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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州蘇氏(진주소씨)
본관(本貫): 진주(晉州)
시조(始祖): 소백손(蘇伯孫)
유래(由來):
소씨(蘇氏)는 풍이(風夷)의 후손(後孫) 적제축융(赤帝祝融)이 기원전 4241년 풍주 배곡(風州倍谷)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전국토에 무궁화(蘇:부소나무)를 심어 소(蘇)를 성(姓)으로 삼고, 이름을 복해(復解)라 한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한다.
그 후 복해(復解)의 61세손 소풍(蘇豊)이 기원전 2392년 소성(蘇城:지금의 길림성)의 하백(河伯:하백)에 봉해졌고, 그의 69세손 소백손(蘇伯孫)이 신 유(申 有), 진 기(陳 岐) 등과 더불어 진한(辰韓)을 세웠으며, 백손(伯孫)의 29세손 알천은 신라 진덕왕(眞德王) 때 상대등(上大等)을 지내고 660년(태종 무열왕 7) 3월 진주 구시동(九枾洞:지금의 상대동)에 이거(移居), 경(慶)으로 개명(改名)하고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문호(門戶)를 열었다.
소씨(蘇氏)의 본관(本貫)은 진주(晋州), 남원(南原), 진강(鎭江:강화지방) 등 12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모두가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세거 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다.
가문의 중요 인물
소복서(蘇福瑞)
소복서(蘇福瑞)661년(문무왕 1)~742년(경덕왕 1)에 사람이며 신라 효소왕(孝昭王) 때 청주 총관(靑州摠管)을 지냈다.
시조인 각간 경(慶)의 손자이며, 아명은 치자이다.
공은 677년(문무왕 17)에 일직이 화랑이 되었는데, 679년 2월 탐라(지금의 제주도)정벌 때 큰 공을 세웠다. 벼슬은 696년(효소왕 5) 청주 총관을 지냈으며, 707년(성덕왕 6)에 굶주린 백성에게 구휼을 베풀어 선정을 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신임을 받었다.
소억자(蘇億滋)
소억자(蘇億滋)679년(문무왕 19)~739년(효성왕 3)
복서의 아들인 억자(億滋)는 성덕왕(聖德王) 때 한주 총관(漢州摠管)을 역임했다.
청주총관 복서(福瑞)의 아들인 그는 711년(성덕왕 10) 한주 총관을 지내고, 725년(성덕왕 24) 4월 발해에 사신으로 다녀와 외교적인 곡을 세워 그 공을 인정 받았다.
소격달(蘇格達)
891(진성영왕 5)~983(성종 2)
11세손 격달(格達)이 고려 초에 대장군(大將軍)에 오르다.
자는 유달(有達)이고, 호는 모은(募隱), 시호는 강평(康平)이다. 시조 慶의 11세손이며, 강주도독 송의 아들이다.
914년 화랑이 되고, 916년(신덕왕 5) 하동에 증산산성을 쌓아 후백제를 방어한 공으로 하동태수가 되었다.
당시 후삼국의 난세로 925년 왕봉규가 권지강주사가 되어 독립국 행세를 히게 되고, 강주 고을의 향방이 난처해지자 공은 고려에 귀부할 것을 결심하고, 926년(태조 9) 군사 1턴을 거느리고 고려에 들어가 대장군이 되어 태조 왕건의 삼한통합을 도왔다.927년에 태조가 강주(진주)를 공략할 때 이에 참전하여 왕봉규를 멸하고, 934년(태조 17) 태조가 운주를 공략할 때 큰 공을 세웠다.
1054년(문종 8) 12월에 삼한벽상공신 태부에 증직되었다.아들은 진흠(振欽)이며, 5세손 계령의 딸은 헌종비 희순왕후가 되었다.
춯전 (진주소씨 세덕록)
소목(蘇穆)
800년(애장왕 1)~870년(경문왕 10)
청주 도독(靑州都督)을 지낸 소목(穆:시조의 8세손)은 문장이 뛰어나 「역대제왕고(歷代帝王考)」, 「유소국사(有蘇國史)」, 「유당견문기(有唐見聞記)」, 「동이씨족원류(東夷氏族源流)」를 저술(著述)했다.
청주도독 상영의 장자에며, 시호는 희경(僖景)이다.
838년(민애왕 1) 김양의 난을 평정하였고, 후에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위에 열거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소은(蘇恩)
생몰년 미상. 신라 하대 당나라에 파견된 사신. 최치원 ( 崔致遠 )이 왕의 명령을 받들어 지은 〈견숙위학생수령등입조장 遣宿衛學生首領等入朝狀〉에 의하면, 신라 말기에 수창부시랑(守倉部侍郎) 급찬 ( 級飡 ) 김영(金穎)이 하정사 ( 賀正使 )로 당나라에 갈 때 2인의 수령(首領) 중 한 사람으로 김영을 수행하였는데, 이때 기탁(祈卓) 등 8인이 대령(大領)으로서 역시 하정사를 수행하였으며, 함께 간 유학생은 최신지(崔愼之) 등 8인이었다.
그런데 입조장에 의하면 이때 수령으로 파견된 사람은 당나라에 유학한 경험이 있는 자로서 뽑았다고 하므로 소은은 중국 유학생 출신임이 분명하다.
종래 소은이 수령으로서 당나라에 건너간 연대를 최신지의 경력을 역산하여 885년(헌강왕 11)일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입조장의 내용을 여러모로 분석해 볼 때 진성여왕 말년, 혹은 효공왕 즉위 초인 897년 경이 아닐까 짐작되고 있다.
소문(蘇汶)
문장이 뛰어나 「소씨삼대문장(蘇氏三代文章)」으로 일컬어졌다.
소 문 (蘇 汶)은 웅주도독 은의 아들이며, 강주 도독 송의 아우이다.
소목, 소은과 함께 당시 소씨의 삼대문장이라고 칭송을 받았다.공은 도한 947년9(고려 정종 2) 진주 소씨 최초의 대동보인 <동근보)를 발행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로 전해지며, 지금은 그 서문만 남아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대동부는 안동권씨 문중의 족보이다.
소계령
고려 문종(文宗) 때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과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올랐던 계령(繼 :격달의 현손)은 헌종(獻宗)이 즉위하여 딸이 회순왕후(懷純王后:헌종의 비)로 간택되자 국구(國舅)가 되어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져서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소경보(蘇景輔)
소경보(蘇景輔)는 진산부원군 계령의 아들이고, 문하시중 광보의 아우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소광보(蘇光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
소세린(蘇世麟)
세린(世麟)은 문하시중 경보의 아들이고, 이부상서 세기의 아우이며, 시호는 문정9文貞)이다.1147년(의종 1)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냈고, 인종에게 선무팔조(先務八條) 충신효제에의염치(忠信孝悌禮儀廉恥)를 백성에게 가르칠 것을 건의하였다.
소경손(蘇慶遜)
1132년(인종 10)~1196년(명종 26)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올라 무신정치(武臣政治)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 산수를 벗삼아 여생을 보냈다.
수문전 대학사 이관의 아들이며, 시호는 장렬(莊烈)이다.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집권 후 사정의 난을 일으키자 이 난을 평정하고 그 공으로 상장군겸 개성순무사에 올랐다.그 후 추밀원사가 되었으나 무신정치로 조정이 어지럽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소함(蘇涵)
고종(高宗) 때 몽고병(蒙古兵)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호는 월호(月湖)이며, 시조 경의 22세손이고, 무종의 아들이다.고려 때 산원동정을 거쳐 좌우위 상장군에 이르렀으며, 1254년(고종 41) 몽고의 침입 때 2천명의 보졸(步卒)을 거느리고 아모간의 1만 군사와 싸우다 진위에서 순절하였다.
소희철(蘇希哲)
정의대부(政議大夫)로 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에 올랐다.
소문철(蘇文哲)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
자는 군철(君哲)이며, 좌우위상장군 함의 아들이다.일찍이 문과에 올랐으며, 몽고의 침입 때 대군을 맞아 싸우다 아버지 함이 순절하자 이에 격분하여 수많은 적을 죽였다.
후에 정의대부,금오위상장군을 거쳐 상장군이 되었다.
소을경(蘇乙卿)
1325년(충숙왕 12)~1385년(우왕 1)
공민왕(恭愍王) 때 개성윤(開城尹)을 지내며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했다.
판도판서 약우의 아들이다.1350년(충정왕 2)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가 1365년(공민왕 14) 광정대부에 오르고 개성윤이 되었으며, 청백리로 유명하였다.
1370년(공민왕 19) 판도판서를 지냈으나, 잦은 정변과 외침으로 나라가 어지럽자 1374년 진위로 낙향하였다.
출전( 진주소씨 세덕록)
소천(蘇遷)
1352년(공민왕 1)~1396년(태조 5)
정몽주(鄭夢周)의 고제(高弟)로 사재감 소윤(司宰監少尹)을 지낸 소천(遷)은 고려말에 명망을 떨쳤다.
판도판서 을경의 아들이다.
포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1369년(공민왕 18) 문과에 장원하고, 사재감 소윤에 이르렀다.
1392년(공양왕 4)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포은선생이 변을 당하자 전주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출전(진주소씨 세덕록)
소세량(蘇世良)
1476(성종 7)∼1528(중종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원우(元佑), 호는 곤암(困菴)·병암(屛巖). 중군사정(中軍司正) 희(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부판윤 효식(效軾)이고, 아버지는 의빈부도사 자파(自坡)이며, 어머니는 개성왕씨(開城王氏)로 석주(碩珠)의 딸이다.
좌찬성 세양(世讓)의 형이다. 1496년(연산군 2) 생원시를 거쳐 성균관에 들어가 명유(名儒)들과 교유하였으며, 사서삼경은 물론 소설 ( 小說 )· 불경 ( 佛經 )에까지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며 이에 힘입어 문장과 글이 물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1507년(중종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한림원에 들어가 예문관검열에 등용된 뒤 오랫동안 대간 ( 臺諫 )·시종(侍從)으로 시강(侍講)하였으며, 주서(奏書)와 상소는 거의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1516년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부임, 백성을 사랑하고 가혹한 형벌을 금하고 서리들의 기강을 쇄신하여 칭송을 받았다.
4년 후 홍문관수찬, 사헌부의 지평·장령, 홍문관의 ·응교·직제학 등을 거쳐 1522년 사간· 좌부승지 ( 左副承旨 )· 동부승지 ( 同副承旨 ) 등을 역임하였다. 1524년 대사간에 승진되었다가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남원부사를 자원하였다. 이때 과중한 업무로 인하여 임지에서 죽었다.
그는 평생 글을 좋아하여 가산은 돌보지 않았으며 효우(孝友)하였고 향리(鄕里)의 후배를 양성하여 크게 교화하였다. 익산(益山)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병암집 屛巖集≫ 1권이 있다.
소세양(蘇世讓)
1486(성종 17)∼1562(명종 1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퇴재(退齋)·퇴휴당(退休堂). 중군사정(中軍司正) 희(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효식(效軾)이고, 아버지는 의빈부도사 자파(自坡)이다. 어머니는 개성왕씨(開城王氏)로 석주(碩珠)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 진사시에 이어 1509년(중종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언을 거쳐 수찬에 재직 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 顯德王后 )의 복위를 건의, 현릉 ( 顯陵 )에 이장하게 하였다. 1514년 사가독서 ( 賜暇讀書 )를 했고, 직제학을 거쳐 사성이 되었다. 1521년 영접사(迎接使) 이행 ( 李荇 )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았고, 그 뒤 왕자사부 ( 王子師傅 ) 등을 지냈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나, 1530년 왜구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했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형조판서 등을 거쳐 1533년 지중추부사에 올라 진하사 ( 進賀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37년 형조·호조·병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다.
이듬해 성주사고 ( 星州史庫 )가 불타자 왕명에 따라 춘추관 ( 春秋館 )의 실록을 등사, 봉안하였다. 1545년(인종 1) 윤임 ( 尹任 ) 일파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이 해 명종이 즉위한 뒤 을사사화로 윤임 등이 몰락하자 재기용되어 좌찬성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익산에 은퇴하였다.
문명이 높고 율시 ( 律詩 )에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익산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양곡집 陽谷集≫이 있으며, 글씨는 양주에 임참찬권비(任參贊權碑)와 소세량부인묘갈(蘇世良夫人墓碣)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소세영(蘇世榮)
1486년(성종 17)~1553년9명종 8)
상원 군수(祥原郡守)로 부임하여 국민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었던 세영(世榮:자언의 아들)은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다.
자는 화정(和政), 호는 계전(桂田)이며, 홍문관 대제학 현손의 손자이고, 자언의 아들이다.
1540년(중종 35) 조산대부,상원군수로 부임하여 문무를 권장하고 군민을 사랑하여 농업과 산업을 권장, 군민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니, 이를 기리는 선정비가 세워졌다.1699년(숙종 25) 상원 대덕서원에 제향되었다.
소상진(蘇尙眞)
1548년(명종 3)~1592년(선조 25)
상진(尙眞)은 임진왜란 때 성주(星州)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조선의 의병으로 보성 출신이며, 자는 실보(實甫), 호는 서암(書庵)이다
.신라 각간 경의 33세손이며, 옥연포 만호 규의 장남이다.
19세때 현령 남평인 문준(文準)의 딸과 결혼하였고, 다년간 병서를 읽고 무예를 연마하여 담약과 용력을 겸전하여 통훈대부 사재감 주부에 제수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달천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연히 일어나, 근왕하기 위해 필마단창으로 상경하던 도중 전주에서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을 만나 의병을 모집한 후 그와 같이 영남으로 내려갔다. 진보군수 임계영이 의병을 일으켜 분전한다는 말을 듣고 그와 합세하여 임게영이 우의장, 장윤이 부장, 그가 별장이 되었다.
그는 항상 홍의를 입고 선두에서 돌격하여 연전연승하니, 왜적이 옹의만 보면 홍의장군이 나타났다고 하며 겁에 질려 그의 예봉을 피해 달아났다.
부장 장윤이 그의 용맹을 보고 아끼면서 "나라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의병 뿐이요, 의병이 믿는 것은 장군 밖에 없으니, 자중하여 목숨을 보전하기 바라오."하자 "장부가 전지에서 어찌 죽음을 두려워 하리오.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나의 듯이오."라고 대답하였다.
그 해 12월 13일 성주 싸움에서 불과 의병 백여명으로 천여명의 적을 상대하여 분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당하지 못하고 장병이 후퇴하려 하자 "적을 보고 피하는 자 어찌 의병이라 하랴."고 외치며 혼자 적진에 뛰어 들어가 좌충우돌 무수한 적을 베니, 아군의 사기가 충천하여 승세를 굳혔으나 패주하는 적장 모리휘원을 추격하다가 적탄을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조정에서 공의 숭고한 정충보국의 정신을 가상히 여겨 통정대부 예조참의에 증직하였고, 나주의 정렬사에 배향하였다.1978년 여러 후손들이 발의하여 국가의 보조와 문중의 협조로 이를 중수하고, 군수가 사적비를 세웠다.
소제(蘇濟)
1551년 ~1593년(선조 26)
진주성(晋州城)에서 왜병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가서 성을 지키다가 순절하였다.
조선의 의병이고 자는 경즙(景楫), 호는 적은(迪隱)이며, 직장 연의 6대손이고 인세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용력이 비범해서 활쏘기와 말달리기를 좋아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아버지가 병으로 위중하자 약을 구하러 3백리 길을 하루 사이에 다녀 와 달여 드려서 수개월을 연명시키기도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로 피난한 가운데 동복현감 황진(黃進)이 병졸을 이끌고 남원을 지날 때 백의로 왕진의 군문에 들어가니 황진이 기꺼이 맞아들여 병마 한 부대를 주었다.
그는 군중 앞에서 칼을 어루만지며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을 다짐하자 장졸이 모두 울었다 한다.황진과 함게 진안 방면에 들어 온 적을 무찌르고, 7월에 전주에 침입한 적을 맞아 싸워서 대승하였다.금산에 있는 적이 쳐들어올 기미가 보이자 공시억, 위대기, 황박 등과 함께 진산 이현에서 주야로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대파하여 물리쳤다.
그 때 공은 많은 상처를 입어 온 몸이 피로 물들었으나 30여 적을 베었다 한다.이듬해 봄에 김천일, 최경희, 이종인, 황진과 함께 진주에 가서 성을 수비하다가 6월 19일 적이 단성, 곤양, 사천 등지를 차단하고 진주를 향해 쳐들어오니 아군은 고립되고 적세는 산과 들을 메웠다. 매일같이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비오는 듯한 적탄에 맞아 기절하여 땅바닥에 쓰러진 적도 많았다.
28일 왜적이 땅 밑으로 굴을 파고 쳐들어오니 힘을 다해 싸워도 사태는 불리하였다. 그는 탈출 못 할 것을 직감하고 일기장 끝머리에 "死"자를 써서 짚신과 함께 말에 실려 내몰았다.
그 이튿날 성은 함락되고 황진, 김천일, 최경희, 고종후 등이 차례로 죽고 공도 적탄에 맞아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7월 2일 말이 호초일기와 짚신 한짝을 싣고 돌아왔으므로 초혼장이 거행되었다.한성부 주부에 추증되었으며, 1788년9정조 12) 정문의 은전이 내려졌고, 금성 장렬사, 금산의 대첩단에 제향되었으며, 금산 금곡에 비가 세워졌다.
소동(蘇仝)
행진(行震:진산의 이현 싸움에서 순절)의 아들 소동(仝)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순절했다.
소영복(蘇永福)
1555(명종 10) ∼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중수(重綏), 호는 사은(四隱). 익산 출신. 대사간 세량(世良)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현감 민선(敏善)이다. 서윤 ( 庶尹 ) 응선(膺善)에게 입양되었다. 김은휘(金殷輝)의 문인이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된 뒤 성균관에 들어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혼 ( 成渾 )으로부터 출사할 것을 여러 번 권유받았으나 학문이 미진함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의 사람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용화산 ( 龍華山 )에 작은 성을 쌓아 향토 방위에 참여했으며, 난 후 국정 전반에 관한 시무책 ( 時務策 )을 조정에 올려 가납(嘉納)되기도 하였다.
1601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수천 권의 서책 속에 묻혀 후진 교육에 진력하였다. 1605년 김장생 ( 金長生 )이 익산군수로 있을 때 매번 그의 방문을 받아 군정자문(郡政諮問)에 응하였다.
이와 아울러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경전(經典) · 사서(史書) 등 귀중한 전적 ( 典籍 )들을 나라에 기증하여 궁중의 비서각( 煉 書閣)에 비치하도록 하기도 했다. 그 무렵 향리 일대가 한해로 매년 흉년을 겪게 되자 40여 리에 달하는 수로 건설을 건의, 농민 생활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경학(經學)뿐만 아니라, 천문 · 지리 · 의복(醫卜) · 병법(兵法) · 관방(關防) 등에 이르기까지 널리 통했으며, 성혼에게 종유(從遊 ; 좇아 사귐.)하는 한편, 조헌 ( 趙憲 ) · 정경세 ( 鄭經世 ) · 한백겸 ( 韓百謙 ) · 황신 ( 黃愼 ) 등과의 친교가 두터웠다.
광해군 때 조카 명국(鳴國)이 대북 · 소북간의 당쟁에 관여, 몰락하자 이에 연좌되어 대명(待命) 중에 질병을 얻어 죽었다.
소동도(蘇東道)
1592(선조 25)∼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자유(子由), 호는 면와(眠窩). 전라북도 익산 출신. 첨사 세공(世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사 건(建)이고, 아버지는 찰방 만선(萬善)이다. 1617년(광해군 9)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광해군 때는 벼슬하지 않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서인 ( 西人 )이 집권하자 163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에 보직된 뒤 1646년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나 곧 면직되었다. 이듬해 평안도 은산부사를 지내고 정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었다. 이어 암행어사로서 민정과 수령의 치적을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1650년(효종 1) 의주부윤이 되어 호란 후 피폐하여진 민생을 구제하고 국방과 영선사업에 힘썼다. 뒤에 경주부윤을 거쳐 165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수령전최(守令殿最 : 근무 성적의 평가)에 공정을 기하였다. 익산지방의 대표적인 명문출신으로 성리학적 실천윤리를 몸소 실천하였으며, 화암서원 ( 花巖書院 )에 제향되었다.
소응무(蘇應武)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순절.
소두산(蘇斗山)
1627(인조 5) ∼ 1693(숙종 1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망여(望如), 호는 월주(月洲). 건(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억선(億善)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 同知中樞府事 ) 동명(東鳴)이다. 송시열 ( 宋時烈 )의 문인이다.
1652년(효종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60년(현종 1) 식년문과에 장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1663년 사간원정언 ·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직언 때문에 권신의 비위에 거슬려 외직으로 전전하였다. 1672년 나주목사로 있을 때 진휼책을 잘한 공로로 수상하였다.
1675년(숙종 1) 제주목사, 1681년에 강릉부사 · 의주부윤 · 함경북도병마절도사 · 동래부사 · 공홍도관찰사(公洪道觀察使) · 공홍도수군절도사 등을 거쳐 1688년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듬해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 울분 끝에 병사하였다.
중요 외직(外職)을 역임할 때마다 남인들로부터 “ 권신들에 부탁하여 여러 번 고을을 다스리며 탐학(貪虐)을 자행하였다. ” 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서인집권하에서도 대간으로부터 처신이 근신하지 못하여 공의(公議)에 버림받았고, 향촌에 있을때는 무단(武斷), 수령 재임 때에는 탐관오리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의 시문은 ≪ 월주집 ≫ 에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소진형(蘇鎭亨)
1885(고종 22)∼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논산 출신. 1919년 대한광복회 ( 大韓光復會 ) 간부인 우이견(禹利見)·권영만(權寧萬)·이재환(李載煥) 등과 협의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송금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충청남도지역의 부호를 조사한 뒤 군자금납부요구서와 이에 불응할 때에는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의 문서 19통을 작성하여 발송하였다.
그 뒤 수금된 자금 2,000원을 임시정부 특파원 김규일(金圭一)에게 주어 송금하도록 하였으며, 1920년 경신학교 ( 儆新學校 )에서 임시정부 후원단체인 독립주비단(獨立籌備團)을 조직하고 그 해 음력 9월에 이 단의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그 뒤 임시정부로부터 독립공채를 받아 이를 각지의 부호들에게 배부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 임시정부가 발행하는 각종의 독립운동 관계문서를 인수하여 이를 배포함으로써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1920년 일본경찰에 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언도받았다. 1982년 건국표창,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소휘옥(蘇輝玉), 소진우(蘇鎭佑),소천술(蘇千述),소휘태(蘇輝泰)
한말(韓末)에 구국의 충정(忠貞)으로 항일투쟁에 앞장서서 의절(義節)의 가문(家門)인 진주 소씨를 더욱 빛냈다.
蘇斗山(소두산) 선생의 일화.
고전적을 바준 소두산
고전적은 현종 때 이호동(梨湖洞)에서 자란 사람으로 명도(明道)의 문하에서 배워 풍수지리에 통달했던 인물이라 한다.
그러나 그는 서자 태생이어서 명도에게까지도 서자의 차별을 받았다. 뒤에 명도가 죽자 묘터로 좋지 못한 자리에 자리를 잡아 그를 장사지내게 하였다.
지리에 신안(神眼)을 가진 고전적이 골랐으니 누구도 탓하지 않았지만 동문인 소두산(蘇斗山)이 목사로 와서 이를 알고는 고전적을 하옥시켰다.
그러나 얼마 뒤 소목사가 인통을 세 번 떨어뜨리는 꿈을 꾸었는데, 이를 해몽할 수 있는 사람은 고전적밖에 없었다. 그 해몽으로 인해 소목사는 크게 출세를 하게 되어 그 보답으로 고전적에게 전적이라는 벼슬을 주게 되었다.
蘇奏(소주)의 결심
소진(蘇奏)이라는 변설가(辯좀家)가 있었다.
자(字)는 이자(李子)라고 하였으며 동주(東周)의 사람으로서 , 동쪽에 있는 제 (齊)나라에 가서 귀곡(鬼谷) 선생의 제자가 되었다. 종횡자재의 변재를 배우고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관직에 나가기를 구했었다. 그러나 오륙년이 지나도, 남이 알아주기는 고사하고, 방황하느라고 많은 여비만 소비 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가친척들까지 몰래 소진을 비웃으면서
「주(周)의 사람은 옛부터 모두 산업(産業)에 종사하여 벌이를 한다든지 또는직공이나 장사를 하면서 세금을 내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는 본업을 버리고 단지 의론(議論)이나 변설만을 일삼고 있으니 생활이 어려움은 무리가 아니야.」
라고 그를 비난했으며, 아내나 형수는 베를 짜면서 얼어나 마중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소진은 야속한 세상인심을 대하고는 심한 분노와 두려움을 절감하면서, 방에서 나오지 않고, 책만 뒤적이며 독백하였다.
「이제껏 많은 책을 읽었지만, 아무 일이건 이룩한 것이 없다면 만 권의 서적을 읽은들 아무 소용도 없구나.」
깊이 느낀 바 있어서 마침내 처박아 두였던 주서(周書) 태공망(太公望)의 비결인 병서(兵書) 만을 숙독 연구하였다.
일 년이 지나서야 겨우 이치를 해독하고, 왕의 사정을 헤아리고, 가깝게 하여 이야기 할 수 있는 요령을 터득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췌마(揣摩)의 일편(一篇)을 저술하고는,
「이것만 있으면 반드시 당시 부국강병을 바라는 국왕들에게 절대 필요한 지침서가 되리라.」
혼자 자부하고는 곧 주(周) 나라 현왕(顯王)을 찾아갔다.
그러나 현왕을 모시는 신하들은 일찍이 소진의 성장과 行蹟(행적)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무턱대고 그의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다시금 진(奏)나라에 가서 혜왕(惠王)을 만났으나 왕은 상앙(商央)을 죽인 뒤라 변사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등용되지 못했다.
다시금 조(趙) 또는 연(燕))나라에 일 년간 머물면 서 왕을 만났고, 계속해서 제(齊), 위(魏)나라 왕에게 합종(合從)의 계략을 강의하여 드디어 성공을 거두었다.
마침내 제 나라의 승상(丞相)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전에 본체도 않던 형수가 이미 알고 멀리까지 마중 나왔다.
소진은 쓴 웃음을 지으며
「전날에는 나를 보고 베틀에서 일어나지도 않더니, 오늘 육십리 밖에까지 마중 나온 것은 무슨 뜻인지요.」
라고 물으니 형수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지금 여섯 나라의 벼슬을 갖고 돌아왔으니 명성을 천하에 떨치고 조상의 이름을 드높혔으므로 마중 나온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소진은
「지금 이렇게 금의환향할 수 있는 것은 지난 날 형수께서 나를 몹시 부끄럽게 하였으므로, 다시금 결심하게 한 연유이지요.」
라고 오히려 사의를 표하였다는 것이었다.
출전<불교설화집 정두서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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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하민족대성보>
항렬(行列)
세 | 항렬자 | 세 | 항렬자 | 세 | 항렬자 |
48 | 在(재) | 55 | 洪(홍) | 62 | 炯(형) |
49 | 鎬(호) | 56 | 根(근) | 63 | 載(재) |
50 | 淳(순) | 57 | 熙(희) | 64 | 鉉(현) |
51 | 秀(수) | 58 | 基(기) | 65 | 洛(락) |
52 | 炅(경) | 59 | 鎔(용) | 66 | 東(동) |
53 | 均(균) | 60 | 海(해) | 67 | 煥(환) |
54 | 鐘(종) | 61 | 相(상) | 68 | 坰(경) |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진주 소씨(晋州蘇氏)는 남한(南韓)에 총 9,191가구, 38,85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자료들은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아래글 출처 진주소씨 대종회
곤오공 소풍의 내력
1) 소풍의 내력
소풍(蘇豊)의 아버지는 육종(陸終)이니 전욱(顓頊) 고양씨(高陽氏)의 고손자(高孫子)이다. 육종이 귀방씨(鬼方氏)의 누이 여귀(女貴)와 결혼하여 6형제를 낳았는데 그 장자(長子)는 풍(豊)이고 요동근처(遼東近處)인 난하유역(灤河流域)에 거주하여 호를 곤오(昆吾)라 하고 성씨(姓氏)를 기씨(己氏)라 하였다. (BC. 2417년생)
부소보(扶蘇譜:1320년간) 상상계(上上系)에 기록되기를 곤오씨인 소풍이 제곡(帝嚳) 고신씨(高辛氏)가 폭정함으로 불함산(弗咸山:백두산) 북쪽으로 이주하였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중국의 조상으로 알려졌던 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의 삼황(三皇)과 황제(黃帝軒轅氏)의 후손인 소호(少昊) 금천씨(金天氏), 전욱(顓頊) 고양씨(高陽氏), 제욱(帝頊) 고신씨(高辛氏), 제요(帝堯:요임금) 제순(帝舜:순임금:순(舜)은 부소(扶蘇)와 같이 무궁화이다. 오제(五帝) 등은 최근 연구에서 중국사(中國史)에 한국인(韓國人)으로 밝혀졌다. 이른바 삼황오제가 한국인이라는 것은 공자, 맹자는 물론 현재 대만(臺灣) 학자들의 역사연구 저서에 밝혀져 있을 뿐 아니라 은(殷)나라 문화를 대표하는 갑골문자(甲骨文字)의 기록이 또한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한편 상계보에 기록된 동숙신(東肅愼)은 단군조선의 전신일 뿐 아니라, 이 동숙신과 삼성오제(三星五帝)의 나라 서숙신(西肅愼)이란 국명에서 동국(東國)이라는 말이 유래한 듯하고 예부터 우리나라를 동국이라 하였으니 그 까닭은 한국의 중심지는 현중국(現中國)의 산동성(山東省:여기에 단군신화의 원형같은 동이족의 신화유적이 있다)이고 여기에 만주와 한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부소보(扶蘇譜)에 기록되기를 BC. 2392년 홍제 8년에 고신씨가 쳐들어 왔기 때문에 소풍이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어 수동(綬東) 들에서 이들을 격퇴하는 큰 공을 세웠다. 홍제가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소풍을 소성에 봉하여 하백(河伯)이라 하니 일명 하백(夏伯)이고 묘호(廟號)는 태하공이다.
소성(蘇城)은 일명 남소(南蘇:고구려의 남소성)라 했고 이곳을 지나는 강 이름을 소밀하(蘇密河)라 하니 만주 송화강(松花江)이고 단군이 도읍(都邑)했던 길림성(吉林省)에 가깝다. 소성(참고:태안(泰安)의 옛이름도 소성(蘇城) 또는 소태(蘇泰)이다)을 또한 부소갑(참고:개성의 옛이름도 부소갑(扶蘇岬)이다)이라 하니 또는 비서갑(非西岬), 비서갑(匪西岬)이라고도 쓴다. 부소(扶蘇) 비서(非西) 비소(匪蘇)는 모두 소(蘇)의 우리말로 새벽 또는 서울(京)의 뜻으로 생각된다. 하백의 묘는 소성에 있으니 소풍의 기록은 환국사 단군고기에 실려있다.
하백 소풍은 견이(畎夷)의 딸인 유정(有姃)과 결혼하니 견이는 동구이중의 한 갈래이고 그의 어머니 여귀도 견이의 후손이고 견이의 한 갈래가 흉노족(凶奴族)이 되었다. 흉노족은 유럽에서는 Hun족으로 불렀고 고구려의 원족으로 생각된다.
이들 고구려족이 무서워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것이 서양학자들의 견해이고 이들이 중국을 넘보기 어렵자 서진하여 German족(서양족)을 내쫓고 핀란드, 헝가리 등의 나라가 되었다. 이들에게 쫓긴 게르만족이 이후에 영국, 프랑스 등 중세 유럽국가가 되었다.
하백은 유정(有姃)사이에서 장자 갑(岬:부공), 차자 환(桓), 삼자 흘(紇)은 중원으로 나아가 서소국(西蘇國:有蘇氏)을 세웠다.
장자 갑이 구수(句秀:仁公), 일청(一淸:弘公)과 딸 정아(靖妸)를 낳으니 이가 단군의 황후(皇后)이다.
2) 부소갑 하백 소갑의 내력
부소갑(扶蘇岬)은 소풍(蘇豊)의 영지(領地) 소성(蘇城)의 다른 이름이고 하백(河伯)이란 소성을 다스리는 제후를 총칭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풍이 최초의 하백(河伯)이고 그 아들 갑(岬), 손자 구수(句秀), 일청(一淸), 등이 모두 하백이라 하였다. 부소보상(扶蘇譜上)에 나타난 적제(赤帝)를 보면 적제 복해(復解), 적제 부통(扶統), 적제 화인(和仁), 적제 밀유(密由), 적제로 불린 자가 4명이 나온다.
삼황오제(三皇五帝)중 태호(太昊) 복희씨(伏羲氏)의 나라는 16대나 계속 되었는데 모두 태호씨이고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는 8대나 계속 되었는데, 모두 염제이다. 하백도 이와 같아서 묘호(廟號)나 휘(諱)는 각각 다를 지라도 모두 하백(河伯)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풍(豊)도 갑(岬)도 구수(句秀)도 모두 하백(河伯)이다. 일본 역대왕을 천황(天皇)이라는 이치와 같다.
하백(河伯) 갑(岬)은 단군기록(檀君記錄)에 나오는 부소갑(扶蘇岬) 하백을 말하니 바로 단군(檀君)의 장인이다. 부소보의 갑(岬)공 딸이 정아(靖妸 ; 일명 마니)이고 부소신모(扶蘇神母)라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진주소씨 시조 소경(초휘:알천) 상대등공 유사
(晉州蘇氏 始祖 蘇慶(初諱:閼川) 上大等公 遺事)
공(公)의 휘(諱)는 경(慶)이요 초휘(初諱)는 알천(閼川)이시고 진주소씨 시조(晉州蘇氏 始祖) 이시다. 공(公)은 단기 2910년(서기 577년) 정유(丁酉) 5월 6일 신라국 제25대 진지왕(眞智王) 2년에 아찬(阿?) 휘 휴곤(休昆: 初諱는 武殷)의 다섯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차남은 조부령(調部令)이신 휘 태호(太乎)이시고 삼남은 신라 고승 원광법사(圓光法師)로부터 화랑도와 신라인의 중심사상이 된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받으시고 부친을 따라 백제 침공을 막다가 아막성(阿莫城)에서 친구 추항(?項)과 같이 전사하신 내마(奈麻) 휘 귀산(貴山)이시고, 사남은 창부령(倉部令)이신 휘 외사부(外斯夫)이시며, 오남은 휘 문우(文于)이시다. 공(公)은 태어나시면서 부터 풍체가 당당하고 영특하시어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모았고 국선(國仙)이 되신 후에 더욱 낭도(郎徒)들을 잘 인솔하고 성원을 받았으며 무예와 지식을 닦으면서 성장 후 군사에 편입되어 전장에 나아가 싸우면서 승진하였다.
휘 알천(閼川)의 청장년 시기는 실로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삼국이 영토 확장을 꾀하여 변방은 항시 전쟁이 연속되었고, 특히 백제 무왕(武王) 재위 41년과 의자왕(義慈王) 재위 20년간은 끊임없이 신라를 괴롭혔고 고구려 또한 변방 침공이 잦았다.
신라에서는 알천(閼川)장군, 용춘(龍春)장군, 필탄(弼呑)장군 등 많은 장군들에게 외침(外侵)이 있을 때 마다 군사를 주어 해당 성주(城主)와 더불어 싸우게 하였다. 2969년(서기 636년) 5월 선덕여왕(善德女王) 5년에 백제대군이 독산성(獨山城)을 침공할 때 알천(閼川)장군이 이끄는 신라군은 백제군을 맞아 크게 승리하였고, 백제군은 우소(于召)장군이 포로가 되는 등 많은 손실을 입고 패퇴하였다.
선덕여왕(善德女王)은 이같이 충성스럽고 치밀하며 합리적이고 과감한 공(公)을 대장군(大將軍)으로 보(補)하고 각 전장을 통솔토록 하였으며, 한편 2971년(서기 638년) 고구려병이 칠중성(七重城 : 積城)을 침공할 때는 공(公)이 친히 장병을 이끌고 나아가 고구려병을 물리쳤다.
같은 시기에 선덕여왕(善德女王)은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서 개구리 소리가 요란하자 이를 듣고 백제군이 침공하기 위하여 매복하고 있음을 판단하고 알천(閼川)장군으로 하여금 여근곡(女根谷 : 五峰山 富山下 溪谷)에 가서 숨어 있는 백제군을 토벌하라고 명하여 공(公)은 이를 섬멸한 후 후속부대까지 패퇴시키고 돌아와 알천장군은 선덕여왕에게 어떻게 그리 자세히 알고 계셨는가? 고 물으니 왕은 여근곡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여 주시니 이 대담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그후 공(公)은 각간(角干)직과 이찬(伊?) 벼슬에 올라 내정에 적극 참여 하였으며 2980년(서기 647년) 정미(丁未) 2월에는 신라 최고관직(新羅 最高官職)인 상대등(上大等)에 오르시고 귀족회의(貴族會議 : 和白) 의장이 되시니 당시 회백회의 임원은 임종공(林宗公), 술천공(述川公), 호림공(虎林公), 염장공(廉長公), 유신공(庾信公)이었다.
2987년(서기 654년)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L 재위 8년)이 승하(昇遐)하시자 조정 군신들은 모두 공(公)에게 왕위(王位)에 올라 섭정(攝政)하여 주실 것을 간청(懇請)하였으나 공(公)은 이를 완곡(婉曲)히 물리치고 “신(臣)은 이미 늙었으며 또한 덕행이 일컬을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춘추(春秋)공은 국세(國勢)의 덕망(德望)이 숭중(崇重)하고 제세(濟世)의 영걸(英傑)이다”라고 춘추공을 추천하여 왕위를 권하였으나 사양하다가 알천공(閼川公)의 강력한 권유(勸誘)에 의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곧 후에 삼국(三國)을 통일(統一)한 신라 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시다.
그후 무열왕(武烈王)은 2989년(서기 656년)에 알천공(閼川公)의 국가에 대한 공로(功勞)를 가상(嘉賞)하고 자신(自身)을 왕위에 오르도록 한 감사의뜻을 모아 공(公)의 24대 조(祖)이신 소벌공(蘇伐公)을 문열왕(文烈王)으로 추봉하였다. 이때 공(公)은 연로(年老)하여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더불어 여생을 보낼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공(公)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師今)의 14세손이고 상대등 총지국사장(上大等 摠知國事長) 선(宣)의 딸인 영아부인 박씨(玲阿夫人 朴氏)와 혼인하여 일자(一子)를 두었으니 이가 곧 휘 이벌(諱 利伐, 호는 山史, 改諱 : 老欣)이시고 이벌공은 예부령(禮部令) 경태(京太)의 딸인 이우부인 석씨(利雨夫人 昔氏)와 혼인하였으나 늙도록 후사가 없어 서로가 개탄(慨歎)하고 있을 때 하루는 공(公)의 꿈에 소벌공(蘇伐公)이 나타나 현몽(現夢)하시기를 “그대가 도사곡(塗斯谷)으로 이거 하면 가히 구치자(九將軍)을 얻으리라”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아부인 박씨와 자부 이우부인 석씨도 이상동몽(異床同夢)이었으니 이는 필시 조상(祖上)의 계시(啓示)라 생각하고 2991년(서기 658년) 무오(戊午)년 가을 청강(菁江:南江)에 이르러 사방을 살펴보니 꿈의 계시대로 감나무 가지가 아홉 개이고 그 감나무(九?木) 밑 그릇에 새겨진 글자가 “이곳은 구치자가 날곳이요 후세에 반드시 20여명의 장수와 재상이 나올 땅이다”라는 내용을 보고 공(公)은 그곳에 집을 지어 2993년(서기660년) 3월 3일에 이사하고 이곳을 도사곡(塗斯谷)이라 이름하였고, 이사 후 손자 휘 복서(福瑞)을 얻으시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집안의 경사를 맞게 되어 공(公)은 존함(尊啣)을 경사경(慶)자로 개휘하였고 공(公)의 독자 이벌(利伐)은 노년에 얻은 기쁨으로 역시 존함을 노흔(老欣)으로 개휘하였다.
그후 노흔공은 이남 복상(福祥)과 삼남 복정(福廷)등 삼형제를 두시었고 후일 이곳을 도사곡에서 소경의 존함을 따서 소경동(蘇慶洞)이라고 하였다가 다시 벼슬 이름을 따서 상대동(上大洞)으로 바꾸었으니 현재도 이곳이 진주시 상대동이다.
그후 손자인 3세 휘 복서(福瑞)는 국선(國仙)을 거쳐 청주총관(菁州摠管)이 되시고, 4세 휘 억자(億子)는 한주총관(漢州摠管), 5세 휘 후준(後俊)은 상주총관(尙州摠管), 6세 휘 검백(劍白)은 웅주도독(熊州都督)이 되셨고, 7세 휘 상영(尙榮)은 청주도독(菁州都督), 8세 휘 목(穆)도 청주도독(菁州都督), 9세 휘 은(恩)은 웅주도독(熊州都督), 10세 휘 송(淞)은 강주도독(康州都督), 11세 휘 격달(格達)은 하동태수(河東太守)을 거쳐 고려국(高麗國) 대장군(大將軍)이 되시었다.
공(公)이 도사곡으로 이사하신 후 9대 9장군이 이어 나왔으니 이는 구시목(九?木)의 은덕으로 기리고 있다. 공(公)은 손자 삼형제(三兄弟)와 더불어 화락(和樂)한 노년을 보내시다가 3019년(서기 686년) 10월 12일 조용히 유명(幽明)을 달리 하시니 수(壽)는 백십세(百十歲)이시다.
묘지(墓地)는 진주시 상대동 선학산록(仙鶴山麓)에 있고 대각간(大角干) 김인문(金仁問)이 비문(碑文)을 썼으나 보존되지 못하고 유실(遺失)되어 4310년(서기 1977년) 전국 종친회에서 재건비(再建碑)하고 예장석(禮葬石)과 조경(造景)을 하였으며 4322년(서기 1989년) 월훈석(月暈石)등으로 묘소를 개수 조경하였다.
진주소씨는 상계(上系)가 확실하여 시조(始祖) 휘 경(慶)으로부터 24대조가 신라국(新羅國) 창건(創建)시 초대왕인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양육한 소벌공(蘇伐公)이시고, 28대조가 후진한(後辰韓) 주이신 백손공(伯孫公 : 辰公)이시며, 그 이상 상상계(上上系)로 96대조가 태하공(太夏公 : 豊公)에 이르는 상상계원류계도(上上系源流圖)를 가진 오래된 토성(土姓)중의 하나이다.
진주소씨 시조(晉州蘇氏 始祖) 신라국 상대등(新羅國 上大等) 소알천(蘇閼川=蘇慶)공 가문
작 성 자 운영자 작 성 일 2009-09-12 02:11:10
요즘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주요 인물로 알천랑에 대해 네티즌은 물론 시청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 동안 알천랑에 대해 잘모르고 있던 세상사람들이 극중에서 카리스마 넘치고 대역배우인 이승효군의 분장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면서 실존인물인지 가공의 인물인지 궁금해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대하여 지식인 코너 및 기타 인터넷 창에 답변형식을 통하여 공개기록을 했었습니다.
또한 이미 진주소씨 홈페이지와 씨족 카페에 소알천(蘇閼川)공에 대한 유사(遺事)가 올려져 있었지만 그 정보를 접하지 못했다가 탤런트 겸 배우인 소지섭이 알천랑의 후손인지 아닌지에 대해 갑론을박하였고, 그 과정에서 진주소씨대종회에서는 기자들의 질문에 소지섭은 알천랑의 47세손이 확실하다는 증명과 함께 같은 배우 소유진양과 가수 소명씨, SBS방송의 찬란한유산 연출자 소현경, MBC방송의 에덴의 동쪽 연출자 소원영씨도 알천공의 후손임을 확인 해주었습니다.
하여 그 이후 공개된 정보에 의해 대다수 사람들은 소알천공은 진주소씨 시조로 알고 있지만 일부 네티즌과 시청자는 아직도 우리 시조이신 할아버지 가문(가계)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것 같아 다시 한 번 알천(경)공에 대한 조상과 후손에 대하여 공개합니다. 아울러 시간이 허락되는대로 단계별 시대별로 공개하려 하니 잘 헤아려 이해하시고 각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진주소씨대종회 종사관리 위원장 소태섭 배
진주소씨 시조(晉州蘇氏 始祖) 신라국 상대등(新羅國 上大等) 소알천(蘇閼川=蘇慶)공 가문
진주소씨 시조 소알천(蘇閼川=蘇慶)공은 아버지 아찬(阿飡) 소휴곤(蘇休昆:初諱 蘇武殷)공과 가미노부인(加美老夫人) 사이에서 서기 577년 신라 진지왕(眞智王) 2년 5월 6일 경주 사량부(沙梁部)에서 탄생하여 서기 686년 신문왕(神文王) 6년 10월 12일 진주 구시동(현 상대동)에서 서거(逝去)하시기까지 110세의 천수(天壽)를 누리셨다.
알천공은 아달라이사금(阿達羅抳師今)의 14세손이고 상대등 총지국사장(上大等 摠知國事長) 박선(朴宣)공의 따님인 영아부인 박씨(玲阿夫人 朴氏)와 혼인하여 자식 한 명을 두었으니 이가 곧 소이벌(蘇利伐 :호는 山史, 改諱:老欣)공이고, 독자 이벌(利伐)공은 예부령(禮部令) 석경태(昔京太)공의 따님인 이우부인 석씨(利雨夫人 昔氏)와 혼인하였다.
알천공께서는 화랑(花郞), 국선(國仙)을 거쳐 장군(將軍)과 대장군(大將軍), 이찬(伊飡), 각간(角干)으로써 충성을 다하고 문무(文武)를 겸비한 일인지하 만인재상인 상대등(上大等)으로 재임 중 서기 654년에 진덕여왕(眞德女王) 등극 8년만에 승하를 맞는다.
화백회의 의장인 공은 군신들의 결의로 왕위에 추대 받았으나 사양하고, 김춘추(金春秋)공을 추대하여 신라왕으로 등극시키니 소벌도리(蘇伐都利)공이 박혁거세대왕을 신라국 초대왕으로 등극시킨 이후 두 번째로 신라천년사직(新羅千年社稷)을 반석위에 올려놓게 되었다.
그 공적으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金春秋)은 소벌도리공을 문열왕(文烈王)으로 봉하였다. 이유는 상대등 소알천(소경)공의 신라에 대한 충성과 공적이 가히 박혁거세거서간(朴赫居世居西干:弗矩內)을 신라 초대왕인 국조로 세운 소벌도리공과 같기 때문이었다.
소벌도리공께서 문열왕으로 추대받던 날 밤, 알천공은 영아부인 박씨(玲阿夫人 朴氏)와 며느리 이우부인 석씨가 이상동몽으로 소벌도리공께서 꿈에 나타나 도사곡에 구시목이 있는곳(현재 진주시 상대동)으로 이거(移居)를 하게 되면 후손을 이을 것이며 구치자(九豸者:九將軍)를 얻을 것이란 현몽을 하게 된다.
현몽대로 660년 3월 3일 삼짇날 진주 구시동으로 이거하여 진주를 관향으로 하는 진주소씨의 문호를 열게 되는 계기가 되고, 상대등 알천공은 천복(天福)을 받아 독자 소이벌(蘇利伐)공에게 후손이 없어 대가 끊길 뻔하는 문중의 최대 번민(煩悶)에서 득손(得孫)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거 이듬해인 661년 1월 독자이신 소이벌공과 며느리 이우부인 석씨(利雨夫人 昔氏) 사이에 손자 소복서(蘇福瑞)공을 얻게 되고, 학수고대하던 집안의 경사를 맞이하니 알천공은 경사로울 경(慶)자를 쓰는 소알천(蘇閼川)에서 소경(蘇慶)으로 개명을 한다. 또한 독자 소이벌(蘇利伐)공도 늙어서 아들을 얻은 기쁨으로 늙을 노(老)자에 기쁠 흔(欣)자를 쓰는 소노흔(蘇老欣)으로 개명을 하고 이후 차남 병부사(兵部史) 소복상(蘇福祥)공, 삼남 사공(司空) 소복정(蘇福廷)공 등 삼형제를 두며, 현몽한대로 상대등공 직계로 9대 동안에 모두 행정과 군사권을 가진 9대 9장군(九代 九將軍)을 낳게 되었으니 이는 어느 성씨에도 결코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것이다.
구대 구장군의 이야기는 전설이 아닌 역사적인 사실로써 알천공의 3세손 소복서(蘇福瑞 : 청주총관)공으로부터 대대로 9대에 걸쳐 4세손 소억자(蘇億慈:한주총관)공, 5세손 소후준(蘇後俊:상주총관)공, 6세손 소검백(蘇劍白:웅주도독)공, 7세손 소상영(蘇尙榮:청주도독)공, 8세손 소목(蘇穆:청주도독)공, 9세손 소은(蘇恩:웅주도독)공, 10세손 소송(蘇淞:강주도독)공, 11세손 소격달(蘇格達:하동태수)공에 이르기까지 진주소씨의 힘찬 출발이었으며, 중흥을 이룬 명문벌(名門閥)로 대대로 영예로운 문중이었다. 이로써 9대 장군은 무예에 뛰어난 장군뿐만 아니라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알천공은 태상계조상(太上系祖上)으로 적제 축융(赤帝 祝融) 소복해(蘇復解)공의 157세손이며, 부소갑(扶蘇岬) 부족국가를 세운 상상계조상(上上系祖上)으로 태하공 곤오(太夏公 昆吾) 소풍(蘇豊)공의 97세손이고, 중상계조상(中上系祖上)으로 후진한(後辰韓)을 세운 진공(辰公) 소백손(蘇伯孫)공의 29세손이다. 또한 박혁거세 거서간을 신라왕으로 세운 신라개국의 원조 소벌도리(蘇伐都利)공의 25세손으로 신라국초부터 대대로 명문 충신가문에서 자랐다.
공의 6대조 소강선(蘇强宣)공에게는 소고구(蘇高矩:初諱 德智)공과 소자구(蘇自矩:初諱 伐智) 두 아들이 있었다.
소고구(蘇高矩)공은 신라장군으로 463년 자비왕(慈悲王) 6년에 왜병이 삽량성(歃良城)에 침투하자 동생 자구공과 함께 복병(伏兵)으로 요격하여 물리치고 우장군(右將軍)이 되었다.
소고구(蘇高矩)공의 증손(曾孫) 소광종(蘇光宗:初諱 比次夫)공은 대아찬(大阿飡)이다.
공은 서기 551년 진흥왕(眞興王) 12년에 왕명으로 거칠부(居柒夫) 김황종(金荒宗) 등 7장군과 함께 백제군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쳐서 죽령(竹嶺)과 고현(高峴)사이의 10군을 빼앗았던 명장이다.
대아찬 소광종공의 아들 아찬(阿飡) 소휴곤(初諱 武殷)공 역시 신라의 장군으로 597년 진평왕 19년에 백제가 신라의 아막성(阿莫城)을 공격할 때 왕명으로 건품(乾品)공과 함께 이를 방어했다.
소휴곤공의 차남 소귀산(蘇貴山)공은 서기 602년 진평왕 24년에 백제군이 다시 아막성을 에워싸고 공격함으로 소감관직(少監官職)을 띠고 출전하였다. 아버지 휴곤공이 복병(伏兵)의 급습을 받고 말에서 떨어져 병졸들이 어쩔 줄 몰라 할 때 아들 귀산(알천공의 동생)공이 달려가 자기의 말을 아버지에게 주고 원광법사에게 배운 세속오계(世俗五戒)의 임전무퇴(臨戰無退)를 생각하며 친구 추항(箒項)공과 함께 적과 싸워 크게 이기고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오다가 죽음을 맞았다. 진평왕은 아나벌(阿那伐)까지 마중 나왔다가 애도하고 내마(奈麻)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아찬(阿飡) 소휴곤(蘇休昆:蘇武殷)과 가미노부인(加美老夫人) 슬하에는 5형제를 두셨으니 장남은 상대등(上大等) 소알천(蘇閼川:改諱 蘇慶)공으로 진주소씨 시조이며, 차남은 조부령(調部令) 소태호(蘇太乎)공이고, 삼남은 신라충신 소감(少監) 내마(奈麻) 소귀산(蘇貴山)공이요, 사남은 창부령(倉部令) 소외사부(蘇外斯夫)공이며, 오남은 소문우(蘇文宇)공이다.
이와 같이 진주소씨 시조 소알천공의 가문과 가계는 뚜렷하며 태상계의 선조와 그 이하 후손에 대해서도 가계가 확실하게 이어져 오고 있는 명문집안이다. 앞으로 알천공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이 허락 되는대로 시대별로 언급하기로 한다.
※ 참고문헌 : 진주소씨 대동보, 진주소씨사, 진주소씨 회지, 현파가승보
진주소씨 관향 및 씨족사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불리웠으며, 757년(경덕왕 16년) 9주5소경제(九州五小京制)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
뒤에 청주(靑州)로 개칭되었다가 고려(高麗) 초에 다시 강주(康州)로 환원하였고, 995년(성종 14년)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晋州市)가 되었다.
소씨(蘇氏)는 풍이(風夷)의 후손(後孫) 적제축융(赤帝祝融)이 기원전 4241년 풍주 배곡(風州倍谷)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전국토에 무궁화(蘇:부소나무)를 심어 소(蘇)를 성(姓)으로 삼고, 이름을 복해(復解)라 한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한다.
그 후 복해(復解)의 61세손 소 풍(蘇 豊)이 기원전 2392년 소성(蘇城:지금의 길림성)의 하백(河伯:하백)에 봉해졌고, 그의 69세손 소백손(蘇伯孫)이 신 유(申 有), 진 기(陳 岐) 등과 더불어 진한(辰韓)을 세웠으며, 백손(伯孫)의 29세손 알천은 신라 진덕왕(眞德王) 때 상대등(上大等)을 지내고 660년(태종 무열왕 7년) 3월 진주 구시동(九枾洞:지금의 상대동)에 이거(移居), 경(慶)으로 개명(改名)하고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문호(門戶)를 열었다. 소씨(蘇氏)의 본관(本貫)은 진주(晋州), 남원(南原), 진강(鎭江:강화지방) 등 12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모두가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세거 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으로는 시조의 손자 복서(福瑞)가 신라 효소왕(孝昭王) 때 청주 총관(靑州摠管)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억자(億滋)는 성덕왕(聖德王) 때 한주 총관(漢州摠管)을 역임했고, 11세손 격달(格達)이 고려 초에 대장군(大將軍)에 오르는 등 직계(直系)로 구세구장군(九世九將軍)이 배출되어 크게 무명(武名)을 떨쳤다.
한편 청주 도독(靑州都督)을 지낸 목(穆:시조의 8세손)은 문장이 뛰어나 「역대제왕고(歷代帝王考),「유소국사(有蘇國史),「유당견문기(有唐見聞記),「동이씨족원류(東夷氏族源流)」를 저술(著述)했고, 그의 아들 은(恩)은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웅주 도독(熊州都督)을 지내고 저서(著書)로「진한세가(辰韓世家)」와「삼소변설(三蘇辨說)」등을 남겨 문(汶:은의 아들)과 함께 「소씨삼대문장(蘇氏三代文章)」으로 일컬어졌다. 고려 문종(文宗) 때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과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올랐던 계령(繼 :격달의 현손)은 헌종(獻宗)이 즉위하여 딸이 회순왕후(懷純王后:헌종의 비)로 간택되자 국구(國舅)가 되어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져서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으며, 광보(光輔)와 경보(景輔)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했고, 경보의 아들 세린(世麟)은 인종(仁宗)에게 <선무팔조(先務八條)>를 상소하여 백성들에게 충신효제(忠信孝悌) 와 예의렴치(禮義廉恥)를 가르치도록 건의했다.
그 외 고려 때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올라 무신정치(武臣政治)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던 경손(慶遜:세린의 손자)과 고종(高宗) 때 몽고병(蒙古兵)과 싸우다가 순절한 함(涵)이 뛰어났으며, 정의대부(政議大夫)로 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에 올랐던 희철(希哲)과 정당문학(政堂文學) 문철(文哲)의 형제가 유명했다.
공민왕(恭愍王) 때 개성윤(開城尹)을 지내며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했던 을경(乙卿:희철의 증손, 판도판서 약우의 맏아들)과 정몽주(鄭夢周)의 고제(高弟)로 사재감 소윤(司宰監少尹)을 지낸 천(遷)은 고려말(高麗末)에 명망(名望)을 떨쳤으며, 그의 손자(孫子) 현손(玄孫)은 성종(成宗) 때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지냈다. 한편 구례 현감(求禮縣監)을 지낸 자파(自坡)의 일곱 아들이 모두 현달(顯達)하여 크게 위세(威勢)를 떨쳤다.
1507년(중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둘째 아들 세량(世良)은 용담 현령(龍潭縣令)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고 이도(吏道)를 쇄신하여 세인의 칭송을 받았으며, 삼사(三司)의 벼슬을 두루 역임한 후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나 부모(父母)의 봉양을 위하여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내려갔다.
그의 아우 세양(世讓:자파의 다섯째 아들)은 1509년(중종 4)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 주서(注書), 정언(正言) 등을 거쳐 수찬(修撰)에 올라 단 종(端宗)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하여 현릉(顯陵)에 이장(移葬)케 했으며,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이조 정랑(吏曹正郞), 사인(舍人), 교리(校理), 직제학(直提學) 등을 거치고 사성(司成)이 되어 영접사(迎接使) 이 행(李 荇)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명(明)나라 사신(使臣)을 맞아 시문(詩文)으로 응답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그후 병조(兵曹)와 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우찬성(右贊成)이 되어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겸하여 성주(星州)의 사고(史庫)가 불타자 왕명으로 춘추관(春秋館)의 실록(實錄)을 등사해서 봉안했으며, 인종(仁宗)이 즉위하여 대윤(大尹)인 윤 임(尹 任) 일파의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가 명종(明宗)이 즉위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윤 임 등이 제거된 후 다시 기용되어 좌찬성(左贊成)을 지내다가 전라도 익산(全羅道益山)에 은거했다. 특히 그는 신용개(申用漑), 남 곤(南 袞) 등과 더불어 중종조의 7대 문형(文衡)인 한 사람으로 문명(文名)이 높고 율시(律詩)가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상원 군수(祥原郡守)로 부임하여 국민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었던 세영(世榮:자언의 아들)은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으며, 상진(尙眞)은 임진왜란 때 성주(星州)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여 진주성(晋州城)에서 순절한 제(濟)와 함께 의절(義節)의 가통(家統)을 세웠고, 행진(行震:진산의 이현 싸움에서 순절)의 아들 동(仝)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순절했다.
그 밖의 인물로는 부제학(副堤學) 봉(逢)의 손자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진력했던 영복(永福)이 천문(天文), 지리(地理), 경사(經史), 병법 (兵法), 의약(醫藥) 등에 정통하여 명성(名聲)을 떨쳤으며, 만선(萬善:세공의손자) 의 아들 동도(東道)는 청북어사(淸北御史)와 경주부윤(慶州府尹)을 거쳐 효종(孝宗) 때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순절한 응무(應武)와 함께 이름을 날렸고, 송시열(宋時烈)의 고제(高弟)로 바른말을 잘 했던 두산(斗山)은 권신들의 비위에 거슬려 외직으로만 전전하다가 숙종 때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로 나갔으나 기사환국 (己巳換局)으로 서인(西人)이 배척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 외 수구, 여유(汝由), 휘식(輝植), 휘면(輝冕), 승규(昇奎) 등이 문장과 도학(道學)으로 조선의 학문을 빛냈으며, 한말(韓末)에 와서는 휘태(輝泰)와 천술(千述), 진형(鎭亨), 진우(鎭佑), 휘옥(輝玉), 병원(秉元) 등이 구국의 충정(忠貞)으로 항일투쟁에 앞장서서 의절(義節)의 가문(家門)인 진주(晉州) 소씨(蘇氏)를 더욱 빛냈다.
1. 뿌리 깊은 나무
뿌리 없는 나무는 없으며 조상 없는 자손도 없다. 뿌리 깊은 나무는 가지와 잎이 무성하며 태풍이 불어도 넘어지지 않는다. 우리 소씨(蘇氏)의 뿌리는 먼 옛날부터 깊고 견고하다. 월주공(月洲公)이 진위 생원(生員) 운핵공(雲翮公)과 1670년 경술보(庚戌譜)를 창간할 때 23세 휘(諱) 희철(希哲)로 시조(始祖)를 삼았다. 1980년대에 현파가승(玄坡家乘1911년 ; 致善 記)이 발견되어 세계최초의 남도가승(南塗家乘670년) 동근보(東槿譜947년)와 서풍보(瑞風譜1103년)와 부소보(扶蘇譜1320년)를 고증하여 휘(諱) 경(慶)을 시조로 하여 1981년 신유보(辛酉譜)를 편찬(編纂)하였고, 경술보 이후 9회 대동보 7회 가승이 발간되었다.
1) 상상계(上上系)
옛날 소풍(蘇豊)이 소씨의 조조(肇祖)이며 적제축융(赤帝祝融)의 61세손이니 호는 곤오(昆吾)
또는 태하공(太夏公)이라 했으며 갑진(BC2417 甲辰 : 단군기원 84년전)에 태어났으니 풍이(風夷)의 후손이다. 홍제(洪帝)8년에 소풍(蘇豊)께서 동숙신(東潚愼:조선) 불함산(弗咸山 : 백두산) 북쪽에 소성(蘇城:소나라)을 세워 하백(河伯:왕)이 되므로 기씨(己)성을 소씨(蘇)성으로 개성하여 소씨가 비로소 생겼으니 소풍공(蘇豊公)이 소씨의 조조(肇祖)이다. 소성은 지금의 부소갑(扶蘇岬)이다. 사적은 환국사와 단군고기에 기재되었다. 국토에 소목(蘇木:槿 무궁화)을 심어 국태민안을 축원하였고 지금의 업성(業姓)에 소성이 후손에 이어지니 약 102대에1,200여년이 되었고 정축년에 삼소를 설치하니 북소(北蘇) 남소(南蘇) 서소(西蘇)이다. 후손이 후소국(後蘇國)을 세워 63대 900여년이 되었다고 하며, 동근보에 휘 두노(頭老)의 59세손 휘 백손이 진한의 주(主)라 하였다.
2) 상계(上系)
소백손공(蘇伯孫公 :BC240年 辛酉生)은 병(秉)자 항렬로 73대조이고 나라가 혼란하자 신하(臣下)들을 이끌고 백두대간을 타고 경주(慶州) 형산(兄山)으로 내려와 후진한(後辰韓)의 주(主=王)가 되셨으니 진공(辰公이라 하며 동근보(東槿譜), 에 경주(慶州) 소씨(蘇氏) 시조(始祖)라고 기록되었다.
소벌공(蘇伐公 :BC129年 壬子生)은 소백손공의 5세손이오 육부(六部) 촌장(村長)중에 수장인 돌산고허촌장(突山高墟村長)이며 박혁거세를 양육시켜 신라를 건국하셨으니 백공, 또는 소도리(蘇都利), 소벌도리(蘇伐都利)라 하였고, 사적이 삼국유사, 삼국사기, 신라사에 기록되었다.
3) 시조(始祖)
소경공(蘇慶公, 閼川 : AC577年 丁酉生)은 소백손공의 29세손이오, 소벌공의 25세손이시며 병자 항렬은 공의 46세손이다. 각간공(角干公 :정승)은 신라 진덕왕 원년에 상대등(上大等 : 수상,국무총리)이 되셨고 왕이 서거하자 여러 신하들이 공에게 왕이 되기를 간청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시고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하니 그가 태종무열왕이며 무열왕은 경공에게 보은하기 위하여 경공의 선조(先祖)이신 소벌공을 문열왕(文烈王)으로 추봉하였다. 그후 경공은 슬하에 손자가 없어 늘 고심중에 꿈에 선조이신 소벌공이 나타나 진주 도사곡 지금의 상대동으로 이사하면 구치(九豸:장군)를 얻을 것이다 했는데, 이상동몽으로 부인 영아부인 박씨(玲阿夫人 朴氏) 자부(子婦) 이우부인 석씨(利雨夫人 昔氏)가 같은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경신(660년) 3월3일에 상대동으로 이사하시여 터전을 닦으시고 진주 소씨의 시조(始祖)가 되셨다. 사적이 신라사(新羅史)에 기록되어있다.
4) 신라시대
경공의 2세 휘 노흔공(老欣公)께서 670년 최초로 남도가승(南塗家乘)을 기록하였고, 7세 휘 상영(尙榮) 청주도독공이 진양군 문산면 소문리 소촌(蘇村)으로 이거하였고, 11세 휘 격달공이 하동태수(河東太守)일 때 신라가 망하자 고려에 망명하여 왕건(王建)을 도와 삼한통일(三韓統一)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되셨고, 신라에 9장군 8시중, 7총관 4대 문과 3대 3문장 삼한벽상공신 등 신라를 빛낸 분들이 있었다.
5)고려시대
고려에 와서 휘 격달(格達) 대장군은 삼한벽상공신으로 국가에 공헌하셨고 947년 동근보를 창간하셨다. 14세 휘 현(顯) 이부상서공(吏部尙書公)이 회동(檜洞)에 이거하였다. 15세 휘 계령공(繼苓公)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께서 서풍보(瑞風譜1103년)를 발간하셨다. 22세 좌우위상장군(左右衛上將軍) 휘 함(涵)께서 1254년 몽고난에 순절하였고 이 때 우리 소씨의 인구가 15만 명이었으나 멸문의 화(禍)를 당했다. 공의 장남 휘 희철(希哲) 정의대부 금오위상장군(政議大夫 金吾衛上將軍)은 신유보 이전까지 시조로 모셨었으며 정(靖)과 단(端) 두 형제를 두었다. 24세 휘 정(靖) 정당문학으로 1316년 추동가승(樞桐家乘) 구장지(九將誌)와 구인사지(九印祠誌)를 1320년 부소보를 간행하였으며 약우(若雨) 약운(若雲) 형제를 두었다. 휘 약우는 봉익대부 대부판도판서로 을경, 을충, 을신을 낳으니 그후손은 익산 전주 보성 용담 상원 은진 안변 공주 등지에 살고 있다. 24세 휘 단(端) 정의대부 성균대사성의 후손은 수원에 살고 있다. 휘 약운 절도병마사의 후손은 남원에 살고 있다. 26세 휘 을경(乙卿) 광정대부 판도판서는 진위 여좌동으로 이거하였으니 여좌동 일대는 공의 고조부 휘 함(涵)께서 몽고난에 순절한 전공 사패지(賜牌地)이다. 휘 을경은 형제를 두니 휘 담(覃)은 운주령 겸 근농방어사 전고사이며 후손은 남강공파, 참판공파이다. 휘 천(遷) 사재감 소윤이 담과 형제로 을경의 둘째이며, 고려가 망함에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충절을 가지고 휘 담은 진위에 은거하고 휘 천 소윤공(少尹公)께서는 전주로 낙향하여 정착하여 자정하셨다. 고려에서 삼한벽상공신 9시중(侍中:정승) 7상서(尙書) 판관(判官) 판서(判書) 부원군(府院君)과 여러 대장군 등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많이 배출되어 고려에 공헌하였으니 이로 인하여 우리 소씨는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칭한다.
6)조선시대
조선시대에 와서 휘 천(遷) 소윤공(少尹公)께서는 두 아들을 두니 휘 희(禧)와 우(祐)이다. 휘 희는 무과중군시정, 증 병조참판이요. 휘 우는 상원파 파조로 북한지방에 거주하였고 후손 현섭은 진주 시조이하 묘소 발굴에 병사공파 진거씨와 함께 희생적으로 노력하여 그 공로가 지대하다.
참판공 휘 희는 생 2남하니 휘 효식과 효철이다. 휘 효식은 부안현감 증 병조판서요. 휘 효철은 능성현령이요 자 계첨은 보공장군 축산포만호이다. 후손은 전남 보성 순천지방에 집단 거주하고 있으며 일충(一忠) 구효(九孝) 육열(六烈)의 삼강문(三綱門)은 그 지방의 유명한 소문(蘇門 )의 정려(旌閭)이다. 판서공 휘 효식은 생 3남하니 휘 자파(自坡), 기파(起坡), 계파(繼坡)가 그 대를 잇는다.
휘 자파 의정부 좌찬성공께서 익산으로 이거하시어 생 7남1녀하고 7남 모두 등과(登科)하였는바 특히 대사간 곤암공 양관대제학 양곡공이 출세하므로 조선조에 소문(蘇門)의 중흥을 이루었으며, 이로 인하여 익산에서 우리 소가들이 번창하게 된것이다. 휘 기파는 웅천부사 재임 중 조카 휘 세공과 왜적을 정벌하여 훈공을 세웠으며 전라좌수사를 역임하고 경상병사에 승진하였고 후손은 익산 망성에 살고 있다. 휘 계파는 무과로 선전(宣傳)과 도사(都事)를 역임하고 오포만호가 되었다. 후예들은 전주 등지에 산거(散居)하고 있다. 이리하여 우리 소씨는 어느 성씨 보다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충신 선조를 모신 자랑스러운 성씨라는 것을 자각하고 긍지와 자부심을 후손들에게 심어 주어야 한다.
2. 관향(貫鄕) ․ 세거지(世居地)의 변천사
1) 옛적에 진국(辰國)에 속하다.
2) 삼한(三韓)시대에 변한(弁韓)의 순시국(淳是國)의 도읍지이다.
3) 서기 42년 가락국(駕洛國)이 건립되고 진주 남강(南江)의 당시 이름인 청천(菁川)을 따라 청주(菁州)라 하다.
4) 서기 512년 백제의 무열왕12년에 백제에 점령되어 거열성(居列城:거창)의 속주가 되다.
5) 서기 661년 신라 문무왕 1년에 다시 청주라 하고 거타주(거열성,거창)의 속주가 되다.
6) 서기 685년 신문왕5년에 전국을 9주로 개편하고 청주를 거타주에서 분리하여 청주라 하 다.
7) 경덕왕 (742-765) 때에 강주라 하고, 혜공왕 (765-780) 때 다시 청주라 하였으며, 후에 강주(康州)라 하다.
8) 서기 983년 고려 성종 2년에 강주목이 되었으며, 995년 성종 14년에 진주(晋州)로 개칭하다.
9) 조선 태조 (1392-1398) 때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다.
10) 조선 태종(1400 - 1418) 때에 진주목(晋州牧)으로 강등되다.
11) 서기 1895년 고종 22년에 진양군이 되고 경남 감영을 두다.
12) 서기 1914년 진양군이 개편되어 1914년에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되고 진양읍이 되 다.
13) 서기 1939년 10월에 진주부로 승격되고 1945년 8월에 진주시로 개편하고 나머지는 진양군이 되다.
진주소씨 상상계보(晉州蘇氏上上系譜)
옛날 소풍(蘇豊)이 소씨의 조조(肇祖)이며 적제축융(赤帝祝融)의 61세손이고 호는 곤오(昆吾), 또는 태하공(太夏公)이라 했으며 갑진년(甲辰年)에 태어났고 풍이(風夷)의 후손이다. 옛날 고신씨(高辛氏)가 정치를 매우 포악하게 하였기 때문에 불함산(弗咸山:백두산) 북쪽으로 이사하였다. 숙신홍제(肅愼洪帝) 8년에 고신씨가 쳐들어올 때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수동(綏東) 벌판에서 격퇴시켰다. 홍제(洪帝)가 그 공적(功績)을 치하하고 소성(蘇城)에 봉(封)하여 하백(河伯)이 되다. 또는 하백(夏伯)이라고도 하며 당시 사람들은 태하공(太夏公)이라 불렀다. 묘는 소성(蘇城)에 있으며 지금의 부소갑(扶蘇岬)이다. 사적은 환국사(桓國史),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태하공이 견이(畎夷)의 딸 유정(有姃)과 결혼하여 비(妃)로 삼아 아들 3명과 딸 1명을 낳았다. 큰 아들은 갑(岬)이며 병자년에 태어나 부공(扶公)이 되었고, 둘째 아들은 환(桓)이요, 셋째 아들은 흘(紇) 이며 서소국주(西蘇國主)가 되었다. 태하공과 의견이 맞지 않기 때문에 요(堯)의 신하가 되어 소성(蘇城)에 봉(封)해지니 지금의 업성(鄴城)이다. 후손(後孫)이 계속 이어가니 102대에 역년(歷年)이 3100여 년이 되었다. 부공(扶公)의 큰 아들은 구수(句秀)이며 인공(仁公)이 되었고, 둘째 아들은 일청(一淸)이며 홍공(弘公)이 되었고, 딸은 정아(靖妸)이며 부소(扶蘇)의 신모(神母:단군황후)가 되었다.
구수(句秀)의 아들은 선루(仙婁)이며 고공(高公)이 되었고, 선루의 큰 아들은 영리(英利)이며 태공(太公)이 되었다. 당(唐)이 장경(臧京)으로 도읍을 옮길 때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3백리의 영토를 하사(下賜)받았다. 이는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자세히 나온다. 둘째 아들은 상화(上和)이며 경공(景公)이 되었고, 셋째 아들은 남우(南雨)이며 원공(元公)이 되었다.
영리(英利)의 아들은 해월(海月)이며 세공(世公)이 되었다. 해월의 큰 아들은 정조(丁祖)이고 신해년(辛亥年)에 태어났으며, 둘째 아들은 법호(法乎)이다. 정조의 큰 아들은 가리(加里)이며 진공(眞公)이 되었고, 임술년(壬戌年) 여름에 도적이 쳐들어 올 때에 하남(河南)에서 격퇴 시켰다. 둘째 아들은 성고(成高)이며 정공(貞公)이 되었다. 가리(加里)의 아들은 나랑(那浪)이며 순공(純公)이 되었고, 하왕(夏王)이 견이(畎夷)를 공격하였기 때문에 하(夏)를 정벌하였다.
나랑(那浪)의 큰 아들은 노니(老尼)이며 덕공(德公)이 되었다. 그 후손들이 계속 이어지니 30여대였다. 둘째 아들은 나벌(奈伐)이며 태재(太宰)가 되었다. 정축년(丁丑年)에 삼소(三蘇)가 요청하여 평제(平帝)가 삼소를 세우니 북소(北蘇), 남소(南蘇), 서소(西蘇)이다. 강동(江東)의 십이봉(十二峰)에 이르기까지 근수(槿樹:무궁화)를 심었다. 이때 흘(紇)의 후손이 서남으로 옮겨 그곳에 그대로 봉(封)해져 후소국주(後蘇國主)가 되어 제원(濟原)에 도읍하였다. 후손이 계속 나오니 63대 1890여 년이 되었다. 나벌(奈伐)의 큰 아들은 성창(成昌)이며 태사(太師)가 되었고, 후손 정국(定國)이 공익대부(工翊大夫)가 되었다. 둘째 아들은 기강(己江)이고, 후손(後孫) 문수(文洙)는 상대부(上大夫)이다. 셋째 아들은 두로(頭老)이며 태재(太宰)가 되었고, 곧 진주소씨의 직계(直系) 조상(祖上)이 된다. 넷째 아들은 개남(介男)이다. 후손(後孫) 내벌(乃伐)은 나벌(奈伐)이라고도 하는데 기자(寄子) 당시 수상(首相)이 되었다.
동근보(東槿譜) 기록에는 두로(頭老)의 59세손 백손(伯孫)이 진한(辰韓)의 진공(辰公)이 되었으며, 경주소씨(慶州蘇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태재공(太宰公)으로부터 진공(辰公)에 이르기까지 그간의 세계(世系)가 미비하나 세월이 오래되어 조사할 수 없다. 춘강공(春江公)의 가승(家乘)을 조사해 본다면 태재공(太宰公)으로부터 진공(辰公)에 이르기까지 그간의 세계(世系)는 57세가 된다고 했다. 또 경주소씨(慶州蘇氏)에 전해오는 가승(家乘)을 조사해 보면 그 간의 세계가 59세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까닭은 무엇때문인가?
그러나 소성용(蘇性用)이 지은 경주소씨의 가승(家乘)을 본다면 동근보와 아주 비슷하다. 때문에 이하는 그에 나오는 세계(世系)를 뽑아 기록했다. 두로(頭老)의 아들은 음기오(音其吾)이니 신묘년(辛卯年)에 태어나서 태사(太師)가 되었다. 을묘년(乙卯年)에 신원함(伸寃函)의 설치를 각(各) 주(州)에 요청하였다. 음기오(音其吾)의 큰 아들 한아달(韓阿達)은 수상(首相)이 되었으며, 신사년(辛巳年)에 기공창(機工廠)의 설치를 주청(奏請) 하였다. 한아달(韓阿達)의 큰 아들은 아시(阿始)이며 상장(上將)이 되었다. 아시의 다섯째 아들은 대아야(大亞野)이며 호는 유위자(有爲子)요, 국태사(國太師)가 되었고 태학관(太學館)의 건립을 요청하였다. 대아야(大亞野)의 일곱째 아들은 삼태(三台)이다. 삼태의 셋째 아들은 여달자(余達子)이다. 여달자의 아들은 한사람(韓沙覽)이며 상장(上將)이 되었다. 한사람(韓沙覽)의 큰 아들은 한희미(韓熙美)이다. 한희미의 넷째 아들은 홍산벌(洪山伐)이다. 홍산벌의 큰 아들은 해중(奚中)이고 수상이 되었으며, 둘째 아들은 태가(台家)이며 태수(太守)가 되었다. 해중의 셋째 아들은 우소리(于所里)고 상장 신우천(申尤天)의 딸과 결혼 하였다. 부인의 이름은 부호이며 11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의 큰 아들은 사랑(沙浪)이고 상장(上將)이 되었다. 사랑의 큰 아들은 모량(牟梁)이며 상장이 되었으며 무진년(戊辰年)에 엄년(嚴年)을 격퇴시켰다.
둘째 아들은 도소리(道小里)이다. 모량의 아들은 가이윤(加伊尹)이다. 가이윤의 일곱째 아들은 물(物)이다. 물의 여섯째 아들은 찬론(讚論)이다. 찬론의 둘째 아들은 양훈(良訓)이다. 양훈의 셋째 아들은 마번(麻番)이며 상대부(上大夫)가 되었고, 다섯째 아들은 시기(時其)이다. 시기의 아홉째 아들은 수내(水乃)이다. 수내의 둘째 아들 풍현(風玄)은 태수(太守)가 되었다. 풍현의 큰 아들은 발강이(發康伊)이며 태학사(太學士)가 되었다. 발강이의 셋째 아들은 학거(郝巨)이다. 학거의 냇째 아들은 참현(參玄)이고 상장(上將)이 되어 무진년(戊辰年)에 역신(逆臣)인 독(督)을 격퇴(擊退)하였다. 참현의 큰 아들은 백수(白水)이다. 백수의 큰 아들은 파랑달(波浪達)이며 재상(宰相)이 되었다. 파랑달의 여섯째 아들은 요열(要烈)이고 단군(壇君)때에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다. 요열의 큰 아들은 집(集)이다. 집의 작은 아들은 비산(飛山)이며 상장(上將)이 되었다. 비산의 큰 아들은 이석(二石)이요, 다섯째 아들은 순석(純石)이다. 순석의 큰 아들은 검이(黔伊)이며 태수(太守)가 되었다. 검이의 넷째 아들은 길(吉)이고 의술학당(醫術學堂)의 건립을 주청(奏請)했었다. 길(吉)의 큰 아들은 한(韓)이며 병가(兵家)를 위하여 단국병법(檀國兵法)이라는 책을 지었다. 한의 큰 아들은 비사(比斯)이다. 비사의 셋째 아들은 소함(所咸)이고 태학사(太學士)요, 넷째 아들은 소덕(所德)이다. 소덕의 큰 아들은 고수(高修)이다. 고수의 셋째 아들은 석(碩)이고 태재(太宰)이다. 석의 아들은 가지(加知)이며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계축년(癸丑年)에 북적(北狄)을 격퇴하였다. 가지의 둘째 아들은 백수(白首)이고 승상(丞相)이 되었다. 백수의 큰 아들은 전(筌)이며 좌복야(左僕射)요, 둘째 아들은 화금(化今)이고 우복야(右僕射)이다. 화금의 다섯째 아들은 상(尙)이요, 여섯째 아들은 손서(孫瑞)이다. 손서의 큰 아들은 구로(具路)이며 좌장(左將)이 되어 병인년(丙寅年)에 견융(犬戎)을 정벌하여 평정 했다. 구로의 셋째 아들은 한지(韓地)이고 태자태부(太子太傅)이다. 한지의 큰 아들은 기(紀)이며 태학사(太學士)요, 둘째 아들은 남길(南吉)이요, 셋째 아들은 죽길(竹吉)이다. 기의 큰 아들은 조(兆)이며 태사(太師)이다. 조의 넷째 아들은 고리(高里)이며 판윤(判尹)이다. 고리의 큰 아들은 소을길(所乙吉)이고 좌보익(左輔翼)이다. 소을길의 셋째 아들은 가문(家文)이다. 가문의 큰 아들은 소을전(所乙田)이다. 소을전의 넷째 아들은 매(每)이며 부소대부(扶蘇大夫)이다. 매의 셋째 아들은 행수(行首)이다. 행수의 큰 아들은 준(俊)이고 판윤(判尹)이요, 둘째 아들은 사(事)이다. 준의 큰 아들은 보미(甫美)이다. 보미의 큰 아들은 고개(高介)이며 태자태부(太子太傅)요, 둘째 아들은 미중(未中) 이고 상장(上將)이요, 셋째 아들은 환월(桓月)이며 판윤(判尹)이요, 넷째 아들은 윤(允)이며 수상(首相)이다. 윤의 큰 아들은 위어(位於)이다. 위어의 둘째 아들은 자근(自根)이고 상장(上將)이요, 셋째 아들은 자구(自句)이다. 자근의 큰 아들은 가을일(加乙日)이며 판윤(判尹)이요, 둘째 아들은 고산(高山)이다. 가을일의 큰 아들은 대알(大閼)이며 수상(首相)이다. 대알의 큰 아들은 백손(伯孫)이고 신유년(辛酉年)에 태어나 후진한주(後辰韓主)가 되었으며, 묘호(廟號)는 진공(辰公)이니 진주소씨(晉州蘇氏) 시조(始祖) 경공(慶公)께서 진주(晉州)를 관향(貫鄕)으로 삼기 이전(以前)까지 경주소씨(慶州蘇氏) 시조(始祖)가 되었다.
진주소씨(晉州蘇氏) 내력과 시조(始祖)와 선조(先祖)
소씨(蘇氏)는 진주(晉州)를 본관(本貫)으로 하는 단일본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진주를 비롯하여 진강, 충주, 능주, 익산, 조양등 12개의 본관이 전해지고 있으나, 이는 모두 진주소씨의 분파세거지(分派世居地)를 이르는 것으로 본다.
소씨의 원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민족의 역사와 비등한 수천 년의 세월을 만날 수 있으니, 이 땅에서 가장 뿌리가 깊은 유구(悠久)한 씨족사를 지닌 성씨라 일컬을 만하다.
소씨(蘇氏)의 연원(淵源)은 동구이(東九夷:배달겨레의 옛 이름)중 풍이(風夷)의 후손인 적제축융(赤帝祝融:왕의 칭호)이 기원전 4241년 풍주배곡(風州倍谷)에 도읍을 정하고 전국토(全國土)에 무궁화(蘇)를 심어 성(姓)을 소(蘇), 이름을 복해(復解)라 한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는 말과 함께 그의 61세손(世孫)인 소풍(蘇豊)이 기원전 2392년 소성(蘇城:비서압, 부소압으로 현재의 길림성)의 하백(河伯)에 봉해졌고, 소풍(蘇豊)의 69세손 소백손(蘇伯孫)이 기원전 209년에 진한(辰韓)을 건국하였다.
진주소씨세보(晉州蘇氏世譜)에 의하면 오방신장(五方申將)의 하나인 적제(赤帝)의 61세손 태하공(太夏公) 풍이(風夷)가 기성(己姓)을 소성(蘇姓)으로 바꾸어 소씨가 되었는데, 태하공이 적제의 배곡(倍谷)에서 처음엔 난하(灤河)로 옮겼다가 숙신(肅愼)의 홍제(洪帝)때에 불함산으로 들어가 그곳에 봉해졌으며, 나라 이름을 유소국(有蘇國)이라 하였다. 그 뒤에 공의 후손들 중 일부는 중국대륙으로 가고 일부는 한반도로 이동하였는데, 태하공의 69세손인 진공(辰公) 백손(伯孫)이 경주로 옮겨 후진한 군주(後辰翰 君主)가 되고 그 뒤 27대(代) 동안 살았다. 신라 6촌의 하나인 고허촌(高墟村)의 촌장 소벌(蘇伐 = 蘇伐都利公)이 바로 진공(辰公)의 5세손(世孫)이다.
기원전 57년에 와서 소백손(蘇伯孫)의 5세손 소벌(蘇伐)이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세워 신라(新羅)를 건국했고 벌(伐 = 蘇伐都利)의 25세손 알천(閼川 = 改諱 慶)은 서기 638년 선덕여왕(善德女王) 7년 이찬(伊湌)이 되면서 각간(角干)에 올랐고, 서기647년 진덕여왕(眞德女王) 1년 2월에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고 각종 문헌에 기록되었다.
시조(始祖) 소경(蘇慶)은 진공(辰公:휘 백손)의 29세손으로 상대등(上大等)을 역임한 후, 서기 660년(태종무열왕 7년) 봄 3월 3일에 진주의 도사곡(塗斯谷)으로 이거(移居)하였다. 공의 15세손인 계령(繼笭)공이 고려조(高麗朝)에서 크게 현달하여 신호위 상장군(神虎衛 上將軍), 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지냈고, 그 따님이 헌종(獻宗)의 왕비(王妃)가 되어 회순왕후(懷純王后)에 책봉됨으로써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우리나라 소씨(蘇氏)가 진주(晉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은 것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데 진주소씨는 시조를 경자보(庚子譜) 족보 수간(편찬)할 때까지는 문공공(文恭公) 희철(希哲)공으로 삼아왔으며, 1951년 발견된 양곡공(陽谷公) 후손 소창엽(蘇昌燁)이 소장하고 있는 세계보(世系譜)인 부소보(扶蘇譜)와 1975년 발견된 소종만(蘇鐘萬) 소장(所藏)인 소치선가승(蘇致善家乘)에 의하여 비로소 문헌사적(文獻事蹟)과 분묘소재(墳墓所在) 등의 고증이 이루어져서 오늘날과 같이 상대등 경(慶)공을 시조로 바로잡게 되었음이 신유보(辛酉譜)에 나타나 있다.
상대등공의 묘역은 오래도록 실전되었던 것을 1975년 봄에 찾아 봉심(奉審)하게 되었다.
소경(蘇慶)은 577년(진지왕 2년)에 태어나 신라 최고관직인 상대등(上大等:17관등을 초월하여 임명하던 최고 관직으로 나라의 정사를 총괄하여 다스리는 한편, 화백과 같은 신라6대 귀족회의의장)에 올랐다. 진덕여왕이 서거하자 여러 군신들이 공에게 섭정을 청하였는데, 이를 사양하며 "신은 이미 늙었으며 또한 덕행을 일컬을 만한 것이 없으나, 춘추(春秋)는 덕망이 숭중(崇重)하고 실로 제세의 영걸이라 아니할 수 없다"하고 김춘추(金春秋)를 추대하였다. 태종무열왕이 경공(慶公)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공의 조상이신 소벌(蘇伐 = 蘇伐都利公)공을 문열왕(文烈王)에 봉하였다.
신유보에 보면 공은 소백손의 29세손이요, 또한 고허촌장 소벌공(蘇伐公)의 25세손으로 초명(初名:본명)은 소알천(蘇閼川)이다. 나이가 팔순이 넘도록 손(孫)이 없었는데, 어느날 꿈에 선조인 백공(白公 = 蘇伐公)이 나타나 “그대가 도사곡으로 옮겨 살면 반드시 구치자(9장군)를 얻으리라”고 하였다. 이 꿈을 꾼 후 경공께서 660년(태종무열왕 7년) 3월 3일 그곳 도사곡(지금의 진주시 상대동)으로 이사하였으며, 결국 661년 1월 10일 며느리 석씨(昔氏)가 손자 복서(福瑞)를 낳았다. 이에 그 기쁨으로 경공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경사로울 경자(慶字)를 써서 '경(慶)'이라 개명(改名)하였다고 한다. 그 후 공의 3세 복서(福瑞), 4세 억자(億滋), 5세 후준(後俊), 6세 검백(劍白), 7세 상영(尙榮), 8세 목(穆), 9세 은(恩), 10세 송(淞), 11세 격달(格達)까지 9세 9장군(9世 9將軍)이 이어져 현몽의 내용과 일치하는 구치자(九豸者 : 장군)를 얻었다.
신라 말기에 왕봉규(王逢規)의 난(亂)으로 인해 멸문지경에 이르렀으나 장군(將軍) 격달(格達)이 왕건(王建) 휘하에서 공(功)을 세워 대장군(大將軍:무관의 으뜸 벼슬)에 올라 고려(高麗)때까지 관직을 지냈으며,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진 계령(繼苓)공을 비롯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 광보(光輔) 등 7명의 정승(政丞)이 배출되었다.
고려조(高麗朝)에서 15만을 헤아리던 소씨(蘇氏)는 몽고의 침입으로 두 번째 멸문지경이 되었다가 희철공(希哲公)이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가운(家運)을 다시 일으키기 시작하여 1261년(고려 원종 2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무숭(茂崇)이 진주를 사관(賜貫) 받았다.
한편 도사(都事)를 거쳐 구례 현감(求禮 縣監)을 지낸 자파(自坡)공의 아들 7형제가 크게 현달(顯達)하여 명성을 날렸는데, 그중 둘째 아들인 세량(世良)공이 대사간에 오르고, 다섯째 아들인 세양(世讓)공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동명(東鳴)공의 아들 두산(斗山)공이 숙종(潚宗) 때 평안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올랐으나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西人)이 배척 당할 때 개탄(慨嘆)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이후로는 소씨(蘇氏)의 관계(官界) 진출(進出)이 크게 둔화(鈍化)되었다.
이상과 같이 뚜렷한 고증(考證)과 설화(說話)를 바탕으로 한 씨족의 기원(紀元)과 흥기(興起)를 밝혀주고 있는 성씨는 흔치 않으니, 이는 우리 민족 역사와 함께 매우 귀중하고 소중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소씨는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서 전통(傳統)과 가풍(家風)을 이은 명문가(名門家)로써 긍지(矜持)와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전국에 흩어져 있는 문집(文集), 유물(遺物), 유적(遺蹟) 등 관리와 전국 종친들의 결속(結束)을 다지는데 자발적인 참여와 협조를 바라고 있다.
이글은 진주소씨 회지 44호에 게재된 것으로 저자의 승인을 받아 옮긴 것입니다.
한국 소씨(蘇氏)의 유래
글쓴이 : 대종회 부회장 소병석
1. 서론
지금부터 30년 전만 해도 우리 소씨는 고려 말기 소희철 장군을 시조로 월주공이 만든 경술보 이전을 알 수가 없었다. 기껏 소씨의 자랑이란 양곡 소세양 할아버지께서 홍문관과 예문관, 즉 양관 대제학을 지낸 것을 내세웠을 뿐이다. 종인의 수도 매우 적어 가축인 소에 빗대 온갖 별명이 따라 다녔고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1975년 현파가승(玄坡家乘)이 발견됨으로써 진주 소씨의 시조는 신라 진덕여왕 때의 상대등 알천장군임이 밝혀졌고 신라 창업 공신 소벌공의 25세손임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1979년에는 동근보, 서풍보, 부소보, 소씨 상상계보 등이 잇따라 발견됨으로써 우리 소씨는 고려 때 생긴 별 볼일 없는 희성이 아니라 한 민족의 뿌리 종족이며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영광스러운 씨족임이 밝혀져 소씨로 태어난 설움을 말끔히 씻게 되었다.
그러나 소씨의 역사는 단군왕검 이전 2000년까지 올라가는 장구한 것이었고 그 내용도 엄청난 것이어서 그대로 후손에게 전하기엔 자칫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다각적인 연구와 사실규명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행이 우리 상상계보는 흔히 옛날 문건이 그러하듯이 신비스럽고 황당무계한 설화, 전설이 아니라 국내외의 권위 있는 사서(史書)와 고고학, 언어학, 지리학 등 연구에 따라서는 실증이 가능하므로 우리 후손들은 끊임없이 연구하여 사실을 전하여야겠다. 이 연구 결과는 한민족 뿌리를 규명하는 일과도 일치한다.
2. 소씨(蘇氏)의 발상(發祥)
진주 소씨 동근보(東權諸) 서문과 부소보(扶蘇譜)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가. 동근보 : 소씨는 적제의 후손이다. 기묘년(6223년 전) 여름에 갈천씨를 대신하여 제(帝)가 되었다. 환국의 영토에 소(蘇)를 심었다. 소의 기강과 덕의 교화로 백성들에게 풍도를 숭상케 한 것이 소를 성씨로 삼게 된 것이다.
희경공(僖景公)은 부소(扶蘇)는 무궁화요 화랑의 큰 근본이며 국가의 기초라 했다. 여기서 희경공은 진주 소씨 시조 알천장군(휘는 경(慶))이 진주로 이사한 후 9대 9장군이 태어났는데 이 중 6대 장군 목(穆)이 청주도독을 역임하고 서기 870년 별세하자 국가에서 내린 시호이다.
소씨가 생기고 5000여년 후에 신라의 소목장군이 무궁화라 해석하고 매우 추상적인 설명을 하였다. 그러나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부소는 무궁화가 아니다. 무궁화는 시리아 원산지로 세계에 퍼졌는데 북위 38도 부근 이남 낮은 지역에 피는 꽃이다. 그러면 무궁화는 언제 신라지역에 왔는가. 중동지역에서 산출되는 유리제품이 4세기 조성된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빨라야 4세기쯤이고 728년 혜초가 인도와 중동을 여행하고 왕오천축국전을 지었는데 이때 혜초가 가져왔을 가능성이 제일 높다. 희경공은 혜초보다 약 100년 후에 활동한 사람이니 이때쯤 신라에는 무궁화 꽃이 널리 퍼졌을 것이다.
마지막 빙하기가 1만 2천 년 전인데 지구는 꾸준히 온난화했다. 그래도 21세기인 지금도 무궁화는 황해도 이남에만 피고 있으니 희경공의 해석은 잘못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궁화 꽃을 소씨의 상징 꽃으로 정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나. 부소보 : 우리 소씨는 구두씨(九頭氏) 후손인 적제에서 나왔다.
상대등공이 말하길 옛날 적제가 있었으니 휘는 복해요 호는 축융(祝融)이다. 환국의 제가 되어 기묘년에 개국하니 풍주의 배곡에 도읍을 정했다. 조이(鳥夷)의 딸 항영(姮英)과 결혼하고 그를 황후로 삼았으며 9명의 아들을 낳아 9주에 봉한 뒤로 그 후손들이 그곳에 살고 있다.
여기서 축융이 최초의 지도자, 통치자임을 알 수 있다. 때는 신석기 시대 말엽으로 과연 성씨나 호 같은 것이 있을까? 문자가 있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구전으로 전했을 텐데 같은 내용이 우리 족보뿐 아니라 동국역대사에도 적제 축융이 새소리를 듣고 음악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중국의 역사학자 서량지(徐亮之)도 중국 역사가 시작하기 전 동이족의 음악은 이름이 높다. 축융의 후손 전욱 고양 제는 비룡씨에게 명하여 음악을 지었다고 했고 동국벌열보(東國閥閱譜)에도 소씨는 축융과 전욱의 후손이다. 육종은 곤오를 낳고 소나라에 봉했다는 기록이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소씨는 축융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니 우리는 믿을 수밖에 없고 보다 치밀한 연구와 사료발굴이 필요하다. 또 하나 소씨의 발상지는 배곡이라 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실로 민족의 뿌리를 밝힌 것이다. 배곡은 바이곡이고 바로 바이칼 호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민족은 바이칼 호 근처에서 발생한 것이다.
우선 고고학적으로 바이칼 호 동쪽 브리야트 지역에는 신석기 시대 유물이 많이 나오고 특히 우리 민족의 특징인 빗살무늬 토기가 이를 뒷받침한다. 다음 언어학적으로 브리야트 언어는 우리 한국어와 그 문법과 단어가 유사한 것이 많다. 핀란드의 언어학자 람스테트가 젊은 시절 아시아어를 연구코자 일본에 왔는데 한국 유학생을 만나 몇 가지 한국어의 특정을 파악하고 한국어는 우랄 얄타이어 계통이라 했다. 이것이 이후 통설이 되었는데 계속 연구한 람스테트가 말년에 크게 후회하고 한국어는 우랄 알타이어의 할아버지어에 해당한다고 수정하였다. 따라서 몽골, 만주, 터키, 글안, 일본 등 아시아언어는 한국어에서 갈려나간 것이다.
중국 임혜상 교수는 그의 저서 중국민족사에서 바이칼 호 동쪽에 문화민족이 있었으니 바로 신농씨의 원부족이라고 했다. 문화민족이 무엇인가? 원시부족이 아니라는 말이다. 신농씨는 삼황오제의 한분으로 우리 동이문화의 위인 중 하나이고 축융의 후손임을 많은 사서(史書)에 기록되어 있다. 결국 우리 소씨는 다시 말하면 한국인은 6000여 년 전 바이칼 호 근처에서 순록을 사냥하고 바이칼 호에서 어렵을 하며 일부 농사도 짓다가 남하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3. 소(蘇)는 무엇인가?
소는 쇠요, 알이다. 쇠의 고대한자는 銕(철)이다. 즉 동이족이 쇠를 만들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말하는 쇠는 무쇠뿐 아니라 금, 은, 동, 아연 등 모든 금속을 말한다. 고대에는 쇠의 원료를 모래에서 채취했다. 그래서 모래알이란 말이 지금도 있다. 다시 말하면 모래의 알맹이 그것이 쇠의 원료다. 그 알을 채취하는 하천을 ‘알수’ 또는 ‘아리수’라 했다. 그 알을 채취하는 부족이 모여 사는 도시 또는 나라가 ‘아리성’이요 그 알로 쇠를 만드는 곳을 ‘소성’이라 했다. 그래서 아리성 또는 소성은 여러 곳에 있을 수밖에 없고 그것을 채취하는 강도 여러 곳에 있으니 흑룡강, 심양의 소자하, 압록강, 대동강, 한강, 경주 알천의 옛 이름이 모두 아리수다.
그런데 쇠를 만드는 데는 엄청난 고열이 필요하다. 그래서 제철기술자는 불을 관리하는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다. 화정관은 그 부족의 최고 지도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축융이란 바로 화정관이요 제철기술자다. 우리 소씨가 북소, 남소, 서소, 후소 등 여러 곳의 쇠나라 왕으로 봉했던 전통은 적제 축융이 후손들에게 그 제철기술을 물려줬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갈 이야기는 우리나라는 삼국의 시조가 모두 알에서 나왔다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전한다. 사람이 날짐승이나 파충류가 아닌데 어떻게 알에서 나올 수 있겠는가. 모두 제철집단의 대표자 또는 그 출신이라는 사실이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새알로 변형된 것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쇠가 많이 나는 지역은 가야지방이다. 고고학적 유물로 보나 삼국지 동이전 기록으로 보나 쇠를 많이 생산했고 많이 수출한 기록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가야에는 쇠를 만들 수 있는 부족이 많았다. 7개 부족이 있었는데 모두 왕이 되었다. 6가야가 그것이다. 그런데 금관가야에는 2개 부족이 있어 수로와 탈해 부족이다. 결국 치열한 경합 끝에 수로가 왕이 되고 석탈해는 신라로 망명해서 신라의 왕이 된다. 고구려의 주몽은 하백의 외손자라고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되었는데 학자들 해석에는 하백은 물귀신이라고 한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물귀신이 어디 있겠는가. 사실은 우리 소씨 시조 곤오공께서 최초의 하백으로 취임해서 하천을 관리하고 쇳가루를 채취하여 쇠를 만들던 직책이며 아리성(쇠성) 성주로써 수천 년 세습되어 오다가 고조선 말기에 성주 딸 아리낭자(아리랑) 유화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외가의 제철기술을 습득하였기에 소수 인원으로도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한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이기백 교수는 김씨는 소씨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축융 소복해의 자손에서 삼황오제가 나왔는데 그 중의 한분이 소호금천씨다. 그런데 삼국사기 김유신전에는 가야왕족 김씨는 소호금천의 후손이라고 했고 신라 문무왕비에도 소호금천씨의 자손이라고 했으니 소씨에서 나온 것은 맞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중국 땅은 산동반도인데 소호금천씨의 나라가 바로 산동반도에 있었고 그의 묘가 지금도 산동성 곡부에 있으니 그 자손이 한반도에 건너올 가능성은 아주 높다.
우리 성씨 소를 부소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다름 아닌 불쇠 즉 부시를 말한다. 8.15 광복 전까지 각 가정과 담배 피우는 사람들은 부시를 가지고 다녔다. 쑥을 말려 부시깃을 만들고 차돌을 쇳조각(부시)으로 쳐서 불씨를 만들었다.
4. 곤오공(昆吾公)과 소성(蘇城)
축융이 소씨인가? 이에 대하여는 우리 족보 동근보와 부소보에 기록되었을 뿐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우리 소씨는 직계자손이니 구전으로 대대로 이어져 족보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선사시대 인물이므로 실존조차 알 수 없다. 그리고 가장 오래되고 가장 권위 있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차도 축융씨가 간흑 언급되고 있으나 성씨에 관하여는 風, 姜, 姬, 己 등으로 분화되었다고 한다. 조사 결과 축융으로부터 그 자손 중 12대에 관하여는 그 족적과 성씨 등을 문자상으로 규명할 수 있어서 이를 정리하여 우리 진주 소씨 회지 제42호 26페이지에 필자가 발표한 바 있다. 소씨가 문자상으로 정착되고 수천 년간 세습 성씨가 된 것은 곤오공부터이다. 곤오공은 축융의 61세손이고 한, 중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우리의 득성시조라 할 수 있다. 곤오공의 행적에 관하여는 역시 회지 42호에 필자가 연구 발표하였다.
요약하면 3황5제 중 한분인 고신씨(高辛民) 시대에 곤오공은 지금의 하남성 낙양 근처 허창 지역에 있던 곤오국의 제후로 봉해져 있었고 종조부 중여(重黎)는 국정을 총괄하는 대신으로 정치를 잘하여 백성들이 옛날 축융 같다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공공씨의 반란이 일어나자 진압의 명을 받았으나 실패하자 무참히 처형당했다. 이때 진압군에 가담했던 곤오공은 자신도 처형당할까 염려되어 가족을 이끌고 망명길에 올랐다. 고신씨는 군대를 보내 추격하였고 동숙신 홍제는 상장군 역통(力通)을 보내어 응전하고 곤오공은 의병을 모아 수등벌에서 격전 끝에 승리하였다.
이 공로로 홍제는 곤오공을 소성의 하백(河伯)으로 봉하였다. 아마도 곤오공은 곤오나라가 원래 철, 금, 구리가 풍부한 지역으로 제철기술자를 다수 대동하고 망명했음으로 쇠성(소성)의 책임자로 임명된 것 같다. 그래서 본래는 기(己)씨였으나 소(蘇)씨로 성을 바꾸고 오늘날까지 이어온 것이다.
곤오공 슬하에는 소갑(蘇岬), 소환(蘇桓), 소흘(蘇紇) 삼형제를 두었으니 큰아들 소갑은 오늘날 한국 소씨의 큰 맥을 이은 종가가 되었고, 셋째아들 소홀은 서숙신으로 귀환하여 중국 소씨의 시조가 되었다. 필자가 중국에서 발굴한 자료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곤오공의 동숙신 망명 사실도 모르고 있고 소씨 시조는 곤오공의 아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셋째아들 소흘이라는 사실조차 명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러면 소풍(蘇豊) 곤오공이 봉해진 소성은 어디인가? 부소보는 부소갑(扶蘇岬)이라 했다. 부소갑은 또 어디인가? 혹자는 만주 하얼빈이라고 추정하였다. 생각건대 하얼빈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얼빈은 고조선이 있던 요동반도와 너무 떨어져 있어 영토도 아닌 미개지이며 단군조선의 유물인 빗살무늬토기나, 비파형동검, 고인돌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송화강이 직강(直江)으로 쇳가루를 채취할만한 모래톱이나 굴곡진 곳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하얼빈이 대도시화된 것은 불과 100년 전 러시아가 만주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개발하여 도시가 된 것이고 러시아가 개발하기 전에는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하얼빈 명칭 자체가 만주어로 그물을 말리는 곳이다.
그렇다면 부소갑은 어디일까? 필자는 심양 남쪽 소가둔(蘇家屯)이라고 추정한다. 소자하(蘇子河) 변에 있어서 철 생산에 적합하고 위치적으로 고조선 심장부에 가깝고 청동유물이 다량 발굴되기 때문이다. 또한 명칭 자체가 우리 소씨 발생지와 연관성이 많기 때문이다.
5. 소백손(蘇伯孫)과 소벌공(蘇伐公)
곤오공의 70세손 소백손은 고조선 수상 소대알(蘇大閼)의 장남이다. 기원전 3세기말 진한 (秦漢) 교체기에 대륙에 살던 교민과 중국인이 다수 피난하여 몰려들고 위만이 이들을 규합하여 반란으로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백손공은 조선유민과 제철기술자 신유(申有), 진기 (陳岐), 신천(神川), 발산(發山) 등을 인솔하여 경주시 형산 남쪽 국당리 지역에 도착하고 BC 209년 임진년에 나라를 세웠다. 고조선 직할영토가 진한임을 감안하여 후진한이라 국호를 정하고 계속 모여드는 조선유민을 다스리게 되었다.
군주명은 도리(都利)인데 5대를 계속하여 벌공에 이르렀다. 삼국유사에 소벌공은 하늘에서 형산에 내려왔다고 기록되었는데 이것은 조선민족 자신이 하늘나라 백성임을 자처했음으로 조선 본국에서 왔다는 말이고 벌공의 고조부 소백손의 이동 사실이 시간이 많이 흘러 변형된 것이다. 소벌공은 협소한 형산 지역에서 넓고 사철(沙鐵) 채취에 유리한 형산강 상류지역인 오늘날 경주 남산으로 이동하여 고허촌을 건설했던 것이다. 백손공과 같은 이유로 경주지역에는 6개의 집단이 있었으니 이를 통합할 필요가 있어 소벌도리공은 알천(북천) 백사장에 촌장회의를 소집하여 통합국가 건설을 논의하였다.
소벌도리공은 가장 규모가 큰 부족집단의 지도자로서 고허촌에서 왕을 추대하기로 합의하고(나정, 알령정 모두 고허촌 지역에 었다.) 유망한 인재를 양성하여 서라벌을 건국하였다. 박혁거세에 관하여 윤치도(尹致道)씨는 고허촌장에게 영특한 아들이 있어 숙성하고 영위 (英偉)함이 가히 군왕의 기상인지라 육촌장이 합의하여 왕으로 추대하였다고 하여 아예 소벌공의 아들로 간주하였으나 그 때 소별공은 72세요 장남 해리(解利)공은 45세이니 손자라고 하여야 이치에 맞다. 그렇지 않다면 집안에서 가장 유망한 인재였을 것이다. 이때가 BC 57년인데 AD 32년 유리왕 9년에는 각 촌의 이름을 고치고 6성을 하사하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소벌공을 최씨의 조상이라 하고 삼국유사는 정씨의 조상이라고 한다. 우리 상상계보를 보면 모두 맞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소벌공의 증손자 이정(利貞)공이 최씨를 하사받았으며 역시 증손자 소빈(蘇彬)이 정(鄭)씨를 하사받았기 때문에 혈통상으로는 모두 소벌공 자손이다. 중요한 것은 유리왕이 당시의 유력자에게 성씨를 하사한 것이지 그 증조할아버지에게 소급해서 성씨를 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소씨, 박씨, 최씨, 정씨는 다투지 말고 동조동근(同祖同根)임을 서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안동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경주 김씨 김행(金幸)에게 권(權)씨를 하사했으나 혈통상으로는 역시 김알지의 후손인 것과 같다.
6. 진주 소씨와 시조 소경공(蘇慶公)
진주 소씨의 조상은 소벌공의 25세손이며 진덕여왕 때의 상대등인 소경공이다. 소경공은 진골귀족의 수장으로서 왕이 될 수 있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진주로 낙향하여 우리의 직계조상이 되었다. 신라는 엄격한 신분사회로써 각각 신분에 따라 옷 색이 다르고 집 크기가 다르며 관직을 맡을 한계가 있었다. 왕은 부계 모계 모두 왕족인 성골이어야 하고 최고 관직인 상대등, 각간은 한쪽만 왕족인 진골이 아니면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26대 진평왕에 이르러 성골 남자는 아무도 없어 할 수 없이 성골 여자 선덕여왕이 생겼으며 또 그 뒤를 사촌동생 진덕여왕이 계승하게 되었다. 진덕여왕은 진골귀족 중 최고 서열과 전공(戰功)이 뛰어난 소경공을 상대등(영의정)으로 삼고 국정을 주도케 하였다. 진덕여왕이 승하하자 이제는 진골 중에서 왕을 추대할 수밖에 없는데 77세의 소경공은 이때 신노(身老)하다 하여 젊은 진골 중 국제적 명성이 있는 김춘추를 대신 추천함으로써 태종무열왕이 되게 하였다. 태종무열왕은 소경공의 덕행에 보답하는 뜻으로 공의 24대조인 소벌공을 문열왕(文烈王)으로 추봉하였다. 공의 15세손 소계령은 고려 헌종 때 이부상서가 되었으며 따님이 회순왕후(懷純王后)로 봉해져 진산부원군이 되었고 그 후 원종2년에 무숭공(戊崇公)께서 진주로 관향을 공인받게 되었다.
2006년 1월 15일
신라 상대등(上大等) 알천공(閼川公) 46세손 소병석(蘇秉石)
이글은 진주소씨 회지 44호에 게재되었던 것으로 저자의 승인을 받아 옮긴 것입니다.
중국 소씨(蘇氏)의 내력
글쓴이 : 대종회 부회장 소병석
지난 여름 중국을 여행하면서 틈틈이 소씨에 관한 자료를 물색한 결과 다행히 성씨연구회에서 중국 소씨에 관한 내력을 입수하였기에 그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한다. 소씨는 중국의 성씨 중 41번째로 많다. 옛 고서에 의하면 육종의 장자 곤오공의 후대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사마천 사기 초세가의 기록에 의하면 육종은 전욱 고양씨의 현손이었고 6명의 아들 중 장자가 곤오공이였다.
집해(集解)라는 책에는 곤오공의 이름은 번(樊)이고 성은 기(己)씨이며 곤오(昆吾) 나라에 봉해져 호가 곤오가 되었다. 곤오공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라 중엽에 소(蘇)로 봉해졌다.
죽서기년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임금 괴(槐) 33년 곤오의 아들을 유소에 봉해져 유소씨라고도 한다. 소나라의 도성에 대하여 사해(辭海)의 기록에는 지금의 하남 제원 서북에 있다 하고, 지명사전에는 하북 임장현 서쪽에 있다고 한다. 어떤 학자는 하남 휘현시 소령에 있다고도 한다.
주(周) 무왕은 곤오공의 후손 분생(忿生)을 사관(司冠)으로 봉하여 형벌과 감찰을 담당케 하였는데 형벌이 공평하고 백성을 잘 다스려 소나라 왕으로 봉했다. 분생은 도읍을 온(溫)으로 옮겨 온씨라고도 칭한다.
관련된 역사책과 소씨 족보에 의하면 소씨는 지금의 하남성 온현(溫顯) 무척(武陟) 심양(沁陽) 일대에 대대로 살아왔다. 진나라 때는 일부가 호남, 호북으로 이주하여 살았고 동주의 낙양에 일부가 거주하였다고 한다.
춘추시대 초장왕에게는 대부(大夫) 소종(蘇從)이 있었고 전국시대에는 낙양 출신 소진(蘇秦), 소대(蘇代), 소역(蘇繹) 삼형제가 있었다. 한나라 초에는 통일천하를 잘 다스리기 위하여 인구를 재배치했는데 이 때 소씨의 일부는 무공의 두릉(武功 杜陵)으로 옮기고 후에 일부는부풍 평능(扶風 平陵)으로 옮겼는데 모두 큰 부족으로 발전하였다.
무공(武功) 소씨의 일부는 서진(西晉) 말엽에 양양에 거주하였고, 일부는 섬서성의 남전(藍田)에 거주하였다. 부풍(扶風) 소씨의 후손은 한단(邯鄲)에서 관직을 하고 현지에서 정착하여 조군(趙郡) 소씨를 형성하였다. 오호 16국 시대에 중원 토족이 대부분 남쪽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소씨도 강소성과 절강성 일대에 정착하였다. 당나라 때 조군 소씨의 일부는 사천성으로 옮기고 하남 소씨는 일찍이 두 번이나 복건성으로 옮겼다. 한번은 초기 진정(陳政), 진원광(陳元光) 부자를 따라 민(閔)나라에 들어가서 장주(章州)를 만들었고, 한번은 당나라 말기에 민나라에 들어가 정착하여 큰 부족으로 발전하였다.
일찍이 호남신화(湖南新化) 안화매산(安化梅山) 일대의 소씨는 매산만(梅山蠻)으로 불렸으며, 일부는 요족(搖族)으로 융화되었다. 북송 희령(熙寧) 5년(1072) 장돈(章惇)이 매산만을평정하고 많은 사람을 살육하였다. 소씨는 다행히 살육에서 벗어나 남쪽으로 광서성, 광동성, 운남성으로 도망하고 일부는 베트남, 라오스, 태국 북부산악지역으로 피난하였다. 북송 때 선화진사(宣和進士) 소흠(蘇欽)은 가보와 족보를 작성할 때 선유남문, 홍화함두, 천주, 진강, 동안, 남안, 탑구, 영훈, 용계, 대만 각처에 흩어져 거주했다고만 했다. 북송 때부터 이미 소씨족이 대만에 이주하여 살았다. 명청(明淸) 양대에 더욱 많은 소씨들이 대만에 들어가 살았고 일부는 정성공이 대만을 수복할 때 따라가 황무지를 개간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 후 이들 중 일부는 동남아시아와 유럽과 미국 등 나라에 이주, 화교가 되었다. 소씨는 중국 문명과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공헌했으며 수 많은 저명한 인물을 배출하였다. 전국시대 소진은 종횡가로서 낙양 사람이며 다재다능한 종합적인 지략가로서 육국이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여야 한다고 각국을 설복하여 육국의 정승을 겸했으며 10 여 년간이나 진나라가 감히 함곡관 동쪽으로 병력이동을 못하게 하였고, 동생 소대는 제나라와 연나라에서 활동하였고 동생 소역도 종횡술을 익혔다. 마왕퇴에서 출토한 백서 ‘전국종횡가서에는 소진의 서신과 여행기 16 건이 보존되어 있다. 한나라 때 소무(蘇武)는 무릉 소씨로 기원전 100년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19년간이나 구류를 당했다. 많은 위협을 당하고 바이칼 호에 끌려가서 양을 키워 살았지만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후한 때 부풍 평릉 소씨 소장(蘇章)은 무원령 관직 때 흉년을 만나도 기름진 땅을 찾아 일궈 백성의 기아를 구했다. 기주자사로 있을 때는 법을 잘 준수하고 사리사욕이 없었으며 의지가 강인했었다. 진(晉)나라 때 정현 사람 소준(蘇埈)은 수천 명의 유랑민을 규합하여 자위 조직을 만들고 남쪽으로 진격하여 동진 초기 관군장군이 되었으며 군대를 이끌고 건강(강소성 남경)을 공격하여 딘독으로 정부를 세웠다. 16세기 전진(前奏)의 여류시인 소혜(蘇蕙)는 무공 소씨로 비단에 ‘회문선도시’를 수놓아 남편에게 보내 그리움의 감정을 잘 표현해 유명하고, 서위(西魏) 무공사람 소작(蘇綽)은 상서 겸 사농경(司農卿)으로 제도를 개혁하였다. 그 아들 소위(蘇威)는 수나라 대신으로 임금에게 건의하여 백성들의 부역을 감해주고 울령격식을 제정하였다. 당나라 때는 소씨가 5명의 재상을 배출했으니 소양(蘇良), 소환(蘇環). 소미도(蘇味道), 소정(蘇廷), 소검(蘇檢)이다. 그 중 소미도, 소정은 모두 유명한 문학가였다. 또한 대장군 소정방, 시인 소원명도 있었다.
북송 때 사천 소씨는 문단에서 혁혁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미산(사천성) 사람 소식(소동파)은 저명한 문학가, 서화가였으며 시의 품격이 독특하고 청신, 건강하였으며 단어가 호방하여 후대에 매우 영향이 컸었다. 그중 서법은 낭만적이었고 일취월장하여 문장의 기세가 웅장하고 성대하였다. 그의 아버지 소순(蘇洵)과 동생 소철(蘇轍)도 산문학의 대가로 이들을 합하여 삼소라 하고 당송(唐宋) 시대 8대가 중 3명이 모두 포함되었다. 소동파의 아들 소과역(蘇過亦)도 문학가였다.
삼소와 동시대 시인 소순흠(蘇舜欽)은 재주동산(梓州銅山) 사람으로 천문학자이며, 의학자 소송(蘇頌)은 천주(泉州) 사람으로 한공렴 등과 ‘수운의상대’를 만들고 저서로 ‘신의상요법’, ‘도경본초’가 있는데 약물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원나라 때 소천작(蘇天爵)은 강남행대에서 감찰어사로 활동할 때 백성들의 억울한 죄를 재심리하어 진실을 밝혔고 숙정방렴사 때는 개혁정치를 하였다. 청나라 말기에는 고급 장령으로 소천복과 소원훈이 있었고, 중국 무산계급 혁명가이며 중국 공산당 초기 저명한 노동운동 지도자인 소조정(蘇兆征)이 있다.
대개 이상과 같이 요약되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곤오공의 실체에 대해서는 한중(韓中) 모두 일치하나 중국에서는 곤오공이 동숙신(환국)에 망명하였고 한국에서 소성의 하백이 되어 기씨 성을 소씨로 바꾸어 소씨의 조조(肇祖)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고, 곤오공의 셋째 아들 소흘(蘇訖)이 중국에 들어가서 중국 소씨의 시조가 되었는데 이 사실도 모르는 채 곤오공에게 아들이 있었다고 막연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곤오공의 이름이 번(樊)이라는 사실과 중국 역사상 많은 소씨들의 활약상과 출신지를 소상히 밝혔다는 점이다. 우리 족보와 함께 서로 보완하면 소씨의 내력이 보다 자명해질 것으로 믿고 여러 종친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
끝으로 이 글을 씀에 있어서 상원공파 회장이신 도일(道一) 회장님의 도움이 컸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감사를 드립니다.
2005년 12월
경공 46세손 소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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