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산행은 한강가 노량진 낮은산, 언덕위의 사육신 역사공원으로 올라가 단종 복위를 꾀하다 죽은 충신
7인의 묘역을 둘러보고, 역사관 등 유적을 찬찬히 살펴본 후 1시간 30여분 만에 노량진 수산 시장으로
돌아와 점심식사로서 6월 산행행사가 종료되었다.
금번 산행식사 메뉴는 광어, 농어, 연어, 민어 등의 모듬회와 홍어 까지 따로 추가된 화려한 상차림을 박영춘
전회장께서 준비하여 흡족한 식사시간이 되었다.
● 일 시 : 2024.6.15(토) 10:30
● 대 기 : 노량진역 1번 출구 나무 그늘 쉼터(전철 1, 9호선)
● 산 행 : 사육신 역사공원(노량진)
● 점 심 : 12시 / ‘ 황금어장'(수산시장 2층)
* 전철 1호선 1번출구, 9호선 7번 출구 직진
● 회 비 : 2만원
● 참 석 : 30명(남: 22 , 여: 8 )
김노성, 김명재, 김상주, 김용기, 김춘수, 김형환, 김형준, 남철석, 박대한, 박진억,
박영춘, 변재근, 송길현, 신완옥, 윤민석, 이자형, 이남희, 임종윤, 정준호, 정해룡,
조규상, 한형호
김귀임, 김실림, 김영순, 김춘희, 문연순, 박복순, 안재자, 한연옥
※ 노량진 사육신공원 이야기
출처 : 일요서울i(http://www.ilyoseoul.co.kr)
김경은 여행작가
‘노량진’이란 지명은 한강에서 유래한다. 옛날 한강은 구간별로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노들강(이촌에서 노량진까지), 송파강(옛 잠실섬 근처), 용산강(용산 부근)이라고 하는 것처럼. 노량은 노들(강)의 한자식 표기다. 노들은 백로가 뛰어놀던 징검다리라는 뜻이다. 여기에 아주 오래전부터 나루터가 있었다. 노량진(津)으로 불린 이유다. 노량나루는 광나루, 마포나루, 한강나루, 양화나루 등과 함께 한양 5대 나루로 꼽혔다. 하지만 오늘날 노량진에서 강남을 연상하지는 않는다. 대신 ‘학원’과 ‘공시생’을 떠올린다.
한강에서 유래된 ‘노랑진’ 지명
노량진역 풍경은 후발주자 강남4구와는 사뭇 달랐다. 품위 있는 명품매장도 찾기 어려웠다. 분위기 좋은 카페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블링블링한 차림의 여성도 눈에 띄지 않았다. 노량진역 역사 건너편에 있는 건물은 학원 일색이다. ‘00공무원학원’, ‘00수도건축토목학원’, ‘00임용고시학원’, ‘스피치면접학원’……. 학원 벽은 광고 폭탄을 맞은 듯 너저분하다. 마치 찢어지게 애달픈 청년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노량진 학원생 모두의 미래에 축복이 함께 하길 기원해 본다.
노량진역에서 한강대교로 방향을 잡았다. 400여m 걸었다. 왼편으로 우거진 숲이 나타났다. 성역화된 사육신공원이다. 홍살문이 탐방객에게 맞는다. 홍살문의 빛깔이 유난히 붉다. 충신에 대한 예의를 다하라는 경고일까. 홍살문을 통과하자 불이문(不二門)이 나타났다. 불이문은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이다. 이 문으로 통과하면 속세를 벗어나 해탈의 세상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사육신묘의 불이문은 전혀 다른 뜻이다.
세조는 1455년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았다(계유정난). 사육신을 비롯한 17명이 단종복귀운동(1456년 6월)을 주도했다. 거사일은 세조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한 명나라 사절단을 맞는 잔칫날이었다. 거사 동지였던 김질이 변심했다. 단종복귀운동에 참여했던 충신은 일순간 ‘역적’으로 몰렸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한 지 7일 만에 처형됐다. 연좌제에 따라 1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주도자의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한 것이다. 조선 역사상 단일사건으로 가장 큰 희생자를 낸 정치 사건이었다.
[사육신공원, 조선정치사건 100여명 사형]희생자 중 특별히 왕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여섯 충신을 사육신이라고 한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가 그들이다. 당대의 최고 윤리는 불사이군(不事二君·두 명의 임금을 모시지 않는다)이었다. 사육신은 숱한 고문(국문)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죽어가면서도 왕과 신의를 지켰다. 그들의 성스러운 죽음은 대를 이어 백성의 입에 전해졌다.
사육신을 충절의 상징으로 그린 최초의 사료는 남효원이 지은 《추강집》에 수록된 〈육신전〉이다.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를 모은 <육신전>에서 ‘사육신’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나온다. 그뿐만 아니라 사건의 전모와 사육신의 전기 그리고 기록자의 세평까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진정 역사는 승자의 편인가. 함석헌 선생이 《씨ᄋᆞᆯ의 소리》에서 그 물음의 답변을 찾는다. “수양대군이 불러온 피바람, 그렇지만 세조의 피바람 뒤에 우리는 ‘의(義)’를 알았다. 사육신이 죽지 않았던들 우리가 ‘의’를 알았겠는가”라고. 위인의 무덤은 필자를 ‘역사를 생각하는 인간’으로 만든다.
의절사 앞에는 1782년(정조 6년)에 세워진 신도비와 육각형의 사육신비도 둘러보았다. 사육신비는 숙종 17년(1691)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민절서원의 터에 세워졌다.
의절사 뒤편에 난 협문을 지나자 돌계단이다. 이 계단을 오르면 사육신묘가 나타난다. 묘지가 있는 마루터기는 일면 ‘아차고개’로 불린다. 단종 복귀 거사 직후 영등포 이남에 살던 어떤 선비가 사육신 처형의 부당성 간(諫)하기 위해 도성을 향하여 말을 달렸다. 이 고개에 이르렀을 때 육신이 이미 군기감터에서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차, 늦었구나’하고 한탄하던 고개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고문당하고 사지찢기는 거열형까지
17명 중 15명은 불에 달군 쇠로 지지는 고문을 당했다. 그 뒤에 군기감터(지금의 프레스센터 부근)에서 사지를 찢기는 거열형을 당했다. 잘린 목은 저잣거리에 걸렸다. 아무도 시신을 수습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역적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3일째 되던 날, 한 거지 행세를 한 사람이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 그리고 성삼문의 부친인 성승 장군의 효수된 머리를 수습해서 한강 건너 현재의 사육신묘에 모셨다. 거지 차림으로 나타난 사람은 매월당 김시습(《연려실기술》)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사육신묘는 훼손됐다. 다시 무덤을 수습한 것은 박팽년의 7대손 박숭고다. 성승 장군의 묘는 끝내 찾지 못해 4분의 묘지만 정비했다. 그런데 어떻게 멸문지화(남성)를 당한 박팽년의 후손이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거기에는 역사 속 반전이 숨어 있다. 박팽년의 남자 친족은 모두 능지처참이나 참형을 당했다. 부인 전옥금은 정인지 가문의 여종을 보내졌다. 당시 전옥금은 임신 중이었다. 사내를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관비로 삼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불행은 불행을 낳는다. 아들이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박팽년 집안 여종도 임신 중이었다. 하늘이 도왔다. 딸이었다. 전옥금과 여종은 갓난아이를 바꿔치기했다. 박팽년의 후손은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사육신 중 유일하게 대를 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박숭고는 박팽년만이 아니라 사육신을 극진히 살폈다.
그럼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를 제외한 하위지와 유성원 무덤은 무엇일까. 가묘다. 서울시에서 1977~1978년 사육신묘 정화사업을 벌이면서 하위지, 유성원의 가묘를 추가로 조성, 사육신묘를 완성(?)했다. 그런데 사육신묘라면 6분을 모셔야 하는 게 당연하다. 왜 무덤이 7기가 있는 것일까. 가묘를 쓸 때 김문기도 사육신묘에 봉안해달라는 탄원서가 제출됐다. 국가편찬위원회가 이를 수용, 김문기도 사육신에 포함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사육신공원에는 7분의 묘지와 신위를 모셔져 있다.
마루터기를 둘러봤다. 무덤 크기는 작았다. 잔디도 성겼다. 어떤 묘비석은 무너져 내리고 있다. 비석에는 이름조차 없다. 성씨만 있다. ‘성씨지묘’, ‘하씨지묘’처럼. 역적으로 몰린 사육신을 지키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절개를 지켰던 역사적 인물의 무덤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애잔한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 어찌 보면 그나마 다행이다. 사육신묘가 아직 남아 있는 그 자체가 기적이기 때문이다.
※ 조선시대 역사 복습
노량진 사육신묘는 조선 시대의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묘지로,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하며 목숨을 바친 여섯 명의 충신, 즉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고자 한 곳입니다.
□ 사육신(死六臣) 묘
사육신은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처형된 여섯 명의 충신을 가리킵니다.
1. 성삼문
2. 박팽년
3. 하위지
4. 이개
5. 유성원
6. 유응부
사육신은 세조가 어린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이를 반대하고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했습니다. 사육신묘는 이 충신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후대에 세워졌습니다.
□ 사육신묘의 역사와 의의
사육신묘는 조선 시대 충신들의 의리를 상징하는 중요한 역사적 장소입니다. 이곳은 단종을 위한 충절과 의리를 기리는 장소로, 한국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매년 단종과 사육신을 기리는 제사가 열리며,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 그들의 충절을 기리고 있습니다.
노량진 사육신묘와 김문기의 가묘는 충절과 의리를 상징하는 중요한 역사 유적지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의미를 갖습니다.
□ 사육신묘의 구성
사육신묘는 1968년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었으며,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구성 요소가 있습니다:
- **사당(社堂)**: 충신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 **묘역**: 사육신의 묘와 김문기의 가묘가 위치한 곳입니다.
- **비석**: 각 충신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 김문기 가묘
김문기(1399-1456)는 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체포되어 순절한 인물입니다. 그는 세조에게 복종을 거부하고 충절을 지키다가 처형되었습니다. 김문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노량진 사육신묘 내에 그의 가묘(假墓)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가묘는 실제로 시신이 안장된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무덤의 형태를 갖춘 기념물입니다. 이는 김문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세운 것입니다.
김문기(金文起, 1399-1456)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하며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순절한 인물입니다. 그의 삶과 죽음은 역사적, 학술적으로 여러 관점에서 해석되고 있습니다.
- 김문기의 생애와 업적
김문기는 세종 대에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치며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특히 세종과 문종의 신임을 받으며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문종이 사망하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김문기는 단종의 안위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세조(수양대군)가 왕위를 찬탈하면서 그의 운명도 급변하게 되었습니다.
- 단종 복위 운동과 순절
김문기는 사육신과 함께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하며 단종 복위를 꾀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김문기는 체포되어 처형당했습니다. 그의 충절은 후대에 큰 감동을 주었고, 사육신과 함께 충신으로 추앙받게 되었습니다.
- 학술적 견해
김문기에 대한 학술적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충신으로서의 평가**: 많은 학자들은 김문기를 충절의 상징으로 평가합니다. 그는 세조의 찬탈에 끝까지 저항하며, 자신의 목숨을 바쳐 단종에 대한 충성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평가에서 김문기는 조선 시대의 윤리적, 도덕적 이상을 대표하는 인물로 간주됩니다. 그의 행적은 유교적 가치관에 부합하며, 후대의 교육과 도덕적 교훈으로 자주 인용됩니다.
2. **정치적 맥락에서의 평가**: 일부 학자들은 김문기의 행동을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맥락에서 분석합니다. 이들은 김문기의 충절이 단순한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당시 조선 조정 내의 권력 투쟁과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세조의 왕위 찬탈은 조선 왕조의 권력 구조를 재편하는 사건이었고, 김문기와 사육신의 저항은 이러한 권력 재편에 대한 반발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김문기의 행위는 도덕적 충절뿐만 아니라, 정치적 저항의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 김문기의 유산
김문기의 충절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사육신과 함께 충절의 상징으로 기려졌으며, 그의 행적은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도덕적 교훈으로 남아 있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충절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김문기에 대한 학술적 견해는 그를 단순한 충신으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여 그의 행동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김문기의 역사적 위치를 더욱 풍부하게 해석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