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회 믿음의 선각자 편 - 건강 개혁의 다리를 놓음(죤 캘럭의 등장)
건강 개혁의 다리를 놓음
재림교회는 교회가 처음으로 태동될 때에 가장 급히 떠오른 현안이 건강에 대한 빛이었다. 건강에 대한 빛을 받음으로서 교회가 탄생된다. 당시의 상활을 잠시 고려하여 보자. 교회가 조직이 된 후에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들이 사람들의 건강 상태였다. 19세기로 접어드는 미국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위생과 건강은 형편없었다. 우선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1800년에는 32세, 1850년에는 52세로 되어 있었다. 먹는 음식에 있어서도 무엇이 몸에 좋은 것이지 나쁜지에 대한 구별이 없었고, 당시에는 전염병의 창궐로 인하여 죽음이 많았고, 영양에 대한 기본 지식도 전혀 없었다. 목욕시설도 없었고. 수도시설도 없었다. 1872년 엘렌 화잇은 건강한 사람은 매주 두 번의 목욕을 권장하던 시절이다.
당시에는 음식물을 저장할 수 있는 냉동시설이 전혀 없었고, 옥외 변소로 인하여 불결하지 그지없었으며, 쓰레기 처리장이 없어 유출된 오물로 인하여 어디를 가든지 악취가 즐비하여 길거리에는 돼지 떼들이 쓰레기를 먹어치우는 소동을 벌이고 있었다. 거리는 비포장도로인데다 말똥과 소똥이 즐비하여 온통 악취를 풍기는 지경이 되어 도시나 시골이나 별반 나을 것이 없는 주변이 온통 쓰레기들과 배설물로 뒤덮어져 있었다. 그리고 어디를 가든지 침을 뱉고 흡연하여 실내와 실외를 막론하고 피워 물고 다님으로 불결함은 이루 말이 아니었다. 황열병의 전염으로 높은 치사율로 사람들이 죽어갔다. 동풍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탓에 공기로 인하여 사망률이 심하였다.
당시 병원에 간다는 것은 죽으러 간다는 인식이 팽배되어 있을 정도로 병원이 비위생적이었고, 오히려 병원에서는 전염병이 나돌았다. 의학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 병이 들면 몸 속의 체액을 빼는 것이 주효하다고 하여 강력한 약물로 출혈을 촉진시킴으로 몸에 해를 가져왔다. 구토, 설사, 고혈을 회복의 징조로 보았다. 수술을 위한 마취제의 사용도 없었다. 세균에 대한 위생학적 대비도 없었고, 의사의 수준도 형편없었던 때였다. 당시의 의사들의 수준으로는 환자들의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죽음으로 일찍 몰고 가는 역할 밖에는 그 아무런 것도 하지 못하였다.
이러던 때인 1830년에 일부 건강 개혁 운동이 실베스터 그레이엄이라는 분이 등ㅈ아하여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건강수칙에 매우 근접한 것들이 많이 있다. 대표적인 것들을 보면 주식을 채소와 과실로, 빵은 정제되지 않은 밀가루로, 버터 대신 양질의 크림을, 음식을 잘 씹으며, 육류와 생선은 제외, 지방과 기름진 그레이비 및 독한 양념을 피함, 커피, 포도주, 홍차, 담배 등 자극성을 피함, 저녁 식사를 가볍게, 식사는 자기 전 3시간 전에 가질 것, 간식과 과식의 금지, 약보다는 절제와 재욕에 우선함, 동풍이 잘 되는 곳에서 잠을 잘 것, 몸에 꼭 맞는 옷을 피함, 온스와 냉수 목욕, 유산소 운동, 빵은 제조 후 12-24시간 지난 것을 먹을 것 등이다. 이상의 것은 오늘날의 건강 수칙과 거의 동일하다. 당시 종교적 건강개혁자들은 건강법칙을 하나님의 법으로 간주하여 건강한 삶을 사는 거을 우선하여 많은 노력들을 병행하였다. 당시 널리 사용하던 것 중의 하나가 수치료로 이것을 저들은 그레이엄 건강요법이라고 불렀다. 건강을 위한 개혁 프로그램은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전수가 된 것이다. 화잇 선지는 이럴 때에 유독성 약물의 사용을 배격한다는 말을 하였고, 천연치료법인 오늘날 소위 뉴스타트 치료의 근본 원리를 제시하여 당시 건강개혁자들과 일치하였다.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으로는 화잇 선지가 언급한 대개의 건강에 관한 기별들은 전에 이미 공개된 것들로 그것들을 다시 견고하게 주입시켜 우리들의 실생활의 일부분으로 가져오도록 독보적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신자들은 신앙과 건강을 병행시킴으로 어떠한 민족보다도 오래 살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재림신도들은 처음부터 건강문제를 다루어 왔던 이들은 아니었다. 엘렌 화잇은 1859년에 돼지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하여 헤스켈과 다른 몇 사람들에게 권고하는 말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돼지고기를 먹는 문제에 관한 견해를 자기 혼자만 알고 지키면 해로울 것이 없겠지만, 그대들의 판단과 의견은 이것을 신앙을 검증하는 시금석으로 만들었으며, 그대들의 행동은 이 문제에 관한 믿음을 확실히 드러내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서 부언하기를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를 원하신다면, 이 문제에 대한 확신을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 만일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교회의 의무라면 하나님은 두세 사람 이상이 그것을 깨닫도록 하실 것이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진리라 하여도 그것을 포용성 있게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주면서 교회를 차분하게 인도하여 오신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인도하여 올 때에 건강개혁을 생활에 옮겨가지고 왔던 분을 사용하여 오셨다. 그중 대표적인 한 분이 죠셉 베이츠이다. 그는 1821년에 과감하게 독주를 끊은 사람이다. 당시 그는 식사보다도 술을 더 기다린 자였다. 1822년에는 포도주를, 1823년에는 담배를, 1824년에는 모든 형태의 주정음료를 끊고, 1831년에는 홍차와 커피까지 끊었으며 , 그는 1843년 2월에는 더 이상 육식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는 깨닫는 대로 ㅅㄹ천하여 그가 80세 죽는 날까지 단 두 번 말라리아에 걸려 드러누운 것 외에는 아파 본 적이 없었다. 베이츠는 79세가 되던 해애 건강 컨벤션에 참석하여 자기가 건강을 지켜 온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하였다. “힘들게 바다를 헤치고 다니던 젊은 시절의 어려움 때문에 지금 나이쯤이면 불구가 되어 꽤나 고생을 하리라 믿었던 내 과거의 생각과는 달리, 고마우신 하나님 덕분에 그 분의 풍요한 축복이 나의 개혁을 위한 모든 노력을 보상하시기 때문에 나는 전혀 ㅇ픈 데가 없습니다. 내가 계속 개혁을 추구하며 모든 잘못된 것을 버릴 때. 어린 양을 따르는 구원 얻은 무리와 함께 하나님의 보좌 앞에 흠 없이 서게 될 것을 믿고, 나는 더욱 더 깊어지는 기쁨과 환희를 얻고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베이츠는 건강생활의 습관은 그저 자신의 생활의 일부분으로 생각하여 어떤 자리에서도 언급한 바가 없었던 그였으나 1863년에는 달라져 재림교회 신자들에게는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대총회가 조직되었던 그해인 6월 10일에 하나님께서 하나의 이상을 화잇 부인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바로 건강이었는바 건강하지 않고서야 그 무엇도 제대로 이루어낼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주어진 권면이 하나님의 위대한 치료제인 깨끗하고 신선한 물이 등장하며, 풍요로운 삶을 위한 우리들의 의무인 것을 화잇의 원고에 실렸다. 몸을 제대로 추스르는 건강법칙이 없어 재임스 화잇은 혹사를 당하며, 뇌일혈로 쓰러지기도 하였고, 중풍에 시달렸고, 그나마 두 아들도 잃었다. 1865년 12월 25일 뉴욕 주 로체스타에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백성들이 너무도 건강개혁의 빛을 소홀히 하여 왔음을 보여주며 이제는 교회라고 하는 기관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사회적, 선교적 의미를 내포하여 의료기관 설립을 요하게 되었다. 이제 교회는 안식일을 지키는 백성들이 경영하는 의료기관의 혜택을 접하게 됨에 따라 좋은 인상을 받고 육신의 죄와 병든 영혼을 치유케 하는 영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을 것이다. 그래서 의료를 선교의 발판으로 삼게 되었다. 이는 세상이 건강을 상실함으로 인하여 오는 손해를 그대로 방관할 수 없음이 하나님의 이상이다.
재림교회는 건강기별을 기별의 오른팔로 생각하면서 우리가 전하는 세 천사의 기별의 건강개혁과 직결된 것임을 주지하게 되어 우리가 중시 여겨야 할 것 중에 제일 우선순위로 두고, 자칫 잘못하다가 광신으로 빠져나가는 사례를 조심하면서 단도리를 쳐야만 하였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여도 자신들의 괴팍한 성격이 가미되어 해를 끼치는 자들 때문에 건강개혁에 대한 바른 지도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던 초기 시절이었다. 대총회는 이러한 폐단을 일소하기 위하여 건강에 대한 기사를 리뷰지에 연재하여 실림으로써 건강개혁을 돕기 위한 실질적 방안책을 기고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애를 좀 더 건강한 생활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다가 1866년 8월 대총회는 건강개혁지를 발행하게 되었다. 글을 여러 분들이 번갈아 쓰면서 건강에 대한 철학을 숙지시켜 이에 대한 무지가 죄인 것을 인식시키고, 이제 건강은 전문 분야의 사람만이 다룰 것이 아니고 건강한 생활을 생활에 옮긴이들의 체험을 통한 축복들을 글에 실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는 모습을 실제로 보여드릴 수 있도록 하였다. 건강법칙을 준수함으로 과거에 아팠던 형편에서 기쁨의 삶을 살게 된 것들을 여러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확증하였다.
교회가 교회로서 자리 잡혀지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주입시키는 과정도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교회는 늘 건강만을 강조하여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말라고 설교하고 가르친 일로 인하여 참석하는 이들은 한 가지도 생활에 옮기지 못한지라 교회를 나갈 재미를 상실하기도 하였으나 그것을 참으면서 듣고 들어 나중에는 생활에 모두 적용하여 건강한 삶을 살게 하여 준 교회에 사람들은 감사함을 지니게 되었다. 교회가 하늘이 준 기별임을 알면서 의료기관을 설립할 최초에는 의사 2명, 직원 2명, 간호원 1명, 보조원 3, 4명으로 시작한 것이 본 재림교회의 형편이었다. 그러던 것이 불과 4개월 만에 새 건물을 짓게 되었고, 건강잡지도 출판하여 구독자를 많이 얻게 되었다가 그후 35년에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베틀 크릭 요양소를 만들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틀 크릭 요양 병원이 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1876년에 베틀 크릭 요양원의 원장으로 온 존 하비 켈록이라는 의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5피드 3인치의 단신으로 무슨 일이든 활기차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였다. 그는 가난하였고, 처음에는 읫가 되기 위한 꿈을 지닌 것이 아니라 교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교회에서 학자금을 대주어 의사의 길을 걷도록 하여 주었다. 그는 명석하였던지라 당시 미국의 명문인 뉴욕의 벨뷰 병원 의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베틀 크릭의 요양소의 원장이 되었다 당시 나이 23세의 풋내기 의사인지라 처음에 있던 20여명의 환자들 중에 애숭이 의사라고 천대를 받아 6명이 떠나가고, 나머지 환자들로부터도 환영을 받지 못하였으나 일년만 조건부로 일하기로 한 것이 그만 67년을 한 곳에서 일을 함으로 베틀 크릭 왕국을 운영하다시피 하였다. 몇 달 안에 환자는 두 배로 증가하였고, 1877년 이듬해에는 새 건물을 증축하고, 미국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병원 중 하나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켈록은 무려 50여권의 책을 썼으며 콘 플레이크와 콜드 시리얼 산업을 고안하였고, 최첨단 의료기술을 개발하여 당대의 저명한 외과의사로 명성을 날렸다.
죤 캘록은 1852년에 그의 부친이 재림신앙을 받아들였던 해에 열여섯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캘록의 부인은 1855년에 리뷰 헤랄드 출판소 건립에 재정의 일부를 후원하여 가족들을 베틀 크릭으로 이주하여 가게 문을 열었다. 1866년 켈록이 14세가 되던 해애 출판소에서 교정자로 취업한다. 웨스턴 건강 개혁 기관의 취임식을 갖고 당시 최고의 금액인 500불의 헌금을 내었다. 캘록은 선생이 되는 것이 목표였다. 그가 일년 동안은 학교에서 가르치다가 1872년에 뉴저지에 있는 테레픽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다가 미시간의 의과대학으로 옮겨갔다. 그러다가 뉴욕 시의 벨류에 의과대학으로 옮겨가 재임스 화잇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다가 1875년에 베틀 크릭으로 와서 일년 후에 건강개혁 연구소에서 의료 감독청을 만들어 24세에 청년 의사가 20명의 환자를 맡게 된다. 처음에는 별로 인기가 없었으나 많은 환자들이 몰려와 승승장구하여 유명세를 얻어 의료와 수술양성소로 이름이 바뀌어지면서 가장 유명한 곳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유명 인사들을 병원에 유치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두 개의 병동을 짓고 천명의 환자를 모시는 병원으로 일약 도약하였다.
그는 일류의 의사들을 포진시켰고, 유럽을 자주 여행하면서 의료 발전을 병행하고 책을 저술하며 의과대학을 짓고 공중 강연을 하고 의료 기구들을 발명하고 음식을 개발하여 면허를 얻고 지금도 그의 유명세가 이어지고 있다. 콘 푸레이크는 세계적으로 이용되어 그는 큰 부를 누리게 된다. 그가 널리 알려지고 유명세를 더할 무렵, 그가 살아 있는 성전이라는 채을 저술하여 범신론 사상을 유포시켜 교회의 장래를 어둡게 하였다. 급기야는 하나님께서 그곳의 발전을 제어시키기 위하여 원인 모를 화재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그가 잘못된 사상으로 빠지게 된 요인 중에는 세상의 인기를 얻고자 노력한 때문이다. 용양소의 분위기를 호텔보다 더 화려하게 꾸몄다. 흰 색깔의 옷, 넥타이, 양말, 흰 신발을 신고 사람들을 모아 놓고 즐거운 강연을 경주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유입하면서 차츰 교회지도자들과 마찰을 일으켰다. 그에게 신경질을 나게 함으로 교회와 거리가 점차 멀어지고 권면을 듣는 것을 소홀히 여기면서 자신의 생각으로 향하여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하나님의 선지자의 권면도 외면하여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영향력의 좋은 것들을 그만 날리고 말았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그가 조금만 인내하여 참고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였다면 당대의 대통령과 헨fl 포드 같은 이에게 재림의 소망을 줄 수 있었다고 회상하였다.
그가 건립한 요양소가 불이 나는 중에서도 후에 다시 세우긴 하였으나 점차 쇠락하고 결국에는 그의 사상을 철회하지 않고 교단을 떠나고 말았다. 부와 명성을 얻은 이에게는 자연적으로 이성 문제로 인한 스캔들이 따르게 마련인 고로, 누구 하나 그를 기억하는 자가 없게 되고 말았다. 하나님은 비록 의료계의 거인인 캘록을 잃었다 해도 요양소 건립은 계속 하나님의 선지자의 지도와 권면 속에서 전진하고 있었다. 켈록이 세운 건물은 지금도 남아 있어 국가에서 회수하여 군인부대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 군부대 당국은 이곳이 그 유명한 켈록이 재림교회의 병원으로 사용되던 흔적을 남겨두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이곳 부대의 현직 사령관인 최고의 책임자의 환대로 시설의 일부를 구경하고 잠간이나마 환담을 주고받았던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