 이용자가 최고의 도덕성을 명예로 생각하는 사관생도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도서관에 들어서면 자연광을 이용한 채광이 눈에 띈다. 정진경 육사 교장(중장)은 “재학 당시 햇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도서관에서 공부했던 추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도서관 바닥은 석회암의 일종인 트래버틴(travertine)을, 건물 내부벽은 녹색 대리석을 사용했다. 책장과 의자, 서가 등은 모두 참나무로 마감했다. 설계자인 김종성 건축가는 한국 건축가 1세대로 작고한 김중업, 김수근 건축가와 함께 한국 3대 현대 건축 거장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종로 SK사옥, 서울시립역사박물관, 서울 힐튼호텔 등을 설계했고, 강남구 삼성동에 짓는 현대차 GBC 마스터플랜 총괄 책임을 맡고 있기도 하다. 이밖에도 육사에는 조선시대 삼군부 부속 건물 중 하나인 청헌당과 서울시 건축상을 받은 원불교 화랑대 교당, 한국건축가협회장을 역임한 강석원 건축가가 지은 화랑대 성당 등도 있다.] 탐방코스: [ 육군사관학교 행정안내소 → 육군사관학교 기념관(교훈탑) → 육군박물관 → 범무천(汎武泉) → 범무천(汎武泉) 옆에 있는 야외 무기전시장 → 육군사관학교 행정안내소(제 2 정문) ] 탐방일 : 2022년 11월 11일(금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2시간11분 소요) 14:14~14:18 서울 노원구 공릉동 32-1 번지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행정안내소에서 탐방출발하여 꼭대기층에 전망대가 있는 육군사관학교 기념관(교훈탑)으로 이동 [교훈탑으로도 불리는 육군사관학교 기념관은 육사 개교 40주년을 맞은 1986년 지어졌다. 개관 당시엔 지하에 식당을 갖추고 꼭대기는 전망대로 꾸며 타워 기능에 충실했다고 한다. 현재 식당은 사라졌지만, 전망대는 그대로다. 이 기념관은 김중업 건축가와 함께 한국 현대 건축의 양대 거장으로 평가받는 고(故)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했다.] 14:18~14:51 육군사관학교 기념관(교훈탑) 관람 [금요일 오후 2시 30분에는 교훈탑 앞 화랑 연병장에서 생도들이 실시하는 열병식인 화랑의식을 관람할 수 있다.] 14:51~14:55 하늘에서 보면 마치 열쇠처럼 생긴 육군 박물관으로 이동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 고(故) 김중업 건축가가 1981년 육군 박물관을 설계했다. 육군박물관 앞 광장에는 故 강재구 소령 동상이 있다.] 14:55~16:05 육군 박물관 관람 16:05~16:07 연못과 분수대로 구성된 휴식공간인 범무천(汎武泉)으로 이동 16:07~16:09 범무천(汎武泉)에서 국회의사당 건물을 닮은 학교본부를 사진촬영 [학교본부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설계한 고(故) 무애(無涯) 이광노 건축가의 작품이다. 육사 지휘부가 입주했고 석조 건축물이다. 지하 1층~지상 3층, 연면적 6000㎡ 규모로 1980년 완공했다.] 16:09~16:10 범무천(汎武泉) 옆에 있는 야외 무기전시장으로 이동 16:10~16:20 야외 무기전시장 관람 16:20~16:25 육군사관학교 행정안내소로 원점회귀하여 육군사관학교 탐방 완료 16:25~16:32 육군 사관학교 제2 정문 건너편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화랑대역으로 가는 버스 승차 대기 16:32~16:36 1155번 버스를 타고 육군 사관학교 제2 정문 앞 버스 정류장에서 화랑대역 2번 출구로 이동 16:36~16:44 화랑대역에서 역촌역으로 가는 6호선 지하철 승차 대기 16:44~17:42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출발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58분 소요] [ 태릉 & 강릉 ] 지도 노원불빛정원 지도 서울여자대학교 안내도 육군 사관학교 탐방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