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불꽃, 讀 『아리랑』謾想
舞鶴山人 박 희 용
2015년 새해부터는 시문학-성리학-불교와 같은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를 일단 현재 수준에서 정리하고, 시대와 사회적인 문제에 해결책을 모색하는 정치-경제-이념과 같은 외면세계를 공부하기로 작심하여 우선 1월 8일에 책 세 권을 샀다. 남현우 엮음 도서출판 대동 1988년 초판 『항일무장투쟁사』와 에드거 스노 지음 도서출판 두레 2015년 개정판 5쇄 『중국의 붉은 별』 그리고 님 웨일즈 ․ 김산 지음 도서출판 동녘 개정3판 17쇄 『아리랑』.
물론 이 세 권 말고도 서가엔 『경상북도 상주동학농민혁명과 현대사로 이어지는 자료집』-『자본론-정치경제학비판』-『『자본론』의 현대적 해석』-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마르크스평전』-『The Left 1848~2000 유럽좌파의 역사』-『코뮤니스트』-『혁명의 시간』-『식민지시대 한국아나키즘운동사』-『한국아나키즘운동사 연구』-『해방 공간의 아나키스트』-『사회주의인터내셔널과 사회민주주의 정당』-『한국사회민주주의 정당의 기원』-『韓國共産主義運動硏究와 批判』-『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연구』-『中國共産主義運動史 1991년~1987년』-『대장정』-『혁명가들의 항일회상』-『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약산김원봉』-『김학철평전』-『조선공산당초대책임비서 김재봉』-『장강일기』-『중국 연변의 조선족』-『한반도와 만주의 역사 문화』-『그쪽 안동은 잘 있니껴?』-『불화 그리고 불온한 시대의 철학』-『이현상평전』-『조선인민군우편함 4640호』-『벙어리새』-『내 마음 속의 인민군 장교』-『조봉암과 1950년대 (상)』-『조봉암과 1950년대 (하)』-『한국사와 농민』-『체 게바라평전』-『코뮨주의 선언』-『슈퍼자본주의』-『고삐 풀린 자본주의』-『과학과 기술로 본 세계사 강의』-『문명의 붕괴』-『증오의 세기』-『만들어진 신』-『총,균,쇠』-『두려움 없는 미래』-『엑소더스 이주경제학』-『100년 후』-『유라시아 유목민족사』-『강호중국』-『마오의 제국』-『시진평평전』-『중국의 미래』-『제국의 슬픔』-『중국을 읽다』-『공개문서로 보는 미중관계와 한반도』-『갈등하는 동맹』-『21세기의 한미동맹은 어디로?』-『전쟁과 인간-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일본인의 조선관』-『반일 그 새로운 시작』-『동북아시대의 한반도』-『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통일 이후 통일을 생각한다』-『통일 이후의 문학교육』 등의 책이 꽂혀서 일독 또는 재독을 기다리고 있다.
『아리랑』을 받고 곧 「30년 전에 읽고, 항일투쟁정신을 배우기 위해 다시 사 읽다」라 자서했다. 초판 1쇄가 1984년 3월이니 아마 그 때, 30대 초에 구입해서 한 번 읽은 기억이 있다. 그 때도 김산의 치열한 삶에 감동했던 기억이 어슴푸레하게 떠오른다.
김산, 본명 장지락이 님 웨일즈를 만나지 않았다면? 일제시대에 활동했던 어느 한 혁명가의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은 되었겠지만 지금처럼 유명하진 않았을 거다. 혁명에 목숨을 바친 진실한 혁명가에게 ‘유명’이란 말을 붙여 외람되지만, 님 웨일즈 덕분에 그는 역사에 뚜렷이 각인되었고 후세인들은 그 당시의 피어린 항일투쟁사를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무명의 항일 혁명가들과 전사들의 이름과 업적이 일월에 새겨지게 되었으니, 님 웨일즈 역시 인류 공통의 가치를 지향하는 기자로서 역사가로서 의식인으로서 시대 중심에 뚜렷하게 섰다. 그래서 인간에게나 동물에게나 우연이든 필연이든 만남, 즉 인연이 중요하다.
김산이 1905년 생이니, 죽지 않고 살았다면 이후의 삶이 어떻게 펼쳐졌을까? 아마 그는 1945년 광복될 때까지 만주에서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조직과 유격 활동 등 항일 투쟁에 전념하였을 거다. 혹여 오성륜처럼 체포되어 전향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의 불같은 성격을 보면 전향을 하지 않고 총살형을 감내하였을 거다.
광복되곤 곧 북조선에 들어가 연안파 공산당 간부로서 활동하였을 거다. 40대로서 연부역강하고 투쟁 경력과 지도자로서 자질과 품성이 우수하기 때문에 북조선에 중요 직책을 맡았을 거다. 항일 투쟁에서 군사 경력보다 당 조직 경력이 강하기 때문에 남침의 주력인 인민군 쪽보다 당 조직 사업 책임자로 활동하였을 거다. 그러다가 종전 후에 연안파 숙청 때 사망하였거나 간신히 중국으로 망명하였을 거다. 연안파든 소련파든 갑산파든 국내파든 한 시대 공산주의 운동에 노력하여 그 공으로 북조선의 지배층이 된 그들, 후일 통일한국사에서 그들을 어떻게 평가할지 몰라도 2015년 현재 한국사에선 육이오전쟁을 먼저 시작한 자들로 낙인하고 있다. 김산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행적과 결과를 살펴봄으로써 한반도사 전체적인 관점에서 그 당시 지식인들과 혁명가들의 의식의 허상과 실상을 조감할 수 있고, 나아가 통일 한반도 운동에 방향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땅 한반도에서 1900년 전후에 태어난 세대는 20세기 한국사에 주역이 되었다. 그들은 스무 살 전후부터 항일투쟁에 일선 전사가 되었고, 마흔 살 전후엔 해방 공간의 이념 갈등과 남북전쟁에 주역이었다. 쉰 살 이후엔 남북에서 정치 지도층으로 활동하였다.
그들의 의식 형성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국운의 몰락기에 피어난 개화기 문화였다. 국운이 정상이었다면 개화기 문화도 정상적으로 발달하였겠지만 조선이 망한 암울한 사회 분위기에서는 문화가 기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그들의 의식도 기형이 지 않을 수 없었다. 전통 문화의 뿌리로부터도 단절된 그들의 허기진 의식에 급습한 것은 일본을 통해 들어온 외래문화였다.
그 외래문화가 국내 지식인들의 검증을 통해 수입되었다면 합리적인 토착화를 이룰 수 있었겠지만 일본 국수주의 지식인들이 의도적으로 가공한 것을 일본 문화의 세례를 받은 일본 유학생들을 통해 간접으로 수입하다보니 사회 전반적인 지식인들의 의식이 일제에 종속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순차적으로 수입되었다면 조금이라도 갈피를 잡을 수 있었지만, 한꺼번에, 홍수가 아니라 대형 쓰나미로 밀려들어와 조선 지식인들의 의식세계를 극도로 혼란스럽게 하였다.
당시에 유행한 사조는 크게 민주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등 세 가지였다. 민주주의는 겉으로는 자유와 평등을 가치로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만국 무역의 자유와 인류 평등을 명분으로 약소국에 대한 간섭과 침략을 합리화하는 서구 강대국의 무한 식민자본주의를 떠받치는 중추적 이론이었다. 구시대 민주주의에서 시민권이란 시민 모두가 공화정이든 입헌정이든 국가라는 탱크의 충실한 부품으로서의 의무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현대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가 발생하였으니, 초기부터 부자들의 질시와 극렬한 반대를 받았다. 공산주의 운동이 강해질수록 기득권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국가의 혹독한 탄압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김산 역시 15세인 1919년 3 ․ 1 운동 경험을 통해 의식의 눈을 뜬 후 이러한 사조 속에서 극심한 사상의 혼란을 겪었다. 출신이 소자작농인 그로서 선택할 수 있는 사상의 길은, 독실한 기독교도인 어머니의 영향도 컸겠지만 무정부주의, 즉 아나키즘을 거쳐 공산주의에 정착하는 것이었다.
근대문명기에 동서양의 여러 나라는 대체로 비슷한 역사적 환경과 체험을 하였다. 영국과 미국 같은 강대국들도 겉으로는 강하였지만 속으로는 다양한 모순들이 들끓고 있었으며, 약소국들과 식민지들은 혹독한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모든 국가 모든 사회를 막론하고 조금이라도 의식이 깨인 지식인이라면 인류 생활 모습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중상자본주의의 무한 질주에 대한 우려가 가장 컸으며,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아나키즘과 공산주의였다. 이 둘은 약소국과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크게 공명하였다. 특히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 이후엔 공산주의가 진보적 지식인들에 대표적인 이념으로 정착되어 안으로는 오랜 기간 동안 누적된 계급 모순과 갈등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밖으로는 침략해오는 식민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투쟁에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자 김산은 15세인 1919년부터 27세인 1922년까지 7년 동안 일본 유학과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거쳐 상하이와 베이징에 정착하기까지 많은 현실 체험과 인물들과의 만남을 통해 정신을 단련하였다. 그의 말대로 1922년 27세에 베이징에서 만난 공산주의자 김충창으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상하이에서 만난 흥사단 지도자 안창호로부터 두 번째 영향을 받았다. 이후 본격적인 공산주의자로서의 활동기인 1928년에 만난 소비에트 지도자 펑화이로부터 세 번째 영향을 받았다.
김산이 전형적인 공산주의자에만 머물렀다면 님 웨일즈가 서둘러 『아리랑』을 출판하지 않았을 것이다. 1991년에 초판 추천의 글에서 리영희가 ‘고결한 낭만주의적 인텔리 혁명가’라고 부를 정도의 감동을 인터뷰 현장으로 받았기 때문에 님 웨일즈가 사명감을 갖고 책을 출판한 것이다. 김산은 1991년 한국어판 서문에서 님 웨일즈가 언급한대로 ‘단테적 심리를 졸업하고 톨스토이즘과 아나키즘으로 나아갔고 곧 사회주의의 현대철학인 마르크시즘’에 이른 지식인형 공산주의자였다. 또한 ‘추종자가 아니라 천부적 지도자의 자질을 타고난 진보적 사고의 소유자로서 유망하고 훌륭한 모범적 인물’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공산주의자나 아나키스트였다. 강대국 국수주의의 목표가 부국강병이고, 부국강병을 떠받치는 기반이 군사력이고, 군사력을 강화하는 원천이 경제력이고, 경제력이 안으로는 노동대중 착취와 밖으로는 식민지 자원 수탈에서 나오고, 경제력을 주도하는 세력이 독점재벌이고, 독점재벌의 주인이 지배계급이니, 지배계급을 혁명하지 않고는 시대적 모순과 갈등을 해결 할 수 없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이하 계급 출신 지식인으로서 정신이 올바른 자라면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배계급 출신 중에서도 양심적 지식인들은 겨우 묵시적 동조자 정도 밖에 될 수 없었다.
밀폐된 용기에서 물이 끓으면 강한 에너지를 생산한다. 출구가 없는 에너지는 마침내 폭발한다. 그러나 출구를 조절하면 그 에너지를 유효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다. 물은 민중이고 화력은 정치이다. 화력을 강화하면서도 출구를 만들어 주지 않으면 용기가 폭발한다. 반대로 화력과 출구를 적절하게 조절하면 물의 에너지를 반영구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이러한 이치는 국가 경영에서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여러 조직과 단체의 운영에서도 적용된다.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운동과 혁명에도 적용된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까닭은 민중의 분노를 혁명지도자들이 잘 조절하였기 때문이다. 반대로 프랑스 혁명이 여러 번 실패한 까닭은 민중의 에너지는 충만했으나 그것을 조절하는 지도자들의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1927년 12월 광둥코뮌은 설 끓은 물과 어설픈 출구가 초래한 실패였다. 주력은 공산주의 혁명 의욕이 넘치는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2,000 명의 노동자들과 2,000 명의 사관후보생들 만이었을 뿐이고 시민들과 학생들, 도시 주변 농민들의 호응이 없었다. 김산이 구술한 ‘우리는 ‘인터내셔널가’를 부르고 구호를 외쳤다. 비록 이 구호들이 민중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의 선창으로 이루어지기는 했지만’과 ‘어떤 사람들은 총을 새로운 재산으로 생각하여 잽싸게 집어서 코뮌을 지키는 데 사용하지 않고 집으로 가져가 보관하기도 하였다’와 ‘최초의 행동이 끝나고 평화와 질서가 회복되자 노동자들이 보기에는 더는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그들 대부분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자연발생적인 대중으로 이루어진 부대가 공통으로 경험하는 실패이다’와 ‘코뮌 기간에 학생투쟁은 없었다. 사실상 학생들은 대중운동에도, 무장투쟁에도 참가하지 않았다’에서 볼 수 있듯이 광둥코뮌은 물인 민중과 학생들로부터 호응과 참여를 받지 못하고 무장봉기에 참여한 세력조차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정도로 출구가 허술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 대중의 참여가 저조한 점은 대중들 개개인 의식의 미개와 혁명 조건이 미성숙하였기 때문인데도 지도자들은 의욕만 앞세워 일을 서둘렀다.
광동코뮌 이후 10여 년의 과격투쟁을 거치고 난 다음, 33세 때인 1937년에 김산이 이 책에서 비로소 언급하였듯이 혁명운동에 있어서 과격투쟁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온건과 과격을 적절하게 활용할 때 사업이 성공하는 것이지 어느 한쪽에로만 쏠리면 무게 중심이 무너져서 전부를 잃고 만다. 무모한 과격투쟁의 근원은 혁명가들의 최대 맹점인 지적 우월성과 단편적 과격성 때문이다. 김산이 312쪽에서 “분파주의, 각 개인이 모두 지도자가 되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과 협조를 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들마다 서로서로 의심하고 있다는 데에 우리가 화를 당하는 원인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공산당 지도부에는 스스로 우수한 두뇌를 가졌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너무 많아서 번번이 온건투쟁은 후순위가 되고 과격투쟁이 우선으로 선택되어 강요되었다. 그래놓고는 아직 백군이 진입해오지도 않았는데도, 전략전술 능력이 없어 지시에 따라 행동하는 노동자들만 남기고 김산을 위시한 지도층 공산당원들이 대책 없이 미리 후퇴함으로써 남은 노동자과들 일부 시민 7,500여 명이 학살당하고 만 것은 공둥코뮌을 시작한 공산당원들의 커다란 실책이었다.
또한 김산은 책 후반부로 갈수록 중국 혁명에 기여한 조선인으로서 중국인들에 대한 회의를 자주 말한다. 앞에서 광둥코뮌 때의 경험에 보태어, “만주 지린성 중국농민들은 중국 대다수 지역 이상으로 자기들의 생활이 개선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억압받는 소수인 조선 사람만이 혁명적이었다”와 “철도노동자들의 생활은 농업노동자의 생활보다 낫기 때문에 그들은 투쟁은 하지 않는다”와 350쪽에 “바로 옆에서는 어떤 놈인지 줄곧 아편을 피워댔다. 그 역겨운 냄새에 속이 메스꺼워졌다. 나는 중국인의 성격을 알고 있었으며, 보수를 받지 않는 한 어려운 일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와 353쪽에 “중국에는 법이 없잖아. 놈들은 못하는 짓이 없으니까. 일본에는 최소한 법이 있어. 석방될 것인가 징역을 살 것인가. 그리고 형량이 얼마나 될 것인가를 언제라도 알수 있어. 하지만 중국에서는 죽음과 자유가 백지 한 장 차이야. 어떤 형편없는 증거에 의해 어떤 판결을 받을지 아무도 알 수 없거든”와 365쪽에 “나와 함께 가는 사복형사는 와세다대학 출신이었는데 꽤 감상적인 사내였다. 그는 나를 찬미하고 있다는 태도를 분명히 보였고 또한 내가 지은 시를 몇 편 주거나 아니면 감옥에서 느꼈던 바를 말해달라고 졸랐다. 모든 일본인들은 용기 있는 삶을 찬미하며, 겉으로는 혁명가를 미워한다 할지라도 속으로는 존경한다. 중국인이라면 혁명가를 바보 아니면 돈을 가져다주는 대리인쯤으로 여길 것이다”와 367쪽에 “해외에 파견되는 일본인 관리는 말단 직원까지도 교육이 잘 되어 있다. 이들은 일본제국의 전위인 것이다. 조선 국내의 경찰은 이들과는 질이 달랐다”와 376쪽에 “중국에서는 아무도 출소자를 도와주지 않는다. ‘귀찮은 일’이 일어날까 봐 두려워서 모든 사람들이 가능하다면 관계를 끊으려고 한다”와 385쪽에 “나는 새로운 노선에 따른 준비가 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광저우와 하이루펑, 베이징에서 과격한 ‘폭동주의’에 지긋지긋할 정도로 괴로움을 당해왔으므로”와 386쪽에 “스파이라는 비난을 받고 리리산주의자라고 재훈련을 받은 후 내 마음은 갈피를 못 잡고 혼란에 빠져 있었다. 내 어려움의 일부는 내가 중국인 사이에 끼여 있는 조선 사람이라는 데서 오는 것이라는 느낌을 피할 수가 없었다. 중국에서는 심지어 공산주의자들조차도 국수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와 396쪽에 “중국인들은 얼마나 놀라운 사람들인가? 그네들은 수천 년 동안이나 되는 대로 몸을 내맡기고도 즐거워하고 만족하고 있다. 나는 결국 삶과 죽음과 투쟁에 대한 중국인의 태도에 압도당하고 있는 것일까? 결국 점술과 숙명의 신봉자들의 커다란 무리 속으로 흡수되어 버리고 있는 것일까?” 등의 말을 통해 중국인에 대한 실망과 일본인에 대한 은근한 비교 우위를 나타낸다.
1920년 겨울 16세 때부터 34세까지 1938년까지 18년 동안 중국 혁명에 헌신한 김산은 중국공산당 바오안 법정의 책임자였던 캉성의 결정에 따른 ‘트로츠키주의자’혹은 ‘일본 스파이’라는 죄명으로 비밀리에 처형되었는데, 앞에 언급된 많은 부분들이 캉성에게 밀고 되어 그 당시 재판에 증거로 제시되었을 것이다. 또한 과격투쟁보다 조직운동과 이론 위주의 온건론을 말하는 조선인 출신 지도급 당원으로서의 김산의 역할에 대한 불만과 불안감이 처형의 큰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김산의 의식 근저에 흐르는 기독교 집안 출신의 유신론적 성향과 톨스토이적 인도주의자로서의 자세가 과격 정통파들 보기에 항상 문제시 되었을 것이다.
김산은 중국 공산혁명 활동의 전반기엔 과격투쟁가였지만 후반부터는 조직운동 위주의 온건이론가의 면모를 보인다. 믿고 따르면서도 비판하였던 김충창의 전철을 밟았다. 김산이 캉성에 의해 처형되지 않았다면, 김충창이 그 당시엔 열렬한 공산주의 이론가였으나 일제 패망이 구체화되면서 공산주의를 초월한 이념 세계로 진입하여 해방된 다음에 남한에서 학자로 정착하여 본명 김성숙으로 역사적 역할을 열매 맺었듯이, 김산도 대학 강단에 서서 학문의 길을 심화하면서 해방을 기다렸을 것이다. 해방된 다음엔 본명 장지락으로 역사적 역할의 결과를 남북 어디에서 이루었을지는 알 수 없다. 김성숙이 북조선인 평북 철산 태생이면서도 한국에 정착하였듯이 장지락이 평양 교외 차산리 출신이라고 해서 공산주의 신념에 맞게 반드시 북조선으로 귀국하였다고 볼 수만은 없다. 그렇다고 남조선으로 귀국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 단지 30년 대 말부터 김산이 공산주의 과격투쟁과 분파주의에 대한 비판과 환멸이 점증한 걸로 봐선 김성숙의 노선을 추종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김산이 치열하게 살았던 1920년대와 30년대의 20년간은 이후의 동북아를 결정하는 기간이었다. 그 기간 동안에 강렬한 투쟁력을 확보한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 소련 공산당이 결국 1945년에 승리하면서 동북아는 공산주의가 주류가 되었고, 한반도 남부와 대만, 일본 열도는 서구 세력에 종속되어 방어 기지 역할을 수행하는 지정학적 위치가 되었다. 그에 따라 1950년에 한반도에서 북방과 해양 두 세력 간에 전쟁이 일어남으로써 한반도는 영구 분단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므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된 한반도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김산이 살았던 시대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정리가 필요하다. 그 일차적 자료로서 이 책 『아리랑』이 갖는 역사적 의미가 크다. 특히 님 웨일즈가 자세하게 묘사한 김산의 언행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의식과 기치관 등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봄으로써 현대 공산주의자들의 의식과 가치관을 파악하는 하나의 잣대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천민자본주의의 과도한 발달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대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주인공 김산 뿐만 아니라 등장한 모든 인물들을 통해, 공산주의 운동이 20세기 후반부터 위축된 원인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 가를, 그렇다면 현대 문명의 발전 방향에 적합하도록 공산주의를 어떻게 변화 시킬 것인가에 대한 모색에 한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모색의 하나로, 엄격한 정통 마르크시즘의 결과를 반추해 보자. 그 엄격함, 아니 냉혹함은 러시아 혁명과 중국 혁명, 그리고 북조선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는 동력이었다. 그러나 그 동력은 수천만 인민들의 고혈을 빨아들임으로써 계속할 수 있었다. 혁명의 목표가 무엇인가. 그 목적은 다수 인민들의 안락을 위한 것이지 소수 지도층의 안락을 위한 것임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혁명의 적들뿐만 아니라 더 많은 수의 중립 인민들, 심지어는 동지들 가운데에서도 조금이라도 정통 마르크시즘에 충성하지 않는 자들은 회색분자로 몰아 재교육의 기회도 주지 않고 전부 말살하고 말았으니, 공산주의 혁명의 목적이 시대가 흐를수록 모호해지게 되었고, 그 모호함이 결국 정통 마르크시즘조차 휘발시켜버리고 말았다. 덩치가 큰 러시아나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라는 정치적 장치만 남아있을 뿐 내실은 모두 자본주의화 되었다. 규모가 작은 북한 역시 정통 마르크시즘은 사라지고 공산주의 옷만 입은 봉건왕조가 되고 말았다. 인민을 위한다면서도 인민을 무시하였기 때문에, 인도주의라는 기초를 무시했기 때문에 한 세기 동안 공산주의 완성을 위해 헌신한 혁명가들의 노력이 수포가 되고 말았다. 혁명의 완성은 쉬웠지만 인민공화국의 유지가 더 어려웠다. 결국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에 반대되는 이념으로서는 화려했지만 자본주의 대안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아 인류의 선택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한 모색의 하나로, 엄격한 자본주의의 결과를 반추해 보자. 그 엄격함, 아니 잔혹함은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부국강병을 성공시키는 동력이었다. 그러나 그 동력은 수탈과 착취의 식민제국주의에 사용되어 약소국 국민들의 고혈을 빨아들임으로써 서양인의 야만이 계속될 수 있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목표가 무엇인가. 그 목적 역시 물질적 풍요를 통한 다수 인민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것이었지 두 번의 세계대전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를 일으킨 사람들의 의지와 목표가 그런 것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인류 야수성의 극치를 보았고, 풍요로운 물질문명 속에 서린 배금주의를 통해 인류의 물신성을 확인하였으며, 환경오염과 자원고갈로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약 150년간의 실험을 통해서 자본주의가 인류의 미래에 적합한 제도가 아님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물질문명의 단맛에 취한 인류의 미련 때문에 자본주의는 여전히 최선에 제도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인류는 사회적 제도를 이루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한 제도를 이루는 바탕이 이념이고, 이념이 뿌리 한 원천이 물질 욕구이다. 물질 욕구는 인간마다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강제될 수 없다. 하지만 가족, 사회, 국가를 순차로 이루기 때문에 물질 욕구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필요하고, 그 사회적 통제를 합법화할 수 있는 논리적 명분이 집약된 이념이 필요하다. 그러한 이념으로 자본주의, 공산주의, 아니키즘 등이 19세기에 대두되어 이후 한 세기 동안 두 진영에서 실험을 통한 경쟁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갈등과 폭력, 살육과 전쟁이 빈번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인류 생존에 적합한 이념과 제도에 대한 실험이다. 김산과 님 웨일즈의 일생이 바로 그 실험의 한 부분이었고, 그들의 뒤를 이어 많은 혁명가들이 실험에 일생을 바치고 있다.
자본주의는 부자의 논리이고 공산주의는 빈자의 논리이다. 인간 모두의 물질 욕구는 비슷하지만 신체와 정신 양면에서 능력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소유에서도 차이가 난다. 그래서 빈자는 자기 능력이 부족하여 소유가 부족한 데도 불평불만하고, 부자는 자기의 우수한 능력 때문에 풍요한 물질 소유가 당연하다고 자만한다. ‘빈자는 불평불만만 하지 말고 더 열심히 일하고, 부자는 자만하지 말고 소유를 조금 나누어 주면 갈등이 해소될 텐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종이 위에 단순한 생각이고 인간 생존에 현실은 매우 복잡다단하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빈부격차가 심각해지면서 부자의 자만과 빈자의 불평불만이 빈번하게 충돌하여 마침내 파국에 이르고 만다. 그러나 파국은 부자와 빈자 모두에게 유해한 것, 그렇다면 임계점에 도달하기 전에 압력을 낮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도 반영구적으로 낮추어야지, 위기를 모면하려고 임시처방책을 남발하면 결국 언젠가 처방이 무효한 지경이 된다.
자본주의가 확대된 신자유주의 경제는 장점 못지않게 단점이 속출하고 있어서 반드시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아나키즘은 외부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작은 사회에 적합한 것으로, 공산주의는 대중사회의 경제적 욕구와 정치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는 것으로 규명되었다. 이에 따라 제시된 수정자본주의와 수정공산주의는 일종의 임시처방책이다. 또한 유럽의 제3의 길과 복지사회주의는 한계에 이르렀고, 이미 박물관에 들어갔던 아나키즘을 꺼내 먼지를 닦아보지만 역시 구시대 농경사회용이다. 그러므로 21세기 초에 이르러 이미 생존의 위기에 이른 인류는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 종의 지혜를 모아 제4의 길을 만들어내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글로벌 경제와 문화가 충만한 지구에 무리지어 붙어사는 이상엔 더 이상 한 나라 한 민족만의 부국강병책이 성립하기 어렵고, 모든 면에서 서로 협력하지 않고서는 생활하기가 어렵다. 사회와 국가 모두, 넓게는 세계 각국들 모두, 빈자들은 부자들의 세금 없이 살아가기 어렵고 부자들은 빈자들의 노동 없이 기득권을 유지할 수가 없다.
제4의 길은 ‘물질 욕구의 조절과 더불어 살아가는 태도’를 사상에 바탕으로 하며 ‘삶의 즐거움’을 목표로 한다. 그 중심에 ‘인간주의 경제가 있다.
개인은 물질 욕구를 조절하여 노동 생산력과 소비의 균형을 유지하며, 기업은 주식회사 체제로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고 노동자들이 주주가 되어 경영에 참여하고 이윤을 공유하여 노동의 인격화를 이루어야 한다. 국가는 기간시설 국유화 및 공영화와 통화정책, 세금정책, 노동정책, 복지정책, 자원정책, 주택정책, 농업정책, 교육정책, 교통과 통신정책, 안보정책, 공급과 소비 조절을 위한 긴급경제명령권 등의 국가 전체의 경제 위기를 관리할 수 있는 중점적인 분야에 대한 권한을 갖는다.
인간주의 경제에서 핵심은 ‘노동의 인격화’이다. 노동이 괴로움이 아니라 즐거움이 되려면 보수를 많이 받는 것보다 일에 대한 자부심이 우선이다. 자부심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만족과 자랑에서 나올 수도 있지만, 일이 내 것이란 생각이 우선이다. 즉 내가 노동하는 현장이 사장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것이라는 생각이 노동의 인격화를 이루는 필수조건이다. 그러기 위해선 물질적 보상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 방법은 ‘노동자의 주주화’ 뿐이다.
한 기업에서 ‘노동자의 주주화’를 이루는 방법은 매년 기업 전체 이윤에서 노동자들에게 상여금으로 지급되는 부분을 기본으로 하고, 기업 이윤에서 법으로 정한 일정 부분과 기업주와 대주주들의 소득에서 법으로 정한 일정 부분을 노동자 개인별 주식으로 전환하면 된다. 이러한 제도를 통해서 노동자들은 연봉이 낮거나 해마다 상승하지 않더라도 주식으로 얻는 이득과 주주라는 만족감이 있기 때문에 성실하게 일하게 된다. 내가 열심히 일하면 내 기업이 발전하여 더 많은 주식 이윤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 내가 나태하면 이윤이 적고 망한다는 생각으로 모두가 자기 맡은 일에 성실하게 된다. 노동이 즐거우면 직장 생활이 즐겁고, 저녁에 돌아간 가정생활 역시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가정이 즐거우면 사회가 즐겁고 사회가 즐거우면 국가가, 지구가 즐거울 것은 당연한 이치.
‘노동의 인격화’가 되려면 기업인들과 국가의 관심과 유도가 필수적이다. 국가도 제도 정착과 관리에 노력해야겠지만, 먼저 기업인들의 의식 구조가 개선되어야 한다. 그 개선의 동인이 바로 제4의 길에 대한 믿음이다. 기업인들이 제4의 길에 관심하는 시초는 자본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삶과 사회 전체, 국가와 세계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가지는 것이다. 또한 제도 교육과 사회 교육을 통해 제4의 길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넓히는 것이다. 기업인들 역시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이윤 독점에서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노동의 인격화’가 결국 자기에게도 유익하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된다.
‘노동의 인격화’가 사회 전체의 기본 노선이지만 ‘노동자의 주주화’는 기업의 형태에 따라 적절하게 변용된다. 주식회사는 원칙대로 시행해야 하고, 공기업이나 소수 자본가들의 출자에 의한 합자회사나 유한회사의 경우엔 노동자들의 주식이 자본가 전체 주식의 1/4 수준이 되도록 하며, 개인회사의 경우에도 이에 준하도록 하면 된다. 이 경우에 자본가들과 사장은 개인적 사고를 초월해서 사회적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하고, 있어야만 한다.
기업 이윤에 대한 존중이 ‘노동자의 주주화’에서 꼭 필요하다. 국가가 과도한 의욕이나 정치적 목적을 내세워 세금을 지나치게 부과하거나 노동자들의 지분을 확대하려고 해선 안 된다. 그것은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는 것과 같아 기업을 망쳐서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뺏게 된다.
또한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노동자의 주주화’에서 필요하다. 창업주라 하더라도 기업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경제 위치가 되거나 국가적으로 중요한 경제 단계에 이르면 경영에서 벗어나 대주주로 전환하고, 기업은 전문 경영인 체제로 변화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업이 세습 경영의 병폐인 유전적 열성화의 위험에서 벗어나 발전할 수 있다. 또한 전문 경영인 역시 높은 보수와 함께 ‘노동자의 주주화’ 제도의 일원이 됨으로서 경영에 중심이 서고 책임감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적 가치와 공산주의적 사고의 조합이 ‘노동자의 주주화’에 필요하다. 자본주의적 가치인 창의성과 소유욕은 생산력 향상과 이윤 창출에 동력이 되고, 공산주의적 사고인 다수가 함께 일하고 함께 이득을 본다는 공동의식은 노동에 동력이 된다. 비로소 자유와 평등이 대립을 초월해 자본주의적 가치와 공산주의적 사고의 정수가 묘하게 얽혀 동전의 양면처럼 통합 개념이 된다. ‘민주’라는 말이 양 쪽에서 모두 사용되면서도 묘하게 어긋났던 틈을 메우게 된다. 우리들 인간 무리가, 눈금이 안 맞는 보도와 넛트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한 실험기인 19~20세기를 겨우 보내고, 이제 21세기를 살기 시작하였는데, ‘노동자의 주주화’를 도구로 한 ‘노동의 인격화’의 완성이 김산과 님 웨일즈의 혁명정신을 잇는 제4의 길이 아니겠는가. 그 중심에 '인간주의 경제'가 서고.
1931년 8월, 스물네 살의 여기자 님 웨일즈가 중국 혁명의 현장에 뛰어들어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시대였던 1930년대를 종횡 무진한 이유도 위와 같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본질을 성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더 발전된 다음 세대를 그리기 위한 간절한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그녀의 노력으로 『아리랑』이 출판됨으로써 그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역사적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아리랑』을 관통하는 정신은 김산 한 개인에 대한 기록이나 찬양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유무명 수많은 인물들의 고뇌의 흔적이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적이든 동지이든 모두 자기들이 추구하는 목표를 위해 아낌없이 투쟁했다. 공산당원들과 적군 병사들은 공산주의 혁명의 완성을 위하여, 국민당원들과 백군은 보수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하여, 일본 형사들과 병사들은 제국의 안위와 발전을 위하여, 모두 다 땀과 눈물을 뻘뻘 흘렸다. 전사한 자들이 뿌린 붉은 피는 새로운 시대의 영양분이 되었다.
님 웨일즈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 말 대로 김산은 ‘현대인’의 정신과 ‘현대인’의 심리를 소유한 사람이었다. 이것은 1937년의 인터뷰 이후 54년 만인 1991년에 한 말이니까 김산이 1930년대를 살면서도 정신과 심리는 반세기 앞을 가고 있을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김산은 님 웨일즈가 언급한대로 동양 공산주의자의 사고와 정신과 심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표본이었다. 그런 면에서 『아리랑』이 출판되어 서구 독자들에게 차츰 널리 읽히게 되면서 공산주의자와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각국의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읽혀지면서 혁명의 방향과 강도를 생각해보도록 하는 시간을 갖게 했을 것이다. 분명히 『아리랑』은 “제3세계는 ’미래를 잇는 다리‘를 만들어야 한다. 3~4세기 동안 서양이 주도해온 문명과 문화에 만족하며 살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좋은 점은 취하고 나쁜 점은 버리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라는 님 웨일즈의 말대로 좋은 ‘미래를 잇는 다리’역할을 하고 있다. 님 웨일즈와 남편 에드가 스노우가 궁리한 ‘공업합작운동’의 정신의 깃발이 그 다리 위에서 펄럭이고 있다. 김산과 님 웨일즈의 만남은 두 정신의 교류를 넘어 인류 문명사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면 지나친 미화일까?.
2015년 1월 19일 안동 열락연재에서 쓰다