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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과 문정왕후 윤 씨의 아들인
제13대 명종(1534~1567)과
인순왕후(1532~1575) 심 씨의 능인
강릉
[강릉은 중종과 문정왕후 윤 씨의 아들인 제13대 명종(1534~1567)과 인순왕후(1532~1575) 심 씨의 능이다.
명종은 후사 없이 죽은 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으로 등극한 후부터 8년간 문정왕후 윤 씨가 섭정했고 155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친정했지만 외척인 윤원형, 윤원로 등에 의해 정사가 좌지우지되면서 혼란을 겪었다.
인순왕후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1543년 경원대군(명종)과 가례를 올리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명종이 죽은 후 선조가 즉위하자 잠시 수렴청정을 했다. 1569년(선조 2)에 의성(懿聖)이라는 존호가 진상되었다. 아들 순회세자를 일찍 잃고 이복 조카인 하성군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사망했다.]
강릉에 관한
안내문
중종과 문정왕후 윤 씨의 아들인
제13대 명종(1534~1567)과
인순왕후(1532~1575) 심 씨의 능인
강릉
조선 제 13대 왕, 明宗
수렴청정의 그늘에서 시름의 세월을 보내다
시대 : 조선
출생 : 1534년(중종 29)
사망 : 1567년(명종 22)
본명 : 이환(李峘)
본관 : 전주(全州)
목차접기
후사 없이 죽은 인종의 뒤를 잇다
을사사화, 소윤의 세상이 오다
수렴청정의 그늘
들끓는 민란과 임꺽정의 출현
소윤의 몰락 그 후, 짧았던 명종의 친정
후사 없이 죽은 인종의 뒤를 잇다
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명종은 1534년(중종 29)에 중종과 셋째 부인인 문정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인종의 이복동생으로, 출생과 함께 경원군(慶源君)에 봉해지고 인종이 즉위한 1544년(인종 1)에 경원대군(慶源大君)에 봉해졌다. 이름은 환(峘), 자는 대양(對陽)이다.
중종의 첫 번째 계비이자 인종의 모후인 장경왕후 윤씨는 인종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그 후 중종의 두 번째 계비로 궁에 들어온 문정왕후 윤씨는 세자인 인종을 친아들처럼 대하고 인종 역시 문정왕후에 대한 효성이 극진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중종의 둘째 아들인 경원군을 낳은 후로 태도가 돌변했다. 경원군은 자랄수록 총명하고 의젓해졌다. 게다가 세자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때부터 문정왕후와 그의 오빠 윤원로, 동생 윤원형 등의 소윤 일파는 왕의 자리를 탐내기 시작했다. 이는 세자 비호 세력인 대윤과의 정치적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가운데 중종이 죽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윤과 소윤의 정치적 대립은 일단 대윤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마음이 급해진 문정왕후와 소윤은 왕이 후사가 없으니 경원대군을 세제로 책봉해 종사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했다. 그런데 세제 책봉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인종이 8개월의 짧은 치세를 끝으로 죽고 말았다. 인종은 죽기 전 경원대군에게 전위한다는 전교를 내렸다. 결국 경원대군을 왕으로 삼고자 했던 문정왕후와 소윤 일파의 꿈은 이루어졌다.
1545년(명종 즉위) 7월 6일 명종이 즉위했다. 이때 나이 12세였다. 너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윤원형을 비롯한 소윤 일파가 정치 전면에 드러나면서 실세로 부상했다.
명종의 비는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로 심강(沈鋼)의 딸이다. 1542년(중종 37)에 경원대군과 혼인했으며, 명종의 즉위와 함께 왕비에 책봉되었다.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는 1551년(명종 6)에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낳았다. 순회세자는 명종의 유일한 자식이다. 1557년(명종 12)에 7세의 나이에 세자에 책봉되었고 2년 후 윤옥(尹玉)의 딸과 혼인까지 했으나 1563년(명종 18)에 13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죽었다. 명종은 6명의 후궁을 두었으나 그 사이에서는 모두 자식을 보지 못했다.
을사사화, 소윤의 세상이 오다
명종의 즉위와 함께 정권을 잡은 소윤 일파는 곧바로 정적인 대윤 일파를 비롯해 자신들의 뜻에 반하는 세력들을 제거했다. 이른바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킨 것이다. 사화로 불리는 이유는 대윤 일파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사림들이 화를 입었기 때문이다.
을사사화를 주도한 인물은 윤원형과 결탁한 이기(李芑)였다. 이기는 인종이 즉위하고 대윤이 정권을 잡았을 때 탄핵된 인물로, 대윤인 윤임, 유관, 유인숙 등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명종의 즉위와 함께 조정에 복귀한 이기는 양사(兩司)를 앞세워 윤임, 유관, 유인숙을 탄핵했다.
그런데 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사화로까지 비화되었다. 백인걸(白仁傑)을 비롯한 사림들이 윤임 등에 대한 탄핵이 정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대비(문정왕후)는 노여워하며 백인걸을 의금부에 가두는 한편 백인걸에게 동조했던 양사의 관원들을 파직시켰다. 또한 이미 탄핵된 윤임 등을 귀양 보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권벌(權橃)이 유관과 유인숙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서 소윤파인 정순붕(鄭順朋)은 권벌이 역적들을 옹호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윤임, 유관, 유인숙은 사사되었으며, 그들을 옹호했던 권벌도 체직(遞職)되었다.
여기에다 김명윤(金明胤)이 성종의 아들인 계성군(鷄城君)의 양자이자 윤임의 생질인 계림군(桂林君)과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鳳城君)이 역모를 꾸몄다고 고변하는 일이 일어났다. 고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계림군 이유(李瑠)는 윤임의 3촌 조카로서, 윤임이 그에게 의지해 흉측한 모의를 했으니 이유도 반드시 그 실정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미 그 실정을 알고서도 즉시 고변하지 않았으니, 용서할 수 없는 죄이어서 당연히 처치한 바가 있어야 할 터인데도 조정에서는 아직까지 처치함이 없습니다. 이는 필시 범죄의 괴수가 이미 제거되었으니 이런 것쯤은 염려할 것이 없다고 여겨 버려두고 거론하지 않는 것일 겁니다. ……봉성군 이완(李岏)은 신의 죽은 아내의 가까운 친척인데 나이가 아직 어리니 필시 계략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완이 여러 왕자군(王子君) 중에서 조금 뛰어나다고 해 무지한 무리들 중에 간혹 칭찬하는 자가 있으니, 국가가 위험한 시기를 당해 공훈을 탐내고 재앙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이에 의지해 반란의 계제로 삼을 자가 없다고 또한 보장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처치하소서. - 《명종실록》 권 2, 명종 즉위년 9월 1일
이 일과 관련해 이미 사사된 윤임, 유관, 유인숙의 아들들과 계림군의 친인척 그리고 봉성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혐의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잡혀와 고초를 받고 좌천되는 등 피해를 입었다.
을사사화로 소윤 일파는 확실하게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이후에도 윤원형 등은 양재역 벽서사건(정미사화), 이홍윤(李洪胤) 역모 사건(이홍남 고변 사건) 등을 일으키며 자신들의 뜻에 반하는 정적들을 제거해 나갔다.
수렴청정의 그늘
명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모후인 문정왕후가 8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문정왕후는 '타고난 자질이 영명(英明)하고 성도(聖度)가 강정(剛正)'하며, '규문(閨門)이 법도가 있고 내정(內庭)이 엄숙'했다. 소윤 일파와 더불어 정국을 이끌어 감에 있어서 정사에 비판적인 인사들을 가차 없이 내치는 등 단호한 면모를 보였다. 명종은 명색이 왕이었지만 모후의 그늘에 가려 전혀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이는 비단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만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 친정을 하게 된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임금이 나이 이미 장성했으므로 대비가 비로소 환정(還政)했다. 따라서 마음대로 권력을 부리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만일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곧 국문(國文)으로 조목을 나열해 중관(中官)을 시켜서 외전에 내어 보냈다. 임금이 보고 나서 일이 행할 만한 것은 행하고, 행하지 못할 것이면 곧 얼굴에 수심을 나타내며 그 쪽지를 말아서 소매 속에 넣었다. 이로써 매양 문정왕후에게 거슬렸으므로 왕후는 불시에 임금을 불러들여, "무엇 무엇은 어째서 행하지 않느냐." 하고 따지면 임금은 온순한 태도로 그의 합당성 여부를 진술했다. 문정왕후는 버럭 화를 내어 "네가 임금이 된 것은 모두 오라버니와 나의 힘이다." 했다. 어떤 때는 때리기까지 해 임금의 얼굴에 기운이 없어지고 눈물 자국까지 보일 적이 있었다. - 《연려실기술》 권 10, 명종 조 고사본말
사정이 이러하니 명종에게는 '눈물의 왕'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명종이 스스로 정치적 견해를 밝히고 자신의 의지대로 정책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모후인 문정왕후와 외숙인 윤원형을 비롯한 소윤 일파의 벽을 뛰어넘어야 했다. 그러나 명종에게는 자력으로 친정 체제를 구축할 힘이 없었다.
문정왕후가 집권하는 동안 가장 눈에 띄는 정책 변화는 불교 중흥책이었다. 역대 왕들 중에도 개인적인 불심 때문에 억불숭유(抑佛崇儒)의 국시를 어기고 불교를 장려한 경우가 있었지만, 문정왕후처럼 정책적, 전폭적으로 불교를 지지하고 장려한 경우는 없었다.
문정왕후의 불교 정책을 이끌어 간 핵심 인물은 보우(普雨)라는 승려였다. 정만종(鄭萬鍾)의 추천으로 문정왕후와 인연을 맺은 보우는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고 불교를 개혁하고 중흥시키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성종 대에 폐지된 도첩제(度牒制)를 부활시켜 불법승의 폐해를 없애려고 했다. 또한 강제로 통합되었던 양종(兩宗)을 다시 분리해 봉은사(奉恩寺)에 선종을, 봉선사(奉先寺)에 교종을 두었다. 이러한 보우의 불교 정책은 성리학을 중시하는 관료들과 유생들의 반발을 샀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비호 아래 보우는 승승장구했다. 세간에서는 권력에 붙어 불교를 일으키려고 하는 보우를 '요승(妖僧)'이라고 헐뜯기도 했다.
그러나 보우의 불교 중흥 정책은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죽으면서 끝나고 말았다. 일찍 죽은 순회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규모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문정왕후의 죽음 이후 보우는 처단되었으며, 15년 동안 추진되었던 불교 중흥 정책도 모두 취소되었다.
들끓는 민란과 임꺽정의 출현
조선 중기인 15, 16세기는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져 도적떼가 들끓고, 크고 작은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흉년이 겹치고 왕과 권신들이 토지를 독점하면서 먹고 살기가 힘들어진 농민들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스스로 도적의 소굴로 들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왜구들의 노략질도 백성을 괴롭혔다. 1555년(명종 10)에는 대마도 등에서 거주하던 왜인들이 배 70여 척을 이끌고 쳐들어와 전라도 일대에서 대규모 노략질을 했다. 이 사건을 을묘왜변(乙卯倭變)이라 한다. 중종 시절에 발생한 삼포왜란 이후 줄어든 교역량에 불만을 품은 왜구들의 도발이었다. 을묘왜변을 계기로 임시기구였던 비변사가 상설기구로 되었다.
한편 명종 대에 이르러 도적들이 많이 일어났는데, 그중에서도 임꺽정이라는 희대의 도적이 출현해 조정에서는 임꺽정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임꺽정은 황해도 지역을 기반으로 전국에 걸쳐 활동했는데, '의적(義賊)'이라고 불리며 백성들의 비호를 받기도 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조정에서는 임꺽정의 무리를 소탕하기 위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이러한 논의가 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영의정 상진, 좌의정 안현, 우의정 이준경, 영중추부사 윤원형이 함께 의논해 아뢰었다. "개성부도사를 무신으로 뽑아 보내라는 상교(上敎)가 지당하나, 비록 무신을 뽑아 보내더라도 별다른 조치 없이 일상적으로만 해 나간다면 오히려 이익됨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요사이 많은 강적(强賊)들이 본부(本府)의 성저(城底)에 몰려들어 주민을 살해하는 일이 매우 많은데도, 사람들은 보복이 두려워 감히 고발하지 못하고, 관리들은 비록 보고 듣는 바가 있어도 매복을 시켜 포착(捕捉)할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합니다.
지난날 임꺽정을 추적할 즈음에 패두(牌頭, 개성부 포도관이었던 이억근을 이름)의 말을 듣지 않고 군사 20여 명만을 주어 초라하고 서툴게 움직이다가 마침내 패두가 살해당하게 되었는가 하면, 바로 뒤를 이어 적을 끝까지 추격하지 않았다가 끝내 적들이 멋대로 날뛰게 했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무신을 보내 포착할 방법을 강구해서, 혹은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기도 하고, 혹은 문견(聞見)을 근거로 추적하기도 해 반드시 포착할 것을 기하게 해야 합니다." - 《명종실록》 권 25, 명종 14년 3월 27일
조정의 임꺽정 소탕 작전은 3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다 1560년(명종 15)에 임꺽정 패거리의 모주(謀主)인 서림이 잡히면서 그와 관련된 정보를 고했고, 이를 바탕으로 관군이 출동해 임꺽정과 그 일당을 잡아들였다. 임꺽정은 무리를 이끌고 구월산으로 들어가 끝까지 항전했지만 결국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임꺽정의 출현과 도적떼들의 잦은 민란은 당시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했는지를 보여 주는 단면이다. 민생이 피폐해진 데는 자연재해로 인해 흉년이 겹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권신들이 득세하면서 정치가 문란해졌기 때문이었다. 힘 있는 사람이 토지와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는 사회·경제적 착취가 극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소윤의 몰락 그 후, 짧았던 명종의 친정
명종은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둔 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인순왕후의 외삼촌인 이량(李樑)을 기용한 것이 대표적인 일이다. 즉, 외척인 윤원형을 또 다른 외척으로 견제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력을 키운 이량이 잔존 사림 세력을 제거하려다 인순왕후의 동생인 심의겸(沈義謙)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량은 생질인 심의겸이 사림 세력과 가깝게 지내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를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역으로 당하고 만 것이다. 이제 조정에는 윤원형과 심의겸이라는 두 외척 세력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것이 문정왕후가 죽기 직전까지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 일파의 권세도 영원하지는 않았다. 특히 문정왕후가 죽으면서 세상은 이들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명종 역시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친정 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숙인 윤원형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양사의 탄핵을 받은 윤원형은 1565년(명종 20) 8월에 삭탈관작되어 귀양갔다. 그리고 정권을 잡은 20년 동안 함께 악행을 저질렀던 처 정난정(鄭蘭貞)과 함께 귀양지에서 죽었다.
비로소 명종은 인재를 고루 등용하며 소신 있게 정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사림의 전성기가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명종의 치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명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죽고 난 지 불과 2년 만인 1567년(명종 22) 6월에 3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명종은 갑자기 병세가 위독해지는 바람에 왕위 계승자를 미처 정하지도 못했다. 이에 영의정 이준경이 명종비인 인순왕후에게 물어 생전에 정해 놓은 덕흥부원군(德興府院君)의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을 입승대통(入承大統)시켜 후계를 잇게 하니, 이가 선조이다.
명종의 시호는 공헌(恭憲)이며, 능은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강릉(康陵)이다. 강릉은 문정왕후의 묘인 태릉(泰陵) 옆에 있다.
강릉 홍살문
[태릉&강릉] 안내도
2022년11월11일 서울 노원구 [ 태릉 & 강릉 & 노원불빛정원 & 서울여자대학교 & 육군사관학교 ] 탐방기 09:27~10:21 3호선 연신내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출발하여 약수역에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서울 노원구 화랑로 지하 510 번지에 있는 6호선 화랑대역으로 이동 [54분 소요] 탐방지 : 서울 노원구 [ 태릉 & 강릉 ] 탐방코스: [ 화랑대역 4번 출구 ~(2.7km)~ 태릉 입구 ~ 태릉 탐방 ~ (태릉~강릉) 연결 숲길 ~ 강릉 탐방 ~(2.2km)~ 육군사관학교 제2 정문 ] 일시 : 2022년 11월 11일(금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1시간53분 소요) * 10:21~10:43 서울 노원구 공릉동 282-6 번지에 있는 6호선 화랑대역 4번 출구에서 탐방 출발하여 태릉으로 이동 [22분 소요] * 10:43~11:09 태릉(泰陵) 탐방 [태릉은 제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1501~1565) 윤 씨의 능으로 봉분 1기만 있는 단릉이다. 문정왕후는 중종과 인종, 명종 3대에 걸쳐 왕비와 대비로 있으면서 정권에 개입하는 등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조선을 회오리바람 속으로 몰아넣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문정왕후에 관한 일화는 워낙 많지만 을사사화와 연계된 정난정의 일화는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다. 그녀의 아버지 정윤겸은 부총관을 지냈지만 어머니는 관비 출신이므로 위계가 철저한 조선에서 그녀가 일어설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난정은 이 기회를 반전시키기 위해 우선 기생이 되었다. 고관과 자주 어울릴 수 있는 기생은 격이 낮은 여자가 신분 상승을 꾀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녀는 바람대로 문정왕후의 남동생인 소윤 윤원형의 첩이 되었다. 마침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고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정계는 모두 윤원형 쪽으로 쏠린다. 곧바로 윤원형은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인종의 외척 윤임이 그의 조카 봉성군에게 왕위를 주려 한다고 무고한다. 이는 인종의 외척인 대윤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의 권력 다툼으로, 결국 대윤의 우두머리인 윤임 등이 반역 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고 만다. 이를 '을사사화'라고 한다. 이 기회를 이용해 정난정은 윤원형의 정실 김 씨를 몰아낸 다음 적처가 되고,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해 전매·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한다. 그럼에도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했고, 1553년에는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이 되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정난정에 대한 사가들의 평은 비난으로 꽉 차 있지만 그녀는 윤원형을 움직여 적자와 서자의 신분 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했다. 당시로서는 신분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획기적인 정책으로 좌절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문정왕후는 당의 측천무후, 청의 서태후와 비교될 정도로 억척같은 집념으로 아들을 왕으로 만든 여인이다. 그러나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8년 동안 국정을 지휘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문정왕후의 가장 큰 피해자로 그의 아들인 명종이 손꼽히기도 한다. 왕이 된 아들에게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겠느냐?"라며 호통을 치고, 왕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회초리까지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종을 눈물로 왕위를 지킨 왕으로 기억한다.] * 11:09~11:31 (태릉~강릉) 연결 숲길을 걸어서 강릉(康陵)으로 이동 * 11:31~11:52 강릉(康陵) 탐방 [강릉은 중종과 문정왕후 윤 씨의 아들인 제13대 명종(1534~1567)과 인순왕후(1532~1575) 심 씨의 능이다. 명종은 후사 없이 죽은 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으로 등극한 후부터 8년간 문정왕후 윤 씨가 섭정했고 155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친정했지만 외척인 윤원형, 윤원로 등에 의해 정사가 좌지우지되면서 혼란을 겪었다. 인순왕후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1543년 경원대군(명종)과 가례를 올리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명종이 죽은 후 선조가 즉위하자 잠시 수렴청정을 했다. 1569년(선조 2)에 의성(懿聖)이라는 존호가 진상되었다. 아들 순회세자를 일찍 잃고 이복 조카인 하성군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사망했다.] * 11:52~12:14 서울 노원구 공릉동 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제2정문으로 이동하여 태릉과 강릉의 탐방 완료 탐방지 : 서울 노원구 [ 노원 불빛정원 & 서울여자대학교 ] 탐방코스: [ 서울 노원구 공릉동 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제2정문 ~ 노원 불빛정원 ~ 서울여자대학교 정문 ~ 서울여자대학교 캠퍼스 ~ 육군사관학교 제2정문 ] 탐방일 : 2022년 11월 11일(금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1시간12분 소요) 12:14~12:17 서울 노원구 공릉동 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제2정문에서 탐방 출발하여 노원불빛정원으로 이동 12:17~12:47 노원불빛정원(화랑대 철도공원)을 탐방 12:47~12:51 서울여자대학교 정문으로 이동 12:51~13:21 서울여자대학교 캠퍼스를 (50주년 기념관~기독교 교육관~인문사회관~중앙도서관~조형예술관~ 고명우 기념관(대학원 건물)~학생누리관~바롬인성교육관~대강당)의 코스로 탐방 13:21~13:26 서울 노원구 공릉동 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제2정문으로 원점회귀하여 탐방 완료 13:26~14:14 육군사관학교 제2정문 옆에 있는 행정안내소에서 신분증 제출하고 출입증 수령 후 준비해온 간식으로 식사 [육사 관광은 희망일 3일 이상 전에 육사 사이트 온라인서비스 섹션에서 미리 신청하여 승인을 받아야 한다. 육사 방문 가능일 : 화 ~ 금요일 육사 관광 시간(1일 2회) : 오전 10:00~12:00, 오후 2:00 ~ 4:00 금요일 오후 2시 30분에는 생도들이 실시하는 열병식인 화랑의식을 볼 수 있다.] 탐방지 :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화랑대 8경 :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의 경관과 군사문화 전통을 팔경으로 형상화하여, 화랑대의 4계절 8개 경치를 교훈ㆍ사관생도 신조ㆍ군인관ㆍ사생관 등 의미와 결합해 구성했다. ◀ 제1경 고(故) 강재구 소령 동상.그 앞을 지나며 추모하는 생도 퍼레이드 모습 - 부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 같이 바쳐 부하사랑을 실천한 故 강재구 소령의 살신성인 정신을 본받는다. ◀ 제2경 호국로에 피어난 벚꽃 아래를 걷는 생도 기마 대열 -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인자하지만 자신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게 수신(修身)할 것을 다짐한다. ◀ 제3경 초여름 하늘 위로 우뚝 솟은 교훈탑 - 장차 조국의 국방을 책임질 지(智)·인(仁)·용(勇)을 갖춘 호국 동량들의 기세가 하늘 높이 치솟는다. ◀ 제4경 한여름 범무상·쌍사자상 분수 - 범무상(汎武像)과 쌍사자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름 분수를 보며 뜨거운 열정을 불태우는 청년 사관들이 항재전장 상무정신을 되새긴다. ◀ 제5경 화랑연병장에서 행진하는 생도들의 힘찬 퍼레이드 - 삼국 통일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예전 화랑들. 이에 못지않은 기백을 가진 청년 사관들의 위풍당당한 ‘용(勇)’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 제6경 오색단풍이 물든 늦가을 화랑대 교정 - 생도들이 가을 정취 가득한 낭만적인 화랑대 교정에서 동료애를 나누며 문학과 예술에 심취해 엘리트 장교의 소양을 키운다. ◀ 제7경 겨울 눈 속의 호국 비 - 호국 비를 보면서 위국헌신의 사명감과 가치관을 내면화·신념화한다. 비문은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 제8경 눈보라 속의 화랑 연병장 풍경 - 혹한 속에서도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같이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의연함과 초지일관의 가치관을 품고 있다.] [육사 교정은 군인 양성 기관인만큼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에 근엄하고 차가운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강철희 한국건축가협회장은 “육사 교정은 김중업·김수근·이광노·김종성 등 대한민국 1세대 건축 거장들의 작품이 다 모여있는 ‘한국 현대 건축의 미니 박물관’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학교본부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설계한 고(故) 무애 이광노 건축가의 작품이다. 육사 지휘부가 입주했고 석조 건축물이다. 지하 1층~지상 3층, 연면적 6000㎡ 규모로 1980년 완공했다. 이광노 건축가는 1975년 국회의사당을 짓자마자 학교본부 설계에 착수했다. 그러다보니 국회의사당과 외관이나 구조적 측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국회의사당의 경우 1층 중앙로비인 로텐더홀은 천장이 높아 웅장한 느낌을 준다. 육사 학교본부도 비슷하다. 1층에 들어가면 천장이 3층 높이여서 시원스럽다. 눈에 띄는 점은 국회의사당과 달리 돔이 없다는 것. 학교본부 지붕은 사각형 로비에 어울리도록 초가지붕 모양이다. 박영준 육사 토목환경학과장은 “초가집은 겸손과 겸양, 섬김의 대명사로 군대 지휘부가 갖춰야할 덕목”이라며 “국가의 리더가 될 생도들이 교육생 시절에 배워야 할 덕목을 건물 설계에 녹여냈다”고 했다.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 고(故) 김중업 건축가는 프랑스 대사관, 삼일빌딩,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 등을 설계했다. ‘현대건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기도하다. 그는 1981년 육군박물관을 설계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군사박물관으로 1983년 지하 1층~지상 3층 규모로 준공했다. 전시실 2개와 강당 등으로 이뤄졌다. 전시실로 올라가는 1층 계단 창문에는 3층 천장까지 스테인드 글래스로 처리했다. 이 창문엔 사물놀이패가 신명나게 노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2층의 1전시실은 고대실로, 3층의 2전시실은 현대실로 각각 운영한다. 고대실은 선사시대부터 광복까지의 군사 자료 약 1000점이, 현대실엔 6·25전쟁과 월남전 참전 기념물, 평화유지군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최근엔 마지막 남은 대한제국 장교였던 황석 부위가 입었던 예복이 박물관에 기증됐다. 이 건물은 외관이 독특하다. 직사각형 모양 사무동 건물과 원형의 박물관 등 두 개의 매스로 이뤄져 있다. 하늘에서 보면 마치 열쇠처럼 생겼다. 그래서 육사 생도들 사이에선 ‘조국 통일의 열쇠’가 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당시 박물관 설계에 참여했던 곽재환 칸건축 대표의 설명은 전혀 다르다. 그는 “박물관이 ‘장구’를 형상화했다거나 ‘열쇠’ 모양이라는 건 엉뚱한 이야기”라고 했다. 안중근 의사를 떠올리며 ‘위국헌신 군인본분’의 핵심 메시지인 충성의 ‘충(忠)’을 은유해서 설계했다는 것. 곽 대표는 “박물관이 육사의 중심이고, 우리나라의 중심이자 세계의 중심이 되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했다. 실제로 건물 가운데 원통형 중정(中庭)은 ‘가운데 중(中)’을 형상화했고, 건물 중앙에 설치했던 분수는 ‘마음 심(心)’을 상징한다는 것. 다만 원래 분수였던 중정은 관리상 이유로 철거했다. 육사 관계자는 “박물관 유물에 습기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이유로 분수를 없앤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철거 후엔 원형 울림통 효과가 있어 공연장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했다. 이에 대해 곽 대표는 “유물 보존 대책은 다른 대안이 많지만 박물관에서 분수를 없애면 하늘의 마음을 담고자 한 김중업 선생의 설계 의도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건물 외벽은 기와색 삼각벽돌로 둘렀다. 삼각형이어서 빛에 따라 형상이나 빛깔, 색이 달라진다. 이 삼각벽돌은 솔가지를 태워 색을 입힌 것으로 기와를 만들 때 쓰는 전통 가마 방식이다. 당대 최고 벽돌장인 김영림씨가 제작했다. 박물관 기둥은 군인의 ‘세워총’ 자세를 형상화했다. 사각형 건물 끝엔 비상계단이 있는데 일부러 방향을 비스듬히 해 건물과 별개인 조형물처럼 보이는 효과를 주었다. 빗물을 받는 물홈통은 잔 모양으로 디테일을 살렸다. 육사기념관은 일명 ‘교훈탑’으로 불린다. 1962년 5월부터 사용한 교훈인 ‘참되게 자라자, 배워서 이기자, 나라를 빛내자’를 ‘지(智)·인(仁)·용(勇)’으로 다시 환원하면서 건립이 구상됐고, 이후 졸업생의 성금으로 1986년 준공했다. 김중업 건축가와 함께 한국 현대 건축의 양대 거장으로 평가받는 고(故)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했다. 김수근 건축가는 이 건물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기념관은 지상의 탑과 지상 1층~지하 2층 기념관으로 구성된다. 탑 높이는 64m로 ‘육사’를 상징하며, 탑을 받치는 5개의 지주는 육군의 별을 상징한다. 항간에는 “오각성(五角星) 탑이 제5공화국을 상징하는 것 아니냐”는 소문도 있다. 하지만 김수근 건축가와 함께 일했던 김원석 공간건축 고문은 터무니없다고 했다. 그는 “오각별은 군에서 그 자체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면서 “5공화국과 관련된 건 없다”고 했다. 육사기념관 1층엔 학교 역사관과 전사자실이 있다. 눈에 띄는 건 1층 외벽에 개교 이후 74기(2018년)까지 졸업생 명단이 한 명도 빠짐없이 동판으로 새겨져 있다는 것. 김원석 고문은 “졸업생들이 할아버지가 되더라도 긍지를 갖고 손자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게 해놓은 것”이라고 했다. 지하 2층엔 생도생활 등을 엿볼 수 있는 전시관이 있다. 꼭대기층엔 바닥면적 70㎡ 규모의 십오각형 모양 전망대가 있다. 육사 교정 전체와 태릉 일대를 볼 수 있어 조망이 뛰어나다. 탑이 지어진 1986년은 육사 개교 40주년이었는데, 10년 뒤 50주년인 1996년 기념관 형태로 바뀌었다. 그 전엔 지하에 식당과 카페테리아가 있었다. 육사도서관은 1982년 준공했다. 지하 1층~지상 2층, 연면적 6753㎡(약 2000평)짜리 건물이다. 생도교육과 학술 정보 지원 목적으로 대우그룹이 지어 기증했다. 건물에 우당(愚堂)이란 이름이 붙어있는데,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부친의 호를 썼기 때문이다. 이 도서관은 건축 당시엔 국내에서 보기 힘든 개가식(열람자가 서가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도서관)으로 설계했다. 설계자인 김종성 건축가는 “지금이야 대부분 도서관이 개가식이지만, 당시엔 도서가 분실·훼손될 것을 우려해 흔치 않았다”며 “주된 이용자가 최고의 도덕성을 명예로 생각하는 사관생도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도서관에 들어서면 자연광을 이용한 채광이 눈에 띈다. 정진경 육사 교장(중장)은 “재학 당시 햇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도서관에서 공부했던 추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도서관 바닥은 석회암의 일종인 트래버틴(travertine)을, 건물 내부벽은 녹색 대리석을 사용했다. 책장과 의자, 서가 등은 모두 참나무로 마감했다. 설계자인 김종성 건축가는 한국 건축가 1세대로 작고한 김중업, 김수근 건축가와 함께 한국 3대 현대 건축 거장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종로 SK사옥, 서울시립역사박물관, 서울 힐튼호텔 등을 설계했고, 강남구 삼성동에 짓는 현대차 GBC 마스터플랜 총괄 책임을 맡고 있기도 하다. 이밖에도 육사에는 조선시대 삼군부 부속 건물 중 하나인 청헌당과 서울시 건축상을 받은 원불교 화랑대 교당, 한국건축가협회장을 역임한 강석원 건축가가 지은 화랑대 성당 등도 있다.] 탐방코스: [ 육군사관학교 행정안내소 → 육군사관학교 기념관(교훈탑) → 육군박물관 → 범무천(汎武泉) → 범무천(汎武泉) 옆에 있는 야외 무기전시장 → 육군사관학교 행정안내소(제 2 정문) ] 탐방일 : 2022년 11월 11일(금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2시간11분 소요) 14:14~14:18 서울 노원구 공릉동 32-1 번지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행정안내소에서 탐방출발하여 꼭대기층에 전망대가 있는 육군사관학교 기념관(교훈탑)으로 이동 [교훈탑으로도 불리는 육군사관학교 기념관은 육사 개교 40주년을 맞은 1986년 지어졌다. 개관 당시엔 지하에 식당을 갖추고 꼭대기는 전망대로 꾸며 타워 기능에 충실했다고 한다. 현재 식당은 사라졌지만, 전망대는 그대로다. 이 기념관은 김중업 건축가와 함께 한국 현대 건축의 양대 거장으로 평가받는 고(故)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했다.] 14:18~14:51 육군사관학교 기념관(교훈탑) 관람 [금요일 오후 2시 30분에는 교훈탑 앞 화랑 연병장에서 생도들이 실시하는 열병식인 화랑의식을 관람할 수 있다.] 14:51~14:55 하늘에서 보면 마치 열쇠처럼 생긴 육군 박물관으로 이동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 고(故) 김중업 건축가가 1981년 육군 박물관을 설계했다. 육군박물관 앞 광장에는 故 강재구 소령 동상이 있다.] 14:55~16:05 육군 박물관 관람 16:05~16:07 연못과 분수대로 구성된 휴식공간인 범무천(汎武泉)으로 이동 16:07~16:09 범무천(汎武泉)에서 국회의사당 건물을 닮은 학교본부를 사진촬영 [학교본부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설계한 고(故) 무애(無涯) 이광노 건축가의 작품이다. 육사 지휘부가 입주했고 석조 건축물이다. 지하 1층~지상 3층, 연면적 6000㎡ 규모로 1980년 완공했다.] 16:09~16:10 범무천(汎武泉) 옆에 있는 야외 무기전시장으로 이동 16:10~16:20 야외 무기전시장 관람 16:20~16:25 육군사관학교 행정안내소로 원점회귀하여 육군사관학교 탐방 완료 16:25~16:32 육군 사관학교 제2 정문 건너편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화랑대역으로 가는 버스 승차 대기 16:32~16:36 1155번 버스를 타고 육군 사관학교 제2 정문 앞 버스 정류장에서 화랑대역 2번 출구로 이동 16:36~16:44 화랑대역에서 역촌역으로 가는 6호선 지하철 승차 대기 16:44~17:42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출발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58분 소요] [ 태릉 & 강릉 ] 지도 노원불빛정원 지도 서울여자대학교 안내도 육군 사관학교 탐방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