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글.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불어 설운 날에 말이예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송창식은 '선운사'란 노래다. 기차에서 내내 CD에서 흘러나오는 가사를 상상하며 나름대로 선운사를 그려보았다. 지난해 말 변산반도과 남도를 둘러보았을 때 이 곳을 그냥 지나쳤다. 아마도 4월의 동백꽃을 보고 싶어 그랬나보다. 오늘에서야 그 꿈이 이루어지는구나.
생각보다 선운사란 절은 웅장했고, 산은 겉보기엔 작고 평범한 것 같지만, 그 가슴속으로 들어가 보니 도처에 기암괴석이 있으며, 골이 의외로 깊고 절경이 많았다. 가히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으리라.
여행은 다음사이트의 '나의 문화유산답사동호회' 주관으로 2001. 4. 29 (일) 에 다녀왔다. 주로 차를 몰고 혼자서 여행을 즐기다가 15명이나 되는 회원들과 같이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답사를 해보니 새로운 맛이 난다. 여러 사람과 친분을 나누고, 감정들을 공유하는 점이 좋았던 반면, 어쩔수 없는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부담감과 여러 교통편을 갈아타는 불편과 시간적 소모가 아쉬움으로 다가선다. 그러나 사람과 함께 하는 여행보다 더 좋은 것은 없으리...
2. 출발
5시에 일어나 샤워하고 준비물 챙기고 집을 나섰다. '나문답' 동호회 회원과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벌써 회원들이 나와 있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았고 (36세), 또 하나는 여성회원이 많았던 것이다. 답사는 '남성분야'라는 그릇된 사고를 깨우치려고 여성회원들이 시위하듯 서 있다.
7시 5분기차를 타고 간다. 오랜만에 타보는 기차를 타니 그 차체로서 기분이 좋다. 대전쯤 지나니 보슬비가 내린다. 동백의 선명한 붉은 빛을 보기 위해서는 비가 멈추기를, 가뭄에 시달리는 농민을 위해서는 폭우가 내렸으면 좋겠다. 그래서 기도한 것이 선운사입구까지 폭우가 쏟아지고 그 이후에는 쨍쨍하길 기원했다.
' 신태인'을 지났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드넓은 평야를 보게 되어 마음의 포근함을 느낀다. 조그만 야산에는 어김없이 무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산이 있어야 사람을 묻지....
조정래소설 '아리랑' 과 문순태의 '타오르는 강'이 생각난다. 그 배경이 이곳 김제와 고부 그리고 태인인 것이다. 그나마 조그만 땅마져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뼈빠지게 일해 봐야 공출을 당하고, 곰소항을 통해 쌀들이 일본국민을 살찌운 것이다. 바로 여기가 동학혁명과 일제수탈의 현장인 것이다.
3. 도착
10시 50분쯤 정읍역에 도착하니 그제야 회원들을 자세히 보게 된다. - 나이가 제일 많으니까 무게 잡아야지...
고창행 버스를 탄다. 선운사 입구에 도착했다. 전국제일의 자동차 손해율을 자랑하듯 기사양반이 곡예운전과 과속을 한다. 고창은 제일 맛있다는 수박생산지가 아닌가? 고창읍성에서 성 밟기도 해보고 싶은데.. 지난번에 가본 해미읍성이나 낙안읍성과의 느낌도 다를텐데....
버스를 두번이나 갈아타고서야 선운사 입구에 도착했다. 관광지안에 있는 식당에 가서 돌솥비빕밥을 먹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먹어보는 '맛없는 음식'이었다. 일회성 손님이라 그런지 서비스도 엉망이고 나중엔 손님 받아야 한다고 내보낸다. 심지어는 돌솥이 불에 달구어지지 않은 채 그냥 내왔다...생각 같아선 식당을 엎어 버려야 하는데.. 역시 무게 잡아야지..
정력강장제로 알려져 있는 '복분자술' 말그대로 오줌줄기가 힘이 세서 요강을 넘어뜨린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장어는 또 어떠하리... 전국최고의 장어는 풍천이 아닌가?
이런 맛을 보고 그냥 지나치다니.. 사실 돈을 더 걷든지. 찬조금을 받든지...
해남의 최고한식집 '천일식당'. 당진의 '해태식당'. 평택의'고박사 냉면'등 맛집이라면 몇시간씩 찾아 다니며 미각을 쌓았던 내게 있어 이런 맛없는 비빕밥으로 때우다니... 이것도 단체여행의 아쉬움으로 다가선다.
4. 백파선사 비문
선운사 경내까지 길이 아름답다. 분꽃처럼 생긴 꽃과 단풍나무가 가로수다. 걷는 자체만으로도 좋다. 매표소를 지나 일주문이 보인다. 이제부터 불국정토에 들어선 것이다.
절간 초입 부도밭에는 유홍준교수가 그렇게 찬사를 늘어놓은 추사 김정희의 '백파선사비문'이 있다.
'華嚴宗主 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 라는 힘찬 해서체의 필치가 있다. 책에서는 '송곳으로 강판을 뚫는 힘'으로 붓끝을 강하게 내리 꽂았다고 한다. 그런 글을 읽으니 더욱 자세히 보게된다.
뒷면엔 추사가 왜 백파가 화엄종주인지, 그리고 대기대용을 쓴 이유를 풀이한 비문과 백파를 삶을 기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울임이 강하고 변화가 많은 추사체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 행서글씨는 추사가 죽기 1년전에 쓴 최고 명작으로 평가되는 금석문이라 한다. 뒤의 날짜와 완당학사 김정희라는 글씨는 후대에 새로 쓴 글씨니까 추사의 글씨와 비교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추사와 백파와는 오랜 기간동안 논쟁을 벌인다. 처음엔 대흥사의 초의선사와 논쟁을 벌이지만 초의와 오랜 친구인 추사가 이 논쟁에 참여한다. 싸움을 말릴려고 끼어 들었다가...
추사의 안아무인격인 욕설 비슷한 편지 공방으로 서로간의 학문을 키워나간 것이다. 9년에 걸친 제주도 귀양살이로 통해 인생의 달관과 겸손을 배우고, 새로 태어난 위인이 된 것이다. 그렇게 매몰차게 내몰았던 백파를 최고의 고승이라고 추켜 세운 겸손함이 배어있고, 말년의 최고의 경지가 배어있는 글씨라니 다시 한번 보게 되고 어루만지게 된다.
그러한 것은 원교 대흥사에 있는 이광사 글씨도 마찬가지다. '저것도 글씨냐' 하면서 현판을 떼고 자기글씨를 붙였던 오만함이 해배 되어 돌아와 이광사의 글씨를 다시 올려 붙인다.
5. 선운사
한때는 89개의 암자에 3천승려가 수도를 했던 큰절이었으나 지금은 동운암, 참당암, 도솔암, 석상암 네개의 암자만이 남았다.
아마도 동백아가씨에 꼬임에 빠져서인가? 선운사는 참 묘한사찰이다. 동백꽃(정결한 여성상징)도 그러하고 장어도 그러하고 복분자술도 그러하며 모도 수도의 장인 사찰과는 전혀 어울리지 아니한 것들이다.
마치 수도승의 파계를 유혹하기 위해 떼로 몰려 있는 악마들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수도승의 도력을 시험하기 위해 몰려있는 유혹의 손길과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서정주도 막걸릿집 여자의 목쉰 육자배기를 읊었는지 모른다.
백제 위덕왕때 검단선사가 신라 진흥황의 시주로 창건한 이후 조선 광해군때 재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사천왕문은 수리중이라 보지 못했다. 그 앞에 만세루가 자리잡고 있다. 상당히 큰 건물이다.
가장 눈에 띄는 가람은 대웅보전이다. 소박하면서 웅장한 멋이 편안한 느낌을 갖게 한다, 맞배지붕 다포식건물이며 기둥이나 보가 원형으로 깍지 않고 나무의 형태를 그대로 심어 자연미가 넘친다.
개심사의 심검당의 모습이랄까? 어째튼 특이한 점은 대웅전의 주불이 석가가 아니라 '비로자나불'이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에서는 대적광전에 비로자나불을 모시는데 선운사만이 상식을 깨고 있다.
<사진설명> 보물로 지정된 금동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원교 이광사의 '靜窩'(조용한 작은집)란 현판을 찾아 헤멨다. 요사채 어디 건물에 붙었다는데... 배추 다듬고 있는 할머니에게 물어 물어 현판을 찾을 수 있었다. 정말 힘과 기교가 넘친다. 추사가 뒤늦게 이광사의 글자에 머리를 숙인 이유를 알게 한다. 초보자인 내게도 힘있게 느껴지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가슴을 설래게 하는 것이 대웅전 뒷편의 동백숲이다. 5-6백년된 3천그루의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산불예방 때문인지 숲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다가선다.
(오늘 보슬비가 내리는데 열어주지...).
6. 참당암
참당암까지 오르는 오솔길이 아름답다. 우선 조용하고 숲이 우거져 있어 산사의 맛을 느낀다. 보비는 오히려 땀을 식혀주는 청량제라고나 할까? 절까지 오르면서 직장인의 스트레스를 양파껍질 벗기는 것처럼 털어낸다. 마지막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無我)
우선 돌담벼락이 아니라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담이 포근하게 우릴 맞이한다. 그 안엔 삐죽히 대나무줄기가 우릴 훔쳐본다. 한눈에 봐도 청정도량임을 느낀다. 참선하는 곳이다. 대웅전은 조선초기의 맞배지붕이며 다포형식을 취한다. 후대에 중건한 듯하다. 아담하면서도 힘찬 기운이 서려있다. 보물이다.
비교적 넓은 마당을 가지고 있다.
대웅전 앞편엔 나무관음보살이라고 글씬바위가 있다. 예전에 절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무엇보다 감동을 받은것은 대웅전 앞의 두 그루의 동백나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백꽃을 접했다. 떨어진 붉은 동백꽃이 실연당한 여인의 자태라고 할까. 보통 꽃은 꽃잎이 흩날리며 시들어 가지만 동백꽃은 송이째 부러지며 쓰러진다. 단두대에 잘려나간 루이16세처럼.. 영원한 영화는 없다. 한순간이다.
아쉬운 듯 절을 훑어보고 나온다 가람배치가 참으로 잘 된 것처럼 느껴진다. 대웅전 뒷편엔 구부린 소나무가 절을 호위한다.
오늘자(5/1) 중앙일보에 보니까 87년 창당암에서 도난당한 동종이 91년 조계종으로 편지와 함께 배달되었다. 훔친
사람의 꿈에 신장님과 지장보살이 나타나 본래의 곳에 돌려놓으라는 현몽이 나타나 양심의 가책에 혼쭐나며 그 뜻을 깨달아 돌려준 것이다.
( 그 동종을 왜 못 보았지...)
7. 산행
도솔암으로 향하는 길을 왔던 길로 가지 않고 능선을 타고 뒤로 넘어가기로 했다.
오히려 이 산행이 내겐 행복으로 다가왔다. 비록 338미터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바다에 닿기 전에 마지막으로 용솟음친 흔적이 보인다. 의외로 계곡도 깊고 나무도 많다. 기차안의 탁한 공기때문에 기침에 시달렸는데 이곳은 너무나 공기가 맑았다. 큰 비닐에 한무더기 담아가고 싶을 정도다.
꼭대기에 오르니 전망이 기가 막히다. 저 멀리 바다가 보이고 첩첩의 산중과 계곡은 정말 아름답다. 실로 글로 표현하가 어렵다. 날씨가 좋으면 저 멀리의 위도가 보일텐데..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땀을 식힌다. ( 이 추억 오래 간직하자.....)
8. 진흥굴
분명 능선을 타면 낙조대가 나올텐데... 만약 잘못 들어서 반대로 빠진다면 낭패다. 차라리 하산길을 택하는 것이 안전하다. 부지런히 걸었다. 그나마 6개월 동안 헬쓰클럽에서 매일 30분씩 뛴 것이 이번 산행에 도움이 된다. 그다지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보슬비가 청량수처럼 땀을 씻어 내준다.
내려와 보니 부채살의 큰 소나무가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한다. 600년된 소나무란다. 그 옆엔 진흥굴이 보인다. 신라 진흥왕이 말년에 왕위를 물려주고 이곳에 머물었는데 굴에서 자다 꿈속에서 바위가 갈라가며 미륵삼존불이 현신하는 것을 보고 선운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그 굴이 바로 이 진흥굴이다.
9. 도솔암
원래 선운산은 도솔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선운사가 워낙 유명해져서 산이름을 선운산이라 했다. 도솔암이 더 큰 절이었다면 원래이름을 가졌을 것이다. 도솔천은 불교의 천국쯤 해당하니, 도솔암으로 가는 길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다,
암자입구에 보물280호 '지장보살상'의 자세한 설명이 적힌 푯말을 보았다. 그래서 그 암자에 있는 보살상이 그 보물인줄 알고 열심히 사진 찍고 감상했는데 그것이 아니다.(원효의 깨달음)
그 지장보살상은 석불위의 내원궁에 모셔진 것이다.
어째튼 약수한잔 마시고 마음을 가다듬고, 정말 보고싶었던 칠송대의 석각여래상을 보기 위해 올라갔다.
10. 칠송대의 암각여래상
40여미터가 넘는 깍아지는 암벽이 새겨 있는 이 암각여래상은 우리나라 최대의 마애불이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귀가 유난히 길고 꽉 다문 입술이 보통의 온아한 부처상과는 다른 느낌을 갖게 한다. 이는 신라말이후 누구나 수양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의 영향을 받아 지방호족들의 자화상적 이미지가 가미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한다.
아마 이 불상을 만든 것은 대역사일 것이다. 여래상 머리위에 보호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구멍이 나있고, 부러진 나무가 박혀있는 것이 보인다.
배꼽부위에 땜질한 흔적이 보이는데 이것이 유명한 '석불비결' 이다. 명치 부위에 네모난 서랍이 파여 있는데 보통 불경, 불화 등의 문서를 같이 봉안하는 감실이다.
그런데 그 부처님 배꼽 속에 신기한 비결이 들어 있어서 그 비결이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게 된다. 전라감사 이서구가 부임하여 선운사에 이르러 석불의 배꼽을 떼고 그 비결을 내어보려는데 뇌성벽력이 일어나 첫머리만 읽었다.'전라감사 이서구가 열어본다"란 글자만 본 것이다.
11. 내원궁
여래상 옆길로 내원궁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다. 내원궁은 도솔천 한 가운데 있는 궁전이다. 이곳에서 풍경은 기가 막히다. 신록의 수림과 기암괴석, 계곡의 물소리등 난간에 선 자체가 말 그리로 궁전에 온 기분이다.
이 암자엔 아까 햇갈렷던 지장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유홍준교수가 '경기고등학교 나온 보살님' 같다는 표현처럼 학자처럼 똑똑하게 보인다. 금테를 머리에 두르고 까까머리를 한 것이 특이하다. 왼손엔 법륜을 쥐고 있으며 화려한 옷주름과 목장식 그리고 세밀한 손금까지... 조선시대 불상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모레면 불탄일이라 신도들로 가득 차 있다.
12. 마침말
나무와 얘기하면서 하산한다. 그 경치 좋다는 낙조대를 보지 못한 애석함도 있지만 이번에도 역시 다음에 또 올 명분을 낙조대로 찾아야겠다. 근처에 폐교가 있어 담장너머 보았더니 잡초가 무성하다. 왠지 페교 사진 한 장 찍고 싶다. (나도 나이가 들어서인가?)
혼자 걷는 맛이 그저 좋다. 세상일이 다 이랬으면 좋겠다. 다시금 선운사 가람을 둘러보고 백파선사비를 다시 한번 어루만지고 선운사를 뒤로한다.
정읍에서 서울 가는 기차좌석이 있었다. 예약하고 역 앞에 있는 중국집에서 짜장 두개, 짬뽕 하나, 소주 1병 시켜 먹었다. 하루의 피로가 소주 한잔에 가신다. 기차시간 때문에 급히 먹었다. 계산해보니 1만원이 나왔다. '정말 싸네..."
선운사는 다시 한번 오고 싶은 곳이다. 가람과 산행, 역사가 어우러진 곳이기 때문이다. 근처 고인돌, 신재효생가, 읍성, 내소사까지 볼 생각을 벌써부터 갖는 것은 이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