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가까운 곳
10월이 다 가는데도 은빈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더 이상 기다리지를 못하고 10월
의 마지막 날에 피렌체로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자동 응답기가 받았다. 이탈리아 말과 한국
어로 녹음된 메시지에다 그녀는 여행 중이라고만 짧게 알려 놓고 있었다. 어디로 여행을 갔
는지 또 언제 돌아올 것인지에 대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여행. 미심쩍은 말이었다. 그녀
는 유독 움직이길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 즈음 방송국에서 기획사를 통해 주말 연속극의
출연 제의가 들어왔으나 나는 발작적으로 거절하고 말았다. 그렇다, 틀림없이 발작적이었다.
전화를 걸어 온 담당 매니저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고 사이를 두었다가 건조한 목소리로
나에 대한 매니저로 일을 포기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해한다고 이내 맞장구를 쳤다.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해 둔 일이었고 저쪽에서도 채산성이 없는 일을 계속할 수는 없을 터
이었다. 나는 남은 배당금과 관련된 서류처리를 그에게 부탁했고 그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대꾸해 왔다. 재고해 보란 등의 아무런 여지도 없었다. 그것은 나와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
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버스를 타고 하릴없이 신촌의 <오래된 정거장>과 세종문화회
관과 일산 호수공원에 다녀오기도 했다.
장미원의 꽃들과 호수의 연꽃들은 이미 끝이 다 타버려 다음해를 준비하느라 제 속으로
말려들어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철하와 송해란이 서울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누군가
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는데도 철하에게서는 웬일인지 연락이 오지 않았
다. 자리가 잡히면 소식이 오려니하고 나 또한 별다른 연락은 하지 않았다. 달력을 보니 그
새 11월 중순이었다. 철하의 상경 소식을 들은 날이었을 것이다. 나는 담당 매니저의 전화를
받고 세무 관련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충무로에 나갔다. 지하철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는데
때마침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지하철 입구에서 파란 비닐 우산을 사서 쓰고 기획사
가 있는 동국대학교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애완견을 파는 상점들이 몰려 있는 거리는
보도 블록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어서 질척거리고 있었고 흙탕물이 튀어 바지가 더러워졌
다. 어쨌든 육 년이나 해온 텔레비전 일을 그만두는 날이었으므로 기분은 더없이 묘하고 착
잡했다. 미련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앞이 막막한 때문이었다. 그때 뒷전에서 빵빵!하고 승
용차 한 대가 옆으로 다가와 멈춰섰다. 돌아보니 작동 중인 윈도 브러시 안에 웬 여자가 하
나 앉아있었다. 처음엔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암만해도 아니겠지 싶어 나는
몸을 돌려 우산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몇 발자국 더 뜯겨 나간 보도 블록을 피해 걷고 있는
데 차가 따라오더니 차창이 스르르 내려갔다. 아, 반딧불. 지난 여름 무주 리조트에서 만났
던 여자였다. 이런 곳에서 그녀와 마주치게 되다니. 서울 바닥이 의외로 좁다고는 하지만 참
으로 뜻밖이었다. 그녀는 몸을 숙이고 차창 밖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농담조의 말을 건넸다.
"망가진 보도 블록 사이로 걸어가는 헐렁한 비닐 우산의 남자. 한눈에 딱 알아봤습니다." 나
는 반가운 낯으로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럼 비오는 날의 선글라스는 무슨 뜻입니까?"
그녀는 싱글거리며 벌컥 차 문을 열고 나더러 타라고 했다. "이런 날이 더 눈부신 사람도
있는 거예요." 약속이 있다는 말을 못하고 나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안
에서 나를 살피며 이랬다. "타지 않으면 앞으론 기회가 없을 텐데요. 언제 또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겠어요. 안 그래요?" 나는 우산을 접고 그녀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그녀는 내 바짓가
랑이에 튄 흙탕물을 잠깐 흘겨보았다. "그런 후줄근한 모습으로 누굴 만나러 가는 길이죠?"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녀는 동국대 앞에서 차를 유턴하더니 매일 경제신문사거리를 빠르게
지나 평화방송 쪽으로 우회전해 중앙극장 옆의 주차장에다 차를 집어 넣었다. 예정된 코스
를 밟아 가듯 막힘이 없었다. 아연한 심정으로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도 사실은 약속
이 있어 가던 길이었어요. 남창우 씨처럼 별로 달갑잖은 약속이죠.
아무 연락 없이 하루나 이틀쯤 늦어져도 상관없는 약속 말예요. 그쪽은 어때요?" "글쎄
요." "이런 날에 하필이면 건조하고 지루한 얘기를 나누러 가고 싶진 않았는데 마침 잘됐군
요. 그렇다고 상대한테 손해나 피해를 끼칠일도 물론 아니구요." 그렇다면 나도 그런 것이었
다. 내일이나 모레쯤 가도 상관없을 뿐더러 상대에게 손해가 되는 일도 아니었다. 나는 그녀
의 핸드폰을 빌려 기획사의 매니저와 간단하게 통화를 하고 그녀에게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물었다. "그건 저도 무르겠는데요. 일단 우산을 쓰고 명동 거리를 걷다보면 좋은 생각이 떠
오르지 않을까요?"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었다. 학생 때나 하는 일이지만 미리 정해 놓지 말
고 어떤 일을 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차에서 내려 트렁크에서 우산을 꺼내 쓰며 그녀가 말
했다. "어쩐지 유쾌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요." 그것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원하고 있으면 그런 일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리라. 나는 그녀와 함께 명동성당 쪽으
로 올라갔다. 그녀는 검은 반코트에 청바지와 흰 운동화 차림이었다. 무주에서보았을 때와는
달리 몇 살이나 젊어 보였다. 나이가 몇이라고 했더라? 언덕바지에 있는 사진관 옆을 지나
며 그녀가 내 우산을 툭건드렸다. "성당에 들어갔다 갈까요?" 성당. "왜요? 저는 지나는 길
에 가끔 들르곤 하는데요." 카톨릭 신자냐고 묻자 그녀는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
지만 그런 곳에 들어가 서성이고 싶을 때가 있다고 했다. "깨끗한 마당을 가진 큰 집들 말
예요." 그렇지. 어디든 신이 주재하고 있는 곳에 가면 한결같이 마당들이 깨끗하지. "그런
마당에 들어가 있으면 금방 마음이 정갈해져요. 남창우 씨는 그런 경험 없어요?" "여기가
그런 데 아닙니까."
성모 마리아상 앞에 놓인 꽃다발들이 비를 맞고 있었다. 거기서 그녀와 나는 각자 파란
우산과 흰 우산을 받쳐들고 서 있었다.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죄 얘기할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한 줄로 줄여 답했다. "지난달부터 손님을 기다
리고 있는데 웬일인지 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가 우산을 뒤로 조금 비껴 들고 내 얼굴을
살폈다. "그럼 이쪽에서 가면 되잖아요." "어디에 있는지 오고 있는 중이겠죠." 이쪽으로 오
고 있다? "글쎄, 그런 생각은 미처 못해 봤습니다." "그런 생각을 안 해보다니요. 아까는 분
명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러더니 얼굴을 감추고 그녀는 의미심장하
게 웃었다. 수녀 둘이 그녀와 훔쳐보며 기도실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요즘도 옷을 만드
시나요?" "옷이요? 네, 그럼요." 그녀는 한 달에 열 벌쯤 옷을 만들고 있었다. 직원 둘이 더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게 많은 것인지 적은 것인지를 묻지는 않았다. 어쨌든 옷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바느질 솜씨만큼은 한국 사람이 최고 수준이라는 것말고는 옷에 관해서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쨌든 남들이 입을 옷을 만드는 직업이 있는 것이다. 앞으로 무슨 일
을 해야 할 것인가를 나는 생각해 보고 있었다. "3시예요. 괜찮다면 어디 가서 점심 할까요?
저 아직 식사 전이거든요." 나도 점심을 거른 참이어서 나는 그녀와 명동성당을 빠져 나왔
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명동 거리는 젊은이들로 붐비고 있어 마치 우산 쇼를 보러 나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우산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도 있겠군. 중앙우체국 뒷골목
에 있는 <명동칼국수>집에서 그녀와 나는 별말도 없이 칼국수를 먹었다. 젓가락을 내려놓
고 나서 그녀는 희뿌연 유리창 밖을 기웃거리며 어디 또 갈 데 없을까요? 하는 말을 던져
왔다. 글쎄, 갑자기 갈 데가 어디 있겠는가.
전에는 명동에 나오면 <필하모닉>이라는 음악 감상실을 자주 다녔지만 지금은 아마 없어
졌을 것이다. 나는 <명동칼국수>집에서 가까운 <부루의 뜨락>이라는 음반집을 오랜만에
찾았다. 한때는 고전음악을 듣는다고 자주 들르던 집이었다. 그곳에 들른 것은 여름에 무주
에서 만났을 때 그녀가 내게 들려준 베토벤과 바흐가 생각나서였다. 에드빈 피셔가 연주한
바흐의 명반을 구한 곳도 바로 이곳에서였다. 비좁은 계단을 통해 LP만 모아 놓은 3층으로
올라가서 나는 그녀에게 리히터가 키릴 콘드라신과 함께 1968년에 모스크바 스테이트 심포
니와 연주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1번>을 사주었다. 학교 때 피아노를 한 사람이
라니 어지간한 레이블은 다 갖고 있을 터였다. 물론 리히터도 있을 터이었다. "아녜요, CD
밖엔 없었는데 마침 잘됐네요. 여기 와서 이런 명반을 구하게 될 줄은 몰랐군요."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아르헤르치의 연주보다 좋다고 생각합니다." "많이 듣는 편
이군요." "차이코프스키 피협 1번은 리히터와 아르페르치밖에 모릅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
면 운이 좋은 편이군요. 알짜만 골라서 들은 셈이니까요. 거짓말이라는 건 알지만요." 푸르
트벵글러의 대형 사진이 붙어 있는 비좁은 계단을 내려와 그녀와 나는 우산을 비껴 쓰고 광
교 쪽으로 내려갔다. "음악이든 뭐든 다 한때인 모양입니다. 무엇에 집착해서 한번 커다란
정념의 덩어리가 빠져 나가고 나면 그 빈 곳이 좀처럼 다시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건 사람
에 관한 일도 마찬가지겠지요. 이해의 폭은 늘어나도 정념은 온전히 되살아나지 않습니다.
글쎄요, 거기서부터 인생이 다시 보이는 거긴 하겠지만." 그녀는 입을 다물고 비에 젖은 제
운동화만 내려다보면 걷기만했다. 그러는 사이에 일찌감치 거리의 네온사인 켜지기 시작하
고 먼데서 일긋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꿈처럼 어른거렸다. "거리가 비에 부서져
도시라솔파미레도로 내려앉고 있군요. 그런데 저런 풍경이 어째 지금은 착색 판화처럼 예뻐
보이는군요. 옆에 누가 있기 때문일까요?" 대답이 없자 그녀가 제풀에 희미한 소리로 웃었
다. "차가운 맥주가 먹고 싶군요. 어디 그럴 만한 델 알고 있나요?" 리히터와 차이코프스키
와 맥주. 그리고 뒤에서 느닷없이 경보음을 울리며 찾아온 여름날의 손님. 그러나 광교에 아
는 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맥주 맛이야 병에 들어 있으니 어디나 다 같을 테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데라면 좋을 터
이었다. 그러나저러나 중앙극장 옆에 주차해 놓은 차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무튼 술 얘기
가 나왔으므로 그녀와 나는 신호등을 건너 종로서적 뒤에 있는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
에로>라는 2층 카페로 올라갔다. 비에 젖은 목조 계단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계단을
올라갈 때 그녀가 내 손을 슬쩍 잡았다가 얼른 놓았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을 때 그녀의
얼굴이 무주에서 만났을 때처럼 마흔 가까운 여자로 변해 있었다. 화장으로 감춘 눈가의 주
름살과 담배로 약해진 잇몸과 윤기를 잃은 머리칼과 탄력 없는 피부가 한눈에 빨려 들어왔
다. 맥주컵을 잡은 손에도 엷은 주름살이 드러나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녀는 그처럼 방심하
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빛이 빠져 나간 모습으로 맥주만 홀짝거리고 있다가 무주에서의
일을 들춰냈다. "그때 일이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그럼 남창우 씨와 상관없이 제가 조금 힘
들어지곤 합니다." 무슨 말을 하고 있음인가. 비가 내려서 그런지 카페엔 사람이 북적거렸고
공기도 후텁했고 맥주 맛도 미지근했다. "가끔 남창우 씨를 만나 보면 어떨까 생각해 봤습
니다. 위안을 주는 사람은 아니지만 남창우 씨와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 동질감이란 게 느껴
집니다." "..." "어때요, 저와 생각이 비슷하다면 비나 눈이 내리는 날 차를 타고 함께 여행을
떠나면요? 그래서 바닷가나 산사 아래서 하루치의 인생을 나누는 일 말예요. 부끄러운 얘기
지만 저에겐 그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아 있지도 않습니다. 남자에게 안도감을 줄 수 있는
나이가 지나가고 있다는 말이죠.
눈치챘겠지만 유혹하고 있는 거예요." 유혹. 기다리는 손님이 없으면 받아들이고 싶은 유
혹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곧 안도감이 사라진다 해도 받아들이고 싶은 제안이었다. 어차피
몸은 늙고 마음만 남게 마련이다. 나눠 가질 수 있는 진정한 안도감이란 것도 거기서 비롯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성냥불을 담배에 붙이
고는 양미간을 찡그리고 나를 건너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엷은 긴장의 빛이 감돌고 있었
다. 어쩐지 스스로 괴롭고 아픈 모습이었다. 반쯤 피우다 만 담배를 그녀는 재떨이에 꼭꼭
눌러 껐다. "저는 손님이 될 수 없는 사람인가 보군요." "반가운 손님입니다." 그런가요? 하
고 그녀는 입가에 야릇한 웃음을 매달고는 다시 또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갑갑한 마음
이 되어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유리창으로 눈을 돌렸다.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봐
요. 서로에게 똑같이 주어진 기회의 순간인지도 모르잖아요." 스피커에서는 피터 폴 앤 메리
의 <500마일>이란 노래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나는 여름 무주와 늦가을 비가 내리는 서울
과의 거리를 가늠해 보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밤길을 따라 나는 여름 무주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그곳은 실감이 나지 않는 거리로 자꾸 멀어지고 있었다. 티롤 호텔.
반딧불. 적상산. 그러나 서울이라는 곳은 휴양지처럼 언제나 지우고 떠날 수 있는 임시적인
공간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장소이다. 사소하게 주고받는 모든 말과 행위가 서로에게
덫이 되고 그물이 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지금 내게 하고 있는 말은 일종의 법을 요
구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마음에도 법이 있고 감옥이 있다. 그녀는 담배 연기 속에
서 나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도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바를 모를 리 없었을 것
이다. 나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일순 그녀의 속눈썹이 하프 소리처럼
떨리더니 얼굴로 잔잔히 피가 몰려 올라왔다.
그러더니 왜요?라고 눈으로 물어 왔다. "제게는 곧 만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의 빚
이 큰 사람이어서 어디에 가 있어도 아마 생각이 날 겁니다. 당신과 둘이 채송화가 피어 있
는 돌담 옆에 서서 비가 내리고 있는 먼 바다의 풍경을 구경하고 있다고 해도 역시 생각날
사람입니다." 그녀는 맥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이마의 머리칼을 길게 쓸어 올렸다. "그
렇군요." "그렇습니다." 그녀는 언뜻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삼 분 정도가 지나자 아까
충무로에서 만났을 때의 탄력을 회복했다. 역시 감정의 군더더기가 없고 솔직하고 담백한
사람이었다. 사람에겐 저마다 스타일이 있게 마련인데 어느 때나 그걸 잃지 않는다는 건 생
각만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밖은 어둠이 내려 비도 먹물빛으로 변해 있었다. 검은 비가
내리는 늦가을 밤. 창문 옆에 놓인 보라색 양란이 혼자 외롭게 밤을 지키고 있었다. "어딘가
커다란 응덩이가 있는데 거기 악어 한 마리가 살아요. 눈만 내놓고 수면에 가만히 떠 있어
요. 악어는 무얼 보고 있을까요?" 느닷없이 웬 악어인가. "라코스떼. 남창우 씨 가슴에 박혀
있는 게 악어 맞죠?" 내가 입고 있는 남방 셔츠의 브랜드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나 원참.
어쨌든 대답을 해야겠기에 나는 커다란 웅덩이부터 떠올렸다. "풀잎 사이에 숨어 있는 황소
개구리와 가마우지. 그리고 가마우지의 옆구리에 물고기 두 마리가 떠 있군요. 하지만 다들
몸을 사리고 잠들어 있으니 악어도 가만히 있어야겠죠." 그녀는 후후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
다. 어깨에서 머리칼이 아름답게 따라 흔들렸다. 8시였다. 그녀와 나는 마시다 만 맥주잔을
놓고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까지 혼자 우산을 쓰고 걸어갈 일을 생각하니 아득하군요." 종
로에서 명동 중앙극장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언제 거기서 여기까지 걸어온 것인가. "악어가
거기까지 바래다 줘도 괜찮겠는지요." "그렇다면 마음이 한결 든든할 거예요." 그녀가 우산
을 고쳐 잡으며 내 팔꿈치를 괜히 툭 건드려 왔다. 오늘 두 번째였다. "제 유혹을 견뎌 낸
남자는 남창우 씨가 처음인 걸로 기억합니다. 제가 학생이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말이죠." 농
담조로 하는 말이었다. "어려운 시험을 견뎌 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저를 시
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나는 악어의 소리를 흉내내 그렇게 말했다. "그 문어체의 화법도
자꾸 들으니 딱딱하지만은 않군요." 을지로 지하도를 건너 명동 길로 접어들었다. 말없이 우
산 속을 걷고 있는 사이에 나는 그녀가 몇 년 전에 남편과 아이 둘을 한꺼번에 잃은 여자라
는 사실을 떠올렸다. 여자 혼자 산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리라. 한번 인생을 치러 본 사람
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겠지.
세상을 살아가려면 사람은 항상 안과 밖의 경계를 잘 조절해야 한다. 남자인 경우도 그게
안 되는 때가 종종 있다. 사람은 누구나 반이어서 나머지 반을 찾게 마련이다. 그걸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남자와 여자라고 해도 상관없다. 아무튼 혼자 살려면 남자와 여자라는 일인이
역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안 된다고 해서 문을 닫아 걸면 모양새도 안 좋을뿐더러
되레 그게 또 약점이 된다. 명동성당 앞을 지나며 그녀는 발을 멈추고 십자가를 올려다보았
다. 저 어둠 속에서 아직도 성모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안고 비 내리는 밤을 지키고 있을
것이었다. 주차장까지 와서 그녀는 내게 더 내줄 수 없느냐고 했다. 나는 선선히 그러겠다고
했다. 운전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녀는 픽 웃으며 우산을 접어 트렁크에 넣고 운전석
에 올라탔다. "여름에 무주에서도 그렇게 물었죠." 그랬던가. 옆자리에 올라타 안전 벨트를
어깨에 두르며 나는 그녀와 걸어 내려온 명동 길을 내다보았다. 돌이킬 수도 다시 돌아갈수
도 없는 저 아득한 밤비의 거리를. 그녀는 고요히 앉아 카스테레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를
듣고 있었다. "이제 저는 곧 마흔이 되겠고 머리가 하얗게 변하기 시작하겠죠. 요즘 들어 죽
음이란 걸 생각해 봐요. 그건 곧 삶을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저를 둘러싼 모든 것들
은 제가 죽어도 얼마간 더 세상에 남겠죠. 저는 저의 부재보다 오히려 그게 더 마음이 아파
요."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남편과 아이의 부재 뒤에 얼마간 더 이 세
상에 남겨져 있는 존재였다.
그녀는 그게 곧 자신의 얘기인지도 모르고 그런 말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부재 뒤에 남겨진 존재들인 것이다. "남창우 씨는 여름에 만났을 때보다 뭔가 좀 선
명해진 거 같아요. 그땐 꼭 고아원에서 쫓겨난 아이 같았는데 이제는 학교 운동장을 비로
쓸어 놓고 입학하는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막 부임한 선생님의 모습이에요." 누굴 기다리
고 있으면 사람이 선명해 보이는가. "그게 누군지는 몰라도 아마 운동장의 주인이겠죠. 손님
말예요." 대놓고 묻지는 않았으나 그녀는 그게 누군지 알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나는 대꾸를
않고 그저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왜 그렇게 공허하게 보이나요? 마당을 다 쓸어 놓고 나
서도 말예요." "..." "남창우 씨는 모습이 어두워요. 운동장이 어두컴컴하니까 손님이 안 들어
오고 있는 거예요. 상상해봐요. 비가 내리고 있는 밤의 운동장을 말예요." 그런가. 언젠가 나
수연과 함께 나는 비 내리는 운동장의 스탠드에 앉아 파리솔을 쓰고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
지. 한데 그게 꿈이었던가 생시였던가. 차는 평창동 쪽으로 가고 있었다. 거리는 온통 물바
다로 변해 있었다. 한 손으로 담배를 피워 물며 그녀가 메마른 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 어
쩌면 가까운 곳에 와 있는지도 몰라요." 나는 그저 우멍하니 앉아 있었다. 혼자말이려니 하
고 흘려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 손님이란 사람 말예요." 그제야 나는 어둑한 옆을 돌아보
았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전조등에 드러난 빗길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
까?" "남창우 씨도 실은 알고 있어요. 다만 아무도 알려 주지 않기 때문에 모르고 있는 거
예요. 오늘 남창우 씨를 만나면서 분명히 그렇게 느꼈어요. 물론 제 말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그런데 남창우 씨 자신은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무의식 속에서 아련히 감
지되는 게 없는지 한번 생각해 봐요. 좀더 주위를 환하게 밝혀 놓고 말예요. 손님은 그렇게
맞아야 하는 거예요." "..." "귀한 분인가 봐요.
다른 사람은 발도 들여놓을 수가 없으니 말예요. 하긴 인생에는 그런 사람이 하나쯤 있어
야겠죠." 차가 평창동에 있는 그녀의 의상실 앞에 도착했을 때 그리고 나는 언젠가 나수연
이 내게 했던 말을 번쩍 기억해 냈다. 누군가 곧 먼데서 당신을 찾아올 거예요. 그때 그 사
람을 만나지 못하게 되면 당신은 또 오랜 세월 방화하게 될 거예요. 아무 소식 없이 슬쩍
왔다가 당신이 찾지 못하면 다시 돌아갈 그런 사람이에요. 그녀가 안전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릴 때까지 나는 넋을 잃고 눈을 부릅뜬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내 그런 모습에서
무언가를 읽어 내고 있었다. 밖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그녀는 석연찮은 얼굴로 나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냥 돌아가시겠어요?"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맥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녀가 네?하고 되물었다. 그녀의 머리칼이 비에 젖고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묻는 말로 대답했다. "커피 한 잔 주시겠습니까?"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더니 괜찮
겠어요? 라고 말했다. 나는 차에서 내려 불이 꺼져 있는 의상실의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
이명숙 옷가게>. 지중해풍의 하얀 건물에 안이 삼십 평쯤 돼보이는 작은 집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이명숙이었다. 그녀는 일주일에 오 일을 여기서 하루 종일 일한다고 했다. 집
은 차로 십여분 거리에 따로 있었다. 그녀는 통유리창에 면한 응접실의 불을 켜고 수건을
가져 와 머리에 묻은 빗방울을 닦아 낸 다음 커피를 두 잔 가지고 소파에 와 앉았다. 앞에
서 비에 젖은 여자의 냄새가 났다. "그냥 여길 한번 함께 오고 싶었어요." 길을 가다 무심코
들여다본 적은 있지만 의상시에 들어와 보기는 처음이었다. 방송국의 소품실이나 분장실과
는 달리 여기엔 묘한 질서와 생동감이 있었다. 마치 왕족의 무덤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마네킹들이 순장을 당해 서서 죽은 이탈리아 출신의 디자이너 베르사체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불쑥 연락을 드릴까도 생각해 봤어요. 만약에 그랬다면 뭔가
지금보다 훨씬 복잡해졌겠죠?"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어쩌면 다시 돌아와야만 하는 힘든 길을 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와 나는 커피잔을
들고 유리창에 홀뿌리고 있는 밤비를 마네킹 사이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네킹과 밤비. 그리
고 방금 시내에서 비를 맞고 돌아온 여름 무주의 나그네들. 그런 밤이었다. "그게 누군지 물
어 봐도 되겠어요?" 그녀는 기어코 손님의 이름을 묻고 있었다. 나는 사이를 두고 천천히
커피를 마신 다음 잔을 내려놓으며 그녀에게 그게 누구인가를 말해 주었다. 이혼한 아내라
는 말에 그녀는 문득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미망인의 얼굴로 다시금 부재 뒤에 남겨
진 자신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가끔 아무나 붙잡고, 저 어떻게 하죠?라고 묻고 싶을
때가 있어요. 아마 실제로 그러기도 했을 거예요. 그때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글쎄, 어떻게
하지? 라고 반문하죠. 아무도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는 거예요. 기껏해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경솔하게 굴다가는 자칫 엉뚱한 꼴을 보게 될 테니까,
이러죠. 그렇게 움직이지 않고 몇 년을 살았어요. 그런데 그 사이에 시간이 거침없이 흘러갔
어요. 그렇다면 머리가 하얘질 때까지 또 가만히 앉아 있어야만 하는 걸까요?" "..."
"이런 밤에 여기 앉아 있으면 바다에 떠 있는 여객선이 생각나요. 또 거기 타고 있는 사
람들의 모습들이 보여요.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혹은 졸고 있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말예요. 아마도 그게 사는 걸거예요. 인생에는 파트너가 필
요한 법이고 제게도 사실 그런 사람이 필요해요." "..." "그게 꼭 남자라는 얘기는 아녜요. 하
지만 그게 마네킹이거나 벽에 걸려 있는 옷이라고 생각해 봐요. 공허하지 않아요? 낮에 충
무로에 남창우 씨의 뒷모습을 봤을 때 화닥 반가웠던 것도 다 그래서였을 거예요. 이젠 이
해하시겠죠?" "그래요." 그녀는 빈 커피잔을 들여다보며 얘기를 계속했다. "기다릴 수밖에
없으니 저는 또 뭔가를 기다리며 살 거예요. 그러나 이제는 그 기다림 안에도 움직임이 있
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만히 있으라는 사람들의 말은 옳지 않았어요. 그 말이 무관심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거예요." 무관심. 그랬을 것이다. 사람이란 의외로 타인
에게 아주 무관심한 존재들인 것이다. 그래서 파트너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알고 계시
겠지만 사람은 뜻밖에도 약한 짐승이고 그래서 건빵한 조각에 한 순간 옷을 벗기도 하죠.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그걸 내미는 손 때문에 말예요. 주제넘은 소리지만 그분을 다시 만나
게 되면 그런 것도 다 이해하고 받아 주시길 바라요. 다른 뜻은 없고 그저 같은 여자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나도 진심을 예시했다.
"여기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너무 유심히 보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렇게 되면 오히려 사람들이 이 안을 들여다볼 수 없을 테니까요. 이건 제 경험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가요?" 그녀는 가만가만 웃고 나더니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왔다. "우연
이라도 해도 사람의 만남엔 확실히 설명하기 힘든 비의가 숨어 있는가 봐요. 오늘 남창우
씨를 만나서 저를 한번 더 깨닫게 됐어요." 나도 오늘 그녀를 만나 비의의 전언을 수신했다.
사람은 이렇듯 암암리에 이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말에
도 한껏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게 그다지 나쁜 것만도 아닐 테
죠. 이렇게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씩 깨우치게 되잖아요. 아주 미세한 결로 이루어진
인생의 사소한 것들 말예요. 이를테면 옷감 속에 감춰진 엷은 무늬나 잠시 한눈을 팔다 다
시 시작된 바느질 자국 따위, 그걸 육체는 시간을 통해 기억하고 또 스스로에게 남기잖아
요." 섬세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얼굴엔 생을 여러 번 숙고해서 받아들인 수조함이 배어 있
었다. 삶이란 그렇게 자신의 육체를 통해 길들여 가는 것이리라. "자기 나이를 가장 좋은 나
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게 제대로 사는 방법이겠죠." 나는 흐려진 눈으로 마네킹과 옷들과
유리창의 빗물과 앞에 앉아있는 그녀를 차례로 눈여겨보며 맥주를 마시다 자정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상실을 나오기 전 나는 그녀와 이런 말잇기식의 대화를 나눴다. 내가 먼저 운을
뗐다. "지금이 바로 생의 한순간인 것을 어제는 몰랐습니다." "닥쳐올 날엔 또 무슨 쓸쓸한
황홀." "그럼 빛이 그리웠던 나그네가 밤길을 더듬어 오겠지요." "숱한 새벽과 여명의 하늘
끝에 걸린 어린 날의 꿈들을 그가 가져 왔으면 좋겠습니다."
"새벽 창밖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있으면 잠에서 깨어나 문을 열어 주시기만 하면 됩니
다." 비는 서서히 그쳐 가고 있었다. 옷가게를 나와 거리로 내려오다 뒤를 돌아보니 그리고
불이 꺼져 있었다. 은빈이 가까이에 와 있다는 느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 갔다. 그녀는
이혼을 하고 나서 나와 살았던 아파트를 나와도 안면이 있는 그녀의 친구에겐 전세로 맡기
고 이탈리아로 떠났었다. 나는 수렁거리는 마음으로 성산동에 있는 아파트로 전화를 넣어
보았다. 11월 19일 수요일 오후의 일이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시국이 어수선한 때였다.
전화는 자동 응답기가 받았다. 세입자는 인사동에 있는 <덕원화랑>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
는 중이었다. 급한 용무가 있으면 화랑으로 연락을 해달라고 하며 그녀는 전화 번호를 알려
놓고 있었다. 나는 인사동에 있는 화랑들이 매주 수요일에 전시회가 시작된다는 걸 기억해
냈다. 나중에 다시 전화를 할까 생각하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인사동으로 나갔다. 오
후 7시면 화랑이 문을 닫을 시각이고 그렇게 되면 은빈의 친구도 만날 수 없을 것이었다. <
덕원화랑>이 있는 인사동 사거리에 도착한 것은 저녁 6시 30분이었다. 가로수가 색종이처럼
낙엽을 날리고 있는 바람 찬 거리에서 나는 쟈코메티의 조각처럼 잠시 앙상하게 흔들리며
서 있다가 화랑 안으로 들어갔다. 전시회가 시작되는 날이어서 혼잡할 거라는 건 짐작하고
왔지만 더불어 네 명이 모여서 하는 그룹전이었다. 4층 전시실로 들어서자 수십 명의 사람
들이 그 좁은 전시장 안에 북적거리고 있었다. 일일이 그들의 낯을 살피며 돌아다닐 수도
없어 쭈뼛거리고 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도로 내려와 복도에 있는 공중 전화
에서 김성아라는 화가를 찾았다. 화랑으로 들어올 때 포스터를 보고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
냈던 것이다. 온갖 소음이 들려 나오는 가운데 한참 만에 그녀가 전화를 바꿔 들었다. 그녀
는 어쩐 일이세요? 하고 대뜸 경계하는 투로 물었다. 만났으면 한다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내?하고 반문했다. 나는 또박또박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그녀는
무슨 일인데요?하며 반감이 느껴지는 소리를 냈다. "바쁘신 건 알지만 은빈이에 관한 일이
니 시간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며 공격적인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런
데 왜 저를 찾는 건데요? 은빈이에 관한 일은 그쪽에서 더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나는 간
곡하게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빈이와 가까운 사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부탁합니다.
두 분은 오래 전부터 절친한 사이가 아닙니까." 피할 수 없었던지 그녀는 저녁 약속이 돼
있으니 9시쯤에나 시간을 낼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9시라고 해도 나는 기다릴 수밖에 없
었다. 만나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화랑을 나와 나는 골동품을 늘어놓고 파는 노점과 다기점과 헌책방과 액세서리 점을 기웃
거리다 국밥을 사먹고 9시 10분 전에 그녀와 약속한 <볼가>라는 찻집 겸 술집에 먼저 가
있었다. 눈이라도 내릴 듯 하늘에 검은 구름이 낮게 몰려와 있었고 바람은 점점 세찬 기세
로 불어 가고 있었다. 그녀가 나타난 것은 9시 30분이었다. 전시회 오픈 기념으로 받은 꽃다
발을 두어 개 가슴에 껴안고 문을 들어선 그녀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날엔 으레
사람들과 늦게까지 술추렴을 한다는 걸 나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꼭이 그래서 그런
것만도 아닌 얼굴이었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는 그녀에게 의자를 내 주었다.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용건만 말씀하세요." 그녀는 비우고 온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꽃다발까지 챙겨 들고 온 걸로 봐서 그건 아니지 싶었지만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빈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초조한 마음에 나는 곧장 그렇게
물었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보았다. "그걸 왜 저한테 묻죠?" 그런가? "모르고
있단 말인가요?"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는 꽃다발을 옆자리에 내려놓더니 물컵을 집어 들었
다. 이런 식으로는 도대체 아무 말도 들을 수가 없을 듯했다. 나는 도박이라도 하는 심정으
로 다시 이런 말을 던졌다. "은빈이가 서울에 와 있는 걸로 압니다." "뭐라구요? 도대체 누
가 그런 소릴 해요." 그녀는 꼿꼿하게 도사리고 앉아 완강하게 내 말을 부인했다. 이미 시작
된 도박이었으므로 뒤로 물러설 계제도 아니었다. 이러자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
니 말이 이리저리로 뛰고 있었다. "알고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꼭 만나야 합니다. 은빈이
에겐 아직도 누구보다 제가 가까운 사람이 아닙니까."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그녀는 언저
리만 맴돌고 있었다. "모르고 있는 겁니까?" 어수선한 모습으로 그녀는 내 눈길을 피한 채
무릎 위에 놓인 가방 끈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은빈의 소식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십 분이 지나도록 그녀는 용접
해 놓은 철대문처럼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사이사이 이쪽 눈치를 살피며 어쩌다 입을 열 듯 하다가도 또 눈길을 딴 데로 돌리면서
딴청을 부렸다. 나는 참을성을 가지고 내가 은빈이를 만나야만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
했다. 얘기를 다 듣고 나서도 그녀는 의혹에 찬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은빈이와 저에
게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겁니다." 그제야 그녀는 쏘듯이 툭 내뱉었
다. "그렇다면 은빈이가 어디 있는지쯤은 항상 알고 있어야죠." 나는 지난달에 피렌체로 가
려고 편지를 썼던 사실과 연락이 닿지 않았던 과정의 일들을 얘기했다. 그녀는 요령부득인
얼굴로 이마에 진땀까지 흘리며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자물통도 이런 자물통이 없었다. 하지
만 경우와 때를 보고 열 때는 또 열어야만 할 게 아닌가. 그녀가 불안한 동작으로 꽃다발을
손에 쥐어 들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둘 다 힘든 사람들예요. 누군들 조개 껍데기처럼 양쪽
이 딱 맞아서 살겠어요. 제가 보기에 두 사람은 꼭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예요.
제가 뭐 하고 싶지도 않은 말이지만 하루하루 비비면서 닳아지고 그래서 나중에 비슷해지는
게 부부란 거 아녜요? 왜들 그렇게 욕심이 많아요. 그런 욕심은 혼자 있을 때나 부리고 사
는거예요. 제가 모르는 부분도 있겠지만 두 사람 그러다가 잘못된 거 아녜요?" 그랬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저 지금 남창우 씨의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
게까지 말하니 저도 무릅쓰고 얘기하겠어요. 그전에 한 가지 약속하세요. 저도 나중에 은빈
이에게 할말이 있어야만 하니까요." 약속하겠다고 나는 말했다. "은빈이를 만나는 일이 오히
려 나쁜 일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되면 그애는 다시 못 일어나요. 무슨 뜻인
지 아시죠?" 그녀는 확인하려는 듯 내 눈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그런데도 꼭 만나겠
다는 뜻인가요?" "서울에 있습니까?" "서울에 있습니까?" "지금은 아니예요." 서울에 있다가
그녀는 이틀 전 양평에 있는 친구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상태였다. 한갓진 곳에서 쉬고 싶
어했노라고 그녀는 전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벌써 보름 전에 서울에 들어와 있었다. 무슨 일
로 서울에 오게 됐는가고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마침
늦게 결혼하는 친구가 있어 겸사겸사 들어온 셈이죠." 어떤 경우에도 그녀는 다시는 서울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내게 말했었다. 물론 외조모 상을 다하리라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순전히 나를 겨냥한 말이라는 건 그때는 알고 있던 터였다. 친구의 결
혼식은 지난 주였고 신랑 신부는 지금 신혼여행 중이었다. 그럼 은빈인 언제 피렌체로 돌아
가는가. "그런 말은 아직 못 들었어요. 하지만 제게 입막음을 부탁하더군요." 입막음. 아까<
덕원화랑>에서 나와 통화하고 나서 그녀는 곧바로 은빈이에게 내가 찾아온 사실을 알린 모
양이었다. "그건 서울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부탁받은 거예요." "뭐가 말입니까?" "혹시라
도 남창우 씨가 찾게 되면 대답을 피하란 얘기 말예요." "..." 곤란한 일이라는 건 알았으나
나는 은빈이가 가 있는 곳이 양평 어디인지를 그녀에게 알려 달라고 했다. "며칠 있다 서울
로 올 거예요. 제 생각으론 그때 만나는 게 좋을 듯해요. 아까 무척 당황하고 있었어요. 그
런데 또 불쑥 양평까지 찾아가면 어떻겠어요. 얼마간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잖
아요. 누구라도 쫓기는 느낌을 받고 있으면 더 세세 달아나는 법이 잖아요. 또 그렇게 쫓아
가서 잡은 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당분간 그냥 내버려두세요. 이건 제가 부탁하는 거예요."
"..." "내용은 모르지만 은빈인 몹시 불안한 상태예요. 바깥 생활도 이젠 힘든 모양이구요.
이혼하고 나서 서로 만난 적 있나요?" "여름에 파리에 갔다가 통화만 했을 뿐입니다." "그게
처음였던가요?" "그렇군요." "남창우 씨도 알고 보면 참 매정한 사람이에요. 저야 앞으로 두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할 바 아니지만 안타까운 건 사실이에요. 이제 와서 찾아 다니는
남창우 씨 모습도 그렇고 그때 그렇게 말렸는데 기어이 전세금 빼가지고 밖으로 나가더니
봐요. 몸만 상해가지고 돌아오잖아요. 그렇다면 앞으로 파먹고 살아갈 마음이라고 벌어 놨어
야죠. 작업은 웬만큼 한 모양이지만 그것도 다 사람 꼴이 된 다음의 일 아녜요?" 피곤한 얼
굴로 그녀는 가봐야겠다며 자리를 수습하고 일어났다.
나는 그녀를 따라 찻집을 나왔다. 쌀쌀한 밤이었다. 양평엔 지금 눈이 올지도 모른다는 터
무니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인사동 기로 나와 그녀에게 인사의 말을 건넸다. 그녀는 오두마
니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수첩 한 장을 찢어 은빈이 가 있는 양평 전화 번호를 내게 적어
주었다. "고맙습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것도 나중에 가서 다 무책임한 말이 될
수 있으니까 말예요." 나는 그녀가 적어 준 전화 번호를 호주머니에 집어 넣으며 그녀를 바
라보았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 볼게 있는데요, 은빈이가 서울에 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
죠?" "모르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김성아 씨를 만나고 나서 알았습니다." 그녀는 어
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아무튼 되게 놀라더군요. 은빈이 말예
요." 눈인사를 하고 돌아서 가다가 그녀가 발길을 돌려 내게로 왔다. "만나 보세요. 저도 웬
지 그게 좋을 것 같네요." "그럴 생각입니다." "두 사람이 살던 집을 빌려 쓰고 있다 보니까
마음이 약해져 결국 만만한 꼴이 되고 말았군요. 저도 꽤나 냉정한 사람인데요.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어요."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만만하게 보았던 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란 세상
에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녀가 돌아서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나는 밤늦게 버스를 타
고 집으로 돌아왔다. 양평. 차를 빌려 가면 두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잇는 거리다. 하지만 김
성아의 말대로 거기까지 찾아가는 일은 더 두고 생각해 볼 일이다. 은빈이 서울에 와 있다
는 사실이 나로서도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이다. 이튿날 나는 철하와 통화했다. 번호를
알아내 내가 건 전화였다. 그는 마포 공덕동 로터리 부근에 전셋집을 구해 서울 살림을 시
작하고 있었다. 제주도에 있을 때와는 달리 무겁게 가라앉은 소리로 그는 몇 년 만에 돌아
온 서울 생활이 힘에 부친다고 했다. 무얼 하느냐고 묻자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야당의 선
거 캠프에 들어가 있다고 했다. "대통령 선거 말이야?" "그거말고 당장에 무슨 선거가 있
어?" "거기서 뭘 하는데." "뭘 하겠어. 고작해야 정당원 행세로 전단이나 박는 뒤치다꺼릴
일이지." 염려되는 바가 없지 않았으나 나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
다가 그가 자조 섞인 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새 정권이 탄생할 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하
려고 했던 것은 뭔가 이게 아닌 것 같아. 나는 불온한 권력에 항거하고 싶었던 거지 권력을
만들어 내는 데 이바지하려고 뛰어 다니는 건 아니었거든. 여든 야든 말이야." "그렇다면 다
른 일도 생각해 보. 자네 능력이면 얼마든지 가능하잖아. 아무리 그럴듯한 정권이 들어서도
거리의 맨홀 뚜껑처럼 모든 구멍을 다 막을 수는 없어. 가령 이런 것도 생각해 봐. 장애인,
아동, 청소년, 노인, 환경 문제 따위 말이야. 그런 일도 매우 중요하고 물론 아무나 할 수 있
는 일이 아니야." "그런 말을 듣고 있으니까 내가 노인네가 된 것 같군." 선거 캠프에서 무
얼 겪고 느꼈는지 그는 확실히 맥이 풀려 있었다. "그제나 이제나 나는 외곽에 주둔하면서
불온한 힘에 대항하고 싶어." "자네는 지금도 그러고 있는 거야." "그런가?" "그게 자네가
갖고 있는 사소하지만 위대한 부분이야. 권력이 생기면 거기 붙지 못해 대개들 안달이잖아.
또 눈이 밝아져 사방을 꿰뚫어 보는 데는 얼마간의 물리적인 시간은 필요한 거야.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게 맥이 빠져 있어." 그쯤에서 말을 돌리고 싶어 나는 송해란의 소식
을 물었다. "뭐 사설 학원에 나가 애들 모아 놓고 피아노도 가르치고 노래도 가르치고 그러
는 모양이더라. 웬 여자가 남자보다 더 바빠. 학원에서 돌아와서도 하루 종일 시장이다 어디
다 왔다갔다하느라고 도대체 코빼기 보기가 힘들어. 나 그 여자 그렇게 살림 좋아하는 거
정말 몰랐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그래도 삶에대한 애정이 깃들여 있었다. 여유를 되
찾고 나서 이번에는 그가 은빈의 소식을 물어 왔다. 그녀가 서울에 와 있다는 말에 그는 깜
짝 놀라고 있었다. "그래 만났어?" "나도 어제 알았어.
지금은 양평에 있는 친구 집에 가 있는 모양이야. 서울로 나오면 만나야 되겠지." "어떻게
왔대?" "글쎄, 외조모 상을 당해 들어온 모양인데 자세한 건 만나 봐야 알겠지." 그는 주의
깊게 듣고 있다가 이런 소리를 전해 왔다. "느낌이 심상찮은데. 자네한테는 이번이 어쩌면
마지막 기회인지도 몰라. 내 말 알아듣겠어?" 알아들었지만 나는 잠자코 있었다. "아무튼 돌
아왔다니 기쁘군. 그래, 이제 속속들이 다 돌아오는군."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조만간
에 만나 소주라도 한잔하자고 하면서 나는 전화를 끊었다. 바닥에서 물이 새기 시작하는 배
를 타고 강의 한가운데를 건너고 있는 듯한 초조한 느낌이 사위에 두텁게 몰려와 있었다.
시국도 그렇고 철하 부부의 살림살이도 그렇고 은빈의 일이 또한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